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71화 미네르바 절망 조교 (1)
잡자마자 냉동 보존시켰다는 성녀의 정신 상태가 왜 이리 바람직하게 썩어 빠졌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조니는 일단 데리고 가기로 했다. 어차피 노예로 부릴 거니 순종적으로 복종하고 굴종을 자처하는 다재다능한 소질의 미네르바는 다른 노예들의 귀감 그 자체였지 나쁠 건 없었다.
안개의 숲을 지나오며 시험 삼아 몇 가지를 시켜 봤는데 뭐든 간에 막힘이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하시는 편이 암퇘지들이 더 기뻐하옵니다.’라며 교태를 부리면서 조니에게 부족한 지식을 가르쳐 주었다. 도대체 어디 사는 어떤 놈에게 교육받았는지 몰라도 완벽한 우등생이었다.
의심이 가는 건 잡아서 얼렸던 그 주인이 직접 조교한 게 아닌가 했는데, 미네르바는 잡히자마자 지금까지 계속 냉동 보존돼 있었다고만 했다. 그럼 잡히기 전부터 이미 이런 상태였냐고 물었더니 그땐 순진해 빠진 처녀 계집이었다 하고, 이도 저도 아니면 어찌 그렇게 잘 아느냐고 묻자 미소만 방싯방싯 지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수상쩍은 구석이 있었다.
‘테크닉을 보면 노예 도시에서 조교받은 건 확실한데 지금까지 계속 냉동 보존돼 있던 노예란 말이지. 발랄라이카 씨가 잘못 알거나 날 속인 게 아니라면 주인이 중간중간 깨워 조교했는데 미네르바가 그 사실을 감추고 있는 것이거나, 아니면 정말로 냉동돼 있던 것은 맞지만 모종의 수단으로 그 상태에서 조교를 했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당사자 모르게 한 건 아냐. 모른다는 게 아니라 말을 안 하는 것만 봐도 알고는 있다는 거니까. 그럼 수단이 중요한 게 아니라 왜 말을 하지 않느냐가 중요한 거네.’
거기까지 계산이 되자 답은 금방 나왔다.
‘조교한 대상에 대한 충성심이 남아 있다 이거지?’
조니가 주인이라고 말하는 순간 태도를 바꿔 머리를 조아린 걸 보면 뼛속까지 노예 근성이 심어져 있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주인으로 인정하면서도 조교 대상에 대해 묻는 말에만 대답을 하지 않는 건 조니보다 조교 대상이 상위 명령권자라는 의미였다.
한마디로 정상적인 루트로 구매하면서 주인을 바꾸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왕을 진정한 주인님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다. 조니를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노예처럼 행동하는 건 주인을 대하는 법에 대한 조교가 완벽한 탓이고.
즉, 현재 조니는 진짜 주인이 아니라 미네르바가 단지 주인처럼 대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었다.
‘……아니,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일견 생각하면 그게 맞는 것 같지만 두 번 생각해 보면 뭔가 이상해. 정말로 왕을 진짜 주인님으로 모시고 있다면 왕의 명령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내가 주인이라고 했다고 해서 날 정말 주인처럼 대할 이유가 없어. 난 왕이 아니니까. 아무리 노예 근성이 심어져 있다고 해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결국 미네르바는 왕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대답하지 않은 게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으로 일부러 대답하지 않은 거다.’
그리고 정말로 그런 것이라면, 조니가 주인이라고 했다고 해서 정말 주인처럼 대하고 스스로 노예를자처하는 것 역시 미네르바의 자율적인 판단이라고 봐야 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조니는 미네르바가 처음 냉동 보존 장치에서 깨어났을 때와, 자신이 주인이라고 말한 순간 완전히 달라진 눈빛과 말투,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건 단순히 태도만 바뀐 게 아니라 아예 사람이 바뀐 듯한 느낌이었다.
또한 이상한 점은 그 이전부터 있었다.
슥 둘러본 것만으로 노예 도시가 아니란 걸 알아본 점, 그리고 냉동되었다 깨어난 직후에 아무런 확인도 없이 시간이 꽤 지난 것 같다고 말한 점 등등. 그건 그 장소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이런저런 정보들을 종합해 본 조니는 이내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깨어난 직후에 미네르바의 내용물이…… 바뀌었다?’
그런 일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그런 것이라면 모든 설명이 가능했다.
또한 바뀐 내용물은 지금까지 깨어 있어서 시간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정확한 시간은 잴 수 없었다. 더불어 줄곧 노예 도시 안에 있었으며 그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고, 노예가 되어서라도 다시 노예 도시 안으로 들어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래, 그래서 완벽한 노예임을 자처했다고 하면 모든 게 말이 돼. 그리고 왜 그렇게 된 건지는…… 짐작 가는 바가 하나 있고.’
다른 건 몰라도 밀수꾼들의 우두머리인 발랄라이카가 밀수품을 헷갈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냉동 보관 장치 안에 있던 노예가 아테나의성녀인 건 확실하다고 봐도 괜찮았다.
그리고 내용물이 바뀌었고, 그 바뀐 내용물이 다시 노예 도시로 들어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면?
답이 나온다.
“미네르바.”
“하명하소서.”
“내가 볼 땐 네가 날 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말야. 넌 어떻게 생각해?”
“소녀가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그래? 내 눈엔 네가 미네르바가 아니라 아테나로 보이는데, 내 착각인 건가?”
“…….”
그 순간 처음으로 미네르바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고, 조니가 대신 웃었다.
“나를 이용해 노예 도시로 돌아갈 생각인 거겠지? 이미 완전히 굴복한 주인인 왕의 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백 년 만에 처음으로 자유를 찾은 아테나는 자신이 더 이상 아테나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여신의 육체를 완전히 버리고 성녀의 몸으로 강림했기에 정신과 육체에 담긴 신성 중 하나를 잃어버린 것이다.
잃어버린 것은 육체에 담겨 있던 전투의 신성.
남은 것은 정신에 담겨 있는 지혜의 신성.
본래는 정신이 완전히 굴복하고 육체가 굴복하지 않아 정신을 포기하는 것이 이상적이었지만, 왕의 손에서 도망치기 위해서는 굴복하지 않은 여신의 육체를 버리고 이미 굴복한 정신이라도 다른 곳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남아 있다가는 결국 육체마저 굴복하게 돼 전쟁의 신성이 노예 도시에 강림하게 되니 그것만은 기필코 막아 냈어야만 했다. 전쟁을 일으킬 수 있게 되면 앞으로의 일은 뻔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여신의 육체와 분리돼 더 이상 전쟁의 여신 아테나가 아닌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가 되어 신성의 격이 떨어지고 다른 존재가 되었다지만, 왕에게 종속감을 느끼고 굴복하고 있는 것은 여전했다. 육체는 달라졌지만 아테나일 적부터 마음은 이미 온전히왕에게 종속된 이상 미네르바가 굴복한 것과 똑같았으니 새로운 몸으로 강림한들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아직 굴복하지 않은 여신의 육체마저 없었으니 오히려 더욱 심한 종속감을 느끼고 있었다. 한낱 인간인 성녀의 몸에는 왕에게 완벽하게 조교된 마음을 억누를 만한 의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눈을 뜨자마자 왕의 곁으로 끊임없이 다가가고 싶었고 그의 발치에 엎드려 복종하고 싶었다.
미네르바의 주인은 그녀 자신이 아니라 왕이었으니까.
어찌어찌 왕의 곁에서 멀어지는 것만은 가능했지만 명령만 듣지 않게 된 것일 뿐 미네르바는 이미 완전한 왕의 노예였다. 여기서 스스로 더 왕과 멀어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고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 도망친 것을 사죄하고 암퇘지처럼굴종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눈앞의 노예 상인에게 들켜 버렸다. 이 정도면 충분히 들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미네르바보다 노예 상인의 지혜가 더 앞선 것이다.
그런 것은 왕조차 할 수 없었다. 왕에게는 지혜가 없었으니까. 악의 도시 바티칸에는 지혜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바티칸에 지혜가 존재하게 된 것은 아테나의 마음, 즉 미네르바가 굴복하여 지혜의 신성이 바티칸에 떨어지게 된 순간부터였다.
하지만 그것은 고작 몇 년밖에 되지 않았고 바티칸의 모든 이들이 지혜가 생겼음을 인지하고 다루기에는 지극히 짧은 시간이었다.
왕은 오히려 영생을 살아가는 만큼 모든 것이 느긋해, 지혜를 다룰 수 있게 된 것을 알았음에도 노력하지 않았다. 그의 진짜 목표는 전쟁의 신성이었고 지혜의 신성은 필요로 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지혜를 다루는 자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바티칸의 그 누구보다도, 심지어 왕보다도 지혜로운 노예 상인이. 어쩌면 악의 도시바티칸에서 유일하게 지혜를 획득한 자일지도 모르는 그런 자가.
‘이것은 붙잡지 않을 수 없는 동아줄이오이다. 이것은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지니.’
지혜의 여신인 미네르바가 이것이 마지막 기회임을 모를 수가 없었다.
“소녀, 거짓 없이 말하나니 소녀는 아테나가 아니라 미네르바요, 전쟁을 관장하던 여신에서 전투의 신성을 스스로 버려 격이 떨어진 지혜의 여신이옵니다.”
“역시 그런 거였구만. 정신과 육체가 담당하는 역할이 따로 있었다는 거고, 육체를 버리고 정신만이 성녀의 몸으로 들어왔다는 거지? 왕에게 붙잡혀 조교되고 있다가.”
미네르바는 함박미소를 지었다. 역시나 이자는 지혜를 완전하게 다룰 줄 아는 노예 상인이었다. 지혜의 여신인 그녀의 가호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여신의 육체를 되찾고 다시 천상으로 올라갈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그녀는 이미 완벽한 왕의 노예였으니 그렇게 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다만 그런 방법이 있다는 것만 알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상대는 스스로 궁구하고 깨달을 줄 아는, 지혜로운 자이니까.
이후의 일은 완전히 하늘의 뜻에, 아니, 눈앞의 노예 상인에게 맡길 뿐.
“정확하옵니다. 정신이왕에게 굴복하여 영혼까지 노예임을 교육받았으니 지금도 왕에게 돌아갈 방법만을 찾고 있는 천박한 암퇘지 신세이옵니다.”
“내가 너를 산 주인인데? 그런데도 왕에게돌아가고 싶은 거야?”
“마음은 그렇사옵니다. 그분이 진정한 주인이시기에.”
“하하. 그렇단 거지. 좋아, 다 알아들었어.”
“과연 왕께 돌아갈 수 있게끔 소녀를 도와주실 주인으로서 부족함이 없사옵니다. 부디 소녀를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왕에게 반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가 한계였다. 다른 마법적 제약이 있는 것은 아니나 이미 마음이 완전히 왕에게 넘어갔기에 벗어나려고 생각하는 것조차 떠올릴 수 없었다. 부러진 날개가 완전히 나았어도 날기를 포기하고 주인의 어깨에서 지저귀기만 하는 관상조가 지금의 미네르바였다.
그러나 지혜로운 이 노예 상인이라면 틀림없이 그녀를…….
“암, 그래야지. 성녀도 아니고 날개 잃은 여신을 평생 동안 노예로 부릴 수 있는 기횐데. 얼굴도 모르는 왕 같은 놈 따위 두 번 다시 떠오르지 않도록 예쁘게 잘 길들여 줄게. 평생 내 발을 핥으며 노래할 수 있게끔.”
미네르바는 잠시 자신이 말을 제대로 이해한 건지 잘못 이해한 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뭐라 하셨사온지? 소녀가 제대로 듣지 못 한 것 같사…….”
“제대로 못 들었어? 널 따먹을 거라고.평생 동안. 앞으로 다른 누구도 감히 떠올리지 못할 때까지. 앞으론 내가 진정한 주인이란 걸 전신에 새겨 줄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내 취향으로 물들여버릴 테니 기쁘게 받아들이렴.”
“…….”
미네르바는 직감했다.
잘못 걸렸음을.
‘전하, 어쩌면 소녀는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르겠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