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화 〉1화 아리스톨 입수 (1) (2/95)



〈 2화 〉1화 아리스톨 입수 (1)

대륙의 서쪽 끄트머리에 있는 오벨 왕국은 늘 고민이 많았다. 나라는 작고 자원이 별로 없어 자급자족이 쉽지 않았는데, 사방을 강대국에게 둘러싸여 있어 다른 길을 모색할 수가 없었다.

남은 길은 오로지 하나뿐.

서쪽 경계에 있는 안개의 숲을 개척하는 것뿐이었는데 그곳은 수백 년 전부터 금지로 정해져 있었고 들어갔다가 살아 돌아온 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기적처럼 한 명의 일류 모험가가 안개의 숲에서 귀환했다.

무려 5년 전에 행방불명되었었던 모험가로 모두 당연히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있던 자였다.

그런데 5년 만에 안개의 숲에서 돌아온 그는 들어가기 전보다 살이 올라 있었고 혈색이 좋았으며 입고 있는 옷도 귀한 천으로 만든 값비싼 것이었다.

그 말은  안개의 숲 너머에 다른 나라가 있다는 뜻!

오벨 왕국의 왕은 곧바로 대규모 개척단을 꾸려 금지 너머의 나라를 방문하기로 했다.

 나라가 부유하고 강하면 손을 잡고 무역로를 개척할 것이고, 부유하고 약하면 지배코자 한 것이다.

그렇게 꾸려진 개척단에는 수십 명의 기사와 마법사들, 그리고 왕국 제일의 기사인 제일 공주 아리스톨과 100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천재 마법사인 넷째 공주 리즈, 대륙 제일의 현자가   있을 거라고 평가받는 막내 공주 베티가 동행하기로 했다.

오벨 왕국 전력의 절반 이상을 투입한 셈이었다.

그리고 개척단은 귀환한 모험가를 길잡이로 세워 안개의 숲으로 들어갔다.

***

4월 8일.

“사, 살려 줘!”

“으악!”

“도망가십시오, 공주님! 공주님만이라도…… 크아아악!”

아리스톨은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 소리와 흩뿌려지고 있는 피에 아연실색했다.

수백 년 전부터 금지였다더니 안개의 숲은 정말 상상 이상으로 위험한 땅이었다. 이런 위험한 땅을 일개 모험자가 어떻게 통과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 모험가는 어디 있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길잡이를 맡은 모험가는 보이지 않았다. 휘황찬란한 옷을 입었기에 늘 눈에 띄는 자였는데 지금은  조각 하나 보이지 않았다.

‘도망쳤나? 아니면 그도 잡아먹혔는가?’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더 이상 고민하고 있을 여유도 없었다.

개척단은 이미 안개의 숲에 서식하는 정체불명의 괴물에게 당해 반수 이상이 죽었고 지금도 대부분이 피를 흘리고 쓰러지고 있었다.

무사한 사람은 개척단의 가장 안쪽에 있던 그녀 자신과 넷째인 리즈, 그리고 막내인 베티뿐이었다.

그녀들은 전력이기도 했지만 공주이기도  만큼 기사와 마법사들이 최우선적으로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희생은 의미가 없었고 아리스톨도 동생들과 함께 이곳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저 괴물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저런 몬스터는 듣도 보도 못했거늘!”

저런 괴물이 도사리고 있는 줄 알았다면 결코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길잡이 모험가는 그런 소리를 일절 하지 않았고 자기만 믿고 따라오면 된다고 했었다.

“어, 언니…… 우리 어떡해요?”

아리스톨은 그녀의 손을  쥐고 떨고 있는 베티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줬다.

“괜찮아. 베티는 살 수 있어. 언니가 반드시 살려 줄게. 리즈도 언니만 믿으렴.”

“언니…….”

넷째 공주 리즈도 아리스톨의 품으로 파고들어 눈물을 글썽거렸다.

천재 마법사라고는 하지만 이런 처참한 실전은 처음이었고 그녀가 익힌 어떤 마법으로도 지금의 난국을 타개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괜찮아. 언니만 믿으렴. 언니가 둘 다 살려 줄게.”

아리스톨은 두 동생을 토닥여 주다가 허리를 곧게 세우고 성검을뽑았다.

지금까지는 개척단의 지휘관이었지만 그녀 자신은 오벨 왕국의 제일기사.

사실 괴물들과 마주친 순간에 지휘관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선두에서 활로를 열었어야만 했다.

그랬으면 일부는 길을 뚫고 탈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동생을 데리고 탈출하는 것만도 버거운 일이었다.

“리즈, 베티. 절대 내 뒤를 놓치지 마. 계속 달려야 해.  수 있겠지?”

리즈와 베티는 눈물이 맺힌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스톨은 베티만이라도 등에 업고 달리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괴물들이 너무 많고  강했다.

‘전신이 촉수로 이뤄진 괴물이라니. 기동성과 유연성을 생각하면 등에 누군가를 업을 순 없어. 제발 힘을 내서  뒤를 따라오렴, 얘들아.’

아리스톨은 성검을 굳게 쥐고 활로를 살폈다.

그나마 가능한 길은 오로지 두 곳뿐.

개척단이 뚫고  동쪽과 가고 있던 서쪽이었다. 이 촉수 괴물들은 북쪽과 남쪽에서 몰려들었다.

‘그 길잡이의 안내가 맞기는 했던 건가? 하지만 지금은 그걸 확인할 겨를이 없어. 일단 돌파부터 해야 해.’

동쪽 길은 지금까지 온 길이기에 지리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개의 숲에 들어온 지 이미  달 이상이 흘렀기에 오벨 왕국으로 돌아가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반면 서쪽 길은 괴물들이 접근한 곳은 아니지만 지형이 어떤지도 모르고 얼마나 더 가야 목적지로 삼았던 나라에 도착하는지도  수 없었다. 아니, 그런 나라가 존재하는지도 불투명했다.

‘어디로 가야 하지?’

확실하지만 한 달 이상 걸리는 길.

불확실하지만 괴물들은 없는 길.

아리스톨은 눈을 질끈 감고 결정을 내렸다.

“서쪽으로  거야. 이미 돌아가기에는 너무 깊이 들어왔어.”

그렇게 오벨 왕국의 제일 기사는 두 여동생만 데리고 안개의 숲의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수많은 촉수 괴물들을 베어 넘기면서.

“허억…… 허억…… 허억…….”

아리스톨은 빛을 잃은 성검을 땅에 박아 넣고 쓰러지려는 몸을 부여잡았다.

대체 검을 얼마나 휘둘렀을까.

이젠 눈앞에 괴물이 나타난다 해도  한  휘두를 기운이 남지 않았다.

그나마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 않았다는 게 다행이었다. 배가 부른 것인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촉수 괴물들은 그녀를 잡으려고만 하고 이빨을 드러내 물어뜯지는 않았던 것이다.

검에 체중을 실은 채 한동안 숨을 고르던 아리스톨은 주변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 깨닫고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두 동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리, 리즈…… 베티?”

언제헤어진 것일까.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며 촉수 괴물에게 잡히지 않는 것만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리 그녀라 해도 그 와중에 두 동생의 안위까지 살피는 건 불가능했다.

“아, 안 돼…….”

털썩.

두 동생을 챙기지 못했단 죄책감에 아리스톨은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아리스톨은 자신이 땅바닥에 누워 있지않다는 걸   있었다.

‘평평한 나무? 침대인가?’

사방은 어두워 사물이 분간되지 않았다. 하지만 등에서 느껴지는 감촉이나 코에 느껴지는 차가운 공기의 냄새는 분명히 실내 공간이었다.

“깼나요?”

그때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이 느껴지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꾀죄죄한 남자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니, 남자라기보다는 소년? 기껏해야 베티 또래의 남자애로 보였다.

“여긴…… 어디지?”

“판자촌이에요. 안개의 국경선에 있는.”

“안개의 국경선? 수, 숲을 벗어난 건가?”

다급한 아리스톨의 물음에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입구 바로 앞에 쓰러져 계시더라고요. 아마 안개의 숲을 통과하신 것 같던데…….”

“그렇다. 나는 안개의  너머에 있는 나라에서 파견한 개척단의 지휘관이다. 그런데 숲에서 그 촉수 형태를 한 괴물들 때문에…….”

낡고헌 이불을 두 손으로  쥔 아리스톨을  소년은 어두운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피엔드.”

“피엔드?”

“이곳 말로 악령, 마귀를 뜻해요. 유충인 그리퍼부터 시작해 완전체인 레비아단으로 성장하는데, 변태할 때마다  배씩 커지며 강해지죠. 그리퍼만 해도일반인은 상대할 수 없지만 완전체인 레비아단은…… 마법까지 쓰는 괴물이에요.”

“그럴 수가…… 몬스터가 마법을 쓴다고?”

피엔드라는 괴물 자체를 처음 보기도 했지만 한낱 몬스터가 마법을 쓴다는 소리도 생전 처음 듣는 소리였다.

유연한 몸과 날카로운 이빨만 해도 왕국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는데 마법까지 쓴다면 대체 어떻게 상대하란 말인가?

“그래도 레비아단까지 성장하기는 쉽지 않아서 평생 가도 못 보는 사람들이  많다네요. 저 안개의 숲에도 성체는 있지만 완전체는 없다고 하고요.”

“그렇군…….”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 소리였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촉수 괴물이 아니라 두 여동생의 행방, 그리고 자신이 처한 상황이었다.

아리스톨은 일단 소년을 쳐다보며 고개를 숙였다.

“나를 구해 줬는데 감사가 늦었구나. 나는 안개의  너머에 있는 오벨 왕국의 제일 기사이자 첫째 공주인 아리스톨이라 한다. 비록 지금 가진 것을 모두 잃었기에 보답은 할 수 없지만, 생명을 구해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한다. 나중에라도 왕국에 복귀하게 되면 필히 대가를 치르도록 하지.”

그녀의 말에 소년은 난처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 이름은 조니예요. 보다시피 판잣집에 살고 있고…… 구하게 된 건 순전히 운이 좋았을 뿐이니까 딱히 보답을 바라진 않네요.그런데 그보다요.”

“응? 할 말이 있나?”

궁금해하는 아리스톨을 향해 조니는 우물쭈물하다가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이곳이 어떤 곳인 줄 알고서 오신 건가요?”

“……부와 기회가 넘치는 잘사는 나라라고 들었을 뿐이다. 왜 그러지?”

“부와 기회라…… 확실히 그 말이 맞기는한데.”

조니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한숨을 내쉰 뒤, 힘겹게 말을 이었다.

“여긴 노예를 사고팔아 부를 쌓은 도시예요. 모든 여자는 노예로 취급해 조교하고, 비싸게 팔아 치워서.”

아리스톨은 그 말에 정신이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뭐, 뭐라고……?”

조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정말 내키지 않아 하는 표정으로 다시  번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니까 노예 도시라고요. 다른 사람 눈에 띄는 순간 공주님도 노예가 되실 거고요. 모든 여자는 노예로 삼는다. 그게 이 도시에 하나뿐인 절대 규칙이거든요. 공주님은 대체 이런 곳에 왜 오신 거예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