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대결
굴란은 수우를 노려봤다.
“잠깐, 수우? 지금 넌 몰제한테 협박당해서 강제로 증언하고 있는 거야. 맞지? 그렇지? 몰제를 습격했단 말이 사실이라면 넌 추방이야.”
놈은 대답을 유도했다.
수우를 다시금 협박해 생각을 바꾸게 할 속셈이었던 모양인데, 놈의 얄팍한 수법은 안 통했다.
수우는 재차 목소리를 높였다.
“굴란의 사주로 몰제를 습격해 죽이려고 했습니다. 굴란은 족장을 뽑는 대결에서 이기기 위해 다른 후보들을 습격했습니다.”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밝히는 수우.
굴란은 이를 부득 갈았다.
‘수우 녀석, 어린 놈이라 속여먹기 좋아서 데리고 있었더니…’
도대체 무슨 소리를 들었기에 맘이 돌아섰을까.
‘제길, 팔랑귀 녀석이니 금방 넘어갔겠지.’
굴란은 콧바람을 세게 불었다.
놈은 수우의 발언을 부정했다.
“난 모르는 일이군.”
“뻔뻔한 녀석. 이젠 대놓고 거짓말이냐!!”
몰제가 성냈다.
굴란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 갑자기 이런 식의 모함하는 저의가 궁금한데. 혹시 족장을 선발하는 대결 때문에 그런가?”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구나. 네놈이야말로 족장이 되겠다고 날 습격해놓고. 명예를 잃는 게 두렵지도 않은가.”
“하, 내 명예는 내가 챙긴다.”
굴란은 헛바람을 내쉬며 비아냥거렸다.
몰제는 눈이 시뻘게졌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 망할 놈의 혀를 뽑아버리고 싶었다.
굴란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자기 파벌들에게 소리쳤다.
“너희는 몰제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냐?”
“아닙니다.”
“말도 안 됩니다.”
“순진한 수우를 꼬드겨 누명을 씌우고 있습니다.”
굴란은 피식 웃었다.
놈은 보란 듯이 팔을 활짝 벌리며 소리쳤다.
“여론이 그렇다는군.”
굴란은 뒤돌아 오크들에게 소리쳤다.
“보라 오크들이여, 우리는 반드시 사이타나의 밑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만 이 지긋지긋한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다.”
굴란이 여론을 모으려는 순간.
깡!!
갑자기 소음이 들렸다.
굉장히 묵직한 소음이라 굴란의 연설이 도중에 끊어졌다.
깡~!!
다시 들리는 소리.
굴란은 미간을 찌푸리며 방해한 인물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선우영이 있었다.
선우영은 칼집으로 바위를 툭툭 치고 있었다.
“아, 뭔 벌레가 이렇게 많아?”
굴란의 연설을 방해하고도 시치미 뚝 떼는 선우영.
그는 굴란의 시선을 느끼고, 바위를 때리던 동작을 멈췄다.
“아, 미안. 벌레가 워낙 많아서.”
“…….”
굴란은 한번 넘어가 주겠단 듯이 다시 오크들을 향해 소리쳤다.
“우리 오크가 생존할 유일한….”
깡, 깡!!
칼집이 바위를 때리는 소리가 또 들렸다.
굴란은 연설이 또 끊어졌다.
그는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왜 자꾸 방해하는 거지?”
깡깡.
계속 칼집으로 바위를 때리던 선우영.
그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아휴, 어디서 이렇게 벌레가 울어대는 거야. 시끄럽게.”
그러더니 굴란을 보고 눈을 살짝 크게 뜨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치 이제 깨달았단 듯이.
“벌레 소리가 어디서 들리나 했더니, 너였구나?”
“이 자식이?!”
굴란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며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한바탕 싸울 기세였다.
선우영은 귀를 후벼파며 말을 이었다.
“사이타나의 밑으로 들어가? 무슨 개소리를 그렇게 장황하게 해?”
“네놈이 무슨 상관이냐. 오크의 일이다!!”
“아니, 너무 바보 같잖아. 내가 또 헛소리하는 녀석들을 보면 막 닭살이 돋아나는 성격이라 그냥은 못 보겠거든.”
선우영의 비아냥.
굴란은 이빨을 드러냈다.
동시에 놈의 파벌에 속한 오크들이 무기를 뽑으며 일촉즉발의 상황이 펼쳐졌다.
선우영은 오러를 뿜어냈다.
그것도 살기를 담아서.
어마어마한 강풍이 불며 땅굴의 내부가 살짝이나마 흔들렸다.
무시무시한 위압감.
물을 담아뒀던 항아리가 깨지고.
오크들은 전신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움직일 수 없었다.
굴란은 깨달았다.
‘강하다.’
자신과 격이 다른 강자.
함부로 덤벼들었다간 오히려 자기 모가지가 잘릴 판국이다.
굴란이 자기 파벌에게 소리쳤다.
“무기를 땅바닥에 놓아라.”
굴란의 부하들은 무기를 떨어뜨리듯 손에서 놓았다.
그제야 선우영은 뿜어내던 오러를 거둬들였다.
“이럴 땐 잔머리가 잘 돌아가네. 계속 덤비려 했으면 머리를 부숴버릴 작정이었는데.”
굴란은 선우영은 바라봤다.
“넌 누구냐? 레오의 부하는 아닌 듯한데.”
“내 이름은 선우영. 사이타나와 싸우기 위해 다른 세상에서 넘어온 사람이다.”
“뭐? 다른 세상? 네놈이 거기서 넘어왔다는 걸 어떻게 믿지?”
그러자 페일이 나섰다.
그는 앞으로 나와 오크들에게 얼굴을 보였다.
“내가 데려왔네.”
“뭐?”
오크들은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나이 좀 있는 오크들이 페일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너는 설마 페일?!”
“페일 경께서 아군을 데리고 돌아오셨다고?!”
테오는 헛기침했다.
“크흠. 헤스본은 탈환되었고 백성들은 페일 폐하를 왕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 말에 분위기가 출렁였다.
헤스본이 탈환되었단 소리는 군단장이 죽었단 소리가 아닌가.
선우영은 낭랑하게 소리쳤다.
“벨제부브, 벨페고르, 마몬. 군단장 3명을 내가 쓰러뜨렸다.”
엄청난 발언.
오크들은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군단장 3명을 쓰러뜨렸다고?”
“저게 정말이야?”
“그 말이 사실이라면 사이타나를 무찌를 수 있겠는데.”
오크들의 여론이 확 기울었다.
선우영은 이 기세를 몰아 연설에 들어갔다.
“사이타나의 밑으로 들어가겠다고 칩시다. 놈이 반겨준단 보장이 있습니까? 막말로 오크가 무기도 없고 식량도 부족한 상황인데.”
오크들이 조용해졌다.
맞는 말이다.
“지배욕이 그득그득한 사이타나가 오크들을 대우해 줄 거라고? 그걸 어떻게 믿어요? 자기 욕심 때문에 여러분 영토를 빼앗은 놈인데. 여러분을 침략의 첨병으로 이용할 생각뿐이면 어쩌실 겁니까?”
오크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사이타나한테 갔다가 붙잡혀 이용당하면 반항할 기회도 없을 거다.
그러면 지금보다 더 최악의 상황이 될 게 뻔했다.
선우영이 소리쳤다.
“저와 함께 싸워 사이타나를 무찌르고 영토를 되찾읍시다. 저한테는 오크들을 모두 먹여 살릴 식량과 무기가 있습니다!! 함께 명예를 세웁시다.”
오크들은 환호했다.
손뼉 치며 소리 지르는 자들이 많았다.
오크들도 사이타나의 밑으로 들어가고 싶었겠나. 자기들 영토를 빼앗고, 가족들을 죽인 원수인데.
사이타나와 싸우며 많은 오크가 죽었다.
부모, 형제, 친구.
수많은 오크를 죽인 원수의 밑으로 들어간다는 게 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굶주림은 고통스러웠다.
그랬기에, 굴욕을 감내하며 사이타나의 밑으로 들어가려 했다.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
선우영의 등장.
그가 군단장 3명을 쓰러뜨리고, 식량까지 넉넉히 챙겼다.
사이타나의 밑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다.
굶주림이 해결됐으니까.
지금부턴 당당하게 사이타나와 싸우면 됐다.
오크들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
굴란이 버럭 화냈다.
“오크의 미래는 오크가 정한다. 인간이 끼어들지 마라.”
“오? 그러셔? 근데 이걸 어쩌나. 알다시피 내가 헛소리를 들으면 닭살이 돋는 체질이라 가만히 있지를 못하거든.”
“오크의 결정은 족장이 내린다.”
“하, 그런 식으로 나온다?”
선우영은 굴란을 째려보며 살기를 보였다.
굴란은 움찔했다.
강자가 보내는 살기.
살갗이 아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함에도 굴하지 않았다.
“오크의 미래는 오크가 정하는 법. 인간이 정하지 않는다. 게다가 난 군단장 3명이 쓰러졌단 말을 믿지 못한다.”
놈은 끝까지 추잡스럽게 굴었다.
선우영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좋아.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몰제와 싸워서 족장을 가리겠단 뜻이로군.”
“그렇다.”
선우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한번 해봐.”
그 말에 굴란은 피식 웃었다.
선우영은 이기지 못해도 몰제는 이야기가 다르다.
실력이 호각이었으니까.
‘몰제가 갑자기 기연을 얻어 한 단계 경지가 올라간 게 아니라면, 놈을 이기는 건 어렵지 않지.’
설마 자신이 질까.
굴란은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거라 여겼다.
“무기를 가져와라.”
굴란이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부하들은 굴란의 무기를 가지러 갔다.
그러며 몰래 날붙이에 독액을 발랐다. 딱 한 번이라도 베이면 그 자리에서 마비가 올 수 있게.
굴란은 부하들이 가져온 무기를 손에 쥐었다.
오크들의 대결.
심지어 족장을 뽑는 대결에선 독과 아티팩트를 사용하면 안 된다.
굴란은 그 규칙을 어겼다.
‘어기면 어떠냐. 말로 그럴듯하게 속여 넘기면 그만이지.’
굴란은 그리 생각했다.
몰제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고 앞으로 걸어갔다.
굴란은 히죽였다.
“이봐, 몰제. 주무기인 도끼와 방패는 필요 없나? 그거 없으면 본 실력을 내기 힘들 텐데.”
“네놈 상대로 도끼는 필요 없다. 검 한 자루면 된다.”
“자만하군.”
“그건 해봐야 알겠지.”
몰제와 굴란이 마주 서서 서로를 노려봤다.
주변에 있던 오크들이 물러났다.
“그럼, 시작하지.”
몰제가 말하자마자 굴란이 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궤적이었다.
“하찮군.”
몰제는 콧방귀를 뀌며 그의 검을 쳐냈다.
어렵지 않았다.
백영희에게 배운 보법을 활용해 공격의 힘이 흩어지도록 유도했으니까.
“뭐야?!”
굴란은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검술은 자신이 몰제보다 훨씬 우위에 있을 텐데.
첫 공격을 가볍게 쳐내다니.
그리 생각한 순간.
몰제의 칼날이 어마어마한 빛무리를 쏟아냈다.
그건 검강이었다.
굴란은 일순간 숨 막히는 공포심을 느꼈다.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와 머리를 강타했다.
소름이 돋았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고.
눈앞이 새카맣게 변하는 기분.
부우웅.
몰제의 검강이 굴란의 검을 베어냈다.
압도적인 실력이었다.
굴란은 놀라 발을 헛디뎌 엉덩방아를 찍었다.
몰제는 검을 높이 들었다.
내려치기 자세.
굴란은 그 모습에 압도되어 몸이 굳어버렸다.
‘못 이긴다.’
그렇게 판단한 굴란은 곧바로 소리쳤다.
“항복, 항복한다!!”
아래로 내려쳐지던 몰제의 검이 도중에 멈췄다. 정확히 굴란의 이마에 닿기 직전에.
굴란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내가 이겼군.”
몰제는 검을 거뒀다.
그리고 동족들을 향해 소리쳤다.
“나에게 도전할 자 있는가!!”
아무도 없었다.
검강을 본 그 순간 오크들은 싸울 생각을 접었다.
몰제는 검을 땅에 내리꽂았다.
“그럼, 내가 이제부터 오크를 이끄는 족장이다. 이의가 있는 자는 지금 이야기하라.”
조용했다.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오크들은 몰제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오크 족장님을 뵙니다.”
“족장님을 뵙니다.”
오크들은 그를 족장으로 추대했다.
모두가 충성했다.
족장이 된 몰제는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우린 사이타나와 싸운다.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 오크의 명예를 증명할 것이다.”
“우와아아아.”
“몰제 족장님 만세!!!”
오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찬동했다.
몰제는 굴란을 쳐다봤다.
“넌 추방이다. 꺼져라. 두 번 다시는 오크들의 눈앞에 나타나지 마라.”
“큭, 반드시 후회할 날이 올 거다.”
굴란은 이를 부득 갈며 땅굴을 나섰다. 그의 부하들과 함께 말이다.
수우는 몰제를 바라봤다.
“아저씨, 족장이 되신 거 축하드려요.”
그리 말하며 인사하는 수우.
그러며 뒤돌아 땅굴을 나가려 했다.
오크들의 규칙.
명예를 잃은 오크는 추방이다.
그러니 자신은 이곳에 있을 수 없다.
하지만,
‘후회 없는 선택이다.’
자신의 선택이 오크의 미래를 바른길로 바꿨으니 말이다.
수우가 나가려는 순간.
몰제가 소리쳤다.
“기다려라.”
“네?”
“분명 명예를 잃은 오크는 추방이 맞다. 하지만 추방당한 오크가 명예를 되찾으면 다시 무리에 합류할 수 있단 규칙도 있지.”
“…….”
수우는 눈을 크게 떴다.
몰제는 슬그머니 웃었다.
“한때 잘못된 길을 택했지만, 다시 올바른 길로 돌아왔으니 넌 무리에 합류할 자격이 있다.”
“족장님!!”
“어서 빨리 와라. 이 말썽꾸러기야.”
몰제는 수우를 다시 받아줬다.
수우는 엎드려 절했다.
“감사합니다. 족장님. 오크의 명예를 위해 최선을 다해 싸우겠습니다.”
“됐다. 일어서라.”
몰제는 수우의 어깨를 토닥이며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선우영에게 다가갔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오크는 사이타나의 밑으로 들어가 굴욕을 겪었을 겁니다. 오늘날 이렇게 오크가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전부 선우영 대장님 덕분입니다.”
선우영은 피식 웃었다.
“뭐, 감사 인사는 됐고. 고마우시면 나중에 술이나 하죠.”
“그거 좋군요.”
몰제는 껄껄 웃었다.
* * *
도망친 굴란.
녀석은 씩씩거렸다.
‘이대로 쫓겨날 순 없어.’
혹여나 대결에서 패배했을 때를 대비해 마련해둔 대책이 있었다.
몬스터 군대.
그걸 이용해 선우영을 공격할 참이었다.
놈은 이미 몇 달 전에 군단장 아스모데우스와 접촉했었다.
그리고 거래했다.
동족을 팔아넘길 테니, 땅과 돈을 달라고.
아스모데우스는 수락했다.
굴란이 오크들에게 사이타나의 밑에 들어가자고 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자기 보신을 위해서!!
굴란은 평소 아스모데우스와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갔다.
마침 오늘이 그녀와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깊은 숲속에 자리한 호수.
그곳에 서큐버스들의 여왕 아스모데우스가 있었다.
굴란은 얼른 그녀의 앞에 절했다.
“아스모데우스 님!!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선우영이라는 자가 나타나 우리를 방해합니다.”
“선우영? 무슨 소리지?”
“페일이 다른 차원에서 데려온 전사인데, 군단장 3명을 없앴다고 합니다.”
“흐음, 그래? 그 녀석과 싸웠겠군?”
“당연하죠. 싸워서 패배했으니 아스모데우스 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게 아닙니까. 녀석이 헤스본까지 점령했다고 합니다.”
“그래, 놈을 한번 만나봐야겠군. 좋은 선물을 가지고 말이야.”
“네?”
굴란은 눈을 끔뻑거렸다.
저게 무슨 소리인가 싶은 순간.
스걱-!!
굴란의 모가지가 잘렸다.
아스모데우스는 땅바닥을 굴러다니는 놈의 머리를 들었다.
“후훗, 이 정도면 좋은 선물이 되겠지? 동맹 제안하러 가는 선물로서 말이야.”
사이타나를 쓰러뜨리고 일인자가 되고 싶었던 아스모데우스.
“선우영이라… 아주 재미있는 조커 카드가 등장했어.”
그녀는 사이타나를 배신하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