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27화 마스터 일리아스 & 검희 라셴드 첫 만남 (1)
“산책 중인가? 그런데 왜 주인이 안 보이지?”
밝은 표정으로 고양이처럼 네발로 걸어 내려가고있어서 무심코 지나칠 뻔했는데, 자세히 보니 주인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산책이든 체벌이든 간에 모든 노예는 주인이 대동하고 다녀야 했기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설마 도망가는 건 아닐 테고…….”
노예 도시에서 노예가 대낮에 도망쳤다는 소리는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주인 없이 혼자 다니는 것도 말이 안 되기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게다가 자세히 보니 엉덩이 골 위에 찍혀 있는 브랜드 낙인은 애드베르토 세르빌리였다. 정신을 강제로 굴복시키는 고위 마법인 데다 그 마법 낙인을 찍고 도망을 시도라도 한 노예가 여태 하나도 없었으니 더더욱 도망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니는 왠지 모르게 계속 신경이 쓰였고, 결국 그 펫 노예에게로 다가가서 주인 없이 질질 끌려 다니는 목줄을 확 잡아챘다.
“헉?! 누구세요?”
“너, 주인은 어디 있니?”
“……저 위에서 보고 계시고 노출 플레이 중인데요?”
노예의 시선을 따라 대로 위쪽을 보는데 주인인 듯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전부 다 노예를 대동하고 있거나 혼자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고 이쪽을 지켜보는 사람은 딱히 없었다.
“안 보이는데?”
“……방치 플레이도 즐기시는지라 골목에 숨어서 지켜보고 계실 거예요. 그럼 이만 가 봐도 될까요?”
“왠지 수상한데…….”
“어디가 수상하신지…… 마법 낙인 찍힌 거 안 보이세요? 제 주인님은 대마법사시라 제가 도망간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랍니다.”
펫 노예는 그렇게 말하며 등을 돌리고 엉덩이를 들어 올려 보였다.
“흠…….”
조니는 노예의 말을 대충 들으면서마법 낙인의 형태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낙인 자체가 노예 상인의 명함이나 사인과도 같은 것이기에 모두 독자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고 유명한 노예 상인들의 낙인은 조니도 몇 알고 있는 게 있었다.
그러나 이 펫 노예에게 찍힌 낙인은 처음 보는 형태였다.
“굉장히 세련된 낙인이네. 좌우 엉덩이 골에 반씩 나눠 찍힌 나비 날개라…… 이런 낙인이면 상당히 옛날 분이려나?”
동식물의 형상이나 멋진 문양, 문구를 베이스로 하는낙인은 대부분 노예 도시 초기부터 오랜 세월을 살아가고 있는 대귀족들이 사용하고 있었다. 나비 날개 낙인은 비록 처음 보는 것이지만 다른 자질구레한 표식 없이 펼쳐진 날개 한 쌍만 찍혀 있는 것으로 볼 때 최근에 만들어진 건 아닐 확률이 높았다.
애드베르토 세르빌리를 찍었으니 최소한 고위 마법사. 거기에 낙인의 형태를 볼 땐 십중팔구 대귀족.
견적을 낸 조니는 일단 펫 노예의 목줄을 단단히 잡아끌며 목적지를 바꿨다.
“이 정도 주인이면 손해 볼 일은 없을 것 같네. 직접 확인해 보면 되겠지. 따라오렴.”
“헉. 저, 저기요?”
“주인이 정말 지켜보고 있으면 튀어 나오거나 하지 않겠어? 어차피 여기선 주인 없이 혼자 다니는 노예는 줍는 사람이 임자야.”
“아니, 그게, 저기…….”
“따라와.”
조니는 목줄을 콱 잡아당기며 방랑자들의 구역으로 향했다. 브랜드 낙인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인물이 그곳에 있었다.
보 아저씨의 타투 샵.
키마이라 가문의 마스터 타투이스트 보가 운영하는 타투 샵으로, 개인 낙인 도구를 갖추지 못한 초보 노예 상인들에게 브랜드 낙인 타투를 새겨 주거나 영구적인 타투 메이크업, 이국적으로 보이게 하는 형형색색의 전신 타투 등을 새겨 주는 곳이었다.
노예 상인을 처음 시작하는 이들은 거의 모두가 이곳에서 개인 브랜드 낙인을 타투로 새긴 뒤 납품했기에 노예 도시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브랜드 낙인을 구분할 줄 아는 인물이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보는 얼굴이군. 브랜드 낙인 새기러 왔나?”
보 아저씨의 물음에 조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길 가다 주웠는데 혹시 이 브랜드 낙인이 누구 건지 아시나 해서요. 찾아 드리려고 하거든요.”
“탈주 노예인가? 어디 한번 보여 보게.”
조니는 보 아저씨가 볼 수 있도록 펫 노예를 돌려세웠다. 그러자 브랜드 낙인을 확인한 보 아저씨가 흥미를 보였다.
“호오…… 대마법사의 브랜드 낙인이군. 기억에 있네. 아주 오래전에 본 적이 있었지.”
보 아저씨는 사람 좋은 배불뚝이 아저씨처럼 생겼지만 실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키마이라 가문은 인간의 가문이 아니었으니까. 노예 도시가 세워질 적의 인물이라는 소문도 있을 정도였다.
“어떤 분인가요?”
“글쎄.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하지만 브랜드 낙인 모음집에 있는 건 확실하네.”
그렇게 말하고서 매해 발행되는 브랜드 낙인 모음집을 펼친 보 아저씨는 앞부분을 몇 장 넘기더니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 여기 있군. 마스터 일리아스. 노예 도시를 세운 키마이라 가문의 대귀족들 중 한 분이시지. 티에라 델 성채에 가면 볼 수 있을 거야.”
“……상당한 거물이었네요. 그것도 보 아저씨랑 같은 가문 분이시고.”
조니의 말에 보 아저씨가 허허 웃었다.
“날 아는군, 젊은 친구? 요즘 젊은이들은 그냥 인간으로 알고 있는데 신기하군.”
“노예 도시에서 살아가려면 정보가 최우선이잖아요. 어릴 때부터 발품 좀 팔았지요.”
“기특한 친구구만. 주운 노예는 주운 사람의 소유물인데도 주인에게 찾아 준다고 하고…… 좋네. 내 특별히 티에라 델 성채에 들어갈 수 있는 소개장을 하나 써 주지.”
각 구역의 고위 귀족들이 거주하는 홀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다. 해당 구역의 귀족이나 유력가들에게 노예를 여럿 납품하여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린 후에야 겨우 허락되는 것인데, 그 과정을 소개장 하나로 패스할 수 있게 해 줄 정도라면 노예 도시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의미였다. 그야말로 어린 조니가 필사적으로 살아남을 길을 찾기 위해 온갖 정보를 다 수집했던 덕에 얻어 낸 행운이었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조만간 전신 타투 한번 부탁드리러 올게요.”
“허허. 그래 주면 내가 더 고맙고.”
초짜들 사이에선 그냥 브랜드 낙인이나 새기러 오는 타투 샵이었기에 값비싼 전신 타투는 주문이 거의 없었다. 타고난 예술가인 보 아저씨에게는 따분하기만 한 일거리뿐이었으니 조니의 말이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분 좋게 써 준 초대장을 받은 조니는 꾸벅 인사를 하고 펫 노예를 끌고 방랑자들의 구역에 있는 티에라 델 성채로향했다. 노예 도시의 온갖 이종족들이 가장 많이 사는 구역이기도 했고 인간이 아닌 키마이라 가문이 지배하는 곳인 만큼 경비병 역시 짐승족이었다.
하지만 보 아저씨가 써 준 초대장을 내밀자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성채 경비병이 그대로 통과시켜 줬다.
“들어가시오. 왕좌의 방을 제외한 모든 곳의 통행이 허락되오. 하지만 성채 밖으로 나가면 다시 들어갈 수 없으니 주의하시오.”
“알겠습니다.”
조니는 노예의 목줄을 끌고 안으로 들어가며 표정을 살폈지만 노예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딱히 도망을 쳤다거나 하는 불안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니는 펫 노예를 믿지도 않았고 신경 쓰지도 않았다. 정말 노출 플레이였든 아니든 간에 조니는 손해 볼 게 없었다. 오히려 한 번이라도 대귀족에게 눈도장을 찍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또한 성채 안으로 들어와서까지 길안내를 안 하는 걸 보면 충성심이 눈곱만큼도 없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자, 가자. 마스터 일리아스는 어디에 머무르고 계시려나.”
최상층 쪽이 아닐까 생각하며 내부를 순찰하는 친위병에게 물으니 예상과는 다르게 지하라고 알려 주었다. 대개 높은 사람일수록 높은 곳에 사는데 희한하게도 정반대였다.
“만나 보면 알겠지.”
조니는 태연하게 목줄을 잡아끌면서 성채 지하로 내려갔다.
인적도 완전히 끊길 무렵 도착한 지하층엔 입구가 단 하나밖에 없었다. 마스터 일리아스의거주구였다. 경비병도 없고 문도달려 있지 않은 입구를 통과한 조니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펴보면서 주인을 찾았다.
“실례합니다. 일리아스 님 계신가요?”
“안까지 들어와.”
맑은 고운 목소리가 조니의 귀에 꽂혔다. 목소리만으로 판단할 때는 젊은 아가씨의 미성이었다. 하지만 키마이라 가문의 대귀족이니 실제로 젊을 리는 없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한참을 들어가자 넓은 홀이 펼쳐졌고 그 끝에 있는 옥좌에 빨간 드레스를 입고 빨간 작은 우산으로 얼굴을 가린 주인이 눈에 보였다. 겉보기는 완벽한 인간 아가씨였다.
조니가 방문 목적을 말하려고 하자 옥좌의 주인, 마스터 일리아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침에 도망간 노예를 데려왔네. 뒤늦게 굴복하여 돌아온 줄 알았더니.”
“게이트로 이어진 대로를 혼자 내려가고 있던데 주인이 안 보이더라고요. 애드베르토 세르빌리가 찍힌 걸 봐서 설마 싶긴 했는데, 혹시 몰라 데리고 와 봤어요.”
조니의 설명에 마스터 일리아스가 빨간 우산을 치우고 얼굴을 드러냈다. 인형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완벽한 미를 갖추고 있는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마법 낙인을 찍고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도망쳤어. 이런 경우는 나도 처음이었지만 애드베르토 세르빌리를 찍어 놓고도 도망치게 한 것 때문에 찾으러 나가질 못했지.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으니까.”
노예 도시의 대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이 마법 낙인은 지금까지 단 한 명의 노예도 탈주할 생각을 갖게 하지 못한 최고위 마법이었다. 그런데 대마법사인 마스터 일리아스가 직접 시전하고도노예가 도망쳤으니 외부로 알려지면 엄청난 명성을 떨어트릴 만한 일이었기에 밖으로 나가질 못하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데려와 줘서 고마워. 덕분에 내 명성도 지켰고 애드베르토 세르빌리의 미처 알지 못했던 문제점도 알게 됐어. 마땅한 보상을 해 주도록 할게.”
마스터 일리아스는 예쁘지만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로 조니를 바라봤다. 마치 빨려들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신비로운 눈이었다.
한참 동안 조니를 응시한 마스터 일리아스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네게 필요할 만한 보상 세 가지를 제시할 테니 가장 필요한 걸 골라 봐.”
마스터 일리아스는 이어서 세 가지의 보상을 제시했다.
첫째는 마스터 일리아스가 직접 조제한마법 시약들.
망각의 강물, 바쿠스 넥타르, 사랑의 묘약, 필터 등 조니가 제조할 수 없지만 노예 조교에 있어 아주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고급 마법 시약들을 제공받는 것.
둘째는 다른 사람의 아우라를 항시 볼 수 있게 해 주는 아티팩트 목걸이.
마지막 셋째는 마스터 일리아스와의 하룻밤.
게다가 단순히 그냥 자는 것이 아니라 친히 여러 가지 교습을 시켜 주는 교육도 포함된 동침이었다.
분명히 셋 다 조니에게 아주 필요하고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것들이었고 어느 걸 선택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괜찮은 보상이었다. 특히 마지막은 대귀족이자 대마법사인 마스터 일리아스와 하룻밤을 보냈다는 상징성도 있었다. 이 사실을 바깥에 퍼트리면 조니의 명성 또한 올라갈 게 틀림없었다.
“어떤 걸 고를 거니?”
그러나 조니는 마스터 일리아스의 물음에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저었다.
“셋 다 유용하긴 하지만 절박한 것들은 아니네요. 혹시 주제넘은 게 아니라면 다른 걸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
마스터 일리아스는 조니의 눈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봤다. 대가 이상의 탐욕을 바라는 것이면 바로 징치하고 내쫓을 생각이었다.
‘……읽을 수가 없어. 저 어린 나이에 어떻게 이렇게 태연한 걸까.’
아우라와는 달리 속마음을 읽을 수는 없었던 마스터 일리아스는 조니의 생각을 알고 싶어서라도 승낙을 했다.
“좋아. 말해 봐.”
“성장형 아티팩트를 만들어 주시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