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100일 후
제니스 다큐의 파급 효과가 생각보다 컸다.
홍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다.
방송사가 집중 광고를 하자 본방사수를 했던 시청자들이 상당히 많았던 것이다.
1화 반응은 이전 제니스라면 겪지 않았을 호응이 있었고 유명 아이돌만큼이나 댓글이 많았다. 예상대로 사막 장면과 시드니 쇼핑 장면에 대한 반응이 좋았다.
제니스 멤버들이 청순한 스타일이 아니었네.
원래 제니스 애들이 저렇게 잘 놀았나.
대충 이런 반응이 다수였다.
그것으로 끝이다. 더는 이슈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2화가 방송되고 나선 반응이 또 달라졌다.
댓글이 거의 2배로 뛰었고, 일주일 동안 재방송을 두 번이나 해서 그 영향으로 시청률도 2배로 올랐다. 2화에서 자유분방이 뭔지 제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덩달아 다큐에 이따금 나오던 제니스 신곡에 대한 기대와 궁금증도 커졌다. 3일 전 유튜브에 올린 신곡 티저 영상의 반등도 뜨거운 편이었다.
댓글 반응을 보니 그럴 만했다.
티저에 나오는 도입부 신스 후크.
그게 뭔가 다르다는 인상을 강렬하게 준 거였다.
“형. 준비됐어.”
지성이의 부름에 연습실로 들어갔다.
임차한 넓은 연습실에 제니스 멤버들이 늘어섰다.
앞에는 지성이가 카메라를 설치해 두었다.
최종 안무를 찍어 유튜브에 올리려는 참이다.
음악이 터지듯 나오면서 멤버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찌나 다들 강행군을 벌였는지 살이 쪽 빠졌다. 그럼에도 춤에 힘이 있었다. 절도 있는 칼군무가 벌어진다.
이전 제니스 안무와는 전혀 다르다. 다른 걸그룹 안무와도 확연히 다르다. 귀엽지도, 청순하지도 않다. 파워풀하고, 그루브하다. 포인트 안무는 따라 하고 싶은 느낌이 들고.
열심히 한 흔적을 보고 있으니 괜스레 가슴이 찡했다.
멋진 포즈로 안무가 끝나자 박수가 절로 나온다.
짝짝짝짝!
“모두 수고했어요!”
“다들 수고했다!”
나도 힘차게 박수를 보냈다.
멤버들이 호흡을 고르며 포옹했다. 이전 같았으면 주저앉았을 정도로 어려운 춤인데 다들 쌩쌩했다. 체력도 좋아진 듯.
지성이에게 물었다.
“음원유통사에선 메인에 띄워 준대?”
지성이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두 곳은 3시간 정도 노출 가능한데, 가장 큰 유통사는 안 된데. 거긴 메인에 딱 3개 노출되는데, 다 그 유통사가 직접 유통한 음원들이야.”
그럴 줄 알았다.
신곡이 발표되면 음원 유통사 메인에 노출되어 홍보 효과를 봐야 하는데, 그럴 기회가 없다. 다들 자사가 유통한 음원을 메인에 걸어놓는 바람에. 그러면 최신곡 차트 외에는 신곡이 나와도 나왔는지 알 길이 없는 거다.
지성이에게 말했다.
“타이틀과 뮤비는 정확히 3일 정오에 동시에 올려. 두 번째 곡은 다음 날 12시에 올리고. 안무 연습 영상은 신곡 발표하고 일주일 후에. 뮤비 조회수부터 올려야 하니까.”
“알았어.”
* * *
외주 제작사에서 난리를 치고 3일 후.
그러니까 한 달쯤 전.
내게 막말을 들었던 작가의 보조작가를 만났다.
30대 중반의 여성작가였다.
외주 제작사 대표가 내 의견대로 하기로 했다.
시놉시스와 대본이 안 좋으면 없던 일로 하면 되니까.
그 대표가 보조작가에게 내 소개를 안 한 모양이었다.
그 망할 작가가 무슨 해코지라도 할 거라고 봤는지.
‘윌 메이드에서 이번에 작가님 데뷔작을 고려하십니다.’
이 한 마디에 임성희라는 보조작가가 경악했다.
너무도 뜻밖의 소식이 들리면 그럴 수도 있다.
드라마 입봉이 바늘구멍 뚫고 들어가기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던 일이기도 하고.
드라마 작가는 보통 보조작가를 서너 명씩 두고 쓴다.
보조작가 시스템은 두 종류였다.
하나는 영화 스태프처럼 퍼스트와 막내로 이뤄진 팀.
다른 하나는 따로 급이 없는 보조 작가 팀.
전자는 소재가 나오면 아이디어 회의를 통해 전체 줄거리를 만들고, 각 화의 시놉을 구성한다. 그 시놉시스대로 퍼스트가 대본 작업을 한다. 그 대본을 메인 작가가 ‘다듬기’ 형식으로 완성하는 방식이다.
후자는 메인작가와 보조작가들이 회의한 다음.
메인작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쓴다.
보조작가는 말 그대로 아이디어 보조만 할 뿐.
거액의 고료를 받는 유명한 작가는 대부분 이 방식이다.
임성희 작가는 전자로 퍼스트 급이었다.
그날 그녀가 써둔 여러 작품과 소재 등을 자세히 검토하고 분석했다. 작곡가의 곡을 분석하고 조합했던 것처럼 임 작가가 써둔 소재와 작품들도 같은 과정을 거쳤다.
그리하여 임 작가 데뷔작 하나를 골랐다.
판타지 로맨스.
그날 만난 이후 매일 한두 번 메일을 주고받았다.
전체 줄거리를 짜고 각 화의 시놉시스를 만들어 나갔다.
그녀가 줄거리를 짜서 보내오면 내가 분석을 통해 수정을 하고. 그걸 임 작가가 다시 아이디어를 첨가하여 보내오고.
작업을 해보니 임성희 작가의 실력이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망할 작가의 입맛에 맞춰서 막장 드라마를 썼을 뿐.
내가 뭘 하나 던지면 척척 다 받아냈다.
그렇게 16부작 미니시리즈 시놉시스를 뽑았다.
코어로 그 시놉을 분석했는데 좋은 결과가 나왔다.
1회 시청률 6%. 3회 시청률 9%.
평균 시청률 13%.
대본이 나오면 또 달라질 터였다.
시놉만으로 알 수 없는 임 작가의 필력이 남달랐기 때문에.
여성 시청자가 좋아하는 로맨스 드라마.
나는 코어 능력을 빌려도 못 쓴다.
아니, 남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쓴다.
시놉시스를 최종 점검하고 나도 그녀도 오케이 했을 때.
임 작가가 5화까지 대본 집필에 들어갔다.
그리고 8월 3일 오늘.
오늘 중으로 대본을 보내겠다는 연락이 왔다.
* * *
로즈 엔터 식구들이 제니스 숙소에 모였다.
미주와 연희는 잠을 못 잤는지 눈이 퀭했다.
숙소 곳곳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며칠 전부터 서 PD가 제니스를 찍고 있다.
지성이가 음원유통사 창을 5개나 띄어 놓고 대기했다.
내 노트북과 지성이 노트북. 숙소 노트북까지 동원했다.
1위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다.
3년 동안 무명이었던 걸그룹이 다큐 이슈 하나로 단숨에 1위를 하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다. 역주행이면 몰라도.
코어가 두 신곡을 분석했을 때는 좋은 결과가 나왔다.
곡이 상당히 좋다는 의미인데, 이게 음원 순위 1위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제니스는 팬덤이 없으니까.
일반 대중을 상대로 승부를 볼 수밖에.
우리 목표는 1시간 안에 10위 권에 드는 것.
다큐 방영 이후 제니스에 대한 인지도가 상당히 높아졌고, 그 중 제니스 신곡을 찾아 들어보려는 사람도 늘었다.
멤버들이 초조하게 시계를 보고 있었다.
현재 시각 12시 3분.
“후…….”
자리를 함께한 방준혁 작곡가도 긴장했다.
그가 한숨을 쉬니 여기저기서 깊은숨이 나온다.
12시 정각에 곡은 이미 올라왔다. 최신 앨범을 소개하는 메인페이지에 안 뜨고 한 페이지 뒤에 있다. 유통사가 자사가 투자 및 유통하는 곡을 메인페이지에 띄우기 때문에.
마침내 12시 04분. 47초. 48초. 49초.
지성이가 말했다.
“10. 9. 8. 7. 6. 5. 4. 3. 2…”
정확히 12시 5분.
다들 머리를 맞대고 차트를 보았다.
지성이가 조심스럽게 차트를 위에서 아래로 내렸다.
1위부터 10위까지는 당연히 없다.
20위부터 30위까지도 없고.
그 아래도, 그 아래에도 없었다.
차트에 제니스 신곡이 없다.
100위에도 못 들었다.
다들 얼굴이 굳어져 버렸다.
리즈가 말했다.
“우린 광클릭 해줄 팬이 없어서 그래.”
당연한 리즈의 말에도 다들 의기소침했다.
제니스에 대한 대중의 기대가 있었으나 열성적으로 12시 정각에 찾아와 곡을 들어줄 팬은 많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대로 100위 안에도 못 들면 순위권에 오르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실패로 봐야 하는 거다.
10분이 지났다.
진땀이 났다.
10분이 지나도 안 보이면 정말 가능성이…….
“어? 다른 사이트에는 64위야?”
“어디? 어디에 오빠?”
지성이가 5대 유통사 중 하나의 화면을 보여주었다.
첫 진입 64위다.
그게 시작이었다.
또 다른 유통사에도 58위로 처음 진입하더니, 속속 차트 중간 즘에 이름이 보였다. 그러다 1위 업체의 차트에도 마침내 올라왔다.
첫 진입 36위.
최신곡 1위.
“와아아아!”
“오빠!”
멤버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방방 뛰었다.
얼마나 조바심이 났으면 36위를 보고 이리 좋아할까.
사실 제니스는 이전 곡 최고 순위가 39위였다.
그것도 10분 천하. 다음날에는 100위권 밖.
첫 진입 순위가 이전 최고 순위보다 높았던 거다.
최신곡 1위는 이번이 처음이다.
모인 이들 모두 숨을 죽인 채 화면을 보았다.
5분 간격으로 점점 순위가 올라갔다.
유튜브도 뮤직비디오도 확인했다.
20분 만에 뮤비 조회수가 1630.
다들 신기한 눈으로 댓글을 보았다.
[와! 노래 진짜 미쳤다!]
[제니스 신곡 진짜 좋아요!!]
[I just want to say. amazing!]
[ㅋㅋ 중독성 진짜 짱인듯!]
[제니스 신곡 1위 간다. ㅇㅈ?]
[this girls just got a PERFECT!]
[3번째 듣는 중. 내일이면 300번이 될 듯. ㅋㅋ]
반응은 일단 좋다.
다시 1위 유통사 차트를 보았다.
잠깐 사이 28위가 되었다.
이후 멤버들과 함께 종일 차트를 지켜보았다.
마음을 졸인 긴 기다림 끝에.
마침내 5시 50분 무렵에 9위까지 올랐다.
최고 순위였다.
그 뒤로는 12위와 15위 사이를 머물렀다.
팬덤이 아닌 일반 음악팬과 최근 제니스에 관심을 갖게 된 분들만으로 9위까지 올랐다. 9위 위에는 며칠 동안 1위를 하다 내려온 곡들이라 더 올라갈 것 같진 않았다. 내일도 신곡이 나오고, 모레도 신곡이 나오면 밀려나겠지.
다들 10위 안에 들었다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사실 다른 아이돌 곡과 비교해서 노래가 훨씬 좋았기에 내심 1위도 기대했다. 제니스 이미지를 하루아침에 바꾸긴 어렵겠지.
“방송 활동 다음 주 수요일부터지?”
지성이가 대답했다.
“응. 수요일에 MBS 뮤직. 목요일에 뮤직넷. 금요일에 KBC. 토요일에 MBS. 일요일에 SBC. 이렇게 한 바퀴 돌고. 다음 주에도 한 바퀴 돌고.”
“다 돌 수 있는 거야?”
성 대표가 대신 대답했다.
“전에는 일요일 SBC는 못했어요. 드림콘서트 때 무대 망친 이후로 찍혀서요. 이번엔 연락 드렸더니 출연 순서 정하고 연락 주신다고 하네요.”
“예. 관리 좀 잘해주세요. 지성이도 서포트 잘하고.”
6시간이 되도록 컴퓨터 모니터만 들여다보고 있었더니 피로가 몰려왔다. 여전히 댓글에 정신이 팔린 멤버들을 두고 숙소에서 나갔다.
* * *
내 반지하 방에 돌아와 캔 맥주를 마셨다.
텔레비전 시사교양 프로를 보고 있을 때 톡이 왔다.
[대본 보냈어요.]
[고생하셨어요. 확인해 볼게요.]
[네. ^^]
메일을 열어 임성희 작가가 쓴 대본을 받았다.
코어를 켠 채 대본을 읽어 보았다.
판타지 로맨스 드라마에 내 영화적 전개 방식을 적용한 대본이었다. 드라마 1화, 1화를 영화 방식으로 풀었다. 거기에 임성희 작가의 드라마 작법과 로맨스가 녹아들었다.
내용을 알고 있는데도 감탄을 연발했다.
판타지라 시청자 반응이 좀 갈릴 거라고 예상했는데, 임 작가가 정말 잘 풀어냈다. 이렇게 잘 쓰는 작가가 그 망할 작가 밑에서 5년이나 보조작가를 했다니.
임 작가 원안은 이랬다.
평범한 공시생과 사고 치고 도망 다니는 재벌가 막내아들이 우연히 동거를 하면서 벌어지는 티격태격 로맨스.
이 설정에 판타지 요소를 붙였다.
여주는 500년을 살아온 구미호 가문의 딸.
남주는 구미호를 사냥했던 법사 가문의 아들.
두 가문이 300년 전 싸움 이후 서로 내력을 모른 채 살아오다가 현대에 와서 만나게 된 거였다. 구미호 가족은 정체가 드러날까 봐 평범하게 살았고, 법사 가문은 재벌가가 된 상황.
현대식 삶에 적응한 구미호 가문과 법사 가문.
한국 최고의 재벌인 또 다른 구미호 가문.
인간과 혼혈 구미호. 정체 모를 구미호 사냥꾼.
세 가문의 싸움과 화해, 그리고 엇갈리는 사랑.
로미오와 줄리엣의 변주이자.
꽃보다 남자의 판타지 풍이며.
미 하이틴 영화 ‘트와일라잇’의 드라마 판이었다.
당연히 꽃미남이 줄줄이 나오는 드라마다.
젊은 여성층에게 먹힐 것 같았는데.
딱 기대했던 그대로였다.
남주인 법사 가문의 장남이 정말 멋있게 나온다.
남자주인공과 라이벌인 또 다른 구미호 가문의 남자도 멋있다. 전형적인 츤데레 스타일.
여주는 덜렁대면서도 씩씩한 푼수인데 매력이 있다.
서연이 맡을 여주의 여동생도 경쟁 구미호 가문의 차남과 아름답고도 아련한 사랑을 하고.
소재 리스크가 좀 있을 것으로 봤는데.
대본의 디테일이 워낙 좋았다.
여성 작가와 남성 작가의 특성이 시너지를 일으켰다.
액션과 박진감이 넘치다가도, 로맨스와 브로맨스 부분에선 여성 특유의 섬세함이 살아 있다.
내 느낌이 코어에게도 통했다.
대본을 분석하자 시청률이 훌쩍 뛰었다.
1화 9%. 3화 13%. 5화 18%.
전체 예상 시청률 21%.
요즘 드라마 시청률로는 대박이다.
이번 작품만 공동 작가로 간다.
타이틀은 임성희 작가가 먼저 그다음 나.
당연히 다음 작품은 임 작가 혼자 집필하는 거고.
[대본 아주 잘 나왔네요. 잘 될 것 같아요.]
[정말요? 정말 잘 됐으면 좋겠어요.]
[더 수정하지 말고 기다려 보세요.]
[네. 최 작가님.]
톡을 보낸 뒤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서연이 이번 드라마로 확실히 뜰 것 같다.
7인의 사무원 여주인공을 해도 될 만큼.
* * *
다음 날.
오전 10시쯤 일어나 커피를 마시며 텔레비전을 보았다.
라면이나 끓여 먹을까 싶어 주방으로 갔을 때였다.
지성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왜?”
-형! 지금 우리 신곡 1위야!
“뭐?”
-아침 9시부터 2시간 내내 1위라고!
소름이 확 돋았다.
갑자기 왜?
급히 노트북을 켜서 음원 순위를 확인했다.
제니스란 이름이 차트 그래프 1위에 있다.
어제 19시 무렵부터 점점 오르더니 3위까지 올랐다가 자정 이후 5위까지 떨어졌다. 그러다 새벽 3시부터 다시 오르기 시작했고, 오전 8시에 기존 2위를 크로스 하며 치고 올랐다.
9시에 기존 1위를 넘더니 11시인 지금까지 1위.
혹시나 싶어 다른 음원유통사 순위도 확인했다.
네 곳 중 3곳이 1위였다.
전화를 아직 끊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간밤에 무슨 일 있었어?”
-몰라. 나도 방금 음원 확인했어.
“원인 확인해 봐.”
-응!
또 다른 창을 띄워 포털을 확인했다.
포털이 원인이라면 원인이었다.
제니스 신곡 검색어 1위.
제니스와 신곡의 변신에 대한 기사 네 개.
기사도 호의적이었고, 기사에 달린 댓글도 음악 좋다는 내용이 다수였다. 깎아내리는 기존 1위 가수의 팬들도 있고.
뮤직비디오 조회수도 하룻밤 사이에 폭등했다.
특히 제니스에 대한 편견이 없는 외국인의 댓글이 대부분이었다. 한국인 댓글은 영어에 밀려 내려간 지 오래.
외국인이 왜 이렇게 많지?
댓글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유튜브 메인에 제니스 뮤직비디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니스 음악이 마음에 든 유튜브 음악 담당자 덕분이다.
단순히 운이 좋다고 볼 순 없었다.
음악이 그만큼 좋았다고 볼 수 있으니까.
지성이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형! 아침 라디오에서 DJ가 우리 신곡을 언급했나 봐.
“라디오?”
-응. 출근길 청취율 1위 라디오!
“그래, 알았다.”
바로 전화를 끊었다.
라디오 파급력이 이렇게 좋았나.
검색어 1위에 오른 것도 DJ가 호평한 덕분이다.
청취자들이 라디오에서 듣고 음원을 찾아본 듯.
유튜브 한국판의 인기 급상승 코너에도 제니스 뮤직 비디오가 올라왔다. 일반인은 물론 연예인들의 페이스북 등에도 뮤직 비디오가 링크되어 있다.
곡 자체의 인기와 사람들의 호평, 호기심 등이 물고 물리며 만들어진 결과였다. 솔직히 팬덤과 지명도만 없을 뿐 이전 1위였던 솔로가수 곡보다 제니스 신곡이 훨씬 좋다.
1시간이 넘도록 차트를 지켜보았다.
떨어지기는커녕 점점 더 이전 1위와 격차가 벌어졌다.
지붕 킥까지는 어려울 것 같지만 꽤 높이 올라갔다.
곡의 후렴구인 ‘Look at me baby. 나를 봐 baby.’
이 구절과 안무는 벌써 유행할 조짐까지 보인다.
멤버들이 시크하게 한쪽 어깨를 들썩이는 부분이다.
후크 중독성에 가장 공을 들인 부분.
사실 노래가 좋아도 제니스가 1위를 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다큐가 잘 나왔고, 그게 방송을 탔으며 방송사의 대대적인 홍보가 큰 역할을 했다. 그게 인지도와 기대감을 대폭 상승시키면서 기존 인기가수만큼의 효과를 본 것이다.
놀라운 일은 12시 15분에 또 일어났다.
타이틀 곡이 속절없이 밀려나는 걸 막기 위해 두 번째 신곡을 바로 다음 날인 오늘 정오에 올렸다.
그런데 그 곡 첫 진입이 24위였다. 10분 간격으로 3위씩 오르더니 1시간쯤 지났을 때 갑자기 치고 올랐다.
오후 2시인 지금은 5위 안에 제니스 곡이 둘이나 들어갔다.
1위. 타이틀 곡. 아이 투 아이.
4위. 펑키 곡. 달콤 섬띵.
반응 또한 타이틀과 달랐다.
아이 투 아이가 제니스의 변신에 놀랐다면.
달콤 섬띵은 제니스의 실력에 대한 칭찬 일색이었다.
1위는 하루 만에 내려왔다.
유명 아이돌이 신곡을 발표하면서 2위로 밀렸다.
며칠 더 지난 뒤에는 3위, 4위로 밀렸고.
정말 대박은 신곡이 발표되고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수요일 음악방송에서 처음 3위에 오르더니.
금요일 음악방송에선 제니스로선 처음으로 1위 다툼을 했다. 그런데 기대를 안 했던 일요일 음방에서 기적적으로 1등을 했다. 그것도 타이틀 곡이 아닌 펑키 곡으로.
제니스 멤버들의 감격은 말로 해서 뭘 하랴.
그날 생방송에서 멤버들은 뜨겁디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또한 그날 처음으로 팬덤을 발견했다.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더 많은 팬덤이었다.
그 펑키 곡도 역주행을 벌여 결국 차트 1위를 했다.
이후 제니스의 두 신곡은 두 달이 넘도록 차트 30위 안에 머물렀다.
그렇게 제니스는 인기 아이돌이 되었다.
* * *
제니스가 신곡을 발표하고 100여 일이 지났다.
많은 일이 있었다.
우선 난 시나리오 두 편을 작업했다.
하나는 70억 대 예산의 범죄 스릴러 각색.
하나는 20억 대 예산의 타임루프 스릴러 각본.
각각 계약금은 3천이었다.
당연히 1고로 끝냈는데 작품 전달은 3주 후에 보냈다.
공을 들인 것처럼.
그리고 얼마 전에 제니스 신곡 음원 수익이 들어왔다.
국내 음원유통사를 비롯하여 외국의 음악사이트와 포털의 음원 수익을 모두 합친 거였다.
석 달간 누적된 두 곡의 음원 수익 30억.
그 중 제작사 수익은 총 수익의 40%로 12억.
여기에 유튜브 뮤비 광고 수익을 합쳐 13억.
세금과 배분 떼고 제작사 수익 6억 2천4백만.
두 곡 제작과 활동에 약 1억 6천을 들였다.
이것이 기획사가 아이돌을 키우는 이유다.
투자 대비 수익이 상당히 크다 보니.
그리고 저작권 수익.
저작권자는 작사 4.5 작곡 4.5. 총수익의 9%.
이걸 작곡가 및 제니스와 나누었다.
해서 내 저작권 수입은 1억 3천5백이 나왔다.
제니스도 제법 쏠쏠했다.
실연자인 가수 몫 2.25%에 6천7백5십만.
작사 저작권 수입도 4.5%의 반인 6천7백5십만.
도합 1억 3천5백만.
여기에 음원 수익 배분 5억 6천만을 합치면.
6억 9천5백만.
세금과 투자금 정산하여 각 멤버가 1억 이상을 벌었다.
제작사 수익과 내 저작권을 합쳐서 7억이 넘었다.
여기에 국경의 끝 흥행 보너스로 3억.
간신히 투자금 10억이 만들어졌다.
시나리오를 써서 번 돈 1억 4천에 로즈 엔터 자본금으로 아직 6천이 남아 있으니 회사 운영 자금은 충분했다.
투자금 10억이 들어오자마자 나는 보스다에 투자했다.
내가 투자할 때 조약돌 픽쳐스는 이미 촬영을 시작했다.
촬영 회차 81회. 촬영 기간 115일.
현재 6회차.
CG E&M이 메인 투자 겸 배급으로 40억 투자.
CT 인베스트먼트는 공동 투자로 30억 투자.
벤처캐피털과 창투사 세 회사가 15억.
그리고 로즈 엔터가 15억.
신성영화사도 촬영이 임박했다.
촬영 회차 74회. 촬영 기간 97일.
다음 주부터 촬영이다.
이번에도 CT 인베스트먼트가 메인 투자로 25억.
그 외 6개 회사가 나머지 60억을 투자했다.
배급은 전작 배급사인 NEO.
공동 집필로 들어간 드라마는 이미 방영 중이다.
제목은 ‘여우야(女優夜)’다.
지난달 말에 시작했는데 방영 전부터 방송사에서 홍보를 열심히 해줬다. 행여 그 망할 작가가 방해라도 할까 싶었는데 전혀 그런 건 없었다. 애초에 그 작가의 영향력 따윈 없었다.
기대 속에 방영된 첫 화 시청률은 8%.
다음 화는 10%. 3화부터 시청률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어제 5화에서 15%를 찍었다. 본격적인 구미호 가문의 대립이 시작되는 내일 6화부터 더 오를 것이 확실했다.
12화에서 시청률 최고점을 찍을 거다.
드디어 남주가 여주에게 고백하는 장면이 있으니.
서연은 상당히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아 열연 중이다.
제니스 인기를 등에 업었고 연기도 일취월장했다.
주인공들의 로맨스만큼이나 서연의 로맨스도 인기가 많다.
이 드라마는 2달간 이어진다.
서연은 이 드라마 다 찍고 바로 7인의 사무원으로 넘어오기로 했다. 7인의 사무원은 서연이 안 나오는 씬부터 먼저 찍기로 했고.
* * *
신성영화사에 출근했다.
5일 전 고사를 지내고 내일모레부터 촬영이다.
촬영을 앞두고 최종 문서 작업이 한창이었다.
난 여전히 제작실장이지만 전작과 달리 이 대표님이 하던 투자나 영진위 지원 및 협찬 관련 업무를 주로 했다.
내가 하던 일은 제작부장이 된 상일이가 했고.
이번엔 선배 작가인 김영석 형이 연출부 써드가 되었다.
오천일 감독이 입봉하게 되면서 인물 담당 세컨드가 조감독이 되었고. 승철이는 바로 그 자리에 올라섰다.
영화 촬영 준비를 점검하면서 나는 보스다 촬영도 이따금 들렀다. 내가 투자한 만큼 변수가 일어나지 않는지 감시 아닌 감시를 했다. 감독이 신인이긴 했지만 촬영감독과 조명기사가 워낙 베테랑이라 연출 경험 부족은 큰 흠이 아니었다.
오늘도 나는 보스다 촬영현장에 왔다.
“컷! 다시 갑니다!”
손호영 감독이 촬영 6회차 만에 현장에 적응했다.
89명에 이르는 스태프들이 손 감독의 외침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예산이 큰 만큼 스태프도 많다.
6회차 촬영은 경쟁 조폭이 주인공 조폭 쪽을 기습하는 장면이다. 조폭 1. 조폭 2라 불리는 단역 겸 스턴트 배우들만 15명. 나머지 조폭 30여 명은 모두 보조출연자.
조감독이 외쳤다.
“황 선배님 쪽에 뒤늦게 움직이는 분이 있어요!”
보조출연 업체 반장이 외쳤다.
“레디 떨어지면 이동하기 전에 제자리 걸음 하세요! 감독님이 액션! 하기 전에 움직이고 있어야 편집점이 잡힙니다! 사열하신 분들은 가만히 서 있고요!”
“알겠습니다!”
“자자! 긴장하지들 마시고!”
배우 황정우의 외침이다.
황정우 배우 덕분에 현장 분위기가 좋다.
주연배우가 차에 오르고, 상대 조폭은 출입구 쪽으로 들어갔다. 주인공 쪽 조폭들은 그 차 양 옆으로 나열했다.
얼떨결에 조폭 대역이 되어 버린 황정우 배우가 차를 타고 나가면 경쟁 조폭이 차를 막고 기습한다.
모든 배우와 보조출연자가 대기하던 그때.
조감독의 외침이 들려왔다.
“자! 레디!”
보조출연자들이 제자리걸음을 했다.
반장이 계속 제자리 걸음을 하라며 손을 빙빙 돌린다.
“스피드!”
“롤!”
“씬 24. 3에 둘!”
“액션!”
황정우 배우가 겁을 먹은 채 부하들의 사열을 받는다.
오른팔 역할이 얼굴 펴라고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꾹꾹 찌른다. 황정우 배우가 묘하게 죽을상을 짓는다. 진짜 연기 하나는 끝내준다.
황 배우가 차에 오르고 이내 떠난다.
늘어선 조폭들은 일제히 90도 인사.
그때 주차장 입구로 경쟁 조폭들이 몰려왔다.
“우와아아아!”
“다 제껴 버려!”
“형님! 반달파 놈들입니다!”
“회장님 대피시켜! 어서!”
끼이익-
황정우 배우가 탄 차량이 급히 후진하며 빠진다.
스테디 캠이 곧장 나아가고, 두 조폭이 어지럽게 뒤섞이며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조폭들의 싸움을 찍던 스테디 캠이 뒤로 방향을 돌린다.
후진하여 멈춘 차에서 황정우 배우가 급히 내린다. 부하들의 팔에 잡힌 채 서둘러 빠져나간다.
그때 달려드는 칼잡이!
“형님!”
달려든 칼잡이가 황정우 배우의 배에 칼을 꽂는다.
순간 반사적으로 발을 뻗는 부하.
퍽-
칼잡이가 나가떨어진다.
“컷! 오케이!”
“바로 4쇼트 갑니다!”
짝짝짝짝-
박수가 터져 나온다.
동선도 완벽하게 짜였고, 합도 기가 막히다.
어떻게 이런 절묘한 카메라 동선을 짰을까.
조감독이 반장에게 갔다.
“부하 하나가 황정우 선배를 몸으로 막아주는 씬이 있는데 연기 좀 되는 분 계세요?”
반장이 보조출연자들을 돌아보았다.
“경험 있는 분들은 모두 얼굴이 나왔는데요.”
조감독이 출연자 하나를 가리키며 스크립터에게 물었다.
“저분 오전에 얼굴 나왔어?”
“저분은 2회차 때 오신 분이에요. 얼굴 찍혔죠.”
조감독이 반장을 보자 반장이 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합니다. 얼굴 찍혔는지 몰랐네요.”
“대사되는 다른 분 안계세요?”
“그게 저 다 나온 것 같은데.”
그때 김판수가 나섰다.
“조감독. 저 양반은 어때?”
스태프들이 일제히 날 보았다.
나?
엑스트라 하라고? 투자잔데?
조감독이 날 보더니 씩 웃었다.
“최 작가님. 이쪽으로 좀 와보세요.”
도망갈 수는 없으니 가긴 갔다.
조 감독이 어째 음흉한 표정으로 날 보았다.
“작가님. 출연 좀 하시죠. 일당은 드릴게요.”
“내가요? 나 연기해본 적 없는데.”
“보조출연자들도 하는 겁니다.”
뭐, 못할 것도 없다.
“하죠, 뭐.”
“예. 대사는 이겁니다. ‘회장님!’ 하고 황 선배를 막아서면서 칼침 맞는 장면이에요.”
저편에 칼을 든 사람을 보았다.
조감독이 웃었다.
“저거 촬영용 가짜 칼입니다. 안 죽어요.”
이어 조감독이 동선을 가르쳐 주었다.
황정우 배우가 대피할 때 또 칼잡이기 기습한다.
그때 돌아서며 옆구리에 칼을 맞는다.
가짜 보스가 이번 일로 보스 안 한다고 난리 치는 장면.
옷을 갈아입고 몇 번의 리허설을 했다.
“자! 갑니다. 레디!”
“액션!”
난장판이 벌어지는 와중에 황 배우 앞을 막은 채 걸었다.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된다.
칼잡이가 달려들면 황 배우 옆을 막아서면 되겠지.
이거 타이밍이 제대로 되려나.
그때 칼잡이가 옆에서 확 달려들었다.
그쪽으로 몸을 틀었다.
“컷!”
“작가님! 회장님! 하고 외쳐야죠!”
“아, 죄송합니다!”
대사를 깜박했다.
타이밍에 너무 신경을 쓰는 바람에.
“다시 갑니다! 레디!”
“액션!”
똑같은 장면.
달려드는 칼잡이! 황 배우 옆으로 막아서며!
“회장니이이임!”
퍽-
쿠당탕탕!
황 배우와 부딪히며 나자빠졌다.
“컷!”
“작가님! 칼을 맞아야죠! 황 선배와 충돌하지 말고!”
“다시 갑니다! 제자리로!”
얼굴이 빨개졌다.
이 고난도 연기를 보조출연자가 한다고?
긴장하지 말자. 이게 뭐라고 긴장 씩이나 해.
황 배우가 긴장하지 말라고 내 어깨를 두드렸다.
더 긴장된다. 젠장.
두근두근. 두근두근.
“자! 레디!”
“액션!”
다시 달려드는 칼잡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다! 타이밍 기가 막히고!
퍽-
내 옆구리에 칼이 꽂힌다.
근데 왜 이렇게 아파?
“컷!”
“작가님. 허리가 칼을 마중 나가면 어떻게 해요!”
“야, 저 양반 끌어내!”
“하하하하하!”
촬영감독의 개그에 현장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신 대표는 팔짱을 낀 채 웃고 있고.
구경 나온 CG 임원은 낄낄대고.
아우 쪽팔려.
왜 나한테 이걸 시켜!
진짜 술을 마신 것처럼 얼굴이 빨개졌다.
스태프들은 대놓고 웃고 있다.
나 골탕먹이려고 감독과 스태프들이 짠 거 아닐까.
NG를 내면 짜증이 나야지 왜 웃고들 있지?
심호흡했다.
자연스럽게.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자.
지금 내 머릿속엔 회장님에 대한 충성심만 가득할 뿐.
“레디!”
“액션!”
회장님 보호에 온 신경을 쓰며 나아갔다.
그때 들이닥치는 칼잡이!
다급히 몸으로 회장님 앞을 막았다.
“회장님!”
퍽-
옆구리에 칼을 맞고는 그대로 옆으로 기울여졌다.
회장님 부하들이 그 칼잡이를 걷어차고 있고.
“컷! 오케이!”
황정우 배우가 손을 내밀었다.
“연기 잘하시네요. 그렇게 하면 돼요.”
“예.”
민망해서 뭐라 대답해야 할지.
스태프들은 바로 다음 쇼트 세팅에 들어갔다.
다들 얼굴이 밝다.
내 한 몸 희생해서 현장 분위기 밝아지면 좋지 뭐.
또 엑스트라 시킬까 봐 얼른 옷을 갈아입었다.
신 대표 옆으로 갔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연기 잘하시는데요?”
“제가요? 아까 보셨잖아요?”
“네. 오케이 난 연기는 제대로였어요.”
CG 임원도 슬쩍 신 대표 옆에 섰다.
“그러게. 자연스러운 게 그런 거지.”
김판수까지 옆에 와서 거들었다.
“어이, 최 작가. 연기해도 되겠는데?”
“뭔 소리야.”
이 양반들이 누굴 놀리나.
내가 작가에 투자자이니까 이런 빈 소리를 하지.
보조출연자였다면 욕을 바가지 먹었을 터다.
근데 혹시 내게 진짜 연기 재능이 있나?
회장님을 보호하겠다는 일념으로 움직이긴 했다만.
고개를 저었다.
내 얼굴에 연기는 무슨.
코어로 날 분석해 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연기 재능이 없다고 나오면 괜히 자괴감이 들 것 같다.
배우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촬영 현장을 지켜보았다.
현장 분위기가 좋다. 내 몸개그 때문이 아니라 이전부터 현장 분위기가 훈훈한 편이었다.
촬영감독은 한국 3대 촬영감독으로 뽑히는 분이고, 조명기사도 나이는 많지 않지만 국내에서 한 손에 꼽는다.
두 팀장은 함께한 작품이 셋이나 되어서 스태프들도 잘 아는 사이다. 다른 팀 스태프들도 대부분 한 작품 이상 같이한 분들이고. 여유와 자부심이 있는 A급 팀의 특징이라고 할까.
사실 감독이 신인이라 무시를 당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한국에서만 영화를 찍지 않았을 뿐. 미국 저예산 영화 현장 경험을 했고, 그쪽 선진 영화 산업을 잘 알고 있었다.
최고의 팀과 작업하는 데도 감독은 전혀 꿀리질 않았다. 스토리보드 작업 때도 많은 아이디어를 냈고.
신 대표는 신 대표대로 색다른 인정을 받았다.
다년간 금융업계에 있으면서 쌓은 인맥이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영화계 인맥만 현저히 부족했을 뿐.
앉아 있어도 협찬이 들어왔으니 말 다했지.
명품 의상과 장신구. 촬영 장소. PPL 등.
제작비가 100억인데 협찬받은 부분을 금액으로 따지면 10억이 넘는다. 그 덕분에 예산이 넉넉했고 스태프 계약과 복지도 좀 과할 정도로 좋았다. 물론 투자자 입장에서.
독일 B사 자동차를 무료로 사용했고 어느 외국 금융사는 본사 사무실과 건물을 대기업 촬영지로 무상으로 빌려주었다. 그 금융사가 소유한 리조트도 아주 저렴하게 빌렸다.
촬영 장소를 빌리는 것도 다 돈인데 그걸 대폭 아꼈다.
우선 업계에 소문이 날 정도로 ‘책’이 좋았고, 황정우 배우가 캐스팅되었으며 CG가 투자 배급한다는 점. 이게 시너지를 일으켰던 까닭이다.
사실 책이 좋아서 된 건데 신 대표의 수완으로 보였던 점도 있다. 실제로 신 대표 수완이 뛰어나기도 했고.
또 하나.
나는 보스다 책에 이어 공동집필한 ‘여우야’도 시청률 대박이 나면서 연예계 전반에 내 입지가 상당히 올라갔다. 그 덕분에 외주 제작사 윌메이드 대표에게 말한 것처럼 그 드라마에 꽃미남을 대거 꽂아 넣었다.
내가 기획사에도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날 보는 시선이 어떻든.
난 내 할 일만 묵묵히 할 뿐이었다.
이제 각본 계약은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게 되었다.
기본 계약은 5천. 저예산이나 각색은 3천.
흥행 수익 배분은 3% 이상이어야 하고. 최대 3고까지.
지금까지 작업에서 재고까지 가지도 않았지만 1고로 끝낸다는 명시는 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의심스러우니까.
이틀 만에 써서 20일 후에 전달하고.
재고 요청이 오면 바로 작업하고 한 달 후에 보내면 된다.
시나리오 개발 기간이 늘어나면 제작사만 손해 아닌가.
“컷! 오케이!”
“다음 장소로 이동합니다!”
스태프들이 분주히 세팅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난 신 대표와 손 감독. 김판수와 CG 임원과 인사한 후 다시 회사로 향했다. 이번 촬영장에 온 건 신 대표의 인맥을 빌려 협찬 몇 개를 받기 위함이었다.
물론 목표대로 협찬 5개를 얻어냈다.
* * *
협찬 관련 문서를 정리하고 퇴근했다.
집에 와서 샤워를 한 뒤 거실에 앉았다.
한 달 전에 이사했다.
마포에서 강남에 있는 로즈 엔터와 신성영화사를 오가려니 약간 불편해서 이태원동으로 왔다. 2천에 70.
그리 크지는 않지만 2층이고 조용해서 선택한 집이다.
큰 방은 내가 쓰고, 작은 방은 동생이.
가장 작은 방은 옷 방으로.
로즈 엔터에는 부장급 직원이 들어왔고 지성이는 여전히 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성실한 로드매니저가 들어와 제니스 멤버들 활동을 담당했다. 코디네이터도 뽑았고.
성 대표는 꽤 높은 월급을 받으며 회사를 이끌었다.
난 기획본부장이 되었는데 제작 관련만 지원할 뿐 로즈 엔터 일에 큰 관여를 안 했다. 오히려 지성이가 그쪽 일을 배워 나갔다. 성격답지 않게 야망이 큰 녀석이다. 지성이도 관련 업계 퍼지는 내 소문을 듣고 있었던 거지.
어쨌거나 제니스가 인기 걸그룹이 되면서 회사 재정과 수익도 상당히 좋아졌다. 먼저 행사 수입이 5백만 원에서 2천만 원 수준으로 뛰었다.
명실상부한 A급 아이돌이 된 셈이다.
4천 이상이면 S급이고 8천 넘으면 레전드급이다.
행사 업체 기준으로 보면.
게다가 서연은 출연한 드라마가 대박 나서 단독 CF 출연도 했다. 처음으로 제니스 전체 광고 촬영도 했고.
덕분에 사무실 월세와 월급으로 쭉쭉 빠지던 자금이 더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날이 갈수록 불어났다. 이대로 6개월 정도 더 지나면 제니스 활동만으로 몇억은 될 듯.
노트북을 열어 메일을 확인했다.
드라마 외주 제작사에서 연락이 왔다.
물론 안 한다. 아니 못한다.
임성희 작가에게 연락하라고 답장을 보냈다.
시나리오 계약 관련 메일도 왔다.
[최신성 작가님. 우리 작품 좀 합시다. 요새 잘 나간다고 너무 튕기시네. 3% 명시한다니까요. 연락 좀 줘요.]
지랄을 한다.
드림메이커의 박 부장이다.
사람 무시할 때는 언제고 뻔뻔하기도 하지.
일주일 전 작품 하자고 박 부장이 찾아왔었다.
다짜고짜 시놉을 내밀면서 7인의 사무라이를 원안으로 해서 회사원 7명이 대기업을 털어먹는 이야기란다.
내 예상대로 그 홍 작가란 친구는 벌써 내쳤고.
바빠서 안 된다는 말을 하고 무시했다.
신성에서 7인의 사무원을 진행하고 있다는 말은 안 했다.
작품 제목을 철저히 숨겼다.
김 선배가 작업한 한중 합작 전쟁물 각색 건도 있었는데 그 작품도 무시했다. 메이저건 뭐건 양아치 짓거리하는 회사는 절대로 안 하는 걸로. 지난 6년간 내 시나리오 까댄 제작사와 실컷 부려 먹고 진행비만 준 제작사도 안 하는 것으로.
갑질하는 게 아니다.
안 해도 되니까 안 하는 거지.
촬영 일정 문서를 확인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이제 곧 신성의 차기작 촬영이 시작된다.
오천일 감독의 연출력이 조금 걱정이 되긴 한데.
잘되겠지.
* * *
회사에 출근했다.
분주히 오가는 스태프들이 내게 인사를 했다.
“오셨어요. 실장님!”
“네. 감독님은요?”
“회의 중이세요. 저희 먼저 갑니다!”
“네.”
날 보는 스태프들이 시선이 어째 묘하다.
무슨 영화배우를 보는 듯한 눈길. 또 무슨 헛소문이 돌고 있는 건가. 여자 스태프들은 수줍어하는 것 같고.
그러고 보니 국경의 끝도 이맘때 프리를 했다.
그때에 비하면 내 옷차림이 사뭇 다르다.
당시엔 후줄근한 점퍼에 청바지를 입고 다녔으나 지금은 수트에 코트를 입었다. 수트가 잘 어울리는 편이라 요즘엔 제법 멋이 나긴 한다.
연출부 써드인 김영석 형도 보였다.
“어때요? 할 만해요?”
“야, 너무 힘들다.”
말한 것보다 10배는 더 힘들다는 표정이다.
“제작부에서 지원 잘할게요.”
“그래. 나 지금 정신없어.”
대화를 나눌 사이도 없이 김 선배가 스태프들한테 오늘 촬영 시트를 나눠주며 돌아다녔다.
내가 사무실에 들어가자 스태프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실장님, 굿모닝입니다!”
“네. 좋은 아침.”
“안녕하십니까!”
“오늘 잘해 봅시다.”
“왔어요?”
“어, 그래. 승철아.”
막내에서 바로 연출부 세컨드가 된 승철이.
너 감독 될 때 내가 밀어주겠어.
상일이가 걸어왔다.
“첫날부터 지각하시지 말입니다. 다 식었잖아요.”
오상일이 웃으며 커피를 내밀었다.
이젠 내 커피도 있네.
이거 영 적응이 안 된다.
“여, 최 실장! 뭘 이렇게 잘 입고 왔어?”
“컨디션 어떠세요?”
“당연히 좋지. 푹 잤어.”
감독과 팀장님들도 날 반겨 주었다.
어제 봤는데 뭘 또 반기시나.
하긴 오늘 첫 촬영이니.
오천일 감독에게 말했다.
“아무 문제 없죠?”
“제작부에서 준비를 잘해 줘서 아주 깔끔해. 지금 나갈 건데 너도 가지?”
“그럼요.”
팀장님들과 눈인사를 하며 사무실에서 나갔다.
주차장에 있는 내 차에 올랐다.
스태프들이 탑차와 촬영 버스에 오르고 있었다.
바로 출발했다.
* * *
회사 근처 논현동의 한 건물 사무실에 세팅이 시작되었다.
중소기업 영업부 대리인 강 대리 씬이다.
대기업 때문에 동남아 원단 수출이 막힌 장면.
대기실로 가자 엄아인이 날 보곤 일어났다.
그가 고개 인사를 한다.
“작가님, 오셨어요?”
“예. 어제 술 드셨구나?”
“조금요. 친한 분 전시회 뒤풀이가 있었어요.”
“오늘 저녁에 촬영 끝날 거예요.”
“그래야죠. 해장국이라도 먹고 올 걸 그랬네요.”
제작부원에게 손짓했다.
제작부 막내가 쪼르르 달려와 숙취해소 드링크를 내밀었다.
“고마워요.”
막내가 나 잘했죠? 하는 표정을 짓곤 달려갔다.
25살 여자애다. 눈치가 정말 빠른 친구.
“아인 씨! 시바이 확인할게요!”
엄아인이 촬영 위치에 들어가 앉았다.
시바이란 연기 동선을 의미한다.
주연배우가 앉자 카메라 팀이 줄자로 거리를 재고 포커스를 맞췄다. 이어 리허설을 했다.
조명 기사도 외쳤다.
“영수야! 키라이트 5센찌 더 올려!”
“트레이 줍니까?”
“그래! 기석아, 책상 앞에 반사판 대고!”
조명팀이 엄아인 앞에 반사판을 댔다.
엄아인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아직 세다! 플라피 하나 대!”
“예!”
조명에 하얗고 얇은 필터를 대자 빛이 감소했다.
현실에선 아직도 밝지만 영화로 보면 적절한 광량이다.
카메라에 눈을 대고 있던 촬영감독이 엄지를 올렸다.
“조명 완료!”
스태프들은 현장마다 색깔이 약간 다르다.
각 팀이 도제식 시스템이라 팀장 방식으로 하는 거다.
이번 현장 스태프들도 서로 아는 사이라 국경의 끝 현장보다는 분위기가 좋을 것 같았다.
조감독이 외쳤다.
“자, 첫 촬영갑니다! 모두 조용!”
연출부 막내가 카메라 앞에 슬레이터를 댔다.
오천일 감독이 다소 긴장했다.
조감독일 때와는 마음가짐부터가 다르니.
“레디!”
“스핏!”
“롤링!”
“씬 2에 1에 1!”
엄아인은 이미 연기를 시작했다.
“액션!”
전화 수화기를 든 채 씩씩대는 강 대리.
“아니, 이건 아니죠! 우리가 그 업체랑 먼저 계약했다고요! 한국 업체들끼리 싸우면 걔네들만 이득 보는 거 아닙니까! 아니, 그러니까! 이것 봐요! 그쪽이 원래 거래하던 업체를 놔두고 왜 우리 거래처에…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 놔 진짜! 사람이 말을 하는데 전화를 끊고 지랄이야!”
다시 전화를 하지만 안 받는다.
“아오 씨! 이것들은 상도덕도 없어!”
옆자리 직원이 묻는다.
“왜 그래?”
“SG가 물량으로 단가를 후려치잖아요! 지난번에도 이 새끼들 때문에 20억짜리 날렸는데!”
“이 바닥 원래 그래.”
“아오! 열 받아!”
전화 수화기를 입으로 마구 물어뜯는 강 대리.
“컷!”
감독이 찍은 장면을 확인했다.
그런데 턱을 괸 채 골똘히 생각에 빠진다.
OK인지, KEEP인지 NG인지 도통 말이 없다.
엄아인이 스테이션 뒤로 가서 모니터를 보았다.
나도 슬쩍 뒤에서 보았다.
다들 감독만 바라보고 있다.
내가 보기엔 무난한데 왜 그러지?
감독이 한참이나 화면을 보더니 말했다.
“오케이.”
“오케입니다! 다음 쇼트 가요!”
조용히 귀를 기울이던 스태프들이 이내 분주하게 움직였다.
감독 옆에 앉았다.
“왜 그래요?”
감독이 뺨을 벅벅 긁었다.
“판단이 안 서네.”
“뭐가요?”
“연기는 좋은데 더 나은 장면이 나올까 싶어서.”
이 대표님에게 들었다.
처음 감독이 되면 결정 장애에 빠진다고.
더 찍어야 하나. 여기서 오케이 해도 되나.
명확한 자기 기준이 없으면 이렇게 된다.
“좋아요. 이 정도면 오케이 가도 될 것 같아요.”
“이래서 감독들이 욕심을 내는 거겠지?”
“그렇죠. 이 정도 장면을 기준으로 잡아요.”
“그래야겠다.”
나도 이게 내 영화라면 결정이 어려울 것 같다.
스태프들은 감독만 바라보고 있을 테고.
다시 촬영이 재개되었다.
이후에도 감독은 바로바로 결정을 못 했다.
그러다 보니 늘 내게 묻고는 결정을 내렸다.
나도 그럴 수 있으니 속으로 욕도 못하고.
촬영은 그나마 순조로워서 오후까지 이어졌다.
한창 촬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팀 계약직의 리더 역을 맡은 배우 진규가 다음 씬 촬영을 위해 들어왔는데. 웬 눈부시게 예쁜 여자와 함께 왔다.
남자 스태프들의 입이 일제히 벌어진다.
그 여자를 보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정효주?
내 정말 보고 싶었던 여배우가 정효주다.
그 정효주가 왜 이곳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