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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프리 프로덕션 (4/56)

제4장 프리 프로덕션

엄청나게 바쁠 거라는 이 대표님의 엄포는 사실이었다.

8시에 출근했을 때 내 자리에 놓인 것은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제작 스케줄이었다. 대표님이 거진 다하고, 난 보조만 하는데도 업무량이 어마어마했다.

저작권 관련 진행. 영진위에 지원 문서 발송. 가예산 작성. 스토리보드 미팅 계획. 스태프와 배우 리스트 작성. 스태프와 주요 배우 미팅 및 계약. 업체 미팅 및 계약. 계약 관련 딜메모 작성. 영상위원회 및 관련 단체 미팅. 보험 관련 진행. 투자사 제출 서류 작성 등등.

내가 넋을 잃고 있자 민정이가 소리 내어 웃었다.

“겁먹을 거 없어요. 삼촌이 기존에 쓰던 문서들 활용하면 되거든요. 오늘 조감독님 오실 거예요. 그분이랑 의논하셔서 하나씩 처리하시면 돼요. 저작권이나 보험 같은 건 제가 다 하고요.”

“그래도 일이 너무 많은데?”

“조감독님이 제작부원 한 명과 함께 오실 거예요. 최 작가님 경험 없다고 무시하는 분들은 아니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민정이가 내 걱정을 꿰뚫어 봤다.

사실 난 실무경험이 전혀 없는 낙하산이다.

팀장이 경력사원이라고 뻥치고 부서에 꽂은 신입 꼴이다.

제작부원이 얼마나 배알이 꼴릴까.

어쨌거나 열심히 일했다. 대표님이 이전에 쓰던 제작 문서가 회사에 다 있었기에 매뉴얼대로 작성했다. 모르는 거나 헷갈리는 건 민정이에게 물어보면 되었고.

대표님은 투자사에 가서 미팅하는 중이라 점심은 민정이와 둘이서 먹었다. 투자사 쪽에선 일단 반응이 긍정적이라고 했다. 영화가 작다 보니 투자사도 중간 규모였는데, 이 대표님과 그쪽 임원들이 친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부분 투자로 말이 오가는 중이라고 했다. 엄아인이 캐스팅되면 대형투자배급사가 메인투자사가 될 수 있다. 관건은 한국 4대 배급사 중 하나와 계약해야 한다는 점이다.

대형배급사가 유통을 맡지 않으면 개봉관이 대폭 줄어들기 때문에 흥행이 어렵게 된다. 대형 투자배급사가 투자 및 제작한 영화들은 거의 모든 극장에 걸린다. 성수기에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 말 그대로 바늘구멍이다.

척 봐도 피가 마르는 진행 상황인데 전화기 속 이 대표님의 음성은 밝았다.

발로 뛰며 어떻게든 뚫겠다는 의지와 추진력이 대표님의 피를 뜨겁게 하는 모양이다.

대형영화사의 프로듀서로 있을 때에 비하면 현 상황이 매우 열악한데도.

오후 5시쯤에 오늘 일정을 얼추 마무리 지었다.

대표님의 전화를 받고 1시간 정도 기다렸을 때.

사무실로 30대 남자와 20대 중반의 남자가 들어왔다.

“어이, 이민정이! 혼자 고생 많다.”

“오셨어요? 식사는요?”

“나가서 먹지 뭐, 혹시 최 작가님?”

“예. 최신성이라고 합니다.”

30대 남자가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조감독, 오천일입니다. 이쪽은 제작부 오상일.”

조감독은 뚱뚱한 몸에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였다.

덩치 큰 그의 동생과도 말없이 악수했다.

조감독이 동생에게 말했다.

“생각보다 사무실 작지?”

동생이 무표정한 얼굴로 사무실을 돌아보았다.

“좀 그러네.”

솔직하게 말하는 조감독 동생의 말에 난 민정이를 보았다. 민정이는 못 들은 척하는 건지, 개의치 않는 건지 자기 일만 하고 있다.

조감독이 웃으며 말했다.

“이놈이 좀 직설적입니다. 그래도 사심 없고 뒤끝은 없습니다. 제작 일정 좀 봐도 되죠?”

“예. 그러세요.”

조감독이 내 책상에 놓여 있던 일정표를 들고 보았다.

이미 진행한 부분은 체크해 두었다.

“스태프 리스트도 있죠?”

“여기요.”

아직 감독과 계약하지 않아서 스태프 선택은 조감독이 해야 했다. 팀별 스태프 계약 우선순위는 계약금이다. 그다음은 현장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던 팀으로.

“작가님. 맥주 한잔하시죠?”

“좋죠.”

조감독과 그의 동생 그리고 나. 셋이서 사무실에 나가 먹자골목으로 향했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 나란히 걸어가자니 정말 어색했다.

골뱅이 집에 들어가 자리에 앉자 조감독이 거침없이 주문했다. 내 의사를 묻진 않았으나 무례해 보이진 않았다. 골뱅이 집에 왔으니 골뱅이를 주문하는 게 당연하긴 하다.

조감독이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말했다.

“작가님이 오해하실 수도 있겠지만 이게 제 스타일입니다. 하도 다양한 사람에게 치이다 보니 오해하려면 해라. 난 나대로 간다 주의죠. 오해야 시간이 지나면 풀리는 거고, 애초에 안 맞는 사람은 잘해도 나빠지기 마련 아닙니까. 딱히 계약 관계라서 그런 건 아니고요.”

현장 경험이 물씬 묻어나오는 말이었다.

오해하려면 해라. 난 나대로 간다.

그 말에 영화 촬영 현장의 노하우가 담긴 느낌이다.

조감독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조감독 생활만 8년째입니다. 입봉 준비도 해 봤는데 두 번 엎어지고 보니까, 감독 아무나 하는 거 아니더라고요.”

“이 대표님과 잘 아시나 보네요.”

“잘 알죠. 그 양반 밑에서 일했으니까. 솔직히 말할까요?”

무턱대고 뭘 솔직하게 말한다고 하는 걸까.

이 대표님에 대해서? 아니면 회사에 대해서?

그가 다시 말했다.

“이 대표님만 믿고 온 겁니다. 다음 작품 입봉 시켜 준다고 했거든요.”

“액션물을 하신다고 듣긴 했습니다.”

“그 시나리오, 작가님이 쓰시는 거 맞죠?”

“예?”

“저 시나리오 쓸 줄 모릅니다. 창작 재능이 전혀 없더라고요. 그런데 최 작가님이 도와주시면 저도 입봉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시나리오야 쓸 수 있죠.”

“최 작가님이 쓰신 이번 작품 보고 감이 왔습니다. 안 그래도 ‘이거 뭐지?’ 해서 대표님에게 물었더니 일주일 만에 쓰셨다고 하더군요. 작가님한테 빨대 좀 꽂으려고 온 거죠.”

말을 마친 조감독이 슬며시 웃었다.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나왔다.

담백하게 속을 털어놓는 사람을 누가 싫어하랴.

“유명한 작가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게 근데… 큰 영화사 프로듀서들이 제가 감독하는 걸 그다지 좋게 생각 안 합니다. 뭐, 찍혔다고 해야 하나? 감독 접고 조감독만 열심히 하라는 소리만 들었으니까요. 작은 회사나 신생에서 입봉 준비해봐야, 또 헛일 될 거 뻔하고.”

조감독 말인즉. 유명하지 않은데 유명작가만큼 글을 뽑아내는 작가와 일하고 싶다는 뜻이다.

유명 작가와 계약하는 큰 영화사에선 오천일 조감독에게 감독 섭외를 안 하니까.

이 대표님에 대한 신뢰가 그 바탕에 있었을 테고.

그때 맥주와 골뱅이가 나와 시원하게 호프를 비웠다.

조감독은 자신이 찍혔다고 말했는데, 실제로 평판이 나쁠 가능성도 있다. 감독 준비하면서 싸움도 좀 했을 것 같고.

하지만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상대적이다.

이런 사람이 내게는 잘 맞는 느낌이니까.

금세 얼굴이 붉어진 오상일이 말했다.

“그런데 정말 조상미 감독 쓸 겁니까?”

“이 대표님이 그러세요?”

“그렇다고 들었는데… 그 감독 성질 모르시나?”

조상미.

대표님이 감독 리스트에 1순위로 뽑은 여자 신인 감독이다. 단편영화제에서 상 받은 계기로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유명 감독의 연출부에 있었다.

조상미 감독은 영화 1편을 찍었는데 흥행이 저조했다. 그뿐 아니라 촬영 현장 분위기도 살벌했다고 한다.

물론 신경질적인 여자 감독의 언행에 짜증 난 스태프들이 헛소문을 낸 것일 수도 있고.

“소문을 듣기는 했습니다.”

“친구가 그 작품 했는데, 소문은 약과라고 합니다. 15년 전에 어떤 여자 감독과 비슷했답니다. 친구가 그러데요. 조상미 감독과 일하면 아주 힘들 거라고.”

스태프들이 특정 감독과는 안 한다고 하면 영화 못 찍는다. 그 여성 감독은 15년 전 작품 이후 다시 영화를 찍기까지 10년이 걸렸다. 평판이 어떻든 그 감독의 영화는 훌륭하다.

조감독이 나섰다.

“촬영감독과 안 좋았던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감독님 입장에선 촬영감독이 뻔한 방식으로 앵글 잡는 게 불만이었죠. 촬영감독이 주도권을 잡으려 한 것도 있고. 그게 쌓이고 쌓였던 겁니다. 서로 간에.”

오상일이 물었다.

“그런데 대표님은 왜 조상미 감독을 쓰려는 겁니까?”

“영화적 재능이 탁월한 감독이니까요.”

어느 한 명의 문제가 아니다. 촬영감독과 스태프들이 여자 신인감독이라고 우습게 봤겠지. 내가 보기엔 영화적 재능과 관행적 촬영의 충돌에서 시작된 일이다.

“이 영화는 여성감독이 찍어야 합니다. 촬영감독은 조상미 감독이 선택할 테고요.”

조감독은 고개를 끄덕였고, 오상일은 호프를 들이켰다.

조감독이 물었다.

“작가님이 여성 감독을 추천하셨나 보네요.”

“아니요. 리스트는 대표님이 작성했습니다. 그런데 저도 대표님 생각과 같아요. 이 영화, 남자 감독이 찍으면 남성의 야릇한 시선으로 영상을 담게 될 겁니다. 여체를 노골적으로 찍으면 여성 관객이 불편해요. 영화 주제와도 맞지 않죠.”

조감독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남자 감독이 찍으면 에로스러울 테니까.”

“여성 감독도 남자 관객을 배려할 겁니다. 같은 콘티로 찍어도 느낌이 달라질 거예요.”

“맞습니다. 여자의 알몸을 찍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나신을 찍을 테니까요. 여자 심리의 디테일도 살 테고.”

“그게 무슨 차인데?”

오상일의 말에 나와 조감독은 웃기만 했다.

내가 여자가 아닌 이상, 시나리오에 표현된 여자의 심리는 여자가 봤을 때 좀 아닐 수도 있다. 고치면 된다.

시나리오와 영화가 약간 달라지는 것은 상관없다. 스토리의 흐름만 깨지 않는다면. 스토리보드 작성 과정에서 디테일한 부분이 만들어지겠지.

제작실장으로서 첫날은 그렇게 골뱅이소면 한 접시에 계란말이 두 접시. 그리고 소주 2병과 호프 12잔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대표 덕분이지만 꽤 괜찮은 조감독을 만났다. 오천일 조감독을 통해 인맥을 만드는 것도 좋다.

조상미 감독의 예를 보아도 영화는 재능만으로 되지 않는다. 사람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사람을 만나야 한다.

내 영화를 찍게 도와줄 사람들을.

* * *

조감독과 제작부 오상일이 합류하면서 내가 담당한 일이 대폭 줄어들었다. 두 사람은 알아서 일을 처리했다. 날 제작실장이 아닌, 작가로 대접하는 터라 제작 일을 몰라도 답답해하지 않았다.

그렇게 5일이 지난 토요일.

회사가 있는 논현동 호프집에서 조상미 감독과 처음 만났다. 세계적인 감독의 애제자로 불리는 그녀도 영화판에 퍼지는 소문을 신경 쓰고 있었다.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으니.

조상미 감독이 들어올 때 코어를 발동했었는데 다행히 적합성 수치가 89%였다. 기대한 것보다 높았다.

“반갑습니다. 조상미예요.”

모인 세 명은 소문 따위는 듣지도 못했다는 듯 반갑게 맞아 주었다. 감독이 당당해 보이기는 했으나 의기소침한 느낌이 없지는 않았다. 차기작 진행이 잘 안 풀렸던 상황 때문일 터다.

조감독이 유연하게 대화를 주도했다. 시시껄렁한 연예계 이야기부터 날씨 이야기, 정치판 이야기까지. 그러다 우리 영화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시나리오 어떻던가요?”

“좋았어요. 저도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이라, 바꿀 것이 있으면 조심스럽게 부탁하려고 했는데, 딱히 수정할 데가 없더라고요. 대사나 동선은 약간 바꿀 데가 있었고요.”

“큰 줄기가 깨지지 않는 선에서 얼마든 바꾸세요.”

“그럼 제가 하기로 하는 건가요?”

“네.”

“전작 어떻게 됐는지는 아시죠?”

“예. 망했죠.”

내 말에 조감독은 피식 웃었고, 조상미 감독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직설적으로 말한 것은 개의치 않는다는 의미다. 그걸 두 사람 다 이해한 모양이다.

소문과 달리 조상미 감독은 자신만 아는 괴팍한 감독이 아니었다. 사회생활을 아는 분이다. 배려할 줄도 알고.

아직 판단이 이를 수도 있겠지만.

“촬영감독님은 생각해 둔 분이 있어요?”

“전화받고 생각은 해 뒀는데… 하실진 모르겠어요.”

좀 전 코어를 발동했을 때 얼핏 본 이름이 있었다.

조상미 감독이 존경하고 함께하고 싶어하는 사람. 우리 영화를 아름답게 찍어줄 분이다. 신생영화사가 계약하기 어려운 분이지만 조상미 감독이 연출하는 작품은 할 가능성이 높다.

“혹시 구민석 감독님?”

“어? 어떻게 아세요?”

“감독님이 박찬익 감독님 작품 스크립터로 있을 때 구민석 촬영감독님과 일했잖아요. 구 감독님이야 조상미 감독님 잘 아실 테고요.”

“이 영화 생각해 보겠다고 하시긴 했어요.”

“그분이 찍어야 합니다. 감독님이 생각하는 미장센을 그분이 그대로 찍어 주실 테니까요.”

“그렇죠. 감독님이 한 미장센하시잖아요.”

조상미 감독이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입에 꿀 발린 소리가 아니다. 박찬익 감독 제자답게 조상미 감독 데뷔작은 영상미가 뛰어나다. 그 영상미 만드느라 현장에서 촬영감독과 싸운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때 톡이 왔다.

[부분 투자는 됐어. 프리 들어가도 돼. 조상미 감독 계약하고 스태프 계약도 진행해. 난 당분간 회사 못 들어간다. 천일이가 알아서 진행할 거야.]

[알겠습니다. 대표님.]

“이 대표님 톡 왔는데 프리 들어가도 된다네요.”

“다행이네. 건배 한 번 하죠.”

조감독이 호프잔을 들자 다들 술잔을 들었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배우 엄아인을 섭외하고 있다고 하자 다들 반겼다. 이유현이 피고인 역으로 고민 중이라고 했는데 조상미 감독이 잠시 생각하더니 좋다고 했다. 나로선 정말 다행이었다.

아내 역할은 아직 찾고 있다고 했다. 신인을 찾고 있으니 일단 내게 맡겨 달라고 감독님에게 청했다.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는데, 감독이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차기작 준비하면서 조 감독에게 마음고생이 있었던 모양이다. 자신의 의견을 딱히 내세우지 않으니. 하기야 자신이 쓴 시나리오도 아닌 작품으로 영화를 찍을 정도면.

어쨌든 드디어 프리 프로덕션에 진입했다.

* * *

감독이 출근한 다음 날부터 업무량이 폭주했다.

감독과 조감독, 그리고 내가 사안 하나하나를 협의하여 결정해 나갔다. 매일 두 차례 이상 회의와 선택이 반복되었다.

연출부. 촬영팀. 조명팀. 음향팀. 미술팀.

녹음. 편집. 음악. 의상. 조연 배우 캐스팅 등등.

결정이 나면 하루에도 몇 차례나 미팅과 계약을 하고, 다시 회의에 들어갔다. 그게 일주일 내내 반복되었다. 스태프들은 한 번 계약하는 거지만, 우린 같은 일을 반복하는 셈이었다.

처음으로 계약한 스태프는 연출부였다.

연출부는 4명인데 각자 할 일이 다 달랐다.

세컨드 중 한 명은 배우와 보조출연자, 의상과 분장 등을 담당하는 인물 담당.

또 한 명은 화면 속 사물을 담당하는 미술 담당이다.

막내는 지금은 온갖 일을 하고 있으나 현장에선 슬레이트를 친다.

그리고 스크립터라는 여자 스태프도 있는데, 이 부원이 감독의 그림자 노릇을 한다. 현장에서 연출과 촬영에 관한 모든 것을 기록하고, 감독이 놓치는 부분을 짚어내야 한다. 이 스크립터가 작성한 기록이 후반 작업 때도 매우 중요한 자료로 쓰인다.

두 연출부 세컨드 중 미술 담당은 제작부원 오상일과 함께 로케이션 헌팅을 가고, 나머지는 촬영 준비 작업을 했다.

연출부 계약 이후로 다른 팀이 속속 합류하기 시작했다.

감독급 스태프가 온 뒤에도 회의가 계속되었다.

영상 전체 회의. 조명 전체 회의. 미술 전체 회의.

사운드 회의. 장비운영계획. 배우 의상과 헤어, 분장.

리허설 일정. 사운드트랙 회의 등등.

주연급이 아직 캐스팅되지 않았으나, 프리 프로덕션에서 미리 해 두어야 하는 과정이었다.

또한, 메인 투자가 지지부진한 터라 대표님도 회사에 와서 업무를 봐야 했다. 엄아인이 안 한다는 말을 아직 하지 않았기에 다른 배우를 만나러 다니진 않았다.

난 일주일에 두 번 서연을 만나 연기를 점검했다.

서연의 연기가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계약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서 그녀의 눈에 걱정이 비쳤으나 웃으면서 연습만 하라고 해 두었다.

서연에게서 걸그룹 가수가 아닌, 아내가 보일 때까지.

일정은 순조로웠으나 회사에 모인 구성원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는 않았다. 남녀 주연의 소속사에서 이렇다 할 말을 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한 번 더 찾아가고 싶었으나 바빠서 나갈 시간이 없었다. 서연은 회사 근처로 찾아왔던 것이고.

대표님과 내가 몇 번 연락했으나 엄아인의 소속사 대표는 자신도 엄아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거짓말이든 사실이든 황당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프리 프로덕션에 들어간 지 한 달이 되었을 때.

내 폰에 모르는 번호 하나가 떴다.

“신성영화사, 제작실장 최신성입니다.”

-아, 저 배우 엄아인 씨 매니저인데요.

심장이 덜컥했다.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연락이던가.

-아인이 형님이 국경의 끝 하신다고 합니다.

“아! 안 그래도 내내 기다리고 있었네요.”

-결정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형님이 만나뵙고 싶다고 하시는데, 실례지만 혹시 오늘 시간 되시는지요?

“괜찮습니다. 저희가 찾아뵙죠.”

-그럼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예. 어디로 가면 됩니까?”

-여기 인왕산인데요. 오셔서 연락 주세요.

“알겠습니다.”

대표님과 감독님에게 소식을 알렸다.

두 분과 함께 냉큼 인왕산으로 달렸다.

드디어 됐다! 드디어!

* * *

나와 감독님, 대표님이 숨을 헐떡이며 오르막길을 올랐다.

엄아인 매니저가 독립문 쪽에서 개미 마을이란 곳으로 오라고 했는데 등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파트 단지를 지나 한참을 오르자 허름한 동네가 나타났다.

70년대 마을에 온 것 같은 풍경이었다. 도로는 잘 포장되어 있으나 산 중턱에 밀집된 집들은 무척이나 허름했다.

“이곳에 달동네가 있는 줄 몰랐네.”

조 감독의 말을 듣고 나서야 달동네에 왔음을 알았다.

벽화도 있고 집들이 오밀조밀한 게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난다. 아파트 단지와는 공기조차 다른 느낌이다.

개미 마을 초입에서 한참을 더 들어갔을 때.

비로소 엄아인을 만날 수 있었다.

청년들이 연탄을 나르고 있었는데 유난히 외모가 돋보이는 남자가 연탄을 쌓은 지게를 지고 오르고 있었다. 그 뒤에는 매니저로 보이는 남자가 있었고.

5분 후에 엄아인이 빈 지게를 지고 내려왔다. 우리 세 명이 다가가자 그가 연탄이 쌓인 다른 지게를 졌다.

“좀 기다려 주시겠어요? 30분 정도 걸립니다.”

엄아인이 그냥 올라가 버리자 이 대표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에겐 일 이야기보다 봉사 활동이 더 중요한 거다.

청년들이 열심히 연탄을 나르는데 구경만 할 수는 없지.

소소한 기지를 발휘했다고 해두자.

점퍼를 벗고 봉사단에게 갔다.

“장갑 하나 주세요.”

내 말에 자원봉사자분이 코팅 장갑을 내밀었다. 연탄을 쌓아 놓은 지게를 지고 나도 엄아인 씨를 따라 올랐다. 셔츠가 금세 시커메졌으나 옷 좀 버리면 어떤가.

결국 이 대표님도 지게를 졌고, 감독님은 봉사자들과 함께 지게에 연탄을 쌓았다.

3명이 합류하자 30분 걸린다던 일이 15분 만에 끝났다.

엄아인 씨가 우리 세 명에게 생수병을 내밀었다.

“괜히 저 때문에 고생하셨네요.”

“내내 봉사 활동하셨던 거예요?”

감독님의 말에 엄아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미국에 있다가 오늘 아침에 왔습니다. 친한 화백이 계시는데 그분이 봉사 활동하기에 한 손 거들었어요. 아, 시나리오는 기내에서 읽었습니다. 동석이가 하도 보라고 해서 그제야 보게 됐네요. 실은 몇 달 더 쉬고 싶기도 해서요.”

엄아인 옆에 선 매니저가 동석이란 사람이다.

얼굴에 연탄 검댕을 칠한 채 웃고 있다.

물을 한 모금 마신 엄아인이 이어 말했다.

“유현 씨가 제가 하면 할 거라고 했다던데요.”

“네? 저희에겐 말씀 없으셨어요.”

그의 매니저가 급히 말했다.

“실은 이유현 씨 매니저가 저한테 자꾸 아인 형님을 꼬셔 달라고 문자를 보내는 통에…….”

이유현이 자기 매니저를 닦달했던 모양이다.

엄아인이 해야 자신도 하고, 그래야 서연도 아내 역할을 할 수 있으니.

엄아인이 환하게 웃으며 넙죽 인사를 했다.

“조상미 감독님.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 세 명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감독님이 확인까지 했다.

“국경의 끝, 하시는 거죠?”

“그럼요. 연탄 배달까지 시켰는데 안 하면 무슨 욕을 먹으려고요. 동석이한테 일정 보내 주세요. 전 봉사단원들과 저녁 먹기로 해서요. 그럼.”

엄아인이 미소를 지으며 봉사단원들에게로 갔다.

나와 이 대표님이 어정쩡하게 인사를 하려던 그때.

엄아인이 뒤를 보더니 다시 걸어왔다.

“혹시 작가님이세요?”

“네.”

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난 뚱뚱한 아저씨라고 생각했는데 젊은 분이셨네요. 혹시… 차기작 예약해도 될까요?”

“예? 차기작요?”

난데없이 훅 들어왔다.

이런 말이 나올 줄이야.

엄아인이 웃으며 말했다.

“막연히 작가님 작품을 하고 싶네요. 이왕이면 정의로운 주인공 역할 좀 부탁드립니다. 악역만 한다고 팬 분들이 뭐라 하셔서요.”

그 말을 끝으로 엄아인은 미소의 잔상을 남긴 채 걸어갔다.

이 대표님이 내 어깨를 툭 치고는 먼저 내려갔다.

감독은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인가 싶은 얼굴로 날 보다가 웃었다.

나야말로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다.

어쨌거나 가장 큰 산을 넘었다.

그런데 왜 날 뚱뚱한 작가라고 생각했을까.

뚱뚱한 아저씨가 치정 스릴러를 잘 쓰는 건가.

하긴 유명 작가들이 살집이 좀 넉넉하긴 하지.

* * *

이 대표님의 차에 올랐다.

차가 출발하자 감독이 물어왔다.

“엄아인 씨도 한다고 했으니 이제 아내 역할 할 사람도 봐야죠. 최 실장님이 꼭꼭 숨겨 둔 신인이 있다던데.”

“예. 오늘 오디션 보러 가죠.”

차가 회사로 달릴 때 서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서연 씨. 오늘 시간 돼요? 오디션 볼까 해서요.]

문자를 보내기 무섭게 답 문자가 왔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네! 그럴게요!]

대표님과 감독님에겐 차마 말을 못했으나 가슴이 벌렁거렸다. 무명작가로 영화계를 배회하던 내가 엄아인을 직접 만나고 캐스팅까지 하다니. 신분이 상승했다고 말하긴 그렇지만 영화판에 제대로 발을 디뎠다는 것은 확실히 체감했다. 한데 엄아인이 내 차기작을 언급한 이유가 뭘까.

감독에게 물었다.

“국경의 끝 시나리오에 무슨 특이점이라도 있습니까?”

“있죠. 뭐라고 할까.”

감독이 한참이나 머리를 굴리더니 입을 열었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 같다고 할까요.”

“생물이요?”

“인위적인 느낌이 들지 않고 유기체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생물에 칼을 대면 어떻게 되겠어요.”

대표님이 불쑥 거들었다.

“죽죠.”

“그거에요. 어디 손 볼 데가 없을까 해서 찾아봤는데 손을 대면 죽을 것 같은 거예요. 그게 뭔지 나도 잘 몰라서 며칠 생각해 봤는데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괜히 건드렸다가 각본 망치면 어쩌나 걱정도 되고.”

대표님이 다시 거들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먼. 조감독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거든. 재미없는 장면은 있어도 필요 없는 장면은 없다고. 다 필요한 장면이라 잘라내면 맥이 끊어지는 겁니다. 이게 묘한 거예요. 편집이 끝난 영화를 그대로 시나리오로 옮겼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내가 최 작가한테 물었잖아요. 외국 영화 베낀 거 아니냐고?”

“아니죠?”

감독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외국 영화 베꼈으면 외국 정서가 있겠죠.”

“하기야.”

두 사람은 의아할 따름이지만 난 시나리오가 왜 그런 것인지 안다. 코어가 추천하는 최적의 전개를 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장면은 애초에 없었다.

씬은 단 한 가지 목적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캐릭터, 배경 설명, 사건 진행, 복선, 미장센에 의한 상징이나 메시지. 그런 게 한 장면에 중첩되어 있다.

재미없는 장면이라도 그 장면에만 캐릭터의 강렬한 특징 같은 게 담겨 있는 거다. 그 장면을 들어내면 구멍이 난다. 캐릭터든 스토리든 장면이 쌓여서 형성되니까.

내 머릿속에서 완벽한 플롯으로 편집된 영화가 활자로 완성되었던 거였다. 여기에 신을 추가하면 사족이 된다.

물론 편집의 다채로움을 위해 한 씬을 여러 방식으로 찍는 건 상관없다. 그건 엄연히 감독과 촬영감독의 몫이고, 내 할 일은 각본에서 다 했다.

* * *

서연이 잔뜩 긴장한 채 사무실에 있었다.

옥상에서 오디션을 보고 싶으나 10월 말이라 서연이 감기라도 걸리면 안 될 일이었다.

난 문쪽에 서고, 대표님과 감독님은 대표님 책상 뒤에 앉았다. 사람이 많으면 서연이 더 긴장할 것 같아서 조감독만 빼고 나머지 스태프는 모두 내보냈다.

서연이 차분하게 서서 집중하고 있을 때 감독의 표정을 슬쩍 봤다. 일단 서연의 외모는 아내 역할에 어울린다고 보는지 날 보곤 살짝 웃어 주었다.

1분 정도 기다렸다.

눈을 감고 한동안 집중하고 있던 서연이 드디어 연기를 시작했다. 언제 시작하나 싶어 감독이 입을 떼려던 직전이었다.

대사도 없었다. 그냥 무표정하게 한 곳을 바라볼 뿐이다.

지나가다가 봤다면 저게 연기인가 싶을 정도로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고, 연기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내 눈에는 보였다.

서연은 근 한 달 사이.

아내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디지털카메라의 작은 화면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스크린에서는 그녀의 눈빛이 보일 것이다.

그 눈빛에 내가 말했던 감정들이 보였다.

눈으로 다층 심리를 표현하는 것. 그냥 관용적인 말이 아니라 서연은 정말 그랬다. 내가 보기엔 감정이 매우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서연만의 특별한 점이다.

“됐어요. 다음 씬도 준비되었나요?”

감독의 말에 그제야 서연이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났다.

서연은 이어 다음 씬을 연기했다.

발성. 발음. 호흡. 당연히 신인의 티가 난다.

한데 그런 기술적 결핍이 정신적 결함이 있는 아내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베테랑 연기자가 일부러 발음이나 호흡을 부자연스럽게 한 것처럼.

발군의 연기력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본 걸 대표님과 감독님도 보았다.

영화판에 20년 있었던 이 대표님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감독님은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서연과 그녀의 매니저가 허리 숙여 인사했다.

감독이 말했다.

“한 가지 당부할 게 있는데요. 지금보다 더 잘하려고 하지 말고, 유지하는 데 신경 써 줘요. 촬영할 때 지금과 달라지면 곤란하니까요. 아셨죠?”

“네. 감독님.”

서연이 다시 몇 번이나 허리를 숙였다. 그러곤 따스한 눈빛으로 날 보다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나가는 그녀를 따라나갔다.

“작가님. 정말 고맙습니다. 저 잘할게요.”

“감독님 말씀대로 지금 상태로 유지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가수 활동에 지장이 되진 않죠?”

“실은 행사 때 웃지 않는다고 혼나긴 했어요. 지금은 안무 연습만 하고 있어서 활동엔 지장 없어요.”

“신곡 작업은 언제쯤 하죠?”

“내년 3월에요. 혹시 촬영도 그때인가요?”

“아마 1월 중순쯤에 촬영할 겁니다.”

“그러면 겹치진 않을 거예요. 신곡 활동은 길어야 3주거든요. 아, 5월엔 대학 축제 행사가 있는데.”

“그 전에 촬영 끝날 겁니다.”

“네. 그럼 연락드릴게요.”

“그래요. 몸 관리 잘하고요.”

서연이 좀 전처럼 온기를 담은 눈길로 날 보고는 걸어갔다.

그녀의 매니저가 날 보는 눈빛도 서연과 같았다.

내가 뭐라고 은인 대접을 받는지는 모르겠다.

스태프가 늘어나자 대표님이 건물 5층에 있는 사무실 하나를 임대했다. 기존 사무실의 3배 크기였다.

그 사무실을 스태프들이 썼고, 회의실도 그곳에 만들었다.

이 대표님이 왜 작은 사무실을 임차했나 했더니, 원래 이런 방식이었다. 처음부터 큰 사무실을 빌리면 비용이 커지기 때문이다.

확실히 사람이 많아지니 회사다운 느낌은 들었다.

제작부 일을 어느 정도는 파악했고, 스태프들이 하는 일도 정확히 뭔지 알고 있었다. 모든 진행이 문서화 되어 내 책상에 쌓였기 때문이다.

스태프들이 듣도 보도 못한 제작실장의 존재에 의문을 표하긴 했으나 내가 초보라는 건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이 뭔가를 보고했을 때 내가 그 내용을 알고 있었으니까.

난 올라오는 문서들을 한 번 쭉 읽어 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복잡하게 얽혀 있던 진행 상황을 코어 능력으로 분석하여 재배치했다. 그때 내 눈앞에 영화 제작 현황이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입체 도표로 떴다.

현 진행과 다음 진행. 심지어 내가 다 기억하지 못하는 수치까지 전부.

연출부가 진행비로 얼마를 썼고, 조연 배우 계약금은 얼마가 들어갔는지. 미팅 날짜와 회의 기록도 뜨고 그동안 쓴 식비와 교통비까지.

도표를 확인한 뒤 코어 능력을 껐다.

코어 레벨이 좀 오른 느낌이다. 이전에는 1분 정도면 두통이 시작되었는데 이번엔 2분이 더 지난 뒤에야 머리가 슬쩍 아파왔다. 레벨 2 정도 되려나.

정보 분석을 한 뒤에는 그 정보들이 완벽하지는 않아도 기억에 남는다. 이 대표님이 내 능력을 알고 실장 직함을 준 게 아닌데 실제로 실장이 되어야 알 수 있는 전체 구조가 보였던 것이다.

물론 진행의 세부사항과 숨어 있는 문제점은 전혀 모른다.

스태프들이 문서로 보고 하지 않은 부분들이다.

이건 경험의 문제다.

다만 이런 식으로 눈에 들어오면 스태프가 영수증을 속이거나, 제작비를 빼돌리면 알아낼 수 있다. 계산이 안 맞으니까.

아직 가짜 영수증을 제출한 팀은 없었다. 민정이가 잡아내기 어려운 부분에서 삥땅을 쳐도 칠 터다. 감독급이 수백만 원을 빼돌리면 몰라도, 스태프 계약금이 박봉이기에 딱히 잡아낼 생각은 없었다.

스태프들이 바쁘게 일하면서 내가 할 일도 상당히 줄었다. 사실 훨씬 더 많아졌으나, 문서를 워낙 빠르게 읽고 전체 상황을 보게 되면서 줄어든 셈이었다.

내 일 처리를 보고 스태프들도 알아서 길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내가 할리우드에 있다가 온 사람으로 볼 지경이다. 그동안 내가 작업한 시나리오가 개발 단계에서 다 엎어졌으니 스태프들을 만날 일이 있어야지.

* * *

“잘 부탁해요.”

“오히려 저희가 부탁드려야죠. 의상 및 헤어 회의를 회사에서 하시겠어요? 담당 팀이 아인 씨에게 가는 게 나을까요?”

“샘플 나오면 메일로 먼저 보내 주세요. 최종 회의는 회사에서 하죠. 감독님들 의견도 들어야 하니까.”

“예.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엄아인과 미팅을 거친 뒤 남자 주연배우 계약을 했다.

그 다음 날 이유현도 계약을 마무리 지었다. 조연 배역은 이미 캐스팅이 완료되었으니 주요 스태프에 이어 배우 계약까지 끝냈다.

미팅할 때 배우들에게 부탁하여 인터뷰도 했다.

인터뷰를 카메라로 찍어 틈이 나는 대로 뭔가를 만들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여 상당히 공을 들였다. 부디 이걸 쓰지 않는 상황이 되길 바라면서.

* * *

그로부터 일주일 뒤.

사무실 회의실에서 스토리보드 회의를 했다. 감독과 스토리보드작가. 헌팅을 다녀온 연출부 세컨드와 스크립터. 감독급 스태프까지 모여 글 콘티부터 짜나갔다.

한데 이 스토리보드 회의에서 감독과 감독급 스태프들의 언쟁이 벌어졌다. 감독이 자기만의 영상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감독이 현 촬영감독과 친한데도 마찰이 생겼으니 생판 모르는 촬영감독이면 오죽할까.

씬별 쇼트 나누기. 쇼트별 테이크 방식. 앵글 위치.

카메라 종류와 이동. 조명의 톤과 위치 등등.

콘티에 촬영에 대한 모든 것이 들어가기에 일일이 다 합의를 거쳐야 했다. 이렇게 합의해 놓고 현장에서 다르게 가면 감독으로선 분노가 치밀 수밖에 없는 거지.

촬영감독도 할 말은 있을 터다. 머리로 만들어 낸 영상과 현장에서 찍어야 할 영상은 엄연히 다르니까.

어쨌든 지켜보는 내 입장에선 회의가 살벌했다.

그 피 튀는 격전이 무려 10일이나 이어졌다.

스토리보드 회의 마지막 날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원래 회의 분위기가 이렇습니까?”

내 말에 조감독이 대답했다.

“사무실에서 영화 한 편을 찍는다고 보면 됩니다. 최대한 효율적으로 짜 놔야죠. 프리에서 공을 들여놔야 나중에 편해집니다. 그래도 현장에서 문제 생기면 멘붕에 빠지는 건 마찬가지긴 해요.”

다들 지쳐 나가떨어지기 직전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스토리보드가 완성되었다.

감독과 촬영감독이 서로 쳐다보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찬바람이 불 줄 알았는데 감독이 손을 내밀자 촬영감독이 그 손을 잡았다. 촬영감독이 껄껄댔다.

“이거… 쉽게 가려다 된통 혼났네.”

“부탁 좀 드릴게요. 감독님.”

“부탁하고 말고가 있나. 콘티대로 찍으면 되는 거지. 나도 부탁 하나 합시다.”

“예. 말씀하세요.”

“스탭 애들. 수당이나 좀 챙겨 달라고 해 줘요. 안 그래도 저예산이라 계약금 적은데, 차기작 계약할 때 이 작품 단가보고 계약금 후려치면 애들만 힘듭니다.”

“예. 저도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 고생하세요.”

가장 연장자인 촬영감독이 수고했다는 눈인사를 하며 회의실에서 나갔다.

조감독이 촬영감독을 배웅하러 따라나갔다.

감독은 스토리보드 작가의 어깨를 주물러 주고 있었다.

“고생하셨어요. 힘드셨죠?”

스토리보드 작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늘 하는 일인데요, 뭐. 다음 작품도 불러 주실 거죠?”

“그럼요. 수고하셨어요.”

스토리보드 작가도 지친 기색으로 인사를 하고는 회의실을 떠났다.

테이블에는 스토리보드 책자가 놓여 있었다.

“이거 확인해 보실래요?”

“잘하셨을 걸로 믿습니다.”

“저도 좀 쉬어야겠어요. 촬영하기도 전에 쓰러지겠네.”

“예. 들어가셔서 좀 쉬세요.”

노숙자가 다 된 감독도 회의실에서 나갔다.

난 회의실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시계를 보니 밤 11시다.

스태프들은 다 퇴근했다. 촬영이 다가오면 스태프 대부분이 하루에 15시간 이상을 일하게 된다. 촬영 현장에선 더할 테고.

지난 10일간 치열한 회의를 보며 제법 감동 받았다. 열정이 있으니 논쟁이라도 하는 거다. 다른 스태프들도 종일 전화하고, 의논하느라 바쁘게 뛰었다. 그 한 명, 한 명의 모습이 가슴에 묵직하게 전해졌다.

돈은 못 벌어도 열정으로 다들 달린다.

이 열악한 영화 제작 시스템을 바꾸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영화관람료 평균 10,000원 중 9,000원이 투자사와 극장사업자에게 돌아간다. 스태프들은 가진 열정이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질 때까지 버티다가 결국 그만두게 된다.

그들이 일한 만큼 받게 할 수는 없을까.

현재 영화 산업 구조상 불가능한 일이다.

신성 영화사만 해도 영세 자영업자 수준이 아니던가.

다른 건 몰라도 스태프 연봉은 바뀌어야 한다.

그러려면 힘을 가진 누군가가 필요하다.

목표를 다시 바꾸었다.

영화계의 제왕이 아닌,

영화판을 바꿀 사람이 되기로.

* * *

스토리보드 책자를 들고 기존 사무실로 갔다.

내 책상에 책자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보았다.

어쩐지 스토리보드가 눈에 밟힌다.

이 콘티를 읽고 나서 영상구현을 해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영화의 흥행 예측은?

한 번 해볼까.

회의실에 홀로 앉아 스토리보드를 보았다.

나무랄 데 없는 콘티였다. 정확히 시나리오대로 짰으며 추가된 장면과 삭제된 장면은 없었다. 또한 시나리오와 달리 눈앞에서 영화를 보는 듯 장면 장면이 선명했다.

내일 앓아누울 것을 각오하고 이 스토리보드를 통해 영상을 구현해 보기로 했다.

영상 구현 시간은 약 2분씩.

두통이 심해지면 좀 쉬었다가 다시 재개하는 것으로.

마음의 준비를 한 뒤 코어를 발동했다.

영화를 찍는 동시에 내 눈앞에서 영화가 시작되었다.

* * *

새벽 4시가 되어서야 영상 구현이 끝났다.

계속 2분 간격으로 코어를 풀로 가동할 때는 두통이 심하지 않았는데 2시간쯤 지났을 때 갑자기 머리가 터질 만큼 심하게 아팠다.

그 바람에 두통약도 먹고, 소파에 한동안 늘어져 있었는데 놀랍게도 갑자기 눈앞에 빛이 터지는 것 같더니 뭔가 달리진 느낌이 들었다.

뇌 일부가 새롭게 깨어난 것 같았다.

무리하지 않고 적절하게 코어를 풀로 가동하자 그 영향으로 뇌활용도가 더 높아진 거였다. 텍스트만으로 정보 분석을 할 때는 각성이 더디게 진행되더니, 풀로 가동하자 급격히 레벨이 오른다. 레벨 2에서 단숨에 레벨 5로 뛴 걸까.

혹시 두통이 잠재된 뇌세포가 자극을 받아서 생기는 건 아닐까. 처음에도 그랬지만 심한 두통 후에 뇌세포 일부가 깨어났으니.

어떤 변화가 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내 머릿속에서 펼쳐진 영화는 정확히 1시간 44분.

그 내용을 토대로 분석에 들어갔다.

놀랍게도 꽤 넓은 범위로 확장했는데도 5분 이상 분석을 할 수 있었다. 통증이 오면 잠시 쉬었다가 중단한 부분에서 다시 전개. 또 머리가 아프면 쉬었다가 다시.

그렇게 아침 7시가 다 되어서야 분석을 끝냈다.

두통 없이 코어를 가동할 수 있는 시간이 확연히 늘어났다. 더 놀라운 건 중단했던 정보 분석을 이어서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건 원래 할 수 있었는데 그동안 몰랐던 것뿐이었다.

분석한 정보를 다 떨쳐 버리는 것이 아니라 확장만 멈추고 일시중단하는 것. 일종의 Pause다.

머릿속에서 정보가 대량으로 확장된 상태로 중단되었을 때는 머리가 아프지 않다. 다시 정보가 늘어나기 시작하면 그때 뇌활용도가 높아지면서 두통이 발생한다.

이런 식으로 중단과 확장을 반복하다 보니 광범위 정보 분석을 끝낼 수 있었다.

코어 능력이 낮았을 때는 못했던 일이다. 그랬기에 이제야 알 수 있었던 거고.

분석 자료는 이러했다.

영화의 작품수준. 흥행성. 관객 예상 반응. 현 관객의 선호도. 목표 관객층. 영화계의 흐름. 예측 개봉관 수. 예상 흥행 수익. 배우들의 연기력. 영화의 참신함. 영화사적 의미 등.

코어가 영화 자체 분석과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 수집. SNS에서 언급되는 글과 댓글까지 모두 총합하여 결론을 내렸다.

어떤 원리인지는 몰라도 코어가 인터넷 혹은 무선 통신과 연결되는 것은 확실했다.

그 분석 결과가 차례로 떴다.

제작비 약 35억. 마케팅 비용 약 25억 -> 총제작비 60억.

예상 관객 수 약 550만.

흥행 수익 -> 약 550억.

극장 수익(영화발전기금 + 세금) 50% 공제 후 -> 275억.

배급사 수수료 10% 공제 후 -> 247억 5천.

메인투자사 관리비 2% 공제 후 -> 247억 50만.

총 제작비 60억 공제 후 -> 187억 50만.

투자사 순수익 60% -> 112억 2천30만.

제작사 순수익 40% -> 74억 8천20만.

부가 판권 수입 -> 약 20억.

부가 판권 수입 제작사 배분 -> 약 8억.

5단계 정산 시 제작사 순수익.

82억 8천20만.

헐! 소리가 절로 나온다.

구멍가게 수준으로 차린 영화사 수익이 약 82억이다.

550만 관객은 저예산 영화로선 초대박이다.

관객 수와 흥행 수익이 같지는 않을 테고.

영화사는 맨몸으로 발로 뛰어 대박을 냈다고 하지만, 투자사는 앉아서 엄청난 수익을 냈다. 부분투자사만 해도 10억을 투자해서 20억 가까이 벌었으니.

영화사 수익 80억은 대표가 다 가져가는 것은 아니다.

손익분기 후 계약에 따른 배우와 스태프의 수익 배분. 사무실 임대 비용. 스태프 식비 및 진행비. 직원 월급 등으로 처리된다.

제작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투자금에서 사용하면 예산이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투자금을 쓰긴 하지만 그 마이너스 비용을 정산 후 수익금으로 처리하는 거다.

따라서 회사가 벌어들일 예상 순수익은 대략 40억.

차기작 준비도 거뜬하고 기반도 다지는 액수다.

영화사가 늘 이런 이익을 얻긴 어렵다. 영화 한 편하고 말 게 아니니 평균 타율이 중요하다. 위험한 사업이지만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것은 맞다.

그 위험도만 낮춘다면 작품마다 장타를 날릴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영세 영화사가 대형 영화사로 발돋움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서너 작품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또 하나.

부가판권 수익.

일반 영화의 부가판권 수익은 약 10억이다. 그것도 최근 IPTV 시장이 커져서 그렇다. 한데 우리 영화는 두 배다. 그 이유는 아마 노출 영화이기 때문일 터다. 코어가 그런 점까지 읽어 냈다는 것 아닌가.

어쨌든 놀라운 분석 결과였다.

이러니 투자자들이 쌈마이들에게 혹하는 거지.

영화 하나 대박 나면 수익률이 어마어마하다 보니.

두 가지를 배웠다.

하나. 제작사가 자기 돈을 투자하면 안 된다는 것.

제작사가 돈을 쓰지 않아도 수익이 발생했으니까. 투자사 몫으로 들어가는 수익이 꽤 크지만 망할 경우를 생각하면 투자받는 게 훨씬 낫다.

둘. 영화는 정말 비즈니스다.

투자자들에게 감독이나 작가는 돈을 벌게 해 주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점을 여실히 느꼈다. 이러한 점을 제작을 배우면서 처음 체감했다. 그동안 우물 안에 갇혀 글 쓰느라 아등바등했던 게 우스워질 정도로.

그렇게 내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어? 회사에서 밤새셨어요?”

“정리할 게 좀 있어서.”

출근한 민정이가 놀란다.

소파에 늘어져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실장님 눈이 엄청 충혈됐어요. 어디 아프세요?”

“괜찮아. 나 찜질방 가서 한 3시간 있다가 올게.”

“네. 무리하지 마세요. 촬영 들어가기 전에 쓰러지시겠다.”

“걱정 마.”

찜질방에 가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뒤 눈을 붙였다.

깨어나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다시 출근했다.

일이 약간 밀려 있었으나 퇴근 시간까지 충분히 정리할 수 있는 분량이었다. 코어를 풀로 쓰면 쓸수록 발달한다는 점을 알아낸 이상, 한 단계 더 올려 보리라 생각했다.

오후 7시에 이른 퇴근을 한 뒤 회사 근처 모텔 방을 잡았다. 캔 맥주 한 박스와 피자 한 판도 준비해 두었다.

그러곤 주식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주식 종목을 분석해서 한 달 후의 결과를 보는 거다.

일단 엔터테인먼트 한 종목의 분석에 들어갔다.

해당 기업과 관련한 모든 정보를 수집해 나갔다.

3개월에서 3년간의 주가 그래프. 일봉, 주봉, 월봉.

재무 정보. 매출. 공시. 주가수익비율. 기업 순자산.

주가순자산비율. 주당순이익. 자기 자본 이익 지표.

관련 뉴스. 소속 연예인의 동향과 사건 사고.

현재 사업 동향. 소속 신인과 신규사업의 가능성.

직원의 SNS. 직원 고용 상태와 회사 분위기.

한류 동향. 중국 정부 정책과 비공개 지침.

게다가 기업과 연예계와 관련한 찌라시까지.

종목 하나 분석하는 데 걸린 시간은 5시간.

Pause를 걸고 쉬지 않았다면 30분이면 끝났을 터다.

첫 번째 결과는 만족스러우면서도 허탈했다.

PNC엔터. 현 주가 10,900원.

3개월 후 주가 8,800원. 6개월 후 7,900원.

하락 후 답보. 주가 상승은 미궁.

소속 그룹이 발표할 신곡이 어떤 성과를 내느냐에 따라 주가가 갈릴 텐데, 그 점은 코어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아니 예측했을 수도 있다. 신인그룹의 반응은 그냥 그렇고, 소속 아티스트들도 전반적으로 활동과 인기가 주춤한 상태였으니.

중국발 악재 때문에 다른 엔터 종목도 비슷했다.

다만 획기적인 신인을 키우고 있는 회사는 주가가 오른다.

그런 회사도 상승 후 답보라 투자 가치는 높지 않았다.

* * *

첫날 분석은 이것으로 마무리했다.

이후 매일 퇴근 후 모텔에 투숙해서 하루에 한 종목씩 분석했다. 종목 분석도 하고, 업종 분석도 하고.

주식 시장과 증권 정보 전체 구조를 한꺼번에 보면 좀 더 분명하고 확실해질 것 같았다. 그 정도가 되려면 100레벨은 되어야겠지. 아마 그 수준이면 한 국가의 사회 전체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걸 꿰뚫어 보고 있을 테니.

그쯤 되면 거의 신급 아닌가.

후덜덜하네 정말.

사실 그 정도 수준이 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그런 신 혹은 괴물이 되고 싶진 않다. 지금 단계에서도 시간만 들이면 나 하나 잘 먹고 잘 사는 데 문제없으니까.

* * *

그렇게 13일이 지난 후.

단기 상승 10종목. 장기 상승 3종목을 골랐다.

전 세계에 일어나는 이런저런 사건과 유행. 시장 변화 예측. 기업이 개발하는 아이템과 은밀히 추진하는 사업. 아직 그 누구도 분석하지 못한 흐름. 향후 세상을 주도하게 될 사업 등등.

그런 것들을 코어가 찾아낸 것이다. 사내 기밀이나 기업 직원의 SNS 내용도 있었을 것 같은데 확인할 수는 없다.

2주가량 주식을 분석하다 보니 정보와 지식이 머릿속에 쌓여서 나름 주식 전문가가 되었다. 그냥 있을 때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코어를 발동하면 분석했던 정보는 대부분 기억이 났다.

한번 분석한 정보는 사라지지 않으니 신규 정보나 변수만 분석하면 되었다. 같은 종목을 두 번 분석할 때는 두통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결과가 나왔다.

그리하여 13일째에 다시 한 번 점검한 뒤 최종 13종목을 선택했다. 두 번 분석해도 같은 결과가 나왔으니 확실했다.

앞으로 돈이 생기면 단기 상승 종목에 먼저 투자한다.

예측이 맞는지는 한 달만 기다리면 된다.

들어맞는다면 내 인생이 또 달라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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