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55화 베티 공략 시작
한참 후에야 눈물을 그친 잔느는 토끼처럼 새빨개진 눈을 하고 있었다. 하도 많이 운 탓이었다.
그러나 그뿐만은아니고 다른 이유도 하나 더 있었다.
하도 서러워서 울 때는 몰랐는데, 마음을 추스르고 보니 침대에 조니와 단둘이 누워서 안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옷만 벗고 있지 않았지 정을 통한 부부나 다름없는 장소이고 거리였다.
또한 계속해서 뒷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는 조니의 손길도 당혹스러웠다. 그가 그렇게 다정하게 대해 주는 것도 그렇거니와 특히 그 손길이 기분 나쁘지 않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매님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경매장에 팔아 버린 나쁜 사람인데 손은 보통 사람처럼 따뜻하다니…….’
성녀로서 잔느는 죄책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자매들을 팔아 버린 노예 상인이 침대에서 품에 안고 뒷머리를 쓰다듬어 주는데, 그 행위를 거부하지 못하고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이성적으로는 밀쳐내고 싫어해야 맞는데 감정적으로는 그 따스한 손길에 점점 기분이 풀리고 있었다.
그 이율배반적인 감정에 깊은 죄책감을 느낀 잔느는 마음속으로 변명을 했다.
‘내가 해 달라고 한 게 아니라 조니가 마음대로 한 거니깐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거야. 그리고 그만하라고 말하면 화를 내거나 기분 상해할 테니까…….’
그렇게 마음속으로 변명한 잔느는 그 뒤로도 한동안 조니의 따뜻한 품 속에서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조니가 끊임없이 어루만져 주는 그 다정한 손길을 느끼면서.
한참 후에야 마음이 따뜻하게 푸근해진 듯한 충족감을 느끼고서야 잔느는 조니의 품 속에서 고개를 들어 얼굴을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조니.”
“이제 좀 진정됐어?”
“네. 덕분에, 흡.”
조니는 갑자기 덮쳐 온 조니의 입술 때문에 말을 끝까지 다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놀란 것도 처음뿐이고 이내 몸에서 힘을 풀고 천천히 눈을 감으며 조니의 입술이 주는 느낌을 받아들였다. 기습적으로 한 것에 비해 거칠고 우악스런 키스가 아니라 부드럽고 감미로운 키스였다.
“키스쟁이.”
입술이 떨어지자 잔느는 눈을 뜨고 흘겨보며 그렇게 말했다. 시간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아무 때나 키스를 해 오는 조니가 얄궂어서였다.
하지만 조니는 여유롭게 반문했다.
“그만큼 널 갖고 싶어서 그래. 참느라 얼마나 힘든지알아?”
“……미안해요.”
잔느는 자기도 모르게 사과하고 말았다. 조니의 눈빛이 심상찮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그대로 큰일을 내 버릴까 말까 고민하는 야수와도 같은 눈빛이었다.
설마 이대로 자제를 못 하고 덮치는 건 아닐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조니의 얼굴을 보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입에서 거친 숨결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조, 조니…….”
“잔느가 참기 힘들게 했으니까 참아.”
“흡!”
조니는 그대로 잔느의 입술을 잡아먹듯 덮어 버렸다. 그리고 뜨겁게 달궈진 혀로 잔느의 입술을 핥고 빨며 천천히 들이밀었다.
끈적한 움직임은 있어도 거칠지는 않았기에 잔느도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입안으로 들어와 그녀의 혀를 애무하고 타액을 교환하며 질척거리게 움직일 때도, 심장이 떨리고 무섭기는 했어도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조니의 혀놀림에 서서히 익숙해져 가자 잔느의 두 팔이 천천히 올라오더니, 조니의 등을 감싸 안았다.
쪼옥…….
진한 키스가 끝나자 두 사람의 얼굴은 둘 다 붉게 상기돼 있었고 숨이 뜨거웠다. 그 가운데 조니는 그 이상의 진도를 나가는 대신 잔느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품에 안고 속삭였다.
“이대로 자자.”
“……네.”
잔느도 조니의 품을 약하게 파고들면서 그의 가슴 안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몸이 나른해지며 잠이 솔솔 오고 있었다. 너무 꽉 붙어 있었기에 조금 숨이 막히긴 했지만, 그래도 기분 좋게 따뜻했기에 푹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4월 25일
조니는 신성 제국의 27차 정벌전이 끝난 이후 이틀간을 집에서 푹 쉬었다. 전후 정리와 노예들을 관리하며 열정적인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벌전 당일엔 예상치 못하게 새벽 내내 움직이느라 피곤하기도 했고 그 뒤로도 티아마트의 방문을 받는 등 이런저런 긴장과 스트레스가 누적돼 있었기에, 이틀간의 휴식은 리즈의 엉덩이만큼이나 꿀맛이었다.
조니뿐만 아니라 기존의 노예나 새로 들어온 노예들에게도 서로의 처지를 어느 정도 인식하고 대충 무엇을 하고 지내야 할지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던 차였기에, 그녀들에게도 충분히 의미 있는 휴일이 아니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재충전을 끝마치고 집을 나선 오늘은 25일. 드디어 신사 클럽으로 대피시켰던 베티를 만날 날이었다.
“어떻게 변했을지 참 기대되네.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상태로도 타고난 창부였는데 이젠 기술적으로도 많이 성숙해졌겠지? 아무리 처녀를 건드리지 않기로 했어도 그곳은 신사 클럽이니까.”
말이 신사 클럽이지 신사 같은 젠틀한 클럽이 아니라 고위 신사들을 위한 사교 클럽이었다. 고도로 교육받은 클럽 전용 창부들이 항시 대기하고 있으며 언제 어느 때 방문하더라도 즐겁게 쉬고 서비스를 만끽할 수 있는 그런 장소. 당연히 여자를 조교하고 길들이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는 클럽이니만큼 베티와의 거래에 대비해 단단히 교육시켜 놨을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상상이나 했을까? 절대 외부인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 가르치고 길들인 만큼 조니가 파고들기 더 쉬워진다는 것을. 오히려 베티의 마음이 셸리 경에게 붙잡혀 있을수록 조니에게 더 유리했다.
조니가 바로 노예 도시의 엔터테이너, 노예 연출가였기 때문에.
“아, 빨리 보고 싶네. 바로 가야지.”
원래는 이런저런 조교 용품이나 좀 사 두고 천천히 갈까 했는데, 변했을 베티의 모습을 생각하니 손가락이 근질근질해졌다. 조니느 일단 다른 일정은 다 미뤄 버린 채 바로 신사 클럽으로 향했다.
신사 클럽으로 가자 셸리 경이 조니를 알아보고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춘 자만이 지을 수 있는 그런 미소였다.
“투자비는 가져왔나?”
“이번 주 건 저번에 선불로 냈으니 상관없을 텐데요?”
“벌써 꼬리를 마는 건가? 흥, 주제를 알긴 아는군.”
그러나 조니도 피식 웃어 주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그거야 만나고 나서 나갈 때 내면 되는 거죠. 만나기도 전에 미리 낼 필요 있나요? 누구만 좋으라고.”
“하…… 그 말은 오늘 첫 만남에서 처녀를 받을 자신이 있다고 받아들여도 되나?”
얼굴이 붉어진 셸리 경이 짓씹듯이 말했지만 조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500스파크를 꺼냈다.
“누가 오늘이래요? 오늘은 일단 미리 연장하죠.”
“……흥.”
셸리 경은 건방진 모습을 보이는 조니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500스파크는 적은 돈이 아니었기에 마다하지 않았다.
“홀로 들어가서 적당히 빈자리에 앉아 있도록. 곧 보내 주도록 하지.”
“어디 얼마나 길들여 놨는지 저명한 신사 클럽의 조교 실력을 한번 보도록 하죠.”
“나갈 때도 그렇게 여유 있을지 두고 보겠네.”
셸리 경은 으름장을 놓고는 안쪽으로 사라졌다.
“내게서여유가 사라지면 그날이 노예 도시가 무너지는 날일걸?”
조니는 그저 피식 웃어 주고는 홀 안으로 들어갔다.
홀에는 곳곳에 유리 테이블과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는 두 개의 커다란 소파가 배치되어 있었다. 소파는 파트너가 서로 앉을 수 있게 2개씩 세팅되어 있었지만 앉기만 하는 용도는 아니란 걸 바로 알 수 있게끔 누울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크고 길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조니와의 내기가 오늘부터란 걸 알고 있는 사람들인지 생각보다 많은 자리가 들어차 있었다. 어차피 이 노예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노예를 조교하거나 조교된 노예를 데리고 노는 일 뿐이니 밤까지 즐길 생각으로 일찍 나온 모양이었다.
“흠. 그러고 보니 500스파크나 내고 있는데 술이랑 안주는 주려나? 돈이야 이제 넘쳐나지만 기본세팅도 안 해 주면 짜증인데.”
디저트 중에서 가장 비싼 암브로시아조차 16스파크였으니 500스파크는 정말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조교된 노예라면 D급을 한 명, 조교가 안 돼 있다면 적게는 두서너 명에서 많게는 10명 이상의 노예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사실 암브로시아의 가격인 16스파크보다 싼 노예도 심심찮게 나오는 게 노예 경매장이었으니 매주 500스파크의 투자비는 기본 세팅이 아니라 최고급 세팅으로 깔아 줘도 신사 클럽에선 훨씬 남는 장사였다.
“오, 저기 나오는군. 이야…… 아주 그냥 제대로 작정하고 꾸며 놨잖아?”
홀을 기웃거리던 조니는 스테이지 안쪽 문을 열고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베티가 입장하는 모습을 보고는 휘파람을 불었다. 웨딩드레스 한 벌만 해도 200스파크짜리 명품이었다. 헤나 같은 10스파크짜리 노예라면 20명이나 낙찰할 수 있는 초고액의 옷을 이제 겨우 조교한 지 10일밖에 안 된 노예한테 입힌 것이다.
게다가 반지며 귀걸이에 목걸이, 티아라 등의 액세서리도 기품 있는 것들로 도배를 해 놨으며, 심지어 아침부터 뷰티 살롱에 보내 풀코스로 치장했는지 유행하는 최신 헤어스타일에 메이크업까지 완벽했고 아로마와 스파도 제대로 받았는지 탄력있는 우윳빛 피부에선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단순히 조교만 한 게 아니라 벌거벗은 다른 노예들에 비해 얼마나 좋은 대우를 받고 있는지 세뇌시키기 위해서 작정하고 돈을 부은 것이었다.
“저 정도로 잘해 줬으면 아무리 노예가 됐다고 해도 마음이 넘어갈 수밖에 없겠지. 실력만이 아니라 돈까지 아끼지 않고 쓴다 이거지?”
그 정도로 잘해 주는데 과연 10일에 한 번씩 와서 2시간 동안 술상대나 하고 가는 손님에게 마음이 넘어가 처녀를 내주는 노예가 있을까? 아니, 저 정도면 노예가 아니라 애인 대우를 받고 있을 수도 있었다. 누가 봐도 허름한 옷이나 입고 있는 조니에게 가능성이 없는 승부로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조니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베티가 다가오는 것을 지켜봤다.
“어머, 저와 비슷한 또래시네요? 홀에 나가서 접대 한번 해 보라기에 다른 분들처럼 나이 많으신 손님이 오셨을 줄 알았는데. 전 베티라고 해요.”
“얼굴처럼 귀여운 이름이네. 어머니가 아주 미인이셨겠어.”
“호호. 칭찬 감사합니다, 손님. 손님 말씀처럼 정말 미인이세요. 어머니의 얼굴을 닮아서 행복할 정도로요.”
조니가 초장부터 칭찬을 강하게 했지만 베티는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기품 있게 웃는 게 첫 접대가 아니라 수백 번은 나가 본 듯한 닳고 닳은 창부의 관록이 묻어나고 있었다. 딱 봐도 일반적인 방식으로 접근했다가는 단번에 수작이란 걸 알아보고 경계를 할 것 같았다.
‘참 잘도 가르쳐 놨네. 나는 분명히 발끝에도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야. 명성만큼의 실력은 확실히 있어.’
하지만 조니의 장기는 마음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함락시키는 것이지,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자신을 대신해서 이 정도로 수준 높은 엘리트 창부 교육을 시켜 놓은 셸리 경과 신사 클럽이 너무 고마웠다.
“이런 데서 일하는데 표정이 굉장히 밝네. 주인님이 잘해주나 봐?”
조니의 질문에 베티는 예쁘게 웃으면서 고개를 바로 끄덕였다.
“네. 정말 자상하고 멋진 주인님이세요.”
“호오…… 말하는 투를 보니 반하기라도 한 거야?”
베티는 놀랍게도 그 질문마저 고개를 끄덕거리며 긍정했다.
“네, 정말로 반했답니다. 여자라면 반하지 않고는 못 배길 만한 분이세요. 노예가 돼서 슬펐는데 지금은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라면, 손님께서도 어느 정도 감이 오시려나요? 호호.”
“이야, 그 정도란 말야?”
“네.”
베티는 확신에 찬 생기 있는 눈으로 생글거리며 그렇게 대답했다.
이 정도로 길들이고 세뇌시켜 놨으니 셰릴 경이 득의양양해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같은 노예 상인으로서 정말 굉장한 수완이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는 실력이었다.
하지만 조니는 베티를 바라보며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베티의 완전한 마음이 셰릴 경에게 넘어간 순간.
조니가 짜 둔 각본은 바로 그 순간부터가 시작이었다.
‘좋아. 누구 실력이 더 좋은지 비교해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