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90화 윈프레드 셀프 조교 (2)
식사를 마쳤을 때 윈프레드의 태도와 마음가짐은 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긴장이 완전히 풀어져 몸은 보들보들했고 마음은 말랑말랑했다. 그 상태로 조니 곁에 딱 달라붙어 나른하게 늘어져 있었다.
“맛있었어?”
“응. 아주. 후식도 먹고 싶고.”
“그렇게 먹고 더 먹겠다고?”
“……머리 쓰다듬어 줘.”
“하하.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다니까.”
조니는 푸근하게 웃으면서 후식으로 윈프레드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고 윈프레드는 눈을 감고 그 손길을 느끼며 조니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노예가 아니라 애첩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도끼질당하는 것보단 이게 낫지. 도망칠 수 없다면 즐기라는 격언도 있고.’
적지에 가서 함정에 빠지거나 사로잡히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에 내려오는 격언이었다. 끝까지 저항해도 도망칠 수 없다면 차라리 즐기면서 기회를 엿보든가 아예 그곳의 사람이 되어 대우라도 받으라는 말이었다.
암살자라는 직업의 특성상 잡히면 대부분 고문 후 죽는 게 예삿일이었으니 배신만 하지 않는다면 주인을 갈아타는 일도 허락되는 것이다. 기회가 생기면 도망쳐서다시 돌아오면 될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윈프레드는 이곳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아예 접어 버렸다.
써먹기 위해서 길들이는 것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 대우라면 못 지낼 것도 없었다. 만에 하나 도망치려다 들켰을 때 벌어질 수있는 일들을 생각하면, 두 눈 감고 노예가 되는 게 나은 점이 더 많았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위니엘이 문제네. 그 아이는 고통 저항이 완전 내성에 가까우니까. 팔다리를 아무리 쪼개도 눈썹 하나 까딱 안 할 텐데.’
위니엘은 특급 암살자라는 게 빛이 바랠 정도로 일족 역사상 가장 뛰어난 암살자였다. 성격이나 체질 등도 완벽하게 암살에 맞춰져 있었고 고통은 아예 무시하는 수준이었다.
느끼기는 하지만, 그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아무리 큰 고통을 준다 해도 ‘아, 이 정도로 아픈 거구나.’라고 생각하면서 태연하게 차를 마시고 잠을 잘 수 있었다.
견디고 버티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이후에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럴 수 있다는 건 어떤 자극을 받더라도 겉으로표출하지 않는 부동심의 경지였으니, 위니엘이 자기처럼 순순히 노예 신세를 받아들이고 조교당한다는 건 생각하기 어려웠다. 어떻게든 자신을 데리고 탈출할 기회만 노릴 게 분명했다.
‘위니엘 혼자라면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까지 데리고 가려다간 붙잡힐 수도 있다.’
고개를 들지 않고 정신없이 먹기만 했지만 처음 식탁에 앉았을 때 이미 이 집의 구성원들을 살피는 건 모두 끝마친뒤였다.
그래서 일부러 관찰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먹기만 한 것도 있었다.
‘드레니카라고 했던 뿔 달린 여자, 겉으로는 주인에게 아첨하고 아양 떠는 것 같았지만 속에는 짐승이 자리 잡고 있었지. 그것도 잔혹한 피로 물든. 위니엘과 함께해도 승산이 쉽게 보이지가 않았어. 게다가 일리아스라던 토라진 얼굴의 여자. 그 여자도 위험하다. 겉보기엔 연약해 보이지만 인간의 눈이 아니었어. 정체가 뭐지?’
암살을할 때는 언제나 최악을 가정해야 했다. 내가 약하고 상대가 강할 것이라고 가정하고서, 어떤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상정하고 머릿속에서 모의전을 벌였다. 그런 후에 열 번을 해도 모두 안전한 결과가 나올 때에만 조심스럽게 실행하는 게 암살이었다.
그런데 그 두 여자들은 도저히 견적이 잡히지가 않았다. 정체를 알 수가 없고 위험하다는 생각만 드니 암살을 시도할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분위기만 그렇고 실제론 아무 능력이 없을 수도 있지만, 그런 불확실성에 기대 암살을 시도했다가 비명에 간 일족의 암살자가 한둘이 아니었으니 윈프레드는 탈출할 생각을 아예 접을 수밖에 없었다.
위니엘이라면 몰라도 자신은 발각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가 않았기 때문에.
“윈프레드.”
“응?”
윈프레드는 갑자기 조니가 이름을 부르자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너 지금 안 좋은 생각 하는구나?”
“…….”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인간이 있었다.
조니.
그녀들의 주인이 된 자.
신체 능력은 보잘것없고 암살한다면 1초 만에 할 자신이 있었지만 눈치 하나는 기가 막혔다. 상대의 마음을 읽는 데 있어 천부적이었다.
지금만 해도 눈을보고 있던 것도 아니고 어깨에 몸을 기대고만 있었는데 대체 어떻게 알아챈 건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윈프레드는 둘러댈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고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미안해. 혹시라도 동생이 탈출을 시도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 난 결코 도망칠 생각이 없으니믿어 줘.”
“정말 도망칠 생각 없어?”
“응.”
“완벽한 기회를 잡았고 동생이 같이 도망가자고 해도?”
“…….”
윈프레드는 한순간 말문이 막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솔직히 도망치고 싶은 게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대답하지 못한 것 때문에 또 감옥에 매달려 도끼질을 당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고 몸이 덜컥 굳어 버렸다.
그 순간 조니가 윈프레드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어 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괜찮아. 아직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계속 그러진 않으려고 노력할 거지?”
“……응.”
윈프레드는 조니의 말에 긍정하면서, 몸에서 긴장을 풀고 다시 어깨에 몸을 기대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을 느꼈다. 이 순간 조니가 얼마나 큰 양보를 하고 봐준 것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에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게 정말 진실일까?
사실은 자기 자신이 진심으로 조니의 곁에 머무르려고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하자. 난 이미 어느 정도 길들여졌어. 스스로 내 자신을 조교하라는 그 말 때문에.’
거부할 권리도없었거니와 거부할 때의 벌칙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윈프레드는 진심으로 그 명령을 따르는 데 노력하고 있었다.
대가 없는 자유는 없는 것이고, 그 자유를 누리고 싶었으며, 만에 하다 기만하다 들켰을 때 진정한 파국을 맞이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그 결과 고작 밥 한 끼를 먹는 시간 동안 벌써 어느 정도 조니를 생각하고 따르는 마음이 생겨나 있었다.
자기 암시와 조절이 뛰어난 암살자기에 그런 것도 있었다. 일반인이었다면 어떠한 마음을 먹고 싶어도 마음대로 되지 않지만, 암살자인 그녀는 숨 쉬는 것만큼 쉽게 할수 있을 정도로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충성도는 아직 12정도지만 호감도가…… 훗.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을정도로 올라 버렸다니.’
31.
그게 지금 윈프레드 스스로 측정한 조니에 대한 호감도였다.
정말로 좋아하는 남자다 생각하고 밥을 먹여 주고, 먹여 주는 걸 받아먹고, 간단한 스킨십부터가볍게 품에 안기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걸 받아들이는 와중에 그만큼 마음이 열리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도 빠른 속도로 올라가고 있었고, 하루가 지나면 몇까지 도달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단순히 시간이 흐르기때문이 아니라 좋아하는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다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미인계에는 이골이 났지만 정말로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해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조절이 되지가 않았다. 은퇴하고 나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면 해 보고 싶었던 것들을 다 하고 있고, 사랑하는 남자 곁에 머무르는 조강지처를 꿈꾸며 품었던 마음이 계속해서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내가 이렇게 되리란 걸 알아보고 그런 명령을 내린 건 아니겠지?’
한순간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윈프레드는 바로 마음속에서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아무리 눈치가 빠르다고 해도 그건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감정 조절에 철저한 그녀 자신도 이렇게까지 될 줄몰랐으니 타인이 알아본다는 건 절대로 말이 되지 않았다.
신들의 왕에게서 여신을 훔쳐 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땐 항복의 의미로 반쯤 아무렇게나 주워섬겨 앞으로 사랑하게 될 거라고 말했지만, 진짜 이렇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리된다 해도 아주 긴 시간 동안 체념하고 포기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다면 모를까, 고작밥 한 끼 먹는 시간 동안 벌써 이 정도로 마음이 열리고 끌리게 될 줄 어떻게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벌써 조니에게 끌리는 마음이 생기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머리를다정하게 쓰다듬어 줄 때마다가슴이 간질간질하고 말랑말랑한 기분이 들고 있었으니까.
“……주인.”
“응?”
그래서 윈프레드는 반쯤 충동적으로 그런 말을 내뱉고 말았다.
“……주인에게 안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