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6장 새로운 인연 (15/56)

제6장 새로운 인연

연출과 매니저가 하지영과 이리나에게 설명하는 동안.

서연이 돌아왔다.

그녀의 표정은 시종 덤덤했다.

서연에게 말했다.

“잘 참았어.”

“참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이리나 잰 나이만 먹었지 아이돌 애들보다도 못해요. 아역 스타 출신이라 고생해 본 적이 없거든요. 하는 짓이 귀엽더라고요.”

서연이 우리 쪽으로 씩씩대며 오는 이리나를 보았다.

“저런 타입은 싸우면 안 지려고 해요. 말로 해도 소용없고요. 첫 촬영 때 매니저한테 바락바락 대드는 거 보고 성격 파악했죠. 곧 드라마 종영인데 내가 저런 어린애 하나 못 견디고 싸울 것 같아요?”

그래. 서연이 괜히 참은 게 아니다.

이리나에 비하면 어른인 거지.

애랑 어울리면 애 되는 거 한순간이니 무시로 일관한 것 같다. 그런 서연의 태도에 이리나는 선배랍시고 짜증이 난 거고.

안하무인에 인성 개차반인 애들이랑 싸울 필요 없다.

무시하면 된다. 도를 넘으면 반드시 갚아 주면 되고.

하지영과 이리나가 내 앞으로 왔다.

하지영은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고, 이리나는 팔짱을 낀 채 콧방귀를 뀐다. 아무리 작가라도 주인공은 어쩌지 못할 거라는 당당함이다.

연출이 말했다.

“리나야. 네가 사과 좀 해라. 촬영해야지.”

이리나가 나와 서연을 보며 피식 웃었다.

“감독님. 저 사람 진짜 작가 맞아요?”

“맞아. 임성희 작가에게 확인했어.”

이리나의 입이 비틀어지고 있었다.

“흥. 나, 이 드라마 주인공이에요. 대본 안 주면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볼까요? 날 싫어하는 작가가 대본을 안 줘서 결방된다고 하면 내 팬이랑 시청자들이 가만있을 것 같아요?”

“야, 리나야. 그냥 말 한마디면 되잖아.”

연출이 종용했으나 이리나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매니저도 날 노려보고 있고.

이리나가 앙칼지게 말했다.

“나, 사과 안 해. 못해! 선배 무시하고 우습게 보는 년한테 내가 왜 사과를 해! 쳇! 결방되든지 말든지.”

웃으며 받아주었다.

“그럼 그렇게 해.”

이리나가 휙 돌아서 가 버렸다.

“야! 너 정말 이럴 거야!”

연출이 이리나에게 달려갔다.

하지영 씨에게 말했다.

“최성란 작가와 친한 모양이죠?”

“죄송해요. 제가 최성란 작가 말만 믿고…….”

“네. 그런 것 같았습니다.”

“서연아, 미안해.”

“네. 선배님.”

하지영이 내게 고개를 숙이곤 세트로 향했다.

이리나와 연출은 저편에서 실랑이 중이고.

이리나 매니저가 말했다.

“그냥 넘어갑시다. 쟤 사과할 애가 아니라니까요.”

매니저도 사과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인다.

그에게 말했다.

“큐즈에 배우들 많이 계시죠? 잘 됐네요. 앞으로 이리나는 물론 큐즈 엔터 소속 배우들은 내 영화에 절대 출연 못합니다. 당장은 아닐지라도, 내가 아는 영화인의 영화에도 출연 못하게 될 겁니다.”

매니저가 이건 또 뭔 소린가 싶은 얼굴이다.

말을 이었다.

“그리고 시나리오 계약할 때. 큐즈 소속 배우는 캐스팅 안 하는 조건을 걸 겁니다. 큐즈 소속 배우를 캐스팅한 제작사는 영화 못 찍을 수도 있어요. 투자가 안 될 테니까요. 투자는 되어도 CG와 NEO의 배급은 어려울 겁니다. 믿기 어렵죠? 정말 그런지는 두고 보면 압니다. 그럼 사과는 안 하는 걸로.”

서연에게 말했다.

“고생이 좀 되더라도 참아.”

“네. 더한 일도 겪었는데요, 뭐. 저 들어갈게요.”

“그래.”

이리나와 연출은 여전히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서연이 들어가며 말했다.

“감독님. 촬영가시죠. 잘 마무리했어요.”

“그래? 어휴, 이게 뭔 일이냐 대체.”

서연은 노려보는 이리나를 무시하고 세트에 올랐다.

반면 매니저는 뭔가 심상치 않다는 얼굴이다.

당연하다. 내가 누군지 모르니까.

“영진아.”

“네.”

“나 믿고 이제 강하게 나가.”

“알겠습니다.”

영진이는 세상 후련한 표정이다.

이번 같은 일은 매니저로서도 힘들다.

말단인 로드매니저는 아무것도 도울 수가 없으니까.

방송사나 행사 대기실에선 수도 없는 신경전과 싸움이 벌어진다. 아이돌끼리 주먹 다툼을 벌이기도 하고, 매니저끼리 멱살잡이도 한다. 인기 없는 걸그룹은 PD나 인기 아이돌 매니저에게 온갖 무시와 모멸을 당한다.

회사에서 벌어지는 숱한 억울한 사연들.

비겁하고 악랄하고 치졸한 수작질들.

연예계라고 별다를 거 없다.

인기가 걸린 일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나도 했다.

최소한 받은 만큼은 돌려준다.

멀쩡한 다른 배우를 주저앉힐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내 배우를 건드리면 가만히 안 둔다. 사과하지 않으면 으스러질 때까지 짓밟는다. 권력이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고.

다만 난 정도를 가려고 할 뿐이다.

건드리지만 마라.

* * *

제작 센터에서 나가 내 차에 올랐다.

그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최신성 작가님?

“예. 어디시죠?”

-아, 저 큐즈의 매니지먼트 본부장 남희재라고 합니다. 급히 좀 만났으면 하는데요.

“이리나가 사과하지 않았으니 만날 일도 없습니다.”

-리나 걔가 철이 좀 없습니다. 안 그래도 하도 사고를 치고 다녀서 저희도 골치가 아파요. 어려서 그러려니 하시고 좀 만납시다.

“사과 안 할 테니 회사가 해결하라 이겁니까?”

-정말 대본 안 넘길 거예요? 애들끼리 싸운 일 가지고 이러시면 어떻게 합니까? 서연이 걔가 리나 무시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은 생기지도 않았어요. 그렇게 일방적으로…

“이거 아세요?”

-뭐요?

“그 어떤 약이든 당사자 모르게 먹이는 것은 약물 오남용 및 상해로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설사약을 먹였다는 것은 상해의 고의가 있으므로 상해죄가 성립되며, 우리가 합의하지 않는다면 이리나는 폭행 치상으로 실형 받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합의할 생각이 없네요.”

대꾸가 없다.

그러게 왜 그 철없는 짓을 하냐고.

성인이라면 장난과 범죄를 구분할 줄 알아야지.

-정말 이런 식으로 나올 겁니까?

말로 안 되니 싸우겠다 이건가.

큐즈의 힘을 보여 주겠다?

당연하다. 내 경고가 과장된 엄포라고 생각할 테니까.

이리나가 처벌을 받아도 언론을 묶을 수 있다고 보겠지.

기껏 단속해 봐야 연예부 기자다.

나도 기자가 주인공인 시나리오 취재하면서 친해진 기자가 있다. 그것도 사회부 기자.

“이리나가 이틀 안에 사과하지 않으면 대본 안 넘기는 것은 물론, 친한 기자에게 이번 사건 전하겠습니다. 더 할 말 없으면 전화 끊지요.”

-이봐요, 작가님. 좋게좋게 갑시다.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 되어 봐야 좋을 거…

전화를 끊었다.

다시 전화가 왔지만 안 받았다.

문자가 왔다.

[작가님,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그냥 덮어 주십시오. 리나는 제가 잘 타일러 보겠습니다.]

어떻게든 넘어가 보려는 수작이 뻔히 보인다.

[그냥 이리나가 사과하면 됩니다.]

다시 문자가 올 줄 알았으나 안 왔다.

날 설득할 게 아니라 이리나를 설득할 일이다.

본부장도 그걸 아는 거고.

차를 몰고 나갔다.

얼마 안 가 이번엔 임성희 작가에게서 전화가 왔다.

차를 갓길에 세웠다. 안 그래도 기다렸다.

“네.”

-대체 무슨 일이에요?

임성희 작가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다.

반응이야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고.

그녀는 누가 뭐래도 내 편이다.

나 아니었으면 아직도 그 망할 작가 밑에서 보조작가로 열심히 구르고 있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시위를 하자는 거죠?

“네. 드라마 결방하면 미치는 쪽은 방송국입니다. 대본은 저한테 있다고 말 하시면 됩니다. 임 작가님도 피해자인 척 저를 설득하고 있다고 하시고요. 이리나와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임 작가님 차기작은 걱정할 거 없습니다.”

-그래도 일이 커질까 봐서요.

“느긋하게 기다리면 됩니다. 다음 화 촬영 마지노선까지 가면 이리나가 사과할 거예요.”

-알겠어요. 아, 심장 떨려.

“그럼 종방연 때 봐요.”

-네.

전화를 끊고 서울로 달렸다.

* * *

이틀 후.

영진이가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이리나가 서연 앞에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인 모습.

쯔쯔.

절로 혀를 차는 소리가 나온다.

이 한 장을 찍으려고 생난리가 났다.

방송사에선 당장 사과하라고 압력을 넣고, 이리나는 죽어도 못하겠다고 울고불고. 난 최종화 결말을 슬쩍 흘렸다.

남주는 죽고 여주인공은 그로 인해 미친 짓을 하며 싸돌아다니다 정신병원에 갇히고, 동생인 서연이 가문의 수장이 된다는 충격적인 결말. 서연이 여주인공이 되는 시즌 2를 예고했다고 할까.

작가가 빡쳐서 그렇게 쓰겠다는데 어쩔 거야.

그랬더니 결국 사과를 했다.

드라마야 원래대로 마무리했고.

사진 속 이리나는 이를 악물고 있다.

저런 애는 이번 일 못 잊는다. 걔네 회사도 마찬가지고.

너흰 이미 늦었다.

드라마는 종영하겠지만 영화는 앞으로 못 찍는다.

임성희 작가가 대본을 보내면서 드라마 촬영이 다시 시작되었다. 잠도 못 자고 강행군하겠지.

영진이에게 물으니 이젠 별일이 없었다.

이리나는 더는 서연에게 함부로 하지 못했다. 화를 꾹꾹 누르고 쏘아보기만 한다나. 소속 연예인 관리를 어떻게 하기에 애가 그 모양인지.

하지영 씨는 말로만 사과한 게 아니라 서연에게 근사한 밥을 쏘았다. 최성란 작가와는 앞으로 상종도 안 하겠다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예상대로 그 망할 작가의 험담만 듣고 서연을 오해한 거였다.

큐즈는 아마 단단히 벼르고 있을 터다.

지금 큐즈와 나는 골리앗과 다윗의 위치니까.

하지만 내게 덤비는 순간부터 큐즈의 몰락은 시작된다.

큐즈 대표가 현명한 사람이길 바랄 뿐.

* * *

7인의 사무원. 33회 차 촬영.

드디어 서연이 출연하게 되었다.

여주인공이지만 출연 분량은 그리 많지 않았다. 캐스팅 당시엔 서연이 톱스타급이 아니었던 터라서.

그러나 드라마 마지막 회가 시청률 26%를 찍었다.

근 1년 동안 지상파 드라마 최고 시청률이었다.

드디어 서연도 톱스타 반열에 올랐고.

촬영장은 외국 금융사 건물 안이었다.

감독이 열정적으로 현장을 지휘하고 있었다.

첫 촬영 때의 결정 장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이젠 자기 기준이 확실히 생긴 거지.

감독이 조감독 생활을 오래 해서 현장도 잘 이끌어갔다.

“승철아! 배우님들 왔어?”

“서연 씨 오셨고, 과장만 오시면 돼요!”

“감독님! 보조출연자가 좀 부족한데요!”

“몇 명 왔어요?”

“15명이요!”

영석이 형이 난감한 표정으로 사무실 입구에 서 있다.

보조출연업체 반장이 연신 전화를 했다.

감독에게 갔다.

“몇 명 필요해요?”

“대기업 사무실인데 20명은 채워야 그림이 나오지.”

감독과 함께 보조출연 업체 반장에게 갔다.

반장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

“미리 인원수 좀 맞춰서 오시지.”

“오늘 일요일인데다가 직장인 나이 때 보조 출연하는 분들이 많지 않아요. 15명도 겨우 끌어모았습니다.”

감독이 스태프들을 돌아보았다.

“보조 출연할 사람!”

다들 시큰둥한 반응.

“일당 8만 원 줄게!”

그래도 반응이 미적지근.

네 명이 다다.

“영석 씨. 4명 옷 갈아 입혀요.”

“알겠습니다.”

서연이 대기업 여직원 유니폼을 입고 나왔다.

유니폼도 정말 잘 어울리네.

그녀가 자신의 태를 이리저리 보았다.

“이런 옷 처음 입어 봐요.”

“괜찮아. 잘 어울려.”

서연이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승철이가 날 힐끔거리며 감독에게 속닥이고 있었다.

저게 또 무슨 흉계를 꾸미려고?

감독이 내게 오더니 말했다.

“이참에 변태 대리 역할 한 번 할래?”

“예? 시나리오에 없는데?”

“이번 씬에서 과장이 서연 씨를 엄청 갈구잖아. 대리가 호되게 당한 여주인공의 몸매를 더러운 눈으로 훔쳐보는 거지. 아주 음흉하게. 응?”

“평소에 감독님이 그래요?”

“뭐, 인마?”

서연이 웃으며 말했다.

“재밌겠다. 그런 직장 상사 꼭 한 명씩 있다던데.”

“아니, 그래도 내 이미지라는 게 있는데.”

“네가 무슨 이미지가 있어? 너 배우야?”

“나 연기 못 해요.”

“평소 하던 대로 해.”

“뭔 말이야, 대체!”

서연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평소 하던 대로라니? 내가 변태야?

감독이 말을 이었다.

“꼭 시나리오대로 찍으란 법 있냐. 현장에서 아이디어가 나오면 찍으면 돼. 이렇게 찍은 게 영화를 살리기도 하거든. 아니다 싶으면 버리면 되고.”

“뭐, 그렇긴 하네.”

“가서 분장 받아.”

“뭐 얼마나 나온다고 분장까지 받아요.”

“얼굴 안 찍혀도 기본은 해 놔야지. 승철아! 최 작가, 변태 대리 역이다!”

“예!”

승철이가 냅다 달려와 내 등을 떠밀었다.

아, 이건 아닌데.

승철이에게 등 떠밀려 분장부스로 갔다.

분장팀이 일사불란하게 날 분장시켰다.

다른 직원은 와이셔츠만 입고 있는데 나만 정장 상의 단추까지 다 채웠다. 게다가 콧구멍 안에 털까지 심었다.

“어떻게 분장한 거야? 거울 좀.”

“완성하고 보여 드릴게요.”

머리를 2대8로 빗어 넘기는 게 어째 불안했다.

눈썹에는 마스카라 같은 걸 바르고.

“세팅 완료! 슛 갑니다!”

“자, 가요!”

거울을 볼 사이도 없이 승철이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곤 뭐라 할 사이도 없이 서연 옆에 앉았다.

서연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과장 역할 배우도 낄낄대며 웃는다.

분장이 과하면 영화 흐름을 깰 텐데.

“자, 레디!”

왜 이렇게 급해? 준비할 시간도 안 주고.

변태라. 서연이 몸매를 훔쳐보면 되겠지.

이 영화는 코미디가 아니니까 과하지 않게.

그러나 진심으로 즐기는 듯한 변태의 진정성을 가지고.

“액션!”

과장이 서류를 책상에 내려쳤다.

호되게 욕을 먹는 서연.

과장이 무슨 대사를 하는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서연에게 후려치듯 서류 뭉치를 날리는 과장.

난 서연의 엉덩이만 뚫어지라 보고 있었다.

서연이 흩어진 서류를 주워 모으려 허리를 숙였다.

오! 저 탐스러운 엉덩이!

잔뜩 풀이 죽은 모습으로 내 옆을 스치는 서연.

내 눈앞을 지나가는 서연의 엉덩이.

서연이 엉덩이가 이렇게 예뻤나.

한번 슥 만져 보고 싶은…

흐흐흐흐.

“컷! 오케이! 좋았어!”

휴, 다행이다.

이런 게 연기인가. 감정 몰입이 생각보다 쉬운데?

나는 보스다 때처럼 망신은 안 당했다.

서연과 과장 역이 찍은 장면을 보고 있었다.

나도 스테이션으로 갔다.

서연이 날 보더니 눈을 흘겼다.

“뭐야, 오빠! 저질이야!”

“뭔데 그래?”

스테이션에 가려던 그때.

승철이가 뒤에서 날 붙잡았다.

“왜 이래?”

“형은 보면 안 돼.”

“왜? 놔, 인마. 나도 봐야지.”

“감독님 지시야.”

감독을 보았다.

감독 이 인간이 씩 웃는다.

“최 작가 감금해.”

와락!

영석이 형까지 날 붙잡았다.

“형까지 왜 이래! 놔, 좀!”

“들어가지. 이 변태 자식.”

“놔! 놓으라고! 이거 안 놔? 놔아아아!”

두 사람에 잡혀 질질 끌려갔다.

아니, 왜 이러는 건데!

“하하하하하!”

스태프들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보려고 했는데 영석이 형과 승철이가 극장에서 보라며 날 끌어내더니 탕비실에 감금했다.

“야, 이게 바로 메소드 연기지!”

“와, 표정 진짜 예술이다!”

“최 작가님! 평소에 뭘 하고 다니는 거예요?”

“오빠, 다른 여자도 이렇게 봐?”

“이건 연기가 아니라 진심인데?”

표정이라니?

내 얼굴이 클로즈업됐다는 말이잖아?

이 인간들이 진짜!

쾅쾅쾅-

“야, 승철아 문 열어!”

그제야 문이 열렸다.

바로 스테이션으로 갔다.

“어떻게 나왔는데 그래요?”

“잘 나왔어. 흐름 상 이상하면 자르면 돼. 현장 분위기 밝게 했다고 쳐.”

“그러니까, 한번 보자고요.”

“극장에서 봐. 잘릴 확률은 크겠지만.”

승철이가 지나가면서 툭 던졌다.

“형. 내 장담하는데 영화 개봉되면 형 이름이 검색어에 오를 걸요? 씬 스틸러로 아마…”

승철이의 멱살을 잡았다.

“너 이 자식! 일부러 그랬지!”

“어허! 나중에 나 잘했다고 칭찬하기만 해 봐요.”

에휴. 그래, 영화만 잘 나오면 된 거다.

뭐, 이 대표님도 보조출연은 많이 했다고 한다.

영화계에서 유명해진 뒤로는 카메오 출연도 좀 했고.

물론 영화인들만 알아보고 깔깔댔겠지만.

영화인의 숙명이라고 해두자.

이날 촬영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마무리되었다.

난 끝내 보조 출연한 영상을 보지 못했다.

스테이션에는 접근도 못 하게 했으니.

* * *

7인의 사무원 촬영은 큰 변수 없이 무사히 진행되었다.

일주일에 사흘 정도는 강행군.

이틀 정도는 일찍 끝나고 하루는 쉬는 일정이었다.

한겨울에는 양수리 세트장에서 몰아서 찍기에 폭설과 추위 변수는 상관없었다.

그렇게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다음 해가 되었다.

평소에는 애인처럼 굴던 서연이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제니스 공연 후에 집에만 있었다고 한다. 멤버들은 각자 친구들과 파티를 했다는데 혼자 숙소에서 뭘 했던 건지.

문자를 보냈더니 그냥 쉬고 있다는 시무룩한 답장.

뭔가 서운한 게 있는 것 같은데 그날 내가 촬영차 지방에 가 있어서 풀어 줄 수가 없었다.

이후 제니스는 각 방송사 연말 가요제에 출연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한 달 전부터 세 방송사의 연말 시상식 공연을 각각 연습하고, 연초에 있을 음악시상식 준비까지 해야 했다. 아이돌이 1년 중 가장 바쁘다는 이른바 지옥 주다.

그렇게 해를 넘기고 나자 제니스 멤버들 모두 나가떨어졌다. 무명일 땐 그런 가요제에 나가지도 못해서 텔레비전으로만 봤다고 하던데, 막상 겪어보니 사람이 할 짓이 아니란다.

그리하여 1월 말인 지금.

7인의 사무원 67회차가 진행되고 있었다.

어느덧 촬영 막바지다.

지방의 호텔 라운지에서 촬영이 이어졌다.

팀 계약직이 대기업 후계자에게 금융 사기를 치는 장면. 대기업 후계자가 홍콩으로 비자금을 빼돌리는데 그 돈을 가로채는 작전이었다.

사기꾼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브로커. 과장은 홍콩의 자금세탁 전문가. 강 대리는 중국의 페이퍼 컴퍼니 대표. 해커는 후계자의 컴퓨터를 리모트 콘트롤하고.

사기꾼과 그룹 후계자가 앉아 있다.

먼저 마스터 쇼트부터.

“씬 165에 3에 2!”

“액션!”

사기꾼이 노트북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

“우선 전무님은 그룹의 신사업을 추진하십시오. 그런 다음 여기 중국의 여러 회사와 무역 거래를 하시면 됩니다. 물론 저희가 설립한 회사들이지요. 전무님이 이 회사들로부터 원자재를 수입하시면 되는데, 컨테이너 안에 있는 자재들은 아무 가치도 없는 폐품들이 대부분입니다. 정식으로 원장 작성해서 거래 대금 입금하시면, 이 중국 회사들이 거래 대금을 홍콩의 페이퍼 컴퍼니에 투자를 합니다.”

“돈이 좀 모이면 그 홍콩 회사는 사기나 횡령 등으로 파산하겠고?”

“그렇지요. 중국 회사들도 잘못된 투자로 파산하는 거지요. 또한 국내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서도 그 홍콩의 회사에 투자했다가 실패하는 형식으로 가면 되는 겁니다. 현재 중국에 마련된 회사는 20개 회사. 약 2천억을 전무 님 개인 자금으로 만드실 수 있는 겁니다. 한 열 차례 더 하시면.”

“2조 정도는 뺄 수 있겠군.”

“바로 그거지요. 나아가 그렇게 확보한 외부 자금으로 홍콩에서 헤지펀드를 설립한 뒤 대화물산의 지분을 확보하면 대화그룹 전체가 전무님 것이 되는 겁니다.”

“너무 앞서 가진 마시고.”

후계자와 사기꾼이 씩 웃었다.

후계자가 다시 물었다.

“홍콩의 미스터 창이라는 자는 어떻게 믿지?”

“그분이 굴리는 돈이 서구 기업과 중국 공산당 간부들 돈을 합쳐 1000억 달러가 넘습니다. 홍콩 정부 관리까지 그분에게 돈을 맡기는데 누가 그분에게 손을 대겠습니까. 홍콩에는 하루에도 수백 개 회사가 파산을 합니다. 그 분이 관리하는 사업체가 수천 개에 이르기도 하고요. 한국에선 외국에 나간 돈을 추적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도 않지요.”

“흠…….”

“일주일 후에 저와 함께 홍콩에 가서 미스터 창을 만납시다. 그쪽에서도 이쪽의 진의와 안전을 확인하셔야 하니까요. 그분 회사로 목표한 자금이 모이면, 수수료를 지급하고 전무님이 헤지펀드를 설립하시면 되는 거지요. 당연히 미스터 창은 그 자금 못 건드립니다. 전무님께서 그 페이퍼 컴퍼니 명의의 계좌와 비밀번호를 만들고 관리하니까요.”

“컷! 다시 갑니다.”

대사가 워낙 길다 보니 발음이 안 좋은 부분이 나온다.

다시 같은 장면을 찍었다.

힘든 촬영도 아니고 연기력이 필요한 장면도 아니다.

딱히 내가 현장을 지키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웬만한 일은 상일이와 제작부원들이 다하고 있고.

마침 서연에게서 밥을 먹자는 연락이 왔다.

촬영 없는 토요일이라 심심했던 듯.

[지금 어디야?]

[숙소요. 왜요? 데이트 하게?]

[그래. 간만에 대학로에 가보고 싶네]

[알았어요.]

정효주를 만난 이후 서연이 약간 변했다.

날 좋아한다는 마음을 은근슬쩍 표현한다.

그래서 나도 거리낌 없이 대했다.

데이트 하자고 하면. 그래. 이런 식으로.

고백만 안 했지 반쯤 사귀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나도 서연도 정식으로 만나는 건 좀 부담이다.

지금 이대로는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사귀다가 헤어지면 그걸로 끝이다.

제니스는 해체될 테고, 서연도 더는 내 배우가 아닐 테니.

나보다도 그녀가 그걸 더 걱정하는 눈치다.

어쩌면 나와 오랫동안 함께하려고 일부러 사귀자는 말을 안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도 약간은 그게 우려가 되어서 고백을 안 한 것도 있고.

그러다 보니 지금의 관계가 편하고 좋다.

애인이 생기면 이것저것 챙겨줘야 하고, 매일 전화해서 어디서 뭘 하는지 알려줘야 한다. 일에 바쁘다 보면 소홀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면 다투게 되는 거고. 아무리 이해심이 많은 서연일지라도 여자는 여자다. 이해해도 섭섭한 건 어쩔 수 없으니.

친구 같은 관계로 가다 보면 좋은 날이 오겠지.

사실 어제 대학로를 거니는 꿈을 꾸었다.

거기서 키 크고 마른 남자의 실루엣을 봤다.

얼굴을 가리는 곱슬곱슬한 단발머리.

하얗고 기다란 손.

지금 생각해보면 서연을 만날 때도 며칠 전 꿈을 꾸었다. 당시엔 그냥 꿈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니 일종의 예지몽이었다는 걸 알았다.

그 꿈의 영향으로 이유현을 만나겠다고 가로수 길에서 마냥 기다렸던 거다. 결과적으론 그 사람이 서연이었지만.

그런데 비슷한 꿈을 어제도 꾸었다.

서연에 이어 두 번째.

여자가 아닌 남자라면 하나밖에 더 있겠나.

우연히 맞아떨어진 걸 오해한 게 아니라면.

이건 코어의 영향으로 봐야 했다.

정말 그런지 가보면 알겠지.

* * *

나와 서연은 한가하게 대학로를 돌아다녔다.

서연은 중무장한 상태였다. 패딩을 입고 목도리를 얼굴까지 둘둘 말고 모자까지 썼다. 1년 전만 해도 마음 놓고 돌아다니던 그녀였는데 이젠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서 얼굴을 내놓고 다닐 수가 없었다. 서연도 이런 자신이 어색하기만 하고.

그렇게 쏘다니고 있는데 서연이 노점상에서 멈췄다.

그녀가 갈색 목도리를 하나 고르더니 내 목에 걸어준다.

“되게 잘 어울린다. 이거 해요.”

“그래.”

지갑을 꺼내려 하자 서연이 얼른 자신의 지갑을 꺼내 돈을 지불했다. 사주려는 걸 굳이 마다하진 않았다.

서연의 사정이 넉넉해진 것도 작년과 다른 점이다.

드라마 촬영으로 2억 4천을 번 그녀다.

이후 몇 차례 CF 촬영으로도 3억 가까이 벌었다.

7인의 사무원으로 번 돈도 5천만 원이나 되고.

덕분에 회사 재정이 좋아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내게 목도리를 걸어준 서연이 슬쩍 팔짱을 꼈다.

얘가 갈수록 대담해지네.

그렇게 좀 더 걷다가 마로니에 공원 벤치에 앉았다.

얼굴을 가렸어도 서연을 알아보는 사람은 꽤 있었다.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서연을 보다가 발을 동동 구르는 여고생들도 있고. 대놓고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고.

몇 명이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해서 서연이 사진을 찍어 주었다. 그러자 더욱 많은 사람이 몰려왔다.

결국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손님이 별로 없는 커피점 2층으로 들어갔다.

창을 보며 등지고 있으니 서연을 못 알아본다.

서연이 팬들 때문에 혼난 얼굴이지만 기분은 좋아 보였다.

“휴… 귀찮다고 하면 배부른 소리겠죠?”

“벌써 귀찮으면 어떡해?”

“난 괜찮은데 오빠한텐 방해되잖아요.”

“괜찮아. 팬 관리도 연예인의 업무지. 가장 큰 업무.”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어릴 적 어느 때가 생각났다.

“나 어릴 적에 신문 배달 알바 했거든. 날씨 좋은 날엔 배달하기 괜찮은데 비 오는 날은 정말 힘들었어. 특히 장마철이나 폭설 내린 날은 눈물이 다 날 정도로 힘들었지. 하루는 너무 힘들어서 직업 배달원 아저씨한테 물어봤어. 안 힘드냐고? 그 분이 뭐라고 하셨는 줄 알아?”

“글쎄요. 나도 힘들어?”

“그분이 웃으면서 그러더라. 내가 받는 월급에는 맑은 날 일한 것과 비 오는 날 일한 것이 포함된 거라고. 그러니 비 와서 고생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평소에 편하게 배달한 걸 먼저 생각하라고 하셨어.”

“그 뒤로는 별로 안 힘들었어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비가 안 오면 고맙고. 비가 오면 아 오늘이 그날이구나 했지. 신문 배달을 할 때 당연하게 겪는 그날인 거지. 365일 중 300일은 편하고, 65일은 힘든 게 신문 배달이라는 일이었던 거야. 그 뒤로는 날씨 탓 안 했어.”

이번엔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저씨가 인생을 말씀하신 거네요.”

“그런 셈이지. 살다 보면 가끔 힘든 날이 오지만, 그것도 긴 인생에 포함된 일이니까. 오늘 힘들다고 인생 자체를 부정할 순 없잖아. 힘든 날 넘기면 또 좋은 날 오는 거고. 그날 처음으로 사는 게 뭘까? 하고 고민에 빠졌지.”

“중학교 2학년 때 아니에요?”

“맞아.”

나도 서연도 킥킥대며 웃었다.

서연이 날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그러니까, 팬을 대하는 것도 연예인이라는 직업에 포함된 일인 거네요. 힘들어도 해야 하는 불평할 수 없는 일.”

“그래.”

인기를 누리는 연예인은 유명세도 감당해야 하는 거지.

서연을 보고 있으니 그녀가 잘 처신할 것으로 보였다.

드라마 찍을 때 참았던 것만 봐도.

단골 해장국집 주인은 진상 손님을 만나도 불평하지 않았다. 어쩌다 진상을 만나는 것이 장사라는 걸 아시는 거지. 그럴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본인 손해이니 그러려니 하는 거고. 세상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다.

말만 쉽지 쉽게 이룰 경지가 아니다.

“왜 그렇게 웃어요?”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둘이서 커피를 홀짝홀짝 마셨다.

30분가량 커피점에 있다가 다시 나왔다.

“우리 연극 봐요.”

“연극?”

그래. 대학로에 왔으니 연극 보는 것도 좋지.

여러 포스터가 붙은 곳으로 갔다.

십여 개의 연극 포스터를 죽 훑어 보았다.

가만. 왜 그 생각을 못했지?

혹시 연극배우 중에 나와 인연이 있는 사람이 있나?

포스터를 가만히 보았다.

그때 지금까지 없었던 현상이 일어났다.

여러 포스터 중에 빛이 나는 느낌이 드는 연극이 있었다.

호감이 이제는 빛의 형태로 내 눈에 보였던 거다.

정말 코어의 영향 때문이었던 걸까.

[아등바등]

유명 배우는 전혀 안 나오는 개그 연극이다.

살인마로 오인을 받은 남자의 좌충우돌 소동극.

한데 서연도 그 포스터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왜 그래? 재밌을 거 같아?”

“아니요. 뭔가 느낌이 이상한데요?”

“어떤 느낌?”

“날 보러 와줘요. 하고 말하는 거 같아요.”

이건 또 뭐지?

코어 능력이 서연에게 전이되기라도 했나?

아니면 주파수 연결로 비슷한 걸 느끼는 건가.

“괜히 좋아 보이고 그래?”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진 않지만 나와 서연 사이에 보이지 않는 끈 같은 게 있나 보다.

“저 연극 볼까?”

“네. 가요.”

* * *

소극장 KD 아트홀에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6시 30분 공연 때문인지 관객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표 두 장을 구입하여 다른 관객과 함께 객석으로 들어갔다.

서연은 연극을 몇 번 보러왔지만 난 처음이었다.

무대는 작았고, 객석도 그리 크진 않았다.

얼마 뒤 암전이 되었다.

곧 연극이 시작되었는데 연극은 그냥 그랬다.

간간이 웃음이 터지고는 있었으나 좀 허술했다.

극본도 엉성하고, 억지로 짜내는 웃음도 거부감이 들고.

연극이기보다는 개그쇼였다.

그렇다 보니 연기를 잘하는지 어떤지도 영 모르겠고.

주연배우와 단역들까지 다 봤다.

그들에게선 전혀 호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왜 아직도 호감이 남아 있을까 의문을 품던 그때였다.

가짜 살인마와 진짜 살인마가 벌이는 소동.

진짜 살인마가 등장하는 그 순간.

웃음이 멈추고 관객은 긴장했다.

정말 기이하고 특이한 분위기를 가진 남자였다.

잘 웃던 관객이 피칠갑이 된 그 배우가 나오자 숨을 죽였다. 개그쇼가 갑자기 스릴러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 배우가 살인하려는 걸 남자 주인공이 막고, 둘이 우스꽝스러운 격투를 벌이곤 남자 주인공이 살인마를 죽이면서 일이 더 꼬이는 그런 상황이다. 관객들은 웃지 않았다. 다들 대사도 없는 그 단역 배우만 보고 있을 뿐.

서연을 보았다.

그녀도 마찬가지.

단역 배우가 나타났을 때 관객이 긴장한 것은 관객 대부분이 여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배우가 너무나도 잘생긴 까닭이었다.

정말 코어가 내 인연을 전달했던 것일까.

꿈에서 본 그 남자와 얼추 닮았다.

실루엣은 틀림없는 그 남자였다.

마른 몸에 188쯤 되는 키. 구부정한 등과 넓은 어깨.

눈을 가리는 긴 앞머리.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

가끔 드러나는 두 눈에는 짙은 공허가 배여 있다.

멋있게 보이려는 게 아니라 실제로 지독하게 고독한 사람이다. 손짓 하나만으로 마음의 상처가 보인다. 무표정한 얼굴에는 삶의 애착도, 욕망도 비치지 않는다.

혈액에 우수가 흐른다고 해야 하나.

삶을 반쯤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다.

그 처연한 눈빛으로 객석을 볼 때는 여자 관객들이 ‘아…’하는 신음까지 흘렸다. 모성애와 연민을 자극하는 눈이다.

어떤 사연과 경험이 사람을 이토록 처절하고 처량하게 만들 수가 있을까. 바람에 흔들리는 가느다란 촛불 같은 느낌. 곧 꺼질 것만 같은 위기감.

조각 같은 미남은 아니다.

선이 얇고 유약하며 정신은 나약해 보인다.

그 연약한 외모 안에 상처 입은 늑대가 보인다.

그랬다. 여자 관객들은 저 배우를 보러 온 거였다.

강한 호감의 근원은 저 배우였다.

저 남자를 잡아야 한다.

그러면 내 그늘에서 초특급 스타가 나온다.

객석이 밝아지자마자 일어나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로 향하는 내 마음마저 설렌다.

저런 대물 원석이 어디에 있다가 내 앞에 툭 나타난 건지. 대사도 없는 단역을 하고 있고, 입소문도 거의 나질 않았으니 연기는 이제 막 시작했을 터다.

하고많은 사람 중에 무슨 원인으로 코어가 그 단역 배우를 내게 알려준 것인지 의문이다. 그간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그 친구가 포착되기라도 한 건가.

연기력. 안 봐도 된다.

가진 모든 걸 다 잃은 듯한 그 처연한 배우가 다른 일이 아닌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적어도 연기를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니까.

어디서 목수 일을 하고 있지 않은 게 어디냐.

대기실로 가자 그 친구가 안 보였다.

팸플릿을 들고 나가는 한 배우를 잡았다.

“혹시 살인마 역할 했던 배우 어디에 있죠?”

“건하요?”

“네.”

“그런데 누구시죠?”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청년이 명함을 보더니 살포시 웃었다.

드디어 올 게 왔다는 듯.

“방금 나갔어요. 바로 나가면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예. 고맙습니다.”

극장에서 나가 왼쪽 골목으로 걸었다.

그 단역 배우가 골목 벽에 붙은 채 걷고 있었다.

뭔가에 겁을 먹은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행동이 어째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빠르게 따라붙었다.

“잠깐만요.”

단역배우가 흠칫 놀라더니 멈췄다.

뒤돌아 보지도 않는다.

행여 놀랄까 봐 조심스럽게 앞에 섰다.

그제야 가만히 날 보곤 다시 고개를 숙인다.

역시 정상이 아니다.

“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연극 잘 봤어요. 저 영화 하는 사람인데 그쪽한테 관심이 좀 있어서요.”

고개도 들지 않고 대꾸도 없다.

날 피하려는 기색이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연극배우가 된 거지?

“저, 이름이 뭐죠?”

그제야 입이 열렸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윤건하… 입니다.”

이름마저 좋네.

남자인 내가 봐도 한눈에 반할 외모다.

지나가는 여성들이 저도 모르게 돌아볼 정도.

“한 10분 대화 좀 할 수 있을까요?”

“왜… 그러세요?”

목이 잠긴 듯한 차분한 중저음이다.

오랫동안 말 안 하고 살아온 것 같은.

“긴히 할 말이 있습니다. 10분이면 돼요.”

그가 꽤 길게 망설였다.

결국 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윤건하라는 단역 배우를 카페로 데려가려 했으나 그가 극구 거절했다. 사람 많은 곳은 질색인 모양이었다.

본인이 편한 곳으로 가자고 했더니 주택가로 들어갔다.

가면서 코어를 발동하여 윤건하를 분석했다.

그런데 뜨는 게 거의 없다.

나이와 신체. 인상 정도.

이 친구가 스마트 폰을 가지고 있고, SNS라도 한다면 그런 걸 토대로 뭘 알겠는데 전혀 안 한다는 의미다.

입은 옷과 행동 등으로 추정할 수 있는 건.

이 친구가 무척 외롭고 고립된 생활을 했다는 것.

다만 한 가지.

가까이 있으니 호감의 강도가 굉장히 컸다.

그동안 가장 강했던 사람은 단연코 서연이다.

그다음 이 대표님과 투자사 사장님이다.

김판수는 그다음이고.

그런데 이 친구는 서연 다음이다.

게다가 윤건하와 주파수가 연결된 듯.

내 마음으로 지독한 공허함이 밀려들어 온다.

내 머릿속마저도 텅 비어 버릴 지경이다.

날 대하는 불편함과 두려움. 지나가는 사람이 있을 때는 마치 발가벗겨진 채 구경거리가 된 듯한 수치심과 불안함까지도 전해진다.

어느 고깃집 뒷골목에 그와 마주 보고 섰다.

윤건하에게 명함 두 개를 꺼내 내밀었다.

하나는 로즈 엔터 본부장. 하나는 영화사 실장.

윤건하는 아무 감흥도 없이 내 명함을 보았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저 연기 할 줄 몰라요.”

자폐 특성을 보였으나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발음도 목소리도 분명했으니.

“연극배우가 아닌가요?”

윤건하가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뒤에야 그의 입이 열렸다.

“알바… 하고 있었어요.”

알바라는 말에 기가 찼다.

정식 연극배우도 수입이 형편없는데 5분 정도 출연하는 대사도 없는 알바가 받아야 얼마를 받겠나.

이 친구 모습을 봐선 일반 알바도 어렵겠지만.

“굳이 연극 알바를 하는 이유가?”

“이유는 말하고 싶지 않아요. 죄송합니다.”

윤건하가 가버리려 했다.

급히 말했다.

“사연을 좀 들어봐도 될까요? 귀찮게 하려는 게 아닙니다. 더 나은 알바를 소개할 수도 있어요.”

내 말에 윤건하가 돌아보았다.

치렁치렁 늘어뜨린 앞머리. 멋이 아니라 머리를 안 잘랐을 뿐이다. 곱슬곱슬한 건 원래 그런 것 같고.

“잠깐 출연하면 월세 안 내도 돼서 하는 거예요. 다른 알바도 하기 싫습니다.”

윤건하가 그 말을 끝으로 걸어가 버렸다.

나와 서연은 멍하게 그를 보고만 있었다.

서연이 먼저 입을 뗐다.

“저분… 무슨 마음의 상처가 있는 거 같아요. 월세를 안 내도 된다는 걸 보면 집주인이 극단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일단 가보자.”

걸어가는 윤건하를 가만히 보았다.

또 벽에 붙은 채 걸어가고 있다. 행동이 부자연스럽고 사람들 눈치를 본다. 매우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대인기피증이 있는 건가.

아무래도 무슨 정신 질환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윤건하가 한 고깃집으로 들어갔다. 고깃집 주인에게 고개를 푹 숙인 채 인사 아닌 인사를 하고는 건물로 올라갔다.

고깃집 주인이 계단을 오르는 윤건하를 올려다본다.

* * *

고깃집 주인은 윤건하의 이모부였다.

연극 아등바등의 극장주이기도 했고.

명함을 주고 윤건하에 대해 물어볼 게 있다고 하자, 선뜻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내심 반기는 눈치였다.

윤건하의 이모부가 술술 말을 풀었다.

“나도 집사람도 건하 때문에 걱정이 많아요. 도무지 집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하니.”

“월세 이야기는 핑계였군요.”

“네. 4년 전에 옥탑방을 내줬는데 이번에 처음 밖으로 나온 겁니다. 방에 틀어박혀서 밥도 안 먹고 씻지도 않아서 집사람이 고생을 좀 했어요.”

“부모님이 안 계신가요?”

윤건하 이모부가 날 지그시 보다가 말을 이었다.

“4년 전에 사고로 두 분 다 돌아가셨어요. 화재 사고였는데 건하 여자친구도 그때 죽었죠. 불이 났을 때 혼자 살아남았는데 자책과 죄책감에 시달리다 몹쓸 병을 얻었어요. 그 뒤로 방에 틀어박혀서 안 나오더니 병이 악화됐네요.”

나와 서연이 서로 보았다.

윤건하의 상처가 바로 그거였다.

사건 이후 마음의 병을 얻은 채 은둔형 외톨이가 되었던 모양이었다. 그런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연기를 한다는 게 오히려 놀랍다.

“병원에 안 가봤습니까?”

“병원에 가질 않아서 의사 선생님을 모셨는데 복합적인 정신 질환이라고 하더군요. 피해망상. 자기혐오. 대인공포. 불안장애가 있대요. 지금은 그나마 좀 나아진 편입니다. 말이야 정신병이지 사실 일반인과 별 차이는 없습니다. 이모부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사람과 세상을 매우 무서워하는 아이라고 보시면 돼요.”

이모부 말대로 그래 보인다.

말을 할 때 정상인처럼 보였으니까.

“그런 친구가 연기는 어떻게 한 거죠?”

“그나마 사람들 앞에 설 수 있는 일이 연기였거든요. 건하가 연극 하는 내 영향을 받아서 고등학교 때부터 연극을 했어요. 지방대 연극영화과에도 들어갔고요. 그래서 제가 억지로라도 연기를 시켜본 겁니다. 혹시라도 병이 호전될까 싶어서요.”

“경과는 좀 있었습니까?”

“다행히 좀 좋아지긴 했습니다. 첫 무대에 설 때는 정말 애를 먹었는데 보름 지나니 이젠 곧잘 한다고 하네요. 본인 스스로 병을 이겨내려는 의지가 있어요. 그래서 하기로 한 겁니다. 월세도 안 받고 살았으니 미안한 마음도 있었겠죠.”

“연기를 좋아하는 거죠?”

“그럼요. 세상과 사람을 무서워해서 그렇지.”

죄책감과 마음의 상처가 어느 정도는 치유된 것 같다.

4년 만에 집에서 나온 것도 이제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갈 생각이 있지만 두려웠는데, 이모부가 기회와 동기를 부여했던 거다.

이모부가 그를 밖으로 끄집어냈다면.

나는 윤건하를 정상적으로 살게 할 수 있다.

“윤건하 씨한테 전해주세요. 제가 건하 씨를 남들처럼 살게 해줄 수 있다고요. 제가 건하 씨를 배우로 만들고, 건하 씨의 상처도 치유할 겁니다.”

이모부가 날 가만히 보았다.

그가 먹먹한 표정으로 날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요. 이렇게 신경 써 주셔서.”

“이제 세상에 한 걸음 나왔으니 얼마든지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윤건하를 제대로 살게 할 자신이 있다.

진심으로 윤건하의 친구가 된다면.

진심으로 사람의 상처를 대한다면.

* * *

윤건하를 만나고 온 지 8일이 지났다.

7인의 사무원 촬영은 이제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남은 회차는 오늘 포함 2회 차.

부산 김해공항에 와 있었다.

대기업 후계자에게 대형 사기를 치고 홍콩에서 넘어온 계약직 팀을 찍는다. 홍콩에서 촬영했는데 오상일만 따라가고 난 안 갔다. 스태프도 최소 인원으로 가서 3회차만 찍고 왔다. 홍콩 외경과 사무실, 미팅 장면만 찍는 간단한 촬영이었다. 촬영 장비는 홍콩 현지에서 빌렸고.

촬영이 세팅되는 공항 인근에 낯익은 밴이 왔다.

그 밴에서 서연이 내렸다.

이젠 배우의 향기가 물씬 나는 서연이다.

로즈 엔터가 커져서 서연의 전담 코디도 붙어 있다.

서연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나와 서연의 관계가 워낙 돈독하다 보니 사귀는 거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는 한다. 그래도 국경의 끝 때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비밀 연애하지 말고 당당하게 사귀라는 눈치.

“드디어 내일 마지막 촬영이네요.”

“응. 이번에도 다행히 여기까지 잘 왔네.”

“아, 윤건하 씨한테 연락 안 왔어요?”

“문자 보냈더니 답장은 왔어. 아직 잘 모르겠대.”

“마음이 아주 없는 건 아니네요.”

“응. 두려운 거야. 사람들 앞에 서는 게.”

내 착각이 아니라 윤건하도 지금 용기를 내고 있다.

마음의 준비를 하는 중이라고 할까.

그의 이모가 직접 전화해서 고맙다고 몇 번이나 한 걸 보면 며칠 사이 좀 더 나아진 모양이다. 이모부가 윤건하에게 스마트폰도 사주었고.

연극은 이미 그만두었다.

극단 대표가 계약도 하지 않고 윤건하를 출연시킨 터라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건하 씨 심정이 어떨까 생각해 봤는데,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

“무슨 경험?”

“데뷔 초에 드림콘서트 무대에 선 적 있거든요. 그땐 제니스가 주목받는 신인으로 대우받던 때였어요. 비주얼 걸그룹이 나왔다면서. 덕분에 그 큰 무대에 설 수가 있었는데.”

“망했었지?”

서연이 민망하게 웃었다.

“네. 음악방송 몇 번 돌고 처음으로 선 대형 무대였는데 무대에서 두 번이나 넘어지고, 음이탈 나고 인이어 고장 나서 난리 나고. 휴… 그때 생각만 하면 아직도 식은땀 나요.”

“그때 너무 긴장했어.”

“다들 심각할 정도로 긴장했어요. 우리가 연습량이 충분했던 것도 아니고, 데뷔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 큰 무대에 설 줄 누가 알았겠어요. 연희랑 세라는 너무 떨어서 울기까지 했다니까요. 리허설할 때는 제니스 빼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는데 성 대표님이 싹싹 빌어서 선 무대였죠. 그때 안 하는 게 나았어요.”

그 무대 본 적 있다.

핫한 아이돌은 거의 모두 나오는 초대형 무대다.

갓 데뷔한 신인이 그런 무대에서 실수를 연발하는 바람 아이돌 팬들에게 완전히 찍혀 버렸다. 그 뒤로는 뭘 해도 욕을 먹었다.

서연 말대로 안 하는 게 나은 무대였다.

내가 이른 나이에 시나리오 공모전에 당선된 것이 독이 되었던 것처럼, 큰 기회라 여겼던 그 무대가 제니스에겐 지우기 힘든 낙인이 되고 말았다.

서연이 이어 말했다.

“건하 씨 마음이 그때 우리 같아요. 기회는 왔는데 막상 나가자니 너무도 무서운 거. 너무 긴장해서 실수하고 말았지만, 도움이 된 것도 있어요.”

“어떤 도움?”

“이젠 아무리 큰 무대에 서도 긴장 안 해요. 미주가 늘 하는 말이 있어요. 이미 망했는데 더 망할 것도 없다고. 그러면서 깔깔거리면서 무대에 서거든요. 다들 강심장 다 됐어요.”

윤건하도 큰 벽 하나만 넘으면 달라질 것 같다.

그 큰 벽이 무엇이면 좋을까.

윤건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 사람들이 자신을 손가락질한다는 망상을 깨부숴야 한다. 그리고 자신감을 가지게 해야 한다. 심지어 본인이 괴물이 아니라 꽃미남이라는 걸 알게 해야 한다.

내일 마지막 촬영은 모든 일이 끝난 후.

죽은 형사를 대신해 남은 6명이 형사의 딸과 한가한 한때를 보내는 장면을 찍는다. 대기업 후계자의 비자금 700억을 빼돌리고, 국내 여러 시설에 빼돌린 돈 일부를 무기명 후원금으로 보냈다. 그 기업의 온갖 비리와 범죄도 까발렸고.

그리고 해안가 마을에 집을 사서 모여 산다.

그 마지막 장면에 건하를 출연시키는 건 어떨까.

형사의 딸이 있었던 곳을 장애인 시설로 바꾼다.

그곳에 있으면서 자폐아인 건하와 친했던 것으로.

윤건하가 새로운 집으로 찾아온 장면을 추가하면 된다.

건하는 형사 딸이 믿고 의지하는 친구고.

감독에게 갔다.

“장면 좀 추가하면 안 될까요?”

“무슨 장면?”

“6명이 형사 딸을 돌보기는 해도 매일 같이 살 수는 없잖아요. 딸이 6명을 잘 모르기도 하고요.”

“그거야 그렇지. 그래서 뉘앙스만 주자는 거잖아?”

“예. 그걸 조금 더 확실하게 마무리하자는 거죠.”

“딸이 믿을 만한 누군가와 함께 사는 걸로?”

“맞습니다. 누가 봐도 믿을 수 있는 친구. 딸이 시설에 있을 때 유일하게 의지하고 친했던 자폐 청년입니다. 딱 딸과 같은 정신 연령 수준의 친구죠.”

감독이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마무리가 더 낫네. 관객이 더 안심할 수 있을 것 같고. 6명이 딸의 보호자가 되어도 같이 살기는 어려우니까 말이야. 입양을 보낼 수도 없고.”

“어때요?”

“그렇게 가자. 재촬영하고 마지막 장면은 약간만 바꾸면 되니까. 당장 써라. 오늘 배우들에게 나눠줘야 돼.”

“딸이 있던 시설은 보육원이 아닌 장애인 시설로 하고요. 말씀드린 부분을 대사로 처리할 겁니다.”

“그래.”

곧바로 윤건하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예요. 이제는 고민할 필요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날 믿고, 내게 의지하고 큰 산 하나 넘읍시다. 그 산만 넘으면 건하 씨도 달라질 거예요.]

한참 뒤에야 답장이 왔다.

[무슨 일인데요?]

[영화 마지막 장면에 잠깐만 출연해요. 대사도 없습니다. 그냥 아이처럼 웃는 장면만 찍으면 돼요.]

[저 영화 어떻게 찍는지 몰라요.]

[감독님이 하라는 대로 하면 돼요. 앞으로 살면서 단 한 번. 마지막으로 단 한 번 용기를 낸다고 생각해요. 건하 씨 군대 갈 때 두려웠죠? 막상 제대하고 나니 군 생활 별 거 없었고요. 단단히 마음먹고 군대 훈련소에 들어간다는 각오를 해 봐요.]

대답이 없다.

다시 문자를 보냈다.

[눈 딱 감고 험한 산 하나 넘어봅시다. 어차피 세상에 나갈 거라고 마음먹었으면 지금이 좋아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한참 뒤에 답장이 왔다.

[왜 저한테 잘해주세요?]

[동생이 하나 있어요. 맨날 싸우다가도 동생이 아프면 형으로서 보살펴 주는 게 당연한 거죠. 건하 씨도 마음이 아픈 거 같아서 내가 보살펴 주고 싶어서 그래요. 내가 건하 씨한테 형이 될 수도 있죠.]

이후로 답장이 없었다.

나와 서연은 나란히 앉아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두려워서 연락을 끊은 모양이다. 전화를 해봐도 받지를 않고. 괜히 형이 된다 어쩐다 말을 꺼내서 그런 걸까.

“내가 쓸데없는 말을 했나.”

서연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연락 올 거에요.”

문자를 보내는 사이 촬영이 진행되었다.

변장한 6인이 당당하게 입국하는 장면.

언론사에선 연일 대기업의 비리를 보도하고 있고.

아무래도 윤건하가 용기를 내는 게 어려운 모양이다.

이건 보통 사람의 용기와는 다른 차원의….

순간 문자가 왔다.

[저 할게요. 어떻게 해야 하죠?]

[잘했어요. 내가 갈 테니 쉬고 있어요. 정말 잘했어요.]

다시 대꾸가 없다.

마음을 바꾼 건가 싶어 문자를 보내려는데.

답장이 왔다.

[고마워요.]

바로 답장을 쓰려는데 다시 문자가 왔다.

[형...]

형….

갑자기 왜 이렇게 복받치지?

지성이에게서 형이란 말을 평생 들었던 나다.

그 형이라는 말을 듣고 이렇게 감격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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