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43화 신성 제국 27차 정벌전 시작
4월 22일.
댕- 댕- 댕-
자정을 지나 새 날이 왔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노예 도시의 밤거리에 울려 퍼졌다. 하루에 단 한 번 자정에 울리는 이 종소리는 단순히 시간을 알리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노예 도시는 타국의 침입을 막고 노예를 원활하게 조교하기 위해 도시 전체에 독자적인 마법 체계를 구축해 유지하고 있는데, 자연의 기본 법칙을 뒤틀고 바꾸는 대마법이다 보니 오랜 시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때문에 매일 자정을 기점으로 한 번씩 갱신하고, 갱신되었음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이 갱신 작업의 시점을 알리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마법을 유지하고 있는 마나가 하루에 한 번씩 갈리면서 적용되고 있는 마법도 풀리기 때문이었다. 노예 도시에서 독자적으로 만들어 낸 아우스펙스 같은 지속형 마법들은 한 번 시전하면 영구히 유지되게 만들었지만, 실제로는 자정을 기점으로 24시간씩만 유지되고 오직 마법 브랜드 낙인을 찍는 애드베르토 세르빌리만이 마나를 교체해도 풀리지 않고 영구적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 애드베르토 세르빌리에도 결점이 있었다는 것이 최근 알려지게 되었다.
“흠…… 도시 전체에 새로운 마나가 유입될 때 그 마나를 받아들여 자동으로 재시전되는 형태였는데, 처음 시전할 때만큼은 25스파크만큼의 마나를 통해 시전되기 때문에 효과가 완벽하지 않았다는 건가?”
“맞아. 효과 자체는 똑같이 발현되지만 급수가 한 단계 떨어져서 절대적인 지배력은 발휘되지 않는 상태였던 거야. 정신력이 아주 강한 노예라면 저항할 수 있고 주인의 곁에서 도망치는 것도 가능해. 어쩌면 도시 바깥으로 나가는 것조차 가능할지도 모르고.”
“그건 위험하군. 안개의 숲을 통과하는 건 간단한 일은 아니지만 애드베르토 세르빌리에 저항할 정도의 노예라면 어렵지도 않을 테니까. 흠, 니렐리스 대주교가 이번에 산 노예가 혼자서 레비아단을 잡았다던가? 그 정도 노예를 기준으로 삼으면 되나?”
“아니, 드레니카는 특별해. 인간형일 때도 SS+급, 용인화하면 SSS-급이니까. 저항했던 노예는 S+급에서 SS-급 사이였어.”
“그럼 너무 많군. 챔피언급 정도만 되어도 저항할 수 있다는 건데.”
“맞아. 당장 지금이라도 개선해야 해.”
“그래야겠군. 잠시 후면 수확이 시작되니까.”
키마이라 가문의 총사령관인 카니스 장군은 마스터 일리아스의 의견에 동의했다. 안개 군도에는 이미 신성 제국의 정벌 함대가 들어와 있었고 이제 한두 시간 안으로 상륙하게 될 터였다. 지금까지 그런 일은 없었지만 결점이 명확하게 존재하는 이상 전리품들을 수확한 후 애드베르토 세르빌리를 찍고 방치했다가 도망가는 일들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일반적인 노예라면 상관이 없지만 신성 제국의 전리품들을 놓치는 것은 너무 아까운 일이었다. 신성 제국의 빛의 기사단이나 성녀는 이때가 아니면 결코 손에 넣을 수 없었기 때문에.
“샤이타나 대주교는 다른 가문의 대주교들에게 연락을 돌려주시오. 티파레트 집정관은 교황청에서 스파크를 더 받아 오고. 수확을 끝내기 전에 마법 체계를 손보도록 하지.”
“그러지.”
“알겠어요. 하지만 대주교들이 마력을 소모하고 나면 다소 위험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번엔 니렐리스 대주교를 잡기 위해 준비를 단단히 했을 텐데.”
“용인화가 가능한 노예가 있는데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본인이 나설 것도 없이 노예 혼자서도 쓸어버릴 거요. 그보단 일리아스 쪽이 더 걱정이외다. 일리아스, 이번 정벌전을 위해 구입한 노예를 제이크의 암컷으로 줘 버렸다지? 이번엔 핵심 목표가 둘일지도 모른다는 제보가 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네가 대상이어도 이상하지 않아. 이제 신성 제국도 슬슬 네 존재를 알아차릴 때가 되었으니까.”
카니스 장군의 말에 마스터 일리아스는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대비는 해 놨어. 정말 내가 두 번째 핵심 목표라고 해도 니렐리스 대주교 쪽보다 우선순위가 높진 않을 테니 충분해.”
“만약 더 높다면?”
마스터 일리아스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칠흑 같은 눈으로 카니스 장군을 바라보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내가 니렐리스 대주교보다 약해 보여?”
슈슉. 슉.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화살 두 대가 날았다.
“컥.”
“커윽.”
정확히 목을 꿰뚫린 등대 보초들이 비명도 못 지르고 쓰러졌고, 비상종은 울리지 않았다.
“클리어.”
“클리어.”
사수들의 수신호가 떨어지자 잠시 후 새벽안개를 뚫고 안개 군도를 넘어온 함선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신성 제국의 27차 정벌 함대였다.
바티칸의 안개 항구까지 들키지않고 무사히 들어온 정벌 함대는 수많은 기사들을 쏟아 냈고 야음을 틈타 부두를 점령하고 게이트 앞에 집결했다.
이제 게이트를 넘어 바티칸 안으로 들어가면 살아 돌아올 사람은 많지 않았다. 빛의 기사단을 필두로 한 신성 제국의 전력은 결코 약하지 않았지만 악의 도시 바티칸은 법칙이 뒤틀린 장소였고 태곳적 악마들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전부 죽더라도 핵심 목표를 중심으로 지배 가문들의 악마들을 몇이라도 쓰러트리면 그들의 임무는 달성한 셈이었다.
“살아서 빛과 다시 함께하기를.”
“살아서 빛과 다시 함께하기를.”
서로 다른 목표를 배정받은 기사단원들이 한마디의 인사를 나누고, 게이트를 열고 노예 도시 안으로 최대한 조용히 스며들어 갔다. 이것은 전쟁이었지만 정정당당할 필요가 없는 싸움이었고 악을 처단하면 그것으로 되는 성전이었다. 비겁하다는 생각 따위는 조금도 갖고있지 않은 빛의 기사단이 노예 도시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습격이다!”
“신성 제국이다! 신성 제국이 쳐들어왔…… 컥!”
얼마 지나지 않아 거리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망치는 노예들이 없을까 거리를 순찰하고 있던 노예 상인들이었다. 그들 역시 악의 무리인 건 마찬가지였기에 빛의 기사단은 결코 자비를 두지 않고 그들의 목을 베었다.
그러나 모든 노예 상인들이 맥없이 목숨을 내주는 건 아니었다. 최상급 검투 노예를 가르치고 조교할 수 있는 노예 상인들은 그들 스스로가 챔피언들보다 강한 존재였다. 수많은 검투 노예를 양성해 챔피언들을 배출한 강력한 노예 상인들은 거꾸로 빛의 기사단원을 사냥하고 뜨거운 숨을 내뿜었다.
“크훅…… 맛있는 것들이 또 기어들어 왔군, 쿡쿡…….”
퍽.
거대한 푸주칼이 빛의 기사단 한 명의 몸통을 그대로 갈라 버렸다. 절단면에서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고 거대한 황소의 몸을 한 노예 상인은 내장을 한 움큼 꺼내며 콧김을 뿜었다. 실로 몇 년 만에야 다시 보게 된 별미였다.
“이번에도 두세 명은 주워 갈 수있겠군, 크훅쿡쿡…….”
척 봐도 심상찮아 보이는 미노타우르스가 나타나자 조를 이끌던 조장이 옆 골목을 가리키며 조원들을 이끌었다.
“돌아서 간다! 불필요한 충돌은 피하라!”
눈앞의 악을 처단하지 않고 피하라는 명령에도 기사단원들은 불만을 갖지 않았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훨씬 더 강하고 사악한 존재. 목표까지 가는 동안 만나는 모든 악을 처단할 수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내 앞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쿡쿡…….”
하지만 걷는 것은 느리더라도 미노타우르스의 돌진은 말을 탄 기사의 랜스 차지보다 빠르다. 뒤를 내주고 뛰어서 달아나는 것은 그대로 죽여 달라는 말밖에 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조장은 조원들이 빠져나간 골목을 가로막고 검을 뽑았다.
“몬스터가 감히 인간의 말을 하다니, 대체 얼마나 많은 악업을 쌓고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것이냐. 이대로 가만히 놔두면 너 또한 대악마가 될 터이니 오늘로 그 악행을 끊어 주겠다. 빛의 이름으로!”
조원들을 무사히 빠져나가게 한 조장은 검을 굳게 잡고 미노타우르스 앞으로 달려 나갔다. 이 정도 악마라면 불필요한 충돌이라고만 볼 수도 없었다. 대악마가 될 씨앗이니 지금 바로 제거해야 다음 정벌전의 피해가 줄어들었다.
“날 평범한 몬스터라고 생각하다 가랑이를 벌리고 암캐가 된 빛의 창녀들이 한둘이 아니었지, 크훅…… 날 상대하려면 최소한 마스터의 경지는 이루고 와라.”
미노타우르스가 푸주칼을 들며 그리 말하자 달려들고 있는 조장의 검에서 신성한 순백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쿡쿡, 놀아 줄 정도는 되는군.”
미노타우르스의 붉은 눈이 사악한 빛을 뿜고 순백의 아우라와 어둠에 휘감긴 푸주칼이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