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30화 아리스톨 피어싱 & 전신 타투 (1)
집으로 돌아온 조니를 본 아리스톨과 헤나는 깜짝 놀랐다. 조니가 이제까지 지은 적 없는 비장한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 있었어, 주인님?”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오빠……?”
두 사람의 물음에 조니는 묵직하게 천천히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노예를 못 찾는 바람에 대출을 받았어요. 모레면 임대비도 내야 하고 다음 주엔 베티 공주님 때문에 500스파크를 상납해야 하는데…… 생활비도 모자를 판이라서요.”
“…….”
지금까지 500스파크를 갚기 위해 조니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봐 왔던 아리스톨은 뭐라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 대출이 전부 자신과 동생들 때문에 생긴 것이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헤나 역시 자신이 군식구라는 걸 알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미안한 마음이 가득 들 뿐이었다.
“죄송해요, 오빠…….”
“아니야. 헤나 잘못은 아니니까. 어쨌든 그렇게 돼서 좀 위험한 방법에라도 손을 대야 할 것 같아.”
조니는 아리스톨에게 미세사슬 비키니를 건네주며 심각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검투 노예용 옷이에요. 원래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준비한 후에 나가려 했는데, 당장큰돈이계속 들어가다 보니 공주님이 콜로세움이 나가 주셔야겠어요.”
“애초에 그 목적으로 들어오긴 했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아리스톨의 말에 조니는 입술을 깨물었다.
“무기를 살 여윳돈이 없어요.”
“아…….”
“남은 돈은 전부 공주님 승리에 걸 생각이에요. 무기를 들지 않고 맨몸으로 나가면 배당이 높아질 테니까,이기기만 하면 당장 급한 돈은 벌 수 있거든요.”
“……하지만 이길 수 있을까? 아무리내가 기사였다고 해도 맨손으로는…….”
아리스톨이 자신 없어 하는 표정을 짓자 조니도 어쩔 수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도1회전은 괜찮을 거예요. 대부분 이제 막 출전할 만한 B급 검투 노예들의 실력을 보기 위해서 내보내는 거고, 저처럼 장비를 사 주지 않는 노예 상인도 많거든요. 죽으면 그대로 장비까지 잃는 거니까요.”
“세상에. 죽기도 하는 거야?”
아리스톨의 눈이 커졌다.
“결승전에서는 그런 경우가 많아요. 달아오른 관중들이 패자를 죽이라고 요구하거든요. 하지만1, 2회 때는 실력 차가 압도적이거나 하지 않는 한 일부러 죽이는 일은 없어요.”
“그렇구나…… 그럼 운에 기대야 한다는 거네.”
“1회전 때는 무기를 들고 있다 해도 고작 단검이나 부엌칼 정도일 거예요. 도박으로 크게 따기만 하면 2회전 때는 괜찮은 무기를 사 드릴 생각이고요. 1회전만 어떻게든 이긴다면…….”
“…….”
아리스톨이 아무리 오벨 왕국의 제일 기사였다고 해도 맨손으로 무기를 든 상대를 제압하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단검이나 부엌칼 정도만을 들고 나오고 B급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다면, 확실히 충분히 승산이 있는 일이기도 했다.
‘기사단에서도 맨손 대련은 종종 해 왔으니까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적어도 단검 수준의 단병기라면 A급 검투사라 해도 승산은 있어. 하지만 만약 지게 되면…….’
승산은 있지만 절대적인 건 아니었다. 그리고 패배할 경우 조니는 대출받은 모든 돈을 잃게 된다.
아리스톨에게는 자신의 승패보다 그게 더 큰 부담이었다. 만에 하나 지게 되면 조니는 정말 막다른 길에 몰리게 되는 것이었으니까.
“돈을 다 거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 아무리 나라도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은 없는데…….”
“어차피 다른 수도 없어요. 저흰 무조건 이겨야 해요. 돈을 걸지 않는다 해도 지금처럼 적당한 노예가 안 나와 주면…….”
대출금을 못 갚거나 베티의 처녀를 잃게 된다.
또한 단순히 처녀를잃는 정도가 아니라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생명이 달린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알았어. 반드시 이기도록 할게.”
“죄송해요, 공주님. 하지만 지금은…… 공주님께 기댈 수밖에 없어요.”
“그런 소리 하지 마, 조니. 처음부터 정해진 일이었으니까. 무기 없이 나가야 한다는 게 약간 부담되긴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전반적인 수준을 생각하면 이길 확률이 높다고 봐.”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공주님.”
조니는 감동한 눈으로 아리스톨을 보다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리스톨 역시 조니를 가볍게 껴안으면서 등을 쓰다듬었다.
“나만 믿어. 지금까진 조니가 노력해 줬으니까 이젠 내가 보답할게. 설령 내가 죽더라도…… 반드시 이길 거야.”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베티를 구해 달라는 결의였다.
“공주님…….”
잠시 서로의 체온과 마음을 확인한 조니는 몸을 떼고서 전에 없이 진지한 태도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공주님, 한 가지 동의를 구하고 싶은 게 있어요.”
“응? 어떤 동의?”
“제가 처음에 콜로세움의 챔피언이 되면 큰돈과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 거 기억하시나요?”
“당연히 기억하지. 그 말 때문에 검투 노예가 됐는데…….”
아리스톨은 말꼬리를 흐렸다. 조니가 너무 진지한 태도로 그 얘기를 다시 꺼내니 왠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절반은 맞아떨어졌다.
“지금까지 콜로세움의 챔피언들이 모두 자유를 얻은 건 확실해요. 그런데 단순히 이겼다고 해서 그렇게 된 건 아니에요. 공식적으로 콜로세움에서 우승한 노예에게 주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야?”
“콜로세움에서는 관중들의 목소리가 곧 법이에요. 그들이 멋진 모습을 보여 준 노예에게 자유를 주라고 외치고,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 준 노예에겐 죽음을 내리라고 외쳐요. 공주님도 콜로세움의 관중들의 시선을 끌고 열광시킬 필요가 있어요.”
“……상대를 죽여야 한다는 거야?”
“결승전에서는 거의 반드시요. 경기 도중에 죽이지 않았더라도 관중들이 요구하면 최대한 잔인하게 사형을 연출해야 해요. 그걸 거부하면…… 승자와 패자 둘 다 죽게 될 거예요.”
그 잔인한 말에 아리스톨은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명예를 아는 기사에게 이유 없이 패자를 죽이라는 건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오벨 왕국에도 검투 대회는 있었지만 이렇게 비이성적이고 광란적이지는 않았었다. 이건 검투 대회가 아니라 목줄을 채운 맹수들의 피 튀는 싸움 구경이었다.
하지만 아리스톨은 못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기사가 아니었고 노예였으니까. 그렇게 하는 것만이 자신과 동생들의 자유를 얻는 길이라면 하나가 아니라 열 명의 목이라도 칠 수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았어. 그렇게 할게. 난 이미 명예 따윈 없는 노예니까…… 얼마든지 할 수 있어.”
그리고 조니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게 진짜 본론이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어요. 관중들의 시선을 끌 만한 요소가 있어야 하거든요.”
“시선을 끄는 요소?”
“네.”
“……그게 뭐지? 단순히 경기 내용을 말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단순히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걸 말하려는 것이라면 이렇게 진지하게 말할 이유가 없었다. 아리스톨은 조니가 무슨 말을 꺼내려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조니는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아리스톨의 눈을 보다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겨우 입술을 떼었다.
“최대한 독특하고 이국적인 모습으로 꾸며야 해요. 그래야 결승전에 관중들이 많이 모이고, 이국적인 검투사에게 열광하거든요. 시선을 잡아끄는 이국적인 검투사는 설령 패배하더라도 죽이지 말고 살리라고 외치는 경우도 있어요. 당연히 이길 경우엔 더 큰 목소리로 열광하고요.”
챔피언은 패자를 처형해야 한다. 그 말은 아리스톨이 이길 경우 패자를 처형해야 한다는 소리지만, 패배할 경우엔 반드시 죽는다는 소리기도 했다.
뒤늦게야 그 사실을 깨달은 아리스톨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질 경우 반드시 죽는다니…… 그래서 질 경우를 대비해서 관중들의 시선을 끌 수 있을 만큼 꾸미자는 건가?’
패배를 상정하자는 말이었으니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자존심을 내세우기엔 이미 바닥까지 떨어진 자존심이 너무 하찮았다.
또한 아리스톨의 목숨은 그녀만의 것이 아니라 리즈와 베티의 것이기도 했다. 그녀가 맥없이 죽어 버리면 두 동생들을 구제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말 싫으시다면 그냥 출전하셔도 돼요. 패배할 경우…… 가 걸리기는 하지만, 질 경우 차라리 죽는다는 각오라면 상관없겠죠.”
조니가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했지만 아리스톨은 고개를 저었다. 치장 좀 하는 것으로 목숨을 구함받고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면 마다하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아냐, 괜찮아. 꾸미도록 할게. 어떻게 차려입어도 알몸인 것보단 나을 테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조니를 바라보다가, 표정을 보고 뭔가 잘못 받아들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그런 표정이야? 내가 뭐 잘못 이해한 거야?”
“옷을 말한 게 아니에요, 공주님. 제가 말한 건…… 전신 타투와 피어싱이에요.”
“……타투와 피어싱? 그게 뭐지?”
아리스톨은 두 단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오벨 왕국에는 없는 문화기도 했지만 순진하게 자란 처녀가 알 만한 것도 아니었다.
조니도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설명을 했다.
“타투는 바늘로 피부를 뚫어서 물감을 흘려 피부 밑에 그림을 그리는 거예요. 피부 속에다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평생 지울 수가 없어요.”
“마, 말도 안 돼…… 그런 짓을 한단 말야?”
깨끗한 피부를 평생 자랑해 왔던 아리스톨에겐 경악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래 가지고서야 팔다리를 드러내는 옷은 어떻게 입는단 말인가?
하지만 진정한 충격은 그다음이었다.
“그리고 피어싱은…… 몸에 구멍을 내서 귀걸이나 체인 등을 거는 걸 말해요. 하지만 귀만 뚫는 게 아니라 코와 혀, 가슴, 배꼽…… 그 밑의 그곳까지 그런 성적인 부위들에 구멍을 내는 거예요.”
“…….”
조니는 충격에 빠진 아리스톨이 상황을 이해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이럴 때는 재촉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스스로 이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어쩔 수 없다며 납득하고직접 선택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 주는 게 최선이었다.
‘하나뿐인 목숨으로 도박을 할 게 아니라면 어차피 선택할 길은 정해져 있는 거니 걱정할 필요도 없고, 하하.’
그리고 조니의 생각대로 아리스톨은 한참 후 머뭇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절대로…… 지울 수 없는 거야?”
조니는 웃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타투는 못 지워요. 피부를 다 벗겨내지 않는 한은요. 하지만 피어싱은 너무 오랫동안 뚫어 두는 게 아니면 도로 막히니 안심하셔도 돼요. 챔피언이 될 때까지만 뚫는다고 생각하시면…….”
“……알았어.”
“네?”
“할게. 타투랑 피어싱. 죽는 것보단 나으니까.”
“괜찮…… 으시겠어요?”
“다른 수도 없잖아?”
“네…….”
“그럼어쩔 수 없지. 그렇게 해서라도 여벌 목숨을 챙길 수 있다면 하는 수밖에. 왕국으로 돌아가면 수도원에라도 칩거하면 되겠지, 뭐.”
아리스톨은 그렇게 말하면서 조니를 보고 활짝 웃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간직한 맑은 미소였다.
조니는 그 미소를 보면서 마주 웃어 주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웃는 게 너무 귀여워서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 전혀 다른 생각을 한 채로 그렇게 웃음을 나눴다.
그리고 잠시 후 조니가 아리스톨의 손을 잡아끌면서 자연스럽게 말했다.
“알았어요. 그럼 바로 시술하러 가요.”
“오늘 바로?”
“한 번에는 다 못 그리거든요. 꽤 아파서…… 기왕 할 거면 1회전 출전 전에 끝마쳐서 미리 입소문이라도 띄워 둘 겸 오늘부터 밑그림 작업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응, 알았어…… 어차피 할 거면 미뤄서 좋을 것도 없겠지.”
아리스톨도 기왕 마음먹은 거 그 마음이 약해지기 전에 받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조니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곧바로 보 아저씨의 타투 샵으로 이동한 아리스톨은 작업대 위에 엎드리고 시술을 기다렸다. 한 번도 안 해 봤기에 약간의 두려움은 있었지만 바늘로 작업을 한다고 하니 못 참을 것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난관이 하나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어느 정도의 크기로 새겨 줄까, 친구? 작은 거, 큰 거?”
“전신으로 해 주세요. 콜로세움에 나갈 거거든요. 따로 챙겨 입지 않아도 눈에 확 들어오게끔 목부터 발목까지 다 그려 주세요.”
조니의 말을 들은 아리스톨은 엎드린 채로 숨을 멈추고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어, 엉덩이에도 그리는 거야? 낙인 찍힌 엉덩이 위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