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프롤로그 - 5년 전
태초에 악신과 선신,남신과 여신으로 갈라진큰 싸움이 있었다.
패배한 것은 악신과 남신이었다. 그들은 신성을 봉인당한 채 지상으로 떨어져 자그마한 땅 끄트머리에 유배되었고, 승리한 선신과 여신 들은 자신들의 신성을 그 땅에서 회수해 어떠한 자연 법칙도 존재하지 않는 유배지로 만들었다.
그리고 억겁의 시간이 흐르고 인간들이 번성한 후, 그 유배지에 작은 도시가 하나 세워졌다.
모든 여자들을 노예로 삼는 곳, 노예 도시가.
* * *
어린 조니는 예쁜 노예들에게 목줄을 채워 끌고 다니는 노예 상인들을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나도 노예 상인 되고 싶다.”
노예 도시에는 노예 사냥꾼과 노예 상인 두직업밖에 없었고 문턱도 매우 낮았다. 노예 도시 거주민의 90% 이상이 노예 상인이었다. 그러나 어리고 힘이 없는 조니로서는 노예 하나 제대로 간수하기 어려우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때문에 조니는 방랑자들의 구역 뒷골목을 전전하며 아직 성공하지 못한 노예 상인들의 집을 청소해 주거나 간단한 심부름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 가고 있었다. 수중에 남는 돈은 하나도 없고 그날그날 먹을거리를 받는 정도였지만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별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을 하면서 단순히 입에 풀칠만 하는 건 아니었다. 언제고 성장해 힘과 기회가 생긴다면 한 사람의 어엿한 노예상인이 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집을 청소해 주고 심부름을 하면서 노예 상인들이 노예를 어떻게 다루는지, 어떤 조교법을 어떻게 가르치는지를 어깨너머로 보면서 익혔고, 최대한 여러 노예 상인들의 집을 드나들어 청소를 하면서 가급적 많은 노예들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게 노력했다.
어떻게 보면 노예를 직접 사지 않아도 노예를 구별하는 감식안을 기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고, 보통의 노예 상인들이 한 번에 한 노예만 며칠씩 조교하는 것을 볼 때 그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노예를 단기간에 살펴볼 수 있는 썩 괜찮은 방법이기도 했다.
어리고 힘이 없어 남들보다 출발선이 한참 늦었지만 덕분에 준비할 시간은 많이 가질 수 있었다.
“다 독립할 때 도움이 되겠지. 직접 조교해 보지 못해서 기술은 잘 늘지 않지만 그래도 노예 보는 눈은 좋아지는 게 느껴지니까.”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노예를 보는 눈만큼은 방랑자의 구역에 있는 D급 노예 상인들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 됐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노예의 얼굴만 봐도 대략 어떤 성격일지 짐작이 갔고 말 한마디와 태도 하나를 통해서 종합적인 성격을 유추할 수 있었다. 필히 장래에 노예를 직접 조교하게 될 때 큰 무기가 되어 줄 것이었다.
또한 새벽마다 탈주 노예들이 붙잡혀 죽고 때론 노예 상인이 노예에게 오히려 맞아 죽는 일도 벌어지는 곳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살아가다 보니 눈치가 엄청나게 빨라졌다. 빌붙어도 될 노예 상인과그래선 안 될 노예 상인을 구분하는 것은 물론이고 표정 하나만 봐도 노예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구분할 수 있었다.
모든 희망을 잃고 노예가 된 여자들은 완전히 자포자기해서 눈빛이 텅 비거나 두려움에 떨거나 절망에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그중에는 노예가 된 뒤에도 빛을 잃지 않는 당찬 여자들도 있었다. 보통 D급의 노예 상인들이 조교하기 어려워하는 노예가 그런 노예들이었다.
반항기가 심해 어디로튈지 알기 어렵고 무슨 말을 하고 어떻게 대해 줘도 코웃음만 치며무시하는 노예들.
대부분 그런 노예는 심각한 고문을 당하거나 처벌을 받아 처분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때로는 자기가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 노예 경매장에 헐값에 넘겨 버리거나 그냥 화풀이로 죽여 버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하지만 조니는 그런 노예들이야말로 제대로 조교했을 때 그 가치가 빛날 것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노예 상인보다 자기가 우월하다는 생각과 자존심 때문에 굽히지 못하는 것이지, 자기를 마땅히 굴복시킬 만한 주인을 만나면 최선을 다해 봉사하고 능력만큼의 대우를 받고 싶어 하는 속마음을 눈빛에서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 나중에 그런 노예들만 조교해야지. 데리고 있으면서 보기에도 좋고 고위 귀족들도 비싸게 사 줄 것이 분명하니까.”
그때부터 조니는 심부름을 하고 남는 시간에 노예 도시에 사는 귀족들과 각 구역의 실세인 유력가들에 대해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최소한 누가 어떤 취향을 가지고 있고 어떤 노예를 원하는지를 알아야 그에 맞춰 최단 시간 내에 노예를 조교하고 납품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들에게 발품을 팔고 눈도장을 찍어야 더 좋은 구역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아무 명성이 없는 D급 노예 상인들은 평생을 치안이 가장 안 좋은 방랑자들의 구역이나 가장 싸구려 뒷골목인 뱀족의 구역을 전전할 뿐이고 결코 황소족의 구역이나 화이트 타운 등에 입성할 수 없었다.
조니는 화이트 타운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곳에서 번듯한 집을 사고 예쁜 노예들을 여럿 부리며 편하게 살고 싶었다. 자신만 쳐다보는 예쁜 여자들과 하루 종일 노닥거리고 부대끼고 사는 것은 틀림없이 행복할 테니까.
만약 아주 크게 성공한다면 귀족이 될 수도 있고 노예 도시의 지배 가문들 중 한 곳에 들어가게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런쪽에는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귀족이 되자는 것보다는 예쁜 노예들을 거느리고 살자는 게 훨씬 뚜렷하고 눈에 보이는 목표였다.
그렇게 계속해서 노예를 고르는 감식안과 눈치를 키워 가며 살아가던 중, 어느 날 조니는 자신의 인생에 변화를 가져다줄 정보를 얻게 됐다.
“밀수요?”
“그래, 인마! 돈만 내면 아주 교육 잘된 노예들을 안개의 숲 밖에서 밀수해서 가져다준다고! 들키면 좋은 꼴은 못 보지만 지들이 어떻게 알아볼 건데? 내 브랜드 낙인을 찍기만 해서 팔면 손쉽게 화이트 타운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거야!”
청소를 해 주러 간 집에서 만취한 노예 상인이 밀수꾼들에 대한 정보를 알려 준 것이었다. 계속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고 반복해서 많은 정보를듣는 건 어려웠지만, 대충 안개의 숲 그리 깊지 않은 곳 어딘가의 동굴에 밀수꾼들의 접선지가 존재한다고 했다.
조니는 직감적으로 이 정보가 자신의 운명을 크게 바꿔 줄 것이라고 느꼈다.
“나도 그들의 일원이 될 수 있을까?”
정말로 밀수꾼이 되어 살아가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 틈에서 지내다 보면 노예 도시에서는 결코 알 수 없거나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배울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관성적으로 노예 상인 길드에서 가르쳐 준 것만으로 일생 동안 똑같은 일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노예 상인들은 발전이 없었다. 물론 길드에서 배운 조교법만으로도 평생 동안 먹고살 수 있고 얼마든지 노예들을 조교할 수 있지만, 조니는 D급 노예 상인들이 조교를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노예에게 당하는 모습을 여러 번 봐 왔다. 숙달되면 분명 S급 이상의 노예들도 조교할 수 있었지만 숙달되기 전에는 조교할 수 없는 것과도 마찬가지였으니 더 발전시킬 여지가 얼마든지 있었다.
당장 조니가 여러 노예 상인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익힌 눈칫밥과 노예를 구별하는 감식안만 해도 다른 노예 상인들은 갖지 못한 새로운 지식이었다. 출발은 그만큼 늦지만 어느 정도 이후에는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는 것이었으니,조니는 그들과 똑같은 삶의 방식을 취하고 같은 길을 걷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계속 자신만의 길을 찾으며 더많은 것들을 알고 종합해 더 나은 길을 만들고 싶었다.
예쁜 노예들을 잔뜩 거느린 행복한 노예 상인이 되기 위해서.
“좋아. 그들을 찾아보자.”
“음…… 이쪽 부근에서 봤던 것 같다고 했었는데.”
조니는 노예 도시 바깥의 노예 사냥꾼들이 거주하는 판자촌을 기웃거리며 모은 정보를 가지고 안개의 숲으로 들어온 상태였다. 바로 밀수꾼들의 접선지를 찾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정보를 모으는 게 쉽지 않았지만 안개의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여자들을 납치해 오거나 연금술의 재료가 되는 촉수 괴물을 잡아다 파는 노예 사냥꾼들 중에는 확실히 밀수꾼들의 존재를 아는 자들이 있었다. 조니는 그런 노예 사냥꾼을 따라다니며 자질구레한 일들을 심부름해 주면서 조금씩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안개의 숲에는 피엔드라 불리는 촉수 괴물이 살았는데 무척 흉포하고 강하기 때문에 매우 조심해야 했다. 조니 같은 어린애는 만나는 순간 잡아먹히거나 갈가리 찢길 테니 밀수꾼들의 접선지를 찾는 일은 대단히 어려웠다.
그렇게 헤매길 몇 시간이나 되었을까. 조니는 마침내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있는 작은 동굴 입구를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돌무더기가 많아서 얼핏 보면 그냥 바위틈 같아 보였지만, 가까이 가서 고개를 넣어 보면 동굴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여긴가 보다. 모르고 지나가다 보면 그냥 지나치기도 쉽고 다른 동굴도 없는것 같으니.”
조니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운명을 바꿔 줄 밀수꾼들을 만날 수 있었고,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6년의 세월이 지났다.
밀수꾼들의 접선지에서 어엿하게 자리를 잡은 조니는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실버바이올렛의 머리카락이 예쁜 원숙한 여자를 바라봤다.
“어때, 자기. 계획은 다 짰어?”
“계획이 아니라 각본이라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 협력자의 정보가 맞는다면틀림없이 성공할 테니까요.”
“우리야 실패해도 손해는 없지만 자기는 타격이 클 거야. 1, 2년짜리 각본이 아니니까. 그리고 그 기간엔 우리도 도와주지 않을 거고.”
“괜찮아요. 그냥 저 비명횡사하지 않게 지켜봐 주기만 하시면 돼요. 대신 분배는 확실해야 하는 거, 잊지 마시고요.”
6년 동안 밀수꾼들의 모든 노하우를 익힌 조니는 특유의 눈치와 생존 감각으로 특별한 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무대는 그 기술에 대한 최종 확인이자 조니가 진정한 기술자로서 인정받기 위한 시험이었다. 또한 다른 노예 상인들과는전혀 다른 조니만의 조교법을 만들어 내기 위한 과정이기도 했다.
성공한다면 앞으로 밀수꾼들 사이에서 큰 위치를 얻을 것이고 부 역시 얻을 것이나, 실패한다면 아무런 보상 없이 5년이란 긴 세월을 허비하게 되는 셈이었다. 조니의 영특함과 영악함을 잘 아는 실버바이올렛 헤어의 여자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니는 미소만 지었다.
“이번 각본과 새로운 관점의 조교법은 분명히 성공할 거예요. 그리고 앞으로도 모두.”
“나도 자기 말대로 되면 좋겠어. 우리한테도 큰 기회가 될 테니까.”
“걱정 마요. 내 예쁜 공주님들에 대한 정보는 모조리 머릿속에 집어넣었으니까. 지금은 만난 적도 없는데 평생을 알고 지낸 것 같은 기분이에요, 하하.”
그날 조니는 노예 도시로 돌아가 노예 상인 길드 역사상 최초로 기본 테스트에서 모조리 떨어진 뒤 쫓겨났다.
하지만 얼굴은 해맑게 웃고 있었다.
“지금까지 몇 년을 굴렀는데 5년을 못 참겠어? 5년만 지나면 돼. 그러면 가장 예쁜 노예들은 모두 내 것이 될 테니까.”
그리고 5년이 지나고…… 드디어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