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7장 협박과 협상 (16/56)

제7장 협박과 협상

내가 마지막 장면과 재촬영 수정안을 건네자 감독과 팀장들이 즉석에서 콘티를 짰다. 연출부와 상일이는 부산에서 가장 가까운 장애인 시설을 수소문했다. 다행히 마지막 촬영지인 가덕도 인근 김해시에 시설이 있었다.

촬영팀은 촬영이 끝나면 김해로 이동하기로 했다.

난 촬영 중인 오후 3시에 서울로 차를 몰았다.

현재 윤건하는 여러 사람이 바짝 붙어 있는 비행기나 고속열차를 탈 수 없을 것 같아 내 차로 데려오기로 했다.

6시간에 걸쳐 윤건하의 옥탑방에 도착했을 때.

건하가 불도 켜지 않은 방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평소에도 불을 꺼 놓고 생활하는 그다. 답변을 보내고 나서도 고민이 많았는지 짐을 싸다가 풀었다가 한 흔적이 있었다. 얼굴도 초췌하고.

“바로 가면 돼요. 자.”

윤건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는 내 손을 잡지 않았다. 대인기피증이 심한 사람이 남의 손을 잡기란 쉽지 않다. 별로 민망하지도 않아서 손을 거두려는데, 그가 살포시 내 코트 소매를 잡았다. 순진한 여고생 같은 모습에 웃음이 났지만 꾹 참았다.

그의 가방에 온갖 잡동사니와 옷이 잔뜩 있다.

“그냥 맨몸으로 가도 돼요. 가서 사면 되니까.”

윤건하가 자신의 가방을 가만히 보다가 내려놨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말을 잘 듣는 것처럼 보이지만 윤건하로선 어려운 선택이었다. 집착하던 물건을 놓고 간다는 게.

그만큼 이번 일이 그에게도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임을 아는 것이다. 스스로 벗어나려 애쓰는 것이니.

윤건하를 데리고 내려가자 그의 이모 내외가 나와 있었다. 이모는 눈시울이 붉어져 있고, 이모부는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윤건하에겐 별말이 없었다.

윤건하와 만난 이후.

매일 두 번 이상 윤건하에게 문자를 보냈고, 그의 이모와 이모부와도 통화를 자주 했다. 윤건하도 4년 만에 처음으로 이모부 내외와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용기를 못 내고 있었는데 내가 부산에서 문자를 보냈을 때 비로소 결정했다.

어떤 점이 윤건하의 용기에 힘을 준 것인지는 잘 모른다.

내 진심이 전달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윤건하를 차에 태우고 김해시로 향했다.

그는 뒷좌석에 앉아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서울에서 벗어나자 밖을 보았다. 차는 어느새 서울을 벗어나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차멀미해요?”

물끄러미 창밖을 보던 윤건하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괜찮아요.”

“멀미나면 말해요. 혹시 배는 안 고파요?”

“괜찮아요.”

한참이나 말없이 운전하다가 문득 생각나 음악을 틀었다.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데다, 윤건하의 정신을 사납게 하지 않을 것 같아 스탠다드 재즈를 틀었다.

대전을 지나 휴게소에 한 번 정차했다.

내가 배가 고팠던 터라 이런저런 먹거리를 사 들고 차로 돌아갔다. 핫바 하나를 윤건하에게 내밀었다.

“이거 하나 먹어 봐요.”

거절할 줄 알았는데 윤건하가 핫바를 받아 베어 물었다.

“맛있죠?”

“네. 이거 전에 먹어 봤어요.”

“아, 미안.”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윤건하는 4년 전만 해도 멀쩡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외계에서 온 사람 취급했으니.

내가 핫도그를 먹으며 웃자 윤건하도 어색하지만 미소를 보였다. 그의 미소를 볼 때마다 놀란다.

윤건하는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중독성 있는 미소를 만들었다. 그게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우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지 그는 모른다.

* * *

다시 6시간의 운전 끝에 김해시에 도착했다.

새벽 3시였다.

창에 머리를 기댄 채 가벼운 잠에 빠졌던 윤건하를 깨웠다.

그와 함께 스태프들이 묵고 있는 중급 호텔로 들어갔다.

방 하나를 잡아 주려고 했는데 윤건하가 고개를 저었다.

“저…….”

혼자 모르는 곳에 있는 게 두려운 듯.

별수 있나 내 방에서 하루 묵어야지.

남자 둘이서 한 방에 있는 게 영 그랬지만 내가 같이 있는 게 아무래도 나을 것 같았다. 오늘이 촬영 마지막 밤이기도 했고.

내가 씻고 나왔을 때 윤건하는 바닥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싱글 룸이라 자신이 침대에서 잘 수는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혹은 침대에서 자는 게 불편했거나.

그래서 깨우지 않고 베개를 놔주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나도 곧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4시였다.

* * *

윤건하는 아침 햇살을 느끼고 눈을 떴다.

바닥이었지만 베개를 베고 이불을 덮은 채였다.

그는 옆으로 웅크린 채 이불을 매만졌다.

그 형이 이불을 덮어준 걸까.

윤건하는 조용히 일어나 침대를 보았다.

최신성 작가라는 형이 이불도 없이 침대에 잠들어 있었다.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지난 4년.

그는 어둠과 쓰레기들로 가득한 옥탑방 구석에서.

빛을 싫어하는 추한 괴물로 살았다.

괴물은 세상에 나갈 수가 없었다. 자신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웠다. 그래서 갈수록 어둠 속을 파고 들어갔다. 빛이라곤 보이지 않는 심연 속에서 웅크린 채 살았다.

윤건하의 심연은 하나의 세계였다.

그는 망상으로 가득한 그 세계를 무한하게 확장했다.

그 세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스스로 만들어낸 허상과 친구가 되고, 그 허상을 통해 바깥세상을 만났다.

그 세상 속에서 죽은 여자친구도 만났다.

다시 사랑했다. 그녀와 함께 웃고. 울고. 잠들고.

행복했다. 이대로 죽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어느 날 여자친구가 말했다.

‘오빠. 날 위해 세상을 보여주면 안 돼?’

그때 윤건하는 깨달았다.

사랑하는 그녀가, 심연 속에서 만난 친구들이, 그 세계의 모든 것도 진짜가 아니라는 걸. 진짜로 여겼던 여자친구가 자신의 또 다른 자아였다는 것을.

간절히 기도했다.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다시 남들처럼 살아가게 도와달라고 기도했다.

그때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내려왔다.

그날 늪과 같았던 심연에서 나왔다.

4년 만에 처음으로 옥탑방에서 옥상으로 나갔다.

가장 먼저 본 것은 푸른 하늘이었다.

눈 시리도록 푸른 하늘. 그리고 태양.

도시의 소음을 들었고, 사람들을 보았다.

이후 외사촌이 넣어준 애니메이션을 보고 또 보면서 차츰 자신 만의 세계를 지워나갔다. 그리고 스스로 치유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정상이 아니며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이모부가 연극을 하는 분이라는 것도.

윤건하는 다시 최신성을 가만히 보았다.

꿈에서 아니. 심연 속에서 이 형을 보았다.

이 형이 그랬다.

언젠가 내가 찾아갈 거라고.

그리고 다 잊었는데.

어제 이 형이 기억났다.

그 형이 정말 왔다. 약속을 지키려고.

윤건하는 조용히 일어나 욕실로 갔다.

형이 일어나 목욕을 할 수 있게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았다. 그러곤 변기에 앉아 물이 차오르는 욕조를 보았다.

‘형. 고마워요. 날 구해줘서.’

* * *

똑똑.

노크 소리에 눈을 떴다.

“실장님. 이제 나오셔야 해요.”

“알았어.”

오상일이 내가 늦게 잔 걸 알고 일부러 늦게 깨운 모양이다. 덕분에 원래 소집 시간보다 1시간 더 잤다.

일어나 윤건하를 찾아보았다.

어? 어디 갔지?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윤건하가 뚜껑 닫은 변기에 앉아 있었다.

욕조에 뜨거운 물이 가득하다.

“저… 제가 물을 받아놨어요.”

“어. 그래요.”

날 위해 뭐라도 하려고 한 걸까?

뜨거운 물이 가득 채워지도록 변기에 앉아 지켜보았던 것 같았다. 한가하게 목욕할 시간이 없었지만 그래도 욕조에 몸을 담갔다. 12시간에 걸친 운전으로 쌓인 피로가 뜨거운 물에 증발되는 기분이었다.

“실장님! 감독님들 기다리고 있어요!”

“왜 기다리는데? 전달사항 있어?”

“아니요! 섭외하신 배우분 오디션 봐야 하잖아요!”

“오디션 할 게 뭐가 있어! 대사도 없는데!”

“그래도 이미지가 있잖아요!”

“알았다. 바로 내려갈게.”

얼른 옷을 입은 뒤 윤건하 앞에 앉았다.

“어제 내가 산을 하나 넘는다고 했죠? 오디션이 산을 넘는 첫 번째 관문입니다. 별로 할 건 없어요. 감독님들이 뭘 물어보면 대답만 하면 되고, 웃어 보라고 하면 웃으면 됩니다. 새벽에 핫바 먹을 때처럼.”

윤건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불안했다. 감독님들이 갑자기 몰아붙여서 윤건하가 겁을 먹고 도망가면 어쩌나.

“건하 씨가 찍을 장면은 어린 소녀와 노는 장면 하나랑, 그 소녀가 갑자기 떠나는 장면이에요. 친했던 친구가 떠나서 아쉽지만 가서 잘 살아. 이런 느낌에요. 그리고 건하 씨는 마음의 병을 앓는 소녀의 친구 역할이고요.”

윤건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대번에 알아듣는다.

마음의 병을 앓을 뿐 지능과는 아무 관계 없다.

옷이 남루하고, 머리 모양도 꾸미지 않은 헝클어진 상태 그대로다. 따로 분장할 것도 없다.

“갑시다.”

호텔 방을 나섰다.

로비로 가자 소파에 감독님들이 앉아 있었다.

자폐를 앓는 청년 역할이라는 말만 했다.

어떤 단역이 올 줄은 전혀 모르는 상태.

그런데 감독과 팀장들이 일제히 입을 닫으며 날 보았다. 정확히는 내 뒤에서 따라오는 윤건하에게 시선이 꽂혀 있었다.

“이쪽이 어제 말씀드린 신인입니다.”

윤건하가 말없이 인사를 했다. 감독들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엉뚱한 곳을 보기도 했다. 그냥 신인이라면 자신 없는 태도로 보였겠지만, 윤건하는 자폐 청년 역할이다. 그 역할 그대로의 모습.

다들 넋이 나간 표정이다.

감독과 촬영감독님은 윤건하가 연기를 하는 것으로 보는 듯하고, 여성 스태프들은 눈에서 하트가 퐁퐁퐁 하고 뿜어져 나온다.

감독이 일어났다.

“오케이. 더 볼 것도 없다. 가자.”

그 누구도 반대 의견을 내지 않고 일어나 로비에서 나갔다.

영락없는 자폐아의 모습. 빼도 박도 못할 윤건하의 표정과 눈빛. 그리고 슬프고 아름다운 그의 미소. 소녀를 해코지할 여지가 단 1%도 없는 순수 그 자체다.

오히려 자폐아가 저렇게 잘생기면 어떡해?

하는 감독님들과 스태프들 얼굴이다.

* * *

장애인 시설에 도착하자 이미 세팅이 끝났다.

윤건하와 함께 차에서 내렸다.

보충 촬영은 두 씬.

하나는 소녀와 윤건하가 어울려 노는 장면.

또 하나는 소녀가 과장 역의 진규와 함께 시설을 떠나는 장면. 윤건하는 장애인들과 함께 소녀를 배웅한다.

윤건하와 함께 차에 내려 시설로 들어갔다.

아역 배우가 날 보곤 넙죽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박은영이에요.”

“인사해요. 이쪽은 건하 씨 상대역.”

꼬맹이라도 여자는 여자다.

잘생긴 윤건하를 보곤 볼이 빨개진다.

건하도 아이처럼 인사를 하고.

윤건하가 긴장하긴 해도 떨거나 그러진 않았다. 두려움 가득한 눈빛이긴 하지만 이번 단역에는 정말 잘 어울린다.

조감독 대신 내가 리허설을 지도했다.

“은영아. 이 오빠랑 책도 같이 읽고. 같이 누워서 낮잠도 자고 그러면 돼. 건하 씨는 은영이가 하는 대로 자연스럽게 받아 주면 돼요.”

“네.”

소녀는 대답하고 윤건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상대라 그런지 건하는 별 두려움 없이 적응했다.

아이와 함께 활짝 웃기도 하고.

몽타주로 들어갈 여러 노는 씬과 나란히 앉아 창 밖을 보는 씬을 리허설한 다음 촬영에 들어갔다.

카메라와 조명이 설치되고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윤건하가 부쩍 긴장한 모습을 보였으나 견디고 있었다.

내가 말한 커다란 산을 넘는 것.

이게 그거라는 걸 알고 버티고 있는 거였다.

생각보다 잘 적응해서 안도했다.

“자, 슛 들어갑니다! 레디!”

“액션!”

소녀와 윤건하가 노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원래 자폐 청년처럼 보여서 그런지 연기를 하는 건지 아닌 건지 알 수가 없을 정도다.

“컷! 오케이! 아주 좋아요.”

“다음 쇼트 갑니다.”

승철이가 말했다.

“은영아. 이 오빠하고 노는 장면에선 네 마음대로 애드립 해도 돼. 아주 친한 친구하고 노는 것처럼.”

“네. 뭔지 알 것 같아요.”

아역배우가 애드립 연기를 하면서 갈수록 더 나은 장면들이 나왔다. 은영이도 이 잘생긴 오빠가 뭔가 좀 이상하다는 걸 느꼈던 모양이다. 키 큰 자기 또래와 놀듯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목마를 태워 달라 떼를 쓰기도 하고, 긴 다리에 매달린 채 깔깔대기도 하고.

관객이 봤을 때는 더없이 친해 보이는 친구다.

일반 자폐아였다면 소녀의 앞날이 불안하겠는데, 그냥 큰 아픔 때문에 삶의 의욕이 없는 사람으로 보인다. 뭔가 깊은 슬픔을 간직한 듯한 건하의 눈빛 때문에.

그렇게 진규가 소녀를 데리고 가는 장면까지 찍었다.

이 장면에서 건하는 묘한 여운을 주었다. 친한 아이가 떠나는 서운함.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답답함. 그러면서 소녀가 슬퍼할까 봐 어색하게 웃는다.

다들 멍하니 건하의 연기를 보고 있었다.

처음으로 건하가 연기를 했다.

그것도 정말 자연스럽게.

시설에서 마지막 쇼트를 찍자마자 박수가 나왔다.

신인이자 대사도 없는 역할임에도.

이 장면이 다들 인상이 깊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영화의 숨겨진 흥행 포인트가 될지도 모른다.

슬픈 눈동자를 가진 꽃미남의 모습.

흔한 게 아니니까.

“가덕도로 이동합니다!”

촬영진이 분주히 세팅을 해체했다.

건하는 지친 기색으로 내게 왔다.

“어때요?”

윤건하는 그냥 웃을 뿐이었다.

웃는 게 어디냐.

본인도 큰 산 하나 넘은 걸 아는 것 같다.

구경하던 서연이 멀리서 엄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나도 엄지 척을 선사했고.

모든 촬영 스태프가 차를 타고 줄줄이 떠났다.

마침내 내일이 마지막 촬영이다.

가덕도 해안가 언덕에 있는 작은 마을.

계약직 팀원들이 크게 한탕 한 후 모여 사는 동네다.

6인과 소녀가 어느 집에서 쉬고 있다.

마지막 장면은 이미 찍었다.

지미집 부감으로 집을 찍으며 점점 떠오르다 수려한 바다 저편을 찍는 장면. 그렇게 엔딩이다. 이 배경에 곧 찍을 마지막 쇼트의 녹음 사운드가 들어가고.

“컷! 마지막 쇼트 갑니다!”

건하에게 마지막 장면 설명을 해줬다.

그를 집 대문 쪽에 대기 시켰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활짝 웃으며 손은 흔들면 돼요. 그러면 은영이가 달려와 건하 씨 품에 안길 겁니다. 은영이는 건하 씨 손을 잡고 끌면서 6명에게 건하 씨가 누군지 설명할 거고요. 집 정원에 카메라 레일이 깔려 있어요. 거기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요.”

“네.”

딱히 연기 디렉팅은 안 했다. 집 안에 있는 모르는 여섯 사람을 보면 저절로 연기가 나올 테니까.

조감독이 날 보자 고개를 끄덕였다.

6명과 소녀를 찍던 카메라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건하 쪽으로 돌아간다. 이어 소녀가 건하에게 달려가 안겼다가 잡아끌면 다시 집 안쪽으로 카메라가 돌아가고.

“자! 마지막 쇼트 갑니다! 레디!”

“스핏!”

“롤링!”

“씬 169에 5에 1!”

“액션!”

다소 긴장한 윤건하가 가방을 든 채 문을 열고 들어간다.

일제히 건하에게 시선이 집중된다.

건하가 멈칫한다.

그때 은영이가 눈을 크게 뜨더니 달려온다.

“오빠! 정말 왔구나!”

달려와 건하의 다리에 매달리는 은영이. 건하도 어색하게 은영이를 안고 등을 토닥이고. 반가워하던 은영이가 건하의 손을 잡고 끈다.

“아저씨, 언니! 내 친구예요. 내가 병원에 있을 때 나하고만 놀았던 아픈 오빠예요!”

이어 조잘대는 은영이의 맛깔난 대사. 미심쩍은 눈길로 건하를 보던 팀원 6명도 건하의 모습을 보곤 안심하고 표정이 밝아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팀원들의 웃음과 떠드는 소리.

“컷! 오케이!”

짝짝짝짝-

박수가 터져 나왔다.

첫 쇼트 찍고 고민에 빠졌던 감독이 이젠 한 방에 오케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스태프 전원이 수고했다는 말을 한다.

지난 석 달간 이어진 촬영이 비로소 끝났다.

오천일 감독의 연출력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내가 7인의 사무원을 분석했을 때.

감독은 본인의 연출력에 불안해했다.

그게 분석 결과에 반영되었을 뿐.

감독이 내게 왔다.

촬영을 무사히 끝낸 것이 감개무량한 표정이다.

그와 포옹했다.

“수고했다.”

“네. 감독님도 고생 많았어요.”

이어 승철이와 영석이 형과도 포옹했다.

“이번 영화도 느낌이 좋아요.”

“나도 그래.”

“네 덕분에 많이 배웠다.”

“도움됐죠?”

“그러게. 연출부 경험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서연과도 포옹했다.

“고생했어요, 오빠. 건하 씨랑 올라갈 거죠?”

“응. 비행기 타고 올라가.”

“네.”

서연은 나와 다시 포옹하고 코디와 함께 자리를 떴다. 이어 주연배우 엄아인과 진규 등 배우들과도 차례로 악수하고 격려했다. 팀장들은 물론 스태프들과도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상일이와 우리 제작부원들은 힘껏 껴안아 주고.

“너희 정말 고생했다.”

“실장님. 저희 버리지 마세요. 실장님 밑에서 크고 싶어요.”

“누가 버린대?”

각별한 내 식구들과 다시 포옹하곤 떠나보냈다.

긴 시간 인사를 끝낸 후 내 차로 갔다.

윤건하가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가덕도에 오기 전만 해도 뒷좌석에 앉았던 친구다.

“산을 넘고 나니까 별것 아니죠?”

윤건하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도 행동도 여전히 어색하다.

그렇게 촬영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왔다.

다음 날 건하가 달라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꽤 지저분했던 자신의 옥탑방을 치운다는 연락.

서두르지 않았다.

이제 변화의 시작이니까.

* * *

7인의 사무원 후반작업도 순조로웠다.

편집팀과 화면 보정 등을 맡는 MI팀은 전작인 국경의 끝을 했던 팀이 그대로 맡았다. 잘해 주는 팀인데 굳이 다른 팀과 계약할 필요가 없었으니.

회의에 회의가 이어졌다. 죄다 후반 작업 점검.

홍보 자료도 완성해서 배급사에 넘겼고.

마케팅 업체는 이미 홍보를 시작했다.

홍보 예산이 큰 만큼 이번엔 텔레비전 광고도 나간다.

후반 작업은 약 70일 걸린다.

그 공백기에 시나리오를 쓸 수도 있지만 계약을 안 했다.

이미 개봉되는 영화마다 내 이름이 줄줄이 나오게 생겼다.

게다가 내가 쓴 작품끼리 경쟁할 수도 있고.

내 작품들은 아마도 한 달을 주기로 개봉될 것 같다.

늦게 쓴 블랙 돔이 가장 먼저. 이 영화는 워낙 저예산인데다 한 공간에서만 촬영해서 회차가 매우 적었다. 개봉관 수도 적다. 보름 정도 걸렸다가 IPTV 쪽으로 간다.

이어 7인의 사무원이 걸리고, 한 달 지났을 때.

올여름 성수기 최대 기대작으로 나는 보스다가 걸린다.

그 영화가 간판 내릴 즘에 지금은 촬영 중인 황금 전쟁이 걸릴 것 같고 그 영화 끝물에 요한이 개봉한다.

영화 요한은 크랭크 인을 앞두고 있다.

소년 요한 역은 여진국. 파출소장은 정효주.

제작은 정효주 소속사인 BQ 엔터테인먼트.

감독은 변영수라는 여성 감독인데 믿을 만한 분이었다.

화통한 성격에 극사실주의 영화 잘 찍기로 유명한 감독.

시신 토막이라는 끔찍한 장면도 잘 찍을 것 같고, 파출소장의 시선을 담은 여성 특유의 따뜻하고 섬세한 연출도 나올 것 같다.

당연히 이들 작품에는 큐즈 엔터 소속 배우들은 캐스팅하지 않았다. 사실 영화는 배우 측이 갑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내 말이 사실로 드러나는 걸 큐즈 쪽은 이제야 체감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큐즈 측은 이렇다 할 손해가 없고, 날 공격할 수단도 마땅한 게 없는지라 잠자코 있다.

그래도 큐즈가 보복할 수 있으니 지성이에게 큐즈 쪽 약점을 잡아 놓으라고 당부했다. 녹취든, 몰래카메라든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늘 대비해 두라고 했다.

서연은 차기작으로 드라마 출연을 검토 중이었다.

그것도 당당히 여주인공으로.

이번에도 윌 메이드 제작에 임성희 작가 작품.

큐즈 엔터 소속은 출연 불가.

외주 제작사 윌 메이드는 ‘여우야’ 한 편이 대박 나면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제작사로 부상했다. 당연히 임성희 작가가 예쁠 수밖에 없었다.

회사에 출근하면 5시간 정도 일하고 나머지는 내 시간이었다. 마지막 촬영 사흘 뒤 윤건하를 만나러 갔다.

* * *

옥탑방에 들어가자 윤건하가 웃으며 날 반겼다.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이전에 봤을 때와 지금 옥탑방은 사뭇 달랐다.

쓰레기가 잔뜩 쌓여 있던 방이 깨끗해졌다.

“혼자 치웠어요?”

“이모가 도와줬어요.”

이제 주저주저하는 말투도 아니다.

책상에는 연기와 연극 관련 책이 몇 권 꽂혀 있다.

“회사랑 계약할래요?”

“계약요?”

“전속 계약.”

윤건하가 망설였다.

연기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서 그런 듯.

“바로 어디에 출연하는 건 아니고. 마음의 안정도 찾고, 연기 연습도 하면서 지내면 돼요. 내가 다니는 데 따라다녀도 되고.”

“따라다녀도 돼요?”

“그럼요.”

내가 있으면 그래도 편안한가 보다.

건하에겐 미안하지만 어째 겁 많은 강아지 같다.

세상 밖이 무서워 혼자서는 절대 못 나가고 주인과 함께 나가면 신 나게 산책하는 강아지. 그러다 주인이 안 보이면 불안에 떨고 있다가 주인이 보이면 반가워서 뛰어다니는.

건하도 세상 밖이 보고 싶었던 거다.

건하가 또 짐을 싼다.

세상 밖에 나가는 건 건하에게 여행인 거지.

그렇게 간단한 짐을 싼 건하와 함께 옥탑방을 나섰다.

먼저 밥을 먹으러 갔다.

돈가스가 그렇게 먹고 싶었다네.

확실히 뭘 먹으니 건하의 얼굴에 웃음이 돈다.

내가 물을 때만 대답하던 건하가 돈가스를 먹으면서 먼저 말을 꺼내기도 했다. 영화에 대해 궁금했는지 이것저것 묻는다. 본인이 좋아하는 애니 ‘원피스’ 이야기도 하고.

그 애니만 수백 번을 봤단다.

아예 대사까지 줄줄 외운다.

“… 그때 샹크스가 그래요.”

건하의 표정이 갑자기 돌변했다.

“좀 더… 날뛰고 싶은 놈이 있다면. 나와라! 이 내가… 상대해 주겠다. 어떠냐? 티치. 아니, 검은 수염!”

포크를 든 채 멍하게 건하를 보았다.

다소곳하게 돈가스를 먹던 건하가 그 캐릭터가 된 얼굴과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곤 웃으며 또 조용히 돈가스를 입에 가져간다.

너무도 다른 극적인 변화에 당황했다.

이건 뭐랄까.

가장 친한 친구에게는 까불고 장난도 치고 노래도 기가 막히게 부르는데 남 앞에서는 말이 없는 친구.

그런 친구를 보는 듯했다.

“그 애니 보면서 연기 연습을 한 거예요?”

“아니요. 그냥 따라 했어요.”

“4년 동안이나?”

건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1년. 원피스는 내 친구였어요.”

그러니까. 딱히 연기 연습을 한 건 아니고, 애니에 나오는 캐릭터들이 친구인 양 대사를 따라 하고 그랬다는 뜻.

그런데 그게 연기 연습 효과가 있었다.

발음도 정확하고 표정도 좋고.

“그 애니는 어디에 있어요? 방에 컴퓨터 없던데.”

“다 버렸어요.”

“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까 봐.”

건하가 덤덤한 얼굴로 돈가스를 먹었다.

“내가 전편 다 사 줄게요.”

“괜찮아요. 이젠 집착 안 하려고요.”

“그럼 밥 먹고 나가서 이것저것 쇼핑 좀 해요.”

“네.”

식사 후 광화문 대형 서점으로 갔다.

연기 관련 책과 만화책, 소설 따위를 많이 샀다.

그런 다음 백화점에 가서 옷도 좀 샀다.

미용실에 가서 건하의 머리도 조금 다듬었다.

깔끔한 옷을 입고 제멋대로 자란 뒷머리와 옆머리만 좀 쳤더니 제대로 변신했다.

안 그래도 미용사들이 건하를 보자마자 심쿵! 한 표정을 지었는데, 머리를 자르고 난 뒤에는 괜히 긴장했다. 직접 머리를 만지는 미용사는 상기된 채 눈도 못 마주치고.

한참 돌아다니고 있는데 지성이에게서 톡이 왔다.

급히 할 말이 있다며.

안 그래도 들어가서 건하와 계약을 할 참이었다.

* * *

건하를 본 회사 직원들이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새 식구가 간다는 말을 미리 했고, 건하의 특별함도 전했다. 그런 뒤에 갔는데 건하를 보자마자 다들 놀랐다.

어쨌거나 인사를 하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기존 연습실이 좁아서 회의실로 변경한 터였다.

나와 건하, 그리고 지성이가 마주 앉았다.

지성이가 말했다.

“형. 바로 계약할 거지?”

“그래.”

지성이가 할 말이 있다더니.

뭔 일인데 이렇게 급하지?

건하와 계약을 했다.

2년 전속에 계약금 1천만 원.

수익 비율은 건하와 회사가 7대3.

평이한 배우 계약이다.

합의에 따라 계약 조건을 바꿀 수 있다는 조항을 넣었다.

재계약을 하면 계약금과 비율이 달라진다.

계약한 후 지성이가 날 복도로 불러냈다.

“할 말이 뭔데?”

지성이가 한숨을 쉬곤 말했다.

“요즘 제니스랑 하이니스 애들이랑 만났다 하면 싸워. 안 그래도 사이가 극악이었는데, 이리나 사건 이후로 노골적으로 나와. 어젠 코엑스 행사 대기실에서 싸움까지 했어.”

“뭐?”

“리즈는 손을 다쳤고.”

“하이니스 애들을 주먹으로 쳤단 말이야?”

“그건 아니고. 형이 큐즈 쪽 보복에 대비하라고 했잖아?”

“뭐가 걸렸구나.”

“응. 형 말 듣고 대비했는데 이렇게 빨리 건질 줄 몰랐어.”

“뭔데?”

“영진이가 자기 폰으로 찍은 거야.”

지성이가 영상 하나를 보여 주었다.

제니스 멤버들 대기실에 하이니스 애들이 들어온다.

먼저 들어온 애는 지현이라는 애다.

서연과 사이가 아주 안 좋은.

“야, 너희는 선배한테 인사하러 안 오니?”

제니스 멤버들 전원 무시한다.

“야! 안서연! 너 리나 언니한테 한 짓 내가 잊을 것 같지? 몸 팔아서 뜬 주제에 감히 누굴 넘봐!”

“야! 당장 나가!”

연희다. 평소답지 않게 기세가 무섭다.

“안 나가면 어쩔 건데? 어쩔 건데!”

“나가라고! 나가!”

연희가 지현을 거칠 게 밀어냈다.

“어디다 손을 대!”

“야! 아악!”

지현이 연희를 밀치자 급기야 지켜보던 세라가 지현의 머리채를 잡았다. 다른 하이니스 멤버들과 미주까지 달려들어 거친 몸싸움을 벌였다.

서연은 싸늘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을 뿐.

그때였다.

쾅-

“야, 이 쌍년들아! 안 꺼져!”

리즈가 대기실 벽을 주먹으로 쳤던 거였다.

몸싸움이 그제야 멈췄다.

지현과 세라가 서로 밀쳐 냈다.

지현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시발. 미친년들. 개 같은 것들이 꼴값을 떨어요. 두고 봐. 서연이 저년은 우리가 매장시켜 버릴 거야.”

영상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청순하고 사랑스러운 이미지로 톱스타가 된 지현이다.

현재 아이돌 CF 퀸이기도 하고.

저 애한테 저런 면이 있을 줄 팬들은 상상도 못한다.

지성이가 말했다.

“하도 시비를 걸어서 내가 영진이 더러 하이니스 애들과 무대가 겹치면 몰래카메라를 찍으라고 했어. 이전에도 찍었는데 욕은 안 나왔거든. 그래서 애들한테 세게 나가라고 했지. 그래야 지현이가 걸려들 테니까.”

연희와 세라가 그래서 거칠 게 나간 거였다.

하이니스 애들 입에서 욕이 나오게 유도하려고.

“몸 팔아서 떴다는 건 무슨 말이야?”

“서연 씨가 갑자기 떠서 그런 헛소문이 도는 거지.”

“매장시켜 버린다는 건 무슨 소리고?”

“몰라.”

지성이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형 혹시 서연 씨가 걔들한테 무슨 약점 잡힌 거 있어?”

“전혀.”

“지현이 쟤 말하는 거 보면 정말 큐즈가 무슨 보복을 할 거 같아. 이제껏 잠잠했잖아. 형이 말하지 않았어도 몰카 찍어 놓을까 싶었거든.”

“찍은 영상은 편집해라. 상대가 누구인지는 모르고, 하이니스 애들만 나오게. 특히 지현이가 마지막에 욕하는 건 확대해서 반복되도록 편집해.”

“당연하지. 그러려고 찍은 건데.”

내 동생이지만 지성이가 일 하나는 잘한다.

큐즈가 무슨 수작을 벌일지는 모르겠다.

몰카가 인터넷에 뜨면 지현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다.

무슨 보복인지는 몰라도 우린 한 점 부끄러울 게 없다.

오히려 무기가 생긴 거지.

너희가 미사일 쏘면 우린 핵폭탄 쏜다.

* * *

건하와 계약을 한 후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말을 놨는데 건하가 오히려 반겼다. 아무래도 건하가 날 은인으로 보는 듯.

결국 저녁에 밥을 먹으면서 건하가 내 집 지성이 방에서 살기로 했다. 지성이는 독립하기로 했고. 지성이가 번듯한 원룸을 구하는 데 내 돈을 좀 보탰다.

옥탑방에 가서 건하 짐을 내 집으로 옮겼다.

건하도 옥탑방에서 나가고 싶었는지, 아니면 내가 같이 있다는 게 편했는지 시종 웃고 있었다.

서연이 오해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이후 건하를 두고 출근을 했는데 건하는 집에서 종일 책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것도 4년간 잊고 지냈던 사회를 배우는 방법이었다.

매일 같은 일상이 지나갔다.

회사에 가서 후반작업 상황을 점검하고, 퇴근해선 건하와 맥주를 한잔하면서 쉬고. 나는 보스다 촬영도 이상은 없는지 일주일에 한 번은 체크했다.

그러다 큐즈가 무슨 보복을 하려는 것인지 파악했다.

동영상에서 하이니스 지현이가 했던 말.

서연이 몸 팔아서 떴다고.

그렇다면 하나밖에 없다.

그 사안을 코어를 통해 분석했다.

코어는 이 사안의 결과뿐만이 아니라 향후 사건이 큐즈와 로즈 엔터에 미치는 영향까지 도출했다. 큐즈 대표는 합의하여 끝낸 그 사건이 자신의 회사를 흔들 줄은 상상도 못한다.

그 사건과 큐즈의 균열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니까.

큐즈가 날 건드렸다는 것이 사건의 본질이다.

그리하여 나온 결론.

큐즈는 약화되고 로즈 엔터는 확장한다.

이제 큐즈가 일을 벌이기를 기다릴 뿐.

그렇게 한 달이 지나는 동안.

건하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난 매일 건하를 봐서 큰 변화를 느끼지 못했는데, 그의 이모부와 이모는 달라진 건하를 한 번에 알아보았다. 더는 눈치를 보거나 사람을 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하를 안고 눈물을 흘리는 이모를 건하가 위로해 줄 정도로.

이모네 집에서 나오는 건하에게 말했다.

“나는 보스다 촬영장에 가 볼래?”

“어디서 찍어요?”

“대방동 보라매공원.”

“가 보고 싶어요.”

건하와 함께 촬영장으로 향했다.

심혈을 기울였던 막판 광장 촬영이 오늘이다.

내 예측대로라면 나는 보스다는 천만 관객 영화다.

이 영화에 건하가 출연한다면?

확실하게 임팩트를 보여 줄 거라 확신했다.

역할은 있다.

모든 인물을 광장으로 불러 모으게 하는 사건.

대역 보스를 죽이려는 킬러 역이다.

이 역할은 잘생긴 사람이 해야 큰 인상이 남는다.

아직 안 찍기도 했고.

* * *

건하와 함께 보라매공원으로 들어갔다.

멀리 운동장에서 촬영이 한창이었다. 사무실과 주택가에서 좀 떨어져 있는 곳이 보라매공원이다. 소음이 굉장히 크기에 일반 광장에선 찍기 어려웠다.

조폭과 양아치들만 200명. 경찰 500여 명. 사건에 휘말린 각 인물이 모두 모여 있다. 보조출연자만 800명에 이른다.

리허설 중이었다.

조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채 연신 고함을 질러 댔다.

“대충 연기하시면 카메라에 보입니다! 팀별로 정해진 동선과 합에 따라 움직이셔야 해요! 카메라가 주인공을 잡고 있어도 다 보여요!”

“알겠습니다!”

“무술팀! 황정우 씨 뒤편에 계시는 보조출연자들 액션이 좀 엉성합니다! 보호구 착용하고 합을 좀 맞춰 주세요!”

“예!”

의상팀이 급히 보조출연자들에게 가서 보호구를 나눠 주었다. 조끼와 토시 형태로 된 스턴트용 보호구다. 보조출연자들이 점퍼나 양복 상의를 벗고 보호구를 착용했다.

이어 보조출연자들이 몽둥이로 보호구를 착용한 쪽을 치는 리허설을 했다. 포커스 아웃으로 걸리는 출연자들이라 제대로 싸우지 않고 액션이 크기만 해도 된다.

무술팀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나머지 출연자들은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다시 갑니다! 액션!”

건하는 신기한 눈으로 촬영장을 보았다.

천 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게 내가 봐도 놀랍다. 중세 전투를 방불케 하는 조폭 충돌 씬이다. 거기에 경찰들까지 밀어붙이고 있고.

이렇게 마스터를 따 놓고 세부적인 쇼트를 하나씩 딴다.

이 한 장면을 무려 6일이나 찍는다.

건하에게 물었다.

“이 영화에도 출연할 수 있는데 할 수 있지?”

“네. 할 수 있어요.”

건하는 싸움박질 장면을 보고 겁을 먹기는커녕 호기심을 보이고 있었다. 건하가 상당히 빠르게 호전되고 있는데 겉으로 봐선 잘 모르겠다. 건하의 사고 수준은 엄연히 성인인데 자꾸 애처럼 여겨지는 것도 그렇고.

내가 온 걸 발견한 김판수가 걸어왔다.

“어이, 투자자. 오랜만에 왔네.”

“잘돼가?”

“잘되지 그럼. 이번 씬 얼마나 공을…”

말을 하던 김판수가 건하를 보곤 흠칫 놀랐다.

건하의 외모에 놀란 얼굴이다.

이 사람이 꽃미남 처음 보나.

“누구야? 분위기 굉장히 독특한데?”

“누구면? 출연 좀 시켜 주게?”

“누구냐니까?”

“내 신인 배우.”

“그래?”

건하가 먼저 슬쩍 말없이 인사했다.

김판수가 날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야! 이런 배우가 있으면 진작 말을 하지!”

“킬러 역에 딱이지?”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는 김판수 표정.

“그러니까! 진작에 데려오지 그랬냐!”

“원래 누가 하기로 했지?”

“아이돌이 하기로 했는데, 감독은 영 눈에 안 차는 모양이야. 그냥 곱상하게 생겼는데 저 친구 같은 특별한 이미지 같은 게 없어. 걔 기획사도 대사 없는 단역이라 시큰둥하고.”

“계약은 따로 안 했지?”

“단역 출연인데 무슨 계약을 해. 그 역할 할 거지?”

내가 건하를 보자 건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판수가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이햐, 임팩트 제대로 나오겠는데.”

내가 운이 좋은 건지, 건하가 운이 좋은 건지.

주인공이 킬러에게 피습당한다.

이번 광장 씬을 촉발하게 한 사건이다. 물론 주인공이 후배 연극배우들과 함께 모두를 속이는 함정이다.

이 킬러 역할은 영화에 큰 인상을 심어 줄 꽃미남이 예정되어 있었다. 킬러지만 나중에 주인공의 후배 연극배우였다는 게 드러나는 역할이다.

김판수가 건하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죠?”

“윤건하입니다.”

“최 작가. 윤건하 씨랑 저녁때까지 좀 기다려.”

“알았어.”

김판수가 내게 눈인사를 하곤 현장으로 다시 들어갔다.

건하가 정상인과 약간 다르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김판수의 물음에 대답하는 말투도, 표정도, 눈빛도 이상한 점이 없었으니. 그래도 긴장한 떨림은 전해진다.

매일 겪는 다양한 일이 건하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 내는 과정이다.

곧 대형 몹씬 촬영이 시작되었다.

정말 장관이었다.

이런 대형 씬을 초보 감독이 능수능란하게 지휘하는 게 놀랍다. 이토록 재능이 뛰어난 감독이 신인이라는 이유로 투자를 못 받고 있었다니. 인맥 우선으로 영화계가 돌아가는 고질적인 병폐다.

난 한 수 배우는 마음으로 촬영을 지켜보았다.

혹 나중에 전쟁 영화를 찍을 수도 있으니까.

워낙 많이 사람이 나오는 터라 NG가 수도 없이 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현장의 고성이 커진다.

스태프도 사람인 지라.

“거기! 어영부영할 거면 나가세요!”

“저기 머리 긴 분! 싸움 중에 웃으면 어떻게 합니까!”

“촬영 중에 장난치지 마세요, 좀!”

조감독의 고함 몇 번에 출연자들의 군기가 바짝 들었다.

친구끼리 보조출연을 하면 연기 중에 장난이 나오기도 한다. 허우적대며 연기를 하다 보면 실실 웃음도 나고.

자신들은 카메라에 안 잡힐 줄 알지만 다 보인다.

급기야 황정우 배우가 메카폰을 들었다.

“자자! 내 말 들어보세요. 이쪽 흑문파는 보스가 당해서 복수하러 온 것이고! 저쪽 반달파는 조직이 쪼그라들어서 여기서 지면 다 죽는다는 각오입니다잉! 경찰들은 이 조폭 새끼들! 제발 내 쪽으로는 오지 마라! 하고 졸라리 겁을 먹고 있고잉!”

“하하하하하!”

장내에 웃음이 터졌다.

역시 황 배우.

“다들 겁나 진지합니다잉. 싸우면서 막 욕을 하세요! 사운드에 잡히니까, 실제로 욕은 하지 마시고 소리 없이 아주 쌍욕을 하면서 찍는 겁니다잉. 아셨죠? 자, 빨리 찍고 밥 묵으러 갑시다!”

“예!”

900여 명의 대답이 울려 퍼졌다.

황 배우가 메가폰을 감독에게 건넸다.

격려를 해도 배역 그 자체가 되어서 하네.

조감독이 다시 외쳤다.

“다시 원위치로!”

“위치로!”

정말 군대 같다.

살벌했던 현장이 황 배우의 농담 섞인 한 마디에 대번에 풀어졌다. 이후에도 고성이 나오고 NG가 수도 없이 나왔다.

고생해서 찍는 보람은 극장에서 확인될 터다.

그리하여 오전 9시에 시작된 촬영이 오후 5시에 끝났다.

낮에 벌어지는 싸움이라 밤에는 촬영할 수가 없었다.

* * *

손 감독과 신 대표와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두 사람도 건하를 보고 놀란 건 마찬가지.

식사자리에서 킬러 역에 건하를 확정했다.

단역이라 딱히 계약서는 쓰지 않았다.

건하와 함께 집에 돌아와서 킬러 역할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찍는 씬은 두 번.

한 번은 대역 보스와 그의 부하들을 기막힌 솜씨로 기습하는 씬.

그다음은 대역 보스의 연극 후배로서 모두 모여 대 사기극을 논의하는 씬.

다음 날부터 건하는 무술 지도를 받았다.

기막힌 무술 실력으로 부하들을 하나씩 쓰러뜨리곤 보스까지 기습한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역할이 될 수밖에 없다.

세 번째 트레이닝 때까지는 내가 나가서 지켜보았고.

그다음부터는 매니저 영진이가 함께 했다.

영진이가 워낙 착한 친구라 건하와 금세 친해졌다.

그리하여 드디어 건하의 출연 촬영.

건하와 함께 스탠드바 촬영지로 가던 중이었다.

지성이에게서 톡이 왔다.

일단 차를 세웠다.

[형. 큰일 났다.]

[뭔데 그래?]

[스타 패치에 들어가서 확인해 봐.]

스타 패치?

연예계 전문 인터넷 매체.

드디어 물었다!

본인들이 던진 미끼를 본인들이 덥석!

협상으로 수습 가능한 사안이라고 봤겠지.

물론 수습 가능하다. 그 후유증이 커서 그렇지.

스타 패치에 들어가 보았다.

메인에 뜬 화면에 먼저 눈이 갔다.

[안서연과 소속사 대표가 연애?]

[최근 걸그룹 제니스의 리더이자 드라마 여우야로 반짝 스타가 된 안서연이 한 남성과 데이트를 하는 장면이 목격되었습니다. 연예계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그 남성은 제니스 소속사의 실질적인 대표인 C모 본부장이며, 두 사람이 연인 사이임은 연예계에 공공연한…]

기사 중간에 사진이 있었다.

나와 서연이 대학로를 거니는 모습.

서연이 내 목에 목도리를 걸어주는 모습.

서연이 내 팔짱을 낀 채 웃는 모습.

내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다.

누가 봐도 연인 사이 같다.

당시에 팬들이 사진을 찍었는데 그중에 파파라치나 기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다. 큐즈에서 의뢰한 자가 찍은 사진이다. 이게 큐즈가 꾸민 보복이며, 예상했던 바다.

기사 댓글도 짐작했던 그대로.

서연이 갑자기 뜬 이유를 알겠다는 둥.

청순하고 털털한 줄 알았는데 배신이라는 둥.

소속사 대표가 더러운 놈이라는 둥.

댓글 세 개 보고 창을 닫았다.

바로 지성이에게 전화했다.

“지금 당장 기사 내리라고 해. 허위사실 유포로 고소한다고 하고. 반박 보도 자료 꼼꼼하게 작성해서 언론사에 보내.”

-이미 준비하고 있어. 몰카는?

“아직 기다려. 스타 패치가 바로 내리진 않을 테니까. 동영상 지현이 장면 캡쳐해서 내 폰으로 보내.”

-만들어 놓은 거 있어. 형, 근데 서연 씨랑 진짜 사귀어?

“아니야.”

-포털에도 기사 났는데 내가 댓글 플레이 좀 할 게. 둘이 진짜 사귀면 대학로에서 팔짱 끼고 돌아다니겠냐고. 스타 패치가 악의적인 의도로 기사를 올렸다고 할게.

“그래.”

잠시 뒤 사진이 전송되었다.

지현이 ‘시발. 미친년.’ 하고 욕을 하는 짤이었다.

서연에게서 전화가 와서 받았다.

-괜찮아요?

“마침 전화하려고 했어. 놀랐지?”

-네. 이런 일 처음이라.

“멤버들은 뭐래?”

-놀라긴 했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아닌 거 아니까요.

“내가 처리할 거야. 신경 안 써도 돼.”

-네. 또 전화할게요.

“응.”

어째 서연은 그리 놀란 것 같지가 않다.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사실이 아니라도 이건 데미지가 좀 있는데.

바로 큐즈의 임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큐즈의 남희재 본부장.

-아이고. 최 실장님. 웬일이세요? 전화를 다 주시고?

“그쪽에서 사진 찍어서 제보했다는 거 압니다.”

-네? 무슨 사진요?

“스타 패치에 연락하셔서 기사 내리라고 하세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당최 못 알아먹겠네.

“10분 주겠습니다. 10분 안에 안 내리면 하이니스 애들 욕하는 동영상 인터넷에 올립니다. 특히 지현이. 이미지와 다르게 입이 아주 걸더군요.”

잠시 말이 없다.

남 본부장이 지현이란 친구 성격을 아니까.

참 공교롭게도 지현이가 날 도와주네.

-이봐요. 구라를 치려면 제대로 치세요. 우리 애들 착하다는 건 팬들이 더 잘 알거든.

말투에 ‘이건 또 왜 이렇게 돌아가는 거지?’

하는 감정이 담겨 있다. 슬쩍 떠보는 느낌.

“그 착한 애들이 욕을 하면 팬들이 실체를 제대로 알겠네요. 시간 가고 있습니다. 이제 7분 남았어요.”

-뭘 가지고 협박을 하시는지 한번 보기나 합시다.

“긴말 할 거 없고. 당장 스타 패치에 연락해서 기사 내리라고 하세요. 정정 기사 올리고 로즈 엔터와 서연에게 정식으로 사과한다는 말까지 나와야 동영상 안 올립니다. 그거 다하려면 5분 이상 걸릴 겁니다. 이제 6분 남았네.”

-이봐요, 최신성 씨!

“사진 보내죠. 5분 안에 정정 보도 떠야 합니다.”

전화 끊었다.

바로 지현이 욕하는 짤을 보냈다.

그 짤을 보고 식겁하는 남 본부장 얼굴이 선하다.

다시 차를 몰았다.

건하가 날 보고 있었다.

“나쁜 사람이에요?”

“딱히 나쁜 사람은 아니야. 사람 사는 게 이런 거지.”

웃음이 실실 났다.

서연에게 약점 잡힐 일이 하나밖에 더 있나.

진위와 관계없이 서연의 이미지가 나빠지는 건 맞다.

아닌 것으로 밝혀져도 한 번 왜곡된 이미지는 복구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의심의 눈길로 서연을 보게 되니까.

당장 서연과 로즈 엔터의 영업 손실로 이어진다.

따라서 큐즈는 스캔들을 정정하는 조건으로 나와 협상을 하려는 거다. 영화 출연 금지를 풀려는 목적이겠지.

큐즈 소속 배우들은 영화 출연을 못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실제로 CG가 큐즈 소속 배우가 나오는 영화는 투자 및 배급을 안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당연히 소문이다.

그 소문을 투자사 사장님을 통해 내가 내서 그렇지.

투자사 사장님은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CG 임원과 친하다.

제니스 다큐를 밀어준 걸 보면 직급도 높고.

그 두 분의 친분을 빌려 소문을 냈다.

나도 믿는 구석이 있으니 호언장담했던 거고.

해서 큐즈는 적당히 수습할 수 있는 사안으로 나와 협상을 하려고 했는데 틀어졌다. 엄연히 큐즈가 소속 연예인을 잘못 관리하는 탓이다. 사고 치지 말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인성이 어디 가겠나.

어쨌든 이번에 지성이가 제대로 한 건 했다.

그 몰카 없었으면 큐즈와 협상해야 했을 테니까.

물론 몰카는 불법이다.

누가 찍었는지 모르면 불법이고 뭐고 없는 거고.

5분이 지났다.

스타 패치에 들어가자 기사가 그대로 있다.

정정 및 오보 사과도 없고.

바로 문자를 보냈다.

[지금 올립니다. 잘 가요. 하이니스.]

잠시 기다렸다.

하이니스 무너뜨리는 거야 일도 아니다.

한데 걔들 무너지는 게 우리한테 무슨 이익이 있겠나.

하이니스는 그저 떡밥으로 쓰일 뿐.

아니나 다를까.

띠리리리-

남 본부장의 다급함을 대변하는 벨소리!

큐즈가 떡밥을 물었다!

“예.”

-최신성 씨! 아니 최 작가님! 잠깐만요! 그거 올리면 안 됩니다! 그거 올리면 우리 애들 다 죽어요!

“정정 보도가 안 올라오지 않습니까.”

-스타 패치 그 자식들 자기 일 아니라고 느긋하다고요! 추측성 보도 낸 것이 되면 매체 이미지 나빠진다고 지금 정정 기사는 쓰지도 않고 있습니다!

“그러게 왜 허위 보도 자료를 보내냐고요.”

-이번엔 정말 부탁드릴게요! 저희가 영화계에서 최신성 작가님 위치를 제대로 몰라서 그랬던 겁니다! 작가님 뒤에 CG가 있는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니 화 푸시고 이번 일은 좀 덮어 주세요! 제가 거하게 식사 한번 대접하겠습니다! 최 작가님 제 말 듣고 있어요?

목소리가 커서 폰을 잠시 뗐다.

귀청 떨어지겠네, 진짜.

“식사는 필요 없고 조건이 있습니다.”

-뭔데요?

감질나게 말을 아꼈다.

조금 더 지나 말을 꺼냈다.

“스타 패치가 1시간 안에 정정 보도 및 사과할 것. 하이니스와 지현이는 앞으로 제니스와 마주치지 말 것. 소속 연예인 이미지 훼손에 의한 로즈 엔터 영업에 피해를 준 손해배상.”

-손해배상이라면 얼마나?

“서연이 CF 찍기 힘들어졌어요. 이번 드라마 캐스팅도 좀 어려울 것 같고. 대충 견적 나오죠?”

-수억이란 말입니까?

“일단 스타 패치부터 처리하시죠.”

쿨하게 전화 끊었다.

불부터 끄고 협상은 느긋하게.

지성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 아직도 기사 안 내려가는데? 지금 댓글 난리 났어!

“수습해야지. 잘 풀릴 것 같다.”

-근데 큐즈가 한 짓 맞아?

“맞아. 그쪽에서 알아서 할 거야. 너 요새 힘들지?”

-힘들지 그럼 안 힘드냐. 생전 안 하던 회계 문서 봐야지. 영진이 바쁘면 내가 로드 뛰어야지. 매니저가 둘밖에 없는데 고 본부장님과 성 대표님은 계속 행사를 물어 오신다고.

“월급 올려 줄게. 250.”

-정말?

“그래. 그리고 다음 달에 보너스 좀 줄 게. 영진이도.”

-웬 보너스? 얼마 줄 건데?

“경과 봐서. 이번에 네가 제대로 한 건 했다.”

-야, 먹혔구나!

“그럴 것 같다. 끊어. 기사 내려가면 문자 보내고.”

-알았어. 형,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지랄한다.”

* * *

촬영장에 도착하자 스타 패치에 있던 기사가 내려갔다는 연락이 왔다. 이어 오보였다는 정정 기사와 서연 및 로즈 엔터에 심심한 사과를 표한다는 글이 떴다.

네티즌들의 욕은 스타 패치가 다 먹고.

아마도 큐즈가 돈 좀 썼을 듯싶다.

스탠드바에서 촬영이 한창이었다.

킬러가 난입하여 기막힌 칼솜씨로 흑문파 조직원을 제거하며 주인공에게 달려드는 장면이다. 물론 이 흑문파 조직원들은 대역 보스의 후배 연극배우들이다. 이때 죽었던 사람들이 나중에 멀쩡하게 나타나게 된다.

건하가 무술감독 지도를 받으며 합을 맞추고 있었다.

이미 합은 트레이닝 센터에서 맞췄다. 다만 건하가 키가 크고 몸이 좀 둔했다. 그러고 보니 건하의 정신적인 면보다 액션을 더 걱정하고 있었네.

내 눈에는 불안, 두려움이 아직 건하의 표정에 남아 있으나 다른 사람의 눈에는 긴장감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자폐아 특유의 오갈 데 없이 헤매는 시선 처리는 사라졌다. 분명하게 한 곳을 바라본다.

이 시선 처리는 지난 한 달 동안 내가 특훈을 시켰다.

배우는 눈동자가 고정되어야 한다고.

배우의 눈이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면 보는 사람이 어지럽다.

서연도 국경의 끝 첫 촬영 때 이걸 몰라서 눈을 굴리다가 욕을 먹었던 거고. 나도 몰랐던 건 마찬가지.

건하의 몸이 단단하지 않고 빠르지 않은데도 킬러 역에 무척 잘 어울렸다.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다.

키가 커서 동작 크지. 살인하는 자의 눈은 어째 슬퍼 보이지. 넓은 등이 약간 굽어서 고독한 킬러 같다.

그냥 칼만 들고 서 있어도 화보다.

스태프들이 넋을 잃은 채 리허설을 보고 있었다.

여성 스태프들은 한쪽에 몰려와서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보고 있다. 연예인 보러 온 여고생들처럼.

헐렁하고 낡은 셔츠에 헝클어진 머리카락만으로 여심을 훔쳤는데, 지금은 날렵한 검은 슈트에 빨간 가죽 장갑을 끼고 머리까지 정돈되어 있다. 다들 건하가 마음의 병을 앓은 사람일 줄은 상상도 못한다.

신 대표가 내 옆에 왔다.

“정말 운도 좋으세요. 저런 신인도 발굴하시고.”

“그러네요.”

“건하 씨 덕분에 관객이 더 들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남자 영화라고 봐야 하는데, 윤건하 씨 덕분에 여성 관객이 좀 들 것 같아요.”

“네. 제 노림숩니다.”

“저도 정말 운이 좋습니다.”

신 대표를 보았다.

“최 작가님을 만났으니까요.”

“판수 형. 빚 금방 갚겠죠?”

“그럼요. 흥행하면 보너스 두둑하게 드릴 거예요.”

“말만 들어도 좋네요.”

그때 외침이 들려왔다.

“슛 갑니다!”

건하가 날 보았다.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건하의 눈에 긴장과 떨림이 보였다.

이번 씬 덕분에 스타가 된다는 걸 건하는 알고 있을까.

“액션!”

출입문 밖에 있던 건하가 들어오더니 성큼성큼 황정우 배우에게로 걸어갔다. 건하가 칼을 뽑자 부하들이 뭐야! 하며 벌떡 일어난다. 빠르게 접근하며 달려드는 조직원들의 옆구리를 찌르고, 겨드랑이를 베며 지나가는 건하.

캬. 멋지다, 멋져!

“막아!”

조직원들의 고함과 동시에 테이블로 몸을 날리는 건하.

주먹을 날리려는 조직원의 팔을 막아 내며 가슴에 칼을 찌른다.

퍽퍽!

뽑아드는 칼에서 흩뿌려지는 피!

찌르면 손잡이로 칼날이 들어갔다가 피를 머금고 나오는 가짜 칼이다.

서컥- 서걱- 푸푸푹!

순식간에 부하 서너 명을 베고 찌른다. 그제야 기겁한 얼굴로 달아나려는 황정우를 향해 몸을 날린다. 그의 어깨에 칼을 박는 건하!

“으허억!”

외침과 함께 나뒹구는 황정우와 건하.

“컷! 오케이! 잘했어!”

“와! 기가 막히네!”

짝짝짝짝짝-

환호와 박수가 나왔다.

서 있으면 화보고, 움직이면 영화가 되는 건하다.

액션을 하면 몸동작 자체가 예술이 된다.

신이 배우 하라고 내려보낸 친구 같다.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해서 그렇지.

“바로 다음 쇼트 갑니다! 건하 씨! 아까 액션을 토대로 이번엔 가까이서 따는 겁니다!”

건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꺄악!”

갑자기 들려온 비명에 다들 고개가 돌아갔다.

헤어 메이크업 팀 막내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얼굴이 빨개지더니 후다닥 도망간다.

남자 스태프들이 낄낄댔다. 여자 스태프들 반응에 시기나 부러움 같은 건 안 보인다. 건하의 외모가 워낙 넘사벽이라.

고개를 끄덕이는 건하가 좀 멋있긴 했지.

황정우만 유일하게 질투했다.

“야야! 정말 너무들 한다! 너희들 나는 안 보이니?”

“황정우 주연배우님. 리허설 할게요.”

“아, 예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서는 황 배우.

그의 개그에 웃음이 터진다.

이후 쇼트도 잘 찍었다.

스탠드바 기습 씬을 다 찍고 대학로로 향했다.

극장 무대에 주인공과 무명 배우 30여 명이 모여 앉아 대형 사기를 모의하는 장면을 찍는다. 여기에 건하도 합류한다.

대학로로 가던 도중.

전화가 왔다. 큐즈의 이사라는 사람이었다.

* * *

대학로 카페에서 큐즈 이사라는 사람을 만났다.

정말 이사인지, 협상 대리인인지.

어째 조폭같이 생긴 40대 남자였다.

혹시 큐즈 대표가 조폭 출신인가.

정말 조폭이었다면 하이니스 애들이 왜 그런지 알겠다.

큐즈의 관리 방식이 엉망진창인 이유도.

“동영상을 가지고 있다면서요?”

자신의 외모로 겁을 주려는 듯한 인상.

내 뒤쪽 테이블에도 큐즈 직원이 있는 것 같다.

“손해배상 논의는 하셨습니까?”

이사라는 남자가 말했다.

“그래서 얼마 원하시는데?”

반말을 듣자마자 코어를 발동했다.

헛웃음이 났다.

큐즈 이 양반들은 용서를 하려야 할 수가 없다.

이사라는 아저씨 주변으로 별 희한한 게 다 뜬다.

안마시술소. 호스트 바. 룸살롱 등등.

앞에 앉은 남자는 조폭 같은 게 아니라 조폭이다.

큐즈에 투자했거나, 큐즈 대표와 친분이 있는.

웃기게도 불법 업소까지 줄줄이 보인다.

아이고. 오피스텔 성매매업도 하시고.

조폭이 말했다.

“뭘 그렇게 웃으시나? 내가 우스우셔?”

“관계도 없는 분이 왜 이 일에 끼어드세요?”

“뭐?”

“어디서 뵌 분인가 했더니. 강성철 사장님이시죠? 텐프로 클럽 아미르가 요새 장사가 잘 안되나. 유흥업계 거물께서 이런 자리엘 다 오시고 말이에요. 블루문 오피스텔에서 하는 사업은 또 영업정지 먹었나 봐요? 요즘도 연예인 전문 안마시술소 하시나? 아, 큐즈 배우들이 거기 단골이었구나.”

내 앞에 앉은 조폭이 그야말로 식겁했다.

날 겁주려던 인간이 한순간에 얼어 버렸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겁박을 하려고 드나.

별 관계도 없는 일에 끼어들어서 사업 망치면 어쩌려고.

“실례했습니다.”

조폭이 일어나는 걸 잡았다.

이 아저씨, 지금 매우 당황했다.

“남의 일에 끼어들었으면 책임을 지셔야죠.”

“무슨 책임? 난 잘 모르고 나왔는데.”

“에이, 거짓말도 잘하셔.”

“난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잠깐. 그냥 가시면 영업정지 먹습니다.”

“아우, 진짜!”

조폭이 한 대 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날치면 정말 영업정지다.

“큐즈가 우리한테 손해 배상을 할 겁니다. 만약 내 요구대로 배상하지 않으면 강 사장님은 앞으로 사업 못 합니다. 경찰이 용돈을 받아도 어떻게 하겠어요. 신고가 들어가면 출동하는 척은 해야지. 내가 강 사장님 이름을 아는데.”

“당신 내 이름 어떻게 알았어?”

“기억 안 나세요? 강남서에서 한번 봤는데?”

“…….”

강남역 조폭이 강남경찰서에 어디 한두 번 가봤을까.

조폭이 내 뒤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

안경을 쓴 그 남자는 큐즈 직원이다.

조폭에게 다시 말했다.

“큐즈가 배상만 하면 강 사장님은 아무 문제 없이 영업할 겁니다. 만약 신고 들어가면 큐즈 때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강 사장님은 저와 아무 관계 없잖아요.”

조폭이 날 노려보다가 내 뒤 직원에게 갔다.

“너희 대표한테 전해. 큐즈 때문에 내 사업에 문제 생기면 가만히 안 둔다고. 시팔! 누굴 개 호구로 아나. 통 사정을 해서 도와주러 왔더니 이게 뭔 개지랄이야!”

조폭이 욕을 하며 카페에서 나가 버렸다.

내 뒤에 안경을 쓴 남자에게 오라는 손짓을 했다.

안경 쓴 남자가 당황한 기색으로 내게 왔다.

“휴대폰 좀 줘 보세요.”

직원이 내 눈치를 보며 폰을 꺼냈다.

그 폰을 받아 녹음 중인지 아닌지 확인했다.

바로 폰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큐즈 대표에게 전하세요. 배상금은 6억입니다.”

“예? 6억이요?”

“남 본부장에게 말했다시피. 서연은 앞으로 CF 찍기 힘들게 됐어요. 인터넷 매체 부추겨서 고의로 타 소속사 연예인 이미지 훼손한 점. 그에 따른 로즈 엔터 영업 손실. 손해 배상에 합의하시면 하이니스 동영상 안 올립니다.”

“스캔들 기사는 우리가 올린 게 아니잖아요.”

“동영상도 우리가 올린 게 아닌 겁니다.”

직원의 눈에서 동공 지진이 일어났다.

6억은 코어가 추천한 적절한 배상 금액이다.

서연이 벌어들일 돈에 피해보상금을 추가한 정도.

그 이하면 손해고, 그 이상이면 큐즈가 재판 건다.

재판 가면 큐즈나 우리나 너덜너덜해지는 거고.

말을 이었다.

“배상 방식은 6억에 준하는 부동산입니다. 구입 후 양측 동의하에 명의 이전합니다. 우리가 마련한 각서에 대표님 도장 찍으셔야 하고요. 각서는 민‧형사소송 철회 및 손해 배상 합의에 따른 명의 양도 각서입니다. 또한 우리는 큐즈 소속 연예인에게 불리한 정보를 유출하지 않겠다는 문항도 명시할 겁니다.”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내 말에 직원이 정신을 못 차린다.

직원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협박에 의해 강제로 명의 이전하는 거 아닙니까. 조폭과 뭐가 달라요?”

“그러게 왜 조폭 짓을 하세요?”

큐즈 직원이 일순 할 말을 잃었다.

조폭 동원해서 협박하려다 뒤집어졌다.

직원에게 말을 이었다.

“보름 줍니다. 보름 안에 건물 매매 계약서 및 명의 이전 계약서 안 가지고 오시면 하이니스 애들 동영상 유포하는 것은 물론, 강성철 사장님 영업장에 불법 영업 신고 들어갑니다.”

직원이 말을 잇지 못했다.

다시 말했다.

“시원하게 6억 쏘시고 앞으로는 친하게 지나자고 전해 줘요. 영화 출연 금지도 풀어 줄 테니까.”

“정말입니까?”

“그래요. 그럼 전 일어나죠. 촬영 중이라.”

직원에게 눈인사를 하곤 카페에서 나갔다.

친하게 지내기는 개뿔.

배상받으면 큐즈 소속 배우들의 영화 출연 금지는 푼다.

나는 푼다.

제작사들이 캐스팅 안 하는 건 내 알 바가 아니고.

앞으로 일어날지 모르는 큐즈의 균열도.

* * *

대학로 극장에서 촬영은 무사히 진행되고 있었다.

연극 무대 위에서 황정우와 배우들이 대 사기극 논의를 하는 장면인데, 무슨 독립군이 거사를 치르는 듯한 광경이다.

건하는 단역으로 자리만 함께하고 있을 뿐 대사는 없다. 그저 고개만 끄덕끄덕.

그렇게 건하의 두 번째 작품 출연도 잘 끝냈다.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7인의 사무원은 후반 작업 막바지고. 나는 보스다는 곧 있으면 크랭크 업이다. 다른 내 작품들도 속속 촬영을 시작하거나 촬영 준비를 마쳤다.

서연은 스캔들 따위 개나 줘 버리라는 기세로 드라마에 캐스팅되었다. 당당히 주인공으로. 임성희 작가와 제작사 대표가 밀어붙이고 투자도 되는데 어쩌라고.

사건 이후 보름이 지났을 때.

로즈 엔터에 큐즈의 대표가 찾아왔다.

두 종의 계약서를 들고.

* * *

큐즈 대표는 그냥 평범한 아저씨였다.

하이니스와 지현이가 앞으로 벌어들일 돈. 그들이 몰락했을 때의 손해 등을 따져서 합의금을 주기로 한 모양이다.

지현이가 앞으로 찍을 CF만 해도 10억이 넘는다.

계약서 조항 위반에 의한 CF 위약금은 그 열 배다.

하이니스 활동으로 벌어들일 수익은 말할 것도 없고.

큐즈 대표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웃고는 있지만 눈에 분한 심기가 서려 있다.

그가 왔을 때 이미 코어를 발동했다.

현재 큐즈 대표의 심리가 재미있다.

열 받았지만 해결을 해서 시원하다. 제대로 복수를 하고 싶지만 걱정이 훨씬 앞선다. 나에 대한 분노보다 지현이에 대한 짜증이 더 크다. 왜 이런 인간이랑 시비가 붙어서 회사가 이 수난을 겪어야 하는가.

사실 5대 기획사에 속하는 큐즈에게 6억은 3년간 키우던 연습생 서너 명 내보내는 손해 수준이다. 난 서연과 제니스가 벌어들일 수익을 분석해서 6억이라 정한 거고.

큐즈 대표는 작곡가 출신으로 경영 수완이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고집이 센 편이고 독선적이다. 그렇다고 비열하거나 성정이 나쁜 사람도 아니고.

큐즈 대표가 빤히 보다가 말했다.

“우리가 지현이 계약해제하면 어쩌려고 이러세요?”

“겨우 6억에 100억짜리 애를 자르게요?”

“걔 사고 칠 때마다 수습하느니 자를 수도 있습니다.”

이 양반이 씨도 안 먹힐 엄포를 놓네.

지현이는 큐즈의 보배인데 왜 잘라.

머지않아 본인 스스로 나가긴 하겠지만.

큐즈 대표가 다시 말했다.

“이거 하나 분명히 합시다. 나중에 소송이니 뭐니 딴소리 안 할 테니. 우리 애들 동영상 공개 안 한다고 각서 쓰지요. 솔직히 남 본부장이 대응을 잘못한 것도 있으니, 이쯤에서 쌓인 거 다 풀고 잘 좀 해 봅시다. 우리 배우들 불만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CG가 배급을 안 한다는데 어떻게 합니까.”

“각서는 저희가 마련했습니다.”

“그래요? 어디 봅시다.”

합의 각서를 내밀었다.

이 합의 각서는 꽤 꼼꼼하게 작성했다.

이러이러한 근거로 배상금 6억을 도출했으며, 배상하는 측이 이에 합의했다. 또한 우리는 큐즈 엔터 소속 연예인의 오점이 될 수 있는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다.

큐즈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해놨네요. 바로 명의 이전 합시다.”

큐즈 대표도 계약서를 내밀었다.

6억 상당의 아파트 매매 계약서와 명의 이전 계약서.

자세히 내용을 살펴본 후 둘 다 도장을 찍었다.

각서에도 도장을 찍고.

이어 공증사무실로 가서 각서 공증까지 받았다.

이제 이 각서는 법적 효력을 가진다.

큐즈 대표가 소송 걸지 않겠다고 했으나 앞날은 모르니까.

이로써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의 간접적 영향으로 큐즈에 균열이 일어난다.

코어 분석에 따르면 그렇다.

“잘 좀 해 봅시다. 최신성 대표님.”

“그러죠.”

그렇게 큐즈 대표와 헤어졌다.

대표만 잘하면 뭘 하나 아랫사람이 사고를 치는데.

아파트는 성동구 금호동에 있었다.

다리만 건너면 강남 압구정이기에 위치도 좋다.

40평 대 방 4개.

지금 사는 집은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계약 만료 전까지는 이사할 생각이 없었다. 해서 이 아파트에 제니스 멤버들이 이사하기로 결정했다. 방 세 개가 다 작은 데다 코디까지 숙소에서 자는 날이 많아서 비좁은 상태였다.

서연이 사건 당사자로서 아파트에 지분이 있기도 하고.

물론 이 지분은 나중에 서연에게 준다.

이 소식을 알렸더니 제니스 멤버들이 방방 뛰었다.

사실 이제는 본인들도 돈이 있어서 독립할 수는 있지만 그래 봐야 겨우 전세 아니면 월세였다. 아직은 독립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이사할 집의 방이 4개인 것도 그렇고.

며칠 후 이사를 했다.

이사하는 김에 대형 텔레비전도 두 개 사서 하나는 제니스 숙소에, 하나는 지성이 원룸에 보냈다.

그리고 지성이에겐 보너스로 2천만 원.

영진이에겐 1천5백만 원을 주었다.

회사 돈이 아닌 내 돈을 줬다.

6억짜리 아파트가 내 명의가 되었으니.

영화 후반작업은 무난하게 진행되고 있겠다.

큐즈와의 분쟁도 일단락되었겠다.

아무 걱정거리가 없는 일상이 이어졌다.

영화 작업도 일절 하지 않았다.

로즈 엔터에 놀러 가거나. 제니스 행사하는 곳을 구경 가거나. 건하와 함께 촬영장에 가 보거나.

그러는 사이 나는 보스다는 대망의 크랭크 업을 하고.

제니스 멤버들이 이사하고 한 달여 후.

최종 편집본이 나오고 기술 시사를 거쳤다.

그때 분석을 두 번 했다.

이전 예측 관객 수는 580만에서 680만이었다.

한데 이번엔 정확히 692만이 나왔다.

만 단위 수치까지 나온 건 처음이다.

감독 연출력이라는 변수가 사라지고, 윤건하 출연으로 인한 호재가 작용하여 최대치보다 더 나온 거였다.

흥행 수입은 677억이다.

계산을 해보았다.

흥행 수익 -> 약 677억.

극장 수익 50% 공제 후 -> 338억 5천만.

배급사 수수료 10% 공제 후 -> 304억 6천만.

메인투자사 관리비 2% 공제 후 -> 298억 5천만.

총 제작비 85억 공제 후 -> 213억 5천만.

투자사 순수익 60% -> 128억 1천만.

제작사 순수익 40% -> 85억 4천만.

부가 판권 수입 -> 약 12억.

해외 판권 수입 -> 약 11억.

판권 수입 제작사 배분 -> 약 9억.

제작사 총 수익 94억.

내 수익 배분 4%는 3억 7천6백.

신성영화사는 이번 7인의 사무원에 10억을 제작 투자했다. 배분하고 인센티브 주고 그래도 이번 영화로 신성영화사의 순수익은 70억 대에 육박할 것 같다.

국경의 끝으로 번 자금까지 합치면 90억.

이 대표님은 맨손으로 2년이 채 안 되어 그 돈을 번 거다.

내 덕이 큰데 그 돈 다 잡수시면 미안하시지 않을까.

어째 슬슬 독립해야겠다는 마음이 드네.

* * *

VIP 시사회가 열렸다.

국경의 끝과 비교하면 기자와 구경꾼이 두 배다.

참석한 연예인도 상당히 많았다. 배우는 물론이고 모델, 스포츠 스타, 아이돌, 심지어 큐즈 엔터 소속 배우도 있다. 그 배우는 진규 씨를 응원하러 온 사람이다.

정장을 입은 채 속속 포토 라인에 서는 연예인들을 지켜보았다. 제니스 멤버들도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고,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도 환한 얼굴로 번쩍이는 플래시 빛을 맞이했다.

그리고 엄아인과 서연이 팔짱을 낀 채 우아하게 포토라인에 올랐다.

“서연 언니! 예뻐요!”

“엄아인 씨! 흥행 공약 안 하십니까?”

“안서연 씨! 소감 어떠세요?”

기자와 팬들이 저마다 소리를 질러댔다.

진행 스태프의 수신호를 본 두 사람은 더없이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하곤 극장으로 입장했다. 나도 더 볼 것이 없어 극장에 들어갔다.

지난 영화와 달리 이번엔 앞줄에 내 자리가 있었다.

영화에 출연한 배우와 연예인들 바로 뒷좌석.

내가 자리에 앉자 날 찾던 서연이 활짝 웃어 보였다.

스캔들 이후에도 나와 조금도 거리를 두지 않았던 그녀다.

애초에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던 거지.

곧 영화가 시작되었다.

세 번이나 본 영화다.

기자들은 늘 그런 것처럼 무덤덤하게 영화를 봤지만, 연예인과 초대받은 분들은 마음껏 영화를 즐겼다. 초반에는 웃기는 장면과 화가 나는 장면이 번갈아 나온다. 그에 따라 반응도 시시각각 달라지고.

영화는 무사히 끝났다.

영화도 만족스럽고 관객 반응도 좋고.

특히 건하가 출연했을 때 여자 손님들이 눈에 띄게 관심을 보였다. 서로 저 배우 누구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남자들도 속닥거리거나 고개를 끄덕였다.

제니스 멤버들도 마찬가지다.

신인 배우와 계약했다는 말만 들었지 건하와는 만난 적이 없다. 영화 크레딧에 윤건하라는 이름을 보고는 그제야 회사 식구라는 걸 알았다.

내가 보조 출연했던 변태 대리 장면은 없었다.

좋은 장면도 러닝 타임에 맞추려고 들어내는 판에 그런 장면이 들어가면 안 되지.

그 장면을 찍은 건 현장 분위기를 위해서였다.

서연과 제니스 멤버들이 내게로 왔다.

“영화 어때?”

“너무 재밌어요. 국경의 끝보다 더.”

“근데 윤건하라는 분 우리 회사 배우 맞아요?”

“응. 멋있지?”

“우리 그 오빠 소개해 줘요! 네?”

“아직 안 돼. 지금 좀 아파.”

“어디 많이 아파요?”

“나중에 소개해 줄게. 가자 밥 먹으러.”

“네.”

멤버들과 함께 전처럼 중국집으로 갔다.

영화 시사회를 하면 무슨 졸업식 같은 느낌이 든다.

일종의 징크스가 생겼다고 할까.

그로부터 5일 후.

7인의 사무원이 개봉했다.

개봉 첫날부터 반응이 좋았다.

영화를 본 여자들 사이에 윤건하라는 이름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큰 이슈는 되지 않았다. 어? 하고 눈에 띌 뿐 역할이 좀 미미해서.

* * *

여유롭고 느긋한 하루하루였다.

건하와 집에서 노닥거리다 밥을 먹고 산책을 한다.

그러곤 집에 와서 감독 데뷔작 이야기를 굴리고.

오래전부터 내 감독 데뷔작은 이런 영화다. 라고 정해 놓았다. 막연한 이미지만 있었는데, 건하를 만나면서 그 이미지가 정해졌다. 건하가 아니면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주인공.

그 이야기를 느긋하게 굴려 나갔다.

내 작품만 구상한 건 아니었다.

임성희 작가가 조언을 부탁하면 검토해서 넘겨 주었다.

내가 오케이를 해야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서연이 여주인공으로 출연하는 드라마이니 애정도 있고.

김영석 선배는 바로 자신의 입봉작 프리에 들어갔다.

이미 써 둔 작품을 다듬었는데 그 작품 재미있다.

나도 윤색에 참가해서 도움을 주었고.

신성영화사 세 번째 작품은 김영석 감독 영화다.

이 대표님은 김 선배 각본도 내가 쓰라는 눈치를 주셨지만, 그럴 순 없었다. 엄연히 영석이 형은 내 선배 작가니까.

본인 작품을 본인이 연출하는 게 맞기도 하고.

그렇게 7인의 사무원이 흥행을 하고 극장에서 하나둘 간판을 내렸다. 아직 상영하는 극장이 있기에 최종 스코어는 모르지만 600만은 넘었다.

이 대표님 입이 귀에 걸리는 거야 당연한 일이었고.

연락도 오고 해서 오랜만에 회사로 나갔다.

* * *

회사 건물 주차장으로 들어가는데 시커먼 스포츠카가 주차장 입구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주차장을 보니 자리가 하나밖에 없었다. 스포츠카가 주차를 하려는 건지, 나가는 건지 애매해서 그냥 들어갔다.

그때였다.

빠앙-

그 스포츠카가 울린 클랙슨이었다.

왜 경적을 울리는지 몰라도 차를 대고 내렸다.

별수 없이 스포츠카는 도로에 주차했다.

그 스포츠카의 문이 위로 열리더니 잘생긴 남자가 나왔다.

배우 권양기였다.

김영석 선배가 작업했던 한중 합작 전쟁물에 출연하기로 했던 이른바 아이돌 스타다. 그 작품은 결국 엎어졌나.

권양기가 다가왔다.

“저기요.”

“예?”

“제가 맡아놓은 자리인데 새치기를 하면 어떻게 해요?”

“먼저 온 사람이 주차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아니, 내가 먼저 왔잖아요. 주차하려고 했는데 건물 명 확인하는 사이에 아저씨가 새치기한 거잖아요.”

“그래서 어쩌자는 겁니까?”

“어쩌자는 게 아니라 조금만 양보를 해주시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무슨 양보? 진짜 어이가 없네.

권양기가 따라왔다.

“양보 좀 해주세요, 네? 보시다시피 저 차 저렇게 도로에 두면 안 되는 거 아시잖아요.”

“내 차를 빼고 그쪽 차를 주차하겠다는 말입니까?”

“사정 좀 봐주세요. 길가에다 차 세워 놓으면 누가 제 차를 긁을 수도 있잖아요.”

살다 살다 별일을 다 겪는다.

저 비싼 차를 대체 누가 긁는다고.

권양기가 자신의 차와 내 차를 번갈아 본다.

“그냥 공영 주차장에 대세요, 여기서 한 100미터 가면 있습니다. 다른 건물 주차장에 대시던가요.”

“그러지 말고 양보 좀 해 주세요. 제가 지갑을 안 가지고 나와서 그래요. 저 차 견인되면 진짜 골치 아픈데.”

“편한 차를 타세요, 그러면. 사서 고생하지 말고.”

“아, 거 진짜!”

바로 건물로 들어갔다.

권양기가 똥차가 어쩌고저쩌고하며 중얼거렸다.

나 들으라는 소리다.

내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권양기도 연신 자기 차를 돌아보며 내 옆에 섰다. 지갑을 안 가지고 나왔다는 건 뻥이고, 그냥 귀찮았을 뿐이다. 연예인이 벼슬이라도 되는 줄 아나?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나와 권양기가 함께 탔다.

사무실이 있는 12층을 눌렀다.

권양기도 12층을 가는 듯.

내부 거울을 통해 권양기가 보였다.

아래위로 날 훑어본다.

이 아저씨는 뭔데 나한테 안 쫄아?

혹시 날 모르나?

뭐 이런 눈길이다.

소문은 들어서 예상은 했는데.

권양기 인격 수준도 참….

12층에서 나와 권양기가 함께 내렸다.

난 화장실에 갔다.

권양기가 이 건물 12층에 온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다.

웃으며 손을 씻고 있는데 권양기도 화장실에 들어와 머리를 매만졌다. 무슨 면접 보러 온 사람처럼.

“신성영화사에 오셨나 보네요.”

“알 거 없잖아요?”

“제가 거기 직원입니다만.”

“예?”

권양기가 날 빤히 본다.

기획실이나 제작부에서 일하나 싶지?

“무슨 일로 오셨는데요?”

“신성영화사 작품 좀 하려고요. 차기작 한다면서요?”

“예. 책이 나오면 기획사로 갈 겁니다.”

“그래서 온 거죠. 다른 배우가 낚아채기 전에. 회사에서 알면 자존심도 없느냐고 한 소리 들을까 봐 매니저도 없이 혼자 온 거 아닙니까. 저만큼 적극적인 배우도 없죠?”

적극적인 게 아니라 본인이 아쉬워서 온 거지.

연기 못 하는 배우로 유명하니까.

전작도 다 망했고.

“굳이 우리 회사 작품을 하시려는 이유가?”

“정작 직원들은 모르시나 보네. 신성이 만드는 작품은 대박 난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아요. 기획사에 책 보내면 하겠다는 배우들이 한둘이겠어요. 이렇게 미리 와서 얼굴도장 찍어 놔야지.”

“소문을 믿으세요?”

“소문이 아니라 검증이 된 거죠. 최신성 작가 작품이니까.”

“검증이요? 단 두 작품 흥행했는데?”

“두 작품이 아니죠. 최 작가가 쓴 나는 보스다 지금 난리잖아요. 벌써 천만 관객 영화라는 소문이 자자한데.”

“이번 작품은 감독님이 쓴 건데요.”

“예? 최 작가가 쓴 작품이 아니고?”

화장실에서 나갔다.

권양기가 뒤에 따라왔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업무를 보던 민정이가 벌떡 일어났다.

“실장님! 오셨어요?”

흥행이 되니 민정이가 과하게 반겨준다.

권양기가 날 본다.

오? 실장이었어? 이런 눈길.

이 대표님이 일어났다.

“권양기 씨는 여긴 웬일로?”

“안녕하세요, 대표님. 작품 얘기 좀 하려고요.”

권양기가 인사를 하고 두리번거렸다.

“사무실 작구나. 하긴 제작만 잘하면 되지.”

대표님이 내게 말했다.

“최 작가가 권양기 씨 섭외했어?”

“아니요.”

“최 작가요? 이분이요?”

권양기가 흠칫 놀라더니 날 보았다.

그에게 웃으며 말했다.

“예. 똥차 몰고 다니는 최신성입니다.”

권양기의 얼굴이 동작 그만 상태가 됐다.

몹시 진동하는 동공.

웃어야 할지. 혀를 차야 할지.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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