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장 강렬한 인연 (3/56)

제3장 강렬한 인연

대형 배우 기획사인 트윈 브라더스.

배우만 있는 기획사였다. 배우들에게 서열을 매길 수는 없지만 한국 4대 연기파 배우 중 한 명이 있는 곳이다.

송강석의 HIM 엔터테인먼트.

김윤호의 트윈 브라더스.

황정우의 엉클컴퍼니.

하정민의 판타스타.

꽃미남 배우와 톱스타가 속한 회사도 많지만 현 영화계에서 현역 최고로 꼽는 배우들이다. 지금 가장 인기가 많은 배우라도 경력이나 흥행 성적을 따지면 이 네 배우는 군말 없이 최고로 쳐준다.

이 대표님과 난 배우 김윤호에게 책을 넣어 볼 생각이었다. 워낙 큰 배우라 저예산 영화를 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일에 순서라는 게 있기 때문에 우선 찔러 보는 거다. 대배우가 가끔 작은 영화를 하기도 하고

회사로 들어가자 안내를 해 주는 여직원이 있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대표님 좀 뵈러 왔습니다. 영화사 신성의 기획 프로듀서, 이갑성이라고 하면 아실 겁니다. 어제 연락 드렸고요.”

“잠시만요.”

여직원이 전화를 걸어 몇 마디 듣더니 웃어 보였다.

“지금 대표님은 안 계시고요. 본부장님께서 만나 보시겠다고 하시네요. 7층으로 가시면 됩니다.”

대표님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복도와 엘리베이터에 소속 배우들의 사진이 여럿 붙어 있었다. 영화 일을 하면서 연예기획사에 온 것은 처음이다. 배우가 회사에 출근할 일이 없다고 듣긴 했는데, 로비에도 복도에도 배우는 안 보였다.

7층 복도 우측에는 사무실이, 좌측에는 임원 사무실과 회의실 등이 늘어서 있었다. 가장 끝에는 대표실이 있었고.

우린 매니지먼트 본부장 명패가 붙은 사무실에 노크하고 들어갔다.

50대 남자가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이 실장님.”

“예. 좀 쉰다는 게 너무 쉬었네요.”

기획사 본부장과 이 대표님이 친한 척하며 악수했다.

두 분이 10년 전부터 아는 사이였던 모양이다.

난 끼어들 위치가 아닌 듯해서 눈인사만 하고 대표님 옆에 앉았다.

본부장과 이 대표님은 이전에 함께 일했던 일화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 뒤로 요즘 중국 때문에 엔터 사업이 안 좋다는 둥, 신인을 띄워야 하는데 마땅한 작품이 없다는 둥 이야기가 길어졌다.

20분이 지나서야 본부장이 본론을 꺼냈다.

“시나리오는 잘 나왔습니까?”

“저희는 일단 만족스럽습니다. 읽어 보시겠어요?”

“책은 우리 직원이 읽어 볼 겁니다. 우리 회사에 온 건 윤호 씨 때문인 거 같은데… 윤호 씨가 요즘 꽂힌 작품이 하나 있어서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해명 씨는 어때요?”

“지금 예능 하시지 않나요?”

“그거야 뭐, 이 주에 한 번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 영화는 어떤 내용인데요?”

“치정 스릴러입니다.”

그 말을 듣고 본부장의 미간에 찌푸려졌다.

“요즘 애들은 그런 거 안 보는데.”

“대박은 어려워도 중박 이상은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연기를 돋보이게 한 시나리오라 소속사 배우분들이 보시면……”

“해명 씨가 치정극에는 좀 그렇지 않을까요? 게다가 신생 제작사라면 투자도 어려울 텐데.”

“투자사 쪽에는 제가 아는 분들이 좀 계십니다. 해명 씨도 이번 기회에 연기 변신할 수 있고요.”

두 분이 대화하는 동안 본부장 사무실에 붙은 남자 배우들의 면면을 살폈다. 최고는 김윤호이고, 그다음은 유해명이다. 그 외에는 배역에 안 어울리는 젊은 배우이거나 조연급이다. 유해명도 우리 영화에 어울리지 않고.

어쩔 수 없이 다음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대표님이 뽑아 놓은 리스트에 네 명이 있었다. 차기작을 선택하지 않은 배우 중에 배역에 어울리는 이들이다.

엄아인. 류승렬. 차성원. 송현주.

이 중 우리 영화와 가장 잘 맞는 사람은 엄아인이다. 나이가 조금 젊지만 젊은 변호사로도 가능하다. 상대 여배우는 엄아인 씨 나이에 맞추면 되고.

사실 김윤호 배우는 언감생심 꿈도 안 꿨다. 김윤호 씨가 본 시나리오라는 소문이라도 나야 하기에 왔을 뿐이다.

김윤호가 검토한 시나리오라는 말이 나오면 다른 배우들이 관심을 보일 테니까. 유해명 씨는 아무래도 아닌 것 같고.

사진을 보다가 코어 능력을 발동했다.

김윤호나 유해명 사진을 보면 뭔가 뜨나 싶어서.

뜨긴 떴다. 두 배우에 대한 정보를 제거하고, 우리 영화와의 인연이나 연관성을 보려고 했다. 장점은 연기력 하나 일 뿐이고 단점은 크게 부각되었다. 그 단점이란 에로티시즘의 영상미와 두 배우의 외모가 전혀 안 맞는다는 것.

즉, 몸매 좋고 잘생긴 연기파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대표님. 엄아인 씨로 가야 해요. 그분 지금 쉬고…’

두 사람의 대화 중에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말을 하던 이 대표님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대표님이 당황한 얼굴로 날 본다.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그분도 좋지. 좀 젊기는 하지만.”

“예?”

대표님이 본부장의 눈치를 살폈다.

한데 본부장은 지금 무슨 말을 하느냐는 표정이고.

뭐지? 방금 내 속말이 들렸던 건가.

혹시나 싶어 입을 가리고 속으로 말했다.

‘김윤호 씨도, 유해명 씨도 아니에요. 아저씨 몸매로는 유려한 영상이 나올 수가 없으니까요.’

“그렇긴 하네. 근육을 만들어도 좀 어색할 것 같고.”

이런!

설마 했던 것이 맞았다.

코어 능력을 발동한 상태에서 대상을 향해 속으로 말하면 상대의 머릿속에 들린다.

본부장은 아직도 대표님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은 얼굴로 보고 있다.

텔레파시 능력도 있었나.

뇌파, 혹은 뇌세포의 확장으로 초능력 같은 게 발생한 것 같다. 하기야 정보 분석도 초현실적인 능력이긴 하다만.

뇌의 영역이 무한하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과거 할리우드 영화에서 뇌를 100% 활용하면 어떻게 되는지 본 적도 있고.

또 다른 숨은 능력이 있는 건 아닐까.

슬슬 무서워지기까지 하네.

아무튼 이 자리에 더 있을 필요가 없다.

‘대표님. 이제 가죠.’

“그, 그럴까.”

대표님이 본부장 눈치를 보며 일어났다.

본부장도 의아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이 실장님 좀 이상하시네. 아까부터 자꾸 혼잣말하시고. 바쁘신 거 같은데 책은 1팀장 책상에 두고 가세요. 책이 좋으면 윤호 씨가 할 수도 있으니까.”

“예.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대표님과 함께 본부장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곤 사무실에서 나갔다. 대표님의 얼굴이 복잡했다. 왜 그런지는 알 만했다. 엘리베이터를 타자 대표님이 말했다.

“본부장 앞에서 다른 회사 배우를 언급하면 어떡하나. 게다가 김윤호와 유해명은 이 회사 간판인데 대놓고 아저씨 몸매라고 하질 않나.”

“죄송합니다.”

“본부장이 오만하게 나와도 참을 줄 알아야지. 그 양반이 사람이 좋으니 웃고 넘겼지, 다른 회사 임원은 다음부터 보지 말자고 했을 거야.”

“조심하겠습니다.”

이 대표님은 내가 젊은 혈기에 욱한 것으로 본 것 같다. 본부장이 화를 내지 않았으니 이 정도로 하고 넘어가는 거겠지. 본부장에겐 들리지도 않았지만.

기획사에서 나가 대표님의 낡은 차에 올랐다.

“엄아인이 몇 살이지?”

“서른한 살일 겁니다.”

“그나마 이십 대가 아니라 다행이구만.”

“엄아인이라면 서른 후반도 소화할 겁니다. 좀 더 젊은 여배우로 하면 맞출 수 있을 거예요.”

“젊은 여배우가 노출 연기를 하려고 할까? 신인이면 몰라도. 피고인 역할은 연기가 돼야 하는데.”

“노출한 적 있는 연기파도 있죠.”

“누구?”

“이유현요. 현재 28세고요.”

“오, 이유현!”

시대물에 나와 강렬한 연기를 선보였던 배우다.

그 영화의 여주인공이었던 임주연도 좋다. 27살이니 나이도 적당하고.

제대로 된 배우를 잡지 못하면 아름다운 영화가 아니라 야한 영화가 되고 만다.

대표님이 어떻게 생각하든, 이 세 배우 중 한 명은 반드시 캐스팅하기로 마음먹었다.

* * *

이 대표님과 함께 배우 엄아인의 소속사에 갔다.

배우가 외국에 있어서 만날 수 없었다. 엄아인의 소속사는 대형회사가 아닌 데다 이 대표와는 안면도 없어서 실장이라는 매니저에게 책만 주고 나왔다.

그 뒤 낚시를 하는 심정으로 여러 회사를 거쳤다.

우편으로 보내면 바로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확률이 높기에 우선은 매니저에게 책을 전달하고, 그것도 안 되면 안내데스크에 맡겼다.

소속사 14군데에 책을 접수한 뒤 대표님과 헤어졌다.

대표님은 투자사에 문서를 보내기 위해 회사로 돌아갔다. 일주일 후부터 엄청나게 바빠질 거라는 엄포를 내리셨는데, 그게 어느 정도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남아서 커피전문점에 들어가 여배우를 검색했다. 바빠지기 전에 미리 캐스팅을 알아볼 셈이었다.

두 여배우가 안 된다면 차선책이 있어야 한다.

관능적인 몸매에 야릇한 눈빛을 가진 여배우.

그녀의 이름을 모르다가 검색을 해서 찾아냈다.

이얼.

사진을 보니 팜므파탈의 느낌이 상당히 강했다. 나이도 배역 나이와 같다.

엄아인보다 연상은 나쁘지 않다.

고혹적인 여자가 자신이 최고인 줄 아는 남자를 정신적으로 지배해야 한다. 나아가 가지고 노는 뉘앙스가 있어야 한다.

남주 엄아인. 여주 이유현 혹은 이얼. 아내 임주연.

무명 시나리오 작가 주제에, 아직 영화사 제작실장 노릇도 못하는 상태지만 대범하게 가기로 했다.

이전의 나였다면 그럴 용기도 못 냈을 테지만, 코어 능력이 생긴 후로는 무서울 게 없었다.

남자는 무기가 생기면 달라지는 법!

이유현의 SNS를 훑어 보았다.

배우들은 소속사에 가질 않으니 집에 있거나 동료나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기 마련이다.

이유현은 스타그램을 주로 했는데 마지막으로 올린 사진이 가로수길 카페였다.

그동안 올린 사진을 보니 자주 가는 카페였다. 함께하는 이들은 친구이거나 동료 배우다. 임주연도 있었다.

일단 이유현과 이얼, 임주연의 스타그램을 모두 찾아 팔로우한 뒤 새 사진이 올라오기 기다렸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하기로 했기에 일요일까지는 기다려 볼 참이었다. 매니저를 통하면 만나 주질 않을 테니.

* * *

다음 날 오전.

아끼는 옷을 입고 가로숫길로 향했다.

이유현이 즐겨 가는 카페의 맞은 편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서울에서 9년을 살았지만 강남에 놀러 온 것은 한 손에 꼽을 정도다. 이 가로숫길은 처음 왔다.

평일인데도 오가는 미녀들이 많았다. 혹시 브런치라도 먹으러 올까 싶어 기다렸으나 이유현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 날, 그 다음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넷째 날에도 같은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는데 이유현의 사진이 올라왔다. 가로숫길에서 멀지 않은 신사동의 카페였다. 그 카페도 그녀의 단골집이다.

그 카페로 달렸다.

제발 아직 카페에 있으라고 기도를 하면서.

* * *

세 여자가 카페 테라스에서 브런치를 즐기고 있었다.

등을 돌린 여자부터 보였다. 트레이닝복 차림에 머리를 질끈 묶은 모습. 그 여자 맞은편 왼쪽에는 모델로 보이는 늘씬한 미녀. 오른쪽엔 가죽 재킷을 입은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가 이유현이었다.

막상 이유현에게 다가가자니 용기가 안 났다.

배우는 배우였다. 화장을 안 해도 빛이 났으니.

바로 다가가면 극성팬으로 오해할까 봐 일단 카페에 들어가 파스타를 주문하곤 시나리오 책을 꺼냈다.

먼저 날 의식한 사람은 모델로 보이는 여자였다. 내가 보고 있는 시나리오 때문이다. 트레이닝복을 입은 여자는 내게서 등을 돌린 상태였고, 이유현은 날 힐끔 보긴 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모델로 추정되는 여자만 주로 말하고 두 여자는 반응만 보이며 듣기만 했다. 그러다 날 두고 하는 말이 들렸다.

“저 남자, 영화 하는 사람인가 봐. 내가 말 걸어 볼까? 언니 새 작품 찾고 있잖아.”

“네가 관심 있는 건 아니고?”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히히.”

뇌 활용도가 높아져서 그런지 귀에 들렸다.

어떻게 되나 싶어 코어를 발동했다. 잡다한 정보는 걷어치우고 이유현이 우리 영화가 맞는지만 확인했다.

역시 예상대로 피고인 역할에는 적역이었다.

그런데 코어가 이유현의 생각까지 읽는 모양이다.

노출 영화는 더는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정보 분석으로 나타났다. 차기작으로 다른 작품을 거의 결정한 마음도 전해졌고. 이 상태로 노출 영화를 제시하면 틀림없이 거절이다.

나흘간 기다린 보람이 없었다.

바로 자리를 뜰까 하다가 모델로 보이는 여자를 살펴보았다. 연기가 하고 싶으나 재능이 없다고 믿는 여자였다.

등 돌리고 앉은 트레이닝복 차림의 여자도 보았다.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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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미상.]

[나이 : 25세.]

[키 : 167cm] [몸무게 : 49kg]

[인상 : 따뜻함과 차가움이 공존]

[성격 : 털털함. 내숭. 낯가림.]

[몸매 : 적당한 S 라인. 유난히 긴 다리.]

[재능 : 창의적인 표현력. 예술적 감각.]

[아내 역할 : 92%. 매우 적합.]

[이력 : 연예인.]

[능력 : 추정 불가.]

[……]

【최종 분석 : 매우 강렬한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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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분석을 그냥 뒀더니 최종 분석까지 떴다.

아내 역할에 92% 적합하다는 분석에 한 번 놀라고, 나와 매우 강렬한 인연이라는 최종 결과에 더 놀랐다.

그만큼 나와 인연이 있으니 잡아야 한다는 말인데.

대체 누구기에? 얼굴을 보긴 했는데 배우는 아니었다.

정보 분석 결과 이유현은 여배우라고 떴으니까.

내가 이유현을 알고 있으니 배우라고 뜬 것도 있지만.

내 표정이 희한했나 보다.

날 보던 모델이 눈치를 주자 그녀가 날 바라보았다.

이번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야구모자를 쓰고 화장도 안 했지만 정말 예뻤다.

이유현의 미모가 부족해 보일 정도로. 어디서 본 것 같기는 한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화장을 안 해서 그런가.

그 여자는 날 한 번 보고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아내 역의 배우를 찾았다는 기쁨보다는 이상형을 발견한 듯한 설렘이었다.

영화 일을 하면서 여배우와 사랑에 빠지는 망상을 한 적 있다. 코어 능력이 생기면서 그게 헛된 꿈은 아니라는 생각도 했다.

톱스타와 감독의 사랑. 얼마나 멋진가.

어쨌든 판단하기 어려운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

내가 배우가 될 재목을 찾아서 그런 건지. 매우 강한 인연을 만나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단지 미모에 반해서 그런 것인지.

코어를 통해 그 인연이 무엇인지 분석해 보려다 멈췄다.

그녀에게 대한 선입견이 생길까 봐. 혹은 내 감정이 코어의 결과에 휘둘리게 될까 봐. 다른 건 몰라도 내 감정의 영역에 코어를 동원하진 말자. 감정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니까.

트레이닝복 여자는 분석대로 25살로 보였다.

그럼에도 92%로 뜬 건 왜일까. 동안인가.

세 여자는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자신들을 보는 날 수상쩍어했다. 카페에서 나갈 기미까지 보이자 마음이 급했다.

“저기요!”

뜬금없이 고함을 지르는 꼴이 되고 말았다.

당황하고, 마음은 급하고, 이런 식으로 미인들에게 접근한 적이 없던 터라 오버했다.

심장은 쿵쾅거리고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여자 앞에서, 여배우 앞에서도 이런 적이 없는데 오늘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세 여자가 저마다 다른 얼굴로 날 보았다.

불쾌한 표정. 황당한 표정. 아무 생각 없는 표정.

탁자에서 일어나 걸어갔다. 행여나 날 치한으로 볼까 봐 한껏 미소를 담은 채 조심스레 그녀들 앞에 섰다.

“저… 유현 씨. 사인 좀.”

내 말에 세 여자가 피식 웃고 말았다.

급히 주머니에서 펜을 꺼낸 뒤 시나리오 뒤쪽 백지를 펼쳐 내밀었다.

이유현이 거절하기도 뭣했는지 사인을 해 주곤 웃어 보였다. 유현 배우는 인성만큼은 좋은 거 같다.

그 사인이 적힌 페이지를 북- 하고 찢었다.

내 행동에 세 여자가 또 놀랐다.

난 이유현이 사인한 페이지를 서류 봉투 안에 소중히 넣어 담았다.

사인해 달라는 말이 나온 건 코어 능력이 발동한 결과였다. 세 여자의 경계를 풀 수 있는 추천 행동.

아직 코어를 끄지 않았거든.

그러곤 시나리오를 트레이닝복 여자에게 내밀었다.

내 행동에 세 여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트레이닝복 여자가 입을 열었다.

“저도 사인해요? 저, 아세요?”

“모릅니다.”

그 말에 두 여자의 표정은 굳어졌고, 트레이닝복 여자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유는 전혀 모른다.

“그럼 왜?”

“아내 역할을 맡을 배우를 찾고 있었어요. 그쪽이 가장 잘 어울릴 거 같아서요. 이 시나리오 가져가셔서 읽어 보셨으면 합니다.”

“배우요? 제가요?”

얼떨결에 책을 받은 트레이닝복 여자는 매우 당황했고, 두 여자의 안색은 금세 풀렸다. 두 여자의 시선이 흡사 동쪽에서 나타난 귀인을 보는 것만 같다.

내 정체와 영화사의 현실. 투자도 안 된 영화 진행 상황을 알면 날 두들겨 팰지도 모른다.

이유현이 물었다.

“어느 영화사에서 일하세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세 명에게 한 장씩 주었다.

“신성영화삽니다. 앞으로 영화계의 신성이 될 겁니다.”

세 여자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에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 * *

세 여자는 오늘 여유가 좀 있었다.

이유현이 트레이닝복 여자를 도울 생각인지 그녀가 주도하여 커피전문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물론 영화사에 내 이름과 직급을 물어본 뒤였다. 전화는 민정이가 받았고.

영화사 직원인 것보다 내가 시나리오 작가인 점이 이유현에게는 더 안심되는 모양이었다.

표정이 달라졌다. 모델은 시종 웃고 있었고, 트레이닝복 여자는 어째 불안한 기색.

네 명이 어색하게 원탁에 둘러앉았다.

“이거 잠깐 봐도 돼요?”

“네.”

이유현이 트레이닝복 여자가 들고 있던 시나리오를 펼쳐 보았다. 기획안부터 읽어 나갔다.

조마조마하는 심정으로 지켜보았는데 책을 읽는 이유현의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읽는 척을 하는 건지, 노출 영화라 언짢은 건지. 순진한 동생이 노출 영화를 찍는 거라면 바로 거절할 태세다. 다행히 아내 역할은 노출이 없다.

대충 읽다가 내려놓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이유현이 계속 페이지를 넘겼다. 그녀가 책을 읽는 사이 나머지 3명은 여전히 어색한 얼굴로 커피만 홀짝거렸다.

모델이 물었다.

“새로 생긴 영화사죠?”

“네. 대표님이 영화계에서 20년 넘게 계셨던 분이세요.”

“와, 그러면 인맥이 장난 아니겠다.”

“그럼요. 저 같은 사람을 고용했으니까.”

모델이 피식 웃었다.

이유현은 듣지도 못했는지 책 읽기에 바쁘고, 트레이닝복 아가씨는 내 명함만 만지작거린다.

“그쪽도 여배우 맞으시죠?”

트레이닝복 아가씨가 입을 떼려다 멈췄다.

솔직히 말해야 하나, 아니면 그렇다고 해야 하나 망설이는 표정. 영화를 하고 싶은 열망이 있기는 했는데 잘할 수 있을까 두려운 감정도 보인다. 솔직히 말했다가는 오늘 일이 한낮의 소동극으로 끝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결국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 걸그룹 제니스 멤버예요. 서연이라고…….”

“제니스? 아! 5인조 걸그룹?”

“맞아요.”

트레이닝복 아가씨가 알아봐 줘서 고맙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그룹의 지명도가 낮다는 점에 쓸쓸해 보이기도 했고.

내가 잘 몰라서 그랬는지, 서연이라는 여자가 제 입으로 설명하기가 그랬는지 모델 아가씨가 나섰다.

“제니스 데뷔 3년 차예요. 소속사가 힘이 별로 없어서 그렇지 얘네 실력은 진짜거든요. 그런데 얘 연기 전공한 건 어떻게 아세요?”

“그냥 제가 감이 좀 있습니다.”

“역시 작가님은 좀 다르나 보다. 서연이 예고에서 연기 전공했고, 연습생 때도 연기 수업받았거든요. 아, 서연이 원래는 대형 소속사에 있던 애예요. 데뷔는 다른 회사에서 했지만.”

“원래 연기자가 되려고 하신 겁니까?”

서연이 대답했다.

“아니요. 대형 기획사에선 연기 수업도 해요. 그 회사 있을 때 최종 데뷔에서 탈락했어요. 보컬도 좀 약하고 나이도 다른 연습생보다 좀 많은 스물두 살 때라. 그 회사에선 데뷔가 어려워서 다른 회사로 옮겼어요. 바로 데뷔할 수 있는 걸그룹이 있다고 해서 옮긴 건데…….”

말을 흐리는 서연의 얼굴에 후회가 스쳤다.

바로 데뷔한다고 다 좋은 게 아니었다는 후회.

대형기획사에 계속 있었어도 후회했을 것 같다.

모델이 불쑥 나섰다.

“그런데 아내 역할을 하기엔 서연이 좀 어리지 않아요?”

“몇 살이신데요?”

“25살요.”

분석이 정확했다.

아내 역할은 20대 후반에서 서른 초반이 해야 한다.

코어 능력이 서연을 선택한 것은 아마도 처연한 눈빛 때문인 것 같다.

현재 그녀가 처해 있는 상황. 미래가 불안한 심리 상태. 데뷔 3년 차인데 아직도 무명에 가까우면 돈도 못 벌고 있겠지. 수익이 안 나면 그룹이 해체될 테고.

극 중 아내의 복잡한 심리와 통하는 면이 있었던 거다.

내 뇌가 그녀의 표정과 눈빛을 보고 판단한 것 같다.

이 상황에서 연기로 전향하면 기회가 된다.

이유현과 모델 아가씨가 반색했던 이유다.

걸그룹 출신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잘 모르니 신인배우로 적합한 사람이긴 하다. 나이가 좀 들어 보이게 분장하고 엄아인만 캐스팅된다면 둘은 잘 어울린다. 아내 역할은 고도의 연기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런데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

시나리오를 쓸 때 두 여자가 동지가 된 이유를 찾다가 과거 여고생이었을 때 같은 상처를 공유한 것이 시작이었다고 설정했다.

둘 다 피고인의 남편이자, 피해자인 재벌 2세에게 성적 유린을 당한 것으로.

그때의 상처가 두 여자에게 트라우마로 남았고, 서로 의지하는 동지가 됐다. 그래서 아내는 결혼 후에도 자신의 세계에 침전하게 되었으며, 피고인은 용의주도한 팜므파탈이 되었다.

매력적인 여자가 된 피고인은 정체를 숨긴 채 복수를 위해 재벌 2세에게 접근하여 마침내 그의 부인이 되었다. 피고인은 동지인 ‘아내’가 행복하게 살기 바랐으나 하필이면 아내의 남편인 변호사도 재벌 2세 놈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둘 다 파멸시키기로 공모했다.

변호사 놈을 이용하여 재벌 2세 놈을 죽이기로.

원안에서 아내와 피고인, 피해자가 대학 동창생이었다는 설정은 삭제했다. 따라서 아내와 피고인의 나이가 달라도 되었다.

한데 마치 서연을 만날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그런 설정과 전개를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 뇌가 미래까지 예측하는 건가. 원안대로 동창생이었다면 이미 제본된 시나리오를 수정해야 한다.

하지만 나이를 언급하지 않았기에 서연보다 서너 살 많은 이유현이 피고인을 맡아도 된다.

서연이 약간 불안한 눈길로 날 보고 있었다.

제 나이가 어려서 안 되는 건가요? 라고.

무표정하지만 감정이 눈에 드러나는 그녀다.

나만 그 감정이 보이는 건지, 아니면 서연이라는 여자가 특이한 사람인 건지. 혹시 타고난 연기자?

오바하지 말자. 난 그냥 감정을 읽었을 뿐이다.

뭐라 말을 하려던 그때였다.

“저기요.”

이유현이 어느새 시나리오를 다 읽어 버렸다.

그녀의 얼굴에 해석하기 어려운 생각이 담겨 있었다.

“우리 서연이, 아내 역할 할 수 있는 거 맞죠?”

“네. 제가 관철할 겁니다.”

“감독님은 어느 분이시죠?”

“아직 찾고 있습니다. 신인 감독님 위주로요.”

원래는 감독부터 계약하고 캐스팅을 진행하는 게 순서다. 캐스팅은 제작자 및 프로듀서와 감독의 권한이니까.

이유현이 미심쩍어하는 눈치를 보인다.

“남자 주인공은요?”

“1순위는 엄아인 씨입니다.”

“그렇구나. 그쪽에서 하신대요?”

“아직 만나진 못했습니다.”

이유현이 짧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것도 해 놓은 게 없는 상태에서 덥석 시나리오를 내밀었으니 황당할 수밖에.

투자도 안 받았다고 하면 바로 일어날 것만 같다.

아니, 그녀도 이미 아는 눈치다.

“피고인 역할도 안 정해졌을 테고… 혹시 이 역할 때문에 저 찾아오신 거예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현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하고는 싶은데 노출 씬 때문에 꺼려지는 기색. 친한 동생을 위해 다시 한번 해 볼까 하는 고민도 보인다.

“여주는 누굴 염두에 두고 있죠?”

“1순위는 유현 씨. 2순위는 주연 씨. 3순위는 이얼 씨입니다.”

“주연이는 안 될 것 같고… 이얼 씨는 의외네요. 저랑 그분이랑 이미지가 비슷한 건가.”

“생각 없으세요?”

“전 이미 회사와 얘기해 둔 작품이 있어서…….”

“시간은 아직 넉넉합니다. 제가 이얼 씨에게도 찾아뵐 생각이긴 합니다만, 하실 생각이 있으시면 미리 연락 좀 주세요.”

“엄아인 선배님만 캐스팅되면 투자는 문제없을 것 같은데.”

예상대로 그녀는 메인 투자가 안 된 걸 알고 있었다. 감독님이 아직 없다는 것으로 짐작한 모양이다.

이유현의 얼굴에 갈등이 중첩되는 게 보였다.

그녀가 결국 결단을 내렸다.

“투자사 정해지면 그때 연락 주세요. 가능한 한 하는 것으로 할 테니까.”

“유현 씨가 꼭 하셨으면 좋겠네요.”

“단, 조건이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제가 하게 되면 서연이는 반드시 아내 역할 확정되어야 해요. 누가 뭐라 해도 그렇게 해 주셔야 합니다.”

“유현 씨가 이 영화 안 하셔도 서연 씨는 반드시 아내 역할 할 겁니다. 투자사는 제가 끝까지 설득할 겁니다.”

내 각오가 진실 되어 보였는지 이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현이 걱정하는 건 서연이 연기 경력이 없기 때문이다. 걸그룹 멤버라는 선입견도 있고.

투자사나 감독은 거의 100% 확률로 걸고넘어질 게 뻔했다. 자칫 발연기 때문에 영화가 망할 수도 있다며.

방법은 있다.

연기를 보여 주면 된다.

“서연 씨, 이번 주 금요일 스케줄 어떻게 돼요?”

서연이 다소 들뜬 얼굴로 대답했다.

“다음 주에 행사 하나 있는 것 말고는 없어요.”

내 코어가 서연 씨의 스케줄까지 분석했나 보다.

이래저래 최적의 배우를 찾아낸 것 같다.

“금요일에 저희 사무실로 와 주실 수 있어요?”

“네. 그런데 왜…….”

“연기 훈련 좀 하게요.”

말을 하곤 활짝 웃었다.

나? 연기할 줄 모른다. 가르칠 수도 없다.

내 코어 능력을 믿을 뿐.

* * *

이틀이 지나고 금요일.

서연과 약속을 한 그날. 계약금으로 받은 돈으로 DSRL 카메라를 구입했다. 태어나서 처음 써 보는 거금이었다.

카메라 테스트를 하기 전에 조작법을 익혔는데, 코어 능력 덕분에 30분도 안 되어 기능과 조작을 거의 마스터 해 버렸다.

거기에다 광화문에 있는 서점에 가서 연기론, 연출론, 촬영과 조명 기법. 영화제작 실무 등에 관한 책을 사들여 닥치는 대로 읽었다.

내 뇌가 책을 보는 족족 기억해 버렸기에 책을 보는 게 아니라 통째로 외우는 수준이었다.

눈으로 사진을 찍듯 기억해 버리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사들인 장비로 사무실 건물 옥상에 세팅해 놓고 서연 씨를 기다렸다. 장비를 갖추고 연기 훈련을 하는 건 서연 씨가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데 익숙해지라는 의도였다.

얼마 뒤 서연이 옥상으로 왔다.

문자로 아내가 입는 옷을 몇 벌 준비하라고 했는데 하얀 원피스 하나를 미리 입고 점퍼를 걸친 모습이었다. 놀랍게도 밝은 갈색이었던 머리가 검은 생머리로 바뀌어 있었다.

내가 예상한 아내의 모습 그대로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올 때 춥지 않았어요?”

“좀 춥긴 했는데 괜찮아요.”

“소속사에선 뭐래요?”

“당연히 고마워하시죠. 멤버들도 잘됐다면서 막 비명 지르고 그랬어요.”

극 중 아내는 가련한 여자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청승맞게 아파트 베란다에서 물끄러미 밖을 보는 장면이 꽤 있다. 남편에게 구속된 여자의 심리를 묘사한 장면이다.

지금은 10월 중순. 안 그래도 날씨가 쌀쌀한데 바람까지 부는 옥상에서 연기 연습을 할 생각이다. 청순해 보이고, 불쌍해 보이고, 비밀이 숨겨져 있는 여자를 가장 잘 표현할 것 같아서.

그녀의 손에 시나리오 책이 있었는데 단 이틀 만에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이유현의 도움을 받아 캐릭터 연구를 한 모양이다.

난 카메라 뒤에 서고, 서연은 난간에 섰다.

서연이 긴장하는 게 화면에 보였다.

“무대에서도 긴장해요?”

“아니요. 잘 모르는 분 앞에서 하는 게 처음이라…….”

“실제로 촬영하면 회 차 거듭할수록 나아질 거예요.”

아직 촬영 일정이 잡히진 않았지만 서연의 첫 촬영은 집에 혼자 있는 씬부터 찍을 것이다. 그렇게 몇 회 차가 지나가면 영화 촬영도, 스태프 앞에서도 어느 정도는 적응하겠지.

감정이 고조되는 씬은 촬영 후반 마지막 재판 때다. 보조출연자가 많은 장면이라 좀 걸리긴 하지만 그녀가 잘해 줄 거라 믿었다. 이유현이 하게 된다면 의지할 사람도 있을 테고.

“16씬부터 해 봐요.”

서연이 점퍼와 책을 내려놓고 섰다. 바람이 살살 불어와 그녀의 긴 생머리가 얼굴을 간지럽히며 날렸다. 몸이 좀 떨리자 심호흡을 했다.

“그, 그런데 언제 연기해요?”

“지금 하면 돼요.”

서연이 버림받은 여자처럼 우두커니 서서 허공을 응시했다.

소파에 잠든 남편을 가만히 서서 보는 장면이다.

자신을 학대하는 남편에 대한 원망. 남편 몰래 복수를 벌이고 있는 자책감. 자신의 아픈 과거와 현재의 처지 등을 내면 연기로 표현해야 한다.

서연의 눈빛에 그런 감정이 담기지 않았다. 표정으로 연기하려는 게 보였다. 긴장감도 아직 남아 있었고.

그러나 서서히 몰입하기 시작했다. 처음이라 잘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5분 정도 지나 입을 열려고 하던 그때였다.

코어를 발동한 상태였는데 갑자기 배역 적합성 상승이라는 단어가 떴다. 일순 그녀가 역할에 빠져들었던 모양이다.

화면 상으로는 그리 길지 않았다.

“바로 지금. 지금 상태를 기억해요.”

몰입해 있던 서연이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지금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방금 연기가 제대로 나왔어요. 남편에 대한 원망. 그로부터 이어지는 죄책감. 나아가 서글픈 현실. 자유를 향한 갈망. 그런 감정이 차례대로 이어지면 돼요. 감정들이 섞인 게 아니라.”

“아!”

서연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는 다시 연기에 들어갔다.

이유현이 이런 디테일까지는 말해 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온갖 감정이 섞이면 무슨 감정인지 알 수가 있나.

그녀가 다시 연기하고 10초쯤 지나자 확연히 달라졌다.

그래도 좀 모자라긴 했다. 아직 배역 그 자체가 되진 못했으니까.

신인에게 메소드 연기를 바라는 건 무리지.

“됐어요.”

서연의 점퍼를 들어 그녀에게 입혀 주었다. 그녀가 어색하게 고마움을 표하며 시나리오를 들어 뒤적여 보았다. 그러곤 16씬 여백에 메모했다. 정확히 어떤 심리를 표현해야 할지 막막했던 모양이다.

“이번엔 21씬이에요. 아내가 처음으로 쌓인 감정을 표현하는 장면입니다. 남편과 몸싸움도 하고 뺨을 맞기도 해요. 남편에게 변태성욕자 성향이 있다는 걸 암시하는 장면이에요. 아내는 여기서 정신분열 상태를 처음 보여 줍니다. 원래 좀 이상한 여자이긴 했지만 ‘이건 뭐지?’ 하는 느낌을 관객에게 보여 줘야 하거든요.”

“네. 유현 언니에게 그 말은 들었어요. 그런데 이거 저 혼자선 어려운데…….”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보조할 수밖에.

서연이 현관문이라 표시한 부분에 섰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자.

“슛 들어갑니다. 씬 21. 원 테이크. 레디… 고!”

막상 연기를 하려니 영 어색하네.

난 안방에서 넥타이를 매고 나오는 척 연기하며 서연에게 걸어갔다. 서류가방을 들고 나가려는데 서연이 막아섰다. 옆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그녀가 단호한 모습으로 다시 막아섰다.

“뭐 하는 거야? 비켜.”

서연은 말없이 날 쏘아보기만 했다.

“이 여자 왜 이래, 아침부터?”

나가려는 날 다시 서연이 막아섰다.

“비키라고. 나 바빠.”

서연이 갑자기 앙칼지게 소릴 질렀다.

“싫어! 싫어! 싫어!”

내 팔을 잡아 뜯을 듯 악을 써 대는 그녀였다. 내가 확 뿌리치자 서연이 넘어졌다가 내 다리를 잡고 매달렸다.

“아, 왜 이래! 저리 가라, 좀!”

“당신 죽여 버릴 거야! 당신이 내 인생을 망쳤어!”

“말은 바로 하자. 넌 결혼 전에도 미친년이었어. 아니지. 이혼하려고 미친 척하는 거겠지. 쇼하지 말고 저리 가!”

서연을 밀쳐 버리곤 나가려는데 그녀가 내 등에 매달렸다. 그러더니 내 목덜미를 물었다. 진짜로!

“아아!”

내가 몸부림치며 서연을 떨쳐내려고 하자 그녀가 더욱 매달렸다.

“아, 진짜 물면 어떡해요.”

그제야 서연이 황급히 내 몸에서 떨어졌다.

“죄송해요. 난 연기인 줄 알고… 괜찮아요?”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씩 웃었다.

날 막아서는 서연에게서 아내가 보였다.

어쩌다 얻어걸린 연기가 아니었다.

“괜찮아요. 16씬보다 나은데요?”

“아무래도 상대역이 있어서 좀 나은 거 같긴 하네요.”

“좋아요.”

카메라로 돌아가 찍어 놓은 화면을 확인했다.

내가 제대로 본 게 맞았다.

서연의 연기가 한결 나아졌다. 몸싸움을 벌이기 직전에는 내가 생각한 아내의 눈빛과 표정 그대로다. 내 연기는 봐주기가 곤란했고.

“어때요?”

“잘 모르겠어요.”

“이 정도면 좋은 거예요. 115씬도 외웠어요?”

“외우긴 했는데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막막해요. 언닌 그냥 담담하게 하라고 하긴 했는데.”

“담담하게 하면 돼요. 대신 무표정한 얼굴에 목소리 톤만 격양되어야 합니다. 도중에 피고인을 볼 때는 두 여자의 사이의 미묘한 감정이 전해져야 해요. 증거와 함께 폭로할 때는 미친 듯이 대사를 쏟아내며 폭발해야 하고요.”

“유현 언니는 이 장면에서 아내의 곪았던 상처가 터지는 동시에 상처가 아물고, 관객에겐 메시지를 보여 준다고 했는데 전 잘 모르겠어요.”

“변호사이자 남편을 향해 오열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향해 울부짖는 상황입니다. 강렬하게 몰아붙여야 해요. 재판장에 있는 사람도, 관객도 숨이 멎을 정도로.”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연기 연습에 들어갔다.

가장 중요한 115씬 마지막 재판을 중심으로.

* * *

다음날 토요일에도 마찬가지였다. 월요일부터 제작실장으로서 일해야 하기에 서연을 도와줄 시간은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이 전부였다. 그 뒤로는 그녀에게 맡겨야 했다.

다행히 다음날에는 한결 나아졌고, 발성과 발음도 두드러지게 좋아졌다. 옥상에서 꼬박 5시간을 연습하고 숙소에 가서도 연습하는 모양이었다. 이유현이 도움을 주는 것 같기도 하고.

토요일 밤에는 연습을 끝내고 가볍게 맥주도 마셨다.

민정이까지 합류한 술자리였는데, 술이 좀 들어가다 보니 서연과 나 사이의 어색함이 제법 줄어들었다.

맥주 두 잔을 먹고 혀가 꼬부라지더니 종알종알 떠들어대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특이하기도 하고.

그날 연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각 씬에 대한 설명, 아내 캐릭터의 심리 변화도 자세히 알려 주었다. 서연은 메모하다가 나중엔 폰으로 녹음까지 했다.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술을 먹고 난 다음 날 일요일.

연습 3일 만에 진짜 연기를 보았다.

배역 그 자체가 되는 게 무엇인지 서연이 깨달은 거였다.

아직 신인 특유의 어색한 시선 처리가 있긴 했으나 기술적인 부분은 촬영 회차가 거듭되면 달라질 것으로 보였다.

타고난 연기자.

그건 진짜였다.

내 눈앞에서 괴물 신인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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