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영화다 1권
글드림 현대판타지 장편소설
차례
제1장 내게 생긴 능력
제2장 영화사에서 첫걸음
제3장 강렬한 인연
제4장 프리 프로덕션
제5장 메인투자
제6장 로즈 엔터테인먼트
제7장 영화 촬영 현장에서
제8장 감독과 제작실장
제9장 시사회
제1장 내게 생긴 능력
“휴…….”
신사동의 한 빌딩 앞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24살에 공모전에 입상한 이후 매년 2편씩 내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써서 영화사에 들고 갔는데 번번이 까였다.
이번에야말로 될 것 같았는데…….
내 시나리오를 읽는 영화사 제작부장의 표정이 처음엔 좋았는데 중반쯤에서부터 심드렁했다. 각색 좀 도와달라고 전화를 해 댈 때는 간이라도 빼 줄 듯하더니, 원안만 들고 가면 대놓고 귀찮은 표정을 짓는 인간이다.
지난 1년 동안 시나리오 작가로서 번 돈은 달랑 600만 원.
각색 두 번 참여해서 받은 돈인데 두 영화 모두 엎어졌다. 엎어질 수밖에 없는 작업을 하니까 엎어지는 거다.
작년엔 더 심했다.
계약금 천만 원에 선금 300을 받고 기획 단계에서부터 들어갔는데, 그 작품 완성하는 데 열 달이나 걸렸다.
고쳐 쓰기만 무려 12번.
초보 각색 작가에 감독까지 머리를 싸매고 겨우 완고를 냈으나, 결국 캐스팅 불발로 투자가 무산되어 영화가 엎어졌다.
시나리오는 분명 좋았다.
영화사도 쌈마이 소리나 듣는 듣보잡은 아니었다.
한데, ‘책’이 배우들 소속사에 들어가기만 하면 깜깜무소식이다.
매니저들이 까내기 때문이다.
배우가 읽기라도 해야 뭐가 되도 되는 거지.
젠장.
그 영화 엎어지고 정말 고민 많았다.
나이는 차지, 입봉은 못하지.
무명 시나리오 작가의 미래라는 게 뻔하지 않나.
출판사에 들어갈까? 아니면 다 접고 일반 기업에 취업이나 할까? 아니면 조금 더 시도해 볼까.
이런저런 고민이 앞다퉈 밀려왔다.
내 나이 29세.
1년만 더 지나도 취업하기 어려워지는 나이다. 출판사에 들어가는 것도 그렇다.
원래, 감독이 꿈이었다.
영화가 좋아서 시나리오를 썼던 것이지, 글 자체가 좋아서 글쟁이가 된 게 아니다. 학교도 방송영화제작과를 나왔고.
그러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보자는 심정으로 시나리오 한 편을 완성했다.
살해 위협을 받아가며 정·재계의 유착 비리를 파헤치는 열혈 기자이야기.
현실에선 보기 어려운 진정한 기자상을 그려 보고 싶었다.
동문 선배인 사진 기자 형 덕분에 취재도 많이 했다.
흥행 포인트는 분명히 있었다.
사회 고발 메시지도 있었다.
주인공 성격도 거침없고, 신문사 데스크가 정부와 싸우겠다고 결단을 내리는 장면에선 내가 봐도 감동이었다.
그렇게 영화사 다섯 곳을 돌았는데 반응이 비슷했다.
‘위험부담이 크다.’
싸게 쓸 만한 각색 작가가 낙심할까 봐 말을 돌리긴 했지만 결국 그 말이었다.
어떤 PD는 국정원이 압박을 넣을 거라는 말까지 했다. 현 대통령이 집권하는 이상 그게 우리나라의 현실이라면서.
그냥 재미없다거나, 천만 원이나 주고 살 시나리오는 아니라고 하면 될 것을 엉뚱한 핑계로 까는 거다.
“하…….”
그때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결국 취업을 해야 하나 싶었다.
이른 나이에 시나리오 공모전에 당선된 것이 결국 독이 되었다.
당선이 안 되었으면 연출부로 갔거나, 취업 준비를 했을 텐데.
공모전 당선 당시엔 내가 좀 자만한 것도 있다.
꿈이 곧장 실현될 줄로 착각했다.
시나리오 작가로 우선 입봉하고, 메이저 영화사에서 작업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다, 대박 영화에 타이틀을 올리면 영화감독도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영화감독은커녕 작가 입봉도 못했다.
메이저는 고사하고 삼류 영화사, 신생 영화사, 투자자 등쳐먹는 쌈마이들과만 전전했다.
처음에는 몰랐다. 세상을 모르고, 영화판을 몰랐으니까.
영화판도 결국 명문대와 연극영화과 인맥이 주류였다. 영화가 극장에 걸려야 잔금이라도 받지. 늘 선금만 받고 고생만 하다가 영화가 엎어졌다.
답답한 마음에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또 뭐 이리 맑은지.
“후…….”
나지막이 숨을 내뱉었다.
지금은 연출부에 들어가기에도 늦었다.
연출부든 제작부든 막내 대부분이 25살 이하다.
여러 회사에 과 후배들도 있고.
하… 어쩐다.
영화 일은 하고 싶은데 시간은 재촉하고.
여기서 더 버티면 인생 망칠 것만 같고.
전화를 꺼내 친한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작업해요?”
-아니. 어제 각색 하나 넘기고 누워 있다.
“홍대에서 술 한잔하죠?”
-무슨 일 있어?
“예. 인생 상담 좀 합시다.”
-뭔지 알 거 같네. 먼저 가 있어.
전화를 끊고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덜컹덜컹.
덜컹덜컹.
“이번에 내리실 역은…….”
달리는 지하철 유리창에 내 얼굴이 비쳤다.
멍하게 생각에 빠진 내 표정이 안쓰러웠다.
옛날 교수님이 술자리에서 술주정처럼 한 말이 있다.
영화는 천재만 해야 한다고.
정말 그런 걸까.
난 천재는 아니어도 창작력과 미학적 감성은 남보다 낫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그게 아니었다.
사실 서른다섯 정도는 되어야 세상 보는 눈도 생기고, 글도 좀 달라질 것 같긴 하다. 한데 그 나이의 선배들 태반이 지금 내 위치와 별 차이가 없다.
시나리오 작가로 살 것인가. 다른 삶을 살 것인가.
내게 정말 어려운 문제다. 영화를 사랑하기 때문에.
* * *
홍대 삼겹살집에 가서 소주부터 주문해서 한 잔 마셨다.
“크.”
오늘은 왠지 소주가 달게 느껴졌다.
그렇게 삼겹살을 굽고 있을 때 시간 맞춰서 선배가 왔다.
“오셨어요?”
“어, 그래. 빨리 왔네?”
“네, 앉으세요.”
“그래.”
“이모, 여기 잔 하나만 더 주세요.”
선배에게 소주를 따라주었다.
“각색은 잘 됐어요?”
“아직 몰라. 3고 끝내고 그냥 넘겼어. 천 받고 6개월이나 잡혀 있었는데 엎어지면 잔금 날아가는 거지 뭐.”
“계약금이 얼마였는데요?”
“각색 3고 조건으로 천오백. 양 실장이 엎어져도 잔금은 준다고 했는데, 이 바닥 붙어 있으려면 안 받는 게 나아. 잔금 악착같이 받는 놈이라고 찍히면 일만 안 들어와.”
선배가 그제야 한 잔 들이켰다.
탁-
잔을 내려놓은 선배가 날 보더니 물었다.
“넌 작품하고 있어?”
“각색 하나 끝내고 내 작품 썼죠.”
내 대답에 선배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 잘나가는 선배들도 못 팔고 있는데, 그게 되겠냐.”
“일단 하는 거죠 뭐. 형은 아주 포기했어요?”
“영화는 감독 예술이잖아, 감독 예술. 작가 예술 아니라고.”
선배의 말이 비수처럼 꽂히는 느낌이다.
형 말대로 작가가 쓴 작품은 작은 영화사에서나 봐주지 메이저에선 취급도 안 한다.
제작부 직원들이 굴러다니는 시나리오를 우연히 발견한 뒤, 유명 감독을 섭외해서 영화가 제작되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그 외에는 전부 감독이 쓴 작품이거나, 영화사에서 기획한 작품이다.
영화사는 시놉시스를 기획한 뒤, 작가와 감독을 섭외해서 작품을 만들어 나간다. 혹은 감독이나 작가가 기획 단계에서부터 함께 시작하거나.
여기서 나와 선배가 갈린다.
난 3류급이나 신생 영화사에서 기획 초기에 섭외하고, 선배는 메이저에서도 간간이 섭외한다.
그러나 선배가 작업한 영화도 절반 이상은 엎어진다.
선배가 1년에 버는 돈은 약 2천.
10년이나 일했는데도 일반 기업 연봉에도 못 미친다.
이런 이유로 영화판에는 전업 작가가 많지 않다.
거의 모든 작가가 입봉을 못하고 사라지거나, 입봉해도 유명 작가가 되지 못해 메이저 언저리를 전전하다가 사라진다. 억대를 버는 유명작가는 한 손에 꼽을 정도다.
잠시 생각에 잠긴 나를 본 선배가 말했다.
“너 고민 많구나.”
“예. 이번엔 정말 접을까 싶어서요.”
선배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같은 고민을 선배도 했고, 다른 작가들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 접으려면 지금 접는 게 낫다. 나야 이젠 발을 빼기 어렵지만 넌 아직 이십 대 아니냐. 접기엔 좀 이르긴 해도 더 버텨 보라고 말을 못하겠다…”
잠시 말을 끊은 선배가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네 인생 책임질 것도 아니고. 생각해 둔 건 있고?”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
“출판사나 광고업체에 들어갈까 싶네요.”
“취업하려면 영화사가 낫지 않아?”
선배의 질문에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메이저에 들어가기엔 제 스펙이 좀 그렇고, 마이너는 작가나 별 차이 없잖아요. 스태프 막내가 저보다 어리기도 하고.”
선배가 술을 털어 넣고는 웃으며 말했다.
“너, 제작부 일해볼래?”
“계약직은 좀 그런데…….”
“계약직 아니야. 지금 대표님만 계시거든. 어때?”
제작부 스태프가 아니라 직원이라는 의미다.
대표만 있는 영화사의 제작부라…….
흔치 않은 기회이긴 한데.
제작부 일을 해 보라는 선배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시나리오야 나중에 얼마든지 쓸 수 있으니까.
선배가 내 휴대폰에 전화번호를 찍어 주었다.
“이갑성 대표라고, 10년 전까지 뉴월드 총괄 프로듀서로 계시던 분이야. 형수님과 사별하고 일 그만두셨는데 다시 영화 하고 싶으셨나 봐. 직원은 경리 아가씨밖에 없어. 마이너야 어차피 다들 영세하니까.”
“10년 전이면 지금은 인맥이 없을 텐데요?”
“그 양반 영화판에서 20년이나 있었던 분이야. 신생이라도 그 형님 이름값이 어디 가겠냐. 너도 알다시피 신생 영화사가 처음에 필요한 인력이 작가 아니냐. 시나리오부터 개발해야 그다음도 진행할 수 있으니까. 직원 없을 때 네가 가면 딱이다.”
“생각 좀 하고요. 영화 자체를 접을 생각도 했거든요.”
“그래.”
나도, 선배도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제작부.
일 자체로는 흥미롭다. 경험을 쌓으면 프로듀서가 되고, 인맥만 넓히면 영화사도 설립할 수 있다. 영화사 자체는 자본금이 많이 들지 않는다. 시나리오를 잘 뽑아서 투자받으면 그 돈을 회사 운영 자금으로 쓸 수 있다.
일단 제작 일을 배운 뒤 독립 영화라도 찍어 볼까.
사실 여건만 되면 누구든 감독이 될 수 있는 시대다.
“형은 감독 준비 안 해요?”
“천만 관객 작가 타이틀은 있어야 어디 가서 연출한다고 말이나 하지. 내 필모가 종잡을 수가 없잖아. 최고 기록이라 해 봐야 600만. 망한 작품도 몇 개 있고. 누가 날 믿고 투자 하겠냐. 어떤 미친 톱스타가 내 작품에 홀딱 반하면 몰라도.”
“저예산 영화를 찍는 건 어때요?”
“돈 있으면 당장 찍지. 단편 말고 장편.”
“스릴러나 공포물로?”
“당연하지. 돈 적게 들고, 대박 가능성도 높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도 선배처럼 독립 장편 영화를 찍어 볼까 생각도 했다.
극장에 거는 영화가 아니라 인터넷이나 VOD용으로.
평이 좋으면 작가로서도 이름이 좀 알려지지 않을까 싶다.
한데 독립영화라 해도 1억 이상이 들어간다.
배우와 스태프 전원을 학교 후배로 써도 차비와 수고비에 술값, 밥값이 천만 원 이상이고, 차량과 촬영장비 사용료도 수천만 원이다. 영상 보정, 녹음, 편집, 타이틀 그래픽에 들어가는 비용도 상당하다.
선배가 술을 마시며 말했다.
“그나마 넌 결정할 시간이라도 있지. 지금 내가 다른 일 할 수 있겠냐. 기술도 없고, 장사할 돈도 없고.”
선배의 말에 동의하긴 어려웠다.
“선배는 그래도 풀린 케이스잖아요.”
“풀리기는 개뿔. 네 나이 때 한 선배한테 그랬어. 나 재능이 없는 거 같은데 계속해야 하냐고. 그때 선배가 그러더라. 이 바닥에서 한 10년만 버티면 중간은 간다고. 그거보다는 낫겠지 하면서 왔는데, 지금 내 위치가 딱 그 정도인 거야. 지금이 내 전성기일까 봐 무섭다 후…”
선배가 한숨을 쉬곤 말을 이었다.
“뭐, 더 나빠지면 나중에 박 선배 꼴 나는 거지.”
“박 작가님은 요즘 어때요?”
“그 형 쌈마이 다 됐어. 영화사 차리더니 본인이 욕하던 인간들 따라 하고 있더라. 쌈마이가 뭐, 처음부터 쌈마이였겠냐.”
일명 쌈마이.
영화 잘 모르는 부자들 유혹해서 투자받은 뒤 제작하는 척하다가 튀는 인간들.
형의 말이 이어졌다.
“감독 섭외가 안 된다. 배우 캐스팅이 안 된다 하면서 가짜 서류 만들어서 투자금 빼돌리고 있더라고. 그러면서 계속 투자해 달라고 요구하는 거야. 돈을 받으면 또 그 돈 삥땅쳐서 투자자들 속 타게 하고 말이야. 쌈마이들 때문이 투자가 안 된다. 투자가.”
형이 소주를 한 모금 마시곤 다시 말했다.
“영화 잘 만드는 척하다가 결정적으로 거액의 투자금을 요구하는 거지. 투자자가 망설이면 예산 문제로 제작이 어렵다는 말을 슬슬 꺼내는 게 순서야. 그러다 투자자가 손 떼면 영화가 엎어지는 거고.”
나도 대충은 알고 있다.
사기꾼들은 있지도 않은 직원 월급과 진행비. 감독과 배우 접대비. 시나리오 개발비, 부풀린 감독 계약금 등등으로 돈을 빼돌린다.
무명작가에게 달랑 300주고는 이중 계약서엔 2,000만 원을 준 것으로 속인다. 유명 작가 계약금이 5,000만 원쯤 되니까.
“크.”
형이 소주 반 잔을 마저 마시곤 말을 이어갔다.
“부동산 사업이나 하던 투자자들이 영화를 알겠냐고. 돈만 대면 극장에 걸리는 줄만 알지. 쌈마이들은 애초에 영화를 찍지도 않지만 찍어도 극장 개봉 못 하잖아. 거대 투자 배급사들이 개봉관을 독점하는데 무슨 수로.”
이 모든 현실을 영화판에 들어와서야 알았다.
지금도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들 대다수가 잘 모르고 이 바닥에 뛰어든다.
영화를 하고 싶으면 연출, 촬영, 조명, 제작 등을 해야지 시나리오 작가는 답이 없다. 연출을 위해 시나리오를 쓰면 모를까.
선배가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이갑성 대표님 밑에서 일 배워 봐. 시나리오 보는 안목이 있는 분이니까, 작가로 잘 풀릴지 누가 알아.”
나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만나 보기는 할게요.”
“그래.”
둘이서 소주 세 병을 마시고 선배와 헤어졌다.
집으로 오는 내내 고민에 빠져 있었다.
제작부로 전향해서 다시 시작해 볼 것인가.
아니면 아예 손을 뗄 것인가.
캔맥주 네 개를 사 들고 집으로 향하는 골목을 걸었다.
막상 시나리오를 접으려고 하니 미련이 밀려온다. 포기하려면 지금이 딱 좋은데, 몇 년 더 하면 잘 풀릴 것 같은 느낌이 자꾸만 들어서.
생각에 빠진 채 걷고 있는데 뒤에서 오토바이가 질주하는 소음이 들려왔다. 중국집 배달원 하나가 난폭하게 골목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 뒤에는 승용차가 들이받을 듯 달려오고.
빵빵-
“야, 이 새꺄! 거기 안 서!”
“어휴! 저 또라이 새끼!”
도로에서 시비라도 붙은 건가.
벽에 붙은 채 뒤를 보며 걸었다. 당연히 오토바이가 그냥 지나쳐 갈 줄 알았다.
그런데 오토바이가 과속방지턱을 넘는 순간 휘청거리더니 내 쪽으로 확! 들이닥쳤다.
뭐하는 거야!
“으악! 비켜!”
황급히 피하려 했지만 늦고 말았다.
벽을 옆으로 들이받은 오토바이가 그대로 내게 덮쳐들었다.
퍽-
오토바이 운전자가 내 몸을 들이받는 순간.
내 몸이 공중에 뒤집힌 채 떠올라 있었다.
시간이 매우 느리게 흘렀다. 죽는 게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게다가 머릿속에서 번개가 치는 것 같았고, 밤인데도 뒤집힌 세상이 환하게 보였다. 정신을 잃는 그 짧은 순간에 그것만은 분명히 보았다.
* * *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날 친 놈은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벽에 긁힌 자국이 길게 나 있었다. 오토바이가 날 치고는 벽을 긁으며 나아갔다가 자빠진 듯했다.
진짜 어이가 없네…….
그 자리에 앉아 헛웃음만 지었다.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약간 어지럽고, 눈알이 돌아가기라도 했는지 눈의 초점이 좀 안 맞았다.
다친 덴 없는지 살펴보았다.
다행히 옆구리와 다리가 좀 욱신거릴 뿐 부러진 곳은 없었다.
병원에 갈까, 경찰서에 먼저 갈까 하다가 관두었다.
주변에 CCTV도 없고. 경찰에 신고하자니 딱히 외상도 없고. 사실 좀 귀찮은 마음도 들어서 내일 아침에 몸 상태가 안 좋으면 그때 신고할 생각이었다.
* * *
집에 들어와서 한숨만 뻑뻑 쉬며 맥주를 마셨다.
재수가 없으려니 별일이 다 생긴다.
머릿속에 빛이 터졌는데 그건 도대체 뭘까?
이마를 만져 보자 혹이 났다. 정확히 미간 가운데.
오토바이 운전자의 헬멧이나 어깨가 내 이마를 들이받은 모양이다. 그래서 눈알이 제 위치에서 돌아간 듯.
지금은 시야가 정상이다. 아직 어지럽긴 했지만.
설마 뇌를 다친 건 아니겠지.
맥주 4캔을 모두 비운 뒤 씻고 침대에 누웠다.
시나리오는 잠정적으로 접기로 했다. 이갑성 대표라는 분을 만나 보고 인연이라 느껴지면 그분 밑에서 일하기로 했다.
그렇게 만취 상태로 잠이 들었는데.
밤새도록 두통에 시달렸다.
뇌와 눈이 타 버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극심한 통증이었다.
흡사 뇌세포가 모두 녹아내리는 것처럼.
길고 긴 밤을 지나고 새벽이 되어서야 통증이 가라앉았다. 아침에 눈을 뜨고 나서야 뇌세포가 녹아내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반대였다. 뇌세포가 모두 깨어난 느낌이 들었다.
멍하게 천장을 보았는데, 천장의 벽지 무늬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착시가 아니라 진짜 그랬다. 이게 뭐지 싶어 한참이나 천장을 보았다.
내 머리가 어떻게 돼 버린 건가.
그러다 스마트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시야에 희한한 환상 같은 게 보였다. 사고 후유증인가 싶어 머리를 흔들어 환상을 떨쳐내자 사라졌다. 그러곤 아무 이상이 없어서 습관처럼 포털 뉴스를 보았다.
그 뉴스를 보는 순간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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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G전자 : SG그룹의 대표 기업으로 휴대폰…]
↑
[SG전자] [SG건설] [SG생명] [SG물산] [SG…
[SG그룹 : 한국의 대기업으로 2016년 영업매출…]
↑ ↱ [출석 : 어떤…]
【SG그룹 이상진 회장이 검찰에 출석.】
↓ ↳ [검찰 : 범죄의 수사…]
[이상진 회장 : SG그룹의 회장. 나이…]
[형제 이상신] [형제 이상희] [부친…]
↓
[이상신 : SG물산의 사장. 나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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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털의 한 줄 뉴스와 연관된 데이터가 갑자기 생겨나더니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뉴스 하나의 창이 관련 정보의 창을 만들고 그 창이 또 다른 정보의 창을 만든다. 처음의 뉴스와는 다른 정보가 갈수록 확장되어 가고 있었다.
물론 그 정보는 내가 알고 있던 정보가 아니었다.
마치 하나의 정보와 연관된 맵을 보는 것 같았다. 머리에 무슨 장치를 넣은 것처럼 입체 영상 같은 것이 정보의 창을 형성하며 끝없이 가지를 치며 이어진다.
놀랍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이게 대체 무슨 현상인가 싶던 그때.
“읔!”
머리가 지독하게 아파졌다.
하나의 정보에서 파생된 정보가 수백 개로 확장되어 복잡한 그물처럼 엮여 있었다. 지금도 세부 정보가 확장되고 있다.
내 두뇌가 처리할 수 있는 용량 범위를 넘어서자 두통이 발생한 거였다.
뇌세포가 모두 깨어난 게 아닌 건가?
극심해지는 두통에 몸부림치다가 좀 전처럼 머리를 흔들며 생각을 떨쳐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정보의 지도가 사라졌다. 두통도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가시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내 머릿속에 뭔가 생겼다.
정보를 분석하는 뭔가가.
* * *
아인슈타인이 뇌를 10% 정도 활용했다던가.
내 뇌는 최소한 그 이상은 쓰게 된 것 같다.
몇 차례 실험을 통해 뇌의 능력을 확인해 보았는데 정말 세상 모든 것을 분석할 수가 있었다.
사고의 일시적인 후유증인지, 극히 희박한 확률로 뇌세포가 각성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원래 인간에게 있던 잠재 능력이 우연히 개방되어 버린 것인지.
뇌의 활용도가 어마어마하게까지는 아닐지라도 높아진 것은 확실했다.
그 불운한 사고가 내게 기이한 능력을 가져다 준 것이다. 이게 행운인지, 저주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도 놀랍고 신기해서 한동안 멍하게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눈에 보이는 사물을 분석해서 시야가 몹시 어지러웠는데 분석을 차단하자 사라진다.
마치 뇌가 하나 더 생긴 느낌.
기존의 뇌가 내 자아이고, 마우스라면.
새로 생긴 뇌는 자아의 통제를 받는 인공지능 같은.
놀라운 것은 기이한 능력만이 아니었다.
기존의 뇌와 새로 확장한 뇌가 완벽하게 구별된다는 점이다. 주인은 확실히 기존의 뇌였다. 기이한 능력을 내 의지로 통제할 수가 있으니 기존의 뇌라고 따로 정할 수밖에 없었다.
수도 없이 머릿속에서 확장되며 퍼지는 정보를 차단하지 않으면 일상생활을 할 수가 없다. 밥을 먹을 때도 식단에 대한 정보가 뜰 지경이다.
천만다행이었다. 내 의지로 꺼 버릴 수 있으니.
시험 삼아 하나의 정보를 가지고 계속 연관 정보를 확장했더니 정보의 창이 수도 없이 만들어져갔다.
다만 여지없이 두통이 발생해서 더 진행할 수가 없었다.
머리만 아프지 않다면 정보가 무한대로 확장될 것만 같았다. 그만큼 머릿속에 들어차는 정보의 총량도 어마어마하게 커질 테고.
뇌가 정보 네트워크 세계에 들어갔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뇌가 실제로 네트워크에 접속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전혀 모르는 정보들이 뜨고 있었으니.
정보 확장이 1분을 넘어가면 두통이 시작된다.
머리가 아플 즘에 확장된 정보의 창은 약 200개.
기존의 내 뇌활용도라면 첫 몇 단계도 못 넘고 머리가 터져 버렸겠지.
“후… 이거 완전 대박이긴 한데.”
깊은 한숨을 쉬며 능력을 차단했다.
이 특별한 능력이 두려웠다. 뇌세포를 너무 활용해서 혹시 단명하는 건 아닐까. 그게 아니면 뇌에 이상이 생긴 것일 수도 있고. 분명 오토바이에 치여서 머리를 다친 후에 이런 능력이 생긴 거니까.
그래서 늦은 아침을 먹고 종합 병원으로 갔다.
MRI도 찍고 피검사도 하고 그랬는데 뇌에 이상한 점이 있기는 했다. 출혈이나 종양은 없었다. 다른 환자의 뇌 사진보다 밝다는 차이가 있었다. 어두운 영역도 있으나 일반인보다는 약간 밝았다.
어두운 부분은 아직 활성화되지 않은 영역인가.
검사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으니 나이가 지긋한 의사가 내게 찾아왔다. 젊은 의사들까지 대동해서.
“혹 두통이 심하거나, 환각 증세가 있지는 않나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능력에 대해 말해 줄 수도 없고.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일단 숨기고 싶었다.
“딱히 두통이 있진 않아요.”
“음… 워낙 특이한 경우라 여러 선생이 확인해 봤는데 특별한 징후는 찾지 못했어요. 두통이나 이상 증상이 없다고 하니 건강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네요.”
“뇌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니라는 거죠?”
“소견으로는 그렇습니다. 혹, 학회에 발표해도 되겠습니까?”
능력이 밝혀질까 봐 걱정되는 마당인데 학회에 보고라니. 이리저리 불려다닐 게 뻔하다. 능력을 안 써도 두통이 생기고 그러면 모를까.
“문제가 생기면 몰라도 지금은 거절하고 싶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석 달에 한 번 정도 내원해서 경과를 봐야 합니다. 혹 이상이 생기면 바로 병원에 오시고요.”
“예.”
의사가 날 설득하려는 느낌이 들어서 서둘러 병원에서 나갔다. 뇌 의학 학회에서 뭔가를 발견하는 바람에 내 이름이 세계적으로 팔리는 건 정말 사양이다.
* * *
집에 돌아온 뒤에는 내 능력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보기 위한 실험에 돌입했다.
보면 볼수록 놀랍기 그지없는 능력이었다.
뇌의 능력인지, 뭔지는 몰라도 정보 분석의 지도는 내 의지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했다. 게임의 정보창 형태로도 볼 수 있고, 책을 보듯 문장 형태로도 본다.
처음에 지도처럼 보였던 건 정보를 인식하는 내 첫 의식이 그런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다음 입체 영상으로 보였던 것도 한 차원 높은 방식으로 보려 했기에 그렇게 변한 거고.
텍스트로만 보면 두통이 별로 없고, 입체 영상으로 보면 금세 머리가 아파진다. 텍스트라고 해도 범위가 상당히 확장되면 틀림없이 두통이 생긴다.
홀로그램 같은 영상이 눈에 보이는 것은 뇌가 그렇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나만 보이는 도우미 같은 걸 만들어도 된다. 실존하지 않는 홀로그램처럼 내 뇌가 도우미를 만들어 내고, 나만 그걸 인식할 수 있으니까.
좀 무섭긴 하지만 다중인격체를 만들 수 있다는 의미다.
그걸 시험했다가 정말 기절할 뻔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여배우 정효주.
그 아름다운 정효주가 순간 내 침대에 앉아 있었다.
내가 만들어 낸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은 채.
물론 뇌가 인식하는 허상이다.
“이름이 뭐지?”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정효주잖아요.”
할 말을 잃었다. 내가 묻고 내가 대답한 꼴이다.
정확히는 새로운 뇌가 알아서 대답한 거다.
이걸 컴퓨터로 치면 더블 코어라고 해야 하나.
기존 코어는 386인데 새 코어는 인공지능 급.
물론 그 인공지능의 메모리가 좀 부족하긴 하지만.
뇌가 어디까지 인지하는 걸까.
정효주를 만져 보자 따뜻한 살의 촉감이 느껴졌다.
실제로는 없는데 사람의 체온이 느껴지다니.
뇌의 착각이 얼마나 무서운지 실감 난다. 허상이라고 인지하면 손이 정효주의 몸을 관통하여 허공을 휘저을 뿐이고.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러다 정말 미쳐 버릴지도 몰라.
환상에 빠져 허우적대기 전에 정효주를 지워 버렸다.
시나리오를 보면 어떻게 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제목을 보는 순간, 제목과 관련한 숱한 단어들이 스스로 지도를 그리며 확장되어 갔다.
처음엔 제목의 뜻과 의도가 줄줄이 생겨나더니 그걸 지우고 다른 제목을 생각하자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제목들이 떴다.
원래 제목은 ‘주 기자가 간다’였다.
그 제목 주변에 다른 제목들이 떴는데 새로 뜬 제목이 더 나았다. 마치 ‘이 제목이 훨씬 더 낫다!’라고 알려 주는 것처럼. 아주 단순했지만 핵심을 찌른다.
그 중 하나를 선택했다.
[저널리스트.]
이 얼마나 쌈박하고 명료한 제목인가.
왜 이 제목을 생각 못했을까.
영화를 보고 난 뒤 저널리스트란 과연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제목이다. 바로 표지 제목을 바꾸었다.
이어 제1신부터 읽어 나갔는데 보이는 문장이 많다 보니 정보의 확장이 너무도 빨랐다. 단어와 문장에 관한 정보와 분석이 무수히 가지를 친다. 멀미가 날 정도로.
그래서 제한했다.
스토리와 연관된 정보만 뜨는 것으로.
그랬더니 정확하게 스토리와 관련한 정보만 떴다.
더구나 정보 탐색 범위가 좁아지면서 두통도 별로 없었다.
쉬지 않고 시나리오를 쓸 수 있다는 뜻!
이건 뜻밖의 선물이었다.
먼저 첫 신은 신문사 사무실에 들어가는 장면.
머릿속 인공지능이 이 작품을 빠삭하게 분석이라도 한 듯 다른 대안이 줄줄이 떴다. 나무뿌리처럼 정보들이 뻗어 나가는지라 이 홀로그램 역시 간략화했다.
기본 맵은 상하 좌우에만 뜨고, 분석한 정보는 한 단계만.
세부 정보나 가지 치는 정보도 한 단계씩만 확장.
그렇게 정해 두고 분석한 첫 단계를 보았다.
장면 하나를 두고 네 개의 창이 상하 좌우에 뜬다.
왼쪽 - 같은 장면에 더 나은 행동과 대사.
위쪽 - 다른 장면에 같은 행동과 대사.
아래쪽 - 같은 장면과 유사한 다른 장면.
오른쪽 - 모든 것이 다른 장면.
왼쪽 창을 선택하자 제2신이 달라졌다.
세부적으로도 수많은 경우의 수가 나타났다.
기존 제2신으로 갈 것인가, 기존 제2신에서 다른 내용을 선택할 것인가. 아예 다른 장면으로 갈 것인가. 기존과 유사하지만 더 나은 장면으로 갈 것인가.
무한대로 이어지는 경우의 수다.
첫 단계로 돌아가서 오른쪽에 있는 [모든 것이 다른 장면]을 선택해 보았다. 생각지 못한 제1신이 떴다.
이 작품의 내용상 첫 장면으로 가장 나은 것.
그냥 신문사에 출근하는 장면이 아니었다.
출근하기 전 아침. 검찰 포토라인에 서는 인사들의 멘트를 따려고 사생결단으로 들이대는 장면이었다.
몸싸움. 고함. 터지는 플래시. 악다구니. 그리고 대기업 인사를 당혹하게 만드는 주인공의 질문!
주인공의 성격. 앞으로 보게 될 주인공의 행보.
사건의 소개. 기자라는 직업의 특성. 영화의 주제.
기업인과 검찰의 위선. 블랙코미디. 몰입감 등등.
이러한 것들이 첫 장면에 다 들어 있었다.
이걸 영상화로 돌려 보는 건 어떨까.
한 배우를 머리에 떠올린 뒤 이 장면을 영상화로 돌리자 마치 그 배우로 영화로 찍은 듯한 영상들이 전개되었다.
정효주를 만들어 내 실존하는 것처럼 보인 것과 같이 영화 그대로의 화면이 보였다.
롱 테이크로 약 3분간 벌어지는 장면.
영상이 끝나자 내가 구현한 배우가 땀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인터뷰를 끝냈다. 증인과 참고인이 모두 검찰 청사로 들어간 뒤 물러서는 그 표정에 다양한 감정이 실렸다.
만족감. 허탈감. 의구심. 체력부족. 짜증. 희열 등.
배우가 제대로 연기했을 때 나올 명연이었다.
영상화로 돌려 본 이후 엄청난 두통에 시달렸다.
3분 동안 능력을 썼는데 무려 6시간이나 누워 있어야 했다.
한 가지는 분명히 알겠다.
능력을 쓰는 시간이 길어지면 회복도 길어진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