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로즈 엔터테인먼트
시간이 흐르고 흘러 마침내 촬영 6일 전.
이 대표님이 돼지머리가 올려진 고사 상 앞에서 진중하게 고사 축문을 읊었다.
나도 배우와 스태프들도 그 뒤에 늘어섰다.
“유세차.
단기 4350년 1월 11일. 영화 ‘국경의 끝’ 감독 조상미 외 참례자 일동이 모여 영화 ‘국경의 끝’의 촬영을 천지신명께 삼가 고하나이다.
천지신명이시여.
저희 영화 ‘국경의 끝’을 두루 살펴 주시어 제작 기간 중 모든 잡귀 잡신은 얼씬도 못하게 지켜 주십시오. 특히 스케줄 빵구귀신. 날씨변덕귀신. 엔지귀신은 절대 제작현장에는 얼씬도 못하게 해 주시옵고.
저희를 도와주는 노력귀신. 섭외귀신, 원하는 대로 날씨귀신, 스태프끼리 감싸 주는 귀신, 한 번에 오케이 귀신. 무사고 대박 귀신은 저희에게 몰아주시옵소서.
혼신의 힘으로 만들 영화 ‘국경의 끝’이 개봉 첫날부터 극장이 미어터지게 도와주시옵고,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은 명작이 되게 하시옵소서.
여기 좋은 술과 음식을 마련하였으니 부디 흠향하시고, 저희의 작은 정성에 감응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상향.
2017년 1월 11일. 제작자 이갑성 외 참례자 일동.”
이 대표가 돼지 입에 돈 봉투를 끼운 뒤 절을 했다.
조상미 감독과 촬영감독 등도 절을 하고, 나도 오만 원을 돼지 입에 꽂은 뒤 절을 올렸다. 이어 투자사와 배급사 직원들도 절하고, 스태프들도 나란히 늘어서서 절했다.
그렇게 고사를 끝내고 잔칫상이 벌어진 식탁에 앉아 밥도 먹고 술도 마셨다. 대표님과 감독님 맞은편에 주연배우인 엄아인과 이유현, 서연이 앉았고, 서연 맞은편에는 내가 앉아 있었다.
나도 그렇지만 서연도 고사를 처음 경험해서 조금은 들뜬 표정이었다. 이유현이 서연을 살뜰히 챙겨 주었는데, 서연은 선배 배우들과 대화하면서도 날 힐끔거리듯 보았다.
내가 먼저 서연에게 말을 걸었다.
“긴장돼요?”
“조금요.”
“차츰 적응할 거예요. 감독님도 배려해 주실 겁니다.”
“근데 저 잘할 수 있을지 걱정돼요.”
“서연 씨는 이미 잘하고 있어요. 감독님도, 투자사도 서연 씨 캐스팅에 대해선 별말씀이 없었으니까.”
“저… 제가 맥주 따라 드려도 돼요?”
“그럼요.”
맥주잔을 내밀자 서연이 일어서서 내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녀의 손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술을 처음 따라보는 사람처럼. 배우들이 많아서 긴장이 안 풀리나 보다.
나도 배우들 틈에 있으니 약간 주눅이 들기는 했다. 내가 언제부터 영화사 제작실장이었다고 유명 배우들을 보고도 멀쩡할 수 있을까.
영화와 드라마에서나 보던 배우들이 내 앞에서 웃고 떠드는 게 영 적응이 안 된다.
꿀꺽꿀꺽.
잔에 가득 찬 맥주를 단숨에 마셔버렸다.
지난 한 달 동안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다.
투자사 사장님에게 주가가 오른다고 말한 게 한 달 전이다.
최종 촬영 준비를 하면서 휴처스 바이오의 주가를 보고 있었다. 20여 일 동안 답보 상태였던 터라, 코어 예측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혔다.
내가 코어를 너무 믿었던 건가.
분석 자료가 좀 부족했나. 아니면 변수가 생겼나.
골라둔 다른 종목은 조금씩 오르는데 휴처스 바이오만 25일째가 지나도록 제자리.
어차피 투자되었으니 영화에 집중하자.
투자사 사장님에겐 투자받으려고 별짓 다한 놈 되는 거지.
그렇게 마음을 정리한 바로 다음 날.
획기적인 의약 신재료 공개와 함께 주가가 상한가를 쳤다.
3일 연속으로.
“휴…….”
정말 다행이었다.
나름 머리 써보려다 내 무덤 팔 뻔했다.
코어의 예측이 지금까지는 맞아떨어졌다.
남은 종목도 일치하고, 관객 수까지 맞으면 확실하겠지.
서연이 날 보았다.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세요?”
“아니요.”
서연이 잠시 주저하더니 다시 물었다.
“실은 저희 대표님이 실장님과 식사 한번 하고 싶대요. 멤버들도 보고 싶어하고요. 언제 시간이 나시는지…….”
바로 대답을 못했다.
6일 후에 촬영이 시작되는데 내일부터 그날까지 마무리 점검을 해야 한다. 실제 예산 및 계획과 진행에 차이가 없도록 확인하는 업무가 대부분이다. 코어를 통해 완벽하게 시뮬레이션을 했기에 사실상 내가 할 건 다했다.
프리 때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현장에서 분명히 문제가 생긴다고 이 대표님에게 수도 없이 들었다. 완벽해도 현장에선 늘 변수가 있다면서. 그러니 시간은 오늘밖에 없다.
“오늘 저녁은 어때요?”
“괜찮아요! 제가 문자 보내도 되죠?”
“네.”
서연이 신이 난 얼굴로 문자를 보냈다.
잠시 문자를 주고받던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저녁 7시 어떠세요?”
“좋아요. 서연 씨가 문자 주시면 그쪽으로 갈게요.”
“네!”
“그럼 저 먼저 일어날게요.”
“네, 실장님.”
이 대표님에게 협찬 건 마무리하고 저녁 약속이 있다고 말해 주었다.
대표님은 내가 어련히 잘하리라 믿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안서연은 고사 뒤풀이를 대충 끝내고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멤버들이 강아지들처럼 몰려와 서연의 팔을 잡고 소파로 이끌었다.
“언니, 어떻게 됐어? 실장님, 오신 대?”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꺄악!”
멤버들이 비명을 질러 대며 팔짝팔짝 뛰었다.
안서연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냥 식사하는 자리야.”
“우리한테도 기회를 주실지 모르잖아.”
키 큰 멤버, 미주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야! 김칫국 먹고 얹히는 수가 있다.”
“쳇! 미주 언니도 연기하고 싶으면서.”
“서연 언니 정도면 모를까. 뜨지도 못했는데 누가 우릴 불러 준대? 언니 부담되게 오바하지 말고 너흰 잠자코 있어.”
키 작고 귀엽게 생긴 연희가 물었다.
“근데 서연 언니. 난 아무리 생각해도 실장님이 언니한테 반한 거 같아. 유현 언니도 그러더라. 카페에서 언니를 멍하게 쳐다보고 있었다고. 언니 그때 당황했었다며?”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왜 바쁜 실장님이 언니하고 연기 연습을 한 건데? 언니한테 한눈에 반해서 캐스팅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게 하려고 연기 연습도 한 거지.”
미주가 서연을 보며 슬그머니 웃었다.
“언니도 뭔가 심상치 않단 말이야. 실장님만 만나고 오면 얼굴이 발그레 해 가지고.”
“야,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준비나 해. 세라야, 대표님한테 전화해서 우리 미용실 가도 되는지 물어봐 줄래?”
“응.”
미주가 또 한마디 거들었다.
“그냥 저녁 먹는 건데 미용실까지 가려고?”
“나 말고. 너희 좀 꾸미라고.”
“우리가 왜? 실장님하고 그렇고 그런 언니가 꾸며야지.”
서연이 약간은 상기된 얼굴로 미주를 쏘아보았다.
미주가 웃으며 애교를 떨었다.
“아님 말구.”
서연이 일어났다.
“너흰 숙소에 있어. 나랑 대표님이랑 식사할 거야.”
“안 돼! 나 고기 먹고 싶다구! 고기고기!”
“언니! 우리도 보고 싶단 말이야!”
안서연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세 멤버가 따라 들어가려 했지만 문이 잠겼다.
“언니! 우리도 데려가 줘! 조용히 있을게.”
“안 배우님! 우리가 잘못했어요!”
문 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알았어! 같이 가. 그리고 나 아직 배우 아니거든.”
“네~”
그제야 세 멤버가 쪼르르 달려와 소파에 앉았다.
셋이 킥킥대며 웃었다.
무심한 얼굴로 늘어져 있던 래퍼, 리즈가 한마디 했다.
“내가 보기엔 둘이 사귄다. 앱솔루틀리.”
“그렇지?”
“하기야 언니가 수요일만 되면 누구 전화만 기다리더라구.”
“우리, 실장님을 형부로 대우할까? 그러면 실장님이……”
그때 방에서 서연이 버럭 성을 냈다.
“나 남자 만날 생각 없거든!”
“뭐래?”
네 멤버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급기야 서연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멤버들이 후다닥 딴청을 했다.
“너희, 실장님 앞에서 이상한 소리 하기만 해 봐!”
“네~”
* * *
서연이 알려 준 식사 장소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택시에서 내리자 서연이 맞아 주었다.
그녀와 함께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늙수그레한 남자와 예쁜 아가씨 4명이 날 보더니 벌떡 일어났다. 소속사 대표로 보이는 분이 아가씨들에게 뜻 모를 손짓을 한 뒤 넙죽 인사를 했다. 아가씨들도 외계인을 보는 듯한 얼굴로 나란히 인사한다.
“아이고, 최 실장님 반갑습니다. 제니스 애들 매니저 성상민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최신성이에요.”
“앉으세요. 이거 최고급 프랑스 요리점으로 모셔야 하는데, 경황이 없어서 이곳에 모셨네요.”
“저야 순댓국집이 더 편합니다.”
“그런 밥집에서 뵐 수야 있나요.”
서연의 소속사 대표가 과잉친절을 베푼다.
제니스 멤버들도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서 있다.
내가 앉아야 앉을 모양인가.
“앉으세요.”
“네!”
내가 앉자 여자애 4명도 유치원생처럼 앉는다.
서연이 내 옆에 앉으며 말했다.
“애들이 실장님 보고 싶다고 해서 함께 왔어요. 혹시 불편하진 않으시죠?”
“좀 불편하긴 한데요.”
“아…….”
내 말에 대표도, 제니스 멤버들도 당황했다.
“이렇게 예쁜 분들과 밥을 먹은 적이 없어서요. 이거 너무 긴장해서 밥 먹다가 체할 거 같은데…….”
그제야 둘러앉은 이들의 표정이 풀렸다.
오그라드는 말이 잘도 나온다. 이전의 나였다면 절대 하지 못했을 말이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능글맞아진 건지.
“실장님 뭐 드시고 싶으세요?”
“파스타 먹죠. 둥굴레 파스타가 맛있다던데.”
“봉골레 파스타요.”
“큭큭큭.”
여자애들이 입을 가리고 웃어 댔다.
당연히 농담이다. 날 어색해하는 거 같아서 던져 봤다.
그런데 멤버들은 농담인 걸 모른다.
어쩜 그 나이에 파스타도 못 먹어 봤느냐는 표정.
키 큰 멤버 하나가 불쑥 말했다.
“실장님, 여자 분이랑 데이트한 적 없으시죠?”
“예? 그, 그게…….”
사실 남자가 파스타를 먹는 경우는 데이트 때밖에 없다.
데이트한 적은 있다. 대학교 때. 그때 사귀던 친구와 학생식당을 다닌 게 다다. 그 친구와는 내가 입대할 때 헤어졌다.
그 후로 죽 현역 솔로부대다. 전역 후 당선되었고, 집에서 글만 쓰고 있었으니 여자 만날 기회가 있나.
“미주야.”
서연이 키 큰 멤버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다지 무례는 아닌데, 당황하긴 했다.
나보다 더 당황한 건 서연이었고.
어째서?
* * *
주문한 음식이 나오길 기다렸다.
한데 식탁 분위기가 묘했다. 서연은 고개를 숙인 채 딴청을 하고, 미주라는 멤버는 장난기 어린 눈으로 나와 서연을 번갈아 본다.
다른 멤버는 호기심과 기대, 그리고 약간의 실망이 혼재된 표정으로 날 본다. 어째서 그 복잡한 심리를 아느냐 하면. 그 세 가지 감정을 시시각각 드러나고 있었으니까.
호기심과 기대는 알겠는데 날 보고 실망한 이유는 뭘까.
괜히 찔린다. 내가 평범한데다 차가운 인상이긴 하다만.
대표가 말했다.
“우리 서연이 잘될 것 같습니까?”
“예. 잘될 겁니다.”
“안 그래도 애들이 뜨질 못해서 불안했는데, 서연이가 우릴 살리네요. 이번 신곡이 잘돼야 애들도 어찌어찌 활동을 할 텐데. 다, 제가 서포트를 못해서 그렇습니다.”
대표의 말에 웃음 지으며 물었다.
“신곡은 나왔습니까?”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습니다. 유명작곡가 곡 좀 받아 보고 싶은데 쉽지가 않네요. 실장님 앞에서 이런 말 하기가 좀 그렇지만은. 실은… 회사 재정이 어려워서 애들 내년에도 못 뜨면 탈퇴하라고 했습니다. 서연이가 희생하는 것도 있고.”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서연이 괜찮다고 말했으나 대표도, 제니스 멤버들도 얼굴이 어두워졌다. 발랄해 보이는 미주도 탈퇴라는 말이 나오자 시무룩해진다. 악순환에 빠진 모양이다. 그룹이 뜨질 못하니 수익이 나질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지출만 늘어난다.
서연에게 듣기로는 신곡 활동 때 드는 돈이 수천만 원이란다. 의상비에, 로드매니저 월급에, 메이크업 헤어 비용만 그 정도다. 한 달에 몇 번 되지도 않는 행사 수입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다고 했다.
“멤버들 탈퇴하면 대표님은 뭘 하시려고 그럽니까?”
“기획사 접고 장사나 해야죠.”
멤버들 앞이라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대표다.
서연이 그랬다. 걸그룹이 데뷔한 지 3년이 지나도 뜨지 못하면 앞으로도 뜰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그래서 서연은 회사가 뭘 해 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알아서 살 길을 찾던 중이었다. 이유현과 우연히 친해지고, 이런저런 조언을 받던 차에 나와 만났던 거였다.
아마도 성상민 대표는 제니스 해체시키고 연습생 뽑아서 단기간에 데뷔시킬 것이다. 요행을 바라는 일이나 다름없다. 제니스도 그렇게 데뷔했지만 결국 못 뜨지 않았나. 곡이 좋아야 하는데 대표는 곡에 큰돈 쓸 마음은 없는 것 같다.
방송 출현 한 번 못하고 야한 차림으로 행사 무대나 뛰다가 잊히는 걸그룹을 숱하게 봤다. 매일 유튜브를 보던 나나 제니스를 알지, 일반 사람은 잘 모를 터다.
내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음식이 나왔다.
갑자기 분위기가 우중충해진 바람에 다들 기운 빠진 얼굴로 식사했다. 서연만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내 눈치를 살필 뿐.
대표도, 멤버들도 말을 잃었다. 서연이야 이제 인생이 달라졌다고 볼 수 있지만, 남은 멤버는 여전히 앞날이 불투명한 무명 걸그룹이다.
아마 대표가 다른 멤버들도 한 번 봐 달라는 심정으로 멤버들을 데리고 나온 것 같다. 서연의 미모가 돋보이긴 하지만 네 멤버도 제법 예쁘다. 두 명은 개성이 강한 편이고.
서연과 멤버들이 깨작깨작 밥을 먹을 때. 난 잔치국수 흡입하듯 입에 면을 욱여넣고는 씹었다. 열심히 밥을 먹으면서 코어를 발동했다. 코어의 능력이 진보하면서 의지만 불어넣으면 속마음을 전할 수도, 들을 수 있다.
‘전속 계약이 몇 년이죠?’
서연은 내가 귓속말한 줄 알고 날 보며 대답했다.
“올해 5월까지예요.”
난데없는 말이 서연의 입에서 나오자 대표와 멤버들이 서연을 빤히 쳐다보았다. 난 모른 척하고 있었다.
“실장님?”
그제야 고개를 들고 서연과 멤버들을 보았다.
어쩐다. 이 친구들 매니저가 되어 볼까.
내 영화사에 이어 기획사도 만들고 싶긴 했다. 내 배우가 생기면 배우 캐스팅 문제로 골머리를 앓지 않아도 되니까.
가장 벽이 높은 캐스팅만 넘으면 영화 제작은 술술 풀린다고 보면 된다. 캐스팅한 배우가 톱스타냐, 아니냐가 문제지.
먼 훗날 기획사를 설립해 보리라 생각했는데, 망해가는 작은 회사를 인수해서 함께 성장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한데 월세방 보증금 합쳐서 전 재산이 2천만 원이다.
이런 주제에 멤버들을 거두는 게 가당키나 한가.
성상민 대표는 제니스를 반쯤 포기했다. 멤버들에게 탈퇴해도 좋다고 했으니 여자애들을 데려가도 문제는 없다. 애들이 성 대표의 회사에 계속 있으면 결국 그룹은 해체될 테고.
동정심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다. 뭔가 모호한 직감이 발동했다. 분명히 이 멤버들에게 끌리는 게 있다. 이 대표님을 만났을 때도 그랬고, 투자사 사장님을 만났을 때는 더 컸다.
코어가 전달하는 호감이다. 왜일까?
코어로 멤버들의 잠재력을 볼까.
만약 재능이 없다면 모른 척하자.
서연만 내 영화의 페르소나로 함께 가는 거다.
‘멤버들의 잠재력 분석. 연예계를 우선으로 분석하고, 그 외에 모든 직업과 관심 분야에 대해서 분석한다. 성공 가능성이 크면 선명하게 추천한다.’
네 멤버를 동시에 분석하기 시작했다.
각 멤버의 머리 상하좌우로 수많은 창이 나타나고 겹쳐지며 가지를 쳤다. 이전이었다면 바로 두통이 찾아올 정도로 방대한 정보 분석. 5분 이상이 되면 강제로 차단한다.
멤버들 앞에서 머릴 부여잡으면 오해할 테니까.
정보 분석이 되는 와중에도 둘러앉은 이들과 간단한 대화를 나누었다. 전혀 모를 줄 알았는데 내 표정이 뭔가 심상치 않았던 모양이다. 다들 내 눈치만 보고 있다.
다행히 5분 만에 모든 분석이 끝났다.
그녀들의 생각과 SNS 정도만 읽어서 그런 듯.
머리가 좀 아팠지만 초기에 비하면 일취월장했다.
무심코 결과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결과가 안 좋게 나오면 그녀들의 상황을 모른 척하려고 분석을 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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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 24세. 메인 댄서.
댄서출신. 태권도 3단. 순발력. 액션 연기 적합.
잠재력 - 드라마 연기자. 예능. 사극. 악역.
잠재 개방성 77%.
연희 : 23세. 서브 보컬.
아역 배우 출신. 매력적인 음성. 정통 연기 적합.
잠재력 - 영화배우. 뮤지컬. 조역. 연기파.
잠재 개방성 87%.
세라 : 23세. 서브 보컬.
예술고 졸업. 피아노 연주. 탁월한 음색.
잠재력 - 싱어송라이터. 작사작곡.
잠재 개방성 93%.
리즈 : 24세. 래퍼.
모델 출신. 뛰어난 두뇌. 타고난 리듬감.
잠재력 - 만능 엔터테이너. 패션디자이너.
잠재 개방성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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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게 벌어진 입을 얼른 닫았다.
다들 내 얼굴만 뚫어져라 보고 있다.
“왜 그러시는지?”
“아닙니다.”
그제야 입을 뗀 성 대표의 물음에 대충 얼버무렸다.
세라 빼고 세 명 모두 연기에 재능이 있었다. 세라도 연기는 된다. 우선 추천 잠재력이 싱어송라이터였을 뿐이다.
사실 서연 빼고는 주연을 할 만한 미모는 아니다. 그렇다고 조연만 할 정도로 밋밋한 얼굴도 아니고. 작은 소속사에 들어와서 관리를 못 받아서 그렇지 좀 가꾸고 화장도 잘하면 주연급도 될 수 있다.
이 멤버들을 만나라고 코어가 서연을 먼저 선택한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유현을 만나러 간 자리에 서연이 있었던 것도 그냥 우연은 아닌 느낌이 들었으니까.
코어가 미래를 예측하고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을 인도해 주는 걸까. 이미 내 인생의 설계도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많은 무명 걸그룹 중에 곧 해체할 제니스를 만난 것도 그렇고, 그 제니스 멤버들의 잠재력이 하나같이 뛰어난 것도 그렇고.
어쩌면 모든 사람이 제니스 멤버들만큼이나 잠재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잠재 분야의 일을 해서 꽃을 피우면 성공하는 거고, 자신의 잠재력을 모르고 엉뚱한 일을 하면 안 풀릴 수도 있는 거고.
제니스 멤버들은 어쨌든 인연으로 나와 만난 거다.
인연이 아니라면 잠재력이 아무리 높아도 나와 만나지는 않았겠지. 신성의 이 대표님도 그런 것이고.
혹시 그렇다면.
뭐라 말을 꺼내는 성상민 대표도 분석해 보았다.
30초 만에 분석이 끝났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사람은 좋으나 사업 수완은 형편없다. 잠재력은 일반 자영업자 수준. 대형기획사 매니저로 연예계에 들어와서 실장 진급까지만 하고 자기 기획사를 차린 것이다. 배운 게 매니저라 기획사를 하고 있지만 그쪽 방면에 재능이 없다. 제니스 멤버들이 뭘 잘하는지도 모르고.
결단을 내렸다.
가능한 한 이른 시일 안에.
서연에 이어 제니스 멤버들도 내 사람으로 만든다.
* * *
어색해진 분위기 때문에 식사는 길지 않았다.
멤버들은 내 표정 때문에 의문만 잔뜩 쌓인 얼굴이다.
“밥 잘 먹었습니다. 성 대표님.”
“어휴, 제대로 대접도 못 해 드리고 민망하네요. 저는 그저 우리 서연이 캐스팅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올리고 싶었습니다. 너무 언짢아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코어를 발동할 때 내 얼굴이 무섭게 보였던 건가.
하기야 미친놈처럼 말없이 눈알만 굴려 댔으니 이상하긴 했겠지. 안 그래도 인상이 싸늘한 편인데 말이야.
멤버들은 갑자기 내가 화가 났다고 생각했는지 안절부절못했다. 화가 난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성 대표님.”
“말씀하세요. 안 그래도 무슨 생각이 있으신가 했는데.”
“로즈 엔터. 제가 인수하면 안 되겠습니까?”
“예?”
성 대표도, 서연도, 제니스 멤버들도 너무도 놀라 눈과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들에겐 너무도 뜬금없었던 제안이었다. 내게 잘 보여서 차기작에 슬쩍 멤버를 꽂거나, 서연과 동반 출연 정도로 제니스를 띄워 보려던 게 성 대표 계산이다.
난 영화인이고 앞으로도 영화를 한다.
로즈 엔터를 인수하여 영화를 제작하면 된다.
기획사 겸 영화 제작사.
여유가 있을 때 영화사를 설립하는 것보다 지금부터 다져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기존 배우를 영입하는 것보다 무명을 직접 키우고 싶다. 돈으로 얽힌 관계보다는 함께 고생하면서 성장한 끈끈한 가족 같은 회사.
로즈 엔터가 딱이다.
물론 지금은 돈이 없다.
성 대표에게 다시 말했다.
“로즈 엔터를 얼마에 인수할 수 있겠습니까?”
* * *
고사 사흘 후.
CT 인베스트먼트 사장님과 독대했다.
우롱차인지 뭔지 하는 맛도 모르는 차를 홀짝이며 앉아 있었다. 정장을 입고 온 나를 보고 사장님이 대뜸 한 말이 이거였다. ‘뭘 부탁하려고 왔나? 아니면 사죄하려고?’
사죄는 당연히 아니다. 휴처스 바이오가 삼일 연속 상한가 치고, 그 후로도 계속 오르고 있었으니까. 며칠 전만 해도 사장님은 내가 허풍을 쳤다고 생각했을 터다.
이렇게 독대할 수 있었던 건.
사장님도 주가를 주시하고 계셨다는 뜻.
혹은 궁금한 것이 있었다거나.
내친 김이 밀어붙이자.
“부탁 좀 드리려고 찾아뵈었습니다.”
“이거 무섭구먼. 무슨 부탁을 하려고 그렇게 빼입고 왔어? 나한테 하는 부탁이야 돈일 테고.”
뜨끔했다.
사장님이 내가 주식을 언급한 진짜 이유마저도 알고 있었던 거다. 주가가 오르자마자 불쑥 찾아왔으니.
“돈 맞습니다.”
“이 친구야, 회삿돈이 내 돈인 줄 아나?”
“주식에 투자하는 돈은 대표님 돈일 것 아닙니까.”
“정보 하나 던져 주고는 날 물고 늘어질 기세구만.”
“휴처스 말고 제가 말한 다른 종목들 기억하십니까?”
“머리가 굳었는지 겨우 두 종목은 기억해 냈네. 정말 자네 말대로 될지 안 될 지 모르는 판에 전화해서 물어보기도 그렇잖나. 안 그래도 자넬 부르려고는 했지.”
“혹시 제 예측을 이젠 믿으십니까?”
사장님이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하셨다.
“글쎄. 우연일 수도 있지 않은가.”
“저도 아직은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놀랍기는 하더군. 주가가 오르는 것이야, 우연일 수는 있어도 자네가 꼭 집어 말한 대로 휴처스 바이오가 연달아 상한가를 쳤지 않았나. 사실 4일 전까지만 해도 자네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네. 지금은 흥미가 좀 생겼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보게.”
사장님이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
내심을 숨겨서 그렇지 지금 사장님 기분은 날아갈 듯 상쾌해 보였다. 말씀하신 대로 내 예측을 전적으로 믿는 것은 아니지만, 두고 보시려는 모양이다. 5개월 후면 확실해질 테니까.
좀 이르지만 승부를 보자.
이런 기회가 생긴 것만으로도 어딘가.
받아주시면 기대해볼 만하다는 뜻이겠지.
심호흡한 뒤 무심하게 뱉었다.
“5억만 빌려주십시오.”
사장님의 미간이 좁혀졌다.
예상했던 바다. 많아도 1억 이하라고 보셨겠지.
한데 사장님의 입가에 웃음기가 돌았다.
“그 돈으로 주식 사려고?”
“반만 맞습니다. 종잣돈이 필요해서요. 이번만 하고, 앞으로는 안 할 생각입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해야지 돈만 좇고 싶지는 않습니다. 예측이 항상 맞을 것 같지도 않고요.”
날 보시는 사장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소소한 깨달음을 얻은 제자를 보는 듯한.
컴퓨터 프로그래밍 따위로 주식을 정확히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의 마음을 컴퓨터로 예측할 수 없듯이.
사장님은 내가 고른 종목이 운 좋게 예측과 맞아떨어졌다고 보시는 거다. 물론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그래서 나머지 반은?”
“회사 하나 인수하려고요.”
“영화사 말인가? 신성은 어찌하고?”
“작은 기획사입니다.”
“오! 기획사?”
사장님의 귀가 엘프 귀처럼 쫑긋 서는 환각이 보였다.
영화사를 겸한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이 대표님이 섭섭해하실 수 있으니까.
신성에서 독립하기 전까지는 기획사다.
“배우를 직접 키워 보시겠다?”
“예. 괜찮은 신인들이 있어서요.”
사장님이 팔짱을 낀 채 날 보았다. 내 속내를 알아내려는 눈길이다. 혹은 어디서 이런 애가 툭 튀어나온 걸까 하는.
“사업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 봤지. 한데 이상하게도 자네가 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더군. 자네가 말한 그 프로그램에 호기심이 있는 게 아닐세. 자네라는 사람이 궁금해졌어. 자네 같은 친구를 실로 오랜만에 보거든.”
내 뜻 모를 자신감과 확신. 태도 등에 깊은 인상을 받으신 모양이다. 나야 코어 덕분이지만, 사장님은 그 근거와 이유가 궁금하신 거다. 내가 사장님이라도 진취적이고 패기 넘치는 ‘물건’ 하나가 나타나면 관심을 보일 테니까.
사장님이 내게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면.
나도 사장님에게서 깊은 인연을 느꼈다.
그게 맞물려 이렇게 독대하지 않았던가.
넉살 좋게 받아쳤다.
“사실은 저도 그렇습니다. 왠지 사장님께서 흔쾌히 저의 든든한 파트너가 되어 주실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드네요.”
“하하하하!”
여러 의미가 중첩된 사장님의 웃음이었다.
그 웃음을 한 마디로 바꾸면.
‘이놈 봐라?’가 될 것만 같다.
호탕한 웃음 뒤에 사장님이 장고에 드셨다.
이분께는 무리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액수가 크다. 원래 로즈 엔터를 인수할 수 있는 돈만 빌려 보려고 했다. 빌리기 어려우면 로즈 엔터 인수는 없던 일로 하고, 기존 계획대로 나중에 영화사를 설립하면 된다.
하지만 큰돈을 빌릴 가능성이 있다.
시도는 해봐야 하지 않겠나.
어차피 빌리는 돈. 돈을 빌려 주식에 투자해서 종잣돈을 만들어보려고 했던 거다. 내 인생에서 주식 투자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주식은 변수가 너무 많고 몹시 신경이 쓰인다. 몇 번 맞았다고 하더라도 한 번에 훅 갈 수가 있다.
반면 영화는 내 전문 분야인 만큼 불안이 덜하다.
적어도 내 시나리오에 내가 투자하면 확실하지 않을까.
예측만 맞아떨어진다면 영화 투자의 수익률이 더 낫다.
영화 투자를 위해서라도 지금은 종잣돈이 좀 필요하고.
그런 고민 끝에 나온 액수가 5억이다.
사장님이 탁자를 탁. 쳤다.
“좋아. 5억을 빌려주겠네.”
“고맙습니다.”
“그런데 말이야…….”
사장님이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길로 날 보았다.
무슨 말을 하시려고 저리 보시는 걸까.
사장님이 말했다.
“만약 자네가 말한 주식이 모두 오른다면 말일세.”
사장님 눈을 당당하게 바라보았다.
내 눈을 보고 씩 웃으시는 사장님이다.
“그땐 그 돈 안 갚아도 되네.”
“네?”
“그냥 주겠다는 말이야.”
귀를 의심했다.
5억이 애들 껌값도 아니고.
“저는 빌리고 싶습니다만.”
“지금 내게서 빌렸지 않는가.”
“제 말은, 주가와 상관없이 빌리는 것으로…….”
“대신 조건이 있네.”
그럼 그렇지.
과연 사장님 입에서 또 무슨 말이 나올까.
“자네가 말한 세 종목을 지켜보고 있다가 덜컥 사버렸지 뭔가. 올라도 그만, 떨어져도 그만이지. 한데 그 세 종목 모두 올랐네.”
그러셨구나.
안 믿는 척하면서 슬쩍 주식을 사셨던 거다.
사장님이 말을 이었다.
“자네 말대로 5개월 후 주가가 2배로 올라서 내가 이익을 본다면 자네에게 빚을 지는 셈이지. 이것도 거래라면 거랠세. 자넨 내게 돈을 벌게할 정보를 줬으니 나도 그에 합당한 걸 줄 뿐일세.”
“주식이 오르지 않는다면 갚아야 하는 돈이고요.”
“그렇지.”
“그러면 말 하실 조건이란 것이 무엇인지요?”
사장님이 슬쩍 웃음을 지었다.
“나머지 두 종목도 말해주게나.”
혼자 있었으면 무릎을 쳤을 거다.
종목 예측이 지금까지는 맞았기에 5억을 빌릴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사장님이 기억하지 못한 나머지 두 종목까지 말씀드리면 5억을 그냥 받아도 미안한 마음이 덜하다.
오히려 약간 손해 보는 느낌이 들 정도.
아예 10억을 빌리고, 나머지 5억은 무조건 갚을까.
아니다. 5억 빌린 것으로 충분하다.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뭔가?”
사장님이 슬쩍 긴장하셨다.
말을 이어갔다.
“국경의 끝에 전액 투자를 해주십시오.”
내 말에 사장님이 김빠지는 웃음을 지었다.
내 조건이 생각보다 약했던 모양이다.
한 영화에 전액 투자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나머지 투자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네. 촬영이 진행되고 나면 결정이 날 걸세. 흠…….”
사장님이 날 물끄러미 보셨다.
뺨을 긁으시며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자네가 말한 다섯 종목. 한 달이 지났으니 두어 달 후면 윤곽이 보일 걸세. 그쯤 되면 나도 과감한 결정을 해야겠지. 5개월 후에 자네 말대로 된다면 이번에 빌린 5억을 안 갚아도 되는 것은 물론, 작은 선물을 덤으로 주지.”
“선물이라니요?”
“자넨 예측이 맞기만을 기대하면 될 걸세.”
예측이 맞는다면 빌린 돈 안 갚아도 되고, 선물도 주신단다.
사장님이 말씀하신 두어 달 후의 과감한 결정이란.
중간 평가를 보신 뒤 공격적으로 매수하시겠다는 뜻.
그 결과의 이익으로 선물을 주신다는 말씀 같다.
무슨 선물일까.
뭐, 나로선 돈을 빌린 것만으로 어디냐.
“그럼. 기대해 보겠습니다.”
“여기 적어 주게.”
사장님께 나머지 종목 2개도 알려드렸다.
“앞으로 좋은 거래를 해 보자고.”
“고맙습니다. 사장님.”
“나도 마찬가지지.”
사장님이 내미는 손을 잡았다.
* * *
집에 도착하니 자정이었다.
5억을 입금했다는 투자사 사장님의 문자가 와 있었다.
비서도 모르게 하려는지 본인이 직접 보낸 문자였다.
내일 오전에 짬을 내서 제니스 소속사를 인수하기로 했다.
내 입봉작이 개봉할 때까지 기다릴 순 없다.
5월 말이면 제니스는 해체될 테니까.
내게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될 시작이다.
이 보잘것없는 회사가 훗날 종합 엔터테인먼트사가 될지 누가 아나. 로즈 엔터에서 로즈 엔터 & 미디어로.
그러려면 로즈 엔터부터 키워야겠지.
5억을 손에 쥔 이날.
원대한 꿈을 꾸었다.
로즈 엔터를 발판으로 영화계에 우뚝 서는 꿈을.
* * *
제니스 소속사 성 대표가 긴장한 표정으로 날 보았다.
난 그가 준비한 서류를 보고 있었다. 인수인계 서류에 허점이나 오류는 없는지 코어까지 동원해서 꼼꼼하게 살폈다.
부채도 없었고, 자본 대비 매매가도 적절했다. 재무 정리와 소유권 이전 서류도 빠진 것 없이 잘 갖춰져 있었다. 전에도 느낀 거지만 성 대표가 사기꾼 타입은 아니다. 열심히 하는데 방법이 안일해서 그렇지.
로즈 엔터테인먼트.
지난해 매출 2억 6,739만 원. 당기순이익 292만 원.
실 자본금 4,119만 원.
총자산 9,119만 원 상당.
사무실 및 연습실 보증금 및 월세 1,000에 130.
제니스 숙소 보증금 및 월세 2,000에 70.
2013년형 그랜드 스타렉스 실매매가 1,500만 원.
사무실 기자재 및 비품. 500만 원 상당.
무대 의상 및 영업 재산 1,000만 원 상당.
직원은 경리와 로드매니저.
외부 투자 지분 없음. 채무 없음.
대충 예상은 했는데 이 회사의 현실을 수치로 보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매출도 2억 6천이 고작이고 순이익은 처참할 지경이다. 매출이 곧장 활동비용과 월세, 직원 월급과 진행비 등 지출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자본금 4천으로 신곡 활동은 앞으로 한 번뿐이다. 그것도 행사로 충당해서 1억쯤 모아야 가능하다. 제대로 된 뮤직비디오는 언감생심이고. 다음 신곡도 망하면 회사 문 닫아야 한다. 채무가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로즈나 신성이나 구멍가게 수준인 건 똑같다.
“처음엔 얼마 가지고 시작했는데요?”
“2억 가지고 시작했죠. 연습생 뽑을 때는 내가 천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애들이 예뻐서 바로 뜰 줄 알았거든요.”
“곡이 좋아야 뜨죠.”
“제가 큰 착각을 했습니다. 나름 비주얼 걸그룹이라고 자신했는데… 비용을 좀 아끼려다 3년 만에 이 모양 이 꼴이 되고 말았네요.”
“투자받을 생각은 왜 안 했어요?”
“중소연예기획사에 돈 대는 인간들은 죄다 조폭이나 한가지입니다. 중소기획사 대표나 투자자들이나 유흥가에서 돈 번 인간들이에요. 그런 놈들에게 투자받으면 바지사장 꼴 나지요. 조폭들과 엮이면 저도, 애들도 정말 힘들어집니다. 약점 잡혀서 애들 노예 계약하는 건 보통이고, 술자리까지 해야 해요. 제가 그 꼴은 도저히 볼 수가 없어서.”
조폭 놈들이 걸그룹 아이들을 어떻게 대할지 안 봐도 뻔하다. 자신들이 데리고 노는 것은 물론 더 큰 투자자나, 광고주 등의 술자리에 밀어 넣을 수도 있다.
“제니스 멤버들 빼 가려는 회사는 없었어요?”
“왜 없었겠습니까. 애들이 착하고 똑똑해서 아직 남아 있는 거지. 돈에 혹해서 조폭 놈들 회사에 들어갔으면 지금쯤 난리도 아닐 겁니다. 내가 이 바닥 위험하다고 늘 말해 준 것도 있고요.”
서류를 다시 살펴보았다.
손이 많이 가는 회사가 될 게 분명했다. 이 회사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아니고, 영화에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길게 보고 가자.
“좋아요. 제가 로즈 엔터를 인수하죠. 성 대표님은 그대로 대표직 유지하시고, 전 프로듀서로 있겠습니다.”
“그냥 대표를 하시지 그러십니까?”
“바빠서 모든 걸 챙길 시간이 없어요. 대표님이 이전처럼 총괄하시고, 전 제작 관련만 지원하겠습니다.”
“저야, 좋지요.”
대형기획사인 JIP나 YD처럼 대주주인 창립자는 프로듀서 역할을 하고, 경영은 전문 경영인이 하는 것과 같다.
회사인수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인수금액 1억 5천.
기존 사업주의 영업재산과 영업권, 권리 의무를 포괄적으로 승계하는 방식. 즉, 회사가 100% 내 것이란 뜻이다.
9천만 원 상당의 회사 자산과 그동안 제니스가 활동해서 얻은 이름값. 성 대표가 PD나 가요관계자들에게 회사명을 알린 노력을 따져서 산출한 인수 금액이다.
성 대표가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회사를 팔아서 번 돈은 사실상 1억이 안 되지만, 대표직을 유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니스도 다음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대표가 작가이자 영화사 실장이니 제니스가 걸그룹으로 뜨지는 못해도, 배우로는 뜰 기회는 생긴 셈이다.
성 대표님에게 말했다.
“먼저 뛰어난 보컬 트레이너부터 섭외해서 트레이닝 들어가야 합니다. 석 달 동안 노래 연습만 해서 음색까지 달라져야 해요. 지금은 너무 차별성이 없어요.”
“알겠습니다. 신곡은 어떻게 하실는지.”
“신인급 중에 자기 색깔 뚜렷한 분들을 찾아 주세요. 다음 신곡은 강한 이미지로 가야 합니다. 오면서 찾아봤는데 트로피컬 하우스나 신스사이저를 강조한 곡이 좋더군요. 이걸 가이드로 해 두고, 곡이 좋으면 일단 제게 보내 주세요.”
“예산은 어느 정도로 보십니까?”
“곡이 좋으면 무조건 삽니다. 곡이 좋아도 기존 걸그룹이 불렀던 느낌이면 안 됩니다.”
“우리 애들 이미지가 청순해서 좀 안 맞을 텐데요?”
“귀여움, 청순, 섹시. 이것들은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남들 다하는 거 아닙니까. 국경의 끝이 개봉되면 제가 조금 더 집중할 수 있습니다. 신곡 준비하는 다큐도 찍을 거고요.”
“현 자본금으로 가능할까요?”
“돈은 제가 마련하겠습니다. 당분간 행사와 트레이닝에만 집중해 주세요. 다큐 찍을 때 해외 연수도 갈 겁니다. 멤버들의 진짜 모습을 끄집어낼 생각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거칠 게 없으면 자신감이 생기죠. 그 자유가 뭔지 멤버들에게 체험시켜 주고 싶네요. 멤버들의 본 모습 그대로 보여 주면 변신했다는 말을 듣게 될 겁니다. 멤버들의 진짜 모습을 보여 주려면 자신감이 필요해요.”
“아, 알겠습니다.”
성 대표는 알 듯 모를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몇 가지 더 당부하곤 회사로 향했다.
아침에 일어나 걸그룹 제니스에 대한 모든 것을 분석했다.
가장 큰 문제는 곡이 평범한 수준을 넘어 나쁘다는 거였다. 찾아 듣고 싶은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곡들. 누가 불렀는지, 곡 제목은 뭔지도 궁금하지 않은.
관심이 안 생기는데 뜰 리가 있나.
분석을 통해 제니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곡. 가장 잘 어울리는 의상 스타일. 가장 잘 어울리는 콘셉트와 이미지를 찾아냈다. 쿨하고 자유분방한 걸크러시다.
앞으로 제니스는 작사 작곡을 할 것이며, 전원 연기를 병행한다. 그 전에 강한 이미지. 쿨한 이미지. 털털한 이미지를 보여 주어야 하고, 그게 가짜가 아닌 진짜여야 한다.
제니스 멤버들은 실제로 모두 털털한 성격이며 쿨하다.
그걸 그냥 보여 주면 된다. 가면을 벗고 본인들의 민낯을 보여 주려면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신비주의는 톱스타가 된 후에 해도 된다.
* * *
택시를 타고 중고차를 사러 갔다.
매번 택시나 조감독 차를 얻어타고 다닐 수가 없어서 싼 차라도 사야 했다. 이 대표님이 중고차라도 사라는 깊은 뜻으로 잔금 1500을 한 번에 쏴 주신 것도 있고.
고른 차는 2011년식 1,100만 원대 슈퍼 렉스톤.
조감독이 아는 중고차 딜러에게 연락해서 예약한 차다.
내게 차가 생긴다고 생각하니 정말 감개무량했다.
일생 차를 타고 다닐 일은 없을 줄 알았으니.
코어를 발동해서 차 곳곳을 살펴보았는데, 두 차례 정비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침수되거나, 큰 사고는 없었다. 내가 차에 대해 몰라서 자세한 정보가 안 뜬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별다른 하자는 없어 보였다.
매매계약서와 보험 서류를 작성하고 현금 결제한 뒤 그 자리에서 차를 몰고 갔다. 내일모레부터 직접 차를 몰고 현장과 회사를 오가야 하기에 운전 연습 삼아 한 시간가량 돌아다녔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등이 땀에 절었다.
고향 집에서 아버지 차를 몰아보기는 했으나 서울 시내에서 차를 운전하는 건 다른 차원이었다.
회사로 가는 도중에 증권사에 들렀다.
남은 돈 중 3억을 5개 종목에 분산 투자했다.
그 5개 종목 중 일부는 이전 주가보다 약간 오른 상태였다. 3개 종목은 꾸준히 상승하고, 두 개 종목은 영화 개봉 후 두 달쯤 지나면 대폭 상승한다. 분석으로는 그렇다.
오전 일정을 끝낸 뒤 회사로 가서 밤늦게까지 일했다.
토요일, 일요일에도 최종 촬영 준비를 하느라 온종일 정신없이 바빴다. 그리고 월요일은 쉬었다. 촬영 전날까지 일하고 있다면 준비가 덜 됐다는 말 아닌가.
드디어 촬영이다.
감독도, 대표님도, 모든 배우와 스태프도 긴장했다.
나도 긴장했다. 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촬영 회차는 42회.
촬영 기간은 연휴와 휴일 포함 61일.
이제 진짜 전쟁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