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영화사에서 첫걸음
내가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영상을 여러 번 보았다.
영상구현은 뇌의 능력을 풀 가동하는 수준이며, 두통은 30초 만에 찾아온다.
풀 가동 시 회복이 더딘 마지노선은 1분.
그 이상 가면 몇 시간 동안 앓아누워야 한다.
그렇게 쉬기를 반복하면서 같은 장면을 조금 다르게 편집해 보고, 더 나은 장면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눈에 보이는 영상을 두 손을 휘저어 가며 편집했는데, 실제로는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러다 기자와 검찰 직원들의 몸싸움과 아우성이 최고조에 달하는 시점에서 슬로 모션을 걸었다.
기가 막히다!
노멀 모션에서 슬로 모션으로 바꾼 것만으로도 검찰 포토라인에서 벌어지는 아우성이 세상의 부조리를 제대로 부각하고 풍자했다. 세상 잘 돌아간다며 절로 혀를 찰 지경이다.
그러고 보니 이 장면은 영화 ‘살인의 추억’ 중 논에서 벌인 살인 현장 검증 풍경과 유사했다.
롱 테이크로 가면서 엉뚱한 사람을 용의자로 몰아 난리법석을 떨던 장면이다.
후반부터 슬로 모션으로 전환되면서 메시지를 극대화했다.
이 영상은 누가 연결해 준 정보가 아니다.
엄연히 내 머릿속에서 나왔다. 내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었지만 내가 발견하지 못한 가장 좋은 첫 장면.
이 작품과 관련한 모든 것을 분석한 뒤 뇌가 스스로 도출해 낸 장면이다.
물론 내 의지로 머리를 쓴 건 아니다.
뇌가 스스로 작동해서 결과를 내놓았을 뿐.
머리가 아픈 것으로 보아 내 뇌가 아닌 것도 아니고.
어쨌거나.
이제 완벽한 시나리오를 쓸 수 있다.
그 시나리오를 알아주는 사람만 만나면 된다.
다른 분야에도 얼마든지 능력을 쓸 수 있다.
주식 종목을 보면 주가를 예측하지 않을까?
기업 정보를 통해 가장 합당하고 예측 가능한 분석을 조건으로. 기업의 허위 공시나 변수는 제외하고.
아니, 허위 공시와 변수도 잡아낼 것만 같다. 공개된 정보에 허점이 있거나 네트워크에 있는 모든 정보와 연동하여 어떤 조짐을 예측한다면. 단, 내 뇌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영화도 그렇다.
흥행을 저해할 요소를 미리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사람을 분석할 수도 있을 테고.
그러면 내가 천재가 된 것인가.
아니다.
난 여전히 보통 사람이다. 능력을 차단하면 그냥 나다.
능력을 발휘할 때도 체감 상으론 다를 게 없다.
능력을 자주 쓸 수도 없다.
너무 혹사하면 정말 단명할 것만 같다.
과부하라도 걸리면 한순간에 백치가 될지도 모른다.
애초에 머리를 다쳐서 이 능력이 생긴 거 아닌가.
사흘 동안 이런저런 실험을 하다 보니 내게 일어난 충격적인 일이 어느새 익숙해졌다.
괴현상을 분석하고 정리하자 더는 신기하지도 않을 만큼 편해졌던 거다.
그렇게 실험을 한 뒤 모두 10개로 정리했다.
하나. 확장된 뇌를 코어라 부른다.
둘. 내 의지로 코어를 통제하며 능력을 차단할 수 있다.
셋. 코어의 정보 탐색은 무한에 가깝다.
넷. 정보의 분석과 결과는 그 어떤 형태로도 구현한다.
다섯. 기본으로 인지할 정보 창은 텍스트다.
여섯. 첫 번째 정보 탐색은 한 단계로만 확장한다.
일곱. 정보 분석의 첫 결과는 상하 좌우로만 뜬다.
여덟. 광범위 정보 탐색은 1분 이내로 한다.
아홉. 코어의 레벨을 1이라 한다.
열. 그 누구에게도 코어의 존재를 말하지 않는다.
모든 뇌세포가 다 열리진 않은 것 같다. 기존의 뇌에 비해 뇌활용도가 무지막지하게 높아졌을 뿐.
그래서 현재 각성한 뇌 상태를 코어라 부르기로 하고, 레벨 1로 정했다.
정보가 광범위로 확장해도 머리가 덜 아프면 뇌 활용도가 높아졌다는 의미일 터다.
코어를 완전히 가동하면 1분 만에 두통이 온다. 그게 2분 후에 오면 레벨 2라 해도 되겠지.
일단 지금은 간단한 정보 분석이나 시나리오 쓰는 데에만 쓸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정한 것처럼 정보 분석을 1단계 확장으로 정해 놓으면 몇 시간이 지나도 두통이 안 생겼으니까.
지난 며칠 동안 실험으로 두통에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다.
욕심부리다 머리 아파 죽느니 그냥 느긋하게 가련다.
자주 쓰다 보면 언젠가는 코어 레벨이 오르겠지.
광역 분석은 레벨이 몇이나 되어야 할까.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그때는 다른 일에도 써 볼 참이다.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건 시나리오 쓰기.
창작 능력이 생겼으니 제작을 배우는 거다.
3일 만에 집에서 나섰다.
* * *
논현동의 한 허름한 건물로 들어갔다.
이 건물에 이갑성 대표의 영화사가 있었다.
6층 복도로 들어가 한 사무실 앞에 섰다.
어?
[신성영화사]
놀랍게도 내 이름과 영화사 이름이 같았다.
노크하자 안에서 들어와요,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흰머리가 많은 50대 남자가 짜장면을 먹고 있었다.
그 앞에는 앳되어 보이는 아가씨가 앉아 있고.
“저, 어제 연락드린 최신성이라고 합니다.”
“이갑성입니다.”
이 대표와 악수를 했다.
아가씨는 눈치가 빠른지 얼른 일어나 차를 타러 갔다.
“식사 안 하셨으면 하나 시켜드릴까?”
“아니요. 먹고 왔습니다.”
“그럼, 난 식사마저 하고요.”
경리가 내미는 녹차를 들고 소파에 앉았다.
직원을 뽑을 생각이 없는 건가.
영화사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사무실이 작았다.
대표 책상 하나. 캐비닛 하나. 경리가 일하는 기다란 책상 하나. 그리고 가운데에 소파와 유리 탁자.
내가 입사하면 경리와 마주 보고 일할 것 같다.
실례를 무릅쓰고 코어 능력을 발동했다.
사람을 상대로 한 번은 확인하고 싶었다.
사물을 분석했을 때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이 대표님을 중심으로 수많은 창이 생겨났다.
마치 스캔한 것처럼 신체 정보를 비롯해 착용한 옷과 시계 따위의 정보가 증강현실처럼 다닥다닥 들러붙었다.
거기에다 붉은 사인펜으로 획획 갈겨쓴 메모. 탁자의 서류 정리. 사무실 환경과 대표님의 인상과 눈빛 등으로 성격까지 분석한다.
---------------------------------------
[이갑성 : 신성 영화사의 대표.]
[나이 : 54세.]
[키 : 168cm] [몸무게 : 72kg]
[인상 : 온화함. 깔끔함. 날카로운 눈빛.]
[성격 : 검소함. 꼼꼼함. 강인함. 단호함. 너그러움.]
[신뢰도 : 87% 긍정적.]
[지혜 : 일반 이상의 통찰력. 현명함.]
[이력 : 베테랑 영화인. 약 25년 경력.]
[능력 : 풍부한 영화 제작 경험. 수준 높은 안목.]
[잠재력 : 영화계 유력인사가 될 확률 95%.]
[정장 : 맨체스터. 30만 원대. 약 10년 착용.]
[시계 : 불가리아. 160만 원대. 약 15년 착용.]
[구두 : 바크. 50만 원대. 약 7년 착용.]
[……]
---------------------------------------
잡다한 것까지 뜨자 창을 지웠다.
다른 걸 떠나 이 대표님은 신뢰할 만한 분이다. 영화계 유력인사가 될 확률이 매우 높은 것도 놀라웠다. 헛돈 쓰는 사람이 아니며 룸살롱 출입할 분도 아니다.
물론 이 결과는 추정일 뿐이다.
어떤 사람인지 대충 감을 잡았다.
이번엔 경리.
어린 아가씨가 왜 이 영화사에서 일하나 했다.
이 대표의 조카인 듯. 얼굴이 닮았고, 아버지뻘과 단둘이 있는데도 편해 보인다.
이 대표를 보며 생글생글 웃기도 하고.
식사를 마친 이 대표가 내게 서류를 내밀었다.
“한번 보세요.”
“시놉시스네요.”
“기획안인데… 오랜만에 하려니 잘 안 풀리네요.”
7페이지 분량의 기획안을 읽어 보았다.
저예산으로 제작이 가능한 치정 스릴러였다.
신생 영화사의 첫 작품으로 가장 적당한 영화.
에로티시즘과 스릴러를 부각하면 흥행 가능성이 있다.
주인공은 속물 변호사다. 아내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좀 있으나, 아내의 집안 재산을 보고 결혼했다. 결혼 생활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을 무렵. 살인사건의 변론을 맡는다.
사건 피해자는 재벌가의 외동아들.
피고인은 피해자의 아름다운 아내.
검찰은 피고인이 유산 상속을 노리고 남편을 살해한 것으로 보고 불구속 기소했다. 정황은 틀림없어 보이나 결정적인 살해 증거가 부족하여 판결을 통해 유무죄를 가려내야 한다.
그런데 이 피고인의 캐릭터가 관능적이면서도 독특했다.
이 미모의 피고인이 주인공을 유혹하면서 주인공은 치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악마의 홀림에 빠진 듯 주인공은 갈수록 이성을 잃어 가고 피고인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상태가 되어 간다.
그 무렵 아내는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다 주인공이 피고인과 사라진 아내, 죽은 피해자가 삼각 관계였음을 알아낸다.
그때 주인공은 이미 피고인에게 영혼이 사로잡힌 상태였다. 재판이 불리해지자 아내를 찾아내 죽인다. 그리고 아내가 피해자를 살해한 죄책감 때문에 자살한 것으로 위장한다.
재판은 무죄 판결이 나고 주인공과 피고인은 유유히 해외로 도피한다. 재벌가의 유산을 노린 피고인과 변호인의 범죄가 성공하나 싶었으나 여행 중 주인공이 변사체로 발견된다.
거액의 유산을 상속한 피고인에게 또 다른 남자가 있었다.
원초적 본능 느낌인데 다소 약하고 밋밋한 결말이다.
내 표정을 본 이 대표가 웃어 보였다.
“허허, 실망한 표정이 보이네요. 이걸로 열심히 굴려 봐야죠. 안 나오면 다른 거 찾으면 되는 거고.”
“반전을 넣으면 될 것 같습니다.”
“반전이라… 어떤 반전으로?”
시놉시스를 보면서 이미 반전은 나왔다.
원안이 나쁘지 않아서 코어 능력을 발동할 필요도 없었다.
이 대표가 보자마자 시놉시스를 내민 것은 내가 시나리오를 얼마나 볼 줄 아는가를 평가하려고 한 것이다.
난 내 생각을 그대로 전할 생각이었다.
언짢아하면 독선적인 사람이거나, 삼류밖에 안 되는 사람이니까.
“주인공이 후반에 아내에게 뒤집어씌우려는 것까지는 거의 같습니다. 그런데 그 지점부터 관객은 주인공과 피고인 사이에서 묘한 기류를 눈치채게 됩니다. 피고인과 변호인이 사건 이전부터 불륜 관계였던 겁니다. 관객을 속이는 거죠.”
“그 이유는요?”
“피고인의 남편을 죽인 진범이 바로 변호사인 주인공이었던 거죠. 후반까지 복선만 깔고 관객들은 몰라야 합니다.”
이 대표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피고인이 자기 남편을 죽이려고 주인공을 유혹했고, 변호인 선임까지 했다는 거네요. 유산을 상속하면 절반을 주겠다는 식으로 했을 수도 있고.”
“예. 거기서 반전을 한 번 더 줍니다. 주인공의 아내와 피고인은 친구였어요. 아내가 집을 나간 건 남편인 주인공이 피해자를 살해하는 증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내와 피고인이 공모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아내는 자신을 학대하는 남편을 몰락시키고, 피고인은 유산 상속을 노린 거였죠. 주인공은 두 여자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한 겁니다. 두 여자가 손을 잡은 원인과 공모를 벌인 이유는 개연성을 설정하면 됩니다. 이 설정에서 아내와 피고인의 성격도 입체적으로 달라지겠죠.”
“음…….”
“반전 이전에 나왔던 여러 장면이 사실은 피고인이 설계한 함정들이었다는 걸 주인공도, 관객도 나중에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게 가짜이거나 연기였고, 치밀한 각본이었던 거죠.”
이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요. 실은 나도 주인공이 아내를 죽이는 부분이 좀 걸렸는데, 그런 식으로 가면 괜찮은 마무리네요. 초반에 두 여자의 남편이 악질적인 인간임을 묘사하면 개연성도 생길 거 같고.”
“예. 두 남편이 악덕 변호사와 재벌 2세니까요. 두 여자의 관계가 동성애 느낌이 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주인공과 피고인이 불륜 관계인데, 아내는 개의치 않아야 하니까요.”
“좋아요. 벌써 그림이 딱 나오네.”
이 대표가 시놉시스에 메모를 해 나갔다.
사실 작가도 아닌 이 대표가 이 정도 원안을 쓴 것도 놀랍다. 비록 시나리오가 아닌 시놉시스이지만.
이 시놉은 꽤 훌륭한 시나리오가 될 수 있다.
첫째. 빼어난 에로티시즘 영상미를 꼽을 수 있다.
둘째. 연기자가 욕심낼 만한 배역이다. 남자 배우는 점점 파멸로 치닫는 연기를 보여 줄 수 있고, 여자 배우는 피고인 역할로 색다른 관능미를 뽐낼 수 있다.
셋째. 이 영화는 추리극 타입이다. 진범은 누구인가. 아내의 행방은? 미모의 피고인은 정체가 무엇인가. 거기에 남자 주인공의 심리 상태를 중심으로 아슬아슬하게 고조되다가 반전이 일어나며, 또 한 번 반전이 발생한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제작비다.
주요 로케이션은 재판장. 주인공 집. 피고인의 집. 아내를 찾아 나서는 야외 로케 몇 번이면 충분하다.
탑 배우가 하겠다고 결정하면 투자는 직행이다.
이런 것들을 주절주절 말하고 싶었으나 이 대표도 알고 있을 것 같아서 관두었다. 신생영화사의 첫 작품으로 가장 적합한 소재를 선택했으니.
신생은 코미디. 공포. 스릴러를 선택해야 안전하다.
비용 적게 들고 대박은 어려워도 투자비는 뽑을 테니까.
이 대표가 메모를 다하곤 웃으며 말했다.
“최 작가. 이 시나리오 직접 써 볼래요?”
“저, 사실 제작 일 배우려고 왔습니다.”
“그건 아는데… 다른 작가보다 나을 거 같아서 말이에요. 사실 유명작가 모셔 올 돈도 없고, 시나리오 뽑기 전엔 제작팀도 필요 없고 해서 말입니다.”
“그러네요.”
하긴 아직 영화사라 부르기도 뭣한 회사에서 시나리오 개발비로 5,000만 원이나 쓴다는 게 부담이 되긴 한다.
많이 쓰면 천만 원. 그것도 안 되면 500 정도.
그 예산으로 작업해서 시나리오가 제대로 안 나오면 나 같은 무명 불러서 각색 작업을 하는 거다.
그러다 영화 엎어지는 거고.
영화의 근간은 시나리오인데 작은 영화사들은 천만 원 쓰기도 아까워서 적은 돈으로 요행을 바라다가 영화를 엎는 걸 되풀이하고 있다. 악순환이다.
내가 돈 때문에 망설이는 줄 알았나 보다.
이 대표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작가로 천만 원에 계약하지요? 당장 선금으로 오백은 줄 수 있으니까. 그리고 프리 프로덕션부터 최 작가를 제작실장으로 계약할 겁니다. 제작 일은 전혀 모르죠?”
“예. 그런데 제가 제작실장 일은 어려울 텐데요.”
“제작부에 최 작가밖에 없는데 부장이든 팀장이든 뭔 상관이 있겠어요. 제작부원은 한 명만 올 겁니다. 전반적인 일은 나하고 민정이가 처리할 테니까.”
기다렸다는 듯 말을 잇는 이 대표였다.
날 잡으려는 모습 같아 보여서 기분이 꽤 좋았다.
이것도 코어 능력이 생긴 덕분일까.
“오늘부터 작업할까요?”
“책이야 빨리 나오면 좋죠. 집에서 작업하세요? 아니면 호텔이라도 잡아 줘요?”
“집에서 하면 됩니다. 한 일주일 정도 걸릴 거 같네요.”
“일주일? 일주일 만에 한 편을 쓴 다고요?”
“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 더 빠를 수도 있고요.”
내 말에 이 대표가 갸우뚱했다.
보통 초고 작업은 최소 보름은 걸린다.
내 경우엔 2, 3일이면 될 것 같았다.
완고 같은 초고를 쓰고 싶어서 며칠 더 여유를 준 거다.
이 대표가 농담이라도 들은 듯 웃었다.
“급할 거 없으니까, 천천히 해요.”
“일주일이면 충분해요. 그동안 대표님은 미리 준비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래요? 거 참. 10년 동안 영화판이 변한 건지, 최 작가가 빠른 건지. 알겠어요. 그동안 사람 좀 만나러 다녀야겠네. 민정이한테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 알려 주고 가요. 명함 뽑아야 하니까. 작가 명함으로 할래요? 실장 명함으로 할래요?”
“둘 다 하죠, 뭐.”
“그래요. 민정아, 최 작가 명함 1,000장만 주문해라. 앞에는 작가, 뒤에는 실장으로.”
“네.”
경리의 대답에 이어 내가 물었다.
“1,000장씩이나 만들 필요가 있을까요?”
“기본이 1,000장입니다. 앞으로 쓸 일 많아요.”
“그럼 전 작업하러 갈게요.”
“계약 안 하고 작업부터 하게요?”
“급한 거 아니니까요.”
“그래요.”
이 대표가 자기 책상으로 가서 봉투에 서류 뭉치를 주섬주섬 넣었다. 그리고 지갑을 열더니 오만 원권 4장을 꺼냈다.
“계약금 아닙니다. 작업 진행비로 써요.”
“괜찮습니다.”
“부담 갖지 마요. 최 작가 잡아 놓으려고 뇌물 주는 거니까. 뭐, 나중에 실장으로 오면 월급이 박한 것도 있고.”
한 번 더 마다하려다 월급 이야기가 나오자 그냥 받았다.
용돈으로 월급을 퉁 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 * *
기분 좋게 신성영화사에서 나왔다.
코어 능력을 쓰지 않았는데도 시놉을 읽고 바로 수정안을 떠올렸다. 코어가 작동하지 않았음에도 어느 정도는 내 두뇌에 영향을 주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내 의지로 코어의 정보를 활성화하거나, 차단하고 있으니 원래는 늘 활성화되어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렇다고 이전에는 시나리오를 분석할 능력이 없었나.
그건 또 아니다.
바로 대안이 튀어나오지 않아서 그렇지.
캔맥주 네 개를 사 들고 집에 돌아왔다.
먼저 이 대표님이 준 서류 봉투를 꺼내 살펴보았다.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이 대표가 모은 자료였다.
대부분 유사 사건의 공판 기록이다. 영화에 필요한 법률 단어 등도 있고. 법이나 재판에 대해 잘 몰랐는데 이 대표가 모은 자료만으로 충분했다.
신기하게도 한번 죽 훑어보기만 했을 뿐인데도 머리에 다 입력이 되었다. 이 또한 놀라운 능력.
자, 이제 한번 써 볼까.
커피를 끓여 책상에 놓고 의자에 앉았다. 물수건으로 마우스를 닦고, 노트북 키보드를 닦았다. 그리고 노트북 전원을 켠 뒤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할 때 늘 하는 일종의 루틴이다.
노트북 화면이 뜨자 코어 능력을 활성화했다.
노트북이나 키보드에 관한 정보는 뜨지 않도록 제외했다.
오직 시나리오에 관한 것만.
한글 프로그램을 띄운 뒤 제목을 적어 넣었다.
인터넷 검색창에 연관 검색어가 뜨듯, 제목을 치자마자 시놉시스 내용과 관련한 제목들이 줄줄이 뜬다.
정말 기가 막힌 장치다.
원래 제목은 가제로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그걸 ‘국경의 끝’으로 바꾸었다.
여기서 국경은 야망과 본능, 치명적 사랑의 끝을 의미한다. 두 여자가 영화 마지막에 도달하는 인적 없는 바다이며, 남자 주인공이 파국으로 치닫는 막다른 길의 끝이다.
일단 제목을 치고 나서 전체 스토리를 정리하고, 시퀀스도 대략 정했다.
도입부에 어떤 장면을 써야 몰입감을 높일 수 있는지, 남주와 여주가 처음 만날 때는 어떤 장면이 좋은지.
재판의 진행. 중간의 전환점과 클라이맥스. 갈수록 치달아가는 주인공의 심리 상태. 배우의 연기를 최대한 뽑아낼 수 있는 장면들. 드러난 사건과 숨겨진 사건. 서스펜스를 만들어 낼 영화적 기법과 표현들. 복선과 반전 장치들.
그 많은 것이 머릿속에서 일사불란하게 정리가 되어갔다.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정리하자 단숨에 써 내려갈 수 있을 정도로 자리가 잡혔다.
큰 줄기를 잡았으니 곁가지는 써 나가면서 직관으로 잡아 나가면 된다.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첫 장면을 치기 시작했다.
베드씬이다. 첫 장면에 영화의 복선과 주제를 숨긴다.
격정적으로. 관능적으로. 매혹적으로. 퇴폐적으로.
미려한 영상에 왠지 모를 위기감이 담기도록.
카메라는 아름다운 여체를 훑고 지나간다. 땀에 젖은 남자의 등과 팔. 여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다음 장면에 아내가 나와서 이 여자가 남주의 아내인 것으로 보이게 한다.
이 여자는 나중에 등장할 피고인이다. 둘이 이전부터 불륜 관계였다는 것은 피고인의 숨겨진 문신 따위로 관객만 알아차리게 한다.
일필휘지로 장면을 적어 나갔다. 내 시야로 수많은 경우의 수가 떠오른다. 가장 나은 것으로 선택!
미친 듯이 타자를 두드려 나갔다.
* * *
담배를 태우는 것도 잊었다. 두 모금 마신 커피는 식어 있었다. 몰입하여 시나리오를 쓰다 보니 어느새 늦은 밤이었다. 배가 고프기도 해서 작업을 멈췄다.
7시간 만에 56 씬까지 썼다.
시나리오 편집 형태로 38쪽이니 자판을 쉬지 않고 두드리는 물리적인 속도와 거의 같았다.
정보가 순식간에 확장할 때는 1분 만에 두통이 왔는데 시나리오를 쓸 때는 정보량이 매우 적어서 두통이 별로 없었다.
작업한 결과물을 보고 있으니 기분 좋은 헛웃음이 나왔다.
나중에 씬 별로 정리하고, 다듬기도 해야겠지만 내일이면 초고 완성이다. 다듬고 수정하는 게 시간이 더 걸리기는 해도 초고는 가능한 한 빨리 쓰는 게 좋다. 작가가 한 번에 빠르게 썼을 때 영화의 흐름이 가장 좋기 때문이다.
이걸 더 좋게 만들겠다고 추가나 삭제를 하다 보면 원래 흐름이 깨지고 어긋난다.
글을 쓴 사람은 이미 자신의 글에 적응해서 그 세세한 차이와 감흥을 잊어버리게 된다. 나중엔 처음에 재미있었던 부분에서도 아무 느낌이 안 난다.
그쯤 되면 자신의 글이 좋은지 나쁜지 알아볼 수도 없다.
수정해 봐야 더 나아지질 않으니 다른 작가를 불러서 각색하는 거지.
이것이 초고가 완고가 되어야 하는 이유이고, 유명 작가가 돈을 많이 받는 이유다. 초고가 훌륭해야 하니까.
그런데 이 시나리오를 이틀 만에 쓴다.
내가 보기엔 지금이 최상의 상태다.
여기서 다듬으면 다듬을수록 글이 망가진다. 흐름의 기조는 반드시 유지하되, 더 나은 대사와 더 나은 장면이 되게 손을 보면 된다.
시나리오 파일을 저장하고 냉장고로 가서 캔맥주를 꺼냈다.
맥주를 마시면서 내일 써야 할 부분들을 다시 생각했다.
진짜 전투는 내일이다.
주인공에게 지옥의 문이 열리는 지점.
그 터닝포인트를 지나 내일은 클라이맥스로 달리게 되니까.
캔 맥주 두 개를 비운 뒤 씻고 침대에 누웠다.
두통이 좀 있긴 했는데 맥주 덕분에 통증이 잦아들었다.
정말 상쾌하고 편안한 잠자리였다.
내일이 더 기대된다.
오늘은 기적이 시작된 기념비적인 날이고.
* * *
오전 9시에 일어났다.
늘 가는 식당에 가서 아침밥을 먹은 뒤 다시 루틴을 했다.
먼저 인터넷 포탈 뉴스 등을 본 뒤 유튜브에 들어가 화제의 동영상 따위를 본다.
신곡 뮤직비디오도 챙겨 본다.
오전 11시까지 이것저것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살펴보다가 슬슬 글 쓸 준비를 한다. 점심은 원래 안 먹는다.
재떨이를 비우고, 커피를 준비한 뒤 물수건으로 마우스와 노트북 키보드를 닦는다. 경건한 의식이다.
그렇게 다시 ‘국경의 끝’ 파일을 열었다.
영화 시나리오는 흐름이 생명이기 때문에 작업을 재개하려면 씬 1부터 써 놓은 데까지 영화 보듯 죽 읽어야 한다.
영화의 톤과 분위기에 서서히 동화되어야 하고, 캐릭터들의 감정에 이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나리오의 흐름에 제대로 이입하면 그때 작업에 돌입한다.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홀로그램 글짓기 장치처럼 이야기를 전개하면 그에 따르는 수많은 전개가 뜬다.
코어는 가장 효과적인 장면이나, 다음 전개를 미리 알려 준다. 뜻밖의 장면 전환까지도 보여 준다.
난 선택만 하면 된다.
코어가 추천한 장면이 아닌, 내 나름의 선택으로 전개가 조금 어긋날 때도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어긋나지 않은 전개로 이어진다.
어차피 글쓰기란 선택의 과정.
장면. 대사. 전개 방식. 분위기 등등 선택할 것투성이다.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를 놓고 작가들은 직관에 따르거나 직관으로 안 풀리면 고민하게 된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어떤 것이 좋을지 모른다는 점이다. 그래서 작가 대부분은 자신의 직관을 믿고 힘차게 달린다.
난 코어의 도움으로 빠르게 진행할 뿐이다.
내가 선택하는 모든 것은 나의 직관이기도 하니까.
한번 달리기 시작하자 약물에 취해 한 가지에 몰입하는 사람처럼 자판을 두드렸다. 영화가 클라이맥스로 향하기 때문에 어제보다 몰입이 더 컸다.
* * *
“휴…….”
한동안 숨쉬기를 잊었던 사람처럼 긴 숨을 뱉었다.
작업한 지 7시간 만에 초고를 끝냈다.
좀 더 살펴봐야 하지만 이틀 만에. 정확히는 14시간 만에 시나리오 한 편을 완성했다는 것이 놀랍기만 했다.
마지막 씬 아래의 ‘끝’이라는 글자를 보고 있으니 희열이 타올랐다.
121씬. 84쪽. 상영시간 대략 1시간 40분.
다시 코어의 도움을 받아 써도 이보다 잘 나오진 않을 것 같았다.
남주 여주의 심리 상태가 꽤 다층적이고, 배우라면 시도해 보고 싶을 정도로 강렬한 장면들이 있다.
좀 앞서 나가는 건지 모르겠으나 영화 주연상도 노려볼 수 있을 것 같다.
쓰면서 특별한 체험도 했다.
남자주인공에게 몰입하여 엄청난 압박을 느끼면서 타자를 때려 댔고, 진실을 알았을 때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남자주인공이 폭우 속에서 고함을 지르며 발악하는 그 처절한 장면을 쓸 때는 너무 이를 악물어서 잇몸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마지막 두 여자가 바닷가를 거닐 때는 아련하고 후련한 마음이 들었다. 안도감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느낌이었다.
베드씬을 써 나갈 때는 발기까지 했다.
뭐, 전에는 시나리오를 쓰다가 펑펑 울기도 했으니.
나만 그런가. 다른 작가도 그런 걸까.
새 커피를 타 와서 초고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시퀀스나 씬을 재배치하는 건 어떨까?
씬을 축약해서 몽타주 방식으로 전개하는 것은?
독특한 씬 전환을 해서 강한 인상을 주는 건?
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 영화의 주제와 전개에는 맞지 않다.
잡스러운 기교를 부리거나 영화적 기법에 욕심내면 영화의 톤이 깨진다.
그냥 시간과 감정의 흐름 순서대로.
두 번째 작업은 편집과 교정이었다.
씬과 지문. 인물과 대사 사이에 공백을 넣어 가며 교정과 편집을 동시에 진행했다.
대사를 좀 더 맛깔나게 손을 보고, 장면도 더 디테일하게.
오타를 바로 잡고 딱히 손 볼 게 없으면 통과.
좀 더 나은 카메라 앵글이나 시점이 있으면 수정.
직접적인 설명보다 가능한 한 셔레이드로 표현.
여자주인공이 한 남자의 신발에 발을 넣어 보는 것.
여자의 은밀한 짝사랑을 표현한 아주 좋은 셔레이드의 예다. 영화에서 셔레이드는 심층 표현의 도구이며, 작품의 수준을 높이는 고급진 기법 아니던가.
셔레이드가 가능한 장면은 최대한 그렇게 풀었다.
대사도 압축하고, 씬의 길이도 될 수 있으면 줄였다.
분석 끝에 씬을 합쳐도 되는 곳은 합쳤다.
씬과 촬영 장소를 가급적 줄여야 제작비가 덜 든다.
초고를 쓸 때 이미 최상의 선택을 했기 때문에 고칠 부분은 그리 많지 않았다. 빼거나 추가하지는 않고 좀 더 나은 장면으로 만들 뿐이다.
중요한 장면 몇 개와 클라이맥스로 가는 지점에는 지문에 엔터를 많이 쳐서 긴박감이 느껴지도록 강조했다. 씬의 쇼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하는 의도이기도 했다.
배우의 얼굴을 찍어 감정을 따야 하는데 풀샷으로 찍어 버리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3류 감독은 분명히 그런 짓을 한다.
누가 찍을지 모르니까 강조는 해 두고.
* * *
밤 9시가 다 되어서야 시나리오 파일을 저장하고 쉬었다.
영상화로 한번 돌려 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두통 때문에 3분도 못 보고 다음날 종일 고생할 테니까.
내일 원고를 들고 가고 싶었으나 이 대표가 의심할 것이기에 약속대로 일주일 뒤에 가기로 했다. 원고는 더 보지 않았다. 욕심을 내서 손을 대면 망가질 것이 뻔하다.
그 일주일 동안 할 일이 없진 않았다.
기획안을 작성하면 된다.
투자하지 않으면 굴러들어온 복을 차 버리는 느낌을 줘야 한다. 흥행 포인트를 강조하고, 시놉시스도 반전만 빼고 간략하게 정리하고.
투자자에게 보낼 기획안과 투자제안서. 감독에게 보낼 기획안. 배우 기획안도 따로 쓴다.
각자 목적이 다르니까.
가장 중요한 건 연예기획사에 보낼 기획안이다.
영화 제작의 관건은 주연급 연기파나 톱스타가 캐스팅되는 거다. 그러면 감독이고, 투자고 다 된다.
이 작품이면 올해 남녀주연상은 맡아 놨다.
배우라면 욕심낸다. 기획안만 보고 책은 내던질 매니저도 혹해서 배우한테 건네줄 테고.
다른 영화사는 기획사에 우편으로 책을 보내지만 난 직접 찾아갈 생각이었다. 물론 이 대표님과 함께.
감독과 주연급 배우가 캐스팅되면 투자가 100% 이뤄지고, 연출과 촬영 등의 스태프도 구성한다. 그때부터 프리 프로덕션에 돌입한다.
이 작품은 유명 감독은 안 된다. 작품 규모가 작기도 하지만 자기 마음대로 시나리오를 바꿀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신인감독이나 재기하려는 감독을 섭외해야 한다. 배우는 연기를 소화할 수 있는 분으로.
내게 결정권은 없지만 이 대표님에게 그렇게 말해 보기로 했다. 어차피 유명 감독은 계약금이 크기도 하니까.
* * *
한가하고 게을렀던 5일이 지나갔다.
난 출력하여 집게로 집어 놓은 ‘책’과 여러 종류의 기획안이 든 봉투를 들고 집을 나섰다.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아침이었다.
* * *
“진짜야? 진짜 끝냈다고?”
이 대표님이 책을 받아들며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틀에 한 번꼴로 전화를 주고받았고, 주말에는 대표님과 소주도 마셨다. 그날 말씀을 낮춰 달라고 했더니 바로 하대를 하신 대표님이다. 한결 편했다.
“이건 뭔데?”
“기획안요. 세 종류로 한번 써 봤어요.”
“기획안? 어디 보자.”
이 대표가 각각 3페이지 분량의 기획안을 살펴보았다.
시나리오보다 어떤 면에선 기획안이 더 중요하다.
굴러다니는 시나리오도 대개 기획안은 본다.
그의 눈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야, 어떻게 이렇게 요약을 잘했지? 배우가 보면 아주 끔벅 죽겠는데? 시나리오보다 이런 걸 더 잘 쓰는 거 아니야?”
“어차피 글 쓰는 건 같으니까요.”
첫 만남 때와 달리 나도 서글서글해졌다.
이 대표님이 안경을 쓰고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난 경리가 내준 녹차를 홀짝홀짝 마셨다.
“민정이라고 했지? 경리 일 안 힘들어?”
민정이 배시시 웃는다.
“저 경리 아니에요. 제작부장이랍니다.”
“아! 미안.”
나이가 어려 보여서 경리인 줄 알았다.
민정은 킥킥대며 웃기만 했다.
“몇 살이야?”
“25살요.”
“진짜 동안이네.”
민정이 그 말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또 웃었다.
“저, 이래 봬도 메이저 영화사 제작부에 있었어요.”
“제작부장이면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데?”
“이것저것 다 해요. 프로덕션 들어가면 회계와 정산 같은 문서 업무를 주로 보고요. 최 작가님 하는 일이랑 겹치진 않을 거예요.”
“나도 내가 무슨 일을 할지 모르는데?”
“아마 삼촌이 시키는 건 다하게 될걸요?”
민정이 어째 음험한 미소를 지었다.
“삼촌 도우려고 여기 온 거야?”
“네. 지금은 별 볼 일 없는 제작사지만, 삼촌이 큰 회사로 키울 거예요. 삼촌 믿고 왔죠.”
단지 삼촌을 도우려고 온 건 아니라는 뜻인데.
내성적이라 그렇지 야무지고 똑똑한 친구 같았다.
이번엔 민정이가 물었다.
“작가님은 감독이 되고 싶으세요?”
“대표님이 그래?”
“예. 연출 전공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왜 제작부 일을 하시려고요?”
“그냥. 영화에 관한 건 다 해 보고 싶어서.”
“나중에 영화사 차리시려는구나.”
“그것도 나쁘지 않지.”
지난 며칠 쉬면서 내게 야망이 생겼다.
작가로 이름을 날리고, 감독으로 찍은 영화가 흥행도 하고. 경험이 쌓이면 내 영화사도 차리고, 나아가 투자배급사에 극장 체인까지. 거기에다 연예기획사까지 차리면 혼자서 북 치고 장구치고 다 할 수 있다.
내 돈으로 영화 찍고, 내 배우들을 쓰고, 내 극장에 영화를 걸고.
영화계, 아니 연예계의 제왕이 되는 거지.
정말 야무지게 꿈만 크다.
이게 허황한 것인지 실현 가능한 꿈인지는 모르겠다.
그전에 코어 능력이 사라지지나 않았으면.
* * *
이갑성 대표는 정신없이 시나리오를 읽었다.
최 작가가 일주일 만에 시나리오를 쓸 거라고 해서 기대를 전혀 안 했다.
이따금 술 한잔했던 김 작가에게 무명인데 잘 쓰는 작가 없느냐고 물었을 때, 김 작가가 추천한 사람이 최신성 작가였다. 그 작가가 난데없이 제작부로 오겠다고 해서 안 그래도 직원이 필요했던 터라 그러라고 했다.
그런데 웬걸.
잘 쓰는 정도가 아니라 기가 막혔다.
군더더기 없지. 거슬리는 부분 없지. 캐릭터는 살아 숨 쉬지. 씬과 씬의 연결도 영화를 보고 필사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셔레이드 만으로 쌓아 올린 심리 표현은 또 어떤가.
점점 고조되면서 주인공과 관객을 압박해 가는 치밀한 구성도 놀랍다. 이 정도 시나리오는 최고 수준의 감독과 작가가 적어도 1년 이상은 굴리고 굴려야 나오는 글이다.
이 대표는 이 뛰어난 시나리오를 단 일주일 만에 썼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이만하면 천재인데 왜 그동안 무명이었을까.
최신성 작가를 놓치면 안 된다.
내 능력이 닿는 선에서 최대한 대우해 주면 되지 않겠나.
놀란 내심을 숨긴 채 시나리오를 정독한 이 대표였다.
* * *
탁.
이 대표가 탁자에 책을 내려놓았다.
대표님이 삐딱한 얼굴로 날 빤히 보았다.
“이게 자네가 쓴 거 맞아?”
“그럼요.”
“누구 도움도 없이 혼자?”
“시나리오는 협업이 어렵잖아요.”
“이거 외국 영화 베낀 거 아니지?”
“당연히 아니죠. 대표님이 시놉을 베꼈으면 몰라도.”
“허! 이 친구 물건이네.”
“어때요? 더 손볼 건 없죠?”
대표님이 탁자를 손으로 탁- 내려쳤다.
“됐어. 이걸로 됐다고. 더 손보면 망친다. 교정도 잘 되어 있고, 편집도 이 정도면 훌륭하고. 거슬리는 것도 없으니 더 잡고 있을 필요가 없어. 파일 가져왔지?”
“네.”
대표님에게 작은 메모리를 건넸다.
대표님이 바로 민정에게 가서 건네주었다.
“인쇄소에 가서 이 시나리오 제본해 달라고 해. 권수는 50권. 표지 시안 나오면 바로 메일 보내라고 하고.”
“예.”
민정이 메모리를 들고는 사무실에서 나갔다.
이 대표가 내게 오더니 손을 덥석 잡았다.
“최 작가. 다른 데 가지 마라.”
“갈 데도 없어요.”
“자네 이렇게 잘 쓰는데 왜 아직도 입봉을 못했어?”
“전에는 잘 못썼어요. 아직도 잘 쓰는지는 모르겠고요.”
“유명작가가 쓴 것에 손색이 없어. 그동안 고생했다고 하더니 이제 꽃을 피울 모양이다.”
“대표님 만난 덕분일 겁니다.”
“그러면 나야 좋지. 아, 맞다.”
이 대표가 책상으로 가더니 서류 두 매를 가지고 왔다.
“계약하자. 계약금 2천 어떠냐?”
“두 배나 주시려고요?”
“최 작가 말 듣고 반신반의했는데 정말 일주일 만에 써 왔잖아. 대충 휘갈긴 것도 아니고 말이야. 내 경험으로 보면 분명히 톱스타급이 한다. 일단 오백만 받고 중도금 오백에 잔금 천으로 하자. 메인 투자 되면 한 방에 쏴 줄게.”
“저야, 고맙죠. 그런데 투자자나 감독님이 수정 요구를 하면요?”
“투자사가 요구하면 설득해야지 어쩌겠어. 이 책 수정하면 망가진다. 내 영화 인생을 걸고 장담할 수 있어. 감독이 뭐라 그러면 그 인간은 안 봐도 뻔한 거고. 배우도 마찬가지지. 최 작가가 이미 배우 입장에서 최상의 것을 뽑았는데 그걸 못 보면 연기도 못 해.”
뭐, 그렇다면 그런 줄 알면 되겠지.
“일단 죽 읽어 봐.”
이 대표님이 싱글벙글 웃으며 계약서 공란을 기입해 나갔다.
난 계약서를 읽었다.
이 대표님이 기획한 원안으로 시나리오를 썼기 때문에 제작사 콘셉트의 표준 계약서였다. 작가 콘셉트 계약서와 달리 영화가 엎어지면 영화사가 저작권을 갖게 되는 계약서다.
내 오리지널이 아니니 당연한 계약이다.
대표님이 공란을 기입한 계약서를 내게 주었다. 그리고 두 계약서를 나란히 놓고 가운데에 대표님은 도장을, 나는 사인을 했다.
실질적으로 이틀을 일하고 2천을 벌게 된 셈이다.
원래 시나리오는 초고를 쓴 뒤 수정하느라고 몇 개월을 보내야 한다.
대략 6개월이다. 대개는 촬영이 결정되면 중도금을 받고, 크랭크업한 뒤에 잔금이 나온다. 따라서 그 2천만 원은 6개월 치 월급인 셈이다.
이걸 전에는 300만 원 받고 일했다.
월급 50만 원.
영화 제작이 무산되어서 중도금도 잔금도 못 받았으니.
이번 시나리오는 일단 재고 작업이 없다.
투자자나 감독이 요구하면 그때 재고 작업이 들어가는데 대표님이 재고는 없다며 단단히 못을 박았다.
계약한 뒤 대표님이 돈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500 들었어. 세금은 잔금 치를 때 깔 거야.”
“계좌로 보내지 않고요?”
“돈은 주고받아야 맛이지. 얼른 받아.”
“고맙습니다, 대표님.”
돈 봉투를 쥐자 포만감이 몰려왔다.
역시 돈은 손에 쥐어야 맛이다.
대표님이 말했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오늘은 네가 쏴.”
“예.”
받은 돈 500은 대표님 통장에서 뽑은 돈 같다.
아직 투자를 받은 것 같진 않으니까.
그 길로 빌딩에서 나가 먹자골목으로 들어갔다.
내가 소고기를 먹자고 했으나 대표님이 소고기는 소화가 안 된다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해서 곱창집으로 갔다.
그날 배 터지게 곱창을 먹었다. 소주도 둘이서 4병이나 마시고. 먹고 마시면서 대표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화판에서 20년이나 있었던 이 대표님의 경험담은 생생한 교육이었다. 대표님이 추구하는 영화는 철저히 상업영화. 메시지는 보일 듯 말 듯해야 하고 무거운 메시지는 사절이다.
나도 동감하는 말이었다.
그놈의 메시지를 담아 보겠다고 하다가 무명으로 6년을 보냈던 거였다.
기자 이야기를 쓴 것도 바탕은 메시지였으니.
영화는 예술이지만 비즈니스기도 하다.
난 그동안 재미있되, 예술적인 측면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영화의 예술적 기능을 먼저 추구했다고 할까.
역량이 안 되는데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한 거지.
어쩔 수 없었다. 영화를 제작하는 업무와 자본에 대해선 별생각이 없었으니까.
이제부터는 달리 생각한다.
영화는 비즈니스다. 예술과 메시지는 거들 뿐.
기분 좋게 술을 걸친 뒤 대표님과 헤어졌다.
남자 주연은 누굴 먼저 찾아갈지, 감독은 누가 하는 게 좋은지 대략이나마 정했다. 다행히 대표님이 신인감독을 찾자는 내 의견에 동의해 주었다. 기성 감독은 아무래도 자기 색깔을 넣으려고 할 텐데, 대표님이 그걸 간파하신 거다.
대체로 대표님과 내 의견에 큰 충돌은 없었다.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 * *
그로부터 5일 후.
시나리오가 말 그대로 책이 되어 사무실에 배달되었다.
난 대표님과 함께 배우들이 소속한 대형 기획사로 향했다.
까일지라도 가장 잘나가는 배우에게 맨 처음 까여야 다음 배우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