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엘프
선우영 일행은 어느덧 온리의 근처까지 왔다.
선우영은 뒤를 돌아보았다.
이곳에 오는 동안 사이타나의 추격은 없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빨리 전장을 떠났던 건 아주 좋은 판단인 모양이군.’
엘프들을 동료로 맞이하고.
용광검에 정령이 깃들게 하면, 온리에서 할 일은 전부 끝이다.
‘그러면 하루 정도 쉬어야겠다.’
그다음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사이타나의 추적을 피할 수 있다.
한곳에 오래 머무를 여유는 없었다.
그리하여 도착한 온리.
그곳 성벽에 무장한 엘프들이 보였다.
선우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온리를 지배하고 있을 몬스터를 먼저 맞닥뜨릴 줄 알았는데.’
어떻게 성벽에 무장한 엘프가 있을까?
이상하지 않은가.
어떻게 된 걸까?
선우영은 페일에게 이 상황에 대해서 물었다.
“엘프들이 무장하고 있습니다.”
“네, 아무래도 아스모데우스가 없는 틈을 타서 엘프들이 반란을 일으킨 모양입니다.”
“반란이요?”
“아스모데우스가 대다수 병력을 이끌고 전투에 나서느라 성을 지킬 병사들을 소수만 배치한 모양입니다.”
“흠, 그래서 반란이 일어날 수 있었다?”
“노예를 통제하는 병사가 소수이면 자연히 틈이 생길 거고, 엘프들이 그걸 잘 활용했다고 봐야겠죠.”
선우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너희는 누구냐!!”
성벽에 있던 엘프들이 화살을 겨누며 신분을 물었다.
그 눈빛이 사나웠다.
반란이 막 성공한 직후라서 그런지 다들 날이 섰다.
선우영은 앞으로 나왔다.
“사이타나와 싸우기 위해 지구에서 온 선우영이라 합니다. 엘프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자….”
그리 말하던 순간.
피휴웅.
화살 한 발이 선우영을 향해 날아왔다.
오러로 위력이 상승된 상태.
바람 가르는 소리가 제법 날카로웠다.
타압!!
선우영은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맨손으로 잡았다.
“…….”
선우영은 아무 말 없이 화살을 바라보았다.
툭.
그는 화살을 부러뜨렸다.
살기를 뿜어내면서!
“이게 무슨 짓이지? 제대로 해명하지 않으면 많이 섭섭할 것 같은데.”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연기처럼 스멀스멀 퍼져나갔다.
엘프들은 움찔했다.
저런 기운을 풍기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선우영은 오러를 뿜어냈다.
어서 빨리 대답하라는 의미였다.
그가 이리도 화난 이유는 하나였다.
사이타나와 싸운다고 하자 공격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엘프들은 반란을 일으킨 게 아니라, 사이타나에게 굴복한 게 아닐까?
합당한 의심이었다.
엘프들은 겁에 질렸지만 발악하듯 악다구니를 썼다.
“우린 네놈 거짓말에 속지 않는다-!!”
“??”
선우영은 의아함을 느꼈다.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고?
선우영은 살기를 누그러뜨렸다. 대신 부릅뜬 눈으로 엘프들을 바라봤다.
해칠 마음은 없으나, 경계는 놓지 않겠단 행동이었다.
선우영이 엘프들에게 소리쳤다.
“너희 수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러자 한 엘프가 소리쳤다.
“내가 이곳의 수장 케이론이다. 할 말이나 빨리해라!!”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는 케이론.
그는 중년으로 보였으며, 흰색 머리에 푸석푸석한 피부가 눈에 띄었다.
상당히 고생한 티가 났다.
선우영은 케이론에게 소리쳤다.
“난 사이타나와 싸우기 위해 지구에서 왔다. 그런 나를 왜 적대하는가!!”
“아스모데우스와 동맹을 맺은 녀석을 어떻게 믿겠나?”
“사이타나를 무찌르겠단 소린 진짜다. 아스모데우스는 사이타나를 무찌르는데 협력하겠다며 동맹을 제안해왔을 뿐이다.”
“그래서 동맹을 맺었지 않은가!! 우리를 노예로 부리는 아스모데우스와 한편이었지 않은가!!”
“그건 사이타나를 무찌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아스모데우스는 우리를 배신하여 기습하다 사망했다.”
케이론은 재차 되물었다.
“뭐라고?!”
“아스모데우스가 우릴 배신하여 죽였다. 녀석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케이론은 잠시 침묵했다.
선우영은 아스모데우스에 대한 엘프들의 증오가 얼마나 커다란지 이 순간 느꼈다.
그 분노가 너무 거대하다.
자신이 아스모 데우스와 동맹을 맺었단 이유 하나만으로 무작정 공격하지 않았는가.
다행히 그녀가 죽었단 이야기에 오해가 풀리는 듯했다.
선우영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런데 몇몇 엘프들이 분노를 터뜨렸다.
“아스모데우스와 동맹을 맺고 노예였던 우리를 해방해 주지 않았잖아. 우리가 아스모데우스의 노예라고 인정했단 뜻이 아니냐!!”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하지만 선우영은 인내하고 저 질문 또한 답변해줬다.
“아스모데우스가 말했다. 사이타나를 무찌르고 일인자가 되면 마계로 돌아가겠다고.”
“그 말을 믿었단 거냐.”
“그래, 녀석이 마계로 돌아가면 너희도 당연히 노예에서 풀릴 줄 알았다.”
선우영에게 억지를 쓰던 녀석들은 말문이 막혔다.
트집 잡을 게 없었다.
선우영을 향하던 엘프들의 분노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선우영은 엘프들에게 소리쳤다.
“오랜 행군으로 우리 병사들이 지쳐있다. 온리에서 쉴 수 있게 해다오.”
케이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들어와라. 단, 우리도 물자가 부족하니 식량과 무기는 줄 수 없다.”
“그건 걱정하지 마라.”
선우영이 외쳤다.
케이론이 그를 성안으로 들이려 하자 몇몇 엘프들이 반대했다.
“잠시만요. 만약 선우영이 거짓말을 하는 거면 어쩝니까? 아스모데우스를 죽였단 말이 거짓이고, 만약 사이타나의 편에 붙었다면…….”
그러자 케이론이 콧방귀를 꼈다.
“만약 그랬다면 저 병력이 벌써 우리를 공격했겠지. 게다가 저기를 보시게.”
케이론은 선우영의 옆자리에 있는 인물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엘프들은 그를 빤히 쳐다봤다.
어디선가 본 듯한 생김새.
어렴풋이 어떠한 인물이 떠올랐다.
“페일?!”
“페일이 저기 있다니.”
그들은 페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분명히 늙긴 했지만 페일이 맞았다.
케이론은 엘프들에게 이야기했다.
“페일이 어떤 사람인 줄 알고 있지 않나. 그가 저기 있단 사실 하나만으로도 선우영의 발언은 믿을 수 있네.”
끼이익.
굳게 닫힌 성문이 열렸다.
성안으로 들어간 선우영의 병력들은 휴식을 취했다.
밥을 먹고 더러는 잠을 청했다.
선우영은 케이론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엘프를 아군 병력으로 편입시키고, 용광검에 정령이 깃들게 하려면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때였다.
한 엘프가 선우영에게 다가왔다.
“케이론 님께서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하십니다.”
“마침 잘됐군요. 저도 대화를 나누고 싶은 참이었는데.”
“제가 대전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선우영은 그 엘프를 따라 케이론이 있는 대전에 들어갔다.
그곳엔 케이론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다른 엘프들도 있었다.
대전으로 각양각색의 시선이 느껴졌다.
호기심을 보이는 표정.
경계하는 듯한 눈빛도 있었고.
호감을 느끼는 시선도 있었다.
선우영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다양한 시선이 느껴져 왠지 모르게 바짝 긴장되었다.
케이론은 대전에 놓인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곳에서 선우영을 바라봤다.
케이론을 주위로 모든 엘프들이 모여 있었다.
공기가 오싹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대화가 그대로 끝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케이론은 소탈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소.”
케이론은 성벽에서 나눴던 어투와 다르게 예의를 지켰다.
더 이상 적으로 보지 않겠단 의미였다.
“그리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우영은 그리 말하며 예법에 맞게 허리를 숙였다.
케이론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나저나 아스모데우스, 그 영악한 녀석이 배신했다고 하셨는데….”
“동맹을 맺고 뭔가 묘한 낌새를 보여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를 배신하더군요.”
“어떤 식으로 배신했소?”
“한밤중에 잠자고 있을 때 습격해 절 죽이려 했습니다. 다행히 녀석을 경계하고 있어서 살 수 있었지요.”
케이론은 콧바람을 강하게 불며 이를 악물었다.
“그 빌어먹을 녀석답군.”
“그렇게 배신당하자마자 사이타나와 싸웠습니다.”
“고생이 많았군, 그래.”
케이론은 아스모데우스에게 배신당했단 선우영의 말에 동질감을 느꼈다.
같은 악당에게 당했단 느낌이랄까?
그 미세한 동질감은 다른 엘프들도 느끼기 시작했다.
듣고 있던 다른 엘프 하나가 강하게 소리쳤다.
“그 나쁜 녀석은 수십 번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아! 안 그렇소!!”
그 말에 동조하는 엘프들이 외쳤다.
“맞습니다. 아스모데우스가 죽었단 소리에 속이 얼마나 뻥 뚫리던지!!”
“아스모데우스를 죽이고 사이타나와 싸우는 선우영은 영웅이오!”
그들은 선우영에게 호감 가진 엘프들이었다.
선우영이 영웅이란 소리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전혀 없다.
어떠한 엘프들이 대뜸 뜬금없이 선우영에게 소리쳤다.
“그런데 사이타나를 이길 수 있소?”
아무래도 그들은 사이타나를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에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번 전쟁에서 지면 또 노예가 될지 모르니까.
선우영은 낭랑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사이타나와의 전투 이후 여기까지 오는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희망이 있기에 힘을 낼 수 있었다.”
“희망?”
케이론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선우영은 엘프들을 향해 손을 번쩍 벌리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이번 기회에 그들을 설득해 많은 엘프들을 자기 병력으로 지원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연설에 들어갔다.
“우리 지구도 사이타나의 침공으로 수많은 사람이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
“우리는 같은 피해자입니다. 피해자들끼리 힘을 합쳐야 원흉 사이타나를 무찌를 수 있습니다.”
“…….”
“지금 우리에겐 시간이 없습니다. 함께 싸워 사이타나를 무찌릅시다.”
엘프들의 분위기가 변했다.
그의 연설에 조금씩 이끌리는 분위기였다.
선우영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나에게는 희망의 씨앗이 있습니다.”
“희망의 씨앗?”
케이론이 그게 뭐냐고 되물었다.
선우영은 즉답했다.
“나에게 용광검이 있습니다. 실로 대단한 명검이지요. 이 검에 정령이 깃들 수 있습니다.”
케이론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어지간한 명검이 아니고선 불가능할 텐데….”
검에 정령을 깃들게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든 작업인 줄 아는가.
일단 정령이 깃들어도 부서지지 않을 명검부터 만드는 게 중요했다.
정령이 깃드느냐 아니냐는 그다음 일이다.
선우영은 부릅뜬 눈으로 외쳤다.
“용광검에 정령이 깃들 수 있다고 말한 존재는, 듀란달에 깃든 정령입니다.”
“!!”
케이론은 순간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얼굴에서 웃음기도 사라졌다.
저게 사실이라면 이 전쟁에서 이길 희망이 있었다.
어떤 정령이 깃드느냐.
또한 어떠한 능력이 생기느냐.
그것에 따라 전쟁에서 쉽게 이길 수 있을 테니까.
케이론은 시선을 아래로 옮겼다.
생각했다.
곧이어 결심이 선 얼굴을 한 케이론.
그가 엘프들에게 소리쳤다.
“나는 선우영과 동맹을 맺고 모든 걸 돕고자 한다. 이 지긋지긋한 전쟁에서 승리해 사이타나를 없애고 진정한 자유를 손에 넣고 싶다. 반대하는 자가 있는가!!”
엘프들은 조용했다.
아무도 반대하는 자가 없었다.
선우영의 말에 모두가 공감하였다.
희망이 있다면 걸어보고 싶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평화로웠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뭐든 하겠다.
계단에 앉아있던 케이론이 일어났다.
그는 허리를 숙이며 예법을 지켰다.
“우리 엘프들은 그대와 함께 사이타나를 무찌를 것을 약속합니다.”
선우영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는 산뜻한 미소로 케이론에게 악수를 건냈다.
둘은 손을 잡고 흔들었다.
이로써 엘프도 선우영의 동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