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9장 시사회 (9/56)

제9장 시사회

설 연휴 전날 9회 차 촬영이 시작되었다.

남양주 세트장에서 엄아인과 이유현이 베드씬을 찍는다.

호텔 룸과 피고인의 방 두 세트에서 진행되며, 여배우를 배려하기 위해 세팅 직후 감독급만 빼고 나머지 스태프들은 전원 세트장 밖에서 대기했다.

세트장 입구에 서 있었는데 스태프들이 말을 걸어오질 않았다. 3회차 이후 촬영장 분위기가 서먹해서 서연은 자신의 촬영이 있는 날이 아니면 현장에 오질 않았다.

스태프들이 날 멀리하는 이유는 대충 안다.

내가 무명작가였다가 갑자기 영화사 제작실장이 되었다는 점. 애인임을 과시하듯 서연 옆에 너무 붙어 있다는 점.

현장 경험도 없는 작가 출신의 듣보잡이 애인을 영화에 꽂아 넣고 감독과 드잡이질을 했다는 거다.

이래저래 못마땅하다는 거지.

맞다. 다 내가 자초한 일이다.

오해를 했다면 그 원인도 내게 있는 거고.

이성적으로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인간 최신성이 아닌 코어가 판단하는 해결책은 뭘까.

코어의 판단이 곧 내 판단이겠지.

코어를 연 채 눈을 감았다.

이 상황. 감독의 입장과 심정. 망설이는 내 마음.

날 보는 스태프들의 생각. 앞으로 남은 촬영.

이러한 재료를 통해 분석해 보았다.

그런 뒤 나온 결론.

[이 일을 해결할 사람은 나. 사죄 혹은 타협.]

예상했던 결과다.

감독을 교체하면 추가 예산이 발생한다.

개봉 날짜에 못 맞추는 것은 물론 새로 온 감독이 내가 예측한 만큼 영화를 찍어줄지 알 수 없다.

조감독이 찍어도 되지만 조감독은 이 영화와 맞지 않다.

그렇다고 감독이 사과할 것 같지는 않고.

애초에 감독을 몰아붙인 것은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경고였다. 내 경고를 태업이라는 방법으로 감독이 머리를 쓴 것이다. 타협해야 한다.

대표님에게 꽤 긴 문자를 보냈다.

사과와는 별도로 조언을 구했는데, 대표님 역시 장문의 답변을 보내주셨다.

[촬영하다 보면 이런저런 헛소문이 돌기도 하고, 오해를 한 채 촬영이 끝나기도 해. 영화계 평판이 그런 게 쌓여서 만들어지기도 하고. 스태프들은 딱 계약 관계에서 크게 못 벗어나거든. 그렇다면 뭘 하는 게 좋을까.]

[계약 관계를 전제로 말씀이죠?]

[그래. 계약 관계.]

퍼뜩 생각나는 게 있었다.

[대표님. 팀장급 50. 일반 스태프 20. 가능할까요?]

[좀 센데?]

[예비 예산에서 맞춰 보겠습니다. 야외 촬영 전에 스태프 패딩 점퍼 맞추려고 했는데, 그 예산에서 뺄 수도 있고요. 나머진 일일 예산에서 조금씩 빼서 채우면 될 것 같습니다.]

[스태프들은 전혀 기대 안 하고 있지?]

[네. 우리 영화 예산을 다들 아니까요.]

[좋아. 오해가 있다면 본인이 풀어야지.]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참 뒤 다시 문자가 왔다.

[자고로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백성에게 뭘 좀 먹여야 하고,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손에 뭘 좀 쥐여 줘야 하는 법이거든. 오늘이 뭘 좀 주기에 딱 좋은 날이지.]

[네. 대표님. ^^]

상일이를 불렀다.

“은행 좀 다녀와.”

“왜요?”

“설 떡값.”

“굳이 떡값 줄 필요는 없는데요?”

“용돈 들고 고향 내려가면 좋잖아. 현장 분위기도 풀고.”

“그래서 얼마씩 줄 건데요?”

“50. 20.”

“캬하! 실장님 배포 보소.”

오상일이 소주 원샷한 소리를 낸다.

설 떡값은 예산에 없었다. 우리 영화가 메이저 제작사 영화도 아니고, 제작비도 저예산 범주다. 스태프들도 당연히 연휴 떡값은 없을 거라고 믿고 있다.

“겨우 20이야.”

“겨우가 아니죠. 스태프들이 몇 명인데. 하기야 현장 분위기 푸는 데에는 돈만 한 게 없죠. 조촐한 명절 선물 하나를 받아도 기분 좋은 게 사람인데 말이죠.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이왕 쓰는 거 29,000원짜리 선물 세트도 하나씩 사와. 66세트.”

“예산 빵구 날 텐데요.”

“하루에 100만 원씩. 20회 아끼면 돼.”

“예. 그럼 실장님만 믿을게요.”

오상일이 신이 난 얼굴로 차에 올랐다.

촬영장에 들어가 살펴보았다.

“컷!”

감독 콜이 떨어지자 배우 코디가 세트장으로 들어갔다.

조감독의 외침도 들려왔다.

“43씬 준비하겠습니다!”

스태프들이 바로 옆 세트로 이동한 뒤 세팅하기 시작했다.

베드씬의 2/3가량을 이 세트장에서 찍는다.

세트장에서 두 주연배우가 롱 패딩에 담요까지 어깨에 두른 채 나왔다. 엄아인은 내게 눈인사를 하곤 난로가 있는 곳으로 갔고, 이유현은 내게 할 말이 있다는 듯 잠시 보다가 난로로 향했다. 그녀도 서연과 관련한 일로 마음이 좀 쓰이는 모양이다.

* * *

촬영이 오후 5시에 마무리되었다.

감독에게 다가갔다.

감독이 내가 또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긴장했다.

감독을 교체하면 영화가 엎어지는 걸 각오해야 한다.

“왜 그러시죠?”

“대화 좀 합시다.”

“그러죠.”

감독과 한적한 곳으로 갔다.

자존심 때문에 서로 감정만 앞세우면 협상은 결렬이다.

조용히 말했다.

“영화 제대로 찍어 주십쇼.”

“제가 뭘 하기라도 했나요?”

“이 영화, 감독님 영화입니다.”

“그렇긴 하죠.”

감독의 눈을 보니 감정이 복잡하다.

나도, 그녀도 한발 물러서야 할 때이긴 했다.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일전에 투자사에서 제가 했던 말이 있습니다. 제가 가진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이 영화를 분석했을 때. 이 영화 흥행 수익이 550억이라고요.”

감독의 눈이 커졌다.

“설마 그걸 믿고 투자했다는 거예요?”

“아니요. 영화 가능성을 보고 투자했죠. 그런데… 저는 그 예측이 맞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좀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제게 그런 직감 같은 게 좀 있어요. 그래서 그 영화를 제대로 찍어 줄 감독을 찾았고, 그 감독이 조상미 감독님입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감독님이 영화를 제대로 찍어 주시고, 정말 흥행 수익이 550억이라면 감독님은 저예산 영화를 흥행 시킨 감독이 되는 겁니다.”

감독님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작사 수익을 80억이라 했을 때 감독님 수익 배분 3%.”

“3%라면…”

“예. 2억 4천입니다.”

감독이 할 말을 잃었다.

감독 계약금의 4배다.

쐐기를 박았다.

“이대로 대충 영화 찍으시면 영화 망할 거 뻔하고. 감독님도 재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찍어주시면 감독님은 흥행 감독이 되고, 인센티브로 2억을 법니다.”

“그걸 정말 믿는다는 거에요?”

“믿습니다. 저 믿고 4개월 버텨봅시다. 밑져야 본전 아닙니까?”

감독은 대꾸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죠. 이 제안 받아주시지 않으면 감독 교체합니다. 그러니 지금 결정해주시죠. 연휴 동안 새 감독님 찾아야 합니다. 촬영이 더 진행된 뒤에도 대충 찍으시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감독의 얼굴이 더욱 복잡해졌다.

어차피 둘 중 하나가 손을 내밀어야 했다.

감독이 자기 영화 망치게 하려고 대충 찍었을까.

나와 협상하기 위해 시위를 한 거지.

물론 먼저 잘못한 사람은 감독이다.

난 손을 내밀었고, 감독은 잡기만 하면 된다.

감독의 결단은 무척 빨랐다.

감독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제가 죄송해요. 사과할게요.”

“저도 죄송합니다. 감독님께서 이 영화 지휘관이라는 걸 잠시 망각했습니다. 앞으로 제대로 보필하겠습니다. 그리고 좀 전에 한 제 말은 맞을 겁니다.”

감독이 내 눈을 가만히 보다가 촬영 버스로 걸어갔다.

가면서 날 돌아보았다.

그 눈에 온갖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과연 감독과 난 화해를 하게 될까.

스태프들이 떠날 채비를 하던 그때였다.

“다들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오상일이 탄 차와 마트의 승합차 두 대가 줄지어 들어왔다.

승용차에서 상일이가 쇼핑백을 들고 내렸다.

스태프들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진다.

상일이가 외쳤다.

“자! 떡값들 받고 고향 가세요! 많이는 못 넣었습니다!”

스태프들 얼굴에서 일제히 꽃이 피는 것 같았다.

촬영감독님이 입가에 미소를 담은 채 내 어깨를 툭 치고 가셨다. 버스에 오르려던 감독도 제법 놀랐다.

상일이가 팀장들에게 봉투 다발을 나눠 주면, 팀장들은 자기 팀원들에게 봉투를 나눠 주었다. 난 마트 승합차 앞에서 햄 세트를 나눠 주었고.

“설 명절 잘 보내세요!”

“실장님도요!”

“연휴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실장님도 연휴 잘 보내세요!”

“저에 대한 오해는 풀어 주시고요!”

“네~ 고맙습니다, 실장님.”

“저 안서연 씨와 사귀는 거 아닙니다!”

“누가 뭐래요. 잘 먹을게요!”

내가 전달하는 햄 세트를 스태프들이 환한 얼굴로 받아갔다. 목소리는 높았지만 내 마음이 그리 편치는 않았다.

물론 떡값을 줬다고 스태프들이 확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앞으로 내가 오해를 살 일을 안 하면 된다.

감독이 또 이상한 일을 벌이면 그땐 어쩔 수 없다.

영화 엎고 재판할 수밖에.

감독이 선물세트를 들고는 날 물끄러미 보다가 버스에 올랐다. 감독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 느낌이 든다.

대체 왜 일을 이렇게 만들고 말았을까.

다들 웃는 얼굴로 명절 잘 보내라는 인사를 하며 차에 올랐다. 돈을 다 나눠 준 상일이가 다가왔다.

“너도 설 잘 보내.”

“네. 푹 쉬고 오세요.”

상일이가 지출 내역서와 영수증 다발을 내밀었다.

휴… 떡값만 1500을 넘었다.

선물 세트를 합치면 1700.

어떻게든 예산을 쥐어짜 봐야지.

탑차들이 하나 둘 주차장에서 나갔다.

차창을 열어 손을 흔드는 스태프들도 있다.

흐뭇하면서도 씁쓸한 마음으로 철수하는 차들을 보았다.

그때였다.

나가는 차들 가운데 낡은 승용차 하나가 들어왔다.

그 차에서 눈에 익은 남자가 내렸다.

저 인간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그런데 옷도 그렇고, 타고 온 차도 그렇고.

내가 알던 그 인간이 아니었다.

“오, 최신성! 웬일이냐? 정장을 다 입고?”

“오랜만이네요.”

“너 요즘 엑스트라 뛰냐? 하기야 팔리지도 않는 시나리오 죽으라고 써봐야 뭐 하겠냐. 엑스트라라도 해서 먹고 살아야지. 그래, 열심히 살아. 또 모르잖아. 우리 최신성이가 배우가 될지.”

김판수가 내 어깨를 툭툭 치고 지나갔다.

사람이 달라졌다.

저 인간 원래 이런 인간이 아닌데.

게다가 파문처럼 밀려오는 이 호감은 또 뭐고?

급히 코어를 발동했다.

이럴 수가!

【내 인생의 조력자.】

계약금 잔금 500만 원 떼어먹고 잠적한 인간이다.

그런 인간이 내 인생의 조력자라니.

외제차 몰고 다니고 투자받은 돈을 물 쓰듯 하던 인간.

한데 지금은 빚이 3억이 넘고 차도 폐차 직전이다.

입은 옷은 외국 산 수트 대신 패딩 점퍼에 면바지.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어이, 김판수.”

내 말에 김판수가 우뚝 멈추었다.

그가 천천히 날 돌아보았다.

“어이? 김판수?”

“얘기 좀 하죠?”

김판수가 씩씩대며 걸어왔다.

오늘 이 씁쓸한 마음을 이 인간에게 풀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웃으며 걸어갔다.

* * *

김판수와 식탁을 가운데 두고 앉았다.

이 인간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날 본다.

주차장에서 한 판 붙을 뻔했지만 내가 담배 한 개비를 내밀면서 싸움의 기세가 픽! 하고 꺼져 버렸다. 성질은 3년 전 김판수 그대로였으나 지금은 참을 줄 알았다. 건넨 담배도 피워 물지 않았고. 그 이유를 묻자 몸에 해로워서란다.

어쨌든 3년 사이 많이 변한 김판수였다.

자신만만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어딘가 초췌하다.

“요즘 뭐해?”

“뭐 하긴 영화 찍지. 넌 요새 좀 나가나 보다?”

김판수가 말을 하고는 백숙 국물을 수저로 떠먹었다.

내가 물끄러미 보고 있자 그가 피식 웃었다.

“왜? 나 하고 다니는 꼴 보니까, 안 믿기냐?”

“솔직히 예상 못 했는데.”

다시 말문을 닫은 김판수.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 말해줄 것 같진 않다.

속내를 털어놓을 정도로 친한 사이도 아니고.

“지금 하는 영화는 잘 되고?”

“엎어지겠지.”

“투자가 잘 안 돼?”

“그동안 내가 한 일이 있으니까.”

본인이 투자자들 사기 치고 다닌 걸 부정하지 않는다.

이렇게 된 게 어제오늘이 아니라는 의미.

이전 김판수였으면 초라한 행색을 숨기고 싶어서라도 날 모른 척했을 테니까. 더는 내려놓을 게 없다는 거겠지.

악명 때문에 일이 잘 안될 텐데도 아직 남아 있는 걸 보면 영화에 대한 열정은 그대로인 것 같다. 하기야 영화인으로서 경력은 그 누구도 무시 못한다.

“신생에서 일해?”

내 말에 김판수가 수저를 탁. 놨다.

“너 아까부터 반말을 찍찍하는데……”

“뭐 어때. 내 돈 떼먹고 잠수 탄 인간인데.”

김판수가 뭐라 한마디 하려다 웃고 넘겼다.

날 굴려 먹으면서 갑질하던 김판수가 아니다.

날 보는 눈에 미안한 빛이 비친다.

“아는 동생이 영화사를 차렸어. 시나리오는 나왔는데 프리로 못 들어가네.”

“양수리엔 왜 왔는데?”

“아는 조감독 좀 만나려고. 전화해도 받질 않는데 어떻게 하냐. 내가 와야지. 너 만날 줄은 생각도 못했지.”

본인 영화사 접고 신생 영화사에서 일하고 있다.

새 출발 했다는 방증이다.

투자자들 돈 떼어먹을 일은 없으니.

“빚은 어쩌다가 생긴 거야?”

갑자기 빚 이야기가 나오자 김판수가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 척 보면 견적 나오잖아.”

김판수가 수저를 든 채 날 빤히 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다 또 관두더니 백숙 국물만 떠먹었다. 고기는 뜯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모습이 처량하고 측은하다.

그 잘 나가던 사람이 이렇게 몰락할 줄 누가 알았을까.

물론 독립한 뒤 쌈마이 짓을 하면서 자초한 일이지만.

다시 코어를 발동하여 김판수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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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수 : 영화사 제작실장.]

[나이 : 36세.]

[키 : 178cm] [몸무게 : 71kg]

[인상 : 호방함. 눈웃음. 쓸쓸함. 장난기.]

[성격 : 자유분방. 꼼꼼함. 열정적.]

[신뢰도 : 75% 일반적.]

[지혜 : 비상한 두뇌. 남다른 직관.]

[이력 : 베테랑 영화인. 약 9년 경력.]

[능력 : 작품을 고르는 감각. 타고난 직감.]

[잠재력 : 영화계 유력인사가 될 확률 90%.]

[장점 : 뛰어난 화술. 상황 판단. 보좌 능력.]

[단점 : 지나치게 낙천적. 게으름. 이기적.]

[심리 : 가족 걱정. 암담한 미래. 복수심]

심리 부분을 확장시켜 보았다.

[3년 전 동업한 파트너가 배신한 후 빚이 생김. 거기에 아픈 아내의 치료를 위해 돈을 빌리면서 빚이 3억으로 늘어남. 다시 사기 치면 치료 안 받겠다는 아내의 경고 때문에 성실히 살고 있음. 한편 배신한 파트너를 찾으려……]

심리 부분을 원위치시키고 다시 보았다.

[인물 해석 : 나와 상반된 성격과 기질을 가진 인물로 내가 하지 못하는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함. 이 인물 스스로는 리더십과 신뢰도 부재로 성공할 확률이 떨어진다. 그러나 조력자가 있거나, 누군가를 돕는다면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 따라서 내 조력자로는 가장 적합한 인물. 내가 이 인물을 도울 수 있으며, 이 인물이 날 돕는다. 이상적인 상생의 관계.]

【최종 분석 : 내 인생의 조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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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결과를 다시 봐도 놀랍다.

내가 김판수를 돕고, 김판수가 날 돕는 관계다.

왜 내 인생의 조력자인지를 분석했더니 전에 없던 인물 해석까지 나온다. 코어 레벨이 좀 올랐는지 인물 분석이 조금 더 디테일해진 것 같다.

좀 의심스럽긴 하지만 한 가지 마음에 놓이는 점은 있다.

잠재력 부분에서 영화계 유명인사가 될 확률이 90%.

이건 다시 사기 치고 다니지는 않을 거라는 예측이다.

그런 인간이었다면 코어가 추천하지도 않았겠지.

또 하나.

게으르다거나, 뛰어난 화술은 알겠는데 타고난 직감은 좀 의외다. 뛰어난 직관이야 감각적인 측면이지만, 직감을 타고났다는 건 남다른 촉이 있다는 뜻이다.

어쨌든 지금 김판수는 열심히 살려는 의지가 강하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 때문이다.

가족 때문에 이 상황을 버티고 있는 거였다.

아내가 아프다. 아픈 아내의 병을 치료하느라 돈을 빌렸고, 동업하던 파트너에게 억대 사기도 당했다. 게다가 사기 친 사람들에게 돈까지 갚아 나가고 있다.

그랬다.

사기당하고 난 뒤의 비참함.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

그것이 김판수가 변화하게 된 동기다.

김판수는 화려한 언변과 유머감각으로도 유명했다.

그 성격은 변하지 않았을 터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을 뿐.

정말 내 조력자라면 일단 지켜보자.

김판수가 일하는 회사의 영화 작업은 별 관심 없다.

제작이 원만하게 진행되는지 지켜보면 되겠지.

* * *

오랜만에 고향 집으로 갔다.

고향에 내려간다고 해봐야 경기도였지만.

집에 간 당일엔 부모님과 동생과 함께 쉬다가 큰 집으로 향했다. 아버진 별말씀이 없으셨지만 어머닌 여전히 걱정이 크셨다. 내가 영화사 실장이며, 영화를 찍고 있다고 말씀드려도 안 믿는 눈치였다.

취업 준비생인 동생 놈이 내가 뜨면 영화감독이 된다 어쩐다 했던 모양이다. 어쨌든 동생은 내 가능성을 믿어주지만, 부모님은 내가 시간만 버리는 줄 알고 계신다. 영화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는 거지.

큰 집으로 가는 차에서 지성이가 물었다.

“형. 진짜 영화 찍는 거 맞아?”

“맞아.”

“그런데 왜 연예 프로그램에 안 나와?”

“아직 기자들 안 불렀어.”

“그럼 TV에 나오긴 하겠네?”

“촬영 막바지 때 한 번은 부를 거야.”

“나 구경 가도 되지?”

“또, 또!”

운전하시는 아버지의 말에 동생이 입을 닫았다.

“아버지. 제가 운전할까요?”

“됐다.”

차도 없는 놈이 무슨 운전을 하느냐는 말은 생략되었다.

집에 갈 때 내 차를 타고 가려다 괜한 오해를 살까 봐 버스를 타고 갔다. 영화사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차를 샀다고 하면 의심하실 것이 분명하니까.

지성이가 옆에 있는 김에 코어로 분석해 보았다.

동생이 영화에 관심이 많은 데다 지금 취업을 못하고 있기도 해서. 전부터 동생을 만나면 잠재력을 보려고 했다.

한데 예상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

크게 두 가지.

1. 매니저 적합성 91%

2. 기획사 경영 능력 : 88% 긍정적.

솔직히 지성이가 잘생긴 편이라 배우 적합성을 보려고 했다. 그것도 아니면 영화 쪽 관련 잠재력. 동생이 배우가 되고 싶어 했고 영화도 좋아했기데 당연히 그런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매니저가 나온다.

예술적 재능이 좀 낮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사람을 대하는 기술은 나보다 훨씬 낫다.

게다가 나중에 로즈 엔터를 맡겨도 될 것도 같고.

생각해보니 분석이 아니어도 지성이가 매니저를 하면 잘할 것 같다. 부모님에게 잘하고, 나한테도 싹싹하게 대해준다. 화도 잘 안 낸다. 여자들에게도 다정한 편이고.

안 그래도 로드매니저를 뽑아야 하는데.

그냥 지성이를 시킬까.

녀석이 일을 배운 뒤 회사 경영을 맡아도 될 것 같고.

일단 녀석의 뜻이라도 물어야겠지.

* * *

큰집에 가자 먼 곳에 있는 친척들이 먼저 와 있었다.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니 한 마디씩 쏟아져 나온다.

‘언제까지 돈도 안 되는 글을 쓸 거냐.’

‘시나리오 때려치우고 기술을 배워라.’

‘영화 한다는 인간치고 멀쩡한 인간 못 봤다.’

‘늘 뜬다 뜬다 하더니 뜨기는 뜨는 거냐.’

난 잘 될 거 같다는 말을 반복하며 어른들의 잔소리를 받아넘겼다. 결혼하라는 소리가 안 나오는 게 어디냐.

* * *

다음날 제사를 하고 어른들에게 세배도 드리고 음식도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설날 당일 집으로 왔다.

동생을 집 옥상으로 불렀다.

내 말에 지성이가 깜짝 놀랐다.

“뭐? 기획사? 형이 기획사를 사?”

“응. 투자를 받았어.”

“누가 있는데? 설마 걸그룹?”

“그래. 제니스라고.”

“대박!”

지성이의 입이 말 그대로 쩍 벌어졌다.

투자를 받았다는 말에는 별 의심도 안 하는 놈.

영화사 실장이면 그런 게 당연한 줄 아나.

“형. 나 매니저 하면 안 될까?”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녀석이 먼저 본론을 꺼냈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가.

녀석이 영화 일을 하고 싶어 할 줄 알았건만.

“한 달도 못 버티고 나갈걸?”

“나 자신 있어. 근거는 없는데… 그냥 잘할 수 있을 거 같은데? 형이 대표면 내가 매니저만 할 것 같진 않은데?”

이 자식이 벌써 큰 그림을 그렸네.

“그거야 일하는 거 봐서.”

“일단 해 볼래. 못하면 자르면 되는 거지.”

“진심이야?”

“제니스 보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직업이 머리에서 번쩍 한 거야. 이거다! 나도 몰랐던 내 직업이 이거였다!”

장난을 치는 건지 진심인지.

동생이 매니저에 좀 맞을 것 같기는 하다.

“형이 아빠한테 말 좀 잘해줘.”

“그래. 생각 정리 좀 하고.”

동생 인생이 걸린 정도는 아니다.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그만두면 되니까.

결국 결정했다.

지성이와 함께 가기로.

* * *

가족이 모여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상세하게 설명했다.

지금 찍고 있는 영화와 현장에서 벌어진 소동도 이야기했다. 제작실장으로서 힘든 일과 보람도 말하고, 영화사를 설립하겠다는 꿈도 말했다.

아버지는 모처럼 가족이 대화하게 된 자리라 묵묵히 들으셨다. 무턱대고 반대부터 하시는 분은 아니다. 그리고 그 간 나 혼자 서울에 살면서 가족 간의 대화가 너무도 없었다.

모두 모여 진솔한 대화를 하는 것만으로도 아버지와 어머닌 좋아하셨다. 부모 마음이란 게 그런 거였다.

결국 허락이 떨어졌다.

지성이가 매니저 일을 1년만 해보기로.

그런 뒤 다시 가족회의를 하기로.

* * *

내 좁은 반지하 방에 동생이 짐을 풀었다.

좁은 집에서 동생과 함께 지낼 걸 생각하니 좀 암담하긴 했지만 몇 개월만 참으면 될 터였다. 정 안 되면 작은 방 하나 얻어주면 되는 거고.

연휴 마지막 날 지성이와 함께 제니스 숙소로 갔다.

동생은 처음엔 담담한 척하더니 숙소가 가까워지자 눈에 띄게 긴장했다. 제니스 숙소 문 앞에 섰을 때는 하얗게 질릴 지경이었다. 제니스 멤버들이 나와 지성이를 반겼을 때는 입도 뻥긋 못하고 다소곳한 남고생이 되고 말았다.

예쁜 여자도 여럿 만나본 녀석이 걸그룹만큼은 좀 달랐던 모양이다.

미주가 먼저 입을 뗐다.

“몇 살이세요?”

“스, 스물일곱요.”

“잘생기셨다.”

“고맙습니다. 제가… 형보다 조금 낫긴 하죠.”

자식이 뚫린 입이라고 말을 막 하네.

“식사하셨어요? 우리 치킨 시켜 먹으려고 그러는데.”

“야, 대표님 아시면 큰일 나!”

“대표님 지금 지방에 계시잖아. 몰래 먹으면….”

말을 하던 세라가 퍼뜩 내 눈치를 보았다.

실제 대표는 나니까.

지갑에서 오만 원 두 장을 꺼냈다.

“치킨 시켜요.”

“그래도 돼요?”

“그럼요. 다들 집에도 못 갔는데.”

“저희 생맥주도 마셔도 되죠?”

“당연히 치맥해야죠.”

멤버들이 스마트폰을 붙잡고 치킨을 주문한다고 법석을 떨었다. 서연은 내가 싸온 얼마 안 되는 명절 음식을 냉장고에 넣어 둔 뒤 내 옆에 와서 앉았다.

“부모님에게 연락은 드렸어요?”

“네. 일이 있어서 못 간다고 했어요. 애들이 우리 뜨기 전에는 집에 가지 말자고 약속한 게 있어서 다들 안 갔어요. 그런데….”

“말해요.”

“감독님과는 어떻게 됐어요?”

“잘 풀었어요. 서연 씨는 걱정 안 해도 돼요.”

“다행이다.”

서연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많았던 듯 얼굴색이 좋지 않았는데, 그 어두운 기색이 가시는 듯했다.

얼마 뒤 치킨과 생맥주가 배달되었다. 멤버들은 남자인 나와 지성이가 있음에도 내숭 떨지 않고 마음껏 치킨을 흡입했다. 술이 들어가자 나도 편해졌고, 지성이의 얼굴도 한결 부담이 사라졌다.

그날 치맥 파티를 벌이면서 멤버들과 한층 가까워졌다.

멤버들의 요청으로 앞으로 반말하기로 했는데 어색한 쪽은 나였다. 내색하진 않았으나 나도 예쁜 여자애들 틈에 있는 게 영 적응이 안 되었다.

그렇게 멤버들과 파티를 벌이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도 캔맥주를 마시면서 지성이에게 앞으로 할 일을 알려주었다.

“성 대표님과는 따로 안무가와 작곡가를 알아봐. 될 수 있으면 실력 있고 발굴이 안 된 분으로. 행사업체에 연락해서 행사도 따 보고.”

“방송 같은 건 안 해?”

“인지도가 낮아서 예능 출연이 어려워. 방송 활동은 신곡 나올 때 2주 정도 하고. 궁금한 거 있으면 성 대표님에게 물어보면 돼.”

“알았어.”

제니스가 당분간 활동이 없기 때문에 이 정도로만 업무를 맡겨보았다. 기존 로드매니저가 다른 회사로 옮겼기 때문에 진성이가 실장 노릇까지 경험해 봐야 했다. 초보 매니저에겐 좀 벅찬 일이긴 하겠지만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도 있다.

다음날 난 회사로 가고, 지성이는 로즈 엔터로 갔다.

내일 촬영 현장은 좀 다를 것 같다.

느낌이 좋았다.

* * *

“명절 잘 보내셨어요?”

“네. 덕분에 잘 쉬다가 왔어요.”

“실장님, 좋은 아침.”

“네. 송 팀장님도 설 잘 보내셨죠?”

떡값의 위력이 조금은 있었다.

혹은 간만의 푹 쉬어서 그런가.

연휴가 끝나고 스태프들이 하나 둘 회사로 모였는데 다들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 감독도 마찬가지.

“어휴… 연휴 끝나자마자 또 춥네.”

“설 잘 보내셨죠?”

“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감독과 나 사이엔 거리가 없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상당히 큰 어색함이 존재한다.

감독의 표정은 어쨌든 밝아 보였다.

갈등을 빚고 난 뒤에도 웃으며 촬영을 하던 감독이라 이 모습을 진짜라고 보긴 어려웠다.

의도적으로 화해하려는 제스쳐 같기도 하고.

난 잘하려고 마음먹었다.

이젠 감독하기에 달렸을 뿐.

“탐스 아메리카노 드시죠?”

“어떻게 아셨어요? 부탁 좀 할까요?”

“물론이죠.”

감독까지 회의실에 들어간 뒤 상일이에게 문자를 넣었다.

녀석은 일찍 문을 연 커피 전문점으로 직행했다. 대기하고 있다가 내 문자를 받으면 커피를 사서 회사로 온다.

* * *

촬영은 매우 순조로웠다. 오늘 회차는 아내의 은신처와 피고인의 거처를 몰아서 찍는 씬인데, 딱히 감정 연기가 필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감독이 ‘태업’을 하면서 대충 찍은 영상은 재촬영을 해야 한다. 그래서 그 일정을 정리했다. 찍어둔 모든 장면을 버릴 정도는 아니어서, 그 분량과 새로 찍는 분량을 합치면 되었다.

늘어난 회차는 3회.

일찍 끝나는 날에도 재촬영하기로 했다.

예산을 잡을 때 회차가 늘어나는 걸 가상으로 잡아 두기 때문에 충분히 감당할 만했다.

딱히 떡값 때문은 아니지만 촬영 현장이 화기애애했다.

날 바라보던 삐딱한 시선은 안 보인다.

감독은 아무리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고.

겉보기엔 다 털고 새롭게 시작하려는 모습이다.

어쨌거나 촬영은 무사히 진행되었다.

“컷! 오케이!”

“수고하셨습니다.”

첫날이라 오후 6시에 마무리했다.

촬영장에서 나오는 감독에게 말했다.

“시간 되시면 간단히 술 한잔하실까요?”

감독이 날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술 마시자는 내 의도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둘이서 마시는 건 좀 어색해서 촬영감독님과 함께 마시기로 했다.

* * *

회사 근처 호프집에 나와 감독, 촬영감독님과 대표님이 마주 앉았다. 안주도 푸짐하게 시켰다.

대표님과 촬영감독님이 주로 대화를 주도하면서 호프를 마셨다. 대화 주제야 영화 아니면 영화계 돌아가는 이야기다. 다들 술에 취하자 각자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다 감독과도 말을 나누었다.

나도 감독도 적당히 취한 상태였다.

대화하고 보니 연휴 동안 감독이 많은 생각을 했다는 게 보였다. 오늘 촬영장에서 본 모습은 진짜였다. 다 잊고 다시 가기로 한 것이다. 어쩌면 나와 술자리를 해서 다 풀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 솔직히 박찬익 감독님한테 많이 섭섭했어요. 박 감독님이 제 작품 제작해주실 줄 알았거든요.”

“그러셨군요.”

“솔직히 박 감독님이 말만 칭찬하시고 저 내 친 거라고 생각해서 정말 속상했어요. 그렇게 나와서 만든 작품은 망하고. 현장은 힘들고. 사람들은 여자 감독이라고 무시하고.”

“우리 스태프들은 안 그렇잖아요?”

“지금 스태프들은 안 그렇죠. 근데 데뷔작 스태프들은 대놓고 저 무시했어요. 현장에서 별말이 다 나오더라고요. 내가 무슨 박 감독님 내연녀라나, 세컨드라나. 하… 내가 진짜.”

“그런 말까지 나왔다고요?”

“그리고 나 천재 아니에요. 내가 천재라고 내 입으로 말한 적 없다고요. 그런 말 들을 때마다 답답하고 미칠 것 같아요. 그런데 스태프들이 천재라면서 그것도 모르냐. 천재 감독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되나. 사사건건 걸고넘어지는 거예요.”

말없이 맥주를 마셨다.

가슴이 묵직해지고 내심 뜨끔하기도 했다.

감독이 넋두리하듯 말을 이었다.

“정말 힘들었어요. 내가 신인 감독이라서 그렇구나. 내가 여자라서 무시당하는구나. 내가 현장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해서 얕보여서 그런 거구나. 그래서 일부러 강하게 나갔어요. 저 원래 고함 지르고 그러는 사람 아닌데, 어떡해요. 스태프들이 날 무시하는데. 그러다가 촬영기사님과 대판 싸우고……”

말을 하던 감독의 눈에 물기가 맺혔다.

그랬구나. 어떤 퍼즐 하나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난 그저 들어주었다.

누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풀릴 것 같아서.

“촬영기사님과 싸우고 난 뒤 스태프들이 다 촬영기사님 말만 듣더라고요. 다들 나 무시하기로 말을 맞췄던 거예요. 현장 분위기만 그런 거라면 나도 무시하면 되는데, 촬영기사님이 NG 컷이 분명한데 오케이로 가자고 하는 거예요. 자기 경험상 이게 맞다면서.”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그러니까요. 이게 무슨 감독이에요? 현장 하나 휘어잡지 못하고, 오케이도 내지 못하는 게 무슨 감독이냐고요. 내가 대체 뭘 잘못했길래. 내가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스태프들이 날 따돌려요. 흐어어엉.”

오열하듯 말을 하던 감독이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촬영감독님이 감독의 어깨를 어루만져 주었다.

감독의 눈물을 보고 있으니 가슴 한쪽이 뻐근했다. 극심한 마음고생을 한 감독을 나도 괴롭힌 꼴이 되고 말았다.

왜 감독이 무리를 해서라도 현장 주도권을 가지려 했는지, 왜 꼼수를 벌였던 것인지 그제야 이해했다.

다른 현장에서 박찬익 감독 현장에선 없었던 일이 벌어졌고, 그래서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또 전작과 같은 일이 생길까 봐.

영화를 대충 찍은 것도 마음고생의 결과다.

자신의 영화 인생에 회의가 들었을 테니까.

과연 감독을 계속해야 하는 건가 하는.

감독을 처음 만났을 때는 김판수를 분석했을 때만큼 코어 레벨이 높지 않았다. 영화 적합성 정도만 보였을 뿐.

좀 더 나중에 만났더라면 이런 내막을 알았을 텐데.

감독의 전작 스태프들에게 물어도 좋은 말은 안 나왔을 것 같고.

그래도 감독이 잘못한 것은 잘못한 거다.

말로 풀어도 될 걸 지레짐작하고 일을 벌였으니.

이렇게라도 화해해서 다행이다.

지금 감독 모습은 오해의 여지가 없는 진심 그대로다.

내가 먼저 살갑게 다가갈 걸 그랬나.

감독이 세수하러 화장실로 갔다.

한바탕 눈물을 쏟아내고 나자 후련한 모양이다.

촬영감독님이 말했다.

“조 감독은 아직 모르는 일인데… 실은 박찬익 감독이 조 감독을 내친 게 아니야. 험한 야생을 경험하고 돌아오라는 뜻이지. 그게 너무 험해서 문제였던 거고.”

“굳이 야생을 경험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박 감독이 언제까지나 조 감독을 서포트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 박 감독 현장에서도 뒷말이 나왔는데 조 감독은 그걸 몰랐어. 조 감독 스스로 좀 자만한 것도 있고.”

“전작 현장에선 스태프들이 왜 그랬던 거죠?”

“첫 촬영 때 조 감독이 촬영기사를 좀 무시했네. 자기 영화는 고리타분한 앵글로 찍고 싶지 않다고 했거든. 그때부터 틀어지기 시작했지. 어디 얼마나 참신하게 찍는지 보자. 스태프들도 한통속이 되어 감독을 조롱하기 시작했고. 감독입장에선 이번 영화에서도 그럴 줄 알았던 거야. 이번 영화에선 유독 조 감독 영향력이 작았으니까.”

“그래도 서연 씨를 가지고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요.”

“그럴 필요가 없었지. 괜히 겁을 먹었던 거지.”

“그렇군요.”

촬영감독님이 날 지긋이 보았다.

“조상미 감독. 나이만 먹었지, 아직 철부지야. 영화적 재능은 남다른 면이 있다만, 제대로 감독 노릇을 하는 현장은 이번이 처음이거든.”

“예. 저도 처음이라 이 사달이 난 거 같습니다.”

“그런 거지.”

감독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돌아왔다.

“제 뒷담화 하셨죠?”

“나까지 뒷담화하면 조 감독 기댈 곳이 없지 않아?”

촬영감독님의 말에 감독이 피식 웃었다.

“자, 짠해요.”

감독이 맥주잔을 들자 다들 술잔을 부딪쳤다.

새로 나온 호프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촬영감독님과 대표님은 감독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감독에게 말을 꺼냈다.

“미안해요.”

“제가 미안해요. 저도 많이 배웠어요.”

“이런 말 있죠.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자라는 그렇다 치고 솥뚜껑은 뭔데요?”

말없이 날 가리켰다.

감독이 피식하고 웃었다.

“실은 제가 서연 씨를 좀 좋아하긴 해요.”

“그럴 줄 알았어.”

스태프들에게 서연과 사귀는 게 아니라고 말은 했다만.

앞일은 모르는 거다.

감독이라도 미리 알아두시라는 차원.

지나간 일은 다 털자. 앞으로 잘하면 되지.

“현장에서 감독님은 캡틴이십니다. 혹시나 엄한 놈이 캡틴 자리를 노린다면 제가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촬영감독님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 엄한 놈이 나야?”

촬영감독님 개그에 다들 소리 내어 웃었다.

이후 넷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 사람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그 행동이 이해하기 어려운 거겠지.

술자리는 10시를 향하고 있었다.

“저도 6년 동안 무명작가 생활하면서 별의별 소리를 다 들었죠. 드림메이커에선 6개월 동안 구르고 구르다가 진행비 300 받고 쫓겨난 적도 있고요. 잘 되는 해에는 각색만으로 2천만 원 정도 번 적 있고, 안 된 해에는 겨우 500 벌기도 했고요.”

“생활비는 안 부족했어요?”

“부족했던 때도 있죠. 고시원에서 2년 살았으니까요.”

“고시원 살기 힘들다던데.”

“힘들죠. 한밤중에 술 먹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공용 냉장고에 있는 반찬 훔쳐갔다고 방문을 마구 두드리는 사람도 있고. 친하지도 않은데 돈 안 빌려준다고 괴롭히는 사람도 있고요. 밤에 옆 방에서 전화 통화를 하면 제대로 잘 수가 없어요. 창살 없는 감옥이 따로 없죠.”

“실장님에 비하면 전 온실에서 자란 거구나.”

감독이 술잔을 내밀었다.

그 잔에 내 술잔을 부딪쳤다.

웃으며 호프를 쭉 들이켰다.

밤 11시까지 이어진 술자리에서 나와 감독은 자신의 개인사까지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한 번의 술자리 덕분에 감독과 많이 친해졌다. 오해를 푼 것은 당연하고, 현장을 아직도 잘 모른다는 동지애도 조금 생겼다.

난 감독 편이 되어주기로 마음을 잡았다.

감독도 이젠 날 믿고 현장을 지휘하실 것 같다.

앞으로의 촬영도 무난하게 나아갈 것 같고.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사라졌다고 보면 되니까.

마지막 잔으로 건배하고 술자리를 파했다.

그리고 술집 앞에서 잔뜩 취한 감독님과 포옹을 했다.

서로 등까지 두드려 주면서.

* * *

예상대로였다.

이후 촬영은 큰 사고 없이 진행되었다.

세트 촬영을 끝내고 야외 촬영 시작되었는데.

야외 촬영도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날씨는 점점 풀렸으며 예보에 없던 비가 온 적도 별로 없었다. 폭설 때문에 지연된 날엔 실내 촬영 회차를 당겨 촬영했다.

가장 큰 고비였던 변호인의 폭우 씬도 고생은 좀 했지만 당일 촬영을 완료했다. 가장 고난도 촬영이었으나, 배우 엄아인이 20여 차례 리허설과 3번의 NG 끝에 끝냈다.

이후 도로 질주 씬도 무리가 없었고. 처음으로 보조출연자가 나오는 유흥가 밤거리 씬도 무사히 찍고 넘어갔다.

이어 대망의 재판 씬.

양수리 상설 재판장 세트에서 찍었는데 아내가 증언으로 출석하는 마지막 재판 회차에선 기자들까지 불렀다.

연예 프로그램에서 나와 두 주연배우와 서연을 찍어 갔다.

기자들은 서연이 영화에 출연 중인 걸 몰랐던 터라 유독 관심을 보였다.

그 재판장 씬이 끝난 후.

후반 촬영은 물 흐르듯 지나갔다.

부산에서 교도소 씬을 찌고, 재판에서 이긴 피고인과 아내가 외국으로 떠나는 장면은 김해 공항에서 찍었다.

그리하여 마지막 촬영.

거제도 바람의 언덕과 어촌 마을에서 촬영을 끝냈다.

촬영 중 수고했다는 말이 가장 많이 나온 날이다.

나도 울컥했을 정도였으니.

나와 감독이 싸운 3회차가 유일하게 현장에서 벌어진 사고였다. 그게 큰 액땜이었는지 이후 촬영에선 이렇다 할 사건 사고가 없었다. 날씨도 도와줬고.

또 하나.

촬영 내내 나와 서연은 미묘한 감정 밀당을 했다.

스태프들에게 한 말이 있어서 의식적으로 서연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자 서연은 내 섭섭한 기색을 보이다가 그녀 역시 나와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그러다가도 서로 애틋하게 쳐다볼 때도 있었고.

스태프들이 더는 나와 서연의 관계가 어떻든 신경을 안 썼는데도 그랬다. 감정을 표현할 일종의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그게 계속 엇갈리다 보니 나도 서연도 서로의 마음을 잘 알 수가 없었다. 고백을 하면 받아줄는지 애매할 정도로.

스캔들 문제도 있었다.

제니스가 새로 출발할 상황인데 스캔들 때문에 악재가 되면 곤란한 일이었다. 그녀도 멤버들에게 피해를 줄까 봐 몸을 사렸고, 나도 그런 그녀를 배려해야 했고.

그럼에도 그녀와 자주 밥을 먹고 영화도 보러 다녔다.

이건 뭐 섬을 타는 것도 아니고, 매니저로서 같이 다니는 것도 아니고. 데이트라 하기엔 둘의 사이가 좀 어색하기도 했다. 이래저래 그녀와 나의 관계는 모호한 상황이었다.

후반 작업 시간이 좀 빠듯했으나 이 역시 무난했다.

조감독과 스크립터, 감독님이 편집실에 상주하다시피 했기에 내가 할 일은 별로 없었다. 마케팅 부분도 투자사 주도로 대행사가 담당해서 난 보도자료를 전달하면 될 뿐이었다.

편집본이 나오면 영상 보정을 하는 MI팀과 믹싱팀, 사운드 팀이 최종 작업을 했다. 가편집 본을 가지고 최종 작업을 하면 큰 사고이기에 데이터 관리를 철저하게 했다.

마침내 후반 작업도 마무리되었다.

연예 및 영화 프로그램과 케이블 방송에선 영화 ‘국경의 끝’ 예고편이 나오기 시작했고, 주연배우와 서연의 인터뷰 기사도 잡지와 신문에 자주 등장했다.

그렇게 넉 달이 흘러 오늘 5월 19일

기술 시사가 열렸다.

작은 영화관에 감독님과 대표님. 각 파트 팀장을 비롯해 후반 작업 팀장들이 모두 극장 관람석에 앉았다.

다들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개봉 날짜가 코 앞인데 기술적 결함이 보이면 큰일이다.

사운드에 문제가 있으면 보정할 수 있으나 영화 톤이나 편집에서 문제를 발견하면 개봉은 연기된다.

나보다 더 긴장한 사람은 감독님이었다.

“영화 잘 나왔겠죠?”

“네. 편집실에서 수차례 확인했어요. 잘 나왔습니다.”

“제발…….”

감독님이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극장의 불이 꺼졌다.

스크린에 타이틀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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