내가 영화다 3권
글드림 현대판타지 장편소설
차례
제1장 나와 서연 사이
제2장 10년 대계
제3장 내 감독 작품
제4장 감독으로서 첫 촬영
제5장 최신성 그레이
제6장 직감의 정체
제7장 사람의 인연이란
제8장 예상 못 한 변화
제1장 나와 서연 사이
나와 이 대표 앞에 권양기가 앉아 있었다.
권양기가 내 눈치를 살핀다.
그가 말했다.
“저 작가님. 좀 전의 일은 제가 작가님을 몰라보고 실수를 했습니다. 어렵게 산 찬데 도로에 세워 놓으면 걱정이 돼서 제가 떼를 좀 썼어요.”
“말씀드렸다시피 신성 차기작은 감독님 시나리오입니다. 제 작품이 아니에요.”
“최 작가님도 그 작품이 좋으니까, 진행하시는 거겠죠. 저 그 작품이 출연하겠습니다.”
대표님을 보았다.
대표님도, 민정이도 웃고만 있다.
권양기에게 말했다.
“정치 스릴러예요. 주인공이 특검 검사라 권양기 씨는 나이가 안 맞아요.”
“젊은 검사 하면 되지 않습니까?”
“감독님이 40대 연기파를 고려하고 있거든요.”
“젊은 검사 역도 있을 텐데요.”
“조연하시게요?”
“비중을 키워주시면 되지 않을까요?”
“이미 시나리오는 나왔습니다.”
“저, 최 작가님이 각색하시면…….”
권양기가 어떤 캐릭터인지는 알겠다.
막무가내 타입이다.
코어를 통해 슬쩍 보니 돈에 쪼들리고 있다.
필리핀에서 도박하다가 큰 빚을 진 듯.
원래 사치가 심한 친구다.
“다음에 하시죠.”
“그럼 할 수 없네요. 나중에 최 작가님 책이 나오면 저한테 꼭 좀 보내주세요.”
“예. 그러죠.”
권양기가 아쉬운 얼굴로 인사를 하곤 사무실을 나섰다.
이 대표님이 낄낄댔다.
“저 친구 생긴 것과 달리 머리에 든 게 없다더니.”
“별일이 다 있네요.”
“그러게. 신성아.”
“네.”
이 대표님이 내 손을 꼭 잡았다.
“이래저래 고맙다.”
“대표님이 잘 이끌어주신 덕분이죠.”
대표님이 웃고는 말을 이었다.
“김 감독 작품도 잘 될 것 같지?”
“네. 영석이 형이 오래 굴린 작품이라 기본이 좋아요. 어지러웠던 이전 정권을 그린 작품을 보고 싶어하는 대중도 꽤 있고요. 적어도 500만은 나올 겁니다.”
“그래. 2년이 다 되어가니 이젠 그때 이야기를 할 때가 되기는 했지. 아직 좀 조심스럽기는 해도 말이야.”
국경의 끝이 550만 나온다고 했는데 그렇게 됐다.
7인의 사무원도 그 정도 나온다고 했는데 그렇게 돼가고.
이 대표님은 이제 내 분석을 믿는다.
그 ‘컴퓨터 프로그램’에 대한 건 묻지 않으신다.
행여나 내가 불편할까 봐.
대표님이 말했다.
“작가 배분과 별도로 7인의 사무원 정산이 나오면 보너스 주마. 배분과 합치면 꽤 될 거야.”
“고맙습니다. 대표님.”
“네 덕에 돈을 얼마나 벌었는데. 민정이도 상일이도 두둑하게 보너스를 줄 거야. 고생 많이 했으니까.”
대표님이 날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너도 이제 감독 데뷔해야지?”
“벌써요?”
“경력이 뭐가 중요해. 네가 감독하겠다면 돈을 싸들고 찾아올 사람이 한둘이겠어. 배우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작가 입봉한 지 2년도 안 되었는데 감독이라.
대표님이 말했다.
“이번에 준비해 볼래?”
“다른 회사에서요?”
“데뷔만 다른 회사에서 하고 나중에 나하고도 작업하면 되지. 뉴 엔터 대표가 너 감독할 생각 없느냐고 묻더라.”
뉴 엔터테인먼트는 한국 최고의 메이저 회사다.
투자배급사로 출발하여 여러 대중문화 콘텐츠를 제작 유통한다. 뮤지컬. 음반. 드라마 제작까지 한다.
나는 인맥을 만들어서 좋고, 제니스와 서연에게도 여러 장르에 도전해 볼 기회가 생긴다.
이건 대표님의 배려다.
그런데 내 감독 첫 작품 주인공은 건하가 해야 한다.
지금 굴리고 있는 영화의 이미지는 건하 그 자체다.
코어가 괜히 건하를 나와 연결해준 게 아니다.
오래전부터 꿈꾼 내 감독 데뷔작에 건하 같은 친구가 주인공을 해야 한다는 걸 내 무의식이 인지하고 있었던 거지.
지금은 감독할 시기가 아니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 감독은 작가와 다르다.
우선 건하가 정상적인 수준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작가야 글 하나 써주고 나면 시간이 널널하지만, 감독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관리 감독해야 한다. 따라서 감독으로 일에 집중하면 건하가 겉돌게 된다.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둘. 내 데뷔작은 일반 영화와 여러 면에서 다르다.
최신성 스타일이라는 영화적 문법을 창시하고 싶다. 쿠엔티 타란티노나 박찬익 감독처럼. 그러려면 작품을 굴려야 한다. 지금 역량으로 감독이 되어 영화 찍으면 다른 영화와 변별력이 없다.
흥행감독은 세대가 지나가면 잊힌다.
그러나 자신만의 영화를 창시한 사람은 영화사에 남는다.
세계적인 감독이라는 명예는 덤이고.
감독 데뷔는 내 회사에서 하고 싶다.
영화계 인맥은 작가로 작업해도 얼마든지 생긴다.
감독을 권유한 만큼, 뉴 엔터테인먼트와도 작품 할 테고.
회사에 다녀온 이후.
내 감독 데뷔작을 매일 굴렸다.
김영석 선배 입봉작 제작에 나는 빠졌다.
상일이가 제작실장이 되어 처음으로 제작을 지휘하기로 했다. 나는 기획실장이라는 적만 두고 휴가를 나왔다. 월급도 안 받으려고 했다가 반으로 깎았다. 그래도 틈틈이 회사에 나가서 점검하니까.
이것도 이번 작품은 쉬라는 이 대표님 배려다.
서연과는 자주 만나지 않고 간간이 톡만 주고받았다. 스캔들에 대한 두려움은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조심스러운 모양이었다. 본인이 드라마 촬영으로 바쁘기도 하고.
어쨌든 스캔들 때문에 나도 서연도 생각이 많아졌다.
특히 서연이 지난 크리스마스 때 집에 혼자 있었던 것이 아직도 마음에 남았다. 뭔가 내게 신호를 준 것 같은 느낌.
아무래도 올해가 가기 전엔 확실해 해둬야 할 것 같다.
그러는 사이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 * *
마침내 나는 보스다가 개봉했다.
지난 2년간 최대 스크린 수 개봉이다.
건하와 함께 영화를 보러 왔다.
둘 다 반 팔 셔츠를 입고 모자를 쓰고 있었다.
“와, 사람 정말 많네요.”
“응. 올해 첫 기대작이니까.”
지난 보름 동안 나는 보스다 광고가 엄청 나왔다.
주연배우 인터뷰도 거의 모든 언론사에 나왔고, 연예 프로그램과 영화 프로그램은 앞다투어 나는 보스다 홍보에 열을 올렸다. 거대 투자배급사 CG의 영향력이다.
오전에 영화를 본 관객들은 호평 일색이다.
개봉 당일에 SNS를 통해 입소문이 나는 건 처음일 듯.
포털의 영화 게시판에도 댓글이 무수히 달리기 시작했다.
영화 보다가 배가 아픈 건 처음이다. 이렇게 통쾌한 영화는 처음 본다. 마지막 광장 씬이 정말 무지막지하다. 킬러 역할을 한 남자가 너무 멋있다. 그 킬러 이름이 윤건하다. 등등.
그 댓글을 건하에게 보여주었다.
“느낌이 어때?”
“모르겠어요.”
“좋긴 하지?”
“네.”
건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서 앉아 있다가 또 사진 찍힐라.
최모 본부장은 소속 남자배우와도 사귄다고.
“들어가자.”
건하와 함께 극장에 들어갔다.
VIP 시사회에 초대는 받았지만 안 갔다.
그래서 영화는 아직 못 봤다.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빈자리가 하나도 없다.
대대적인 마케팅 효과다.
곧 영화가 시작되었다. 시작하자마자 관객이 영화에 몰입하더니 5분이 지나면서부터 웃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 뒤로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나도 건하도 정말 원 없이 웃었다.
마지막엔 정말 시원시원했다.
남아 있던 스트레스가 죄다 날아가 버린 듯한 쾌감.
영화가 끝나자 일부 관객이 손뼉을 쳤다.
워낙 시끄럽게 영화를 관람했던지라 박수가 낯설거나 생뚱맞지가 않았다. 그 박수에 호응하는 사람들도 있고.
일어나는 관객들이 하나같이 웃고 있었다. 웃음이 계속 이어지다 보니 미소가 그냥 본인의 얼굴이 된 듯. 다들 만족스럽기 그지없는 표정이기도 하고.
“그 후배 킬러 있잖아. 너무 멋지더라.”
“윤건하야. 내가 이름 봐 놨어.”
“어쩜 그렇게 눈이 선할 수가 있지?”
“그 배우 검색하면 나와?”
“안 나오던데. 엑스트란가?”
“엑스트라 하기엔 너무 잘생기지 않았니?”
“그러게.”
일부러 건하 프로필을 만들지 않았다.
일단 신비주의로 간 뒤 좀 더 회복하면 공개한다.
건하가 무난하게 인터뷰를 하면 누가 정신병이 어쩌고 떠들어도 그냥 헛소리가 된다.
건하와 함께 나가던 그때였다.
뒤에서 소곤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분 그 후배 킬러 아니니?”
“글쎄. 비슷하긴 한데.”
“이 극장에 왔나 봐.”
“진짜? 와 대박!”
여자 두 명이 우리 앞을 지나며 보더니 깜짝 놀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건하가 모자를 쓰긴 했는데 몸을 속일 수는 없었다. 두 여자가 호들갑을 떨자 극장에서 나오던 관객이 일제히 우리 쪽을 보았다.
“그 킬러 후배다!”
“와 진짜 키 커!”
막 달려들고 그러진 않지만, 신인치고는 반응이 컸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오더니 사진을 찍어 댄다.
건하가 움찔하며 빠져나가려다 참았다.
여고생 두 명이 우리 앞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들을 향해 넙죽 허리를 숙였다.
“배우 윤건하입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예!”
내 정중한 모습에 관객이 웃으며 대답했다.
발랄한 여고생들 대답에 웃음도 나오고.
서둘러 극장에서 빠져나갔다.
건하가 그제야 깊은숨을 뱉는다.
“괜찮아?”
“네. 조금 당황했어요.”
“점점 익숙해질 거야.”
건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날 보았다.
이전의 건하였다면 겁을 먹고 어쩔 줄 몰라 했겠지.
* * *
나는 보스다는 정말 대박을 냈다.
첫날부터 극장이 미어터지더니, 갈수록 관객이 늘어났다.
매진 행진이 계속되니 스크린 수까지 늘었다.
상영 기간도 무려 두 달이나 이어질 예정이었다.
관객 수가 많아질수록 내 전화도 불이 났다.
영화계 인사들이 두 번째 작품까지는 검증 기간으로 날 지켜보다가, 나는 보스다까지 초대박이 나자 이제는 더 볼 것도 없다는 기세였다.
내 데뷔작의 스토리보드를 짜고 있을 때였다.
CT 사장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왜 연락이 안 오나 했다.
-요즘 한가하지?
“네. 기분 좋으시죠?”
-좋다 마다. 금요일에 시간 있나?
“작품 분석 맡기시게요?”
-자넬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누구 신데요?”
-그냥 만나 봐. 나와 친한 사람이야. 금요일 저녁 7시. 골든 팰리스 호텔.
“알겠습니다.”
누군지는 몰라도 사장님이 괜히 만남을 주선한 게 아니다.
이번 영화로도 돈을 벌었으니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그런 거다. 돈이 아닌 인맥.
* * *
금요일 오후 7시.
난 호텔 22층에 내리자마자 당황했다.
22층 라운지로 가라고 해서 왔는데 사람들이 파티를 하고 있었다. 남녀 연예인이 다수인 가운데 엘리트로 보이는 이들도 있다. 연예인은 신인급이고.
호텔에서 벌이는 파티라 퇴폐적이진 않았다.
영화에서나 본 서구식 파티다.
어디에 현수막이라도 있으면 무슨 파티인지 알겠건만.
웨이터가 다가와 샴페인을 권했다.
한 잔 집어 들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아는 사람도 없고, 누굴 만나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샴페인을 한입에 털어 넣고는 접시를 들고 뷔페가 차려진 곳으로 가서 음식을 담았다.
텅 빈 자리에 혼자 앉았다.
식사하면서 보니 초대받은 사람 모두가 연예계 종사자 같지는 않았다. 나이는 내가 딱 평균인 것 같고.
대체 이 파티의 정체는 뭘까.
좌석 저편에 남녀 톱스타가 앉아 있다. 한보겸과 성유진. 이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은 30대 중후반 여성이었다. 성유진에게 안 꿀릴 정도로 미모의 여인.
그때 그 여자분과 눈이 마주쳤다.
긴가민가한 얼굴로 날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마 했는데 곧장 라운지를 가로질러 내게로 왔다.
그녀가 날 보더니 활짝 웃었다.
“최신성 작가?”
“그렇습니다.”
여자분이 팔짱을 끼고 날 보았다.
무례하진 않고 당당해 보였다.
“어떤 분인지 궁금했는데 이제야 보네요.”
“CT 사장님이 말씀하신 분이시군요.”
“네. 생각보다 젊은 분이시네요.”
“이제 서른 넘었습니다. 그런데 여긴 어떤 파티인지.”
“제가 친한 사람들을 좀 모았어요. 사람도 만나고 식사도 하시라고 불렀죠.”
“연예계 종사자분들인가요?”
“연예계는 물론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보이는 분들이세요. 건전한 사교 모임이에요. 다들 좋으신 분들이고요. 1년에 한 번 하는 저만의 행사죠.”
그러니까, 투자사 사장님이 만나보라고 한 분이 이 파티의 호스트이고, 초청받은 사람은 이 분이 찍은 기대주라는 말이네. 그런 사람들과 인맥을 만들어 보라는 뜻이고.
“실례하지만 CT 사장님과는 어떻게 아시는지.”
“제 스승 노릇을 하셨던 분이세요. 나는 보스다에 투자를 추천했던 분이기도 하고요.”
“CG에 계시는 분이세요?”
“예. 이것저것하고 있죠.”
여자분이 말을 하곤 방긋 웃었다.
사장님과 친하다는 CG 임원이 바로 이분이었다.
나는 보스다에 투자하고, 날 배후에서 도와주기도 했던.
여자분이 만면에 웃음을 담고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그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반가워요. 이지은이라고 해요.”
“초청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쪽으로 가시죠. 궁금한 게 많아요.”
“네.”
이지은이라는 분이 또각또각 내 앞을 걸어갔다.
전신에서 풍기는 아우라가 장난이 아니다.
그런데 이지은이라고?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코어를 발동한 채 이지은 씨를 보았다.
그녀 뒤로 수많은 창이 뜨던 걸 보다가 깜짝 놀랐다.
이지은!
CG 그룹 이선형 회장의 장녀!
* * *
이지은 씨와 빈 테이블에 앉았다.
정체를 알고 나서 그런지 이분 포스가 엄청나다.
코어를 약간 발동한 상태였다.
이지은.
CG 그룹 대주주. 현 CG E&M 전략지원담당 상무.
이지은 씨가 말했다.
“작품 잘 봤어요. 어떻게 그렇게 잘 쓰시는지 궁금해서 황 회장님을 통해 한번 뵙고 싶었어요.”
“잘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지은 씨가 샴페인 잔을 내밀었다.
건배하고 샴페인을 마셨다.
“CT 황 회장님하고만 영화 얘기하시지 마시고, 저에게도 정보 좀 주세요. 영화 분석력이 정말 뛰어나시다고 들었는데.”
“황 회장님께 여쭤보시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건 그렇죠. 그러니까 제 말은 저와 독자적으로 좋은 인연을 이어가면 안 되겠느냐는 말이에요.”
대답없이 이지은 씨를 보았다.
미모의 재벌가 일원이 이런 말을 하니 어째 무섭다.
사장님 쳐내고 둘이서 거래를 하자?
내 표정이 심각해 보였나.
이지은 씨가 방긋 웃었다.
“농담이에요. 투자는 황 회장님을 통해서 하면 돼요.”
고개를 끄덕였다.
말투와 표정을 보니 농담 같기는 하다.
내가 사장님 배신하는 인간인지 떠본 걸까.
“최신성 씨를 보자고 한 건 뭘 부탁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인사를 하고 싶어서 그랬어요. 이왕 오셨으니 저분들과 두루 사귀는 것도 좋고 해서.”
이지은 씨는 재벌가의 딸 답지 않게 담백한 느낌이다.
재벌을 처음 만나긴 했지만.
코어를 발동하지 않았다면 말만 이렇게 하고 어떤 음험한 의도가 있다고 여겼을 터다. 그런데 지극히 순수한 사귐을 말하고 있었다. 거래가 끼지 않은 말 그대로의 사교.
물론 사업가 특유의 야심이나 소유욕은 비친다.
재벌가의 유전자라고 할까.
기본적으로는 좋은 사람인데 사업할 때는 야수 같다.
묘한 이중성.
남자로 치면 한량 기질이 있는 호걸.
“보겸 씨와 유진 씨와도 인사하실래요?”
“예.”
이지은 씨가 날 데리고 두 톱스타에게 갔다.
“인사해요. 이쪽은 영화계의 신성이라 불리는 최신성 작가.”
“반가워요. 한보겸입니다.”
“성유진이에요.”
“최신성입니다.”
한보겸과는 악수를 하고 성유진과는 인사를 했다.
둘 다 아직 어린 나이에 톱스타가 된 이들이다.
권양기나 지현이 같은 친구들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다.
성정이 맑아 보인다.
그들과 합석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스타라고 해서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은 아니다. 일반인과 연예인 사이에는 투명한 막 같은 게 있는데, 그 막을 걷어내면 나와 한치도 다를 바가 없다. 그 투명한 막을 친 사람은 연예인이 아니라 일반인이고.
파티가 무르익자 참석한 이들과도 인사를 했다.
한 직종의 엘리트는 죄다 이 자리에 모인 것 같았다.
이지은은 사회 각층의 기대주들과 인사하는 날 흐뭇하게 보고 있었다. 모인 이들 모두 자신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
대기업이 일명 장학생을 키워 사회 각층에 포진시키듯.
이날 내 지갑에는 명함 30장이 늘어났다.
내 인맥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지은 씨를 통하면 인맥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펀드매니저. 검사. 디자이너. 기자. PD. 국회의원 보좌관. 경제학 박사. IT 기업 대표. 외국계 자산운용사 임원 등등.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엘리트들이다.
비밀스러운 이너서클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권력의 결사는 이런 서클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니 주변부에 한 발만 걸친다.
절대 두 발 다 그 안으로 들어가진 않는다.
내가 이런 모임이 참석하다니. 정말 격세지감이다.
* * *
나는 보스다가 막판 흥행 가도를 질주하는 5월.
또 파티가 벌어질 일이 있었다.
백상예술대상.
내가 국경의 끝 각본상 후보에 올랐다.
국경의 끝은 작품상, 감독상, 남자 최우수연기상, 시나리오 상이 후보에 올랐다. 제대로 영화상 경쟁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해 10월에 있었던 영화상에선 3개 부분 후보에 올랐으나 촬영상만 받았다. 이전 해에 엄아인이 남우주연상을 받았던 터라 못 받을 거라고 예견했었다. 이 영화제는 그래도 공정한 편인데 나눠 먹기가 없지는 않다.
12월에 있었던 영화상에는 출품조차 하지 않았다.
영화계 원로들. 즉 노인네들이 심사하는 영화제다.
출품 안 해도 개별 상을 주기는 하는데, 그 영화상 주최 측은 괘씸하다고 봤는지 후보에도 올리지 않았다. 그 영화제를 매년 보이콧 하는 영화인도 한둘이 아니었고.
이번 영화상을 위해 수트 한 벌을 맞췄다.
처음으로 양복점이란 데를 가서 정장을 해 입었다.
기성복과는 확연히 다른 핏이었다.
옷과 한몸이 된다고 할까.
그 수트를 입고 영화제가 열리는 경희대학교로 갔다.
지성이에게서 곧 서연도 도착한다는 톡을 받았다.
기자와 팬이 가득한 시상식장 근처에 서서 구경했다.
여러 분야의 연예인들과 감독들이 플래시와 환호를 받으며 레드카펫을 걷고 있었다.
곧 은색 밴 하나가 도착하더니 서연이 내렸다.
가슴이 살짝 드러나는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환호하는 관람객에게 인사하며 포토 라인으로 갔다.
서연은 이번에 TV 여자 신인연기상 후보에 올랐다.
나도 시상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스태프가 날 가로막듯 얼굴을 확인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최신성입니다.”
스태프가 리스트를 확인하곤 자리 배치도를 보여주었다.
“나 052석에 앉으시면 됩니다.”
“네. 수고하세요.”
후보자들이 앉는 1층 좌석 뒤편이다. 배우와 감독. 탤런트와 예능인들이 앞줄에 앉고 그다음 연예인이 아닌 후보자들이 앉는다. 내 옆자리가 조상미 감독 자리인데 그녀는 참석하지 않았다. 후보에 오른 감독님들은 유명하신 분들이라 모두 앞에 앉아 있고. 내 주변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서연은 맨 앞줄에서 두 번째에 앉아 있었다. 엄아인 옆이다. 서연이 연신 뒤를 보더니 마침내 날 발견했다.
환하게 웃으며 내게 손짓을 한다.
나도 손을 흔들고.
초대 걸그룹이 나오면서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시상은 TV 부분이 먼저였다. 게다가 첫 시상은 신인상 부분. 남자 신인상에 이어 여자 신인상 시상이 이어졌다.
후보는 5명이었는데 다 쟁쟁했다.
서연은 전혀 기대를 안 한 모습이다.
나는 기대했다. 여우야가 올해 최고 화제작이었으니까.
작년 신인상을 받은 연기자가 시상을 맡았다.
“TV 부분 여자 신인 연기상 수상자는…”
후보에 오른 이들 모두 긴장한 내색을 숨기려 애썼다.
그들을 보던 시상자가 웃으며 시상 봉투를 열었다.
“여우야의 안서연 님. 축하합니다.”
축하 음악이 울려 퍼진다.
서연이 얼떨떨한 모습으로 일어났다. 놀란 얼굴로 우물쭈물하다가 한 연기자가 떠밀자 그제야 무대로 향했다. 객석에서 무대까지 꽤 길어서 내가 다 긴장했다.
서연이 시상자에게 트로피를 받고 마이크 앞에 섰다.
그녀의 눈시울이 뜨거워져 있었다. 전혀 생각 못했나.
서연의 소감이 나왔다.
“음, 아….”
서연이 말을 하지 못하자 격려가 터져 나온다.
“축하해요!”
“예뻐요!”
서연이 마음을 가다듬고 겨우 입을 뗐다.
“감사합니다. 여우야라는 작품은 저한테 은인 같은 작품이에요. 처음 연기가 재밌다는 걸 알게 해주고, 사랑받는다는 게 뭔지 알게 해준 고마운 작품이에요. 여우야가 큰 사랑을 받아서 정말 기쁘고… 생애에 한 번 받을 수 있다는 신인상을 받게 되어서 너무도 기쁘고…. 영상을 예쁘게 찍어주신 감독님. 드라마를 재미있게 써주신 작가님. 고생하신 스태프 여러분. 사랑하는 제니스 멤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서연이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후보자들도, 팬들도 날 의식하진 않았다.
“저를 이 자리까지 오게 해준 분께 정말 고맙다는 마음을 전합니다. 당신을 보면서 때론 서운하고, 때론 존경스럽고 그랬어요. 원망하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고.”
갑자기 울컥했다.
왜 방송 중에 저런 말을….
서연이 날 똑바로 보며 말했다.
“저는 늘 기다리고 있어요.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서연은 그 말을 끝으로 무대에서 내려왔다.
곧 음악이 울리며 다음 시상이 이어졌다.
얼떨떨하면서도 가슴이 묵직해졌다.
나와 서연만이 아는 방송 사고였다.
서연이 작심을 한 걸까. 왜 소감을 말하던 도중에.
눈치를 챈 팬들이 없지 않았다.
만약 서연이 좌석에 앉아 뒤돌아 날 보았다면.
그 팬들의 시선이 바로 날 향했겠지.
신인상 이후 TV 극본 상과 시나리오 상이 이어졌다.
극본 상을 받은 드라마 작가의 소감이 나올 때.
무대 공포가 슬금슬금 날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드라마 작가라면 모를까. 시상식에서 시나리오상은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연예인도 아닌데 그냥 수수한 차림으로 올걸.
1초. 1초 흐를수록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무대에 올라가면 준비한 소감 다 까먹을 것 같다.
괜히 참석했나.
등엔 식은땀이 흐르고 얼굴에 핏기가 가실 정도였다.
나도 꽤 대범한 편인데 무대는 다른 차원이었다.
코어를 슬쩍 발동했다.
다른 사람이 되자. 연기를 하자.
당당하고 여유 있으며 자신감이 넘친다.
난 지금 패기와 야망으로 가득 찬 작가다.
잘나가는 작가의 스웩이 뭔지 보여주마.
세상엔 이런 시나리오 작가도 있다는 걸.
“… 님. 축하드립니다.”
사람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서연은 환하게 웃으며 날 보며 손뼉을 치고 있고.
나구나. 내가 받았구나.
일단 일어나 객석에서 나갔다.
어느 순간 공포감이 사라졌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며칠 전 이 대표님이 해준 말이 있다.
‘배우들 중에는 의외로 내성적인 사람이 많아.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촬영장에서 긴장을 안 하는 이유가 뭘까. 그런 사람이 시상식 무대는 어떻게 나가는 걸까. 이유는 간단해. 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되거든. 자신이 아닌 다른 인물을 표현하는 게 연기인 거고. 팬티만 입고 명동 한가운데를 걸어도 그게 촬영이고, 연기라면 부끄럽지가 않은 거지.’
그랬다.
그래서 나도 연기를 했다.
인간 최신성이 아닌 각본상 주인공 연기에 몰입했다.
이 무대는 영화 촬영 현장이다.
시상자는 배우이고, 관람자들은 엑스트라들이다.
기다란 무대를 걸어나갔다.
무대에 오르자 환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당당하게 무대로 걸어가 시상자와 악수를 하고 트로피를 받았다. 그러곤 마이크 앞에 섰다.
앞을 보자 조명 때문에 객석이 잘 안 보인다.
준비한 소감은 코어 덕분에 내 시야에 줄줄이 떴다.
엉뚱한 관련 정보가 뜨기도 했는데 지금 당장 제어할 상황이 아니었다. 소감을 말해야 했으니.
심호흡한 뒤 입을 뗐다.
“저는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를 감히 대표해서 먼저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시나리오는 영화의 근간입니다. 시나리오가 좋아도 나쁜 영화가 나올 수 있으나, 시나리오가 나쁘면 좋은 영화는 결코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 제작 현실에서는 이 진실을 외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말을 멈추고 객석을 보았다.
일반인은 지루한 기색. 영화인은 관심 어린 얼굴.
말을 이었다.
“일부 영화인들은 그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시나리오에는 투자를 안 하려고 합니다. 투자가 없으면 양질의 시나리오는 나오지 않습니다. 시나리오에 투자하지 않으면 작가들은 직업을 유지하기 어려워집니다. 그에 따라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가 줄어들며, 작가 풀도 협소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고 맙니다.”
연출자가 소감을 빨리 끝내라는 듯 손을 돌리고 있었다.
일반 시청자가 보기엔 관심이 없으니.
말을 이어갔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시나리오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상기해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였다.
코어 창이 너무 확장되어서 원래 소감이 어디 있었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소감 부분을 다시 당겨왔다. 소감을 이어가려는 데 또 확장되어 갔다.
확장 그만을 의식하자 그제야 멈췄다.
하필이면 엉뚱한 관련 정보에서.
연기에 집중하자니 코어가 제멋대로 확장하고.
코어에 집중하자니 연기가 풀려 버리고.
코어를 중지하자니 소감이 기억 안 나고.
“제가 첫 작품임에도 이 상을 받게 되어 정말 기쁘고 감사하고. 그리고 제게 시나리오 상을 주신 관계자 여러분… 아니. 주최 측… 아니. 백상아리대상 심사위원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앞줄에 앉은 톱스타들이 킥킥대며 웃고 있다.
내가 지금 뭔 말을 하는 거야.
소감과 관련 정보가 뒤엉켜서 뭐가 뭔지.
그때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서연이 보였다.
그래. 서연을 보면서 말하자.
“특히 영화를 잘 찍어준 조상미 감독님. 이갑성 대표님. 그리고 함께 고생하고 열정을 불태운 모든 스태프 여러분과 이 기쁨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다시 서연을 보았다.
이번엔 또 서연에 대한 정보가 뜬다.
내가 너무 서연을 의식하고 있었나.
내 눈이 정보 확장 창을 분주히 찾았다.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대체 소감 부분이 어디야?
저건 가?
“저를 아는 모든 분께 고맙다는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따뜻한 눈으로 저를 바라봐 주는 사람에게 전합니다. 이제는 제 마음을 숨기지 않겠습니다. 당당하게 말하겠습니다.”
정신없는 가운데 마지막 문구가 보였다.
“사랑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마이크에서 물러났다.
곧 음악이 터져 나왔다.
시상자와 악수를 하곤 무대를 걸어 객석으로 향했다.
“휴!”
빛 무리 속에서 벗어나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긴장이 한순간에 풀렸다.
소감과 관련 정보가 뒤섞이는 바람에 막판에 이상한 말이 나왔다. 소감을 보고 읽기는 했는데 기억이 안 난다.
무리 없이 다음 시상이 진행되었다.
서연 쪽을 보았다. 그녀가 멍한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그 옆의 여배우는 묘한 미소를 짓고 있고.
좌석에 앉자 앞에 앉은 조연 여배우가 말했다.
얼굴에 미소를 가득 담은 채.
“작가님. 멋지세요.”
“예?”
“여자들은 다 눈치챘거든요.”
앞쪽 객석을 보았다.
여배우들이 날 힐끔거리며 귓속말을 하고 있다.
서연은 어쩔 줄을 모른 채 앞만 보고 있고.
이런! 나도 모르게 뭔가를 말해 버렸다.
일부 멘트가 원래 소감이 아니었어!
* * *
국경의 끝은 남우주연상. 각본상을 받았다.
반드시 참석하라는 주최 측 연락 그대로다.
시상식 뒤풀이가 있었는데 난 집으로 왔다.
날 바라보던 눈빛들이 부담스러워 서둘러 시상식장에서 나와 차에 올랐다. 집으로 향하면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그제야 기억났다.
차를 몰고 가는데 문자가 폭주했다.
[백상아리대상 받은 거. 축하하네.]
[오빠, 서연 언니한테 고백한 거지? ㅋㅋ]
[축하해. 상도 받고 고백도 주고받고. ㅎㅎ]
[엄청 진지한 얼굴로 백상아리가 뭐냐?]
[최신성. 누구한테 고백한 건데?]
아이고. 백상아리라니.
그건 그렇고.
서연이 내게 고백을 암시했었다.
내 코어가 그 멘트를 토대로 할 말을 추천했나 보다.
긴장해서 뭔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스타 패치가 연애 기사를 썼는데 결국 사실이 되고 말았다.
아니다. 정말 고백으로 받아들여진 거라면.
이전에는 연애하고 있었다는 게 아닌 거다.
마치 섬을 타던 두 사람이 시상식을 노리고 고백을 하게 된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이번엔 또 얼마나 악플이 달릴까.
그때 지성이에게서 문자가 왔다.
[형. 포털에 기사 떴는데 봤어?]
차를 세웠다.
[아니. 알아서 처리 좀 해.]
[딱히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왜?]
[서연 씨에게 고백했다는 기사는 없어. 그냥 고백했다는 말만 있지. 문제는]
[문제는?]
[네티즌들은 서연 씨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렇겠지. 악플 많아?]
[아니. 둘이 잘 어울린대. 감동 받았대.]
포털에 들어가 댓글을 확인했다.
지성이 말 그대로다.
기사를 쓴 기자는 내가 고백한 상대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다만 넌지시 서연도 고백을 기다리는 멘트를 했다고 썼다. 누가 봐도 연결이 되는 뉘앙스.
그런데 악플이 별로 없다.
서연이 뜨기 위해 소속사 대표와 사귄다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응원이 대다수다. 부럽다는 말도 많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대하는 진심이 보였나.
아니면 방송의 위력일까.
댓글 하나와 그 답글에 답이 있었다.
[사귀는 거 아니라고 발뺌하더니. ㅉㅉ]
↳[이분 고백이 뭔지 모르시나? 스캔들 났을 땐 사귀는 게 아니었으니까 고백을 한 거죠.]
↳[방송에서 고백할 정도면 부끄러울 게 없다고 봄.]
↳[그 스캔들 덕분에 둘이 이어진 걸까.]
↳[원래 친했는데 이성으로 보이게 된 거임. ㅋㅋㅋ]
↳[윗분 정답!]
↳[생방송에서 고백하면 어떡함? ㅋㅋ]
↳[두 사람 최소 짰음. ㅋ]
↳[서연 표정 못 봤어요? 전혀 모르고 있던데.]
↳[짠 거 아님. 서연 울 뻔했음.]
물끄러미 댓글을 보고 있었다.
대체로 비슷한 댓글 내용이다.
기자가 ‘고백’이라는 단어를 쓰자 네티즌들은 고백으로 받아들이는 거다. 물론 조만간에 내 마음을 서연에게 전하려고 하긴 했지만.
내가 수상한 이후로 서연은 뒤를 보지 않았다.
수상 소감 여파가 엉뚱하게 번지고 확산될까 봐.
시상식 끝난 뒤로는 난 집에 가고 있고, 서연은 수상자 파티에 참석했다. 아마 거기서도 말이 많이 나오겠지.
다행이다. 사람들이 곡해하진 않아서.
일과 사랑. 다 잡을 자신은 있다.
서연에게는 내 표현이 부족할지 모르겠지만.
집에 도착하여 샤워를 했다.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톡이 왔다.
서연이다.
[오빠. 나 오늘 술 한잔할래요.]
[그래.]
어쩌겠나.
오늘 벌어진 일. 오늘 수습해야지.
이젠 뭐 눈치 볼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도 없다.
대중이 서연을 오해할 것 같지도 않으니.
* * *
제니스 숙소 근처에 있는 선술집.
그 술집의 룸 테이블에서 서연과 마주 앉았다.
난 소주. 서연은 호프.
안주는 꽁치구이와 닭꼬치. 버터 콘 한 접시.
내가 두 잔을 마실 때 그녀는 한 모금 마셨다. 원래 술이 약해서 맥주 몇 모금에도 얼굴이 살짝 달아오르는 그녀다.
둘 다 시상식 때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면 나나 서연이나 쑥스럽게 웃기만 하고.
서연은 그저 우리 사이를 확실히 해 주기를 바라고 표현했던 거였다. 여자 입장에선 그것도 고백이겠지. 그냥 그 말뿐이었으면 시청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것이다.
그런데 서연이 한 말과 내가 한 말이 바로 연결이 되어 버렸다. 서연의 말을 듣고 내가 응답해 버린 것으로.
어쨌거나 내가 공개 프러포즈를 한 셈이다.
그것도 생방송 중에.
서연이 날 보며 배시시 웃었다.
“왜 자꾸 웃어?”
“그냥. 오빠가 그럴 줄 정말 몰랐어요.”
내가 정신이 없어서 그랬다고 할 수는 없었다.
엄연히 내 마음은 진심이었으니까.
그래, 망설이며 주춤거리는 것 보다 질러 버리는 게 낫다.
이젠 열애설이 나도 서연의 인기에는 큰 지장이 없다.
차라리 잘됐다.
서연이 내가 먹던 소주잔을 가져가 한 모금 마셨다.
소주 마시면 취할 텐데.
“소주 괜찮겠어?”
“괜찮아요. 취하면 바로 숙소로 가면 되니까. 실은 리즈가 소주를 좋아해서 저도 가끔 한두 모금 해요.”
리즈는 아이돌이라는 애가 숙소에서 소주를 마시나.
하긴 걔 성격을 보면.
“방송사에서 별말 없어?”
“아무 말씀 없었어요. 저도 드라마 시청률에 영향을 주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임성희 작가님은 시청률이 더 오르겠다고 하시긴 했어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소감 중에 말한 고백은 원래 소감의 한 갈래로, 서연이 한 멘트에 대한 추천 답변이었다. 소감을 말할 때 이 멘트를 해도 된다는 코어 추천.
코어가 그걸 추천한 이유를 지금은 안다.
생방송 중 소감으로 고백을 하면 서연의 인기에 지장이 없으며, 오히려 이슈가 발생하여 드라마와 서연의 인기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대중이 오히려 호감을 보일 거라는.
즉, 시상식 때 고백하는 것이 가장 적기였다는 뜻이다.
사적인 공간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하면 대중의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다고 분석한 거지. 방송이 장난이 아니긴 하다만.
내가 소주를 따르려 하자 서연이 소주병을 빼앗더니 내 잔에 따라 주었다. 바로 한 잔 들이켰다.
“나도 한 잔 줘요.”
애가 왜 이러나.
오늘 작정을 했나. 뭔 작정인진 모르겠지만.
내게 내미는 소주잔에 소주를 조금 따랐다.
서연이 단숨에 소주를 마셨다.
한 잔 마시고 이마를 찡긋하는 그녀다. 그러곤 말없이 꽁치구이의 살을 발라내더니 나 먹으라고 내 쪽으로 살을 모았다.
“이거 드세요.”
“응.”
서연이 발라 놓은 꽁치 살을 집어 먹었다.
그녀도 홍조 띤 얼굴로 입에 생선살을 쏘옥 집어넣는다.
‘이상한 데이트’를 할 때와 달리 오늘은 좀 쑥스럽다.
말을 하는 것도 조금 조심스럽고.
“내일도 촬영이지?”
“네. 오전 10시예요. 감독님이 배려해 주셨어요.”
또 대화가 끊어졌다.
이 분위기가 어색해서 눈이 마주치자 둘 다 웃었다.
그나저나 말을 하기는 해야 할 텐데.
서연도 뭔가 망설이는 기색이고.
한참이나 주저하던 그녀.
마침내 입을 뗐다.
“저… 오빠한테 말 낮출래요.”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고작 그 말을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였나.
“그렇게 해.”
서연이 밝게 웃으며 안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곤 젓가락으로 안주를 뒤적거리며 또 말을 아꼈다.
* * *
서연은 신성을 처음 만났을 때는 그에게 별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영화사 옥상에서 연기 지도를 받으면서 점점 신성을 좋아하게 되었다. 영화 촬영을 시작할 무렵에는 자신이 신성을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호감을 비추면서 마음을 표현했는데, 다행히 신성도 그녀에게 마음이 있었다. 고백을 기다린 건 그때부터였다.
그런데 신성이 그녀를 국경의 끝에 꽂았다는 말이 나오고 난 뒤부터 달라졌다. 서연은 그가 자신을 애써 피하는 느낌이 들었다. 서운하고 섭섭했다. 호감이 있었지만 소문 때문에 마음을 접은 걸까 하고 생각했다.
서연은 소문 따위 상관없다는 듯 눈빛으로 마음을 알아달라고 했으나 신성은 늘 무표정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 그녀도 신성의 눈길을 피했다. 좋아한다면 바라봐 주기를 기대하며. 그런데 그 모습을 신성이 오해했다. 서연이 자신에게 별 감정이 없다는 것으로.
의도치 않은 감정의 엇갈림이었다.
서연이 호감을 비치면 신성이 보질 못했고, 신성이 감정을 비치면 서연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둘 다 서로의 마음을 확신하지 못했던 거였다.
그러는 사이.
소속사 대표와 소속 가수라는 현실적인 벽이 생겨났다.
한쪽은 대표 입장을 배려하고, 한쪽은 인기를 배려하고.
그렇게 관계가 어정쩡하게 정립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관계가 변한 것은 국경의 끝이 개봉할 즘이었다.
서로 좋아하는 감정을 그때 확실히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정립된 관계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연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애매한 사이가 되었다.
이제 서연에게 신성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서연은 작년 크리스마스 때.
신성이 만사를 제쳐 두고 고백해 주길 기다렸다.
숙소에 있으면 지방에서 갑자기 올라와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 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끝내 오지 않았다.
그저 한 여자의 로맨틱한 바람일 뿐이었다.
이후 서연은 사랑하는 심정을 숨기고 오빠처럼 신성을 대했다. 언제가 되었든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다 오늘.
신성을 보면서 마음을 말하고 말았다.
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신성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신성에 대한 마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그런데 신성이 고백을 했다.
사랑한다고. 생방송 중에 사랑한다고.
서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동안 애태운 나날들이 가슴을 때렸다.
머릿속은 텅 비어 버렸다.
‘오빠가 날…….’
서연이 꽁치만 뒤적거리고 있던 그때.
최신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서연아, 날 봐.”
* * *
서연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을 보았다.
서연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젓가락을 잡은 그녀의 손가락도 떨리고 있고, 어깨는 잔뜩 움츠러들었다.
내가 일순 말을 잇지 못하자 서연의 눈빛이 몹시 요동쳤다. 곧 울 것처럼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고, 행여나 내 입에서 엉뚱한 말이 나올까 봐 입술까지 파르르 떨린다.
“그래, 우리 연애하자. 연애하자고.”
서연의 표정이 예쁘게 찡그려졌다.
이내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서러웠는지 금세 눈이 그렁그렁했다.
그래 바보짓은 이제 그만하자.
서연의 손을 잡아끌어 당겼다.
놀라 눈을 크게 뜨는 서연의 입술에 입술을 맞췄다.
그녀와의 입맞춤.
따뜻하고 촉촉하고 달콤했다.
그렇게 나와 서연은 작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선 채 입맞춤했다. 내 뺨으로 서연의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서연.
나 때문에 그렇게도 마음이 복잡했었나.
눈물을 흘리며 어색하게 웃는 그녀가 너무도 예뻐 보였다.
눈물을 닦아 주었다.
“미안해.”
“뭐가요?”
“사실 너 배려하려고 내가 마음을 숨겼어.”
내 말에 더욱 울상을 지으며 눈물을 쏟는 그녀다.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하는 표정.
서러움이 기쁨으로 바뀌어 간다.
배려하지 말걸 그랬다. 걸그룹으로 뜨지 못한 그녀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았어야 했다. 스캔들 때문에 남성 팬들 다 떠나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냥 이기적으로 그녀를 차지하는 게 맞았다.
그녀 옆으로 가서 그녀를 앉히고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날 배려했던 거였어요? 제니스가 뜨지 못해서?”
“응. 네 마음도 잘 몰랐고.”
내 말에 서연이 가만히 날 안았다.
그제야 이전에 내가 보인 태도가 이해 가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날 안은 채 말했다.
“그랬구나. 나도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는데.”
“서연이 널 처음 만났을 땐 난 가난한 무명작가였어. 그런 놈이 걸그룹 미녀 멤버에게 자신 있게 고백할 수가 없잖아.”
서연이 내게서 떨어지며 피식 웃었다.
“미주가 오빠더러 연서복이라고 하더니 정말이구나.”
“연서복은 또 뭐야?”
“연애에 서툰 복학생.”
그녀의 말에 나도 웃고, 그녀도 웃었다.
날 두고 멤버들끼리 말이 많았나 보다.
다시 서연의 눈을 보았다.
미약한 흥분과 설렘, 그리고 떨림.
“우리 이제 당당히 만나자. 나도 너도 바빠서 섭섭하고 오해도 있을 수 있겠지만. 항상 날 믿어 줘. 서연이랑 내가 만나는 게 쉬운 거였으면 2년이 다 되도록 고민하지도 않았을 거야. 언제나 네 옆에 있을 게. 몸은 지방에서 촬영하고 있더라도.”
서연은 내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지난 2년 쉽지 않았다.
그냥 만났다면 스캔들 기사 댓글에 나온 것과 같은 반응이었을 터다. 내가 당당하지 못했던 이유다.
서연도 혼자라면 개의치 않았겠지만 아직 뜨지 못한 제니스 멤버들에게는 이기적인 행동이 된다. 그게 미안했겠지.
이젠 다 자유롭다.
나는 더는 무명작가가 아니고.
서연도 이젠 연애한다고 무너질 무명이 아니니.
손을 잡은 채 한동안 서로 바라보았다.
그랬다. 난 서연을 사랑하고 있었다.
애써 내 감정을 밀어내려고만 했을 뿐.
잠시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오래 사귄 연인처럼 그녀의 눈에 애틋함이 담겼다.
그녀가 내 입에 슬쩍 뽀뽀를 해 주었다.
쑥스럽게 물러나는 서연을 끌어당겼다.
좀 전보다 더욱 깊고 진한 입맞춤을 했다.
키스였다. 사랑이 듬뿍 담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