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17화 드레니카 공략 (3)
“이, 이 맛은……!”
마치 입안으로무수히 많은 별들이 쏟아지는 것 같은 맛이었다. 맛이 아니라 행복 그 자체를 먹는 기분. 노예는 태어나서 먹어 본 것 중에서 단연코 으뜸으로 맛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그 맛에 황홀경까지 느낄 수 있었다.
“세상에…… 이게 대체 뭐지? 이런 걸 매일 돈 주고 사 먹을 수 있다는 건가?”
노예는 아직까지도 맛의 여운에 잠긴 채 행복감을 느끼며 조니에게 물었다.
“베스트리안 암브로시아라는 거예요. 정말인진 모르겠는데 암브로시아 원액을 희석시켜 디저트용으로 파는 거라고 들었어요. 수량은 꾸준히 팔기는 하지만 무한정 사들일 순 없어서 돈 많은 갑부나 미식가들이 주로 먹고요.”
암브로시아는 신화 속에 등장하는 신들의 음료이다. 영생과 불사를 준다고 하는데 당연히 진짜일 리는 없겠지만, 노예 도시의 지배자들 중엔 수백 년을 살아왔다는 존재들도 있다고 하니 어쩌면 혹시 모를 일이었다.
“후우…… 내 생애 최고의 맛이었다. 하나 더 사 줄 수 있나?”
“제가 받은 데이트 비용은 이미 거의 다 썼거든요? 앞으로는 다음 주인님한테 사 달라고 하세요. 매일은 무리겠지만 적당히 비위만 맞춰 주면 종종 사 줄 호구는 넘쳐나거든요.”
“흐으음…….”
조니의 말에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노예는 곧 눈을 뜨더니 조니를 와락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헉. 이, 이러시면 고, 곤란한……?”
“곤란하긴 내가 곤란하지. 땅꼬마. 네가 나한테 해 준 것들은 모두 노예가 말을 잘 들었을 때의 포상인가?”
조니는 난처해하면서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그래서 나보고 지금 말 잘 듣는 노예가 되라고?”
노예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이번엔 아까까지와 같은 암사자 같은 표정이 아니라 사냥감을 앞에 둔 상위 포식자의 눈매였다.
조니는 단번에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아뇨, 전혀 그렇지 않은데요?”
“뭐……? 그럼 왜 내게 이런 걸 해 준 거지?”
“반대로 하시면 된다는 걸 알려 드리려고요. 주인을 말 잘 듣게 만들어서 예쁜 옷도 사 오게 시키고, 암브로시아도 사 오게 시키고, 데이트 코스도짜 오게요. 주인에게 맞는 즐거움을 가르쳐서 종처럼 부리세요. 그런 게 누님 전문 아니었어요?”
“그건…… 맞지.”
“노예 도시는 규칙이 특수해서 그렇지 실제로 노예 상인이 될 만한 지배력을 지닌 사람은 거의 없어요. 그냥 환경이 이래서 그런 역할을 맡는 것뿐이거든요. 저만 해도 노예 상인인데, 어디 누님 같은 분을 노예처럼 부리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으세요?”
“흥, 어림도 없지. 네가 무슨말을 하려는지 알아듣겠다. 무작정 때려죽이지 말고 즐겁게 맞는 법을 알려 줘서 길들이란 거지?”
“네, 바로 그거예요. 안젤리카 씨만 해도 여조교사로 이름이 높아요. 누님이라고 그렇게 되지 못하겠어요? 나중엔 노예 상인 조교사로 유명해질지도 모르죠.”
“후후…… 그건 마음에 드는군. 그런데 일단…… 너부터 좀 때려 보면 안 될까?”
조니는 식은땀을 흘렸다. 목소리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아, 암브로시아 하나 더! 하나 더 드릴 테니 목숨만은……!”
“쳇. 눈치만 빠른 땅꼬마 자식.”
결국 조니는 암브로시아 하나를 더 조공으로 바치고서야 목숨 동정을 부지할 수 있었다.
노예 상인 길드로 돌아온 조니는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얌전하게 서 있는 노예를 안젤리카에게 인솔했다.
“잔금 주세요, 안젤리카 씨.”
“뭣?! 진짜? 벌써? 말도 안 돼.”
기겁을 하고 놀라면서도 노예의 아우라를 점검해 본 안젤리카는 자리에 털썩 무너져 내리며 떨떠름한 시선으로 조니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죽어도 상관없으니 맡겨 보기는 했지만 언제쯤 맞아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올까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몇 시간 만에 완벽하게 D급 노예로 조교해서 데려왔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젤리카 눈에 보이는 노예의 아우라에는 단 하나도 없던 복종의 싹이 셋, 사육의 끈과 인지의 핵이 두 개씩 강렬한 성적파동과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
다른 것들도 놀랍지만 특히나 성적 파동은 높으면 높을수록 모든 노예를 조교하기 쉽게 만들어 주는 아우라였고 원치 않게 노예가 된 여자들에게 심어 주기 어려웠기 때문에 보고도 믿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안젤리카는 조니의 목에 팔을 와락 두르고 귀에 속삭였다.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반나절도 안 돼서 아우라가 이만큼이나 안정화되다니?”
“그럼 진짜 맞아 죽으라고 시킨 거였어요?”
“어, 그렇다니까? 뭘 자꾸 되물어?”
“……잔금이나 주시죠.”
“알았어, 줄게. 근데 진짜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야? 노하우 공개 안 할래? 색정광이나 마조 소질도 없는데 엄청나게흥분시켜 놨네. 성감대가 어딘지만이라도 좀 알려 주라.”
“맨입으로요? 됐거든요? 어서 빨리 잔금이나 주세요. 아까 하도 멱살 잡히고 흔들렸더니 아직도 현기증이 나네요.”
“쪼잔한 자식.”
조니는 잔금이 든 돈주머니를 받고 짤랑거리며 기쁜 표정으로 안젤리카와 노예에게 인사를 했다.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잘들 지내세요.”
그런데 길드 밖으로 나가려는 조니를 노예가 불렀다.
“어이, 땅꼬마. 너 이름이 뭐냐?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못 들었군.”
“조니예요. 참 쉽죠?”
“기억해 두지. 난 드레니카다. 다음에 만나게 되면…… 후후.”
“히익.”
조니는 소름이 쭈뼛 돋는 것을 느끼며 길드 밖으로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을 쳤다.
그러고는 노예 상인 길드의 문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름 같은 알려 줄 필요 없는데 괜히 그러네, 어휴…… 빨리 집에 가서 공주님이랑 놀아야지.”
***
그날 밤.
드레니카는 네크로폴리스의 지배자들이 거주하는 레이븐 타워로 팔려 갔다. 코르버스 가문의 니렐리스 대주교가 새로운 구매자였다.
새 주인을 맞이한 드레니카는 당당한 태도로 니렐리스 대주교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당신이 내 새 주인인가? 허약해 보이는군. 내가 주는 즐거움을 제대로 누릴 수 있을지 모르겠어, 후후.”
니렐리스 대주교는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아왔는지 움직일 때마다 부서질 것 같은 몸을 한 미라였다. 육체는 허약하고 약했지만 붕대 안에는 강대한 마력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애드베르토 세르빌리. 도미니 딕텀. 센텐티아 베리타스.”
니렐리스 대주교는 일어반구 대꾸 없이 세 개의 마법을 연달아 펼쳤다. 대마법사의 반열에 오른 그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순식간에 드레니카의 하복부에 마법 브랜드 낙인이 찍히고한 번뿐이지만 시전자의 모든 명령에 따르게 하는 마법 주박이 걸렸다. 그리고 뇌에 착각을 일으켜 다음에 느끼는 감정을 증폭시키게끔 하는 정신 지배 마법까지 이어졌다.
모든 것이 한 호흡 만에 펼쳐져 드레니카는 미처 반응할 수도 없었고, 도미니 딕텀에 걸린 순간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명령에 절대 복종하게 된 드레니카를 향해 니렐리스 대주교가 작은 약병을 던졌다.
“마셔라.”
“네…… 주인님…….”
드레니카는 눈빛이 풀어진 상태로 아무 의심 없이 약병에 든 내용물을 마셨다.
그리고 명령에 따르자마자 주박이 풀어지며 제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뭐, 뭘 먹인 거냐!”
드레니카가 분기를 터트리며 니렐리스 대주교를 때려죽이려고 한 순간, 갑자기 마음속에 이상한 변화가 생겨나는 것을 느끼며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붕대로 감긴 미라인 니렐리스 대주교가 갑자기 사랑스럽게 느껴지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뭐, 뭐야…… 내가 왜 저런 미라를…….”
“확실히 정신력이 강한 노예였군. 안젤리카의 귀띔이 아니었다면 곤란했을지도 모르겠는걸. 그래서 싸게 사긴 했지만.”
드레니카의 상태를 주시하며 그렇게 중얼거린 니렐리스 대주교는 드레니카에게 명령했다.
“내붕대를 조심히 풀고 새것으로 갈아라.”
드레니카는 주인님이 봉사를명령하는 것을듣고 기뻐하며 대답했다. 해 드릴 수 있다는 게 기쁘게 느껴진 탓이다.
“네, 주인님.”
그리고 곧바로 자신의 상태에 경악하며 이를 갈려고 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이미 미소를 짓고 있었고 몸은 주인님이 시킨 대로 봉사하기 위해 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니렐리스 대주교는 붕대에 감긴 채 음산하게 웃었다.
“네가 마신 것은 필터라고 하는 미약이다. 처음 본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헌신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미약이지. 이제 너는 평생토록 내 붕대갈이가 되어 봉사할 것이다.”
“네…… 평생 곁에 둬 주세요, 주인님.”
대답하는 드레니카의 얼굴은 완전히 첫사랑에빠진 소녀의 것이었다.
***
“다녀왔습니다,공주님. 헤나도 잘 있었지?”
“다녀왔어, 주인님?”
“오빠~ 보고 싶었어요!”
와락.
아리스톨이 마중 인사를 할 사이도 없이 헤나가 먼저 조니에게 달려들어 안겼다. 아무리 작은 몸이라고 해도 소녀의 알몸이 전신으로 매달려 오자 조니는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워했다.
“헤나야, 표현이 너무 과한 거 아냐?”
“에헤헤. 그래도 반겨 주는 사람이 있어야 집에 돌아오는 맛이 있죠.”
“그건 그렇긴 해도…… 너 이러다 또 공주님한테 교육받는 거 아냐?”
“아앙, 그땐 그때고 지금은 이렇게 매달려 있을래요. 언니가 저래 보여도 질투가 많아서 그래요. 내가 오빠한테 안기면 막 새침해지는 거 알아요?”
“……공주님, 진짜예요?”
“그, 그럴 리가 있겠어? 내가 왜 헤나를 질투해?”
“근데 왜 오늘은 마중 인사도 제대로 안 해 주시고…….”
조니의 말에 아리스톨은 얼굴을 붉히면서 머뭇머뭇 다가왔다.
“헤나가 있다 보니까 좀 부끄러워서…… 잘 다녀오셨어요, 주인님?”
쪽.
황급히 입맞춤을 한 아리스톨은 몸을 휙 돌리고는 부엌으로 종종 달려갔다.
“난 점심 준비할게!”
“……통조림 꺼내는 것밖에 안 되는데 굳이 준비까지.”
“오빠, 언니 귀엽지 않아요?”
“귀엽다기보단 예쁘시지. 헤나가 귀엽고.”
“얼굴 말고 성격요. 질투하면서 정작 자긴 부끄럼 타고 아앙~ 완전 공주님 성격이야. 근데 헤나도 귀여워요?”
조니의 몸에 매달려 있는 헤나는 고개를 치켜들고 조니를 말똥말똥 쳐다봤다.
“응, 귀여운데?”
“그럼 애정 표현 해 주세요. 나도 뽀뽀하고 싶어요.”
“……오빠랑 동생은 그런 거 안 하거든?”
“그럼 오빠랑 언니는요?”
“……공주님, 교육 좀 더 하셔야 될 거 같은데요.”
“……으, 응, 내가 봐도 그러네. 미, 미안. 점심은 먼저 먹어.”
아리스톨이 헤나를 조니의 몸에서 떼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헤나는 아리스톨의 팔을 뿌리치더니, 더욱 강하게 조니를 끌어안으며 투정 부리듯 외쳤다.
“하지만 이런 거 이상하다구요!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언니는 뭔가 내 눈치 보고 있었고 일어난 뒤에도 오빠 표정 뭔가 이상했어요. 나도 다 컸어요. 나 애 아니란 말이에요. 아무리 오빠가 우리한테 잘해 줘도 결국은 주인님이고 노예 상인인데, 왜 노예 눈치 보느라 아무것도 못 해요? 지금도 언니 나 때문에 눈치 보느라 마중 인사도 제대로 못 했잖아요. 이렇게 우리가 오빠 못 도와주고 방해만 하면 오빤 어떻게 우리 먹여 살려요?”
현재의 자금 사정에 대해서는 헤나에게도 설명을 해 줬기 때문에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리스톨은 힘내라고 격려만 하고 그치는 데 비해, 거침없고 솔직한 성격의 헤나는 자신들이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노예 도시에서 조니와 아리스톨 같은 식구를 만나는 건 정말 일생일대의 행운이란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헤어지기도 싫었고, 이제 막 의지할 데를 찾고 행복해졌는데 그런 조니가 자기들 때문에 제대로 돈을 못 벌어서 죽게 되는 것도 싫었기 때문이었다.
“헤, 헤나야…….”
“헤나야, 그런 건 조니랑 언니가 알아서 할 테니…….”
헤나는 아리스톨의 말에 고개를 홱 돌려 그녀를 노려보듯 쳐다보았다.
“언니도 이상해요. 당장 5일 뒤에 대출금 못 갚으면 조니 오빠 죽는다면서요? 근데 왜 그렇게 태연해요? 오빠 죽어도 돼요? 오빠 죽고 나면 우리 차례 아니에요? 우리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왜 불안한 기색이 하나도 없어요?”
“그, 그건…… 그, 그런 건 아니야. 나는 단지…….”
정곡을 찔린 아리스톨은 뭐라 변명하지 못하고 말만 더듬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나, 난 대체 뭘 하고 있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