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영화다 2권
글드림 현대판타지 장편소설
차례
제1장 영화 개봉
제2장 신성 차기작
제3장 신곡 발표
제4장 100일 후
제5장 기이한 신경전
제6장 새로운 인연
제7장 협박과 협상
제1장 영화 개봉
음악과 함께 기나긴 크레딧이 오르고 있었다.
극장이 밝아졌다.
짝짝짝-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박수가 나왔다.
영화가 정말 좋았다. 무엇보다 영상미와 배우들의 연기가 기가 막혔다. 내용을 아는 나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으니.
음악도 좋았고, 편집도 매끄러웠다.
기술적인 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관객은 잘 모르는 부분이다. 영화 자체만 놓고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커녕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 나왔다.
편집본을 볼 때는 음악과 사운드가 전혀 없어서 왜 이렇게 재미없고 밋밋하나 했다. 무성영화를 보는 듯한 심심함.
그런데 극장에서 보니 다르다.
쾅쾅 울리는 소리만으로도 감정과 심장을 때린다.
다행이다. 내 입봉작이 부끄럽지 않은 작품이라서.
감독님이 기분 좋은 얼굴로 외쳤다.
“좋네요. 이 최종편집으로 가면 됩니다. 따로 보정할 부분은 없어요.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은근히 긴장했던 후반 작업팀도 그제야 안심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촬영 때처럼 서로 악수하고 포옹하고 무사히 최종본이 나온 것을 축하했다. 감독님이 내게로 왔다.
“실장님, 그동안 고마웠어요.”
“저도요. 감독님.”
감독님과 포옹했다.
지금 이 순간.
나와 감독님 사이에는 그 어떤 감정의 찌꺼기도 없었다.
당연하다. 그날 이후로 한 번도 언쟁을 높인 적이 없으니.
더구나 영화도 이렇게 잘 찍어 주셨고.
대표님도 환한 얼굴로 내게로 오셨다.
“고생했다. 최 실장.”
“대표님이 고생하셨죠.”
“영화가 이렇게 잘 나올 줄은 몰랐어. 내가 운이 좋은 모양이다. 자넬 만나서 성공적으로 재기하고, 재기 작품도 잘 나왔으니 말이야. 보통 운으로 되는 게 아니거든.”
“대표님 실력 덕분이죠, 뭐.”
대표님이 말없이 내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
그러곤 날 빤히 보신다.
“너… 나 떠나서 영화 만들어도 도와줘야 한다?”
날 보는 대표님의 눈빛이 애처롭다.
마치 딸 시집보내는 아버지와 같은 표정.
내가 독립할 거라는 정도는 아셨겠지.
“대표님은 제 스승님이십니다. 스승님 배반하는 제자는 되고 싶지 않아요. 제가 뭘 하든 부르시면 언제든 달려갈 겁니다.”
결국 대표님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대표님이 내 어깨를 어루만져 주고는 자리를 뜨셨다.
날 만나서 행운이었다고 말씀하셨는데.
나도 이갑성 대표님을 만난 게 행운이다.
실력도 있고 성품도 좋으신 분을 만나는 게 쉽지 않으니까.
* * *
기술 시사 며칠 후 제작 발표회를 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오늘. 언론 시사회가 열렸다.
기자들이 속속 입장했다.
주연배우들과 서연, 감독님도 들어왔다.
언론배급 시사회를 한 뒤 스크린 무대 위에 인터뷰 테이블을 설치하고 기자간담회를 하게 된다.
저녁엔 VIP 시사회를 하고.
잠시 뒤 배우들과 감독님이 나와 무대 인사를 했다.
감독과 배우들이 한마디씩 소감을 말했다.
그러다 엄아인이 대표로 나와 한마디 더 했다.
“잘 좀 부탁드립니다. 여러 기자님의 기사에 100만이 왔다갔다합니다. 저희 좀 살려 주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감독과 배우들이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들 모두 좌석에 앉고 난 뒤 영화가 시작되었다.
시사회 때 기자들은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아무리 웃기는 장면이 나와도 웃지 않고, 웬만해선 감동도 받지 않는다. 영화가 좋았는지 어땠는지는 기사를 보고 나서야 알 게 된다. 영화를 보는 게 그들에겐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자가 반응한다면 뭔가 있다는 의미다.
그런 기자들이 영화 중반부터 집중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났다.
박수도, 환호도 없다.
기자들의 얼굴에 미묘한 미소가 담겼을 뿐.
그런 기자들을 본 대표님은 세상 다 가진 얼굴이시고.
대표님이 내게 엄지 척을 보여 주셨다.
됐구나.
나와 오상일이 무대로 테이블을 옮겼다.
이어 영화 관람 때보다는 화기애애한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 * *
저녁 7시 VIP 시사회.
난 정장을 입고 시사회에 오는 연예인들의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지켜보았다. 제니스 멤버들도 한껏 차려입고 와서 당당하게 포토라인에 섰다. 배우들과 친한 연예인들도 속속 포토 라인에 서고, 유명인사들도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드디어 주연급 배우들이 등장했다.
자신감 넘치는 엄아인의 인터뷰.
섹시한 드레스를 입고 미모를 뽐내는 이유현.
그리고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신.
“서연 씨! 이쪽 좀 봐주세요!”
“서연 씨, 여기요!”
“서연 씨!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봐주시면 됩니다!”
플래시 불빛이 수도 없이 번쩍거렸다.
서연이 포토라인에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답고 화사하다.
카메라에 집중하던 그녀가 멀리 있는 날 보았다.
손을 흔들어 주자 그녀가 환하게 웃고는 극장으로 들어갔다. 서연이 날 모른 척했다면 상처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좌석 앞자리에 배우들과 감독, 유명인들이 몰려 있었다.
나와 대표님은 뒤편에 앉았다.
그래야 연예인들의 반응을 볼 수가 있으니까.
유명인사들의 영화 관람 반응은 기자들과 천양지차였다.
영화가 끝난 후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엄아인과 친한 남자 연예인들은 환호성을 지르기도 하고.
아직은 모른다. 배우들과 친한 분들 반응이라.
그래도 성공 예감은 들었다.
* * *
5월 31일 금요일 오후 6시.
나와 서연이 모자를 쓴 채 포스터 한 장을 보고 있었다.
따로 떨어진 곳에는 이젠 제니스 매니저가 된 지성이와 제니스 멤버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다. 혹여 팬들이 몰려올까 봐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었다.
가장 관객이 많을 시간에 영화를 보러 왔다.
서연은 아침부터 괜히 눈물이 났다고 한다.
시사회 때는 하도 긴장해서 덤덤했는데, 개봉 첫날에 영화를 보러오니 감개무량했던 모양이다.
지난 넉 달 사이.
서연과 한층 가까워졌다. 후반 작업 때 제니스 트레이닝과 신곡 활동 때문에 거의 매일 보았다. 자연스레 호칭과 말투도 바뀌었고.
“할리우드 영화가 지금 1위인데 괜찮을까요?”
“저 영화 개봉 2주 차야. 저 영화보다 일주일 전에 개봉한 우리나라 영화가 경쟁작이지. 장르가 달라서 직접적인 경쟁은 아니겠지만.”
대진 구도가 나쁘지 않았다.
할리우드 영화는 볼 사람은 이미 다 봤고, 지난주에 개봉한 국산 영화는 재미있다는 평은 있으나 시선 몰이는 못했다. 그 외 영화들은 하강세이거나, 곧 상영 끝날 영화들.
투자배급사에 가서 우리 영화 다음에 걸릴 영화를 확인했는데, 다 고만고만했다. 3주 후에 유명감독의 기대작 하나가 걸리지만 시기적으로 물리지는 않는다. 그 작품이 흥행해서 영화의 파이를 키우면 우리 영화에도 도움이 된다.
그러니 대진표는 상당히 좋은 편이다.
한데 개봉 첫날의 성적이 좀 안 좋다.
황금 시간대임에도 좌석이 꽤 많이 남아 있다.
국산 경쟁작은 거의 매진.
역시 치정 스릴러에는 선뜻 손이 안 가는 거다.
나도 서연도 초조한 눈길로 좌석 현황표를 보았다.
분석대로 초반엔 관객 수가 적다가 나중에 입소문이 난다고 했는데 막상 이렇게 되자 불안했다. 정말 이대로 안 들어오면 어떻게 하지?
그동안 주식 때문에 제법 심력을 썼다.
네 종목이 4월부터 오르기 시작했는데, 한 종목이 5월이 되어서도 오르지 않았다. 돈 5억을 갚아야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코어 예측이 맞느냐 틀리느냐가 걸렸기 때문이었다.
오르던 종목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걱정이 되었다.
그러다 또 오르면 안도를 하고.
그 한 종목이 애를 먹이더니 결국 5월 중순이 되자 상한가를 쳤다. 5월 말인 지금은 다섯 종목 모두 상승 후 답보를 반복하고 있다.
천만 다행히 다섯 종목 모두 2배 이상 올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운 좋게도 상승할 종목에 투자한 거였다. 원래 10종목 골랐는데 그 중 3종목은 아직도 오르지 않았거나, 오르다가 하락했다. 만약 그 3종목 중 하나를 투자사 사장님에게 말했다면 빌린 5억은 갚아야 했을 터다.
그런데 영화 개봉 첫날도 마찬가지 심정이다.
주식은 맞고 영화는 틀리면 그것도 문제다.
영화는 편집본이 나온 후에 두 번이나 분석했다.
두 번 분석 모두 500만에서 600만으로 나왔다.
주식은 모르겠으나 영화 예측만큼은 코어가 어느 정도는 맞출 것 같다. 마지막 관문이다. 이번만 맞으면 된다.
“들어가자.”
“좌석이 2/3밖에 안 찼어요.”
“며칠 지나면 다를 거야.”
서연과 함께 깜깜한 극장으로 들어갔다.
제니스 멤버들도 슬쩍 따라 들어왔다.
우리 뒤에 남녀 커플이 앉았다.
“이 영화 재밌대. 애들이 스타그램에 영화 봤다고 올려놨는데 이유현이 너무 멋지게 나온대.”
“야, 신문 기사 믿을 거 못 돼.”
“누가 뭐래. 애들이 재밌다는데.”
나와 서연의 눈이 마주쳤다.
긴장은 되지만 상황이 묘해서 웃음이 났다.
다행히 기자들이 영화평을 긍정적으로 써줬다.
사실 그건 별 효과가 없었다.
댓글 보니 영화사가 돈을 뿌렸다느니, 기자들이 호평한 영화는 재미가 없다느니. 볼 게 없어서 한번 봐주겠다느니.
다만 오늘 오후부터 올라온 SNS의 관객 평은 대체로 좋았다. 남성 관객은 별로 관심이 없었고, 여성 관객은 영화를 보라고 권하고.
어쨌거나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영화를 보았다.
편집실에서 수도 없이 보고, 두 번의 시사회 때도 본 영화지만 개봉관에서 보니 또 달랐다. 관객 반응과 기자 반응은 천지차이였다.
긴장한 우리 둘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표정이 밝아졌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극장이 밝아졌을 때.
나와 서연이 동시에 뒤를 보았다.
일어나는 관객들이 대체로 만족스러운 얼굴들이다.
이만하면 됐다 싶었다.
지성이는 엄지 척을 해 주고, 제니스 멤버들은 서로 끌어안고 발을 동동 구른다. 서연에게 쌍 엄지를 보이기도 하고.
미주가 슬쩍 다가왔다.
“재밌었어?”
“실장님, 대박.”
한마디 툭 던지고 폴짝폴짝 뛰는 멤버들에게 가는 미주다.
서연의 눈가가 또 뜨거워졌다.
“이 영화 잘될 거 같아요.”
“응. 괜찮네.”
남의 일인 양 시크하게 대답했다.
영화관에서 나와 다들 중식당으로 갔다.
방을 하나 잡은 뒤에야 멤버들 모두 모자를 벗었다.
“우와! 대박! 언니 영화 진짜 재밌어!”
“그래?”
“응. 야한 영화 아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야, 야해야 남자들도 보러오지.”
“굳이 야할 필요는 없잖아.”
“그렇게 야하지도 않더만, 뭐.”
연희와 리즈가 티격태격했다.
지성이가 말했다.
“형. 영화 대박 나면 형은 뭐 있어?”
“없어. 수익 배분 명시를 안 했거든.”
“그럼 뭐야? 영화사만 이득이네.”
“보너스는 있겠지.”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 있는데, 내 폰과 서연의 폰으로 톡과 문자가 쏟아졌다. 퇴근하고 그제야 영화를 본 친구들의 문자다. 아버지의 문자도 있었다.
[영화 잘 봤다. 고생했다.]
아버지 특유의 어색한 문자를 보니 웃음이 난다.
관심 없는 척하셨지만 개봉 첫날에 보신 걸 보면 내내 걱정하고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서연은 답 문자 보내느라 정신없었다.
친구가 별로 없는 나와 달리 서연은 아는 사람도 많다.
“부모님한테서 문자 왔어요. 방금 보셨대요.”
“어디 봐.”
[서연아. 나 어떡하니? 눈물 난다.]
[잘했다. 우리 딸.]
[엄만 너무 고맙다. 집에 언제 올 거니?]
답장도 보내기 전에 흥분해서 보내신 문자들이다.
서연이 정성스레 답장을 보냈다.
내게도 뜻밖의 문자가 하나 왔다.
[영화 잘 봤네. 좋더구먼.]
[정말 다행입니다.]
[약속대로 5억은 안 갚아도 돼.]
[고맙습니다. 사장님.]
[그래. ^ ^]
사장님이 평소에 안 하시던 웃음표까지 찍어 주셨다.
지난 넉 달간 마음 졸인 걸 생각하니 눈물이 다 난다.
내가 보유한 주식의 주가 총액은 6억 8천가량.
3억 조금 넘는 돈을 투자하여 두 배 이상 번 셈이다.
다섯 종목의 주가가 오른 건 신제품 출시와 새로운 기술 공개. 해외 시장 개척. 긍정적 M&A 등의 결과다. 이미 주가 상승 요인이 반영된 것이라 앞으로 크게 오르진 않는다.
딱 적절한 매도 시점이다.
제니스 멤버들과 중국 요리 파티를 했다.
곧 신곡 작업에 들어가야 하기에 앞으로 배부르게 밥을 먹는 일은 당분간 없을 터였다.
지성이에게 멤버들을 맡기고 집에 돌아왔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느긋하게 맥주를 마셨다.
최종 편집본이 나왔을 때 분석을 2번이나 했다.
두 번 모두 흥행이 되는 것으로 나왔다.
이젠 정말 믿어 보자.
주식이야 분석하기 어려운 변수가 있지만, 영화는 최종 편집본이 곧 영화다. 변수가 들어갈 여지가 별로 없다.
영화 흥행 성적은 3주면 나온다.
이대로만 가자.
* * *
오전에 홈트레이딩을 통해 보유 주식을 모두 팔았다.
6억 7천9백만 원이 내 거래 계좌에 찍혔다.
하루 사이 조금 더 올랐으나 욕심을 버렸다.
다시는 주식 투자할 생각이 없다.
이 돈으로 우선 제니스 신곡 작업을 하고, 영화 부분 투자도 할 생각이었다.
든든한 마음으로 로즈 엔터 사무실로 향했다.
* * *
로즈 엔터는 5층 건물의 3층을 쓰는데 그리 크지 않은 사무실에 연습실과 사무실이 다 있었다. 그러니 연습실 크기야 말해야 뭐하겠나. 좁아터져서 안무도 오밀조밀할 수밖에 없다.
그 연습실에서 제니스 멤버들의 보컬 연습이 한창이었다.
“어? 형 웬일이야?”
사무실에 앉아 있던 동생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내 방에 얹혀사는 게 싫다며 연습실에서 숙식하는 녀석이다. 한겨울엔 전기 매트 깔고 침낭에서 지냈다. 지금은 그럭저럭 지낼만하고.
“뭐 하고 있었어?”
“작곡가 알아보고 있어. 영 반응이 그러네.”
“성 대표님은?”
“안무가 만나러 갔어. 유튜브 보다가 찾았지.”
“전문 안무가가 아니잖아?”
“커버 댄서가 아니라 안무를 짜서 대회에 출전한 팀이야. 기가 막히더라. 나중에 확인해 봐.”
연습실에서 세라의 우렁찬 노래가 흘러나온다.
“보컬이 달라지긴 했네.”
“다들 마지막 기회라고 열심히 하고 있어.”
잠시 멤버들의 보컬 연습을 들었다.
하도 연습을 많이 해서 다들 허스키해진 상태다. 고음도 잘 올라가고, 노래에 감정도 실린다.
제니스가 보컬 연습을 한 게 70여 일 전이다. 성 대표가 데려온 보컬 선생인데 석 달 계약금이 천만 원이다. 그만큼 보컬 조련이 뛰어난 선생이었다.
신곡 메인 보컬은 세라가 맡기로 했다.
원래 세라가 노래를 더 잘하는데다 음색도 남달라서.
연습실 문에 다가서서 안을 보았다. 30대 후반의 트레이너가 고함을 질러대고 있다. 멤버들은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악에 받친 듯 노래를 부른다.
전에 없던 바이브레이션도 들린다.
내용도 제법 심화 과정에 들어간 듯하고.
연습실 한쪽 구석에 앉아 멤버들의 트레이닝을 구경했다.
보컬 트레이너가 화이트 보드에 그림을 그려 놓았다.
성대와 두성을 거치는 음의 경로다.
“성대를 순간 닫았다가 큰 호흡을 뱉으면서 일시에 성대를 열면서 소리를 내. 소리를 낼 때는 성대를 잡고 있되, 풀면 안 돼.”
“아아아아~ 잘 모르겠는데요.”
“연습하다 보면 알게 될 거야. 발성이란 성대를 닫고 여는 느낌을 아느냐, 모르느냐. 즉, 호흡이 제대로 되느냐에 달린 거야. 왜냐? 호흡이 안정되고 발성이 편해지니 노래를 부를 때도 안정되고 편하게 부르는 거지. 이게 안 되는 애들이 빽빽 소릴 지르다가 숨이 차는 거라고.”
무슨 말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유명한 선배님들은 그래서 숨이 안 차는구나.”
“그러니까, 가수지. 성대 조절이 가능해지면 성대를 당기는 연습을 해야 해. 고음으로 올리라는 말이 아니야. 성대를 당기면서 호흡을 유지하라는 말이지. 성대 조절이 안 된 상태에서 고음을 내면 숨이 차는데다 삑사리가 나는 거야.”
선생이 다른 그림을 짚었다.
“숨을 압축한 상태에서 터뜨리듯 소리를 지르고, 성대를 당긴 상태에서 호흡 유지! 소리가 풀리지 않아야 해. 진성에서 가성으로 점점 올리면 시원한 고음이 나와. 소리가 크고 높다고 고음이 되는 게 아니야. 그건 과음이지. 고음은 어떤 소리가 나오는 가이지, 어떤 음계까지 올라가느냐가 아니라고. 알겠니?”
“네, 선생님.”
“휴‧… 오늘은 이만 하자.”
보컬 트레이너가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워낙 열정적으로 가르치다 보니 멤버들보다 선생이 더 많은 땀을 흘렸다. 선생이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잘 되고 있어요. 처음엔 기본이 좀 그랬는데 가르치니 달라지기는 하네요.”
“여기서 더 달라질 수도 있어요?”
“그럼요. 연희랑 세라는 정말 일취월장했어요. 서연이는 기본이 좋아서 바로 솔로 나가도 될 정도고요. 미주는 음치에 가까웠는데 이젠 음을 가지고 놀 정도예요. 애들이 열심히 하려고 해서 저도 기분이 좋네요.”
“마지막까지 잘 좀 부탁할게요.”
“예. 애들아, 오늘 배운 거 연습하는 거 잊지 말고.”
“네! 들어가세요, 선생님.”
멤버들이 넙죽 인사를 한다.
보컬 선생이 2시간에 걸친 트레이닝을 마치고 사무실에서 나갔다. 매주 화요일 금요일 트레이닝인데 금요일에 제니스가 지방 행사를 해서 토요일에 나온 그녀였다.
“실장님. 저희 배고파요.”
“그래. 뭐 먹지?”
“저희 짜장면요!”
그때 서연이 나섰다.
“저희 다이어트하고 있어요.”
“대표님이 벌써 준비하래?”
“네.”
멤버들이 원망의 시선으로 서연을 보았다. 사정을 모르는 날 꼬드겨 제대로 한 끼 먹어보려다 된통 걸린 셈이다.
멤버들이 살쪘다고는 하지만 그건 아이돌 시각에 그런 거지 다들 마른 편이다. 그래도 의상 맵시가 나려면 조금 뺄 필요는 있었다.
“2주간 바짝 하는 게 나아? 한 달간 하는 게 나아?”
“2주요!”
“다들 같은 생각이야?”
멤버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서연마저도.
평소처럼 먹다가 2주 정도 열심히 운동하고 안무 연습하면 살은 보기 좋게 빠질 것 같다. 한 달 내내 다이어트 하는 것도 곤욕일 테고.
“지성아. 멤버들 먹고 싶은 거 시켜.”
“형. 대표님이 아시면….”
“내가 프로그램 짜놨다고 해.”
“알았어. 다들 뭐 먹을래요?”
“짜장면!”
“난 짬뽕! 탕수육 시켜도 되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들 신 난 얼굴로 음식을 주문했다.
2주 전 제니스와 재계약했다.
전과 같은 3년 전속에 수익 비율만 분기별로 달라졌다.
1분기 5대5. 2분기 6대4.
그룹 활동은 1/N. 개별 활동은 5:2대3.
개인 활동을 해도 수익의 20%는 다른 멤버에게 간다.
가수 계약은 음반 제작 비용과 활동비가 들기에 배우보다는 회사가 가져가는 게 조금 더 많다. 여기에 재 계약금이 없는 대신 보너스 개념의 인세티브를 넣었다.
신곡 제작은 국경의 끝 정산이 시작되는 6월 말.
신곡 발표는 7월 중순.
음원 판매 수익도 영화 수익만큼이나 무시하지 못한다.
대박 난다면 영화 제작사의 순수익에 버금간다.
지성이에게 물었다.
“신곡은 좀 왔어?”
“오긴 했는데 좀 다 별로야. 들어 볼래?”
“그래.”
지성이가 노트북에서 파일을 열었는데 곡이 6개 있다.
녀석이 곡을 차례로 틀어주었다.
첫 곡은 작곡자가 가이드만 붙여 놓은 곡이었다.
두 번째 곡은 미디엄 템포의 걸스 힙합.
세 번째 곡은 피아노 반주만 있는데 멜로디가 영.
세 곡 모두 일단 패스.
네 번째 곡은 내가 바라는 대로 신시사이저 후렴이 돋보이는 곡이었는데 후크가 없다.
다섯 번째 곡은 EDM이 가미된 트리팝. 제니스의 변신 이미지와 너무 안 맞다.
여섯 번째 곡은 소울 발라드.
“휴….”
지금 가장 인기 있는 걸그룹 ‘원스’처럼 중독성 강한 팝이라면 내 귀가 알아봤을 거다. 혹은 상큼 발랄한 대인기 걸그룹 ‘버디’처럼 노래 자체가 좋으면 모를까.
6곡 모두 제니스와 안 맞거나, 귀에 꽂히질 않는다. 그것도 아니면 기존 제니스 이미지에서 한 발도 더 나가지 못했다.
제니스가 보일 변화를 짐작하자면.
보이그룹처럼 강한 댄스곡을 하거나, 음악성이 있는 곡을 선택해야 한다. 뜨지도 못했는데 한물갔다는 평가를 듣는 3년 차 걸 그룹은 차별성 있는 음악으로 승부 해야 한다.
노래는 모두 꽝이지만 호감이 느껴지는 곡은 있다.
경험상 함부로 무시할 수 있는 느낌이 아니다.
“여섯 곡 작곡가가 같은 사람은 아니지?”
“3명이야.”
“네 번째 곡 작곡자를 만나야겠다. 그나마 이번 신곡에 좀 맞는 작곡자 같아. 제니스가 발표한 곡 느낌도 좀 나고.”
“그분이 제니스 이전 곡을 준 작곡가야. 몇 주 전에 곡 받을 때 작곡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해보겠다고 들었는데.”
나처럼 뜨지 못한 무명이다.
딜레마에 빠진 것 같다. 인기 아이돌에겐 팔리질 않으니 무명 아이돌에게 곡을 팔았고, 그 곡이 대박이 나질 않으니 또 그저 그런 아이돌에게만 곡을 주게 된 것이다.
중소 기획사의 요구대로 곡을 만들다 보니 본인의 색깔은 사라졌지, 실력 없는 작곡가로 낙인이 찍혀 버려서 메이저 신에 진입을 못하지.
일단 작곡자를 만나보자.
작곡가의 실력과 호감의 원인이 뭔지 확인한 후에 다른 곡을 찾아도 늦지 않다.
내친김에 그 작곡가에게 연락했다.
지금 찾아가도 되겠느냐고.
와도 된다는 답장이 왔다.
지성이와 함께 그 작곡가를 만나러 갔다.
* * *
허름한 옥탑방으로 올라갔다.
작곡 장비를 커피전문점으로 옮길 순 없으니 곡을 확인하려면 직접 방문할 수밖에 없었다.
내 또래인 작곡가가 민망한 기색으로 나와 지성이를 반겨주었다. 방은 작아도 작곡 장비는 다 고가였다. 버는 족족 장비를 샀으니 생활이 안 피지.
“침대에라도 앉으세요. 커피 좀 타올까요?”
“아니요. 물이나 한 잔 주세요.”
작곡가가 작은 생수병을 들고 왔다.
물 한 모금 마신 후 물었다.
“방준혁 작곡가라고 하셨죠?”
“네. 아이돌 곡을 만든 지 4년 정도 되었는데 열다섯 곡 판 게 전부네요. 제니스가 사실상 제 생활비를 벌어다 주고 있습니다.”
“가장 히트곡은 뭐죠?”
“보이그룹 레인저의 와일더예요.”
2년 전에 음악방송에서 얼핏 들었던 것 같다.
지금 보이그룹 레인저는 인기가 많다. 인기가 오른 후 더는 방준혁 작곡가의 곡을 안 받았다는 뜻. 와일더가 레인저 입장에선 망한 곡이다. 그 후 유명작곡가의 곡만 발표했겠지.
“기획사 입맛대로 맞춰주는 편이죠?”
“네. 아무래도 제가 무명이다 보니…….”
곡을 팔 수가 없으니 의뢰를 받았다는 거겠지.
무난한 걸그룹의 곡을 만들어 달라고.
“작곡 그만두고 다른 일 알아보신다고 들었는데, 다른 일이라면 생각하신 게 있어요?”
“그게 제가 지금도 부업으로 녹음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더에서 활동하는 애들 레코딩요. 부업이 아니라 전업하려는 거죠.”
프로듀싱과 레코딩 엔지니어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곡은 좀 만들어 두셨어요?”
“만들기야 많이 만들었죠.”
작곡가가 마우스를 움직여 폴더를 보여주었다.
4년에 걸친 작곡 작업의 모든 것이 화면에 떴다.
메인 폴더만 10개.
작업 곡. 완성 곡. 까인 곡. 버린 곡. 아픈 곡.
고려 중. 수정 중. 재고 중. 보류 중. 수면 중.
척 봐도 알 것 같은 폴더들이다.
“완성 곡과 작업 곡을 좀 들어봐도 될까요?”
“작업 곡은 데모 수준도 아니에요. 10초짜리 멜로디만 있는 것도 있고요.”
“상관없습니다.”
“예.”
코어를 약 70% 수준으로 발동했다.
곡이 좋은지 나쁜지. 가능성이 있는지 어떤지.
다른 곡과 조합했을 때의 경우. 다른 진행으로 갔을 때 결과. 곡의 변주는 가능한가. 원래 의도보다 어울리는 장르와 비트는? 곡의 잠재력은?
무명작가를 ‘천재’ 작가로 만들어준 코어다.
이 코어 능력을 무명 작곡가가 가진다면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겠나. 코어가 분석한 결과를 작곡가에게 전달해주면 되는 것.
방준혁 작곡가가 파일을 차례로 틀어주었다.
멜로디만 쳐 둔 곡도 있고, 믹싱까지 한 곡도 있다.
순전히 내 음악 감각을 통한 코어의 분석이 시작되었다.
전문가가 아닌 일반 대중의 귀다.
음악이 나올 때마다 수많은 창이 떴다가 사라졌다.
그렇게 두 폴더의 9곡을 들었다.
“잠깐만요. 잠시 쉬죠.”
들었던 9곡을 다시 정리했다.
좋았던 멜로디. 후크로 쓰면 적당한 부분.
진행을 개선하면 좋아지는 곡.
장르를 바꾸면 훨씬 나아지는 곡.
일단 거기까지 정리했다.
“이번엔 까인 곡과 아픈 곡 위주로 들어보죠.”
“까인 곡은 노래가 길어요. 합치면 백 곡이 넘는데.”
“괜찮습니다. 오늘 시간 많아요.”
“그럼, 그러세요.”
까인 곡 폴더를 열자 무려 112곡이나 나왔다.
작곡가가 창피해서 안 보여주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 곡들도 하나씩 경청했다.
대충 듣지 않고 분석하면서 들었다.
2시간이 지나고.
또 2시간이 지나고.
지성이는 회사로 돌아갔고, 작곡가는 지쳐 나가떨어졌다.
나중에는 내가 직접 곡을 확인했다. 작곡가 모르게 작곡 노트를 훔쳐 보기도 하고.
모든 곡을 다 들었을 때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시계를 보니 저녁 7시였다.
우선 두 곡이 나왔다.
내 느낌에는 두 곡 모두 정말 괜찮다.
작곡가에게 확인받으면 알 터.
* * *
곡을 분석할 때도 영화 분석만큼의 힘이 들어갔다.
도중에 음악 장르와 작곡, 음악 트렌드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쌓이면서 내가 직접 작곡하는 게 가능해질 지경이었다.
피아노와 장비만 다룰 줄 안다면.
방준혁 작곡가의 단계별 작곡 방식과 훔쳐본 작곡 노트, 메모 등을 통해 곡을 어떻게 만드는지도 알게 되었다.
유명 작곡가 용감한 형이 악보를 볼 줄 모름에도 작곡이 가능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작곡 프로그램으로 비트와 멜로디 등을 찍는 시퀸싱만 알면 곡 하나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작곡도 다른 창작 작업과 다르지 않았다.
주제와 틀을 정하고 스케치하고 선을 그린 다음 색을 칠한다. 시나리오는 씬을 쌓고 캐릭터를 만들고 대사를 다듬는 거라면, 작곡은 장르를 선택하고 멜로디 라인을 쓰고 리듬과 악기를 얹는 식이다.
거진 5시간 동안 작곡을 배운 셈이었다.
곡을 분석하고 작곡 방식을 배우고 난 후 재분석을 했다.
들었던 곡들을 조합하기도 하고. 더 나은 장르를 선택하기도 했다. 멜로디를 바꾸거나 다른 곡에서 따오기도 했으며, 장르를 섞어서 시뮬레이션하기도 했다.
일반인도 작곡은 몰라도 음악이 좋은지, 나쁜지는 안다.
지극히 평범한 내 음악 취향을 거친 뒤, 작곡 시스템을 학습한 코어가 추천하고 조합한 결과다.
그렇게 2곡을 만들어 버렸다.
악보는 없지만 내 머릿속에는 있다.
바로 작곡가를 깨웠다.
“두 곡을 발견했습니다.”
“정말요?”
작곡가 지친 기색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작곡가님이 쓴 곡을 조합해서 새롭게 만들어 봤습니다. 어느 파일인지는 몰라요.”
“작곡을 배우신 분이세요?”
“그냥 기억력이 좋은 편입니다. 청음 가능하시죠?”
“3성 코드에 7화음까지는 겨우 듣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음을 딸 수 있다는 말이겠지.
“제가 허밍을 할 테니 악보에 입력해보세요.”
“예.”
작곡가가 불신의 표정으로 날 보다가 작곡 프로그램을 켰다. 컴퓨터와 연결된 마스터 키보드를 치면 그대로 악보에 음표가 찍히는 작곡 프로그램이다.
“흠 흐흠 흐흐흠. 흠으흐흠 흐흐흠…”
내가 허밍으로 멜로디 라인 소절을 부르면 작곡가가 듣고 키보드를 쳐서 악보로 만들어갔다. 도입부인 벌스를 부르고 브릿지에 이어 싸비로 들어갔다.
“흐흠 흐흐흠흐흐. 흐흐흠. 여기서 극적인 전환 뒤에 랩이 16마디 들어가요. 다시 흐흠. 흐흠…”
악보를 쓰는 작곡가의 눈에 놀라움이 들어차고 있었다. 자신이 봐도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던 모양이다.
곡 하나가 끝났을 때.
작곡가가 멍하니 날 보았다.
도무지 믿기 어렵다는 표정.
“이거 장난이 아닌데요. 제가 쓴 멜로디도 있지만 새로 쓴 곡이에요. 딱히 조합했다고 보긴 어려운데요.”
“어때요? 그럴싸하죠?”
“그럴싸한 정도가 아닙니다. 익숙하면서도 전혀 새로운 느낌인데요.”
“한 곡 더 있습니다. 이 곡은 화성학과 코드를 염두에 두고 청음 하셔야 합니다.”
“변주가 다채로운 곡이네요.”
“예. 펑키 기반의 신스 팝이에요.”
“예. 들어볼게요.”
작곡가가 키보드가 아닌 악보와 펜을 꺼내 들었다.
바로 허밍을 시작했다.
도입부를 듣자마자 작곡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럴 수밖에 없다. 팝송을 참조하여 진행해서 그가 듣기엔 외국 작곡가가 만든 곡처럼 느껴졌을 테니까.
한국식 멜로디 진행이 아닌 팝 느낌.
내가 허밍하면 작곡가는 화음까지 염두에 두며 음표를 써내려 갔다. 그가 다 적기를 기다린 뒤에 다음 소절을 하고, 한 소절 할 때마다 포인트를 말해주었다.
두 번째 곡을 써낸 작곡가의 표정이 볼만했다.
무슨 도깨비를 본 듯한.
“혹시 이거 표절 아니죠?”
“당연히 아닙니다.”
“그런데 왜 어디서 들어본 거 같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곡을 이렇게 만들어낼 수가 있죠? 지금 불러주신 것만으로도 완벽한 진행인데요?”
“그런가요?”
“정말 작곡 모르는 거 맞아요?”
“악보도 못 봅니다.”
작곡가 방준혁이 멍한 눈으로 날 본다.
지금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다.
“두 곡의 장르와 중요 포인트를 말씀드릴게요.”
“예.”
작곡가가 바로 메모할 준비를 했다.
“첫 번째 곡은 한류 아이돌 ‘아미’가 선보였던 뭄바톤 트랩 장르입니다. 걸그룹 ‘블링크’도 비슷한 장르를 내서 성공했고요. 여기에 트로피컬 하우스를 섞어도 됩니다. 다만, 벌스에서 짧은 인트로 후 쾅! 하고 등장하는 느낌으로 강렬한 신스 후크를 줘야 합니다.”
작곡가가 바쁘게 메모했다.
뭄바톤 트랩은 레게톤의 일렉트로 하우스 계열이다. 멜로디컬하면서 특징 있는 신시사이저 사운드가 들어간다. 트로피컬 하우스는 재즈 요소가 들어가서 곡이 고급스러워지는 장점이 있다.
방준혁 작곡가의 메모에 의하면 그렇다.
말을 이었다.
“같은 신스 후크를 코러스에도 줘야 하고요. 백사운드와 브릿지 부분에도 중독성 있는 신스나 세션 포인트가 들어가야 해요. 피아노나 기타 리프를 깔아줘도 되고요. ”
“무슨 뜻인지 알겠네요. 느낌이 와요.”
어제였다면 몰랐을 음악 용어가 내 입에서 술술 나온다.
벌스는 도입부이고 코러스 혹은 싸비는 후렴구다. 브릿지는 두 부분을 연결하는 간주 부분인데 여기서 포인트 안무나 랩, 변주된 파트가 들어간다.
“이거 악보만 봐도 어떤 노래가 나올지 보이는데요.”
“그래야죠. 두 번째 곡 장르입니다.”
“네. 말씀하세요.”
“두 번째 곡은 EDM 펑키입니다. 펑키를 바탕으로 신스로 후크를 주세요. 빅밴드 브라스를 추가해도 되고요. 묵직한 베이스 기타와 그루브한 드럼 비트를 백그라운드 사운드나 브릿지 후크로 깔고, 코러스엔 멤버들의 보컬 앙상블이 들어가면 좋을 것 같네요.”
“아까 신스 팝이라 하셨는데 느낌만 펑키인지, 제대로 펑키 사운드로 가시려는 건지요? 펑키도 워낙 다양해서요.”
작곡가는 작곡가다.
디스코와 힙합의 기반이 되었던 펑키는 광범위하다. 제대로 펑키 사운드를 보여주려면 최고 수준의 연주자를 섭외해야 한다. 당연히 아이돌의 펑키는 팝이다.
“조지 마이클의 ‘몽키’라는 곡을 참고해보세요.”
“몽키요?”
작곡가가 유튜브로 몽키라는 곡을 들어보았다.
전자악기인 MIDI를 메인으로 하고 베이스 기타와 드럼은 실제 연주로 녹음한 곡이다. 리듬감이 뛰어난 곡.
몽키의 인트로를 듣다가 벌스로 진입하는 순간.
“아, 이 느낌이구나.”
가볍게 탄성을 지르곤 날 보는 방준혁 작곡가.
몽키와 두 번째 곡을 비교하자 뭔가 보였던 거다.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제니스의 두 신곡.
첫 번째 곡은 타이틀 곡이다.
트렌디하면서 중독성이 강한 곡으로 음원 차트 높은 순위에 오르는 게 목표다.
두 번째 곡은 일부러 펑키 장르를 선택한 만큼 제니스의 달라진 음악성을 보여주기 위한 곡이다. 신 나는 곡이라 멤버들의 자유분방한 변신도 보여줄 수 있고.
멤버들이 보컬 트레이닝을 시작한 지 2달이 넘었다. 그동안의 집중 훈련으로 보컬이 확실히 달라졌다.
따라서 보컬에도 중점을 찍을 생각이다. 변화무쌍한 화음과 보컬 앙상블을 과시하고, 메인 보컬로 변신할 세라는 기존에 없는 음색까지 노려볼 생각이다.
작곡가가 물었다.
“어느 수준으로 곡을 만들까요?”
“데모까지 해주세요. 디테일한 편곡과 믹싱은 데모 나온 뒤에 스튜디오에서 작업해주시고요. 데모로 안무를 짜야 하거든요.”
“알겠습니다.”
“얼마나 걸릴까요?”
“두 곡 합쳐서 한 달이면 됩니다.”
“7월 19일 즘에 신곡 발표 가능할까요?”
“가능해요. 다음 달 초에 멤버들 레코딩하고, 믹싱과 마스터링까지 거치면 7월 둘째 주까지는 완성될 것 같습니다.”
“프로듀싱도 가능하시죠?”
“그렇기는 한데.”
“다 맡길게요.”
작곡가의 안색이 더욱 밝아졌다.
자신이 있으니 하고 싶은 의지가 있는 거겠지.
작곡가의 옥탑방에서 나갔다.
유명이든 무명이든 창작자의 스킬은 거기서 거기다. 창의적인 사고와 영감에서 차이가 날 뿐이지.
내가 방준혁 작곡가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준다면 그도 달라지겠지. 코어 능력을 간접적으로 주는 셈이니.
집으로 향하는 길에 김판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투자가 무산되어 영화가 엎어졌다는 말은 들었다.
새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고 했던가.
“왜?”
-맥주 한잔하자.
“또 일이 안 풀리나 봐?”
-일단 만나. 내가 갈게. 지금 어디야?
“뭔 일인데?”
-마포로 갈 게.
김판수가 전화를 끊었다.
뭔 일이기에 이렇게 급한 건지.
* * *
내가 사는 동네 치킨집에서 김판수와 맥주를 마셨다.
호프를 한 모금 마시자마자 칭찬이 나온다.
“국경의 끝 잘 봤다. 진짜 네가 쓴 거야?”
“누가 대필이라도 했을까 봐?”
“전에 네가 쓴 거 하고 다르던데?”
“나도 조금은 발전했겠지.”
영화 잘 봤다는 문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온다.
1년에 한 번 겨우 만나는 동창 놈들이 각본 타이틀에 내 이름이 있는 걸 보곤 놀라서 문자를 보낸 적도 있다.
사실 중소 영화사 프로듀서에게서도 전화가 두 번 왔다.
같이 작업하자고.
일단 보류했다. 지금 계약하면 제값을 못 받는다.
한 달 지난 뒤에 결정해도 충분하다.
영화가 잘 되고 있다는 신호로 봐도 되겠지.
김판수에게 물었다.
“지금 제작하는 영화는 어디까지 진행됐어?”
“투자 알아보고 있는데 이번에도 쉽지가 않네.”
“감독님은 입봉이겠고.”
“그렇지 뭐.”
“대표님은 괜찮은 분이야?”
“괜찮은 거 이상이지. 그런데 이번에 또 안 되면 제작사 접는단다. 일곱 달째 사무실 월세만 나가고 있으니 어쩌겠어.”
“어떤 영환데?”
“혹시 너… 우리 영화 각색 생각 있어?”
김판수의 눈이 빛났다.
날 만나려고 한 목적이 그거였다.
“일단 소재나 들어보고.”
김판수의 입에서 말이 쏟아졌다.
“조폭 코미디. 여자 속옷 회사에 다니는 회사원이 있는데 전국구 조폭과 똑같이 생겼어. 그 회사원이 협박을 받아 조폭 보스의 대역을 하게 된 거야. 조폭들이 전쟁을 벌이고 있었거든. 근데 그 조폭 보스가 죽어. 주인공이 대역인 걸 유일하게 알고 있던 보스 오른팔도 죽고.”
“그래서 대역이 진짜 조폭 보스가 된다?”
“그렇지! 어때? 죽이지?”
소재는 나쁘지 않은데 좀 더 굴려야 할 내용이다.
뻔한 이야기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니까 이런 내용 아니야. 조폭 보스가 엄청 잔인한 인간인데, 가짜 보스는 인간적이다. 그 가짜 보스가 진짜 보스가 되어 가는 과정에서 부하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게 된다.”
김판수가 뜨끔했다.
“당연히 그 방향으로 가야 이야기가 되지.”
“예측이 가능하잖아? 결말이 보이는 데 누가 봐?”
“반전을 하나 넣으면 되지. 쌍둥이였다던가.”
“그것도 예측할걸? 이 소재는 카게무샤에서 이미 한 이야기야. 뭘 해도 비슷해질 게 뻔해.”
“카게무샤는 뭐냐?”
“그림자 무사.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영화야. 일본 전국 시대 때 오다 노부나가와 싸우던 다케다 신겐이 총에 맞아 죽게 돼. 죽기 직전에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했지. 그래서 신하들이 신겐과 닮은 좀도둑을 신겐 대역으로 내세웠는데, 그 가짜가 신겐만큼이나 영주 역할을 잘했지.”
“그런 게 있어?”
낙심한 김판수를 얼굴을 보다가 웃었다.
“대안을 말해줄까?”
“뭔데? 좋은 생각 있어?”
“조건이 있어. 왜 새 출발 한 건지 말해 봐.”
“그게 왜 궁금한데?”
“당신 꿍꿍이가 뭔지 알아야 함께 가지.”
함께 간다는 말 때문인지 김판수의 동공이 흔들렸다.
딱히 비밀로 할 이유는 없었던 모양이다.
김판수가 바로 입을 뗐다.
“마누라가 아파.”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건 알고 있었으니.
그의 말이 이어졌다.
“어떻게든 치료비를 대고 싶은데, 집 사람이 싫어해. 사기 쳐서 번 돈으로 치료받을 바엔 죽겠단다. 내가 어떻게 하냐. 열심히 살아야지.”
“어떻게 만났는데.”
“초등학교 동창. 내 짝꿍이었어.”
듣자마자 애잔한 느낌이 전해진다.
김판수가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집 사람. 고아야. 여태껏 고생만 한 사람이야. 초딩 때부터 나이 서른이 넘을 때까지 쫓아다녔지. 아니지. 한 6년 동안 연락처도 모르고 살았어. 우연히 만난 거야. 사귀자고 했지. 그때 그러더라. 자길 책임질 수 있느냐고. 내가 쫓겨 다니는 걸 알고 있더라고.”
“그래서 제대로 살겠다고 약속했어?”
“그냥 책임진다고 했어. 한 여자의 인생. 내가 책임진다고.”
김판수의 얼굴에 후회나 회한 같은 건 없었다.
행복해 보였다. 비록 현실이 좀 암담하기는 해도.
김판수가 희미한 웃음을 띠며 말을 이어갔다.
“결혼하고 바로 딸아이를 낳았지. 애가 2살이 됐을 때. 집 사람이 아프기 시작했어. 희귀병이래. 빈혈로 항상 누워 있어야 돼. 자기 몸을 자기가 공격하거든.”
“면역 체계 질환이구나.”
“그래.”
“지금 병원에 계시는 거야?”
“집에 있어. 만성이라 좀 심해지면 입원해야 하고.”
“완쾌할 수는 있어?”
“안 될 거야. 평생 약을 달고 살아야 한다고 했으니까.”
“통증이 심하진 않고?”
“합병증만 없으면 괜찮아. 자주 재발해서 그렇지. 지금은 쌩쌩해. 오늘도 돈 벌어오라고 어찌나 잔소리를 하던지. 확 이혼해버릴까 보다.”
김판수가 아픈 아내를 버릴 것 같진 않지만 상황이 좀 어렵긴 했다. 아내가 일 년에 서너 번 병원 신세를 져도 병원비 감당하는 게 큰 문제다. 매일 먹는 약값은 말할 것도 없고.
김판수가 생각을 떨치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서 네가 생각한 이 영화의 대안은 뭔데?”
이 시나리오에 관심이 생겼다.
내 두 번째 작품이 될 거란 감이 온다.
이 영화 잘 되면 김판수에게도 도움이 되겠지.
김판수가 말한 영화의 대안은 들으면서 나왔다.
잠시 머릿속으로 정리한 뒤 말했다.
“우선 주인공 직업은 회사원이 아닌 무명 연극배우야. 알바로 생활비를 벌고 있지. 조폭 보스는 죽지 않았어. 죽을 뻔했으나 가까스로 살아나서 얼굴과 성대에 화상을 입어 성형을 했어. 보스의 상황을 알지 못하는 주인공은 조폭 보스 대역을 유지하면서 알바도 병행해. 그 상황에서 벌어지는 코미디가 있겠지.”
“그렇지. 부하들이 왜 알바를 뛰느냐고 물을 테니까.”
“그때 진짜 보스가 찾아와서 자리를 되찾으려고 하는데, 주인공을 보스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부하들이 진짜 보스를 내치는 거야. 주인공은 보스 대역을 그만두고 싶지만 24시간 붙어 있는 부하들 때문에 못하게 돼. 진짜 보스는 자꾸만 찾아오고. 둘 사이에서 낀 주인공은 미쳐 버릴 것 같은데 상황은 되게 웃긴 거야. 그러다가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해.”
“무슨 사건?”
“경쟁 조직 칼잡이가 주인공을 기습했어. 현실이라면 주인공이 죽겠지. 그런데 코미디답게 황당한 방법으로 이겨버리는 거야. 게다가 적들이 주인공 동료 연극배우들을 보고는 무자비한 조선족 킬러라고 착각을 해.”
“착각에 착각을 거듭해서 웃기게 한다는 거지?”
“그거야. 알고 봤더니 주인공이 나름 머리를 써서 후배 배우들에게 조선족 킬러 연기를 시켰던 거지.”
“연극으로 속인 거네.”
“그렇지. 주인공이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도 연출하고, 간이 커진 후배들도 킬러 흉내를 내면서 조폭 대역들이 되어 가는 거야. 나중엔 자신들이 진짜 조폭이 된 줄 알고 오버하게 되고.”
“대충 그림은 나오는데. 결말은?”
“주인공과 후배 배우들이 진짜 조폭이 되는 거야.”
“그것도 예측할 수 있잖아?”
“단, 조폭 조직이 일반 회사가 되는 거지.”
“불법 다 정리하고 합법적인 사업으로 바꾼다?”
“응. 점점 대범해져 가는 주인공이 정말 조폭 보스처럼 카리스마를 가지게 돼. 그때부터 주인공이 주도하여 후배 배우들과 치밀한 극본을 짜서 한바탕 판을 벌이는 거야. 경쟁 조직은 함정에 빠지고, 진짜 보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줄곧 의심하던 조직 내 반대파는 사기를 당하고. 자기 조직. 경쟁 조직은 물론 경찰들까지 속이는 거지.”
“현실에서 제대로 연극 한 판 한 거네.”
“그걸 반전으로 넣는 거야. 관객들은 주인공이 살인까지 하면서 진짜 조폭이 되어가는구나 싶었는데, 모두 연극이었다는 게 나중에 밝혀지는 거지. 옛날 영화 스팅처럼.”
반전 범죄 영화의 원조. ‘스팅.’
복수를 위해 갱단 두목을 속이는 두 야바위꾼 이야기.
“엄청 통쾌하겠는데?”
“당연히 그래야지. 마지막 장면에선 주인공이 진짜 조폭 보스이자, 회사의 대표가 되어 사장실의 의자에 앉는 거야. 영화 ‘새로운 세계’의 마지막 장면 패러디라고 할까.”
“오!”
“카게무샤에서 기본은 뽑아놨어. 그걸 코미디 소동극으로 변주하면 돼. 경쟁 조직과 부하들, 경찰들이 주인공에 대해 착각하면 할수록 코미디의 강도가 커질 거야.”
“당연히 그렇겠지.”
“코미디의 법칙. 한 장면에서 두 번은 웃겨라. 행동과 말로 웃기고, 상황으로 웃기고 캐릭터로 웃겨라. 막판에 비비 꼬아놨던 상황들과 인물들을 광장에 모아 넣고 한 번에 터트려라. 한 번 웃기고, 한 번 더 웃기고, 결정타까지 먹여야 포복 졸도가 되는 거지.”
김판수가 스마트폰에다 메모를 하고 있었다.
“뭘 적는 거야?”
“코미디의 법칙.”
뭘 그걸 메모까지 해.
기분 좋게 남은 호프를 원샷했다.
생각만 해도 어떤 영화가 될지 눈에 선하다.
관객이 실컷 웃다가 기분 좋게 극장을 나설 영화다.
“그 작품 누가 썼어?”
“감독. 6고까지 쓰고 완고 냈는데. 아무래도 네가 말한 대로 가야 하지 싶은데.”
“각색료는?”
“넌 얼마 정도로 생각하는데?”
“1고에 2천. 3고까지 가면 3천.”
뭔 헛소리를 하느냐는 김판수 얼굴.
하기야 이전에 내 단가는 500이었으니.
“야, 3고에 3천이면 너무 세.”
“1고에 끝날 거거든.”
“각색 초고로 영화 찍는 미친놈이 어디 있냐.”
“국경의 끝. 초고야.”
“뭐? 그게 초고라고?”
김판수의 눈이 동그래졌다.
“대표님에게 전해. 영화가 극장에 걸리는 거 보고 싶거든 각색해야 한다고. 내가 각색하면 관객 500 이상 든다.”
김판수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갈수록 가관이다 이거지.
근거 있는 자신감이다.
스토리를 듣자마자 어떤 전개가 좋을지 감이 왔다.
“대표와 감독님에게 내 말 전하고 오케이하면 시나리오 보내. 계약하고 일주일 안에 각색해서 보낼 테니까.”
“일단 말은 하겠는데… 근데 일주일?”
“일주일이면 충분해.”
“일주일 만에 초고를 써?”
“안 믿으려면 말고.”
“그게 저, 내가 설득은 하겠는데 감독이 자기 글에 좀 깐깐해서.”
“자기 글 고집하다가 영화 못 찍는 것보다 낫지 않아?”
방긋 웃어주었다.
김판수. 이거 믿어도 되나 싶은 얼굴이다.
* * *
영화 개봉 후 14일이 지나갔다.
개봉 첫 주 주말에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더니 2주차가 되자 확실히 흥행에 속도가 붙었다.
포털 사이트에는 영화에 대한 호평과 그저 그렇다는 평이 동시에 올라왔다. 대체로 여성 관객은 평이 좋은 편이었고, 남성 관객은 노출 볼 거 없다는 평이 대다수. 그래도 엄아인과 이유현의 연기는 볼 만했다고 했다.
일반 관객의 평은 대체로 이랬다.
한데 언론과 평론가 평은 확연히 달랐다.
기자와 평론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엄아인의 연기에 찬사를 보냈다. 올해 영화제 남우주연상 후보라는 말까지 나오고, 부끄럽게도 각본상에 대한 언급도 나온다.
감독에 대한 평도 칭찬 일색.
현재 흥행 스코어는 300만 정도.
첫 주보다 둘째 주 관객 수가 훨씬 많다. 이대로 3주차를 지나 4주로 이어지면 얼추 예상 관객 수에 맞을 것 같다.
여성들 사이에 이유현의 인기가 매우 올라가서 여성 관객이 점점 더 많이 모이는 추세였다. 그런 여성의 남자친구도 덩달아 별생각 없던 영화를 관람하게 되고.
예능을 보며 낄낄거리고 있을 때.
마침내 김판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게 각색을 맡기기로 했다며.
* * *
조약돌 픽쳐스가 있는 역삼동으로 갔다.
작가가 감독을 만나러 가는 게 예의라 오겠다는 걸 말리고 내가 제작사 쪽으로 온 터였다. 하필이면 나와 악연이 있는 메이저 영화사 드림메이커도 이 건물에 있다.
건물 로비에 있는 커피점으로 들어갔다.
기다리던 김판수가 내가 앉자마자 책을 내밀었다.
‘나는 보스다.’
제목이 괜찮은 것 같으면서도 싸 보였다.
코미디 영화니까 뭐 그럴 수도 있고.
김판수가 말했다.
“오늘 계약할래?”
“대표님은?”
“곧 내려올 거야.”
김판수가 건넨 시나리오를 읽어 보았다.
시나리오에 구멍이 좀 있었다. 여러 번 굴리면서 씬을 재편성한 흔적이다. 흐름이 잘 가다가 뚝뚝 끊어진다. 완성도는 있지만 감정의 이입이 들쑥날쑥하기도 하고.
각색 건이 오간 직후 김판수에게서 캐릭터와 스토리를 전달받았다. 그걸 토대로 일주일 동안 영화 전체 구성을 다 짜놨다. 코어를 통해 굴리고 또 굴렸다. 국경의 끝을 쓸 때보다 7배 정리된 수준.
책을 다 읽었을 때.
조약돌 픽쳐스의 대표와 감독이 커피점으로 들어왔다.
“반갑습니다. 신승호라고 합니다.”
“손호영입니다.”
“최신성이에요.”
악수를 하곤 자리에 앉았다.
대표는 신승호. 감독은 손호영.
영화 한다는 겉멋이 든 사람인 줄 알았는데 둘 다 엘리트 냄새가 물씬 풍기는 30대였다.
“잠시 시나리오 좀 더 볼게요.”
“그러세요.”
시나리오를 읽는 척하며 두 사람을 분석했다.
우선 대표는 영화를 잘 모를 뿐 이재에 밝은 사람이었고 두뇌도 뛰어난 것 같다. 감독도 단편 영화 몇 편을 찍어본 게 전부였으나 연출 감각과 실력이 상당히 좋은 느낌이다. 감독으로서 성공할 가능성 90%에 이른다.
성공할 확률이 높은 제작사다.
영화를 몰라서 지금은 버벅거리지만 일단 제작 경험을 쌓으면 대표에게 인재가 모일 것 같다. 투자받은 돈으로 허튼일 할 것 같지도 않고.
“각색 제가 해도 될까요?”
“걱정이 좀 되긴 하지만 김 실장 믿고 가보기로 했습니다. 사실 각색 2천이 저희에겐 쉽지 않은 액수라서요.”
안 그래도 대표 표정을 보니 심사숙고한 얼굴이다.
감독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고.
계약서에 사인했다.
각색 완료 시 선금 천. 프로덕션 진입 시 잔금 천.
내가 미리 언질을 준 터라 계약서에 흥행 수익 배분을 제작사 순수익의 3%로 명시했다. 이 부분에 고민이 많았을 거다. 각색에 수익 배분을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작가 배분치고는 좀 많기도 하고. 뭐, 감독은 각본 연출 합쳐서 배분이 5%라고 들었으니.
계약을 한 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판수가 이 엘리트들과 함께 일하는 이유가 있었다.
대표도 감독도 현장을 잘 모르는 초보들이었기 때문이다.
대표는 외국계 금융회사 간부 출신이고, 감독은 조감독 경험도 없는 미국 명문대 유학파. 둘이 친구였던 거다.
투자가 이렇게 어려울 줄 미처 몰랐단다.
엘리트의 패기인지, 무식해서 겁이 없는 건지.
하긴 영알못이니 김판수를 끌어들였지.
신 대표가 웃으며 말했다.
“국경의 끝 잘 봤습니다.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더군요. 그 작품 초고라는 말 듣고 한 번 더 놀랐고요.”
감독도 한마디 했다.
“사실… 그 영화 보고 각색 맡기려고 한 겁니다. 판수 형 칭찬을 듣고 반신반의했는데 영화 보고 나니 감이 오더군요.”
“제가 각색하면 많은 부분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괜찮으시겠어요? 저도 작가라 감독님 마음 잘 압니다.”
대표가 감독을 보자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와 감독이 각색 범위에 대해 이야기를 좀 했나 보다.
감독이 말했다.
“애착이 없는 건 아니지만 다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전문 작가가 수정한 게 좀 더 낫지 않겠어요? 제가 유학을 오래 해서 요즘 트렌드를 모르기도 하고요.”
“그럼 원안을 기반으로 수정해 보겠습니다. 각색고는 최대한 빨리 완성해서 보내드리죠. 투자에 대해서도 제가 좀 알아보겠습니다.”
“투자야 뭐, 제가 발로 뛰어야죠.”
“그럼. 전 일어날게요.”
대표와 감독이 마중 나오려 하자 김판수가 그럴 필요 없다며 둘을 올려보냈다.
김판수와 함께 로비로 걸어가던 그때였다.
눈에 익은 남자가 걸어왔다.
“최 작가 오랜만이네.”
메이저 영화사 드림메이커의 박 부장.
예전의 김판수만큼이나 꼴 보기 싫은 인간.
내 원작 시나리오를 2천만 원에 사겠다고 해서 처음 메이저 영화사에 갔었다. 그때의 설렘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각색본을 보고 나서 계약하겠다고 해서 6개월 고생했는데 진행비 300만 원 받고 무산됐다. 그때만 해도 내가 운이 없어서, 메이저라서 그런 가 보다 했다.
그로부터 1년 후 내 원작이 교묘하게 수정되어 개봉되었다. 그 영화를 보고 난 뒤 정말 피가 거꾸로 솟는 게 뭔지 알게 되었다. 소재와 설정만 같고 내용이 달랐기 때문이다.
즉, 내 원작에서 포인트 아이템만 뽑아 간 것이다.
알고 보니 이런 식으로 아이템을 빼앗기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메이저 권력이 무명작가를 착취하는 방식이었다. 일종의 열정 페이다.
박 부장이 나와 김판수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끼리끼리 노는구만. 최 작가는 아직도 시나리오 쓰나?”
“요즘도 열정 페이로 작가들 굴립니까?”
“뭐?”
실실 웃던 박 부장이 정색했다.
화를 낼 듯싶었으나 그냥 씩 웃을 뿐이다.
이 인간에겐 내 말이 치부가 아닌 거지.
“글만 잘 써봐. 제작사에서 대우 안 해주나. 작품 좋은 거 있으면 가져와 봐. 회사 작가 팀에 끼워줄 테니까. 월급이라도 받으면 좋잖아?”
박 부장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보았다.
작가 팀에 있는 신인 작가인 모양이다.
아직도 그 짓거리 하고 있다는 뜻.
“당신… 머지않아 내 앞에 무릎 꿇을 날이 올 겁니다.”
“뭐? 당신?”
박 부장이 내게 다가왔다.
나도 다가갔다.
그 중간에 김판수가 스윽 하고 들어왔다.
“어이, 아저씨. 뭐 하려고?”
“안 비켜?”
“그냥 가던 길 가셔. 우리 최 작가 건드리면 확 돌아버리는 수가 있어.”
박 부장이 어이없다는 듯 나와 김판수를 보았다.
헛웃음을 짓더니 얼굴을 싹 바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박 부장이 옆에 선 남자와 함께 출입문으로 향했다.
“우리 홍 작가님은 뭐 좋아하시나?”
“저는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그래, 간만에 짜장면이나 한 그릇 할까.”
박 부장이 뒤돌아보지도 않고 제 갈 길 갔다.
홍 작가라는 친구도 무명작가다. 저 친구 무진장 굴려서 아이템 뽑은 뒤 유명 작가 불러서 새 작품을 만들겠지. 현재 드림메이커는 다른 작품을 하고 있을 테고.
뭐라 떠들며 걸어가는 박 부장을 보며 코어를 발동했다.
7인의 사무라이가 어쩌고저쩌고.
그걸 현대식으로 회사원이 어쩌고저쩌고.
이제 갓 시나리오를 개발하는 단계.
그게 당신이 기획한 작품이라 이거지?
7인의 사무라이라.
박 부장을 엿 먹일 소재 하나가 생각났다.
저 인간이 진행하는 작품이 촬영을 준비할 때쯤.
신성은 이미 그 작품 찍고 있다.
박 부장이 기획한 작품.
내가 엎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