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메인투자
제본된 스토리보드가 각 팀에 배포되면서 스태프들이 더욱 바빠졌다. 팀마다 확정 회의를 하느라 바빴고, 확정 회의를 끝낸 팀은 최종 문서 작성에 돌입한 상태였다.
그런데 문제가 아직 남아 있었다. 곧 촬영에 들어가야 하는데 아직 메인투자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대표는 투자사에 가 있었다. 엄아인이 한다고 했음에도 투자사가 투자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표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직도 투자사가 검토 중이에요?”
-임원들이 회의 중인데… 결정이 좀 늦네.
“이유가 뭔데요?”
-나 때문인 거 같다.
“대표님이 왜요?”
-내가 영화판 10년 떠나 있었잖아. 이 양반들이 내가 시류에 안 맞는 영화를 들고 나왔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 내가 옛날 생각만 하고 요즘 관객 취향을 모른다, 이거지.
“예전 치정극이랑 우리 영화는 다르잖아요.”
-타깃이 여자냐, 남자냐 어중간하다는 거지. 전무라는 양반이 나한테 이러더라, 여자감독이 찍는 야한 영화는 남자들이 안 본다고. 게다가 이유현과 걸그룹 출신 신인도 남자 관객에겐 어필하기 어렵다고도 하고.
“그쪽에서 다른 요구도 해요?”
-그래. 이유현 말고 섹시한 스타일로.
“그런 여배우는 연기가 안 되잖아요.”
-투자사가 원래 그래. 큰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안전한 걸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여배우가 벗는다는 홍보만으로도 남자 관객은 꽤 드니까. 그럼 여자 관객은 놓치는 거야. 두 여자의 복수극이랑 노골적인 영상은 안 맞잖아.
“야동이 넘쳐나는데 여배우 알몸 보자고 영화 봅니까?”
-그러니까, 내 말이.
“주로 나이 드신 분들이 그런 말 하죠?”
-그래. 젊은 직원들은 하자는 분위기야. 임원들 선구안이 좋은 편인데 내가 들고 간 영화라 유독 그러는 거 같다.
“제가 갈게요.”
-그래, 일단 와 봐라. 작가 말이면 좀 다르겠지.
바로 사무실에서 나갔다.
이 대표님이 메인투자사를 찾아간 게 한 달 전이다.
문서를 보낸 건 더 되었고.
대표님은 될 거라고 했으나, 영 느낌이 좋지 않아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해 두었다. 자료를 구비해서 민정이에게 맡겼더니, 민정이가 연출부 막내에게 부탁하여 몇 시간 만에 <작품> 하나를 완성했다.
어째 대기업 직원이 된 것처럼 긴장되었다.
내가 제일 잘나간다는 자신감이면 안 될 것도 된다.
* * *
투자사에 도착하자 대표님이 마중 나와 있었다.
대표님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건물로 들어갔다.
한국에는 4대 투자배급사가 있다. 제작에서 배급까지 하는 회사들로, 그중 두 회사는 극장 체인까지 소유하고 있다.
대표님이 찾은 곳은 CT 인베스트먼트라는 곳으로 주로 공동제작을 하거나 투자만 하는 회사였다. 이 회사가 투자한 영화들 목록을 보고 왔는데, 1,000만 관객이 든 영화는 하나도 없다. 망한 영화도 없고. 이 회사 투자 방식의 결과다.
한 층 전체를 쓰는 투자사 사무실로 들어갔다.
간부들이 회의실에 모여 있었다.
잠시 심호흡한 뒤 회의실로 들어갔다.
임원들이 일제히 나를 본다.
넙죽 인사를 하고는 소개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국경의 끝 각본을 쓰고 현재 신성에서 제작실장을 맡고 있는 최신성이라고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난 찌질한 시나리오 작가가 아니었다. 패기가 넘치다 못해 눈빛으로 임원들을 패기라도 할 것처럼 당당했다.
“신성에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했습니다.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시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영상 출력 장치를 준비해 주시면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다짜고짜 제 할 말만 하는 내 태도에 임원 몇 명은 눈살을 찌푸렸고, 사장 혹은 이사로 보이는 50대는 작은 감탄을 발했다. 임원들이야 무기력한 신입 사원보다 사장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히는 신입이 낫지 않겠는가.
내 행동은 일종의 연기였다. 연기론이라는 책을 읽어서 그런지, 서연을 함부로 가르쳐서 그런지 나도 조금은 연기가 된다.
어쩌면 코어가 생긴 후부터 내 인생이 영화인지도 모른다.
이사로 보이는 분이 지시하자 직원들이 회의실에 들어와 노트북에 빔프로젝트를 연결하고 스크린을 내렸다.
“이 메모리에 PT 파일이 있습니다. 그 파일 첫 페이지 띄우고 제 손짓에 페이지다운 키만 누르면 됩니다.”
“예.”
웅성거리던 임원들이 내가 스크린 앞에 서자 조용해졌다.
내 손짓에 직원이 첫 페이지를 열었다.
다큐멘터리처럼 배우 엄아인과 이유현의 인터뷰가 나왔다.
시나리오를 본 느낌. 영화에 참여한 동기와 기대 등이 차례로 나온 다음 내가 질문을 던졌다.
“왜 이 영화를 하고 싶은 거죠?”
엄아인이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이 영화로 연기의 혁신을 보여주고 싶어요. 구태의연한 연기가 아니라 이런 방식도 있다는 걸 말입니다. 이 영화는 지금까지 없었던 연기의 영감을 주더군요.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닷속과 같은 연기라고 할까요. 이런 연기의 시초는 엄아인이었다. 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엄아인에 이어 이유현도 비슷한 말을 했다. 자신의 대표작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서연도 수줍게 인터뷰를 했다. 그녀가 연기했던 장면도 붙여서 내보냈다.
서연의 처연한 눈빛에서 영상은 멈췄다.
다들 서연의 연기를 봤으니 이제 걸그룹 가수는 안 된다는 말은 쑥 들어갈 터다.
영상에 이어 도표가 떴다.
도표가 뜨자마자 여기저기서 가벼운 탄성이 나왔다.
코어로 국경의 끝을 분석한 내용대로 만든 도표였다.
임원들은 대체 어떤 근거로 작성한 것인지 의문인 표정이다. 영화사 신성이 임의대로 예측한 것이 아니라 무슨 통계를 거쳐 뽑아낸 것 같은.
영화의 장단점에 대한 이유와 설명이 도표에 있었다.
소재의 참신성이 떨어지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럼에도 이 작품을 하는 동기. 영화의 작품성을 돋보이게 하는 몇 가지 장점과 장면들. 소재의 단점을 상쇄할 수 있는 플롯과 내러티브. 연기는 다른 영화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조목조목 설명했다.
누군가가 자기 취향대로 설명한 것으로 보기엔 설득력이 있었고 객관적이었다. 코어가 분석한 그대로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 생각이 코어 능력에 영향을 미쳤는지 아닌지는 나도 모른다. 단점도 분명히 지적하긴 했다.
그 모든 장단점을 취합하여 내린 결론.
지수 최고점이 10이라 했을 때.
소재의 참신성 4.
영화의 작품성 7.
영화의 예술성 8.
영화의 상업성 7.
관객 선호도 5.
관객 유입률 8.
영화계의 반응 8.
배우들의 연기력 9.
총평 : 제작 8. 투자 9. 관람 7.
내가 마이크를 잡았다.
“영화사 신성은 통계와 정보 분석을 바탕으로 본 작품을 자체 평가하였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소재는 진부한 편이지만 영화의 작품성과 예술성, 상업성은 좋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관객 선호도를 보시면 수치가 낮은 편인데 이는 개봉 첫주에는 관객이 적으나, 입소문에 의해 관객이 늘어난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자평하자면 저희는 이 영화를 제작할 가치가 있고, 귀사는 투자하는 것이 이익이며, 관객에게는 영화 관람을 추천해도 된다는 결론입니다. 이상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임원 하나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통계를 낸 겁니까?”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예측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임원들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컴퓨터를 사용했다면 그럴 수도 있다는 얼굴인데, 프로그래밍을 모르니 더 물어볼 수가 없다. 어떤 영화사도 이런 식으로 자체 분석을 내린 적이 없기도 하고.
말을 이었다.
“사람은 감정에 휘둘려서 판단에 실수가 있을 수 있으나, 컴퓨터는 수많은 정보를 취합하여 분석하기에 인간보다 훨씬 정확한 예측을 합니다. 이 도표들은 그 결과이고요. 따라서 CT가 투자한다면 상당한 순수익을 얻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그때 스포츠머리에 반 백발인 임원이 물었다.
“그래서 관객은 얼마나 들 것 같나?”
말투를 보니 이 회사의 사장이 저분인 모양이다.
코어가 꽤 강한 호감을 전달해주는 분이다.
나와 뭔가 인연이 있는 걸까.
다들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프로그래밍으로 영화를 분석했다면, 예상 관객 수도 알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감히 말씀드립니다. 총 흥행수입은 550억. 귀사가 50억가량을 투자했을 때, CT 인베스트먼트의 순수익은 부가판권 수익을 합쳐 100억 정도입니다.”
회의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50억 투자해서 100억을 번다?
미친 수익률이다.
회의장이 떠들썩해졌다.
이 대표님은 날 빤히 보고 있었다.
대표님은 내게 특이한 뭔가가 있다는 걸 이미 눈치챘다.
제작 일을 전혀 모른다고 했고, 처음에는 실제로 몰라서 허둥댔다. 그런데 두어 달 지나자 제작은 물론 다른 팀의 업무까지 모두 파악했고, 문서 처리도 매우 빠르다.
그런 차에 내가 프로그램을 쓴다고 하니 이상했던 점이 그제야 이해가 되는 얼굴이다. 내게 신기가 있다느니, 예지력이 있다느니 하는 말보다 컴퓨터 프로그램이 있다는 말이 더 설득력 있을 테니까.
어차피 뭔가 있음을 밝히는 거. 투자자 앞에서 하는 게 낫다고 봤다. 국경의 끝이 실제로 흥행하면 앞으로 투자받는 게 아무래도 나을 테니까. 정말 흥행 수익이 550억이면 내 말을 믿을 수밖에 없지 않겠나.
그런데 예측과 다르면 어떻게 하지?
대박까지는 아니어도 자신이 있기는 한데.
마침내 반 백발 스포츠머리를 한 분이 입을 열었다.
확실히 이 분이 사장님 같다.
“컴퓨터를 믿고 50억을 투자하란 말인가?”
“시나리오는 믿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안 좋은 시나리오였다면 여러분이 회의를 거듭하실 이유가 없죠.”
사장님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우리도 영 까막눈은 아니거든. 그런데 자네가 말한 550억은 예상 밖이야. 난 200만을 예상했으니 말이야. 솔직히 이 작품은 그만한 흥행은 어렵다고 보네. 스토리보드에서 볼 수 없는 흥행 요인이 따로 있다는 건가?”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중후반 전개와 엄아인 씨의 신들린 연기가 시너지를 일으켜 큰 화제가 될 겁니다. 다른 영화에 없는 특별한 한 가지가 흥행 요인이 되기도 하죠.”
사장님이 껄껄대며 웃었다.
“내가 믿을 만한 근거 하나만 주게. 그러면 투자하지.”
사실 프레젠테이션만으로도 사장님은 넘어왔다. 어차피 투자는 결정된 것 같은데, 투자를 빌미로 은근슬쩍 호기심을 풀려는 거다.
이 회사는 지나치게 안전주의로 간다는 게 문제다. 그런데 미래를 딱딱 맞추는 놈과 함께 간다면? 그것도 안전 아니던가. 이 회사를 신성의 안정적인 파트너로 만들어야 한다.
“다른 측면에서 근거를 대죠.”
내 폰 번호를 찍은 뒤 투자사 사장님에게 다가갔다.
“이 번호로 전화 좀 주시겠습니까?”
사장님이 이건 또 뭔가 싶은 얼굴로 날 보더니 바로 전화를 걸었다. 임원들에게서 먼 회의실 구석에 가서 전화를 받았다.
“코엠 네트웍스. 휴처스 바이오. 셀트런 컴텍. 디오디톡스. 영신제약.”
“그게 다 뭔가?”
임원들이 나와 사장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 말이 들리긴 해도 정확한 의미는 모른다.
“전일 종가 기준으로 코엠 네트웍스 현재가 32,800원. 휴처스 바이오 7,440원. 셀트런 컴텍 5,900원. 디오디톡스 8,430원. 영신제약 128,900원. 이 종목들이 6개월 후에 현 시가의 두 배가 됩니다. 이중 휴처스 바이오는 다음 달에 연달아 상한가를 치게 될 겁니다.”
-프로그램이 그런 것도 예측한다고?
“예. 정확하진 않겠지만 매우 확률이 높습니다.”
사장님이 팔짱을 낀 채 날 가만히 보았다.
-그걸 확신하면 주식을 사 놓지 그러나?
“돈이 없어서요. 사장님께서 영화에 투자하시면 제가 계약 잔금을 받을 테고, 그 돈으로 주식을 살 겁니다.”
나와 사장님만 은밀한 대화를 한 탓에 임원들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주식 정보를 함부로 알려 줘선 곤란하지. 거금을 굴리는 투자사 사장님은 몰라도.
-프로덕션이 한 달 남았던가?
“그렇습니다.”
-한 달 후에 휴처스 바이오의 주가를 보면 되겠군.
“예.”
사장님이 전화를 끊었다.
“우선 25억 투자하지. 자네 말이 맞으면 그때 나머지도 투자하고.”
“제 말을 믿으십니까?”
“전혀.”
대답을 하곤 낄낄대는 사장님이다.
“회장님!”
“무슨 말을 들으셨기에 바로 투자를 결정하십니까?”
임원 몇 명이 물었으나 사장님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직원은 드디어 결정 났다는 듯 밝은 표정이다.
흥행이 된다는 둥. 주가가 오른다는 둥.
그 말과 상관없이 어차피 투자받을 수순이었다.
말 한마디에 넘어가면 그게 회산가, 구멍가게지.
내가 주식을 언급한 건 일종의 전략이다.
사장님과 나와의 비밀 공유로 관계가 돈독해지면 나쁠 거 없으니까. 코어의 예측이 맞으면 안정적인 투자처 하나를 확보하는 거고.
사장님이 내게 와서 손을 내밀었다.
두 손으로 공손히 그 손을 잡았다.
“좋은 영화 하나 만들어 보자고.”
“결과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사장님과 임원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회의실에서 나갔다.
복도로 나가자마자 한숨부터 터져 나온다.
프레젠테이션하러 왔다가 주식 이야기를 하다니.
남한테 종목 추천하는 거 아니라고 들었으나 효과는 있었다. 냉철해 보이던 사장님마저도 흔들리는 게 보였으니.
이미 일을 벌였는데 후회하면 뭘 하랴.
코어 예측이 맞아떨어지길 바랄 수밖에.
잘 되면 든든한 후원자 한 분이 생기는 거다.
“최 실장. 진짜 프로그램이 있어?”
말없이 따르던 대표님이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물어본다. 임원들과 달리 대표님은 내 말을 믿는 모양이다.
“비슷한 게 있긴 있어요.”
“그런 게 있으면 말을 하지. 얼마나 정확한데?”
“솔직히 오늘 보여 드린 건 투자 받을 목적이었습니다.”
“안 맞을 수도 있다는 거네?”
“아직 검증이 안 되어서 그렇지, 확률은 높습니다. 설령 안 맞더라도 투자는 받아 놔야죠.”
“프로그램 예측이 틀렸다고 투자사가 뭐라 할 것은 아닐 것 같다만, 투자사에 찍히면 곤란해.”
“예측은 맞을 겁니다. 정확한가, 아닌가의 차이죠.”
“믿어도 되겠지?”
“그럼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다.
아무래도 내가 코어를 너무 믿고 있다.
앞으로는 조심하자.
예측이 완전히 빗나가면 내 인생 도루묵 된다.
* * *
며칠 후.
투자가 완료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무실에 모여 있던 스태프들이 그제야 안심했다. 불안감을 지우고 저마다 크랭크 인을 앞두고 최종 문서를 작성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배급이 그다음 문제였는데 어려울 거라 보았던 배급사와 계약하게 되었다. 대박 영화를 여럿 제작한 투자배급사, NEO였다. 이제 한배를 타게 된 투자사가 힘을 쓴 모양이다.
개봉 첫 주 스크린 수는 884개.
기대작도, 대형 투자배급사가 제작한 영화도 아니기에 이 정도면 선전했다.
현재 상영관 스크린 수는 2,569개인데, 반드시 2주 차에 입소문이 나서 스크린 수 1,000개 이상은 확보해야 한다. 스크린 수가 줄어드는 3주 차에도 반응이 없으면 가망이 없다.
영화 개봉 시기가 비수기인 5월 말인 것도 좋았다.
성수기에는 블록버스터와 기대작이 상영관을 장악하기에 스크린 확보가 어렵다. 스크린 수가 적으면 흥행도 어렵게 되고. 후반 작업 시간이 좀 빠듯한 게 걸리긴 했다.
촬영과 후반 작업에 필요한 업체 계약도 모두 끝났고, 음악 시안도 끝났다. 회의가 거듭되었던 배우들의 의상, 헤어도 결정되었다. 남양주 종합촬영소에서 만들어지는 세트도 거의 완성되었고.
크랭크 인은 한 달 후인 1월 17일 회사 건물에서.
그때는 한겨울이라 실내 촬영과 세트 촬영을 먼저 한다.
큰 것들이 해결되니 일이 술술 풀린다.
내 계좌에도 시나리오 계약 잔금 1,500만 원이 들어왔다.
이 대표님이 약속한 대로 한 번에 쏴 주셨다.
바로 증권사에 가서 주식거래 계좌를 만들었다. 받은 잔금 1,500만 원으로 전액 주식을 샀다. 투자사 사장님에게 말했던 종목 중 두 개를 골라 분산투자했다. 이 주식은 영화 개봉이 시작될 즘 팔 생각이었다.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백화점에 들러 수트 몇 벌과 구두, 코트 등을 샀다. 앞으로 예의를 갖춰야 할 미팅이 제법 있을 것 같아서. 내 실장 월급이 150인데, 그 월급이 쇼핑 한 번에 다 날아갔다.
회사로 들어가니 민정이가 내 신수가 훤해졌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내가 봐도 나쁘지 않았다. 내 얼굴은 사실 좀 평범한 편이다. 좋게 말하면 샤프하고, 나쁘게 말하면 차갑게 생겼다.
청바지에 맨투맨을 입고 있을 때는 후줄근한 무명작가 그대로인데, 정장에 코트를 입으니 사람이 달라진다. 작가에서 영화사 제작실장으로 변신한다. 옷이 날개라더니 내게 수트가 잘 어울릴 줄은 전혀 생각을 못했다.
수트를 산 이유는 또 있었다.
오늘 워크샵이 있기 때문이다.
제작부원 오상일과 함께 길게 이어붙인 테이블 위에 프린트한 각본과 음료수, 다과 등을 배치했다.
나만 수트를 입고 있었다. 출연진을 예우하는 차원이었는데, 스태프들이 정장이 잘 어울린다고 한마디씩 해 준 덕분에 기분이 꽤 좋았다.
단지 칭찬을 받아서 그런 게 아니라, 스태프들이 날 제작실장으로 대우해 준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회사 회의실에 엄아인과 이유현이 매니저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이어 조연급 배우들이 속속 입장하고, 서연도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감독과 선배 배우들에게 인사를 한 후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그제야 날 보고는 수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난 몇 달 사이 유난히 더 예뻐진 그녀였다.
난 잘하라고 말없이 웃음을 보였다.
모든 배우가 모여 최종 점검을 하는 각본 리딩.
영화 촬영을 위한 사실상 마지막 관문이었다.
* * *
배우들은 안부를 묻고, 스태프들은 잡담했다.
워크샵은 배우와 스태프들이 서로 안면을 익히는 자리지만, 배우들이 바빠서 시나리오 리딩으로 대체하는 추세였다.
조감독이 프린트한 시나리오를 들고 앞에 나섰다.
이미 감독이 배우들과 논의하여 대사나, 씬 몇 곳을 손보았다. 배우마다 특정 대사의 딕션이 어렵거나, 입에 붙지 않는 단어 등이 있기 때문에 수정해야 했다.
이미 배우별 리허설은 끝났고 전체 리딩은 최종 점검을 하는 시간이다. 이 각본 리딩 이후 수정한 것이 최종 시나리오가 되며, 그걸로 일일 촬영계획표를 짠다.
드라마 촬영과 달리 영화 현장에선 시나리오 책을 들고 다니진 않는다. 다들 촬영 시트 몇 장을 들고 다니며 그날 촬영을 한다. 배우들이 각본을 달달 외우는 것은 물론 캐릭터 연구까지 끝냈기 때문에.
다만 걸리는 것은 서연이었다.
촬영 때 한 씬에서 쇼트를 여러 번 따는데 카메라 위치 세팅 때 감정이 깨지면 어쩌나 걱정되었다. 특히 마지막 재판 신에선 대사도 많고 감정도 격해지고, 도중에 수도 없이 쇼트가 나누어진다.
그리고 같은 장소는 몰아서 찍는데 씬마다 감정이 다르다.
서연과 톡을 주고받으면서 그 점을 유의해서 시나리오에 각 씬의 감정과 앞 씬과의 감정 연결을 메모해 두라고 하긴 했다. 배우들에겐 당연한 감정 연결인데 행여나 서연이 그걸 놓치고 있을까 봐 그랬다. 뭐, 그녀도 알고 있긴 했지만.
조감독이 외쳤다.
“모두 주목해 주세요. 영화, 국경의 끝의 리딩을 시작합니다. 책에 파란 표시를 한 부분은 회상 씬이거나, 인서트 쇼트라 건너뛰겠습니다. 자, 준비해 주시고요. 바로 1씬부터 갑니다.”
회의실이 바로 조용해졌다.
지문을 읽는 조감독의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씬 1. 어딘 가의 침대. 밤. 희미한 빛이 산란하는 보랏빛 실크가 육식동물의 등과도 같은 한 남자의 등을 감싼 채 꿈틀거린다. 남자의 등을 감싼 실크 시트가 서서히 위로 당겨 올라가며 남자의 육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알몸이 되어 서로의 몸을 탐닉하는 남자와 여자의……”
첫 씬이 베드씬이라 회의실 분위기도 좀 묘했다.
감독과 촬영감독의 예술적 영감을 위해 첫 씬만 이렇게 썼을 뿐 다른 씬은 직관적인 지문이다. 누가 봐도 비슷한 영상을 떠올릴 수 있도록.
6개의 쇼트로 이뤄진 이 첫 장면에 제목 및 배우와 감독 타이틀이 들어가며 강렬하면서도 초현실적인 CG 화면이 교차 편집된다.
첫 장면에 이어 지문 낭독이 이어지고 배우들의 대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금 낯설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적응이 되어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엄아인의 연기는 완벽에 가까웠고, 이유현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신비롭다고 해야 하나. 목소리만으로 요염하면서도 수상한 느낌이 물씬 들었다.
서연도 쉰 듯한 목소리로 연기했는데 첫 대사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섬뜩한 차가움이 느껴졌다. 스태프들이 일제히 서연을 보았을 정도로.
“아내가 신경질적으로 고함을 질러 댄다.”
“당장 내 집에서 나가!”
“내가 왜? 나 절대 이혼 안 해.”
“날 풀어 줘! 나 집에 가고 싶어!”
“내가 널 묶어 놨니? 여기가 네 집인데 어딜 간다는 거야! 미친 척해도 소용없어! 절대 이혼할 일 없을 테니까!”
“제발! 제발!”
“저리 가 좀! 언제까지 이럴 거야 대체!”
“꺄아아악-”
리딩이 중반을 지나 점점 고조되기 시작한다. 배우들의 목소리도 씬에 맞게 격양되어 갔고, 지켜보는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쥔다. 손에 땀이 나긴 정말 오랜만이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골목길. 변호인이 미친 듯이 헤매고 있다. 대체 뭘 찾으려고 이토록 절박한 것일까. 그때 갑자기 나타나 야구 배트를 휘두르는 괴한!”
“누구야! 너 누구야!”
“괴한이 다짜고짜 변호인을 폭행한다. 등을 맞고 나자빠지는 변호인, 다시 공격하려는 괴한을 밀치며 벽에 붙은 채 괴한과 격투를 벌이는데!”
“너 이 새끼 누가 보냈어! 너 누구냐고 새꺄!”
“흙탕물 범벅이 된 채 의문의 괴한과 격렬한 싸움을 벌이는 변호인. 괴한을 계단 아래로 밀어 버리고 황급히 도주하여 달린다. 그리고 이어지는 괴한과 변호인의 골목 추격전!”
그러다 피고인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남자주인공은 대혼란에 빠지고.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뭘 숨긴 거냐고!”
“아내의 은신처로 보이는 곳에서 물건을 마구 헤집어 놓는 변호인. 벽에 붙은 사진들을 확인하고, 서랍 속 물건들을 거칠게 쏟아내 살펴보지만 그가 찾는 증거는 없다.”
“아악!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변호인, 발악하며 자신의 머리를 움켜잡는데!”
주인공의 발악과 체념. 이어지는 분노와 발광.
그리고 마지막 재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공황상태에 빠진 남자 주인공.
남자 주인공이 어떤 증거를 찾아다닌 이유. 그가 집을 나간 아내를 찾아다니고 죽이려 했던 진짜 이유를 관객이 서서히 눈치채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죽은 피해자가 변호인의 아내와 불륜 관계였다는 조작된 증거가 드러난다. 관객은 변호인인 남자 주인공이 진범이었음을 알게 된다. 아내의 불륜에 분노한 변호사가 충동적으로 벌인 살인이 이 사건의 개요!
“아내와 피해자가 불륜 관계였다는 가짜 증거를 추론하다 결국 숨겨진 진실을 눈치채는 변호인! 입이 쩍 벌어지고, 눈은 튀어나올 듯 커진다.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진 변호인은 소리 없는 경악을 하고!”
“내가 마누라의 불륜에 충동적 살인을 했다고? 미친년이 숨긴 증거가 그거였다고? 그게 어째서 그년에게 있는 거지? 이희진과 그 여자는 대체 무슨 관계야! 이건 말도 안 돼!”
“절규하던 변호인, 문득 한 가지 퍼즐이 풀린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주춤주춤 물러나다 무너지듯 소파에 앉는데.”
“설마… 설마 이게 다 희진이가 꾸민 일이야? 희진이 그게 꾸민 일이었다고? 아닐 거야! 아니야! 그 여자 날 사랑하고 있어! 내가 사랑하고 있잖아! 나한테 그럴 이유가 없다고!”
오랜 시간 여자주인공이 준비했던 함정은 완벽했다.
피고인과 남자주인공이 함께했던 흔적은 모두 사라졌다.
변호인이 피고인에게 혐의를 덮어씌우려 변호사 선임을 먼저 제안했다는 증거까지 드러났다.
변호인이 피고인과 했던 평범한 행동들이 조작된 증거가 되어 뒤바뀌었다.
피고인이 유도하고 준비했던 함정에 변호인이 자신도 모른 채 들어갔던 거였다.
아내에 대한 변태적 집착으로 충동적 살인을 벌인 변호사. 하필이면 죽인 자가 재벌 2세였다. 혐의를 벗기 위해 그 재벌 2세의 부인에게 접근하여 변호인이 되었다. 그리고 재판에서 져서 피고인이 범인이 되게 하려 했으나!
“그때 갑자기 재판장으로 나타난 아내! 설마 했던 일이 현실이 되자 변호인은 정신적 붕괴 상태에 빠지고 만다. 피고인은 매우 당황한 변호인을 보며 뜻 모를 미소를 짓는데!”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검찰 측 증인은 본 사건과 무관합니다! 본 사건과 관계없는 증인 진술에 대해 검찰 측은 피고 측과 아무런 협의도…”
“변호인. 피고 측 참고인입니다. 모르셨어요?”
“깜짝 놀라 피고인을 보는 변호인. 충격에 휩싸인 채 말을 잇지 못하고. 피고인은 담담한 얼굴로 변호인을 본다.”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본 변호인은…”
“기각합니다. 참고인은 증인석에 오르세요.”
“재판장님!”
“변호인! 검찰 측이 본 사건과 관계있는 구술 및 증거를 확보했습니다. 진술 들어보시고 이의제기하세요.”
아내의 증언이 시작되자 주인공의 몸과 사고는 그 순간 멈춰 버린다. 아내의 증언으로 그동안 주인공이 한 악행과 학대가 낱낱이 밝혀진다.
변호인은 살인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인간이며, 피해자를 죽인 진짜 범인은 변호인이자 자신의 남편이라는 말과 함께.
이 마지막 재판이 클라이맥스였다. 격렬한 대사나 행동은 없었다. 변호인은 주체할 수 없이 흔들렸고, 증인으로 나온 아내는 차갑고 차분했다. 피고인은 시종 무표정할 뿐.
클라이맥스를 지난 뒤에는 차분한 분위기로 영화의 끝을 향해 간다. 변호인은 체포되고, 피고인은 재판에서 승소한다.
시간이 흘러 한없이 펼쳐진 어느 바다의 절벽 위.
두 여자가 바다를 보며 손을 잡는다.
그 장면에서 크레딧 타이틀이 올라가면서 엔딩.
“수고하셨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흠뻑 빠져 있던 나도 열심히 손뼉을 쳐 댔다.
코어가 내가 모르는 뭔가를 캐치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게 막연히 연기일 거라고 짐작했다. 이 영화가 정말 550만이나 들 만한 영화인가 싶기도 했다. 소재와 장르, 저예산과 청소년 관람 불가의 한계는 분명히 있으니까.
그런데 리딩을 보고 나니 확신이 생겼다.
내 코어가 세 배우의 연기를 예측했던 것이다.
그냥 연기력이 아닌 세 배우만의 연기가 이 영화의 특징과 섞이며 상승작용을 일으킬 것이라는 점을.
그렇다면 흥행 예측도 맞지 않을까.
리딩 이후 촬영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각 팀의 업무량이 폭증하긴 했으나 난 검토만 하면 되었기에 따로 준비할 건 없었다. 제작부가 소소하게 챙길 일은 오상일과 민정이가 대부분 처리했다.
그러는 동안 내 책상에는 각 팀이 작성한 최종 문서들이 하나 둘 쌓였다. 그 문서들로 최종 점검을 끝내고 대표님에게 올리면 된다.
촬영팀. 조명팀. 음향팀. 미술팀. 촬영 준비 완료.
의상. 분장. 메이크업과 헤어 완료.
촬영 장비와 조명 등 기자재 대여 계약 완료.
발전차. 의상차. 탑차. 밥차 계약 완료.
일일 촬영 스케줄 작성 완료.
보조출연 업체 계약 및 관리 완료.
제작 비품 작성과 관리 방안 정리 완료.
로케이션 일정 확정. 세트 시공 완료.
편집. 믹싱 등 후반 작업 업체들 계약 완료.
거의 마무리되었다.
영화 제작에 가장 큰 산은 세 개다.
배우 캐스팅. 메인 투자. 그리고 프로덕션.
이제 마지막 산 하나가 남았다.
가장 힘들고, 가장 변수도 많다는 촬영 현장.
잘 될까.
혹시 사고는 나지 않을까.
벌써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