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장 신곡 발표 (12/56)

제3장 신곡 발표

사흘 후 지성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드라마 외주제작사에서 서연의 오디션을 보자는 소식이었다.

이틀 전에 7인의 사무원 시놉시스 작업을 했다.

그걸 이 대표님 e메일로 보내고 쉬고 있던 차였다.

엄아인 측이 시나리오까지 괜찮으면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찍겠다는 연락이 왔었다. 투자사 사장님이 이번 작품에도 투자해준다면 무사히 진행될 것 같다.

날이 제법 더워져서 티셔츠에 7부 슬랙스 바지를 입었다. 검정 페도라를 쓰고 슬립온 슈즈를 신고 집을 나섰다. 정신적으로 안정되니 내 패션도 젊은 영화인처럼 보인다.

전엔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다녔으니.

* * *

내 집에서 멀지 않은 상암동에 드라마 외주제작사 사무실이 있었다. 대표가 현직 드라마 작가인 회사다.

“안녕하세요. 조연출 박성동이라고 합니다.”

“안서연이에요.”

“로즈엔터 기획실장, 최신성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내 옷과 비슷하게 차려입은 서연과 함께 외주제작사 사무실로 들어갔다. 제작사가 제법 컸는데 벽면에 그동안 찍은 드라마 포스터가 길게 이어 붙어 있었다.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꽤 큰 회의실 저편에 세 남녀가 앉아 있었다.

작가와 PD, 그리고 제작사 임원인 듯했다.

나도 서연도 정중히 인사를 했다.

“안서연이라고 합니다.”

“서연 씨 매니저인 최신성입니다.”

세 사람 중 임원만 정중하게 인사를 받아주고, 작가와 PD는 대충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엄청나게 잘 나가는 모양이다.

작가가 서연을 선택한 게 아니었던 건가.

작가는 좀 삐딱한 얼굴로 서연의 아래위를 훑어보고 있고, PD는 뚱한 얼굴로 서연을 본다.

나와 서연이 잘 보이려는 태도를 안 보여서 그런 것 같다.

중소 기획사와 드라마제작사 관계는 철저히 을과 갑이니까.

드라마 제작에 투자하고, 톱스타를 보유한 대형기획사와 외주제작사 관계는 또 그 반대이고.

이런 시선이면 주눅이 들만도 한데 서연은 당당했다. 조상미 감독과의 일이 그녀를 한층 단단하게 해준 모양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코어를 발동한 채 작가와 PD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작가와 PD라는 사람들이 어째….

작가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드라마랑 영화 연기 다르다는 건 아시죠?”

서연이 대답했다.

“네. 어떤 역이든 잘할 자신이 있어요.”

“맡은 배역만 잘하면 돼요. 연기 좀 볼까요.”

조연출이 프린트 된 대본을 서연에게 건넸다.

드라마 1회 중 어떤 배역인 모양이다.

작가가 말했다.

“12쪽에 초희라는 인물 대사를 해 봐요.”

“네.”

서연이 프린트를 들고 읽어 보았다.

잠시 캐릭터 분석을 하더니.

“언니, 미연이 걔 우리 회사에서 내 쫓아내야 해. 그 여우 같은 년이 이 실장님한테 꼬리 치는 거 못 봤지? 그년 눈웃음치는 거에 실장님이 넘어갔다니까. 남자들이 미연이 걔 착한 줄 알고 있다구. 언니 뭐라고 말 좀 해 봐.”

작가는 시큰둥한 표정이고 감독은 의외라는 얼굴.

임원은 싱글벙글 웃고 있다.

배역도 어째….

작가가 PD에게 말했다.

“주인공보다 더 예쁘면 좀 안 맞지 않아요?”

“상관없을 거 같은데요. 안서연 씨 성격 있어 보여서 오히려 잘 맞을 것 같습니다. 안하무인 캐릭터잖아요.”

안하무인?

여자 주인공과 경쟁하는 조연이다 이거네.

여주는 가난하고, 서연이 할 역은 못된 여자일 테고.

작가의 말이 이어졌다.

“뭐, 연기는 그럭저럭 하네. 서연 씨. 여자 주인공과 사사건건 부딪히는 역할이에요. 의류업체 사장 딸인데, 잘난 부모 덕에 오만방자한 캐릭터고요. 영화를 찍은 배우라도 드라마에선 신인이니 이런 역부터 시작하는 거죠.”

“네. 저도 알고 있어요.”

신인은 영화에서 여주인공을 해도 드라마로 오면 조연을 해야 한다. 지상파 드라마와 영화의 영향력과 인지도 차이다. 더구나 서연은 영화에서도 조연이었고, 신인이었다.

한데 영 느낌이 안 좋다.

“비중은 별로 안 커요. 여주인공 상대 악역이 있는데, 그 악역의 시누이 노릇을 하는 역할이라서요. 여주에게 감초 역할 친구가 있다면, 악역에게도 그런 친구가 있는 거죠. 그래도 악쓰는 연기가 있어서 시청자들이 제대로 기억하긴 할 거예요.”

서연이 날 슬쩍 보았다.

이거 해도 되느냐는 표정.

여주의 친구도 아니고, 악역의 더 못된 친구라니.

이런 배역이라도 줄 테니 할 테면 하고 말라면 말라는 말인가. 배역을 따려면 접대라도 해야 했나.

사람 불러 놓고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내가 나섰다.

“그 배역을 염두에 두시고 서연을 불렀던 겁니까?”

작가와 PD가 날 빤히 본다.

“왜요? 배역이 이상해요? 신인이 그런 배역이면 됐지, 뭐 얼마나 큰 배역을 맡으시려고요?”

“악역을 하기엔 서연의 이미지와 좀 안 맞아서 말입니다.”

“이 봐요. 작가가 맞다면 맞는 거예요. 그쪽이 판단할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배역 맡기 싫으세요?”

작은 기획사가 작가한테 얼마나 굽히고 들어가기에 작가가 이런 식으로 무례하게 나오는 건지. 아니면 누군가의 캐스팅 오더를 안 하려고 수를 쓰는 건가.

임원이 급히 나섰다.

“실은 대표님께서 서연 씨 연기를 좋게 보셨어요. 차세대 드라마 여주인공 감이라고 이번 드라마에 꼭 캐스팅하라고 하셔서요.”

“위에서 꽂은 연기자라서 악역을 주시는 겁니까?”

임원이 작가를 보았다.

작가의 입이 비틀어지고 있었다.

이 비슷한 일 언제 한 번 겪지 않았던가.

작가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하기 싫으면 하지 마세요. 악역이라도 따겠다고 찾아오는 기획사 매니저들이 한둘인 줄 아세요? 듣도보도 못한 기획사가 어디 경우 없이 배역이 이렇다저렇다 그래. 영화 한 편 출연한 게 뭐 대단한 줄 알아? 무명 걸그룹 주제에 어디서 싸가지 없이 얼굴을 뻣뻣하게 들고……”

말을 하는 작가에게 다가갔다.

“다시 한번 말해봐요. 뭐라고?”

“뭐야, 이 사람!”

작가 앞 탁자에 두 손을 얹고 작가를 쏘아 보았다.

작가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날 빤히 본다.

PD가 다가섰다.

“이봐요, 이게 지금 뭐 하는…”

“PD님은 거기 앉아 계시죠.”

“뭐요?”

작가가 지금까지 작업해 온 방식.

보조작가들에 대한 태도.

인생과 세상을 대하는 가치관.

그런 것들이 단편적으로 내 머릿속에 포착되었다.

목에 걸린 진주 목걸이만 봐도 성격이 보인다.

작가에게 말했다.

“여태껏 당신 대본은 보조작가들 착취해서 나온 글이야. 나는 왜 시청률 대박이 안 오나 싶지? 그럴 수밖에 없어. 온전히 당신 머리에서 나온 글이 아니거든. 댁은 원래 하던 대로 막장 드라마 쓰면 돼. 그걸로는 먹고 살아. 이 작품은 엎는 게 좋아. 시청률 5% 찍고 망할 테니까.”

바로 돌아섰다.

작가가 뒤에서 버럭 소릴 질렀다.

“지금 말 다했어! 이 새끼가 어디서 막말을……”

다시 돌아섰다.

작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다.

냉기 풀풀 나는 음성으로 말했다.

“보조작가들한테 소재 하나 던져주고 굴리고 굴렸는데 마음에 드는 대본이 안 나오지? PD들, 제작사 대표들 구워삶아서 여기까지 잘 왔는데 이번 만큼은 잘 안 되지? ?”

“나가! 여기서 나가라고!”

“당신이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뭔 줄 알아? 실력이 없거든. 작가로서 능력이 부족하니까 다른 방식으로 당신 권위를 세우고 싶은 거야. 안 그래?”

“나가라고! PD님 뭐해요! 이 인간 쫓아내요!”

PD가 어정쩡하게 내게 다가왔다.

이번엔 PD에게 말했다.

“이 작가 아침 드라마 잘 쓰니 주말극도 잘 쓸 것 같죠? 아침 막장 드라마 같은 걸 젊은 층이 볼 것 같습니까? 막장으로 재미 본 사람의 수준이 달라질 것 같아요? 절대 안 달라집니다. 그리고 이 작품 무난하게 제작될 것 같죠? 전혀. 대본이 개판인데 누가 투자를 하고, 어떤 미친 방송사가 편성을 합니까. 이 회사 대표가 왜 이 작가에게 맡긴 것 같습니까?”

“김 피디님!”

PD가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작가는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고.

PD에게 다시 말을 이었다.

“연출 입봉이시죠? 이 양반 아침 드라마 조연출이셨고. 이 작가 실력은 알지만 잘 되면 입봉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함께 하려는 겁니다. 근데 그런 요행은 안 생겨요.”

PD가 뭐라 대꾸를 하지 못했다.

속내를 들킨 것 같은 표정만 지을 뿐.

두 사람 모두에게 말했다.

“왜냐고요. 작품 엎어지라고 맡긴 거니까. 작가가 대표한테 달라붙어서 이 작품 하고 싶다고 하도 귀찮게 구니까, 이참에 아예 떼어내려고 진행한 겁니다. 이 작품 엎어지면 저 작가는 다시 아침 드라마로 갑니다. 거기 가서 입봉하세요. 보조작가들이 쓴 글 짜집기 해서 나오는 대본으로는 주말극 못합니다.”

“아니야! 네가 뭘 안다고 헛소릴 지껄여!”

다시 작가에게 쏘아붙였다.

“돈은 벌고 싶은데 실력이 없으니 어떻게 해. 사회생활이라도 잘해서 성공해야지. 그런데 주말극 좀 해보려니 쉽지 않지? 쉽지 않으면 하질 말아야지. 온전히 당신 작품도 아니잖아?”

“꺼져, 이 새꺄!”

작가의 얼굴이 폭발할 지경이었다.

한마디 더 했다.

“실력 있는 작가들이 당신 같은 쓰레기 밑에서 보조작가 노릇을 하고 있어. 당신 밑에서 열심히만 하면 아는 연출 소개해주겠다고 속이고 부려 먹고 있는 거야. 그따위 속임수 오래갈 것 같나? 그런 주제에 갑질을 해? 보조작가들 위에 군림하고 작은 기획사들이 굽실굽실하니까 당신이 무슨 여왕이라도 되는 줄 알아?”

“그만하시죠.”

보다 못한 PD가 나섰다.

PD의 얼굴이 복잡했다.

본인도 내가 말한 현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작가라면 글이나 잘 쓰세요. 어설픈 잔머리 굴리지 말고.”

작가가 분을 못 이겨 부들부들 떨었다.

PD는 한숨을 쉬고, 임원은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갑질을 하려면 상대를 봐가면서 해야지.

내가 뭐가 아쉬운 게 있다고.

서연의 손을 잡고 끌었다.

“가자. 앞으로 이 회사 작품은 안 한다.”

“네.”

말 그대로 문을 박차고 나갔다.

서연이 연신 뒤를 돌아본다.

이 회사 대표가, 혹은 작가가 방송사 드라마 국장에게 뭔 소리를 하든 상관없다. 드라마 안 하면 그만이니까. 투자사 사장님 지인이 드라마 투자자들이다. 나도 수틀리면 잔머리는 얼마든지 쓸 수 있다.

서연과 함께 제작사에서 나왔다.

서연이 날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내가 화난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응. 미안해. 나 때문에 드라마 출연 못 해서.”

“아니에요. 저도 악역은 좀 그랬어요. 비중도 없는데 욕만 먹을 거 아니에요.”

“그래. 굳이 악역할 필요 없어. 영화면 모를까.”

“그런데 손 좀…….”

“아!”

나도 모르게 서연의 손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그녀의 손을 놨다.

잠시 어색해졌다.

사실 손을 잡은 게 처음이었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내 차로 가려는 데 제작사 임원이 뛰어나왔다.

“잠깐만요!”

일단 멈췄다.

임원이 내 앞에 달려와 숨을 헐떡였다.

“저기… 대표님이 좀 보시잡니다.”

“작가 때문이라면 사과할 생각 없습니다.”

“그게 아니고… 이번 작품 때문에요.”

* * *

외주 제작사 근처 카페에서 외주 제작사 대표와 만났다.

드라마 쪽에서 잔뼈가 굵은 40대 후반이었다.

한때 인기가 많았던 드라마 작가이기도 하고.

“정 이사에게 말은 들었습니다. 제가 그 작품 엎을 거라고 말씀하셨다고요?”

“정말 그러려고 하셨어요?”

“아닙니다. 대본은 일단 통과되어서 최종 편성만 나오면 진행하려고 했죠. 그 양반 방송사 드라마 국장들과 꽤 친해서 편성은 비교적 잘 되는 편이거든요. 사실 안 돼도 그만이라는 생각은 했습니다.”

“보시자고 한 이유는 뭔지요?”

대표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말했다.

“회사에 메인 작가가 5명 있는데 경쟁 시스템입니다. 종편 포함해서 여러 방송사에 5회 대본과 시놉을 넣어서 통과되면 제작하고, 안 되면 다시 기획하고 있죠. 그 양반 대본은 소재가 좀 좋았던 터라 통과는 된 상태였고요. 그런데 통과된 대본을 보조작가가 대부분 썼어요. 척 보면 압니다.”

대표가 한숨을 쉬곤 말을 이었다.

“차라리 잘 됐습니다. 어찌 통과는 돼도 그 양반 스타일 나오기 시작하면 그 작품 시청률 뻔하거든요. 다른 작가가 미니시리즈를 기획하고 있는데 서연 씨를 그 작품에 꼭 좀 출연시키고 싶네요. 장래의 톱스타와 관계를 돈독하게 하고 싶다고 할까요.”

“거기도 악역입니까?”

“아니요. 비중 있는 조연입니다.”

코어가 저절로 발동되었다.

코어에 뭘 포착하는 코드 같은 게 있나 보다.

딱히 뭘 추천한 것은 아니고 내게 영감을 준다.

그리하여 나온 결론.

“아까 그 작가의 보조작가를 만나고 싶네요. 그분이 대본을 쓰시고, 제가 지원을 하고 싶습니다.”

“지원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대표는 내가 시나리오 작가라는 걸 모른다.

로즈 엔터 실장으로 이곳에 왔으니.

그 보조작가가 쓰고 내가 감수하면 좋은 작품이 나온다.

이왕이면 서연을 돋보이게 할 작품.

코어로 시놉을 분석한 뒤 방향만 잡아줘도 충분하다.

말을 이었다.

“그 작가에게 입봉할 기회를 한 번 주세요. 말씀하신 대로 시놉시스와 대본이 잘 나오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톱스타를 그 작품에 캐스팅해드릴 수 있습니다.”

내 말에 대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드라마도 톱스타 캐스팅이 제작의 관건이다.

내가 쓴 작품에 출연하고 싶다는 연기파 배우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쪽 기획사를 뚫어 보는 거다.

* * *

7인의 사무원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했다.

이 대표님에게 말했던 걸 기본 설정으로 가려고 했다.

코어를 발동하여 점검했는데 곳곳에서 구멍이 발생했다.

이 어이없는 상황을 보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구상 당시에는 코어를 활용하지 않았다.

온전히 내 머리로만 구상한 것을 가지고 대표님에게 열변을 토했던 거였다.

코어 능력이 내 실력인 줄 착각하고 있었던 거지.

게다가 직장 생활을 해 본 적 없는 내가 직장인의 애환을 제대로 그린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코어와 내 실력을 혼동하지 말자.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다시 구상에 들어갔다.

코어를 통해 먼저 취재를 시작했다.

직장인 커뮤니티. 웹 카페. 회사 게시판. 그 외 회사에서 벌어지는 온갖 상황과 비합리. 대기업의 횡포. 부당한 해고. 여직원과 계약직이 겪는 일. 적대적 M&A 등.

자료를 수집하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회사에 다닌다는 게 이렇게 힘든 것인 줄 미처 몰랐다.

취준생들은 그런 회사원이 되려고 기를 쓰고 있고.

회사를 다니는 게 아니다. 버티는 거였다.

치졸하고 비열한 상사. 이기적이고 추잡한 동료.

파벌 싸움. 사내 정치. 따돌림. 실적 가로채기.

회사란 정글에서 벌어지는 전쟁터였다.

수많은 하소연과 불만. 억울한 사연.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일들.

그러한 내용을 스토리에 맞게 수렴하여 구성해 나갔다.

주인공의 비중을 40% 이상으로 올리고.

여주인공과 형사는 30%.

나머지 비중은 4명에게 고르게 분산했다.

공감과 감정 이입이 제대로 들어가도록 극적 장치를 설치하고 전개해 나갔다.

형사는 죽는 것으로 결말을 정리했다. 다만 형사가 죽을 때 다른 팀원이 그의 딸을 찾는 장면을 넣었다.

이 딸이 잔망스럽고 귀엽다.

사기꾼이 내내 불평불만만 늘어놓다가 마지막에 큰 거 한 방을 터뜨린다. 그러곤 형사 딸과 함께 티격태격 같은 수준으로 놀다가 영화가 엔딩한다. 남은 6명이 이 아이를 돌볼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판단은 관객의 몫으로.

영화를 본 관객의 느낌은.

분노 3. 안타까움 2. 통쾌함 3. 기분 좋은 여운 2.

영화 하나에 희로애락을 다 느낄 수 있다.

마지막에 기분 좋게 극장을 나선다는 예측이다.

코어를 통해 재구성하자 훨씬 나아졌다.

액션. 감정. 직장인 공감. 박진감과 클라이맥스 등.

여러 요소를 점검해서 이제 구멍이 없음을 확인했다.

전체적인 흐름도 다시 한 번 분석해서 통과시켰다.

엄아인이 한다고 한 만큼.

주인공인 강 대리 역할을 아주 매력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사건과 동선이 절묘하게 맞물리며 조화를 이루며 돌아간다.

최종 점검까지 마친 후 작업에 돌입했다.

* * *

12시간 만에 완고를 냈다.

작품을 쓰고 나서 바로 분석에 들어갔다.

코어도 소재의 한계는 어쩌질 못한다.

총제작비 85억.

예측 관객 수 580만 ~ 680만.

이전과 다른 분석 결과다.

변수를 감지했는지 관객 수 오차 범위가 있다.

입봉작에 580만 이상이면 썩 괜찮은 관객 수다.

변수는 오천일 감독의 연출력에 달린 것 같고.

이건 어떤 소재를 선택해도 비슷할 것 같다.

대표님에게 문자를 보냈다.

[7인의 사무원 보냈어요]

바로 답신이 왔다.

[어. 수고했다.]

[아주 만족스럽진 않으니 검토해보세요.]

[그래야지. 오늘 첫 정산이다. 메일 확인해 봐.]

[알겠습니다.]

국경의 끝이 개봉하고 한 달이 지났다.

상영은 아직 1주일 더 남았으나 이제 판가름이 난 셈이다.

개봉관 수가 대폭 떨어져서 최종 관객 수는 현 스코어에 10만 정도만 더 붙이면 될 듯했다.

대표님이 보내 주신 메일을 열어 보았다.

영화진흥위원회 박스오피스 집계.

현 집계 관객 수 557만.

현 집계 입장수익 546억.

짜릿했다.

코어가 비교적 잘 맞췄다.

일주일 더 상영하게 되면 최종 565만 정도는 될 것 같고.

입장수익은 550억은 거뜬히 넘는다.

첫 분석 때보다 영화 편집본으로 분석한 게 더 맞다.

그땐 564만으로 나왔으니.

이제 영화 예측만큼은 믿어도 될 듯싶다.

다음 작품도 맞으면 확실한 거고.

* * *

며칠 후.

드디어 신곡이 나왔다.

부리나케 사무실로 갔더니 다들 긴장한 상태였다.

방준혁 작곡가는 마른 침만 삼키고 있고.

“신곡 아직 안 들었죠?”

성 대표님이 웃으며 대답했다.

“다 같이 들어야죠. 방 작곡가가 최 실장님 들어오시니까, 긴장하네요.”

“자, 들어 볼까요.”

“잠깐 만요! 준비 좀 하고요.”

작곡가만큼이나 긴장한 연희의 말에 다들 웃었다.

식구들 모두 스피커 앞에서 숨을 죽였다.

지성이가 노트북 키보드에 손을 올린 채 말했다.

“그럼 첫 번째 곡. 갑니다.”

주의를 집중시키는 인상적인 피아노 인트로.

4마디 지나자마자 신스 임팩트가 꽝- 하듯 터져 나온다.

“와!”

자기도 모르게 터지는 탄성!

미디엄 템포지만 신스 도입부가 강렬했다.

제대로 중독성 있는 후크!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벌스와 브리지, 싸비로 넘어갈 때까지 내가 말해 준 부분을 정확히 곡으로 만들었다.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좋았다.

작곡가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첨가되었기 때문.

노래 한 곡에 정신없이 빠져든 것은 처음이었다.

영화에선 버릴 씬이 없다고들 하는데, 이 곡이 그랬다.

수정할 마디가 단 한마디도 없었다.

신스 후크는 곡 후반으로 갈수록 더욱 강해지고, 같은 후렴구라도 추가되는 사운드 효과가 더 들어가서 갈수록 고조되어갔다. 노래 가이드는 허밍이고 랩 파트도 읊조리는 수준이었지만 후크 하나는 제대로 잡았다.

길 가다가도 이 곡은 뭐지? 하는 느낌이 든다.

게다가 곡이 세련되었다. 클럽에서 가뿐하게 춤을 즐길 수 있는 템포. 힙합 느낌의 드럼으로 찍은 비트감도 절어 주고, 엇박자 리듬도 나와서 이 곡만의 포인트도 준다.

라디오 헤드, 크립의 ‘지징- 지징-’ 하는 기타 리프처럼.

별거 아닌 것이 곡의 인상을 잡아 주기도 하는데 이 곡에선 두 번 나오는 엇박자 리듬이 그랬다.

투둥투둥 투둥퉁- 투드드둥 투둥퉁-

사소한 백 사운드 변주가 귀를 잡아끈다.

곡이 끝났을 때.

적막이 흘렀다. 다들 스피커를 보다가 서로 보았다.

서로 보는 눈이 점점 커진다.

“와! 대박!”

“언니~!”

“우리 이제 된 거야!”

“형!”

멤버들이 서로 끌어안고 난리 났다. 지성이 녀석은 날 덮치듯 끌어안고. 성 대표님은 그제야 긴장이 풀린 방준혁 작곡가를 덥석 안았다.

“수고했어! 이번엔 느낌이 와!”

“다행이네요.”

날 안고 매달리는 지성이의 등을 두드렸다.

곡이 정말 좋다. 음원 차트 50위 권 안에 들고, 잘하면 1위도 한 번은 찍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이번 타이틀 곡.

음악방송 1위도 노려볼 만하다.

당연히 그 전에 온갖 홍보 수단을 동원해서 인지도를 높이고 신곡에 대한 기대감을 줘야 한다.

리즈가 시크하게 말했다.

“두 번째 곡도 들어야죠.”

방방 뛰던 멤버들이 일제히 스피커 앞에 몰려왔다.

두 번째 곡은 음악성에 중점을 둔 곡이다. 보컬 실력이 받쳐줘야 한다. 신 나는 곡이기도 하고.

“두 번째 곡입니다.”

다들 두 손을 잡은 채 숨을 죽였다.

두 번째 곡도 좋으면 진짜 대박이다.

모두가 스피커에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두 번째 곡이 나왔다.

팡- 파바바바방 파아앙-

인상적인 짧은 인트로!

이어 터져 나오는 신 나는 리듬과 비트!

팜 파바바팜바 팜바 팜바- 팜 파바바팜바~

“우와! 어떡해!”

“연희야, 쉿!”

두 번째 곡 역시 기가 막혔다.

흥이 절로 나는 곡이다.

보컬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변주가 계속된다.

작곡가가 화음 가이드까지 넣었다. 이 곡의 후크도 장난 아니다. 전혀 색깔이 다른 곡을 한 작곡가가 한 달 만에 만들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멤버들 전원 고개와 어깨를 들썩거린다.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는 곡.

내가 참고하라고 한 조지 마이클의 몽키와 같을 줄 알고 걱정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 곡의 좋은 점이 뭔지를 방준혁 작곡가가 캐치하고 다른 느낌의 펑키 곡을 뽑아낸 것이다.

마지막 후렴구에선 엄청난 보컬로 몰아친다.

보컬 앙상블이 최고조에 이르던 그때.

플러그를 뽑은 듯한 극적인 중단!

“아악! 이 곡이 더 좋아!”

“오빠! 우리 이제 뜰 거야!”

멤버들이 또 얼싸안고 방방 뛰었다.

다들 눈물이라도 쏟을 지경이다.

한결 밝아진 방준혁 작곡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와 힘차게 악수했다.

멤버들이 좋아하면 거기서 끝난 거다.

제니스 멤버들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지난 3년간의 고생이 스친 모양이다.

제대로 된 곡을 받으니 감개무량하기도 하겠지.

원래 7월 19일 즘에 신곡을 발표하려고 했는데.

사전에 홍보할 시간이 좀 필요했다.

대중이 신곡과 제니스의 변신을 기대하게끔.

안무 연습도 완벽하게 하는 게 나을 것도 같고.

“신곡 발표는 8월 초에 할 거야. 인기드라마 OST나 대형 가수 컴백 시점을 보고 늦출 수도 있고. 늦어도 8월 중순에는 발표해야지.”

서연이 물었다.

“녹음은요?”

“7월 10일까진 끝내야 해. 안무와 활동 컨셉 잡는 건 둘째 주에 마무리하고.”

“형, 딱히 급할 건 없는데?”

“날짜를 정해 놔야 긴장감이 생기지. 리즈는 직접 랩을 써봐. 가사는 일단 너희가 써 보고, 어렵다 싶으면 나한테 말하고.”

“우리가 작사해요?”

“그래야지. 너희가 쓴 걸 내가 다듬으면 돼. 안무가는 어떻게 됐죠?”

성 대표가 대답했다.

“두 곡 안무 짜는데 600만 원에 계약하기로 했습니다. 댄싱 팀에 있다가 독립한 친군데 실력이 있어요. 기존 안무가는 천만 원 이상 부를 겁니다.”

“형이 확인해 봐.”

지성이가 영상을 보여주었다.

녀석이 직접 선택한 사람이다.

안무를 보니 됐다 싶다.

나이는 20대 후반인데 힘 있고 절도 있는 춤을 춘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클리셰 적인 춤이 아닌 자기만의 독창적인 안무 스타일이 있다는 점이었다.

제니스 신곡 안무와 잘 맞는다.

지성이 안목이다.

동생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수고했다.”

“이 정도 감은 있어야 매니저 하지.”

다들 안색이 좋다.

의상은 무대 의상이 아닌 외출복으로 입어도 되는 스타일로 동대문 디자이너에게 주문을 의뢰했다. 패션에 관심이 많은 리즈도 신곡 의상 디자인에 참여하고 있다.

컨셉은 자유분방하고 세련된 걸 크러쉬.

이른바 제니스 스타일이다.

작곡가에게 물었다.

“이 데모로 안무 짜도 되는 거죠?”

“예. 크게 달라지진 않을 거예요.”

“최종 곡은 언제쯤 될까요?”

“7월 17일 정도요. 멤버들 레코딩하고 바로 믹싱, 마스터링 들어가면 일주일 안에 나와요.”

“지성아 보드에 적어라.”

“응.”

지성이가 화이트 보드 앞에 섰다.

“현재 6월 30일. 녹음은 7월 10일까지. 13일부터 16일까지 뮤비 촬영. 홍보 영상 편집 후에 22일부터 29일까지 V앱에 영상을 올릴 거야. 7월 31일 타이틀 곡 티저 공개. 신곡 발표는 8월 3일 수요일 정오.”

지성이가 열심히 보드에 적었다.

멤버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부터 신곡 발표하기 사흘 전까지 안무를 완벽하게 맞춰야 해. 20일까지는 활동 컨셉 완료해야 하고.”

“네.”

“알았어요.”

성 대표가 물었다.

“뮤직 비디오는 어떻게 하실는지요?”

“13일부터 16일까지 3박 4일로 뮤비 찍으러 갑니다. 홍보 영상을 겸해서 다큐도 찍을 거예요.”

“진짜 다큐예요?”

서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유를 찍을 거야.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와, 재밌겠다.”

“근데 어디로 가요?”

“어디로 갈 건데요?”

연희와 미주가 참새처럼 쫑알댔다.

“호주.”

“우와아아!”

“지성아, 애들 데리고 숙소로 가.”

“응. 가자!”

성 대표가 급히 나섰다.

“너희 오늘부터 식단 조절해. 호주 갈 때까지 살 빼야 한다고.”

가장 살이 많이 찐 연희가 겁부터 먹었다.

“오늘부터요?”

“그래! 야식 시켜먹으면 혼날 줄 알아! 이번 신곡. 너희가 뚱뚱해서 실패했다는 말 듣고 싶지 않으면 열심히 살 빼.”

“알았어요.”

리즈와 서연을 빼고 급격히 시무룩해지는 멤버들이다.

서연이 나섰다.

“제가 잘 단속할게요. 애들도 이미 각오했어요.”

“그래. 잘하리라 믿는다.”

“저희 갈게요!”

“작곡가님 수고하셨어요!”

멤버들이 밝은 표정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앉으시죠.”

남은 세 사람은 탁자에 둘러앉았다.

작곡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의논 끝에 방준혁 작곡가는 로즈 엔터의 인 하우스 작곡가가 되기로 했다. 회사 소속이면서 외부 작업도 할 수 있는 형태다. 월급은 없고, 음원 수익의 3%를 받는 방식.

음원 수익이 10억은 되어야 3천만 원을 받는다.

이른바 차트 지붕 킥을 해야 얻을 수 있는 수익이다.

그러니 월급으로 따지면 그리 많지 않은 액수가 될 터였다.

곡비는 작곡, 편곡 합쳐서 두 곡에 1천만 원.

작곡은 나와 공동작곡으로 했다.

나보다 방준혁 작곡가가 이런 계약을 원했다.

내 옆에 머물면서 곁불 좀 쬐겠다는 의미다.

그 곁불이란 음악의 영감일 테고.

* * *

기분 좋게 사무실을 나섰다.

지잉-

[애플시네마 프로듀서 김희석이라고 합니다. 시간 좀 나시면 연락 주십시오.]

또 모르는 분에게서 문자가 왔다.

오늘 오후에만 벌써 세 번째.

오늘 무슨 날인가?

나는 보스다 책 때문인 건가?

김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난데… 혹시 회사에 뭔 일 있어?”

-야!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다! 우리 작품 황정우가 긍정적으로 검토한대! 지금 전화받느라 정신없어서 연락 못했다.

“어느 선까지 말이 나왔는데?”

-황정우가 적극적으로 하고 싶어 한단다! CG에서도 관심 있다고 하고. 지금 여기저기서 숟가락 하나 올려 보려고 난리도 아니야. 너 추가 투자한다며? 빨리해라. 늦으면 자리 없어.

“진짜야?”

-그래! 나 바쁘다, 끊어!

전화기 속에서 벨 소리가 요란했다.

어떤 상황인지 대충 알 것 같다.

나는 보스다 책을 투자사와 기획사 등에 돌렸는데 한국 4대 흥행 배우로 꼽히는 황정우가 낚아챘던 거다. 그러자 대형투자배급사 중 하나인 CG E&M도 관심을 보이는 거고.

그 책 소문이 나서 중소 영화사는 물론 메이저에서도 내게 관심이 갔던 거였다.

투자자들이 몰리는 상황이라면 몇 달 뒤에는 내가 투자할 몫이 사라질 수도 있다. 제니스 신곡 수익 정산 때까지는 좀 늦으려나.

김판수에게 문자를 보냈다.

[촬영 기간에 추가 투자할 수도 있으니까, 내 자리 좀 비워 놔. 10억 정도. 배급사에는 나머지 투자까지 결정되었다고 하고.]

[ㅇㅋㅇ.]

“휴…….”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메인투자는 CG와 투자사 사장님의 몫.

그 외 작은 회사들이 5억에서 10억 정도 투자한다.

로즈 엔터는 그 작은 회사 몫.

* * *

며칠이 더 지나 드디어 오늘.

녹음 날이 되었다.

가사는 신곡이 나온 다음 날 완성했다.

멤버들이 보내준 가사를 내가 수정했는데 녹음 날짜가 얼마 안 남아 오래 붙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후 보컬 선생이 무지막지하게 신곡 연습을 시켰다.

그래도 부족했는지 보컬 디렉팅까지 해주겠다고 했다.

작곡가도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보컬 디렉팅은 아직 무명인 방준혁 작곡가도 배워야 할 부분이었다.

녹음실에 가자 멤버들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나와 보컬 선생이 들어가자 그제야 애들이 긴장했다.

“연습 잘했니?”

“네!”

보컬 선생 말에 멤버들이 활짝 웃는다.

자신감이다.

작곡가가 말했다.

“세라부터 들어가. 세라가 기준을 잡아야 해.”

“알겠어요.”

멤버들은 개별 녹음을 한다.

연습이 곧 녹음이었다.

“자, 간다.”

작곡가의 신호에 스튜디오 엔지니어가 음악을 틀었다.

전주 이후 세라가 노래를 불렀다.

보컬 선생이 바로 디렉팅 버튼을 눌렀다.

“세라야. 호흡이 약간 뜬다. 다시.”

세라의 노래가 이어졌다.

잘 진행이 되다가 또 디렉팅 버튼이 눌려졌다.

“너와 난 모호해 모호해. 할 때. 모호해 모호해가 잘 안 붙어. 발음이 눌리는 느낌이니?”

“네. 약간요.”

“실장님. 가사 수정될까요?”

“뒤쪽 모호해를 애매모호로 바꾸죠.”

“세라야, 해볼래?”

세라가 다시 노래를 불렀다.

“너와 난 모호해. 애매모호해.”

“이제 자연스럽네.”

실제로 노래를 불러보질 않았으니 발음이 눌리는 걸 알 턱이 있나. 모호해를 연달아 부르니 발음이 어렵긴 하다.

세라 파트의 녹음은 무사히 마쳤다.

이어 연희 차례.

“연희야, 빨라! 음악 안 듣고 너 혼자만 노래할 거야!”

“다시 할게요!”

“날 멈추게 하지 마. 에서 왜 하지-마. 하고 올리니?”

“가이드에서 여기 밴딩했는데요?”

“가이드는 가이드고!”

“잘 할게요!”

이후에도 디렉팅이 쏟아졌다.

“힘이 줄어들잖아! 호흡 유지!”

“싱잉 악보 안 볼 거면 왜 들고 들어갔어!”

“억지로 밴딩하지 말고 담백하게!”

“끝 음 조금만 더 끌고!”

“반음 올렸다고 내려오면서 꺾어!”

“뱃심 기르라고 내가 몇 번 말했니!”

“박자 밀린다! 다시!”

“몸에 힘 빼고! 편하게 불러야지!”

“호흡! 노래에만 신경 쓰니까, 숨 쉬는 걸 깜박하잖아!”

“자, 한 소절씩! 정박에 하나씩!”

한바탕 폭풍이 몰아쳤다.

녹음실에 적막이 흐를 지경.

삐걱.

연희가 사색이 된 채 녹음실에서 나왔다.

그 모습을 보고 보컬 선생이 혀를 차며 안아주었다.

“잘했어. 내가 너 미워서 그랬겠니.”

“네.”

멤버들 모두 연희를 안아주었다.

이런 혹독한 녹음은 다들 처음인 것 같다.

보컬 선생이 믿음직스러웠다.

다음은 서연.

원래 메인 보컬이 그녀다.

리더라 그런지 보컬 선생의 디렉팅도 달라졌다.

“내 작은 떨림을 너만이 잡을 수가 있어. 여기에 너만이를 두 음이 아니라 한 음으로 붙여 봐. 작곡가님 괜찮죠?”

“네.”

이어지는 서연의 노래에 보컬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훨씬 낫네.”

서연이 말했다.

“저 그런데 애태우지 마. 이 부분요. 비브라토를 4개가 아니라 3개로 하면 안 될까요? 앞 후렴구에 숨 쉴 여유가 부족해서 호흡이 좀 딸려요.”

“그래. 그게 낫겠다.”

서연은 무난하게 녹음이 끝났다.

이어 미주.

미주도 보컬은 영.

아니나다를까. 호통이 이어진다.

“룩 앤 미 베이비에서 액센트가 커!”

“조금 더 편하게!”

“호흡 섞어서. 공기가 없잖아! 그 유명한 공기!”

“가사 내용 모르니? 담담한 게 아니라 유혹하는 거야!”

“왜 콧소리를 넣어? 너 에로영화 찍어?”

“감정 과잉! 다시!”

“미주야! 잠시 쉬었다 가자.”

“오케이! 잘했어!”

미주도 혼쭐이 난 채 녹음부스에서 나왔다.

동병상련을 느낀 연희가 살포시 안아준다.

이어 리즈 차례.

리즈는 방준혁 작곡가가 직접 디렉팅했다.

발음. 톤. 속도. 이 세 번의 디렉팅만으로 녹음을 끝냈다.

시계를 보자 벌써 아침이다.

밤을 꼬박 새웠다.

느낌이 좋다. 이대로만 가자.

며칠 더 녹음하고 나면 바로 호주행이다.

이제 남은 산은 뮤직비디오.

* * *

나와 제니스 멤버들이 차례로 캐리어를 끌고 나왔다.

다들 감격한 표정으로 앞을 보았다.

낯설고 이국적인 풍경. 들리는 말은 죄다 영어.

공기의 냄새마저도 다르다.

미주가 외쳤다.

“헬로우, 시드니!”

호주 시드니에 도착했다.

리즈 빼곤 외국에 온 게 다들 처음이다.

멤버들만큼이나 나도 흥분되었다.

앞으로 있을 고생이 좀 걱정되긴 했지만.

우리 앞에 중형 버스 하나가 멈췄다.

그 차에 지성이가 타고 있었다.

“얼른 타.”

멤버들이 신이 난 얼굴로 버스에 올랐다.

그 뒤로 카메라를 든 VJ 5명이 줄지어 버스에 오른다.

그 중엔 연출부 막내 승철이도 있다.

촬영 때 유일하게 친해진 스태프가 승철이다.

음악방송인 뮤직넷 연출부에 있다가 원래 꿈인 영화를 찍으려고 이직한 친구다. 예능 편집을 많이 해 본 친구인데다, 실력도 제법 있어서 이번 다큐 및 뮤비 촬영의 감독을 맡겼다. 이전에 투자사에서 했던 PT도 승철이가 만들어 줬고.

레코딩 전까지 승철이와 촬영 일정과 시트를 미리 짜 놨다.

VJ는 다큐를 찍고 승철이 팀은 뮤비용을 따로 찍는다.

첫째 날. 시드니 항구와 요트 촬영.

둘째 날. 호주 서부 사막 촬영.

셋째 날. 브리즈번 시내 쇼핑 촬영.

넷째 날. 브리즈번 클럽 촬영.

귀국한 뒤 클럽과 세트장에서 보충 촬영.

다큐는 멤버들이 놀거나 숙소에서 쉬는 장면을 아무런 콘티 없이 자유롭게 찍는다. 뮤비는 요트 탑승. 사막 트래킹. 시내 활보. 클럽 등등을 따로 찍고.

VJ 5명 고용에만 1천만 원이 들었다.

승철이와 연출 및 조명팀 5명에게는 2천만 원.

조명기기와 카메라 임차에 500만 원.

여행 경비 및 비행기 푯값에 4천만 원.

그 외 진행비 약 1천만 원.

모두 9천만 원.

대형기획사에서도 뮤직비디오를 찍는 비용이 1억 5천에서 2억 정도다. 훨씬 더 싸게 찍을 수도 있지만 홍보 다큐를 겸한 촬영이라 돈을 좀 썼다. 투자하지 않고 수억 대 음원 수익을 바랄 수는 없으니.

촬영 일정이 강행군이었다. 그러나 멤버들은 이동 틈틈이 잠을 자고 촬영지에 도착했을 때는 신 나게 놀았다. 일정 장소에 갔을 때는 승철이의 연출에 따라 3시간가량 뮤비용 영상을 찍었다.

다큐든 뮤비든.

말 그대로 자유로움을 찍었다.

아니, 광란의 자유였다.

* * *

4일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바로 세트장과 이태원 클럽에서 보충 촬영을 했다.

호주에서 3박 4일 동안 멤버들은 그야말로 자유를 만끽했다. 리조트나 관광지에서 제 마음대로 놀다가 특정 장소에 갔을 때만 뮤비용 촬영을 했으니.

6일간 찍은 영상은 바로 편집에 들어갔다.

뮤직비디오는 국경의 끝을 편집해준 편집실에서 했다.

다큐 편집은 승철이가 직접 했고.

10분씩 8화.

승철이가 이틀 만에 3회분을 편집했다.

“어때요?”

“괜찮네.”

만족스러웠다.

제니스의 본 모습이 제대로 드러났다.

자유분방함을 넘어 제멋대로 논다.

드론으로 찍은 사막 트레킹 장면은 정말 잘 나왔다.

브리즈번 시내를 활보하는 장면도 좋았고.

영상을 올릴 플랫폼은 V앱. 제니스 채널.

승철이에게 말했다.

“22일 저녁 8시에 1화 올려.”

“예. 근데 형. 뮤직넷은 생각 없어요?”

“왜? 누가 관심 있대?”

“호주 가기 전에 내 사수였던 서 PD한테 제니스 예능 다큐 찍으러 간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잘 찍었냐고 연락이 온 거예요. 전 생각도 안 했는데.”

“그래서?”

“오늘 연락이 왔어요. 전체 내용 한번 보자고요.”

V앱보다야 방송이 백번 낫다.

“서 피디를 만나 봐. 22일 전에는 결정이 나야 돼.”

“알겠습니다.”

* * *

이틀 후 승철이와 함께 뮤직넷 방송사로 왔다.

“서 PD님 반응이 좀 의외인데요.”

“뭐가?”

“어째 좀 적극적이에요. 대형기획사들도 PD들한테 싸바싸바해서 무슨 조건 걸고 소속 연예인들 예능에 투입하는데, 이번 제니스 다큐는 이상하게 관심을 보이잖아요.”

다큐 영상이 잘 나와서 그런가.

승철이와 함께 사무실로 들어갔다.

의자에 늘어져 있는 남자가 서 PD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니스 기획사 최신성 실장입니다.”

“반갑습니다. 서창섭이라고 합니다.”

서 PD가 자리를 옮기자고 해서 휴게실로 향했다.

승철이가 들고 온 캔 커피를 서 PD에게 건넸다.

PD가 말했다.

“다큐 확인해봤습니다. 소소한 재미는 있더라고요. 10분짜리 8화로 편집했던데, 기존 예능 꼭지로 넣기는 좀 애매하네요.”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제니스 10월 3일 정오에 신곡 발표한다고 했죠?”

“그렇습니다.”

“14일 남았네요. 그러면 재편집해서 일주일 안에 다 내보내야 하는데, 매일 편성은 어려워요. 제니스 다큐는 따로 예산과 편성을 잡아야 합니다.”

서 PD가 잠시 주저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조건을 좀 맞춰주셔야 합니다.”

“무슨 조건이죠?”

“다큐가 외주 제작이라 납품 단가를 낮춰야 하거든요. 국장님하고 이미 말은 끝냈어요. 조건만 맞으면 특별 편성 가능합니다. 어떠세요?”

특별 편성이니 돈을 내라는 줄 알았다.

서 PD가 다시 말했다.

“까놓고 말할게요. 본사 제작이든 외주든 호주 가서 다큐 찍었으면 수천 듭니다. 그 수천을 드릴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제 욕심도 있어요. 호주 편은 1부 2부로 나눠서 내일과 다음 주 토요일에 방영하고. 신곡 발표 상황과 그 후 상황까지 한국 편은 저희가 찍어보고 싶습니다. 40분씩 총 4부로요.”

조상미 감독에게 한 번 당하고, 드라마 작가에게 비슷한 일을 겪다 보니 내게 선입견이 생긴 모양이다. 편성이 안 된다는 말을 해 놓고 돈을 뜯어낼 줄 알았다.

“다큐를 얼마에 사시려고요?”

“저희 예산문제도 있고 해서 천에 합시다. 사실 천도 꽤 나가는 건데, 그림이 좋아서요. 호주 아닙니까, 호주.”

“그런데 내일 방송이 가능합니까?”

“승철이가 편집한 걸 제가 오늘내일 재편집하면 방송할 수 있습니다. 데스크 결재는 바로 나올 거고요.”

“그러면 그렇게 해주세요.”

“출연료도 넉넉하게 드릴게요.”

“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살펴가십시오.”

두 사람이 맞절을 하자 승철이가 킥킥대며 웃었다.

내가 서 PD를 제대로 오해했다.

따지고 보니 호주까지 가서 찍은 다큐를 거저먹고 방송하는 건 말도 안 되는 거다. 거기에 방송해줄 테니 돈 내라.

아무리 PD의 힘이 세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

서 PD도 그렇고 예능 국장도 그렇고.

왜 제니스 다큐에 이렇게 관심이 큰 거지?

서연 때문일까. 영상 퀄리티 때문일까.

어째 주도권이 내게 있는 것 같은 위화감이 느껴졌다.

* * *

다음 날 토요일 저녁 8시 50분.

로즈 엔터의 모든 식구가 제니스 숙소에 모였다.

어젯밤부터 제니스 다큐를 방송한다는 광고가 나오더니, 오늘은 프로그램 끝날 때마다 예고편 광고가 나왔다.

놀랍게도 tvM과 영화 채널 온무비에서도 광고가 나온다.

대체 왜?

미주가 채널을 틀어보다가 말했다.

“언니. 이상하지 않아? 왜 우릴 이렇게 띄워 주는 거지?”

다들 대꾸가 없었다.

뮤직넷에서만 띄워 줘도 왜 이러지? 하는 판인데 여러 채널에서 동시에 광고를 해준다. 이건 방송사 국장들 지시가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뮤직넷. tvM. 온무비.

세 채널 모두 대형투자배급사 CG E&M 계열사다.

이거 어째 묘한데?

그때였다.

김판수에게 전화가 왔다.

-야!

“왜?”

-야, 인마!

“뭐야? 술 먹었어?”

-우리 영화! 황정우와 계약했다! 으하하하하!

띠-

이 무슨….

어이없으면서도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기대는 했는데 정말 황정우 배우가 하다니.

가장 큰 산을 넘고 나니 가슴이 후련했다.

황정우가 캐스팅되었다면 CG E&M과 계약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투자사 사장님은 CG가 계약하기만을…

가만?

설마……!

급히 문자를 보냈다.

[사장님. CG 임원들과 친분이 있으세요?]

[있지. 지금도 술 한잔하고 있네만.]

[혹시 제니스에 대해 말씀하셨는지요?]

[나는 보스다 작가가 기획사를 하고 있다고는 했지.]

이런! 설마가 사람을 잡았네.

[제가 하는 일을 보시고 계셨어요?]

[보고는 받고 있지. 도움이 좀 됐나?]

[그렇긴 한데요.]

[시나리오 분석 한 번은 무료로 해주게.]

참나.

어르신한테 귀엽다고 할 수도 없고.

[네. 한 번은 공짜로 해드리죠.]

[수고.]

쿨내가 진동한다.

본인 손해 없이 슬쩍 도움을 주고는 이득을 챙기신다.

이번 일은 천만 원의 10배 이상의 가치가 있다.

반복적인 광고에 세 채널 동시 방영까지.

서 PD가 왜 편성에 마음이 급했는지 이제야 알겠다.

국장이 아닌 방송사 사장님 지시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특혜다.

이걸 넙죽 받아먹어도 되는지 모르겠네.

어쨌거나 다큐가 방송되었다.

멤버들이 분주하게 공항으로 가는 장면부터 시작.

요트를 타고 신 나 하는 장면과 사막을 걷는 장면이 정말 아름답게 나왔다. 배경은 멋지고 멤버들은 예쁘고.

1편은 멤버들이 브리즈번에서 쇼핑하는 장면까지였다.

2편 예고는 클럽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는 장면.

다큐가 끝난 뒤 멤버들이 서로 보았다.

쑥스럽기도 하고 만족스럽기도 하고.

“벌써 기사 떴어!”

“어디?”

다들 지성이의 스마트폰에 머리를 모았다.

기사가 둘이나 올라왔다.

<걸그룹 제니스의 호주 뮤비 촬영기!>

<제니스의 대변신! 호주에서 무슨 일이?>

두 기사에 댓글이 좀비처럼 매달리고 있었다.

[제니스 비글미 쩌네.]

[리즈 방귀 뀌고 도주. 현웃 터짐. ㅋㅋㅋㅋ]

[제니스 언니들 성격 좋아 보여요. 다시 봤어요.]

[호주에는 왜 감?]

[신곡 뮤비 촬영. 제니스 신곡 나옴. 3일에.]

[쇼핑 대폭주! 이런 미친 ㅋㅋ]

[리즈 드립 개웃김.]

[그게 뭐임?]

[안 먹었는데 이상하게 살이 찌는 이유.]

[?]

[귀신이 고칼로리시네. ㅋㅋㅋㅋ]

[ㅋㅋㅋㅋ]

[ㅋㅋㅋㅋㅋ]

이만 하면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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