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8장 감독과 제작실장 (8/56)

제8장 감독과 제작실장

이 대표와 내가 사무실을 왔다갔다하며 전화를 해 댔다.

그때 조명팀 퍼스트가 급히 사무실에 들어왔다.

“어떻게 됐어요?”

“우리 팀 애들 두 명이 안 왔습니다. 벨은 울리는데 받지를 않네요.”

“혹시 교통사고 난 거 아닙니까?”

“아직 모르겠습니다. 이 새끼들 어디 여관에서 자는 거 같은데, 막내도 그놈들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네요.”

대표님이 말했다.

“걔들 벨 소리를 무음으로 해 놓은 거야. 촬영 끝나면 벨 소리를 바꿔 놔야지, 술 먹다가 또 깜박했구만.”

“대표님. 지각한 스태프는 바로 현장에 가는 게 낫죠?”

“그래. 조감독, 도착한 스태프들은 먼저 가라고 해요. 가서 세팅이라도 해 놔야지”

“알겠습니다.”

조명팀 퍼스트가 사무실에서 나갔다.

조명팀 두 명이 결국 사고를 쳤다. 조명감독이 지시하면 알아서 척척 조명을 설치하는 전문가들이다.

조명팀만 지각한 것이 아니었다. 연출부원 한 명도 지각했고, 촬영팀은 퍼스트가 늦었다. 촬영감독과 조명감독, 음향팀과 미술팀은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전화가 왔다.

-촬영팀인데요! 조감독 형이 음주운전으로 걸려서 좀 늦을 것 같다고 합니다!

“음주운전이요? 술 마시느라 밤새웠단 말입니까?”

-그게 저… 술이 덜 깬 거 같네요.

이 대표님의 손짓을 보며 말을 이었다.

“알았습니다. 현장에 바로 가시라고 하세요.”

“자네도 가. 언제까지 기다려.”

“예.”

사무실에서 나가 주차장으로 향했다.

늦지 않은 스태프들은 촬영버스에 탑승한 상태였고, 탑차들도 하나 둘 빠져나가고 있었다.

버스에 오르자 술 냄새가 진동했다. 팀장님들마저도 술이 덜 깨 얼굴이 벌겋다. 술 많이 먹지 말라던 조감독과 제작부 오상일도 늦잠 자서 6시 30분이 되어서야 회사에 왔다.

“출발하세요!”

내가 내리자 바로 버스가 출발했다.

나도 내 차에 올라 버스 뒤를 따랐다.

내 차에는 감독님과 서연이 타고 있었다.

감독님이 물었다.

“조명팀 두 명은 아직도 연락 없대요?”

“예. 펑크 내면 저라도 조명 잡아야죠.”

“큰일이네. 오늘 찍을 씬도 많은데.”

서연이 내게 커피를 내밀었다.

“이거 좀 마셔요.”

“고마워요.”

나도 숙취가 있던 차였다.

서연이 내미는 진한 커피 한 잔을 마시자 속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촬영팀 버스와 탑차와 분장차 등이 줄지어 아현동으로 향했다.

* * *

아현동의 신축 아파트 단지에 촬영 차량이 모여들었다.

아파트 촬영지를 찾는 게 무척 어려웠다. 촬영에 들어가면 민원이 빗발치기 때문이다. 입주자 대표나 부녀회장 등이 거액을 뜯어내려는 것도 있었고.

그러다 헌팅 매니저까지 동원하여 찾아낸 곳이 아현동 재개발 지역의 신축 아파트였다. 세트를 만들어서 촬영하자는 말까지 나왔을 때 내가 나서서 허가를 받아냈다. 아파트 브랜드를 노출하는 조건으로.

허가가 늦게 나는 바람에 미술팀이 부랴부랴 벽지도 바르고, 소품도 설치하는 등 첫 촬영 전날까지 고생해서 겨우 세트장을 만들었다.

난 아파트 동 입구에서 지각한 스태프들을 기다렸다.

하필이면 서연의 첫 촬영 날 이겐 뭔 일인지.

오늘의 지각 사태가 액땜이 되길 바랄 뿐이었다.

* * *

3회 차 촬영은 9시에 시작되었다.

다들 조명감독의 눈치를 보며 세팅했다. 촬영감독은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쉬고 있었으나, 조명감독이 시종 고함을 질러댔기 때문이다.

조명감독이 화를 내는 것은 본인 식구가 큰 실수를 한 까닭이다. 자기 팀원이 다른 팀장에게 욕을 먹는 걸 미리 막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애들아 빨리 좀 하자! 작은 방 텅스 5cm 더 올리고! 라인 밟고 서 있지 말고, 새꺄! 조명 엎어지면 네가 물어낼래! 막내야, 너는 라인 정리부터 해라. 베란다 쪽 키노에 플라피 하나 더 주고.”

조명팀원들을 일부러 들들 볶는 조명 감독이다.

다른 팀장이 한마디도 못하게끔.

음향팀과 미술팀, 분장팀은 한숨만 뻑뻑 쉬고 있고.

다들 워낙 급히 나오느라 세수도 안 한 몰골이다.

머리가 떡진 친구들도 있고.

지각한 조명 팀 두 명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사고 쳐서 그런가 했더니 아니었다.

“저기 감독님.”

“왜!”

“저, 화장실 좀.”

“저도 배가 아파서…….”

“가지가지들 한다! 최 실장, 화장실 써도 되는 거지?”

“아직 수도 연결이 안 됐어요. 1층으로 가셔야 돼요.”

“참아, 새끼들아.”

“감독님. 저 정말 급합니다!”

조명감독이 감독님과 촬영감독의 눈치를 보았다.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허락했다.

“얼른 갔다 와.”

“예!”

두 사람이 냅다 달렸다.

10분 후.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조명 세팅이 완료되었다.

하염없이 기다리던 다른 스태프들도 일제히 집중했다.

이 상황에서도 서연은 혼자 묵묵히 리허설을 하고 있었다.

“조명 완료됐습니다!”

조감독이 나섰다.

“16씬 가겠습니다. 서연 씨 긴장 푸시고요.”

“네.”

대답은 쉽게 했으나 서연의 얼굴이 경직되어 있었다.

연습도 많이 했고, 촬영장에 익숙해지긴 했는데 막상 촬영하려니 너무도 두근거리는 모양이었다.

서연이 계속 심호흡해서 집중하려 했으나 손이 덜덜덜 떨렸다. 연출부 막내가 카메라 앞에 서서 슬레이트를 들자 보는 내가 더 긴장되었다.

“잠깐만요.”

서연에게 다가가 비타민 음료와 약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뭐죠?”

“청심환요. NG 내도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해요.”

서연이 날 물끄러미 보다가 청심환을 받아들었다. 그러곤 입에 넣고 씹다가 삼키곤 비타민 음료를 마셨다.

여전히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그녀를 믿었다.

한번 집중하면 무서운 잠재력을 발휘하는 그녀다.

조감독이 외쳤다.

“16씬 갑니다! 레디!”

“스피드.”

“스타트!”

“씬 16. 1에 1!”

“액션!”

쿠당탕탕-

“컷! 지금 뭐에요!”

슬레이트를 치고 빠져나가던 연출부 막내가 뭔가에 걸려 나뒹굴고 말았다. 본인도 놀랐는지 벌떡 일어난다.

조감독이 버럭 소릴 질렀다.

“야, 넌 술 안 마셨다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연출부 막내가 연신 허리를 숙였다. 조명 케이블에 발이 걸렸던 모양이다. 감독들이 자기 식구는 욕해도 다른 팀원들은 욕하지 않았다. 감정이 쌓이면 현장 분위기가 나빠지기 때문이다. 실수가 없었던 연출부 막내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다시 갑니다! 자, 레디!”

“스피드!”

“스타트!”

“씬 16에 1에 2!”

연출부 막내가 급히 빠져나갔다.

감독이 액션을 외치려다 멈췄다.

“저거 뭐에요!”

이번엔 또 뭔가?

음향감독이 소릴 질렀다.

“야, 붐! 그림자, 그림자!”

붐 마이크의 그림자가 화면에 걸려 있었다.

촬영감독이 카메라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현장 참, 잘 돌아간다.”

촬영장 분위기 때문에 서연은 더욱 긴장했다.

어째 오늘 하루가 무척 길 것 같다.

* * *

잠옷 차림의 서연이 거실 가운데에 유령처럼 서 있다.

같은 차림의 서연이 소파에 말없이 앉아 있다.

외출복을 입은 서연이 베란다에 서서 밖을 보고 있다.

적막하기 짝이 없는 집안. 어두컴컴한 거실.

잠옷 차림으로 세상 밖을 보는 서연의 얼굴.

그 처연한 표정.

첫 촬영은 이런 쇼트들로 이뤄진 씬이었다.

“오케이. 다음 씬 준비해요.”

현장 편집본을 본 감독이 오케이했다.

모니터를 보던 서연은 짧은 한숨을 쉬며 날 보았다.

난 잘하고 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다음 씬은 서연이 누군가와 전화를 하는 장면이다.

조명 위치만 약간 바꿀 뿐 세팅은 동일했다.

어쨌든 첫 대사를 하는 장면이다.

서연이 다시 긴장했다.

“씬 19! 1에 1!”

“액션!”

서연이 바로 연기에 들어갔다.

“당신은 괜찮아요? 나, 나는…”

“컷!”

감독님이 외치곤 음향팀장을 보았다.

음향팀장이 뭔가 걸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감독이 차분하게 말했다.

“서연 씨. 내가 콜하면 몇 초 후에 대사해요. 콜 직후에 대사하면 내 콜이랑 서연 씨 대사가 물리니까.”

“죄송합니다.”

“다시 갑니다.”

서연이 조금 더 긴장했다.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지켜봤음에도 미처 캐치하지 못했나 보다. 감독의 ‘액션’ 콜 후 3초쯤 지나서 대사해야 한다. 콜과 대사가 물리면 편집하기 어렵다.

이후 계속 NG가 났다.

“서연 씨! 시선 처리 불안해요!”

“서연 씨! 시선 고정하라니까!”

“안서연 씨! 대사 정확하게!”

“서연 씨! 손 떨지 말고요!”

4번 연속 NG가 나는 바람에 서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서연이 너무 긴장하고 있었다.

“서연 씨!”

“죄송합니다! 잘하겠습니다!”

서연이 감독님들에게 연신 허리를 굽혔다.

안쓰러웠지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 뒤로도 세 번의 NG 끝에 겨우 오케이가 났다.

촬영장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차가웠다.

나도, 스태프들 일부도 제법 놀랐다. 감독이 어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서연도 상당히 놀란 듯했고.

매니저도 없는지라 분장실로 향하는 서연을 따라갔다.

한데 분장실이 아닌 옆집으로 들어가는 그녀였다.

집 밖에서 기다렸다.

서연이 화장실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에게 호감이 있었던 스태프들도 계속되는 NG 때문에 약간 짜증이 난 상태였다. 감독도 오늘 사태 때문에 화가 많이 난 것 같고.

“안서연 씨 어디 갔어! 스탠바이 안 하고!”

“저 가요!”

서연이 화장실에서 나오다 날 보곤 흠칫 놀랐다.

그녀는 바로 세트장으로 뛰어들어갔다.

이내 호통이 터져 나온다.

“바로 연결인데 울면 어떻게 해요!”

“죄송합니다! 제가 처음이라…….”

“서연 씨 눈 부은 거 가라앉을 때까지 대기!”

복도에 있는 스태프들이 ‘아이씨.’ 하고 짜증을 냈다.

첫날만 해도 서연과 사진 찍자고 덤벼들던 인간들이.

시간을 보았다.

11시 54분.

감독에게 갔다.

“감독님, 지금 점심 먹죠.”

“지금 먹으면 오후 4시쯤 되면 배고플 텐데.”

“그때 햄버거 하나씩 먹으면 됩니다.”

“그래요.”

조감독이 듣고 있다가 외쳤다.

“지금 식사하세요! 12시 30분에 촬영 재개할게요!”

대기하고 있던 오상일이 도시락을 나눠 주기 시작했다.

오전에 주문하여 도착해 있던 도시락이다.

도시락을 다 나눠 주고 보니 서연이 옆집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었다. 아무도 서연을 챙기는 사람이 없다.

이건 좀 너무 한 거 아닌가.

그녀 옆에서 말없이 밥을 먹었다.

서연은 애써 눈물을 참으며 밥알을 고르고 있었다.

손수건을 꺼내 건네주었다.

“그냥 시원하게 울어요. 후련해질 때까지.”

서연이 내 손수건을 눈에 대고 펑펑 울었다.

난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10여 분이나 지난 뒤에야 그녀가 안정했다.

서연이 나지막이 말했다.

“감독님이 저 싫어하시는 거 같아요.”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아닙니다.”

서연의 눈이 내 눈을 향했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실장님 빽으로 캐스팅되었다고 스태프들이 속닥거리는 거 들었어요. 저랑, 실장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면서.”

이건 또 뭔 소리야?

“빽으로 캐스팅된 거 아닙니다. 연기력으로 캐스팅된 거예요. 그리고 이상한 소문은 신경 쓰지 마요.”

“감독님이… 저 안 쓰실 거 같아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가 연기를 못 한 건 맞지만 일부러 더 화내시는 거 같아서요. 제가 스스로 그만두게 하시려고.”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감독님이 좀 과하게 혼낸 건 맞다. 배우가 긴장했으면 긴장을 풀어 줘야 할 텐데 더 긴장하도록 몰아붙였다.

내 빽으로 들어온 신인배우를 쫓아내려고 일부러 그랬던 건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냥 가려고 했는데 막상 연기를 보니 영 아니다 이건가.

감독에 대한 소문이 과장된 게 아니었나?

정말 그건가.

“서연 씨…….”

“네.”

“그만두고 싶어요?”

서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버텨요. 누가 뭐라 하든, 어떤 소문이 나든 신경 쓰지 말고 버텨요. 이게 나도, 서연 씨도 몰랐던 현장의 본 모습일 수도 있어요. 감독님이 욕심을 낸다면 서연 씨도 배우로서 욕심을 내면 돼요. 착해질 필요 없습니다.”

“저도 잘하고 싶은데… 마음만큼 그게 안 돼요.”

“마음만큼 되면 그게 이상한 겁니다. 서연 씨 오늘 생애 첫 촬영입니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더 이상한 거지.”

“네?”

“식사마저 하세요.”

다시 촬영이 시작되었다.

서연이 진정되었음에도 감독은 만족할 줄 몰랐다.

한번 무너진 서연의 멘탈은 회복될 조짐이 없었다.

난 코어를 발동한 채 조상미 감독을 지켜보았다.

조 감독의 속내가 내 머릿속에 들리는 순간.

큰 충격을 받았다.

설마 했던 일이 사실일 뿐 아니라 더 했다.

어제만 해도 함께 술을 마시며 잘 웃던 감독이다. 그런데 지금은 속으로 욕을 하고 있다.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서 서연이 스스로 그만두게 하려고 작정했다.

감독은 이 영화를 하겠다고 했을 때 아내 역할에 다른 배우를 지목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서연을 아내 역할로 확정하자 그때부터 불만이 있었다.

겉으로는 다 수용할 것처럼 하더니, 결국 자기 의도대로 하려는 거다. 본인이 지목한 배우는 아내 역할에 어울리지도 않는다. 단편 영화를 함께 찍었던 학교 후배를 키워 줄 목적.

감독은 현장에 있는 그 누구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세계적인 감독 밑에서 배운 조 감독에게 있어 이 스태프들은 죄다 삼류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땐 웃으면서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감독은 이 영화에 애정이 별로 없다.

자신이 쓴 시나리오가 아니라서.

전작이 망해서 열정을 억지로 짜내서 찍고 있을 뿐.

헛웃음이 실실 나왔다.

싹싹하고 예의 바르며 스태프들에게도 잘하는 감독님.

그건 철저하게 계산된 가면이었다.

전작 현장에서 스태프들과 벌인 갈등은 과장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소된 거였다. 전작의 촬영감독님은 조상미 감독의 실제 모습을 간파했던 거였다.

물론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 본인 자유다.

하지만 제대로 의사 표현을 하지 않고 교묘하게 자기 뜻을 관철하려는 건 문제다. 이건 저열한 꼼수이고, 공작이다.

이대로 가면 감독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리스크가 된다.

감독의 ‘두 얼굴’에 의한 현장의 불화.

조 감독의 전작이 망한 원인일 수도 있다.

1시간 내내 이어진 감독의 온갖 짜증 때문에 스태프들도 화가 단단히 났다. 서연에게만 문제가 있다고 스태프들이 오해했다. 감독이 그렇게 몰아갔다.

결국 서연이 촬영장에서 또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이건 서연의 성격과 관계없다. 그녀를 잘 모르지만 그 어떤 신인이라도 60여 명의 스태프 앞에서 이 상황을 버티기란 쉽지 않다.

“그만하시죠.”

촬영장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독한 표정을 짓고 있던 감독이 날 보더니 웃는다.

“참 쉽지 않네요. 서연 씨 연기 잘하던데, 왜 이렇게 적응을 못 하는지.”

난 말 없이 서연을 볼 뿐이었다. 날 보는 스태프들이 눈길도 곱지 않다. 서연과 나의 관계를 제대로 오해한 모양이다. 어디서 저런 애를 꽂아서 우리가 이 고생을 하나. 하는 듯한 표정들.

“감독님, 저랑 잠깐 대화 좀 나누죠.”

“그래요.”

감독님의 얼굴에 스치듯 비웃음이 보였다.

자신이 서연을 혹독하게 대하자 내가 한마디 하려는 것으로 본다. 실장님 애인이라고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는 속내가 들린다.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감독과 마주 섰다.

“서연 씨의 연기가 그렇게 안 좋습니까?”

“솔직히 좀 실망이네요. 사실 서연 씨보다 연기 잘하는 신인배우는 널리고 널렸잖아요. 서연 씨가 걸그룹 출신이라 큰 기대를 안 하긴 했지만.”

“다른 배우로 교체하고 싶은가 보네요.”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런 점이 없지 않아요.”

감독이 정말 솔직하게 말한다는 표정을 짓는다.

감독을 보며 말했다.

“영화의 성공을 위해서는 제대로 된 감독도 필요하죠.”

“예?”

내 말에 감독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바로 말을 이었다.

“전 감독의 교체도 고려하고 있습니다.”

감독이 헛바람을 뱉으며 날 빤히 보았다.

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느냐는 듯.

“제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요? 감독을 교체해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상미 감독의 표정이 달라졌다.

화만 내지 않을 뿐. 본심이 얼굴에 드러났다.

“정말 어이가 없네요. 지금 서연이 걔 애인이라고 광고하는 거예요? 고작 그런 애 하나 때문에 날 자른다고?”

“감독님 하나 때문에 영화를 망칠 수도 있으니까.”

조 감독의 표정이 급변했다. 방금 전만 해도 내 비위를 맞춰 보려던 내심이 완전히 사라졌다. 사실 내가 감독님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게 영화판의 현실인 건 맞다. 감독님이 오랜 시간 본색을 드러내지 않고 잘 버틴 거지.

“이봐요. 최 실장님. 지금 서연이 걔 때문에 상황 판단이 안 되시나 본데, 애초에 배우를 하면 안 될 애를 데려온 건 실장님이라고요. 영화 하는 사람들 잡고 물어보세요. 연기 안 되는 애를 잘라야 하는지, 감독을 잘라야 하는지.”

“연기가 안 되면 되게 해야죠. 뭘 해 볼 생각도 없이 윽박만 질렀지 않습니까? 사람을 몰아세우면 될 것도 안 되는 겁니다. 첫 촬영 때 자르려고 일부러 심하게 한 거 아닙니까?”

“말이면 단 줄 알아요! 누가 뭘 심하게 해!”

감독이 날 잡아먹을 듯 매섭게 쏘아보았다.

나에 대한 분노와 수치심이 섞여 있다.

내게 내심을 읽혔다는 수치심.

“신인을 지도할 역량이 있음에도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았어요. 다른 배우를 마음에 두셨으면 촬영 전에 교체했어야지, 이런 식으로 본인 뜻대로 하려는 거라면, 남은 촬영 때도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다분합니다. 다음에도 또 이러시면 이 대표님과 감독 교체를 논의하겠습니다.”

“날 자른다고? 이봐요, 최 실장님. 나 자르면 당신 영화일 계속할 수 있을 거 같아?”

“감독님 앞가림이나 하시죠. 영화판 소문이 사실인 걸 확인했으니까.”

“뭐야, 이 새끼야!”

“욕하지 마세요. 스태프들 듣습니다.”

내 멱살이라도 잡으려던 감독이 실실 웃었다.

“좋아, 당신들 마음대로 해. 내가 제공한 용역은 내 권리야. 그거 절대 놓지 않을 테니까, 알아서 해. 어디 영화 만들 수 있나 보자고.”

감독이 콧방귀를 끼며 돌아섰다.

그녀의 뒤에다 말했다.

“이 영화에서 감독님이 제공한 용역이 정확히 뭡니까? 기획안? 주제? 플롯? 스토리? 캐릭터 설정? 스토리보드와 대사 몇 마디밖에 더 있습니까? 캐스팅도 대표님과 제가 하거나, 조감독이 했습니다. 기억나시는 용역을 더 말씀해보세요.”

감독이 피가 나올 듯 입술을 깨물었다.

말을 이었다.

“이 시간 이후 제작사와 합의 없이 감독님이 용역을 제공하지 않거나, 제작에 태만할 경우. 계약 위반으로 모든 저작권은 회사가 가지며, 감독님이 받은 계약금도 반환해야 합니다. 애매하시면 재판하면 되고요. 그런데 재판 결과 나올 때까지 감독님은 영화를 찍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시겠어요?”

당연히 감독 자를 생각 없다.

자존심이 유난히 강한 감독이라는 걸 오늘 알았다.

이 영화를 하면서 구겨졌던 그 자존심을 현장에서 회복하려고 하다 보니 이번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쯤에서 제대로 타협해야 한다.

감독조합에 가서 분쟁 조정을 받아도 조 감독은 그냥 합의하라는 소리만 들을 것이며, 법정에 가면 조 감독은 잘돼야 중도금까지는 받을 수 있다. 또 사고를 쳤다는 게 소문나면 조 감독은 이제 감독 생활 못한다.

조상미 감독은 눈만 부릅뜬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좀 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감독님이 이 영화 하면서 많은 부분 양보하셨고, 자존심도 많이 상하셨다는 거 잘 압니다. 차기작에서 제대로 감독님 작품을 하시려고, 이 작품 하신 것도 알고요. 이 영화도 틀림없는 감독님 작품입니다. 서연 씨가 정말 아내 역할에 안 어울립니까? 만들어진 영화의 틀을 깨야 할 정도로 캐스팅에 맞지 않습니까?”

감독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날 보았다.

감독님이 고려하는 아내 역할은 귀여운 스타일로 누가 봐도 아내역에 안 어울린다. 그 점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건 자존심과는 별개의 문제다.

감독이 그걸 알면서도 그랬다는 건.

이 영화에 애정에 별로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말을 이었다.

“이유현 씨를 캐스팅한 건 서연 씨 덕분입니다. 애초에 서연 씨가 해야, 유현 씨도 한다고 했으니까요. 이미 촬영이 시작되었는데 서연 씨가 잘리고, 유현 씨가 화가 나서 출연 취소하면 이 영화 연기되거나, 엎어집니다. 제작사가 영화 제작을 이어가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겠습니까.”

날 노려보던 감독의 시선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프리 프로덕션에 바빠서 캐스팅의 작은 비화는 듣지 못했던 모양이다.

내 말은 엄포가 아니다. 서연이 잘리면 이유현은 노출에 대한 부담 때문에 이 영화 안 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감독이 서연을 자르고자 한다면 영화 제작을 위해 감독을 교체해야 한다. 안 그래도 진정한 자신의 영화가 아니라고 믿는 감독이다.

“그러니 영화 그냥 찍읍시다. 감독님이 어떤 사람인지는 전 관심 없습니다. 영화만 잘 만들어 주면 됩니다. 그래도 안 되겠다 하시면 제작사와 합의하여 계약 해제하시면 됩니다.”

말을 하고 바로 분장실 쪽으로 갔다.

스태프들이 숨을 죽인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감독이 소릴 지르는 걸 스태프들이 모두 들었다.

조 감독과 촬영하면 촬영 기간 내내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주연배우와 문제가 생기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갈 수도 있다.

코어 능력이 없었다면 감독을 어떻게든 달랬겠지.

다행히 조상미 감독이 촬영 준비를 했다. 끝까지 간다면 회사는 손해배상금이나 위약금으로 1억 정도 손해를 볼 뿐이지만, 감독은 영화 인생 끝난다. 그녀도 그걸 안다. 그래서 첫 만남 때부터 사람 좋은 척하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감독이 나쁜 사람이라는 건 아니다.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의 특성이라면 특성일까.

자존심에 관한 한 유난히 생각이 많은 감독이다.

이성적인 판단이 흔들릴 정도로.

한바탕 하는 바람에 촬영장 분위기가 매우 무거웠다.

나를 보는 시선도, 감독을 보는 시선도 따갑기 그지없었다.

촬영감독은 뜻 모를 웃음만 짓고 있고, 조명감독과 미술 감독 등은 놀란 얼굴이다.

촬영감독 말대로 현장 참, 잘 돌아간다.

남은 회차까지 어떻게 가야 할지.

* * *

조상미 감독은 촬영장 아래층 화장실에 앉아 있었다.

눈에 뜨거운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영화 일을 하면서 이런 수모를 당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그녀였다. 스스로 영화 재능 면에선 천재라고 생각했고, 스승인 박찬익 감독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무명작가 출신 주제에, 고작 신인 배우 문제 가지고 감독 교체 운운하다니. 내가 기가 막혀서.’

조 감독은 전작이 망한데다 자신에 대한 소문 때문에 마음고생이 많았다. 그래서 이번 작품에선 가능한 한 숙이고 들어가리라 작정까지 했다. 그럼에도 결국.

상반된 감정이 그녀의 머릿속을 괴롭히고 있었다.

타인에 대한 분노와 자신에 대한 자책이 뒤섞였다. 자괴감이 들었다가도 제작실장의 말에 너무도 자존심이 상했다.

캐스팅된 배우를 바꾸려고 한 건 자신의 실수였다. 실수인 걸 아는데, 제작실장이 정확히 그걸 읽어내자 벌거벗은 듯 수치심이 일고 분노가 치밀었다.

천재라는 껍질이 한순간에 벗겨져 버렸다.

조상미라는 사람이 일순간에 질 나쁜 인간이 되었다.

자존심 때문에 바보짓을 한 멍청한 감독이 되었다.

문제는 제작실장이 한 말이 다 옳았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더욱 분했다.

감독이 신인 배우 하나 교체하지 못하고. 고작 신인 하나 때문에 영화가 엎어질 수 있으며. 그 때문에 자신이 잘릴 수도 있다는 현실이 기가 막혔다.

이미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는데, 이제는 감독의 직분마저도 부정당하는 기분. 사실 꼼수를 부린 것도 이 영화의 영향력과 지분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현장을 장악할 감독의 지휘권과 힘이 필요했다.

그런 이유로 다소 무리해서라도 일을 벌였는데.

결과적으로 어리석은 짓을 하고 만 셈이다.

‘내 행동을 얼마나 같잖게 보고 있었을까.’

그냥 모른 척 영화 작업을 하자니 너무도 부끄러웠다.

스태프들이 얼마나 무시를 할까.

제작실장은 또 얼마나 속으로 비웃을까.

실수를 인정하고 싶지만 제작실장 앞에서 알몸이 되어 버린 꼴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조 감독은 수차례 고개를 저었다.

자존심을 버리고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것과 어떻게든 제작실장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평행을 달렸다. 그런 치졸한 생각을 하는 자신이 밉고 이 영화 제작 상황이 싫었다.

복수를 하자니 자신이 너무 한심한 인간이 되고.

그냥 넘어가자니 두고두고 손가락질당할 것 같고.

‘대체 왜 그런 바보짓을 해 가지고…….’

그 뒤로도 조감독은 한동안 번민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한 번 자신의 실수를 합리화하기 시작하면 점점 악화되고 나빠질 거라는 걸 잘 아는 감독이었다.

그렇다고 사과를 할 수도 없고.

마음의 상처는 너무도 컸고.

이 영화에 대한 열정도 이젠 다 식어 버렸고.

어쩌면 이 일은 최신성이 풀어야 할 일일지도 모른다.

최신성 실장에겐 자존심 같은 건 없었으니.

* * *

우려와 달리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감독은 불쌍하게 보이려고 그러는 건지, 정말로 기가 죽은 것인지 맥없이 콜을 했다.

서연은 다소 불안하긴 해도 오전보다는 나은 모습으로 연기했다. 아내 역할에 충분히 어울리는 불안함이다.

긴장감 혹은 불안감 그런 게 아내 캐릭터에 분명히 있다. 감독이 그걸 감안하지 않고 단순히 연기 지적만 해서 내가 좀 과하게 나갔던 거다.

우여곡절 끝에 서연의 단독 씬이 끝나고 엄아인과의 촬영도 시작되었다. 주고받는 연기라서 그런지 서연의 연기가 몰라보게 나아졌다.

세팅할 때 엄아인이 서연의 연기를 칭찬하자 다들 어색해했다. 일부는 헛웃음을 짓고 일부는 딴청을 했다. 엄아인이 현장 분위기가 왜 이렇게 썰렁하냐고 물었으나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말은 그렇게 해도 엄아인은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눈치챘다. 의도적으로 개그를 치면서 현장 분위기를 살리려 애썼다.

그 노력 끝에 오후 간식 시간 때는 제법 웃음이 들려왔다.

여전히 냉랭한 사람은 나와 감독뿐이었다.

서연은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만 보았고.

문제가 많았던 날답게 3회 차 촬영은 다음 날 새벽 3시에 끝났다. 조명 스탠드를 잡고 꾸벅거릴 정도로 다들 완전히 지쳐 버린 상태였다. 예산에 없던 귀가비와 수당도 나갔다. 회차도 12시간 정도 밀렸고.

새벽 4시에 해산한 뒤 오후 11시에 다시 모여 아파트에서 4회 차를 찍기 시작했다. 서연은 단단히 각오했는지 씩씩하게 촬영에 임했다. 그녀는 엄아인의 연기력에 놀라면서도 어제와는 다른 연기를 보였다.

감독은 놀라운 사람이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웃으면서 열정적으로 촬영장을 진두지휘했다. 날 향해 웃음을 보이기에 나도 방긋 웃어 주었다.

저 미소가 가면이라 해도 상관없다.

속내가 어떻든 잘해 보자는 의지의 표현이니까.

제작실장으로서 현장을 지켜보고 감독과 갈등도 빚다 보니 영화를 보는 내 마인드마저 바뀐다. 현장 경험 며칠 만에 난 글쟁이가 아닌 사업가에 더 가까워졌다.

이제 내게 시나리오는 그저 영화의 한 부분일 뿐이다. 제작 과정에서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건 없다. 다 중요하다.

천만 다행히 촬영은 문제없이 진행되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그 다음다음 날도.

8회 차까지 무사히 촬영이 진행되었다. 지각 사태는 다시 없었다. 감독도 더는 서연을 몰아붙이지 않았다. 서연이 연기가 일취월장해서 그렇기도 했고.

다만 현장 분위기는 좀 미묘했다. 나와 서연은 따돌림을 당하는 느낌이 들었고, 각 팀장은 일에만 몰두했다. 딱 계약 관계로만 이뤄져서 일하는 모양새였다. 늘 여유로운 촬영감독만 스태프들과 노닥거릴 뿐.

이 대표님도 3회 차 때 일어난 일을 들었으나 내게 별다른 말씀은 없었다. 이 작품은 다른 제작사 실장들처럼 감독 비위를 맞추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감독의 역량이 집대성된 것도 아니고, 조 감독이 없다고 엎어질 것도 아니고.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소동 이후 편집본을 봤는데 영상이 좀 엉성했다.

코어도 뭔가 불길한 느낌을 전달해주고.

혹시 감독님이 변수가 되는 건 아닌가 해서 촬영이 없었던 일요일에 이전처럼 영화 흥행 분석을 했다. 이 편집분대로 가면 영화가 어떻게 되는지를.

관객 동원 수가 260만으로 쪼그라들었다.

두 번을 더 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감독이 대충 찍고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어째 쉽게 오케이가 난다 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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