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41화 성녀 잔느 & 빛의 기사단장 달리아니
정산과 새 주문을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발랄라이카가 조니를 잠시 붙잡았다.
“아, 자기. 그러고 보니 최근 대가문들의 높으신 분들이 노예 상인 길드에서 맞춤 노예를 주문한다고 해. 우리 쪽으로도 소포 배달 요청이 몇 들어왔고.”
“어떤 종류의 노예를요?”
“S+급 이상의 검투 노예로만.”
“……슬슬 때가 된 모양이군요.”
“응.또 한 차례 전쟁이 벌어질 거야. 이곳이 노예 도시인 한은.”
노예 도시는 중개 무역을 통해 물자를 보급하고 있고 이는 이 도시의 실상이 바다 건너 나라들에도 전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왜냐하면 단순히 중간에서 유통만 하는 중개 무역이 아니고, 멀쩡한 여자를 사 와서 노예로 조교해서 유통하는 형태의 중개 무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원자재를수입해 완제품으로 만들어 수출하는 가공 무역이나 마찬가지였다.
파는 나라에서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고 사는 나라에서는 당연히 알고 있었으니 노예 무역의 축이 되는 이곳 노예 도시를 좋지 않게 보는 나라가 존재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때문에 노예 도시는 몇 년마다 한 번씩 외국의 침략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 왔듯 이번에도 이기겠지요. 이곳은 노예 도시니까.”
“그렇겠지. 이곳은 노예 도시니까.”
조니는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밀수꾼의 소굴을 나왔다.
“전쟁이라…… 나도 좀 주워 먹을 게 있으려나.”
노예 도시는 지금까지 수많은 침략을 받아 왔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었다. 이제는 아예 정기적인 행사 같은 분위기였고 일종의 축제로 받아들이는 사람마저 있을 정도였다.
배상금 같은 걸 받는 것은 아니었다. 대신 모든 포로를 노예로 삼아 부리거나 다른 나라에 팔아 버렸다.
특히 가장 꾸준히 전쟁을 걸어오는 곳이 신성 제국이었는데,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섬기는 만큼 신관들이 전부 여자였고 기사단 역시 여성으로 이루어져 있어 수입이 쏠쏠했다. 아름다운 순서대로 높은 능력과 직위를 부여하기에 기사단장급 이상의 포로를 잡으면 팔지 않고 조교해 길들이는 사람들이 더 많을 정도였다.
“리즈랑 아리스톨 정도면 사냥을 나가도 될 것 같은데…….”
가장 비싼 무기가 200스파크밖에 안 되니 금전적으로 어려운 건 아니었다. 당장은 돈이 없지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벌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전쟁인 만큼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둘만 믿고 너무 돌아다니다가 여러 명에게 둘러싸이게 되면 위험할 수 있었다. 가장 안전한 건 그냥 패잔병을 줍는 이삭줍기도 하지 않고 수습이 끝날 때까지 집 안에 처박혀 있는 것이었다.
“어차피 길드에도 가야 하니 가는 김에 정보나 좀 물어보자. 그러면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겠지.”
현재 생활비의 잔고는 0스파크였기에 한 푼이라도 벌어 가야 했다. 때문에 노예 상인 길드에서 아무 노예든 간에 납품 계약을하나받을 생각이었다. 운이 좋다면 안젤리카가 괜찮은 노예를 맞춰 주겠지만 아직 마련되지 않았더라도 따지거나 기다릴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때마침 운이 따랐는지 노예 상인 길드에 들어서자 안젤리카가 환하게 웃으며 조니를 반겨 주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 이제 왔냐? 너 줄 노예 하나 꽉 맡아 두고 있었어. 바로 가져가기만 하면 돼.”
“어떤 노옌데요?”
“그냥 흉터만 좀 치료하고 밥만 좀 먹여서 체력만 붙이면 되는 노예야. 다른 건 안 건드려도 되고.”
“그런 노예가 다 있어요? 그 정도면 그냥 길드에서 관리하는 게 이득이잖아요?”
“고문을 좀 많이 했더니 체력이 바닥까지 떨어졌거든. 알다시피 우리 창고는 지하 감옥을 개조한 거라 거기선 체력이 안 붙어. 오히려 더떨어지지. 그리고 멀쩡한 방 하나 내주고 애지중지할 바엔 그냥 450스파크 주고 노예 상인에게 맡기는 게 편해. 그 시간에 다른 노예들도 점검해야 하니까.”
“그렇군요. 뭐, 저야 편하니 불만 없어요. 데려가지요. 그건 그렇고 뭐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안젤리카는 미리 선수금 200스파크를 꺼내 주면서 대답했다.
“응, 뭔데?”
“요즘 검투 노예 찾는 고객들이 늘어났다면서요?”
“……그건 또 어디서 들은 말이야?”
안젤리카는 스파크를 건네다 말고 잠시 멈칫했다. 그 행동에서 촉을 느낀 조니는 재빨리 선수금을 가로채고는 돈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오다가다요.맞춤 노예 주문도 꽤 들어왔다던데…….”
“이상하네. 우리 복덩어리가 발이 그렇게 넓었었나? 포럼이나 신사 클럽은 고사하고 중앙 광장에도 아직 안나가는 애가 그런 걸 어디서 듣는 거야?”
전쟁 소식은 특급 정보였기에 외부로 유출되는 경우가 없었다. 매번 이기다 보니 축제가 된 판이라 소식이 미리 알려지면 어중이떠중이 노예 상인들이 죄다 검투 노예들을 끌고 튀어나올 텐데, 전력이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면 쳐들어오는 적들이 깜짝 놀라 정벌을 그만두거나 아니면 압도적인 전력을 데리고 오게 될 수 있었다. 때문에 노예 도시의 지배 가문들은 늘 아슬아슬하게 이기는 모양새를 연출하고 있었다.
사정이 그런데 노예 도시에서 인지도가 가장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조니가 전쟁소식을 어디서 엿들은 듯하니 안젤리카가 의아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번 토너먼트 때 제 노예도 출전했었거든요. 특별 경기때. 그때 VIP석에 가까운 곳에 앉아 있어서 운 좋게 들을 수 있었어요.”
“아하. 암캐 공주 말하는 거구나. 그래, 확실히 그 경기에 고위 귀족들이 많이 참석하긴 했지. 난 못 봤지만 멋진 쇼였다고 광장에서 한창 수다 중이더라. 신드라만 아니었다면 가볍게 이기고 올라갈 실력이었는데 청순해 보이는 것과 달리 매우 음란한 암캐여서 더 흥미진진했다면서? 우리 복덩어리가 꽤 괜찮은 노예를 주웠어.”
노예 길드의 마스터인 안젤리카는 조니의 실력으로는 죽었다 깨나도 그 정도의 노예를 조교하지 못한다는 걸 알았기에 운이 좋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게 당연한 일이었고 안젤리카만이 아니라 노예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조니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건 오직 밀수꾼들뿐이었다.
“그 정도의 노예를 주웠으니 저라도 노예 도시에 다시 들어와 볼 생각을 한 거죠. 정말 운이 좋았어요, 하하.”
“그 운 나도 좀 나눠 줘라. 어쨌든 들었다고 하니까 알려 주는 건데, 절대 다른 사람한텐 말하지 마라? 퍼트리고 다니면 윗분들한테 크게 찍힐 테니까.”
조니는 큼직하게 고개를 끄덕거려 줬다.
“당연하죠. 어차피 말하고 다닐 사람도 없어요.”
“그것도 그렇긴 하지. 어쨌든 최근 품질 좋은 검투 노예 주문이 많이 들어오는 건 사실이야. 안 그래도 슬슬 올 때가 됐잖아? 호위병이 없는 분들이 미리 대비하고자 주문들 하고 계셔서 그래. 한 1~2년 내로 쳐들어오지 않을까 싶다나?”
“1~2년이라…… 꽤 남았는데도 상당히 여유 있게 준비하는 거네요.”
“조교할 기간도 필요하고 늦는 것보단 빨리 대비하는 게 나으니깐 그러는 거지. 걔들이 시간 정해 놓고 쳐들어오는 게 아니니까.”
안젤리카는 그렇게 설명했지만 조니는 믿지 않았다. 비싼 금액을 받기 위해 품질을 높이는 게 아니라 호위로 쓰려는 거면 그냥 말만 좀 잘 듣게만 하면 충분했다. 성격이 아무리 드세다고 해도 한두 주면 충분한 일이니 몇 년씩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그보다는 전쟁이 코앞이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더 그럴듯했다. 앞을 내다보고 대비하려는 거면 여러 명이 동시에 노예를 주문할 리가 없었으니까. 노예 상인 길드의 맞춤 노예로도 부족해 밀수꾼들에게 특별 소포 배달까지 요청하는 건 정말로 시급하기 때문이라고 봐야 했다.
‘어쨌든 나한테는 제대로 알려 줄 수 없는 정보란 거네. 매번 이기면서도 정보를 안 푸는 건 포로들을 독점하기 위해서인가? 구미가 당기네.’
전쟁 포로들에 대해서는 조니도 잘 알지 못했다. 노예를 살 위치가 아니고 거리에서 돌아다니는 모습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정보를 꽁꽁 숨긴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됐다.
“걱정이 돼서 물어본 거였어요. 식량이라도 좀 쌓아 놔야 하나 싶어서요.”
조니가 걱정스레 하는 말에 안젤리카는 피식 웃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 언제나 새벽에 쳐들어왔다가 아침이 되기 전에 끝나니까. 전면전이 아니라 암살 작전에 가깝거든. 전면전을 벌일 정도의 대규모 함대는 안개 군도를 통과하지도 못해.”
“그럼 그냥 자는 사이에 끝나겠네요. 알았어요. 노예나 받아 갈게요.”
“응, 그렇게 해. 다음에도 쉬운 거 들어오면 미리 챙겨 줄 테니까 최대한 빨리 납품해주면 더 좋고.”
“네네.”
***
그날 밤, 안개 군도.
노예 도시로 향하는 유일한 길목이었지만 늘 짙은 안개가 껴 있는 그 위험천만한 지역에 수많은 함선들이 나타났다.
디바인 신성 제국의 군함들이었다.
감히 여자들을 납치하고 당당히 사고팔기까지 하는 노예 도시에 천벌을 내리기 위해 27차 정벌전이 떨어진 것이었다.
지금까지 26번이나 전쟁을 벌여 모두 패배했지만, 전부 실패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신성 제국의 진짜 목적은 노예 도시의 함락이 아니었다.
노예 도시를 다스리고 있는 대가문들의 지배자들, 그 거대한 악들의 숫자를 하나씩 줄이기 위함이었다.
매번 많은 피해를 안기는 했지만 그래도 소득이 있어 두세 번의 정벌전마다 한 번씩 지배자들의 수를 줄여 올 수 있었다. 수백 년을 살아온 그 거대한 악들만 처단하면 노예 도시는 무너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함락이 아니라 노예 도시를 구성하고 유지하고 있는 지배자들의 수를 줄이는 게 정벌전의 목적이었고 착실히 성과를 내고 있었기에 27차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27차 정벌전의 핵심 목표는 코르버스 가문의 니렐리스 대주교.
그는 죽음을 거부하고 언데드가 되어 영생을 살아가는 고위 미라였다. 태곳적부터 쌓아 온 마력으로 안개를 관리하는 네 사원 중 하나를 담당하기에 그를 죽이면 노예 도시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었다. 또한 코르버스 가문의 지배자들은 병력을 전혀 두지 않고 오로지 그 본신의 힘으로 가문을 유지하기에 가세를 기울게 만들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 26차례의 정벌전을 벌이면서 그동안 대주교급은 한 번도 노린 적이 없었던 것이 바로 이날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핵심 목표가 더 있었다. 바로 키마이라 가문의 마스터 일리아스였다.
그녀는 노예 도시에서 특별히 맡은 역할이 없어 지금까지 주요 인물 리스트에 올리지 않았었는데, 정벌전을 계속하면서 지배자들의 명단을 입수하고 파악해 가다 보니 1차 정벌전 때부터 존재했음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대마법사라고 해도인간이 그 오랜 세월 동안 살아가는 건 불가능했으니 그녀 역시 특별한 존재일 터.
신성 제국에서는 그녀를 정체를 감춘 위험한 존재로 분류하고 몰래 침투조를 보내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설령 니렐리스 대주교를 죽이지 못하더라도 그녀만큼은 반드시 죽일 수 있도록 대마법사를 상대하기에 가장 특화된 인물들로만 편성했을 정도였다.
“안개 군도에 접어들었으니 내일 새벽이면 작전이 시작될 겁니다, 성녀님. 그때까지 안으로 들어가 쉬시지요.”
함께 특수조에 편성된 빛의 기사단장 달리아니의 말을 들은 잔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모두 갑판에 나와 고생하는데 저 혼자 쉴 수는 없어요. 기도라도 하면서 기사단원분들의 피로를 풀어 드릴게요.”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더 이상 말리지 마세요, 달리아니. 제가 여신님께 받은 신성력은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한 힘이에요.”
“알았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하지만 새벽에 무리 없이 움직이시려면 이따가는 좀 쉬어 주십시오.”
잔느는 염려하지 말라는 듯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럴게요.”
“그럼 전 기사단에 작전을 주지시키러 가 보겠습니다.”
“네, 다녀오세요, 달리아니.”
달리아니를 보낸 잔느는 안개 속에서 군데군데 보이는 암초와 작은 섬들을 보며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들을 납치해 노예로 부리다니, 결코 용서할 수 없어요…… 악의 도시 바티칸.”
사람의 탈을 쓴 악마들이 세운 도시 국가, 바티칸 시국이 이 안개 너머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