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3화 아리스톨 노출 수치심 조교 (1)
4월 9일.
조니는 짐을 정리했다.
가구야 빈집이었을 때 있던 부서진 것들뿐이고 재산은 어차피 아무것도 없었다. 고작해야 입고 있는 헤진 옷 하나만 입고 맨몸으로 가면 됐다.
하지만 아리스톨의 검과 갑옷, 그리고 옷은 처분을 해야 했다.
“공주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한번 결정하면 되돌리는 건 불가능해요.”
“난 괜찮다, 조니. 오히려 나야말로 원치 않는 길에 끌어들여서 미안할 뿐이구나.”
재능이 없어 훔쳐 먹고 살던 조니는 아리스톨 때문에 다시 노예상인이 되기로 했지만, 없던 재능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도시 안으로 들어가서 집을 구하면 10일마다 한 번씩 임대비를 내야 했고 통조림도 더 이상 훔쳐 먹을 수 없었다. 한마디로 직접 돈을 벌지 않는 이상 생계유지가 불가능한 길을 택한 것이다.
“뭐, 어쩔 수 없죠. 공주님 사정을 몰랐으면 모를까 이젠 들어 버렸으니까요. 대신 전 조교에 재능이 없으니 공주님께서 도와주셔야 해요.”
조니가 아리스톨을 노예로 받아 주는 대신에 건 조건이 바로 그거였다.
조니의 조교를 도와줄 것.
얼핏 보면 노예로 받아 주는 대신 조건을 단다는 게 말이 안 됐지만, 노예 상인으로서 생계를 유지할 재능이 없는 조니로서는 당연한 조건이었다.
게다가 도시에 정착할 최소한의 자금도 없는 조니로서는 돈도 대출받아야 했다.
판자촌에 제대로 된 은행 따위가 있을 리가 없으니 당연히 고리대금이었고, 이자율은 상상을 초월했다.
10일에 100스파크.
당장 1스파크도 없는 조니는 대금업자의 집으로 가서 500스파크를 빌리고 10일 내로 600스파크로 갚아야 하는 고리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10일간쓸 돈을 빌리는 대가로 혼자서 3개월을 먹을 수 있는 돈을 갚아야 하게 된 것이다.
당장 10일 동안 100스파크 이상을 벌지 못하면 조니는 그대로 죽는 처지였다.
아니, 100스파크로도 모자랐다.
도시 안에서 가장 싼 집은 뱀족의 구역인 서펀타인에 있었고, 가장 싸다 해도 10일의 임대비가 50스파크였다. 또한임대할 때미리 10일치의 임대비와 중개 수수료 25스파크를 내야만 했다. 사람이 언제 죽어 나갈지 모르는 노예 도시에서는 모든 것이 선금이었다.
“하아…… 500스파크를 빌리자마자 425스파크가 되겠네요. 최소한 10일 동안 D급 노예 한 명은 조교해서 팔아야만 해요.”
“D급 노예의 가격은 얼마지?”
“500스파크가 시세예요. 통조림 값이랑비교하면 엄청나죠? 그래서 조교를 잘하는 노예 상인들은 금방 부자가 될 수 있어요.”
이제 보니 생활필수품이 비싼 게 아니라 오로지 노예 공급과 판매에 초점을 맞춰 인프라가 형성된 것이었다.
“여긴 정말 노예 도시로군. 모든 게 노예에 맞춰져 있어.”
“그런 곳이니까요. 그나저나 공주님…… 이제 슬슬 벗어 주셔야…….”
조니는 쑥스러운지 바닥을 보고 볼을 긁으며 그렇게 말했다.
둘이 함께 노예 도시 안으로 들어가기로 한 이상 아리스톨은 노예가 되어야만 했고,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떻든 간에 남들에게는 확실히 노예와 주인으로 보여야 했다.
그리고 노예 도시로 들어가는 모든 여자는 옷을 입을 수 없었다.
“……알았다.”
아리스톨은 입술을 깨물고 천천히 옷을 벗었다.
왕궁에 있을 때는 시녀들 앞에서 매일 벗고 목욕 시중을 받았지만 남자 앞에서 벗는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앞으로는 매일 벗고 지내야만 했다. 공주이자 기사였던 아리스톨 입장에서는 엄청난 수치심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하아…… 맨살을 스치는 공기가 이렇게 차갑다니. 그리고 이제 내 벗은 몸을 모든 남자들이…….’
아리스톨은 맨살이 차가운 공기에 노출되는 것을 느끼면서 옷을 벗어 내렸다.
“다…… 됐다.”
조니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리스톨의 나신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간 육감적인 몸매. 빛이 반사될 정도로 투명하고 뽀얀 우윳빛 피부는 환상적이었다.
옛날에 노예 상인 교육을 받으면서 몇몇 노예들의 나신을 보긴 했지만 아리스톨 정도의 몸매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몸이 정말…… 예쁘시네요, 공주님.”
“…….”
아리스톨은 뺨을 붉히면서 고개를 돌렸다.
스스로 노예 입장이 되기로 마음먹었다지만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아무리 막냇동생뻘이라고 해도 조니는 알 건 다 아는 혈기 왕성한 남자아이였다.
하지만 그런 아리스톨의 심정을 모르는지 조니는 바로 몸을 돌려 검과 갑옷, 옷을 챙겼다.
“옷과 무구는 제값 받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고, 통조림이라도 몇 개 받아 볼게요. 아니면 쓸 만한 물건이라든지요. 돈 달라고 하면 그대로 찔러 죽일 사람이 널린 곳이라 어쩔 수가 없네요.”
당장 10일 내로 대출금을 갚아야 하는 조니 입장에서는 설령 노예용 건사료 통조림 하나라고 아껴 먹어야 했다.
“그럼 다녀올게요.”
“……다녀와라.”
조니는 여전히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아리스톨을 뒤로하고 집을 나섰다.
“다녀왔어요, 공주님.”
잠시 후 돌아온 조니는 통조림 대신 슬리퍼 한 짝과 허리띠를 들고있었다.
아리스톨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게 내 검과 갑옷, 그리고 옷을 판 대가인가?”
“네…….”
“하아…… 오벨 왕국에서라면 집 한 채를 받아도 부족한 것들인 것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곳은 정말 터무니없는 곳이다. 하다못해 네가 검만이라도 매고 들어갈 수 있다면 이렇게 안타깝진 않을 텐데.”
빛을 잃었다 해도 아리스톨의 검은 성검이었다. 오벨 왕국의 국보이자 다시 구하기 힘든 명검이었다.
하지만 노예는 무기는 고사하고 속옷조차걸칠 수가 없었고, 조니는 이미 노예 도시 사람들이 그를 알고 있는데 갑자기 좋은 무기를 들고 들어가면 당장 오늘 밤 강도당해 죄다 뺏기고 죽을 뿐인지라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전 이거라도 받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슬리퍼랑 허리띠 뺏자고 강도질하러 오진 않을 테고, 계속해서 쓸 수 있는 것들이니까요.”
하긴 중고 거래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고 했으니그걸 생각하면 슬리퍼랑 허리띠도 얻은 게 행운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리스톨은 기가 막히면서도 어딘지 납득이 갔다.
이곳은 그냥 원래 그런 곳인 거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그럼 이제 도시 안으로 갈 수 있는 건가?”
“음, 잠시만요.”
조니는 슬리퍼는 허리춤에 꽂고 허리띠를 양손으로 넓게 쥐고 아리스톨을 향해 다가갔다.
“보셨겠지만 노예는 신체를 구속하고 들어가야 하거든요. 손만이라도 묶여 주세요.”
아리스톨은 미안해하는 조니의 눈을 보다 한숨을 내쉬고 양손을 모아서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다 조니의 손길이 너무 조심스럽고 매듭에 힘이 없자 양손에 힘을 모아서 조니 쪽으로 꾹 내밀었다.
“사양 말고 꽉 묶어 다오. 남들이 의심하지 않게. 네가 그렇게 미안해하면 내가 더 널 볼 낯이 없지 않느냐.”
“감사해요, 공주님.”
조니는 아리스톨의 협조에 힘입어 순조롭게 손목 구속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럼 이제 이동할게요. 발이 좀 아프실 테니까 주의하시고요.”
옷을 벗었으니 발도 당연히 맨발이었다. 기사였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고운 피부를 꾸준히 관리해 온 아리스톨에게는 돌과 자갈이 박힌 땅을 걷는 게 힘들 수밖에 없었다.
“알았다. 알려 줘서 고맙구나.”
“뭘요.”
조니는 쑥스럽게 웃으면서 아리스톨의 양손을 묶은 허리띠의 끝을 잡고 천천히 집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노예 도시로 들어가는 게이트를 향해 천천히 이동하고 있자니 수많은 노예 사냥꾼들의 시선이 조니에게로 향했다.
아리스톨을 음란하게 훑어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순수하게 조니에게 감탄의 기색이었다.
“휘유, 외모 하나는 극상품인데? 어디서 그런 물건을 구한 거야, 조니?”
“저 여드름 꾀죄죄한 꼬맹이가 어디서 저런 물건을 구했지?”
“조니, 이제 노예 상인 다시 재개하는 거냐? 이번엔 실패하지 말고 제대로 자리 잡아 보라고! 그래야 엉아가 가져다주는 건 더 얹어 주지, 크크크.”
하지만 모든 사람이 조니의 성공을 빌어 주는 건 아니었다.
정반대의시선으로 음침하게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주제에 안 맞는 물건을 구했군. 오늘 밤에 누가 배때기를 쑤시면 난 줄 알아라.”
“조니, 네 주제에 그런 물건 들고 도시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냐?그냥 넘기지 그래? 10스파크 쳐주지.”
“어이, 형씨. 딱 봐도 최상품인데 10스파크는 너무한 거 아냐? 그래도 우리 조니잖아. 12스파크는 줘야지.”
“크크크크. 웃긴 자식이군. 좆까. 조니한테 12스파크를 주느니 좆을 떼고 말지.”
“그건 나도 동감이군, 크큭.”
살기가 번뜩이는 두 사람을 지켜본 아리스톨은 그들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들에게선 사람을 여러 본 찔러 본 살인마의 냄새가 났다.
‘정말 조니 말대로 나 혼자 집 밖으로 나갔었다간 그대로 잡혀 죽거나 당한 다음에 노예가 됐겠구나. 조니가 아니었다면 난…….’
아리스톨은 몸이 부르르 떨렸다. 동시에 조니에 대한 고마움도 커져 갔다.
정신을 잃었을 때 저런 자들을 만났을 수도있는데 조니를 만난 건 정말 기적적인 확률이었다.
‘기사의 명예를 걸고 네게 헌신해 주마, 조니. 네가 하루라도 더 빨리 크게 성장해 내 동생들을 구입해 줄 수 있도록.’
그러는 사이에도 조니를 확 찔러 버리고 아리스톨을 강탈해 갈지 고민하는 사냥꾼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다행히도 조니를 응원해 주는 사냥꾼들이 막아 줘서 무사히 게이트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물론 그들도 순수한 마음으로 조니를 돕는건 아니고 일종의 호구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언제라도 칼을 쑤셔 넣을 수 있는 놈이니 이럴 때 은혜를 입혀 두고 자기들의 노예를 조니에게 넘기면서 시세보다 더 받자는 심산인 것이다.
정말이지 사람부터 도시까지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는 곳이었다.
“그럼 조니, 개미언덕에 집 잡을 거지? 물건 구하면 그쪽으로 갈 테니까 문전박대하지 마라. 형하고 너 사이잖냐? 그치?”
“네네, 형님. 자리 잡는 대로 잘 쳐드리면서 그간 신세 진 거 갚을게요. 꼭 찾아와 주세요.”
조니는 오늘 처음 보는 사냥꾼들에게도 그렇게 굽실거리면서 미소를 지었다.
이러나저러나 노예 상인이 되면 노예를 공급받아 조교해서 팔아야 했고, 노예를 공급받는 루트는 셋뿐이었다.
노예 경매.
노예 상인 길드.
노예 사냥꾼.
하지만 실제로 거래가 이루어지는 건 거의 100%가 노예 경매와 길드를 통해서였다.
두 곳에서 언제나 게이트에 진을 치고 앉아노예사냥꾼들이 데리고 오는 노예를 감별해서 바로 구매하기도 했고, 노예 사냥꾼이 직거래를 하겠다고 도시 안으로 들어가 봤자 아는 노예 상인이 없으면 팔 수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직거래를 하려면 일단 상품의 품질이 좋아야 했고 그다음으로는 구매자의 취향에맞아야 했다. 아무리 품질이좋은 노예라 해도 조교 취향에 맞지 않는 노예는 구매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메이드 조교를 잘하는 대신 펫 조교는 전혀 못 하는 노예 상인이 펫 노예용 상품을 사겠는가?
그러나 조니는 조교 실력이 꽝이라는 걸 모두 알고 있었고 상품의 품질을 가릴 처지가 아니란 걸 알기 때문에 단 몇 스파크라도 더 받고자저런 식으로 친한 척을 하는 거였다.
“흠, 너는…… 누구더라?옛날에 본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는군.”
게이트에 도착하자 게이트 키퍼가 조니를 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저 조니입니다. 5년 전에 노예 상인 길드에서 테스트 떨어지고 쫓겨났었지요. 그때 한 번 봤을 뿐인데 기억이 나시는 걸 보면 기억력이 굉장하시네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꾸벅.
조니는 적당한 아첨과 함께 허리를 직각으로 숙이며 인사를 했다.
게이트 키퍼는 그런 조니의 태도가 살가운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아리스톨을 위아래로 한 번 슥 보고는 바로 눈빛이 사나워졌다.
“근데 이건 네가 데리고있을 만한 물건이 아닌데? 금발의 극상품. 어제 들어간 두 년들이랑 같은 출신이군. 오벨 왕국의 공주였는데 네가 어떻게 공주를 데리고 있지?”
90도로 꾸벅 숙인조니의 등 뒤로 식은땀이 축축이 배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