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신성 차기작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했다.
영화 개봉 후 차기작까지 공백기인 지금.
시나리오 작업을 몇 편 해놔야 하는 시기다.
안 그래도 여기저기서 같이 작업하자고 연락이 온다.
영화판은 인맥 우선으로 작업하고, 그다음 흥행한 영화의 크레딧을 보고 물어물어 연줄을 만든다.
신성영화사에 내 폰 번호를 묻는 전화가 여러 번 왔고, 국경의 끝 책에 있는 번호를 보고 직접 연락한 경우도 있었다.
지금까지 5곳에서 연락이 왔다.
아쉽게도 메이저 영화사는 없다.
큰 회사에는 이미 작업하는 작품이 있고, 작가 풀도 제법 넓기 때문이다. 메이저에는 내 발로 찾아가지 않는다. 그쪽에서 큰 몸값을 제시하고 먼저 오기 전까지는.
기대는 했지만 영화 한 편의 흥행과 작품성만으로 소문이 퍼진다. 이러니 잘 되는 놈만 잘되고, 안 풀리는 사람은 뭘 해도 안 풀리는 거지. 검증과 연줄이 가장 중요하니까.
일단은 조약돌의 작품 각색을 하고, 다른 작품은 차차 하기로 했다. 중소 영화사 각색은 많아야 천만 원. 그 이하면 안 하기로 했다. 질질 끄는 회사는 아예 안 할 생각.
신성 차기작도 이번에 준비하기로 했다.
이 대표님은 내가 원안을 들고 오기를 바라시는 터라 시놉시스를 안기면 넙죽 받아드실 기세다.
집에 도착했을 때 반가운 문자가 왔다.
이갑성 대표를 소개해준 은인.
김영석 선배였다.
주차를 한 뒤 냉큼 달려나갔다.
* * *
홍대 고깃집에서 근 여섯 달 만에 선배와 만났다.
선배님이 날 보자마자 덥석 날 안았다.
“축하한다. 국경의 끝 흥행한다며?”
“네. 운이 좋았어요.”
선배님이 장하다는 듯 날 보았다.
선배도 나도 자리에 앉았다.
“제작실장 아무나 하는 거 아닌데, 사고 안 치고 잘했다며?”
“이 대표님 도움이 컸어요. 많이 배웠죠.”
“그래. 네가 입봉하니까, 내가 다 후련하다.”
선배에게 소주를 따라 드렸다.
소주를 채운 잔으로 선배와 건배를 했다.
둘 다 웃으며 한잔 들이켰다.
“선배는 요즘 작업해요?”
“씨네박스에서 작업하고 있어.”
선배의 얼굴이 굳어졌다.
씨네박스는 메이저 급 영화사다.
무슨 힘든 일이 있는 듯.
“잘 안 풀려요?”
“벌써 3고째 굴리는 중이다. 중국 투자사 돈이 들어왔는데 그쪽에서 요구하는 게 많아서 엄청 까다로워. 배우도 권양기 아니면 안 한다고 하고.”
“뭔 영환데 연기도 못 하는 권양기를 쓴데요?”
“전쟁 영화. 중국 투자사 사장이 권양기한테 꽂힌 모양이야. 이번 작품 정말 정이 안 간다. 3고로 손 털기로 했다. 선금 천 받고 3개월 굴렀으면 할 만큼 했지 뭐.”
“형이 손 떼면 다른 작가 부르겠네요.”
“그래. 이미 돈이 들어와서 영화를 엎을 수가 없거든. 나 전에도 두 명 거쳐 갔어. 씨네박스 원안이기도 하고.”
선배에게 다시 소주를 따라주었다.
“혹시… 연출부 일 안 해볼래요?”
“연출부? 신성에서 말이야?”
“예.”
나도 선배도 웃었다.
몇 개월 전과 입장이 바뀐 상황이었으니.
* * *
김 선배와 술을 먹고 이틀 후 월요일.
책상에 앉아 ‘나는 보스다’의 구성을 정리했다.
원안은 대놓고 웃기려는 코미디물이다.
그런데 코미디를 위한 코미디는 한국 관객에게는 안 먹힌다. 코미디는 영화를 재미있게 하는 하나의 요소일 뿐.
해서 스릴러 기법으로 갔다. 인물들은 매우 진지한데 일반 코미디보다 더 웃기고, 서스펜스를 강화해서 긴장감을 극도로 높이게 했다.
참고한 작품은 영화 ‘끝까지 간다’와 ‘주유소 습격 사건.’ 그리고 가이 리치 감독의 영국 영화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 이 세 작품의 장점만 따서 구성을 배치했다.
주인공이 곤경에 빠지는 상황은 끝까지 간다.
막판 난장판이 벌어지는 건 주유소 습격사건.
사건. 상황. 인물. 각 퍼즐이 하나로 엮이는 부분은 가이 리치 감독의 영화들과 재치 발랄한 트릭 영화에서 땄다.
마지막 몹신의 큰 그림을 먼저 그려 놓고.
그 그림의 퍼즐을 조각조각 분리한 다음.
사건과 인물을 씨줄 날줄로 엮어 들어갔다.
입체 영상을 통해 그 관계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영화 시작 직후 몰입을 위한 긴박한 상황 발생.
15분 만에 영화의 동력이 되는 사건 시작.
1시간 무렵 주인공이 결단을 내리는 터닝포인트.
1시간 20분 대반전을 위한 상황에 진입.
1시간 40분 차츰 퍼즐 조각이 그림이 되어가고.
1시간 50분 그림 완성. 숨 막히는 클라이맥스!
모든 씬을 배치한 뒤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의도한 모든 것들이 맞물려 들어갔다.
이젠 쓰기만 하면 될 뿐.
오전 11시.
노트북에 문서를 띄운 뒤 각색 작업에 돌입했다.
작업하면서 뭔가 다른 점을 느꼈다.
국경의 끝을 쓸 때는 약 3시간에 걸친 정리 끝에 초고 작업에 들어갔는데, 이번엔 아이디어 숙성 과정이 있었다. 작업 속도는 똑같았으나 글의 퀄리티가 엄청 높아졌다.
한 7년은 공을 들인 작품처럼.
* * *
조폭 코미디 ‘나는 보스다’는 다음 날 오후 6시에 끝났다.
이번에도 물리적인 작업 시간 그대로.
작업 도중에 계약 관련 연락이 와서 휴대폰을 꺼버렸다.
날이 갈수록 날 찾는 전화가 늘어난다.
기분 좋게 써 놓은 시나리오를 저장했다.
188씬. 106쪽. 상영시간 약 120분.
쓰면서도, 쓰고 나서도 감탄을 연발했다.
국경의 끝보다 더 좋았다.
첫 장면부터 골 때리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관객을 계속해서 밀어붙인다. 배꼽이 쉴 틈을 안 준다. 긴장과 이완이 있어야 하기에 일부러 쉬어가는 장면을 넣어야 할 정도였다.
막판으로 치달으면 내가 다 숨이 막힐 정도로 몰아붙인다. 코미디로 몰아붙이고, 긴박감으로 몰아붙인다. 꼬였던 퍼즐이 하나씩 맞춰지면서 인물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광장에 모여든다. 그리고 한바탕 난장판을 벌인다.
거대한 생쇼. 화끈한 액션. 통렬한 사기극.
쓰면서도 웃었고, 다시 보면서도 웃었다.
너무 웃어서 눈물이 난 장면도 있다.
마지막엔 묵직한 반전. 끝내기 홈런 한 방!
속이 다 시원했다.
시나리오를 쓰고 이렇게 기분 좋고 후련하며 재미있는 건 처음이다. 언제나 내 작품은 어딘가 불안했다. 국경의 끝을 쓸 때도 불안감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확신했다. 이 작품 초대박이 난다고.
지금까지 본 한국 영화 중 이렇게 많이 웃은 영화는 없었다. 주성치 감독의 영화나, 총알 탄 사나이처럼 작정하고 만든 코미디도 아니다. 인물들은 매우 진지하니까.
코미디라기보다는 눈물 나는 희극이다.
주제 같은 건 없다. 막장 인생의 통쾌한 한 판 승부일 뿐.
상업영화의 극치를 보여줬다고 자평했다.
정말이지 마음에 들었다.
이보다 더 잘 쓸 수는 없고, 이 작품보다 나은 작품도 나오기 어려울 것 같았다. 코어가 없었다면 몇 년은 머리 싸매고 굴리고 굴려야 이 수준으로 나올 것 같다.
맥주를 마시면서 감탄의 헛웃음이 계속 났다.
빨리 조약돌 대표에게 시나리오를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어쩌면 이 작품이 내 영화 인생의 전환점이 될지도.
* * *
다음 날 오전.
‘내가 보스다.’ 시나리오 편집 및 교정에 들어갔다. 국경의 끝보다 훨씬 더 잘 나온 시나리오라 딱히 고칠 데도 없었다. 내가 썼는데도, 세 번이나 읽었는데도 웃기는 장면에선 실실 웃음이 나온다.
벤허 감독이 그랬던가.
신이시여, 이 영화를 정녕 제가 만들었단 말입니까.라고.
내 심정이 딱 그렇다.
무난하게 교정하고 편집을 했다. 철저히 상업영화의 틀 안에서 교정하고 수정했다. 작품성이 높아야 하는 국경의 끝과 달리 영화 기법을 그리 녹이지 않았다.
캐릭터와 더 나은 상황에만 치중했다.
오후 2시에 편집과 교정을 모두 끝냈다.
영화 현장을 경험했고, 코어 레벨도 이전보다 높아진 터라 바로 영상화 및 분석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침대에 누웠다. 머리맡에 두통약과 물을 준비한 뒤.
코어를 발동했다.
과연 이 영화는 어떤 분석 결과가 나오는지.
머리가 아프면 일시 중단하고 쉬었다가 다시 가동했다.
이전에 영상화할 때는 5분쯤 지나면 머리가 아팠으나 이제는 최대 7분은 간다.
6분하고 5분 쉬기를 반복!
* * *
저녁 7시에 마침내 영상화 확인이 끝났다.
최고의 작품이 될 거라는 내 짐작은 맞았다.
정말 눈물 나게 재밌었다.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은 여운을 가라앉히며 물을 마셨다.
차분하게 영화 내용을 정리한 다음.
전처럼 분석해보기로 했다.
분석 재료는 전과 대동소이.
영화의 작품수준. 흥행성. 관객 예상 반응. 현 관객의 선호도. 목표 관객층. 감독의 성향. 코미디의 예상 반응. 기존 코미디 영화와의 차이. 예측 개봉관 수. 예상 흥행 수익 등.
그 재료를 토대로 포괄적이면서도 정밀한 분석에 들어갔다. 영상을 구현할 때는 코어를 풀 가동하기에 7분이 지나면 머리가 아팠지만 광역 분석 때는 최대 10분까지 가능했다. 코어가 두세 레벨은 오른 듯.
한 시간에 걸쳐 모든 분석이 끝났다.
나도 알 수 없도록 결과를 차단한 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결과 창을 열었다.
이럴 수가!
일순 숨이 멎었다.
제작비 약 65억. 마케팅 비용 약 35억 -> 총제작비 100억.
예상 관객 수 -> 약 1250만.
흥행 수익 -> 약 1200억.
극장 수익(영화발전기금 + 세금) 50% 공제 후 -> 600억.
배급사 수수료 10% 공제 후 -> 540억.
메인투자사 관리비 2% 공제 후 -> 529억 2천만.
총 제작비 100억 공제 후 -> 429억 2천만.
투자사 순수익 60% -> 257억 5천2백만.
제작사 순수익 40% -> 171억 6천8백만.
부가 판권 수입 -> 약 15억.
해외 판권 수입 -> 약 45억.
판권 수입 제작사 배분 -> 약 24억.
5단계 정산 시 제작사 순수익.
195억 6천8백만.
멍하니 수치들을 보고 있었다.
신생 영화사가 처음 만든 영화 수익이 200억이라니.
이걸 정말 믿어야 할까?
정말 믿을 수 있을까.
수익 배당이 있기는 하지만 제작사가 버는 돈이 너무 많다. 정말 이 영화가 대박 난다면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꼴 아닌가.
신생 영화사 조약돌.
영화 만든 적 없고, 대표는 생초보이며, 감독도 영화 현장 무식자다. 대표가 금융회사 다니던 엘리트답게 어떤 영화를 찍어야 돈이 되는지는 안다. 유학파 감독이 첫 작품은 작가주의 시나리오를 썼다던데 대표가 설득해서 이번 소재를 선택했다고 들었다.
그런 신생 제작사가 첫 작품으로 초대박을 치다니.
물론 감독이 제대로 찍어야 하며, 4대 투자배급사 중 하나가 배급해야 예측한 대로 흥행할 수 있다. 이 회사들은 자사가 제작한 영화를 주로 독점적으로 배급한다. 과연 영화사 조약돌이 배급을 따낼 수 있을까.
그나저나 내가 이 영화로 이익을 얻을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이 영화에 투자하는 것!
* * *
침대에 누워 나는 보스다에 투자할 방법을 모색했다.
시나리오를 닥치는 대로 써서 한 1억 더 모을까.
아니면 은행 대출이라도 받아볼까.
우선 계산부터 해보자.
이왕이면 최대치 15억을 투자했다고 치자.
제작비 100억. 투자사 순수익 257억 5천만 기준.
내 투자 비율 15%면 순수익이 38억 6천2백5십.
부가 판권의 투자사 수익 배당은 36억.
그 중 내 수익은 5억 4천가량.
합쳐서 44억 남짓.
10억 대출에 법인 소득세 20% 세율로 가정하고.
대출금과 이자 및 소득세를 떼면 총수익 25억 정도.
게다가 작가 계약서에 흥행 배당을 3%로 잡았다.
배당금. 약 5억 8천7백.
내 순수익이 무려 30억!
손이 덜덜 떨린다.
이 영화는 100억 대 제작비가 들기 때문에 투자사가 여럿 붙을 수 있다. 여러 투자사가 분산 투자하기에 한 회사가 큰 순수익을 보지는 않게 된다. 그러나 대형 투자배급사가 대부분 투자하고, 배급까지 하면 초대박을 치게 된다.
어떻게든 대형 투자배급사와 계약해야 한다. 그러면 성수기에 개봉 첫날 1000개 이상의 극장에 걸릴 가능성이 커진다.
한마디로 기대작이 된다는 뜻.
그러나 리스크 때문에 투자배급사는 메인투자사로 50억 이하로 투자할 것이다. 메인투자 전에 나와 은밀한 관계가 있는 투자사 사장님도 투자한다. 국경의 끝 정산이 나올 시기이기에 어차피 차기작 투자를 해야 할 테고.
대출은 사장님을 통해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정산 후 수익에 비하면 대출 이자는 아무것도 아니다.
영화 제작 과정에서 변수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천만 관객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박은 난다.
흥행 예측을 낮게 잡아도 수익성이 크다.
그런데 대출까지 해서 투자를 해야 하나.
내 돈 5억만 투자하는 건 어떨까.
그러면 수중에 1억 8천이 남는다.
2억이면 제니스 신곡 활동 자금은 너끈하다.
곡만 잘 만들면 거기서도 수익이 나올 테고.
그렇다고 투자를 아예 안 하려니 솔직히 아쉽다.
조약돌이 돈을 쓸어 담는 걸 구경만 해야 하니까.
내 돈 5억을 투자해도 세금 제하고 16억 정도는 번다.
정산 수익 14억 6천에, 수익 배분 5억 8천 합쳐서.
수익 배분 3%가 6억에 가까운 덕분이다.
내가 영화를 제작하기엔 아직 경력과 인맥이 일천하다.
신성 차기작인 오천일 조감독 입봉작도 돕고, 김 선배의 감독 입봉까지는 지원한 뒤 감독 도전을 해 볼 생각이다.
영화 제작은 그다음.
아마 그땐 신성에서 독립하겠지.
세 가지 갈림길에 섰다.
1. 10억을 대출받아 10억만 투자한다.
2. 그 10억에 내 돈 5억을 합쳐 15억을 투자한다.
3. 내 돈 5억만 투자한다.
코어는 3번을 권한다.
5억 투자에 16억이면 수익도 좋고, 자금도 2억 남으니.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 * *
조약돌 픽쳐스 대표와 감독을 만났다.
김판수도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메일로 시나리오를 보냈는데 바로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세 사람 다 말이 없었다.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는 날 무슨 괴물을 보듯 볼 뿐.
감독이 먼저 입을 뗐다.
“한국 작가들은 원래 이렇게 빨리 씁니까?”
“작품마다 다르죠. 몇 년씩 굴리는 작품도 있고, 석 달 만에 완고내는 작품도 있고요.”
“전 시나리오 보고 무섭기는 또 처음이었네요.”
“무섭다니요?”
“제 말은 그러니까. 그냥 좀 충격적이라서요.”
대꾸없이 커피를 몇 모금 마셨다.
대표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김판수는 어째 날 쏘아보는 듯하고.
“왜 그렇게 봐?”
“이거 네가 쓴 거 확실해?”
“내가 훔치기라도 했다는 거야?”
“너 찌질이 일 때는 이렇게 못 썼잖아?”
“형! 찌질이가 뭡니까? 작가님한테.”
대표님의 역정에 김판수가 꼬리를 말았다.
어쨌든 조약돌 대표는 김판수의 생명줄이다.
“그게 아니라. 최 작가가 몇 년 전에는 이렇게 기막힌 작품을 못 썼거든. 합리적인 의심이다 이거지.”
대표가 날 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최곱니다. 저도 꽤 충격을 받았는데 친구하고 와이프에게 보여줬더니 재밌다고 난리를 치더군요. 저 아직 영화 잘 모르지만 관객이기도 하잖아요. 이 작품 보면서 확신했습니다. 잘만 만들면 대박이라고요.”
감독도 한마디 거들었다.
“제가 썼던 건 이 책 보자마자 다 잊었습니다. 오히려 이걸 어떻게 찍어야 작가님한테 욕을 안 먹을까 걱정을 했네요. 제가 보기엔 더 고칠 것도 없습니다. 완벽한 시나리오란 없다는 주의였는데, 제가 제대로 한 방 먹었네요.”
예상했던 바다.
나도 내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었던 건 처음이니까.
“프리 준비는 되고 있나요?”
“판수 형이 얼추 준비는 하고 있었죠. 투자만 받으면 바로 프리 프로덕션 들어갈 수 있습니다. 판수 형이 스태프 리스트까지 다 뽑아놨거든요.”
“다시 뽑아야 합니다. A급으로요.”
내 말에 대표와 감독이 김판수를 보았다.
김판수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난 회사가 신생이라 저예산으로 찍을 줄 알았지. 이게 100억대 작품일 줄 알았겠냐고.”
“대표님이 생각해둔 투자자가 있죠?”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영화 사업에 관심 있는 지인이 있습니다. 금융사이긴 한데 콘텐츠 사업에 투자할 생각이 있어요.”
“그 지인은 다음 작품 때 함께하셨으면 합니다. 이 작품은 한국 4대 투자배급사 중 하나가 공동제작으로 들어와야 해요. 본인들이 제작 투자한 작품만 개봉관 확보에 공을 들입니다.”
“한데 저희가 그만한 인맥이 없는지라.”
“저와 중견 투자사가 발로 뛰어볼 겁니다. 4대 투자배급사와 손을 잡지 않으면 제작이 무기한 연기될 겁니다.”
“그 정도인가요?”
“예. 반드시 함께하지 않으면 영화를 진행할 수가 없어요. 그동안 철저히 준비해주세요. 또 하나 명심하실 것은. 김판수 씨 말 듣고 엉뚱한 데 돈 쓰시면 안 됩니다. 투명하게 상정한 순수 제작비가 100억입니다. 여기에 술값이라든가, 접대비가 끼면 수십억이 불어나게 돼요.”
“야! 내가 양아치냐?”
발끈하는 김판수를 보며 웃어 주곤 말을 이었다.
“특히 김판수 씨는 여차하면 제작비 빼돌릴 생각부터 하시는 분이니, 꼼수 부리면 바로 자르세요. 김판수 씨가 이 영화 제작의 가장 큰 리스크니까.”
대표와 감독이 김판수를 보았다.
김판수가 할 말을 잃었다는 표정으로 나와 두 명을 보았다.
김판수의 눈에 복잡한 심경이 담겼다.
일부러 과하게 말했다. 상기시키는 의미로.
그런 김판수에게 말했다.
“판수 형. 이번 영화로 형이나 나나. 당당하게 영화인으로 서 봅시다. 형 쌈마이 짓 안 한다는 거 압니다. 이대로 나랑 함께 가주면 형을 도울 겁니다. 내 능력이 닿는 한.”
“판수 형?”
김판수의 눈시울이 뜨거워져 있었다.
갑작스러운 감정의 변화에 나도 적잖이 놀랐다.
본인도 후회하고 있는 걸 내가 건드려서 그런가.
그가 말했다.
“미안하다.”
“예. 그거면 됐습니다.”
김판수가 갑자기 드러난 감정을 숨기려는 듯 서둘러 카페에서 나갔다. 껄렁껄렁한 태도에 유려한 말발, 싼티나는 행동을 일삼던 김판수에게서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일부러 판수 형을 자극했다.
마음을 잡았다고 해도 돈을 만지다 보면 또 옛날 생각이 나기 마련이니까. 내가 투자하기에 더욱더.
김판수 때문에 말문이 막혔던 대표가 입을 뗐다.
“그러면 부분투자를 받아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부분은 제가 일부 투자하죠.”
“예? 투자라니요?”
대표와 감독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작가가 투자한다는 말은 듣도 보도 못했겠지.
“일단 부분에 5억을 투자하고 싶습니다.”
“정말 투자하시는 겁니까?”
“예. 정식으로 투자제안서를 보내주세요. 필요한 문서가 있으면 그것도 알려주시고요. 김판수 씨가 알려주겠지만 프로덕션 진행을 문서로 작성해서 주기적으로 보고해주셔야 합니다. 순 제작비 65억. 마케팅비 35억으로 예산을 잡으면 될 겁니다.”
“아, 알겠습니다.”
“메인투자는 저와 또 다른 투자자에게 맡겨주시고. 프리에 집중해주세요. 투자금은 계약 후 자금이 마련되는 대로 입금하겠습니다. 입금 직후부터 회사 운영에 들어가는 비용을 투자금으로 처리하셔도 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웃으며 일어나 대표님에게 악수를 청했다.
감독님과도 악수하고는 둘의 배웅을 받으며 카페를 나섰다.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두 사람이다.
카페 인근 골목에서 김판수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는 몸에 해로워서 안 핀다더니.
“뭐해? 궁상맞게.”
어느새 원래 김판수가 되어 있었다.
“야, 나 지원해준다는 거 진짜야?”
“그래. 내가 영화사를 차리면 형이 실무 책임을 맡아. 평판이 좋아지면 형 영화사도 차릴 수 있을 거야.”
“진짜야? 너 돈은 있어?”
“나는 보스다 내가 부분투자하기로 했어.”
김판수의 입이 쩍 벌어진다.
“너 돈은 어디서 났어?”
“그건 알 거 없고. 그럼 수고해. 내 말 명심하고.”
“그, 그러마.”
코어가 이르길.
김판수가 날 돕고 내가 김판수를 돕는다고 했다.
판수 형이 영화계 유력인사가 될 확률이 높다고도 했고.
정말 그런지 함께 가보는 거다.
지이잉-
차에 올랐을 때 기다리던 문자가 왔다.
오늘은 영화 개봉 3주 째다.
왜 연락이 안 오시나 했다.
[네. 사장님. 요즘 좋으시죠?]
[좋다마다. 나와 밥한 끼 할 텐가?]
[좋죠.]
투자사 사장님이 찍어준 곳으로 차를 몰았다.
* * *
압구정 한식집에 사장님이 혼자 앉아 계셨다.
영화에서나 보던 그런 고급 한식집이다.
사장님이 환한 웃음으로 날 반겨주었다.
“거기 앉게.”
“네.”
사장님 맞은 편에 앉았다.
“이런 곳은 처음인 가 보구먼.”
“예. 제가 20만 원짜리 밥을 먹을 리가 없죠.”
“나도 자주 오지는 못해. 자네 덕에 돈을 좀 만지게 되었으니 따로 날을 잡은 거지.”
사장님 회사인 CT 인베스트먼트는 국경의 끝 메인투자로 25억을 투자했다. 그리고 촬영 중간에 25억을 추가 투자하여 사실상 메인에 전액 투자를 하게 되었다.
영화 투자로는 매우 드문 일이다.
주가가 오르자 영화 예측도 맞을 거라고 보신 것 같다.
“내가 자네에게 괜히 5억을 준 게 아닐세.”
“수익이 크셨나 봐요.”
“재미는 좀 봤지. 주식은 또 할 생각이 없고?”
“앞으론 생각 없습니다.”
“자네도 주가 예측은 신뢰하지 못하는구먼.”
“예. 하지만 영화 예측은 자신 있습니다.”
“다음 작품도 신성에서 한다고?”
“예.”
“그 작품은 어떻게 되나?”
요리가 하나 둘 나와서 자연스레 대화가 중단되었다.
슬쩍 물어보고는 내 표정을 살피시는 사장님.
내가 뭘 숨길까 봐 그걸 간파하시려는 눈길이다.
“아직 분석이 안 되었어요.”
“내가 또 투자하면 안 되기라도 해?”
“진짜 아직 분석을 안 했어요.”
내가 소리 내어 웃자 사장님도 껄껄대며 웃었다.
투자해달라고 왔는데 그리 말씀을 하시나.
어째 안달이 난 건 사장님 같다.
요리가 들어왔기에 둘 다 식사를 했다.
식사하며 사장님이 말을 꺼냈다.
“신성은 아주 투명해서 좋더구먼. 영화계가 날로 발전한다는 증거로 봐야겠지. 예전엔 정말 엉망이었거든.”
“다른 제작사는 투명하지 않다는 말인가요?”
“한 10년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게 주먹구구였네. 자네 제작비 100억이 들었다는 영화를 보면서 저게 어째서 100억이 든 영화지? 하고 생각한 적 없나?”
“많이 있습니다. 요즘엔 돈을 든 티가 나긴 해요.”
“그래. 요즘엔 투명한 편이지. 예전엔 말이야. 100억짜리 영화라고 하면 순 제작비 100억을 말하는 게 아니었네.”
“그럼 어디에 돈이 들어간 거죠?”
“감독과 대표가 제작비로 룸살롱에서 술 퍼먹은 거지. 게다가 망한 전작의 빚을 다음 영화 제작비로 퉁 치기 일쑤였네.”
전혀 몰랐다.
투자사 입장에선 거의 범죄 수준이다.
“지금도 제작비로 사무실 비용을 쓰긴 합니다.”
“그것도 문제지. 예전보다 나아졌지만 아직도 투자비로 순수하게 제작하지 않고 제작사 운영비로 쓰니까. 이 대표야 워낙 청렴한 사람이라 내가 믿고 투자했지만, 다른 제작사는 여전히 접대다 뭐다 해서 헛돈을 쓰니 말이야.”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여셨다.
“자네 혹시 드라마 쪽에는 관심 없나?”
“드라마도 쓸 수 있기는 합니다.”
“지인 중에 드라마에도 투자하는 친구들이 있지. 듣자하니 유명 작가 작품이면 투자할 만 하다더군. 난 다른 작가는 모르겠고 자네가 드라마를 쓰면 투자할 의향이 있네.”
대형투자배급사를 제외하고 영화와 드라마의 투자사가 겹치는 건 맞다. 주로 벤처캐피탈 회사. 영화 크레딧에 공동 제공으로 타이틀이 오르는 회사들이다.
“지금은 영화 하기에도 바쁘네요.”
그럴 줄 알았다는 사장님 표정.
“그럼 다른 영화 분석도 가능하나?”
“다른 제작사 영화 말입니까?”
“그래. 신성 차기작은 가능한 한 우리가 투자할 걸세. 이왕이면 자네가 분석한 다른 영화에도 투자하고 싶구먼.”
사장님이 날 물끄러미 보셨다.
영화도 내 예측대로 가고 있다.
그 점에 대해선 굳이 입 밖에 내지 않는 분이다.
“시나리오를 가져다주시면 분석은 가능합니다.”
“거래 조건은?”
사장님이 거저 드시려 하지 않아서 좋다.
먼저 조건을 말씀해주시니.
“흥행 가능성이 높은 작품일 경우. 제게 분석 대가를 주셨으면 합니다. 투자 수익 지분을 주셔도 좋고, 건당 분석 비용을 주셔도 좋고요.”
사장님이 ‘이놈 봐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기분 나쁘신 건 아니고, 귀엽다는 내심이다.
“투자 수익 지분은 얼마나?”
“5%가 적당할 것 같습니다.”
사장님이 날 보며 물을 드셨다.
투자사 순수익이 100억일 경우. 내 수익은 5억이다.
투자 지분이 낮으면 내 수익도 낮아지는 거고.
사장님은 국경의 끝 50억 투자로 이미 재미를 보셨다.
예전에 내가 말한 대로 100억 대 순수익이 예상된다.
주식 수입도 있으니 내게 5억을 쾌척하신 거 아닌가.
사장님이 입을 열었다.
“건당 분석은?”
“건당 1천만 원입니다. 사장님 회사에서 시나리오를 검토할 것 아닙니까. 될 만한 것만 보내주시면 됩니다.”
“그 작품을 자네가 각색할 수도 있고.”
“예. 제가 각색한다면 더 나아질 수도 있습니다.”
“흠…….”
사장님이 깊은 침음을 냈다.
매번 공짜로 영화 분석을 해드릴 수는 없다.
영화 분석에 천만 원쯤 불러 놔야 시도 때도 없이 분석해달라고 하시진 않을 테니까.
한 가지 선물 아닌 선물은 드리고 가는 게 낫겠지.
“실은 제가 어느 영화에 5억을 투자할 예정입니다.”
“그 주식으로 번 돈으로?”
“네.”
“그래서 5억 투자의 순수익은?”
사장님이 마른 침을 삼킨다.
내가 투자했다니 뭐가 있나 하신 듯
“15억가량입니다.”
사장님의 입이 슬그머니 벌어진다.
입이 벌어진 뒤에는 만면에 웃음이 번진다.
순식간에 수익률 계산이 끝나신 것 같다.
“그 영화는 메인투자는 됐나?”
“부분 투자도 안 된 상태입니다. 대형투자배급사가 절반 정도 투자하면 분석 결과대로 될 겁니다.”
“나머지 절반에 내 투자 몫도 있겠구먼.”
“예. 45억 정도면 절반입니다. 대형투자사가 나머지를 투자해야 배급에 공을 들이겠죠.”
“즉, 그 영화 제작비가 100억이라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흥행은 천만 관객 이상이라는 뜻이고.”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이거야 원….”
사장님이 복잡한 얼굴로 사과를 씹어 드셨다.
영화에 관해서는 내 예측을 꽤 믿으시는 것 같다.
주식은 운이 좋았다고 보시는 것 같고.
“자네가 쓴 작품인가?”
“예. 큰돈을 벌 수 있는 작품인데, 시나리오 고료만 받을 순 없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지.”
사장님이 반주를 한 모금 마시곤 말했다.
“영화의 흥행에는 여러 변수가 작용한다네. 컴퓨터가 알아내지 못한 부분이 있어. 그런 것까지 감안했나?”
“솔직히 말씀드리면 감독님이 잘 못 찍을 수도 있고, 제작사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배급에 걸림돌이 생길 수도 있고요. 모든 상황이 무난했을 때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정말 천만 관객이 드는 영화를 만들려면 그렇게 되게끔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겠지.”
“그렇습니다.”
“내 술 한잔 받게.”
일어나서 술잔을 들었다.
사장님이 내 술잔에 반주로 나온 술을 따라 주었다.
나도 사장님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사장님이 술을 드실 때 나도 한 잔 쭉 들이켰다.
둘 다 탁자에 술잔을 탁. 하고 내려놓았다.
“함부로 그 영화에 대해서 말하지 말게.”
“그럼요.”
“조만간에 시나리오를 보내줘. 회사에서 검토해보고 자네 확신이 직원들에게도 통하는지 봐야겠지.”
“당연합니다.”
“자네 말대로 하지. 투자지분 5%. 자넬 사외 투자고문으로 모시겠네. 정식으로 계약서를 써야지. 자네에게 영화 분석을 맡길 때는 투자자문 비용으로 천만 원을 집행하겠네.”
과감한 결정에 오히려 내가 놀랐다.
“정말 그렇게 해주시게요?”
“거래는 거래니까.”
거래는 거래다.
나는 정보를 주고 수익을 얻고.
사장님은 안전한 투자를 하고.
10억을 대신 대출해달라는 말은 결국 하지 않았다.
코어가 괜히 내 돈 5억만 투자하라고 권한 게 아니다.
변수는 언제 어디서 생길지 모른다.
김판수 형도 좀 더 지켜봐야 하고.
나는 보스다의 프로덕션은 약 3개월 후.
마케팅 쪽 메인 투자는 그때쯤 결정될 것이다.
제니스 신곡 수익에 기대를 걸어 보기로 했다.
* * *
영화 개봉 3주째 되던 금요일.
오랜만에 신성영화사에 출근했다.
며칠 동안 로즈 엔터에서 신곡 활동 컨셉 회의를 하다가 대표님 호출을 받았다. 안 그래도 드림메이커 박 부장 엿 먹일 생각으로 오천일 감독 입봉작을 구상했던 터다.
회사에는 민정이와 이 대표만 있었다.
“실장님~”
민정이가 과하게 애교를 부렸다.
내게 달려와 안기려다 만다.
“왜 좋은 일 있어?”
“우리 영화 480만 넘었대요.”
“진짜?”
이 대표님이 웃으며 출력한 문서를 보여 주었다.
영진위 전국 박스오피스 집계였다.
집계 현재 총관객 수 485만 3천9백11명.
집계 현재 총입장수익 476억 6천5백 원.
남은 상영 날짜는 약 보름.
깊은 안도와 함께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아직 550만이 들진 않았고 개봉 첫 주에 비하면 관객 수가 꽤 줄어들었다. 그러나 남은 날짜가 14일이다. 여성 관객이 꾸준히 들고 있어서 꽤 많은 개봉관이 일주일 더 상영하기로 한 거였다.
“정말 다행이네요.”
“거, 봐. 기자들 반응 보고 내가 감을 잡았다니까.”
“회사 수익도 어마어마하겠는데요.”
이 대표님은 말없이 내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
돈방석에 앉은 걸 굳이 말할 필요가 있나.
대표님이 말했다.
“얼마 받고 싶어?”
“네?”
“보너스 말이야.”
가슴이 기분 좋게 쿵! 뛰었다.
예측대로 간다면 신성의 순수익은 80억가량이다.
여기서 수익 배분과 운영비, 세금으로 절반 정도 빠지고.
“주시는 대로 받을게요.”
대표님이 빙그레 웃으며 날 보셨다.
얼마를 달라는 것보다 더 무서운 말이다.
“천일이 입봉작은 가져왔고?”
“네.”
“우선 그것부터 보자.”
대표님과 함께 회의실로 향했다.
둘이 마주 보고 앉았다.
“먼저 오천일 감독은 어떤 액션 구상하시는데요?”
“본 아이덴티티 류의 첩보물. 복잡한 거 말고 명료한 거. 나야 뭐, 액션이면 상관없고.”
“혹시 현대판 7인의 사무라이는 어떠세요?”
“그건 몇 번 나왔잖아. 황야의 7인도 있고, 매그니피센트 7도 있고. 왜 리메이크해 보고 싶어?”
“딱히 그런 건 아니고요. 소재하나가 생각나서요.”
“어떤 건데?”
대표님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메모할 준비도 하시고.
잠시 머릿속 정리를 한 뒤 말을 꺼냈다.
“유망한 벤처기업을 악랄한 대기업이 잡아먹으려고 하는데, 급히 불러 모은 계약직 7명이 그걸 막아 내는 이야깁니다.”
“7인의 사무라이와 비슷하네. 그게 다야?”
“일단은 그렇습니다. 두 가지 길이 있어요. 하나는 첩보물 느낌으로 대기업 배후에 미국 방산 업체가 있고, 킬러와 첩보원들까지 개입하는 이야기이에요. 다른 하나는 평범한 소시민이 거대한 힘과 맞서 싸우는 내용이고요.”
대표님이 주저 없이 선택했다.
“두 번째가 낫네. 관객이 공감하면 통쾌함과 감동을 줄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평범한 사람들이 싸우는 휴먼드라마다 이거군.”
“예. 거기에 액션이 추가됩니다. 대기업이 용역업체를 부르고 심지어 청부업자까지 보내거든요. 화려하진 않지만 리얼하고 치열한 싸움이 관객의 마음을 더 잡아끌 수 있습니다.”
“한국 액션 영화가 그런 편이긴 하다만.”
“월급쟁이의 비애. 계약직 직원의 아픔. 일반 회사원들의 애환이 기본이 됩니다. 약자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걸 보여 주고 싶네요. 각자 사연이 있는 계약직 직원들이 대기업에 제대로 한 방 먹일 겁니다.”
“아…….”
이 대표님 입에서 가벼운 탄성이 나왔다.
감정 이입 쉽고, 대리만족도는 높은 영화다.
대표님이 바로 캐치하신 거다.
“액션은 어떤 그림이야?”
“악으로 깡으로 악착같이 싸우는 친구가 주인공이고. 보안팀과 형사 출신인 인물은 액션을 제법 보여 줄 겁니다. 그래 봐야 개싸움 스타일인 건 마찬가지죠.”
대표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싸움이 화려하면 안 어울리지.”
“그림은 좀 그래도 감정이 중요하죠. 얼마나 잘 싸우는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싸우느냐입니다. 싸움의 절실한 동기와 인물들의 사연, 남의 일 같지 않은 공감만 있으면 흥행할 겁니다. 인물이 좀 많은 게 단점이긴 해요.”
“인물들은 어떻게 되나?”
스마트 폰 화면을 띄웠다.
구상하면서 대략 작성해 둔 설정표다.
대표님이 내 스마트폰을 들고 보았다.
“보시는 것처럼 제1인 강 대리. 중소기업 영업부 대리입니다. 상대 대기업의 갑질을 버티다 그만두었죠. 제2인 리더. 그 대기업에 다니다 억울하게 해고된 과장이에요. 제3인 보안관. 같은 대기업 보안팀에 있다가 회사가 하는 일에 환멸을 느끼고 그만둔 특전사 출신이죠.”
“좋다. 그다음.”
“제4인 형사. 그 대기업에 엄청난 복수심을 가진 전직 형사입니다. 제5인 해커. 어둠 세계의 해커로 친구인 벤처 기업 창업자가 납치되자 팀에 합류하게 되었죠.”
“클리셰 캐릭터구먼.”
“감초 역할입니다. 뻔하지 않게만 하면 돼요.”
“그래, 나머지 두 명은?”
“제6인 사기꾼. 전과 5범의 금융 사기꾼입니다. 사고뭉치 타입으로 팀의 불안요소이지만, 후반에 달라집니다.”
“바로 그거지. 마지막 여자 캐릭터 좋은데?”
제작자라 흥행 요소를 바로 파악하신다.
“제7인 계약직. 그 대기업에 다니는 계약직 여직원입니다. 회사를 다니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를 보여 주고, 온갖 희롱과 무시를 당하다가 결국 분연히 일어서죠. 여주인공이 영화 후반에 괴롭히던 상사들을 혼내 줄 때는 여성 관객들이 열렬한 환호를 보낼 겁니다.”
“흠…….”
대표님이 내 스마트 폰을 가만히 보았다.
인물이 좀 많기는 하다.
원작인 7인의 사무라이도 인물은 많다.
이야기를 어떻게 풀고, 인물 분량을 얼마나 적절하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관객의 감정 이입이 갈린다. 당연히 주인공 강 대리 위주로 가야 하는 거고.
자신은 있다.
대표님의 말이 들렸다.
“조합은 나쁘지 않네. 사기꾼과 형사의 사연은?”
“사기꾼은 원래 금융사 직원이었는데 그 대기업 때문에 엄청난 손실을 봤죠. 빚 때문에 사기 치고 다녔던 겁니다. 그리고 형사는 딸이 그 대기업 후계자의 차에 치인 뒤 시신이 유기되었는데 못 찾았어요. 목격자에게 증언을 들었지만, 그 목격자가 매수를 당해요. 증거가 없어서 재판에 가지도 못해요.”
“원작처럼 3명만 살고 다 죽는 건 아니겠지?”
“일단 아무도 안 죽습니다. 형사가 죽을 수는 있어요. 아이가 죽고 아내마저도 병을 앓다가 죽은 뒤 살아갈 희망이 없는 인물입니다. 복수의 끝을 보여 주고 장렬히 최후를 맞이할 수 있죠.”
“나쁘지 않아. 막판에 눈물샘 자극해도 좋지. 이왕이면 사기꾼이 내내 삐딱하다가 마지막에 팀을 위해 제대로 한 건 하면 좋겠어. 클리셰가 좀 있긴 하지만 말이야.”
“네. 얄미우면서도 나중에 호감이 상승할 인물일 겁니다.”
대표님이 뺨을 긁다가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결말이 고민될 것 같은데. 형사의 죽음으로 눈물샘을 건드려도 좋지만 통쾌하게 끝내는 것도 좋을 것 같거든. 안타까움이 남으면 마냥 통쾌할 수는 없지.”
그 말이 나올 줄 알았다.
그게 상업 영화의 문법이니까.
“둘 다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떻게?”
기대감이 차오르는 대표님의 눈.
“마지막에 형사가 죽어요. 대표님 말씀대로 눈물샘을 건드리죠. 희망이 없으니 영화 내내 죽는 게 수순인 것처럼 보였고요.”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형사가 살아서 나타나요. 죽은 것처럼 위장했던 거죠.”
“형사가 안 죽었다? 살아도 희망이 없다며?”
“복수하던 중에 찾아냈어요. 형사의 딸이 살아 있다는 걸.”
“아!”
“재벌 후계자가 아이를 친 후 도로변 풀숲에 다친 아이를 던져 놓은 뒤 뺑소니를 쳤을 때. 택시기사가 구해서 병원으로 데려가요. 아이는 사고 후유증으로 기억을 잃은 채 시설에서 지냈던 거고요.”
“죽음을 각오한 형사가 막판에 아이가 죽지 않았던 걸 알고 죽은 것으로 위장했다 이거군.”
“네. 안 그랬으면 체포되어 감옥에 가고 오랜 시간 아이를 못 보게 될 테니까요.”
“그래. 그 과정은 복선을 깔면 되겠지.”
“예. 초반에 택시 하나가 도로변 풀숲에 쓰러진 아이를 못 보고 그냥 가는 장면 하나를 집어넣으면 됩니다. 후반 반전 나올 때는 그 택시가 후진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보여 주면 되고요. 형사가 죽을지 어떨지는 좀 더 고민해야 해요.”
강 대리에게 감정이입을 해서 진행해야 하기에 여주인공을 뺀 나머지 5인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형사도 그렇고.
시나리오를 쓰다 보면 어떤 결말이 나을지 보이겠지.
대표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잘 정리해서 10장 분량의 시놉을 만들어 봐. 엄아인 측에서 시놉 보고 결정하겠다고 했거든.”
“벌써 얘기가 됐어요?”
“자네 어깨에 뽕 들어갈까 봐 말은 안 했는데. 차기작 시나리오 보내 달라는 기획사가 벌써 네 곳이나 돼. 자네 시나리오면 무조건 하겠다는 연기파 배우도 있고.”
“진짜요?”
“영화 하나 흥행하면 반짝 특수를 누리는 거야. 게다가 우리 영화는 작품성도 잡아서 연기파 배우들 관심이 많아. 특히 다른 회사 프로듀서들이 자네에게 관심이 커.”
솔직히 그런 기류는 나도 느꼈다.
최근 계약하자는 전화가 자주 오고 있었으니.
대표님이 말을 이었다.
“내가 국경의 끝 책을 처음 읽었을 때. 그때 받은 기이한 느낌을 다른 회사 프로듀서들도 느낀 거지. 꿈틀꿈틀 거리는 괴상한 뭔가가 있어. 영화를 봤을 때는 더 하더구만. 영화 내용은 다른 영화와 큰 차이가 없는데 마음을 잡아끄는 이유가 뭘까? 하는 거지. 전엔 몰랐는데 지금은 좀 알겠어.”
“그게 뭔데요?”
대표님이 골똘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물줄기가 막힘없이 흘러가다가 맹렬하게 용솟음친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솟구친 물줄기가 클라이맥스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거지. 전에 그랬잖아. 살아있는 생물 같다고. 영화계 프로들이 그런 걸 발견하는 거야.”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다른 시나리오를 보면 군데군데 턱턱 막히는 부분이 눈에 들어오긴 했다. 관객들은 약간 어색하다는 느낌이 드는 부분이다. 그런 게 없다는 뜻이겠지.
물줄기 비유는 감정의 흐름을 의미하는 거겠고.
대표님이 다시 말했다.
“그래, 제목은 정했어?”
“7인의 사무원입니다.”
“하하하하. 대놓고?”
“예. 대 놓고.”
박 부장이 드림메이커 임원 앞에서 차기작을 소개할 때.
영화사 신성은 그와 비슷한 영화를 이미 시작했다.
그 인간 보란 듯이 7인의 사무원으로.
대표님이 서랍에서 서류 두 개를 꺼내 왔다.
그 서류에 몇 가지 기입을 하더니 내 앞에 와서 앉았다.
“차기작 계약서야. 다른 회사가 덥석 물어가기 전에 계약부터 해야지. 읽어 봐.”
계약서를 들고 읽어 보았다.
응?
“5천만 원요?”
대표님이 환하게 웃었다.
“이제 그 정도는 돼야지. 다른 영화사에서도 그 정도 부를 거야. 그 이하로 부르는 회사 작업은 하지 마. 각색도 3천으로 못 박아 두고. 몸값이 더 올라도 부르는 회사는 있어.”
“메이저에서 연락 온 적은 없는데요.”
“간 보고 있는 거야. 중소 영화사가 왜 시나리오에 돈을 아끼는 줄 알아?”
“각본을 우습게 보니까요.”
“그것도 그렇지만 작가를 못 믿어서 그래. 실제로도 그렇고. 그런데 쓰는 작품마다 흥행하는 작가라면 어때? 작품 하나로 수십억을 벌 수 있는데 각본료 5천이 아까울까?”
“말이야 그렇죠.”
“확실하면 5천이 아니라 1억이라도 투자하는 게 메이저야. 그런 작가가 없었을 뿐이지. 최 작가가 그런 위치까지는 아닐지라도 믿음은 줄 거라고 봐.”
“말이라도 고맙습니다.”
“두고 봐. 이게 그냥 하는 말인지.”
계약서에 사인했다.
선금 1천. 중도금 2천. 잔금 3천.
하… 내가 5천만 원대 작가가 되다니.
놀라움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익 배분율 4%.
흑자를 낸 영화감독 지분율 수준이다.
사실 작가에게 수익 지분을 주는 경우는 별로 없다. 감독도 신인은 계약금이 전부고. 유명감독이야 5% 정도 받는다지만.
대표님이 말했다.
“보너스 3억 책정했는데 괜찮지?”
“예?”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날 뻔했다.
3천만 원이 아니고 3억?
내가 잘못 들었나?
“시나리오 잘 써서 좋은 감독 섭외하고 영화도 잘 만들었어. 지금까지는 흥행도 되고 있고.”
“그래도 3억은 좀 큰데요.”
“무턱대고 책정한 게 아니야. 작가 인센티브로 1억. 제작실장 보너스로 2억이지. 자네 이 영화 찍으면서 월급 150 받고 고생했어. 실장 노릇도 잘해 줬고. 일반 회사도 회사 매출에 공이 큰 직원에게 억대 성과급을 주지 않나. 자네가 이 회사에 벌어다 준 돈을 따지면 3억도 적지.”
설득되었다.
딴 데 나돌지 말고 신성에 말뚝을 박으라는 말씀 같다.
아직도 난 500만 원 벌다가 1천만 원 벌면 가슴이 벌렁거리는 무명작가 마인드에서 그리 못 벗어났다.
억대를 받는 게 자연스러우면 그것도 이상하겠지만.
“그래서 언제 주실 건데요?”
“3개월 후? 길어도 6개월 안에는 정산이 되겠지.”
나는 보스다에 8억은 투자할 수 있을 것 같다.
제니스 신곡 수익으로 7억만 들어오면 15억에 맞춘다.
부디 곡이 잘 나오기를.
이 대표님과 민정이와 인사한 후 사무실에서 나갔다.
집으로 가려는데 지성이에게서 문자가 왔다.
[형. 서연 씨 드라마 찍자고 연락 왔음.]
[드라마? 어느 방송국?]
[방송국이 아니라 외주 제작사.]
다른 영화사에서 캐스팅 문의가 올 줄 알았는데 드라마에서 먼저 올 줄은 몰랐다.
[어떤 드라마 찍었는데?]
[윌메이드, 작년에 대박 친 인어공주 제작한 회사.]
대박까진 아니고 동 시간 시청률 1위였던 드라마다.
당시 프리 프로덕션이 한창이어서 본 적은 없다.
7인의 사무원 여주인공으로 서연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코어를 슬쩍 발동했다.
코어는 드라마 찍기를 추천한다.
서연의 인기와 필모가 늘어나서 7인의 사무원 흥행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드라마에서 악역을 맡으면 오히려 그 반대.
제니스 신곡 활동 끝나자마자 조연급으로 드라마 찍는다.
그 드라마 후 신성 차기작 찍으면 시간이 맞다.
한데 이번 드라마인지는 알 수 없다.
[오디션 보재?]
[응. 서연 씨는 관심이 있대.]
[미팅 잡아 봐.]
[오케이.]
서연은 나날이 성장할 거다.
어느 날 문득 봤을 때 톱스타가 되어 있겠지.
아마 그때쯤 나는.
영화계의 압도적인 강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연예계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