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50화 드레니카 입수
이로써 조니와 잔느의 상호 존중은 다음과 같은 총 여섯 가지가 맺어졌다.
첫째, 조니는 강간을 하지 않는 대신 잔느는 키스를 거부하지 않는다.
둘째, 조니는 지하 감옥에 가두지 않고 고문을 안 하는 대신 잔느는 조니와 한 침대에서 잔다.
셋째, 조니는 피어싱과 타투를 하지 않는 대신 잔느는 묻는 말을 무시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넷째, 조니는 밥을 먹여 주는 대신 잔느는 조니와 노예들을 치료해 준다.
다섯째, 조니는 여신의 눈물을 빼앗지 않는 대신 잔느는 델리아니가 조니에게 절대 복종하게끔 직접 조교한다.
여섯째, 조니는 낮에 옷을 입게 허락해 주는 대신 잔느는 잘 때는 전부 벗는다.
전부 응당한 대가가 있는 조항들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전부가 잔느에게 불리한 독소 조항이었다. 어찌 됐든 잔느는 이로써 스스로 옷을 벗고 한 침대에서 같이 자야하며 묻는 말에 진실만을 대답하고 다쳤을 땐 치료해 줘야 하며 키스를 받아들이고 델리아니를 직접 조교하게 되고 말았으니까. 보통은 반항을 잠재우고 말을 듣게 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지만 그 과정이 일거에 사라진 셈이었다.
“자, 이렇게 우리의 상호 존중은 총 여섯 가지야. 다 간단한 것들이니까 따로 적지 않아도 잊진 않겠지?”
“네…… 괜찮아요.”
“좋아. 그럼 이제 정리하고 나가 보자. 리즈는 저기 쓰러져 있는 애들한테도 마법 낙인을 찍고 아리스톨은 줄 같은 걸로 잘 엮여서 데리고 갈 수 있게 묶어.”
“아, 주인님. 스파크 더 주셔야 하는데요? 주신 스파크는 다 썼어요.”
“일리아스.”
리즈의 말에 조니는 일리아스를 불렀고 일리아스는 그냥 한숨만 폭 내쉬고 아공간에서 보관 중인 돈주머니를 꺼내 조니에게 줬다.
“여기.”
“고마워, 일리아스. 넌 참 착한 것 같아.”
“……흥.”
일리아스는 기도 안 찬다는 듯이 팔짱을 끼며 코웃음을 쳤다. 지배 가문의 한 곳인 키마이라 가문의 중추를 맡고 있는 대마법사인 그녀가 한순간에 마법 낙인이 찍히고 가진 돈마저 다 털린 게 웃기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저 레비아단 계속 조종할 수는 있는 거야? 가능하면 나도 데려가고 싶은데.”
“집에 촉수 괴물용 우리 있어?”
“없는데.”
“그럼 위험해. 해가 뜬 뒤에나 임대할 수 있을 텐데 그 전에 지배가 풀려서 날뛸 거야.”
“그럼 네가 준 돈으로 우리 하나 임대한 후에 잡아다 기르면 되겠네?”
일리아스는 얄밉게 말하는 조니를 찌릿 노려보며 대답했다.
“레비아단을 잡아다 기르는 건 불가능해. 새끼를 잡아서 기르는 거야.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몰랐어?”
“그거야 우리 일리아스가 할 일이지.”
“…….”
무안을 주려 했지만 오히려 핀잔만 들었다. 자연스럽게 고개가 옆으로 홱 돌아가고 분한 나머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아, 토라진 표정 너무 좋아. 어쩜 그렇게 귀엽니?”
슥슥.
조니가 아예 머리까지 쓰다듬었지만 일리아스는 그냥 눈을 꾹 감고 참는 수밖에 없었다. 입을 열어 봤자 손해만 본다는 걸 이미 너무여러 번 겪었으니 차라리 무시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다행히 조니도 그 이상은 놀리지 않고 웃기만 했다. 이제 다른 쪽도 정리가 다 끝났을 테니 티에라 델 성채를 빠져나가야 할 때였다.
“자, 그럼 나가자, 얘들아.”
조니는 새로 늘어난 노예 3명과 수많은 전리품을 챙겨 들고 티에라 델 성채를 빠져나갔다.
몇 분 뒤. 조니 일행이 떠나고 일리아스의 거주구에 적막이 감돌 때 옥좌 뒤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빠져나왔다. 제이크였다. 주인이 잡힌 것은 알았지만 명령도 떨어지지 않았고 혼자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어 그냥 옥좌 뒤에 숨어만 있던 것이다. 하지만 주인이 잡혀갔으니 죽더라도 구하러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제이크를 따라 암캐 한 마리가 따라 나왔다. 암캐는 제이크의 뒷구멍을 혀로 핥으며 낑낑거렸다.
“끼잉끼잉…….”
자신을 버리고 가려 한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크르릉…….”
암캐가 평소보다 애교를 부리며 가지 말라고 만류하자 제이크는 잠시 낮게 으르렁거리며 암캐를 노려봤다.
“끼잉…… 멍멍.”
그 사나운 눈빛에 기가 죽어 고개를 피한 암캐는, 곧바로 뒤로 돌아 엉덩이를 내밀고 살랑살랑 흔듦으로써 남편의 기분을 풀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노력한 것이 효과가 있는지 제이크는 암캐 뒤에 올라타고 허리를 흔들어 주었다.
“멍! 멍멍!”
암캐의 행복한 울음소리가 텅 빈 지하 거주구에 울려 퍼지고, 제이크는 결국주인이 스스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곧 태어날 새끼들을 위해서라도.
조니 일행이 열 명이 넘는 전리품을 굴비 엮어 가듯 주렁주렁 매달고 방랑자들의 구역을 가로질러 가자 뒤늦게 나와 어디 주워 먹을 거 없을까 기웃거리던 노예 상인들이 감히 간을 보려 하지도 못하고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그들 모두 아우스펙스를 쓸 수 있으니 대략의 스펙은 알아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열이 넘는 노예를 수확한 것에서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전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대부분은 검투 노예가 있어 봐야 한 명뿐이었으니 혼자서 건드릴 만한 전력이 아니었다.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봐야 한다니까. 저치들이 내게 겁먹고 뒤로 물러날 줄이야, 하하.”
인간이 아닌 이종족들이 뒤섞여 살아가는 곳이다 보니 노예 도시에서도 치안이 가장 안 좋은 방랑자들의 구역이었지만 지금 조니 앞에선 평화롭기만 했다. 실제로 방랑자들의 구역에서 현 조니 일행을 건드려 볼 수 있을 만한 전력은 지배 가문인 키마이라 가문을 제외한다면 오직 ‘드래곤들’뿐이었다. 물론 실제 드래곤이란 의미는 아니었고 키마이라 가문의 인정을 받은 실세들을 뜻했다. 그들은 모두 티에라 델 성채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명성과 자격이 있었고 콜로세움 토너먼트의 챔피언을 여러 번 배출한 노예 상인들이었다.
‘그래 봤자 이제 나에게도 별거 아닌 일이지. 당장 아리스톨과 페넬로페만 해도 챔피언은 따 논 당상이고 델리아니는 말할것도 없으니까. 뭐, 델리아니는 조교가 필요하긴 하겠지만…… 열흘이나 버티려나?’
또한 예상치 못하게 마스터 일리아스를 노예로 삼은 데다가 많은 스파크까지 수중에 넣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뭘 해도 여유가 넘쳤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대출을 받아 가면서 돈 없는 척을 해 노예들의 위기감과 자책감을 끌어내게 하는 작전은 쓸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어차피 이젠 아리스톨도 손에 넣었으니 그럴 필요도 없었다. 다른 노예 상인들이 그러하듯 돈 펑펑 써 가면서 편하게 조교하고 돈을 벌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급한 일처리는 베티와 미노타우르스뿐인가? 베티야 글피에 한 번 보고 나면 다음 달 5일에나 또 볼 수 있으니 시간 맞춰 천천히 하면 되고, 미노타우르스가 문제네. 전력이라면 지금도 충분한데 기껏 암살자까지소포를 부쳐 달라고 했으니……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하나만 주문했을 텐데.’
어떻게 처리할지는 아리스톨을 보낼 때부터 계획해 놨기에 문제 될 게 없었다. 다만 두 명을 주문했기에 하나가 잉여 전력이 된 게 더 큰 문제였다. 평범한 검투 노예라면 토너먼트에서 우승시킨 뒤 비싸게 팔면 되는데 암살자는 노예 도시에 정식 수요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검투 노예로 전향시킨다고 해서 쉽게 적응할 수 있을 것같지도 않고.
‘쓸모를 만들어 내야지, 뭐. 한 명만 노출시키고 한 명은 비밀 호위로 둔다든지.’
물론 비밀 호위 같은 것도 별 의미가 있지는 않았다. 치안이 안 좋은 구역들이 있기는 해도 암살 같은 게 벌어지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런 거라도 안 시키면 당장 쓸데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기에 더 좋은 쓸모가 생기지 않는다면 정말 비밀 호위라도 시켜야 할 판이었다.
그리고 길은 어느덧 방랑자들의 구역을 넘어 본거지인 뱀족의 구역에 접어들었다. 지배 가문들의 거주 홀에서 멀어졌는지 인기척이 뜸하고 여느 때의 노예 도시처럼 돌아다니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평소라면 탈주 노예를 잡으러 나온 순찰자들 한둘이 보일 만도 했지만 오늘은 전부 지배 가문 쪽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한산하네. 빨리 들어가서 씻고 잠이나 자…….”
조니가 막 입을 연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구름과는 모양이나 속도가 확연히 달랐기에 조니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파충류의 것처럼 샛노란 눈자위에 세로로 길쭉하게 찢어진 눈동자와.
“안녕, 조니? 잘 지냈어?”
“……드레니카 누님?”
날개까지 달린 용인화 상태였기에 조니는 얼굴은 알아보지 못했지만, 목소리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틀림없이 두 번 다시 볼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드레니카의 목소리였다.
“설마 탈주한 건가요?”
조니는 놀랐지만은 드레니카의 강함을 알고 있었기에 납득했지만, 일리아스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납득하지 못했다.
“드레니카라면 니렐리스 대주교의 노예잖아? 어떻게 도망쳐 나온 거지? 애드베르토 세르빌리를 찍은 지도 한참 되었을 텐데?”
드레니카는 일리아스를 바라보다가 씩 웃었다.
“그 마법 낙인 말하는거지? 죽으니까 사라지던데?”
“뭐? 죽었다고?”
일리아스는 얼굴이 하얘졌고 잔느와 달리아니는 반대로 약간 밝아졌다. 자신들은 실패했지만 다른 자매들은 핵심 목표 중 하나를 처단하는 데 성공한 것이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드레니카는 그녀들의 생각을 부정해 줬다.
“침입자 100여 명을 붕대로 감아서 주렁주렁 달고 오는데 방심해 있더라고. 그래서 한 방에 머리를 날려 버리고 부활하지 못하도록 육신을 완전히 가루로 으깨 줬지. 붕대도 마력이 완전히 흩어질 때까지 끊어 버리고. 재수 없는 미라 자식 같으니라고. 감히 날 붕대갈이로 써먹었으니 백번 죽어 마땅해.”
“……말도 안 돼. 아무리 드래곤의 피가 흐른다고 해도 마법 낙인의 종속감에선 벗어날 수 없어! SSS급이 아니라 2급짜리 드래곤이라고 해도 그건 불가능해!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거지?”
일리아스조차 마법 낙인에선 자유로울 수가 없어서 조니를 따라올 수밖에 없었으니 용인화를 해 봤자 SSS+까지가 한계인 드레니카가 주인을 때려 죽였단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게 가능했으면 노예 도시는 이미 오래전에 지배력이 풀어져 무너졌을 것이었다.
“후후. 그게 책상에 앉아 펜대나 굴리는 약골들의 생각인 거지. 난 우리 조니가 가르쳐 준 대로 해서 벗어날 수 있었어.”
일행 전체의 눈이 조니에게로 모여들었고 조니는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노예들과 드레니카를 번갈아 보다 뒷걸음을 쳤다.
“……응? 으응? 왜 날 봐? 난 아무것도 가르쳐 준 거 없거든?”
“그 방법도 상호 존중으로 가르쳐 주시면 안 될까요?”
“저 말이 정말이야, 조니? 나도 알려 줘. 나는 절대로 벗어나지 않을것을 맹세할 테니까 제발.”
잔느와 일리아스는 눈을 무섭게 뜨고 조니에게 달라붙었고 리즈처럼 이미 조니에게 마음을 준 노예들은 그저 새초롬한 눈으로 조니를 흘겨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제 조니 곁에서 떨어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다른 노예에게 그런 방법을 알려 줬다는 게 조금 그렇기는 할 수밖에 없었다.
“저기요, 드레니카 누님. 내가 뭘 가르쳐 줬다고 그런 소릴 해요? 난 그런 방법 알려 준 적 없거든요?”
“네가 내 마음을 돌리면서 한 말 있잖아. 그걸 적용했더니 주인을 때려죽이는 것도 가능하더라고. 이렇게말하면 알아듣겠지?”
그제야 조니도 비로소 알아듣고 입을 쩍 벌리고 경악했다.
‘주인에게 맞는 즐거움을 가르쳐 주려고 하다가 아예 죽여 버렸다고? 아니, 이건 때려죽이는 것 자체가 봉사의 범주에 들어가면 마법 낙인이나 정신 마법도 저지하지 않는다는 거잖아?’
“깨달은 모양이네? 후후. 어쨌든 그렇게 마법에선 벗어날 수 있었는데 니렐리스 대주교가 하는 일을 보면 보통 놈이 아니더라고. 이대로 가다간 정말 괴물들이 나와서 날 갈아 버릴 것 같아서 몸 좀 의탁하고 싶어서 찾아온 거야.영악한 너라면무슨 수를 낼 것 같아서 말이지.”
“……저기요, 누님. 그 말은 나도 때려죽일 수 있다는 건데 내가 받아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조니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자 드레니카는 지면으로 착지한 뒤 용인화를 풀고 조니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고는 가슴을 문질러 댔다.
“우리 사이에 너무 박하게 군다. 너라면 날 길들일 수도 있을 거 아냐? 나도 이제 정말 갈 데 없고 해서 너 아니면 비빌 데도 없어. 말도 잘 들을게, 응?”
“…….”
“아이, 그러지 말고. 정말 말 잘 듣는 노예가 되겠다니까? 누가 찾아와서 나 내놓으라고 하면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길들여 놨으니 안심해도 된다고만 말해 줘, 응응?”
“…….”
조니는 살갑게 애교를 부리며 눈웃음을 살살 치는전쟁 무기를 보고, 큰마음을 먹었다.
‘그래, 아무리 방심했다고는 해도 지배자들 중 하나인 니렐리스 대주교를 때려죽였다면 드레니카는 평범한 노예들과는 급이 아예 달라. 데리고만 있어도 더 이상 날 건드리거나 핍박할 사람은 없을 거야. 하지만 은신처가 필요해서 내게 의지하는 것뿐이기에 언제든지 떠나거나 마음을 바꿀 수 있다는 게 위험하니 그걸 막아야 하는데…….’
안전장치를 찾아 눈을 돌리던 조니의 시선이 어떤 두 사람에게서 못 박힌 듯 움직이질 못했다. 바로 곁에 최적의 안전장치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조니는 드레니카의 등을 밀어 두 사람 앞으로 데려갔다.
“이쪽은 드레니카. 때리는 걸 좋아하는 누님이지.”
그리고 드레니카에게 다른 사람을 소개시켜 줬다.
“얘는 아리스톨. 맞는 걸 좋아하는 암캐야.”
“호오…… 그럼 저쪽은?”
아리스톨과 야릇한 시선을 교환한 드레니카의 시선이 나머지 한 사람에게로 향하자 조니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아가씬 잔느. 죽지만 않으면 얼마든지 치료해 줄 수 있는 성녀야.”
때리고 맞고 치료하고의 무한 순환 고리라는 안전장치가 완벽하게 형성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