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5화 〉44화 드레니카 자유 (45/95)



〈 45화 〉44화 드레니카 자유

더 이상은 못 들어간다! 아악! 길을 막아!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미라 하나가 눈을 떴다. 사악한 마력이 가득 차 있는 초록빛 안광이 어둠을 밝혔다.

“으음. 이제야 도착했나. 기다리느라 깜빡 잠들어 버렸군.”

니렐리스 대주교는 평온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최초의 왕이었던 그는 온몸에 붕대를 두르고 마력을 가둬 죽음을 피한 존재였다. 살아생전에 이미 대마법사의 반열에 올랐던 그는 인간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이후부터 계속 마력을 쌓으며 존재해 왔고, 지금은 태고의 용들이 아니고선 견줄 존재가 없을 정도로 강대한 마력을 품고 있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마나가요동치고 법칙이 뒤틀릴 정도였으니 노예 도시는 기꺼이 그에게 사원 하나를 맡기고 대주교에 앉혔다. 그의 죽음은 단순히  생명이 사라지는 정도가 아니라 노예 도시의  축이 무너지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니렐리스 대주교는 자신이 이번 정벌전의 핵심 목표가 되었음을 알고도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

“지금의 왕들은 혈통으로 이어지지만 최초의 왕은 모든 인간 중에서 가장 강해야만 했지. 제 죽을 자리인 줄 모르고 달려오는 가여운 것들에게 왕의 훈육을 내릴 시간이군.”

니렐리스 대주교는 잠들어 있던 옥좌에서 일어나 몸소 걸음을 옮겼다. 검투 노예나 호위병 따위는 하나도 두지 않았다. 그 자신이 대마법사이고 최초의 왕이자 미라였다. 태어난 지 50년도 안 된 생자들 따위는 수백 명이 몰려와도 그를 어쩔 수 없었다.

“감히 주인님을 해하러 오는 벌레들은 제게맡겨 주시지요, 주인님. 친히 나서실 것 없이 모조리 무릎 꿇려 주인님 앞에 빌게 만들게요.”

“너는 나설  없다, 드레니카. 너는 단지 붕대갈이로서 거뒀을 뿐이니라.”

니렐리스 대주교의 단호한 말에 드레니카는 사랑에 빠진 얼굴로 주인님의 붕대를 쓰다듬었다.

“아아, 역시 나의 위대하신 주인님. 소녀의 사모하는 마음이 오늘도 한층 커지는 것을 느끼고 있답니다.”

“너는 거기서  붕대나 준비하고 있도록. 금방 돌아오지.”

“네, 주인님.”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드레니카는 예쁘게 웃으며 주인님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보면 볼수록 빠져들고 사랑하게 되는 위대한 주인님이었다. 붕대를 갈며 그 보드라운 신체에 손끝이라도 스칠 때면 짜릿짜릿 번개에라도 맞은 것 같았고, 칭찬의 말이라도 들을 땐 그대로 절정에 오를 것 같은 황홀경을 선사했다. 섬기게 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지만 드레니카는 이제  주인님이 없는 삶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저분이야말로 평생토록 사랑하며 헌신할 운명의 주인이었다.

“부디 다치지 말고 돌아와 주세요, 주인님.”

스윽. 스윽.

니렐리스 대주교는 드레니카의 염원을 받으며 붕대를 질질 끌고 서재 밖으로 나갔다. 제법 강한 전력을 끌고 왔는지 신성 제국의 기사들이 레이븐 타워의 경비병들을 속속들이 뚫고 바로 근처까지 올라온 소리가 들려왔다.

“넓은 곳이 편하겠군.”

아래층에서 느껴지는 마력들과 발자국 소리로 수를 가늠한 그는 일부러 마력을 발산하면서 넓은 곳으로 이동했다. 도망가지 않을 테니 어디 한번 와 보라는 자신감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10개 조로 이루어진 기사들이 니렐리스 대주교가 기다리고 있던 서약의 홀로 들어와 그를 포위했다. 100명이 넘는 대인원이  하나를 둘러싸고 절대 도망칠 수 없도록 길을 막았다.

기사만 90명에 마스터급 성기사가 10명, 성녀 또한 무려 3명이나 있는 대전력이었다.

“호오.  귀한 성녀가 셋씩이나 있다니. 내가 누군지 모르고 잘못  건 아닌가보군.”

“죽음을 거부하고 영생을 살아온 언데드! 사악한 미라의 왕! 네가 방심하길 기다려 지금까진 살려 뒀지만 이제 오늘로 끝이다. 지난 정벌전들만 생각해 안일하게 호위 하나 두지 않은 네 어리석음을 통탄하라! 성녀님들, 대 마법 봉인진을!”

“네. 맡겨만 주세요.”

노예 도시는 독자적인 마법 체계가 적용되고 있는 장소였지만 신성 제국은 그간의정벌전을 통해 마력 구조를 분석하고 대비해 왔다. 덕분에 이제는 그들 역시 노예 도시 안에서 마법을 쓸  있었으며, 나아가 노예 도시의 악마들이 마법을 쓰는 것도 막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도시 안에서 마법 봉인진을 펼칠 있다고? 그게 사실인가?”

니렐리스 대주교조차 그 말은 의외였던지라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굳이 체험할 마음까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럼 못 펼치게 막아야겠군.”

니렐리스 대주교는 붕대 안에 품고 있던 마력을 개방했다. 발밑을 중심으로 침묵의 홀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마법진이 순식간에 그려졌고, 그의 몸을 감고 있던 붕대가 풀려나며 홀 안에 있는 전원의 몸을 속박했다.

마법진으로 모든 마법 시전을 막고 붕대로 육체를 구속하는 이 마법은 마법사와 기사를 가리지 않고 모든 존재를 완벽하게 속박할 수 있는 니렐리스 대주교의 고유 대마법, 기쁜 미라의 저주였다.

“싸우기도 전에 전술을 말하는 얼간이가 지휘자라니, 신성 제국도 크기만 컸지 쓰레기 수준이군. 하긴 모시는 여신이 전쟁의 여신도 아니고 미의 여신이니 그것도 당연한가. 어쨌든 너희들의 공양은 잘 받아 주마.”

마법 한 번으로 침입자들을 모두 구속한 니렐리스 대주교는 숨만 쉴 수 있게 코만 남겨 놓고 전신을 모두 마력 봉인 매듭으로 꽁꽁 묶어 버렸다. 기본적으로 그의 마력을 품고 있는 붕대는 묶는 매듭 방식에 의해 다양한 저주 효과가 발생하는 마력 도구기도 했다.

또한 그의 몸을 감고 있던 붕대에 의한 전신 구속은 그 자체로 구속 조교이자 체벌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대로 하루만 묶여 있으면 아무리 싫어하는 상대의 말이라도 복종하고 따르게 되는 부가 효과까지 있었다.

“난 이 도시가 정말 마음에 들어. 인간밖에 없는 나라에서 왕을 하는 것보다 훨씬 즐겁거든.”

니렐리스 대주교는 붕대에 감겨 쓰러진 103명의 미녀들을 뒤로하고 서재로 돌아갔다. 소모한 붕대를 새로 갈고 다시 마력을 보충할 시간이었다. 직접 나서지 않고 드레니카를 보내면  편했을 테지만, 산 노예보다 죽는 노예가 더 많을 테니 귀찮아도 손수 수고를 덜 수밖에 없었다.

“드레니카, 새 붕대를 갈아라.”

“벌써 끝내고 오신 건가요, 주인님? 많은 수가 들어온  같았는데.”

“마법 하나도 피하지 못하는 애송이들이었다. 숫자는 의미가 없지.”

“역시 제가 사모하는 분…… 주인님의 위대함에 이 소녀는 자꾸만 빠져드는 마음을 멈출 길이 없어요. 주인님, 제가 감히 주인님을 사랑해도 괜찮을까요?”

사랑에  빠진 애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드레니카의 말에 니렐리스 대주교는 초록빛 안광을 흩트리며 피식 웃었다. 레비아단도 혼자 때려잡았다더니 속마음은 참 가녀린 소녀 같은 노예였다.

“노예가 주인님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굳이 내게 허락받으려 할 것 없다.”

“아아…… 위대하신 나의 주인님. 부디 소녀의 몸으로 주인님께 봉사할  있는 기회를 주세요. 제발 소녀의 마음을 받아 주세요, 주인님.”

미라가 된 니렐리스 대주교는 더 이상 육체적인즐거움을 느끼지 못했기에 그동안 드레니카를 상대로도 붕대만 갈게  뿐 몸을 취하진 않았다. 하지만 노예가 진심으로 복종한다는 정신적인 즐거움까지 못 누리는 건 아니기에 자발적인 봉사 제안을 흔쾌히 허락했다.

“허락하지. 어디 네 마음껏 한번 날 즐겁게 해 보거라.”

사모하는 주인님의 허락이 떨어지자 드레니카는 요염하게 웃으며 드레스를 벗어 내리고 니렐리스 대주교에게 다가가 나긋나긋하게 손을 뻗어 피부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여체가 붕대 풀린 니렐리스 대주교의 맨몸에 감기고 와락 끌어안았다.

“포옹이 뜨겁군. 네 마음이 이러한 줄 알았다면 진작 봉사하게 해 줬을…… 음?”

니렐리스대주교는 점점 강해지는 포옹에 말을 멈췄다. 아니, 인상을 썼다. 껴안는 정도가 아니라 옥죄는 수준이었다.

“드레니카, 껴안는 게 너무 세다.”

“그런가요, 주인님? 그런데…… 어쩌죠? 제 마음은 아직 닿지 않았는데.”

“그게 무슨 소리, 큭!”

으득, 으드득.

니렐리스 대주교의 몸에서 뼈 부러지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팔뼈가 으스러지고 있었다.

“당장 멈.”

퍽.

니렐리스 대주교는 말을 끝맺을 수가 없었다.

얼굴이 사라졌으니까.

대신 용의비늘이 덮인 인간이 아닌 것의 주먹이 그 자리에 있었다.

털썩.

머리를 잃은 니렐리스 대주교의 육체가 서재 바닥에 쓰러지고 전신에 용의 비늘을 두른 드레니카는 피 묻은 주먹을 핥으면서 요염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사랑하는 주인님의 머리 잃은 몸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대기 시작했다. 살점이 터져 나가고 뼈가 으스러져 가루가 됐다. 시체의 흔적조차 남지 않아 설령 부활의 권능이 있다 하더라도 두 번 다시 부활하지 못할 상태로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온통 피바다가 된 서재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드레니카는 사방에 고인 흥건한 피 웅덩이를 손끝으로 쓸어 담아 자기 몸에 바르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제 사랑이 느껴지셨나요, 주인님? 사랑은때리는 거랍니다.”

그때 피에 젖은 붕대 한 줄기가 미약한 마력을 내뿜으며 꿈틀거리는 게 눈에 보였다. 드레니카는  붕대마저 잡아챈 후에 양손으로 잡아당겨 뚝 끊어 버렸다. 꿈틀거리던 움직임이 잠잠해지고 그제야 마력이 완전히 사라졌다.

동시에 드레니카의 하복부에 새겨져 있던 마법 낙인도 스르륵 없어졌다. 황홀경에 빠져 있던 드레니카의 얼굴이 무서운 속도로 냉정해지고 사랑에 빠져 있던 눈빛도 본래의 것으로 돌아왔다.

“후…… 이제야 풀려났나? 더러운 미라 자식. 감히 날 붕대갈이 노예로 전락시켜?”

드레니카는 니렐리스의 마지막 흔적이 남아 있던  붕대를 입에 넣고 아작아작 씹으며 분을 삭였다. 정신 마법에 당하고 미약을 먹이는 바람에 저항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지는 순간 그녀의 사랑의 방식을 필사적으로 ‘이런 방향’으로 마음속에 새겨 넣었고, 결국 방심한 틈을 타 진심으로 사랑하고 봉사함으로써 쓸데없이 마력만 높은 미라를 처리할 수 있었다. 만약 용인화가 불가능했다면 결코 풀려나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영원히 붕대갈이로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거사고 크게 쳤네? 이전처럼은 넘어갈 수 없겠지?”

드레니카는 전에도 주인이었던 노예 상인 하나를 때려잡은 적이 있었지만 이번 주인은 그 격과 급이 달랐다. 노예 도시의  사원 중 하나를 관리하는 대주교였고 그 말도 안 되는 괴물 같은 마력으로 주변의 안개를 관리하던 중요한 인물이었다. 이번에는 아무리 드레니카가 쓸모 많은 노예라고 해도 위험성을 인지하고 처분할 가능성이 높았다.

저항하고 싶었지만 그럴  있는 존재가 이곳에는 너무 많았다. 잡혀 들어온 순간 그 존재들을 느낄 수 있었고,  때문에 알아서 적당히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도시기에 그런 괴물 같은 존재들까지 자리 잡고 있는 건데? 진짜 환장하겠네…… 이제어떡하지?”

어차피 처분될 신세라면 죽기 전에 마지막 발악으로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고 죽여 버릴까도 생각해 봤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죽는 방식에도 여러 종류가 있었고 죽이는 방법도  다양한 곳이 바로 이 노예 도시였다. 어차피 죽게 될 거라면 차라리 얌전히 잡혀 순순히 죽는 게 덜 고통스럽고 그나마 나을 게 분명했다.

“후우, 그냥 얌전히  내밀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천하의 드레니카가 이런 꼴이  줄이야.”

지금은 어딘가에서 야습을 가한 터라바로 당장 잡으러 오지는 않겠지만  봐도 전투는 금방 끝날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몰래 쳐들어와 이곳저곳으로 흩어진 기운들이 하나둘 사라져 가고 있었다.  시간 내로 저들의 정리가 모두 끝나면 그다음은 바로 자신 차례였다. 예상으로는 곱게 죽여 주면 자비로운 거였고 혈통을 생각해서 평생 씨받이 신세가 되거나 희귀성을 생각해 팔다리를 절단하고 정액받이로 쓰지 않을까 싶었다. 어느 쪽이든 간에 희망은 없었다.

“처분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도시 구경이나 해 볼까. 멀쩡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것도 오늘 새벽이 마지막일 테니.”

드레니카는 레이븐 타워의 창밖으로 어둠이 내리깔린 노예 도시의 거리를 잠시 보다가 밑으로 뛰어내렸다. 레비아단마저 때려잡을 수 있는 용인화된 육체에 이 정도 높이에서의 낙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쿵.

나지막한 충격음과 함께 착지한 드레니카는 먼지를 툭툭 털고 내키는 대로 걸음을 옮기려다가, 갑자기 탄성을 내질렀다. 누군가의 얼굴이 불현듯 떠오른 탓이었다.

“아, 잠깐. 혹시 그 녀석이라면…….”

탈출 불가능한 노예 신세가 된 김에 이판사판으로  죽여 버리고 난동이나 부릴까 싶었던 찰나에 그녀의 마음을 작게나마 달래 주고살길을 제시해 주었던 작은 노예 상인. 그 영악한 녀석이라면 이런 상황도 타개해 주지 않을까 하는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름이 뭐랬지? 존? 조니? 아, 조니였지. 그래, 겉보기와 다르게 영악한 그 녀석이라면 날 구해 줄 수 있을지도 몰라. 의외로 음흉한 녀석이었으니까. 어차피 죽게 될 거 모험이라도 한번 해 볼까?  되면 얼굴이라도 보는  치고, 후후.”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씨받이 신세도 받아들이고 있었던 드레니카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어쩌면 살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속내 감춘 영악한 노예 상인이라면 틀림없이 자신을 구해 줄 방법을 갖고 있을 것이다.

“좋아, 조니를 찾아보자. 운이 좋아 만나게 되면 뭔가 수가 있겠지. 눈치가 빠른 녀석이니 노예가 된다 해도 너무 모질거나 심심하게 하진 않게  줄 것 같고, 그게 최선이겠네, 응응.”

어떻게 찾아야 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드레니카는 일단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물려받은 용의 피가 왠지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직감을 줬기 때문이었다.

“날 구원해 줄 영악한 주인님이 어디에 계시려나?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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