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45화 일리아스 & 잔느 & 달리아니
27차 정벌전의 가장 많은 전력이 니렐리스 대주교에게 향했다면 가장 강한 전력은 마스터 일리아스에게 향했다. 신성 제국이 배출해 낸 최강의 성기사인 광휘의 기사 델리아니를 필두로 아프로디테의 재림이라고까지 불리는 역대 최고의 성녀 잔느가 함께하고 있었다.
니렐리스 대주교와 달리 알려진 게 거의 없는 마스터 일리아스에게 보내기에는 지나치게 강하고 아까운 전력이라는 평도 많았지만, 적어도 그녀들 둘이라면 확실하게 암살에 성공하고 무사히 복귀할 수 있을 거라는 전망 때문에 최종적으로 그렇게 결론이 나게 되었다. 정벌전의 전력은 거의 대부분 돌아오지 못하고 순교하게 되지만 델리아니와 잔느는 단 한 번의 정벌전으로여신의 곁에 보내기에는 너무 아까웠기때문이었다.
그리고 티에라 델 성채에 진입한 특수조는 입구의 경비병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순찰 병력도 없는 것을 보고 낙관적인 전망을 하고 있었다.
“경비병이 거의 없는 걸 보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게 분명해 보입니다, 성녀님. 호위 부대가 부가 목표들의 시선을 끌고 있는 동안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복귀하지요.”
“알았어요, 델리아니. 하지만 다른 쪽으로 간 분들도…… 무사히 돌아오실 수 있을까요?”
“……핵심 목표를 빨리 처리한다면 도우러 가 보죠. 하지만 지금은 핵심 목표를 처단하는 것에만 집중을 다해야 합니다.”
“알겠어요. 마력 봉인은 저에게 맡겨 주세요. 반드시 해낼 테니까요.”
잔느는 오늘 작전을 위해 받아 온 성광의 지팡이를 굳세게 쥐며 그렇게 말했다.
그 자체로 신성력을 품고 있는 성스러운 나무의 가지를 잘라다 빛의 크리스털을 박아 만든 그 지팡이는 신성 제국의 3대 신기 중 하나였다. 신성 마법의 효과를 2배로 높여 주는 데다 신성력의 소모는 절반으로 막아 주는 단 하나뿐인 교황급 지팡이였다.
또한 잔느는 악의 도시 바티칸의 사악한 정신 마법에 저항하기 위해 역시 3대 신기 중 하나인 여신의 눈물이라 불리는 신성한 목걸이까지 차고 있었다. 모든 사악한 존재의 접근을 물리치는 이 신기는 착용자를 모든 사악한 기운에게서 방어해 주기 때문에 직접적인 공격만 받지 않는다면 완벽히 무사한 상태로 신성 제국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었으며, 대마법사로 추정되는 마스터 일리아스의 마법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핵심적인 도구기도 했다.
3대 신기 중 2가지나 한 몸에 지니고 있었으니 마스터 일리아스가 얼마나 사악하고 강력한 대마법사든 간에 잔느는 반드시 막아 낼 자신이 있었다.
“계단이 끝나 갑니다. 준비하십시오, 성녀님.”
“네, 달리아니.”
빛의 기사단장 델리아니와 성녀 잔느는 오늘 반드시 거대한 악 중 하나를 처단하리라 결의하며 마스터 일리아스의 거주구로 들어갔다.
문은 달려 있지 않았지만 입구 안쪽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 그 자체인 칠흑 같은 공간이 그녀들을 반겼다.
“이토록 사악한 마력이라니…….”
성녀인 잔느는 공간 안에 가득 차 있는 사악한 기운에 치를 떨었다. 일반인이라면 발을 들이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잃고 악에 물들게 될 만큼 짙고 어두운 마력이었다.
“하지만 이것뿐이라면 두려워할 것 없어요. 신성 축복!”
쿵.
성광의 지팡이로 바닥을 찧으며 신성 마법을 시전하자 신성한 빛이 지팡이 끝의 크리스털에서 뿜어져 나와 주변의 어둠을 밝혔다. 사악한 마력이 물러나고 특수조는 마음이 빛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어둠 안쪽에서 마스터 일리아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굉장한 아티팩트를 들고 왔네. 다루는 수준도 제법이고. 내가 누군지 몰랐을 텐데 어째서 그렇게까지 준비를 해 온 거지?”
“그림자에 숨어 배후에서 암약하는 악마야말로 진정 위험한 악이니까요. 당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몰랐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고 판단했어요.”
“신성 제국에 그 정도의 판단력이 있을 줄은 몰랐는걸. 알려 줘서 고마워. 다음부턴 참고하도록 할게.”
“다음이 있을 것 같나요? 당신은 오늘 이 자리에서 반드시 처단합니다. 들어가요, 델리아니.”
“네, 성녀님.”
잔느와 델리아니는 특수조를 이끌고 가장 깊은 안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함정이나 마법 트랩 등이 있을 것을 염려해 조심스럽게 이동했지만 아무것도 없이 깔끔했다. 오늘의 암습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까닭도 있었지만, 애초에 일리아스의 성격이 비겁한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신성 축복으로 어둠을 물리치며 거주구의 가장 안쪽까지 들어가자 옥좌에 앉아 있는 일리아스의 모습이 보였다. 온통 빨간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빨갛고 작은 우산을 앞쪽으로 비스듬하게 세워 눈을 가리고 있는 자세로 앉아 있었다.
악마라기보다는 인형 같았고 노예 상인이라기보다는 평범한 부잣집 아가씨 같은 모습이었지만, 잔느는 결코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았다. 눈으로는 저렇게 보일지라도 실제 모습은 온통 까만 어두운 그림자에 싸인 악마들을 많이 보아 왔기 때문이었다.
‘진실의 눈.’
잔느는 악마의 본모습을 보게 해 주는 진실의 눈을 시전했다. 그리고 일리아스의 본모습을 직시했다. 어떤 형상을 갖춘 악마인지 파악해 델리아니에게 알려 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잔느는 자신의 눈에 보인 일리아스의 본모습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인…… 간?”
거짓된 형상으로 본모습을 감추고 있던 것은 빨간 드레스 쪽이었고, 인간 여성의 육신은 진실의 눈으로 보아도 그대로인 채였다.
“이게 무슨……?”
잔느가 놀라자 일리아스는 빨간 우산을 슥 치우며 잔느의 눈을 쳐다봤다.
“내가 인간인 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난 인간이면 안 되나 봐?”
“성녀님, 사악한 악마와 말을 나눌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처단하고 다른 자매들을 도우러 가지요.”
“……알겠어요, 델리아니. 성광 결계!”
잔느는 성광의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지팡이 자체에 깃들어 있는 교황급의 신성 결계를 펼쳤다. 홀 전체에 신성함이 가득 차며 내부의 악마가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결계가 세워졌다.
그러나 일리아스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듯이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변에 가득한 신성한 기운을 몸으로 느꼈다. 그리고 피해를 입거나 힘이 억눌리기는커녕 오히려 혈색이 좋아지고 있었다.
“따스하네. 햇볕 좀 쬐라고 준비해 온 거라면 고맙다고 해 줄게.”
“맙소사. 정말로 평범한 인간인가요?”
“보시다시피.”
“성녀님,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노예 도시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만 봐도순수한 인간은 아닙니다.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지는 모르지만 결계가 안 통한다 해서 검마저 안 통할지는 확인해 보면 알 터, 제가 나서겠습니다.”
“하지만 델리아니, 평범한 인간이라면 우리도 뭔가 잘못 알고 찾아온 게…….”
“기사단은 전원 검을 들도록! 악마에게 공조하는 눈앞의 이단자를 심판하리라!”
“빛의 이름으로!”
“빛의 이름으로!”
잔느는 일말의 주저함이 생겨났지만 델리아니는 개의치 않고 일리아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검에서 마스터의 상징인 성스러운 순백의 아우라가 뿜어지고 단숨에 양단해 버릴 기세로 검을 내리그었다.
“저런. 부하들을 그냥 죽게 놔둘 생각이야?”
“……?”
일리아스의 태연한 말에 델리아니가 일순간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두 눈이 경악으로 가득 찼다.
“아악!”
“단장님! 뒤에 괴물이!”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거대한 괴물이 기사단원들을 몸을 꿰뚫고 있었다. 그런데 죽인 게 아니었다. 흉악하게 생긴 수백 가닥의 촉수가 구멍이란 구멍은 다 파고들어 강간하고 있었다.
“꺄아앗! 드, 들어오지 마!”
“빼! 빼! 빼란 말이야, 이 괴물! 아아악!”
“무, 무슨!”
“빨리 안 구하면 자궁에 괴물의 씨를 받게 될 거야. 종족을 가리지 않고 암컷이라면 모두 100%의 확률로 임신시키니 구할 거라면 서둘러야 할걸. 혹시 새끼를 낳아 기르고 싶다면 양육법은 알려 줄 수 있어. 저것들의 정액과 점액질은 마법 시약의 재료로도 효과가 좋아 이곳에선 널리 알려져 있거든. 관심 있어?”
“이 악마 같은 년이! 죽어랏!”
눈이 뒤집힌 델리아니가 아우라를 활화산처럼 뿜어내며 기사단원들을 뒤로하고 일리아스에게 달려들었다. 부하들의 피해는 뼈아팠지만 이번 정벌전 최대의 목적은 바로 눈앞의 마스터 일리아스를 처단하는 일이었다. 그 목적을 달성할 수만 있다면 단원들 몇의 희생은 달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일리아스 역시 그런 각오와 결단을 읽고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성광 결계 안에서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아 여유로운 것처럼 보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몸이기 때문이었다. 신성력에 피해를 받지 않는 대신 낼 수 있는 힘도 제한적이었다.
즉, 현재 일리아스는티만 나지 않을 뿐 결계에 의해 힘이 억눌려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스터급 성기사 하나 정도는 문제없지만 상처라도 입으면 결계 때문에 귀찮아지겠네. 레비아단을 두 마리 잡아 놓을 걸 그랬나? 어디서 저런 고출력의 아티팩트를 들고 온 거지?’
다른 것보다 아티팩트 하나가 문제였다. 척 보기에도 교황급의 아티팩트로 보이는 지팡이 하나 때문에 큰 제약을 받고 있었다. 저런 걸 마구 찍어 내는 건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니 이번에 회수해 두면 장기적으로 크나큰 이득을 취할 수 있겠지만, 당장 이기는 게 문제였다. 모르긴 몰라도 상처 하나 입는 순간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될 터였다.
‘성녀부터 처리하는 수밖에 없겠네.’
일리아스는 우선순위를 만만한 성기사보다 귀찮은 성녀 쪽으로 잡았다. 잠깐의 정신 지배 후 지팡이만 파기하게 하면 어차피 다 끝난 일이었다.
“도미니 딕텀. 그 지팡이를 부수…… 하, 내 마법을 저항해?”
파지직.
일리아스가 작정하고 시전한 도미니 딕텀이 고작해야 서른도 안 됐을 새파란 성녀에게 튕겨 나가고 말았다. 그것도 방어 마법을 시전한 것도 아니고 결계를 펼치고 있느라 다른 마법은 엄두도 못 내고 있었는데 그냥 막혀 버렸다. 이건 저 새파란 성녀의 정신력이 그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일리아스보다 높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이가 없어 빠르게 잔느의 몸을 훑은 일리아스는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교황급 아티팩트를 두 개나 달고 있었어? 어이가 없네. 니렐리스는 못 죽여도 나만큼은 반드시 죽이겠다는 거야?”
그리고 기습적으로 정신 마법을 시전하느라 내버려 뒀던 델리아니가 코앞까지 짓쳐들었다. 일리아스는 그 모습을 곁눈질로 보면서 한숨을 쉬고 왼손을 들어 올렸다.
턱.
아우라가 세차게 분출되고 있는 성검이 맨손에 가로막혔다.
“이걸 맨손으로 막아? 역시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구나! 정체를 드러내라, 악마!”
경악한 델리아니가 고함을 치자 일리아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착잡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모양이었다. 길보다는 흉이 클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바보니? 맨손으로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 말과 함께 검을 막아 낸 하얀 손에서 핏물이 튀었다. 급한 대로 마나를 집약시켜 막아 내긴 했지만 막아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성녀에게 정신 마법을 막아 주는 교황급의 아티팩트가 있다는 걸 알았다면 애초에 무모한 짓을 하지 않고 바로 델리아니를 상대했을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급박하게 막는 게 아니라면 시간이 오래 걸려서 그렇지 충분히 압도할 자신이 있었다.
성녀는 결계를 유지하느라 다른 짓을 못 하고 마스터급 성기사에 이르지 못한 일반 기사들은 레비아단 한 마리에 모두 묶여 있었으니 차분하게 눈앞의 성기만 잡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악운이 겹치고 겹쳐 어떻게 손쓸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다. 정말 일진이 사나운 날이었다.
‘결계만 아니었어도, 아티팩트가 두 개가 아니라 하나기만 했어도 이렇게까지 몰리진 않았을 텐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그러나 그 이상 생각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공격이 확실하게 통한다는 걸 확인한 델리아니가 신성력을 밑바닥까지 쥐어짜 내며 공격해 오고 있었다.
‘실드만 없었어도 육체 따위 벗어던지면 되는데, 하…….’
허탈했다.
그리고 그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곤경에 처하신 것 같네요. 좀 도와드릴까요, 일리아스 님?”
홱!
고개가 벼락처럼 돌아가고 결계 밖에서 곤란한 듯이 뒷머리를 긁고 있는 소년 하나의 얼굴이 일리아스의 눈에 보였다.
“……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