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오크 족장3
수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오래간만에 풍족한 먹을거리를 보자 이성을 잃었다.
하지만,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어떤 게 올바른 판단인지 생각해야 한다.
오크는 굶주리고 있다.
음식이 필요하다.
사이타나의 밑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침략의 첨병으로 이용당할 거야.’
그건 확실하다.
그걸 각오하고 사이타나의 밑으로 들어가는 거니까.
반면.
선우영과 협력하면?
‘사이타나와 싸우게 되겠지.’
물론 둘 다 밥은 실컷 먹을 수 있게 될 거다.
둘 중 누굴 선택해야 할까.
수우는 고심했다.
‘뭐가 더 이득이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떨어지는 손익계산을 해봤다.
사이타나의 경우.
놈이 다른 차원 지배에 성공하면, 오크는 아무 보상도 없이 그저 이용만 당한다.
떨어지는 이득이 없다.
그저 굶지 않는단 정도?
반대로 사이타나가 선우영한테 처지 당하면….
‘오크는 다른 종족들한테 배신자 취급당하며 숙청당하거나, 불모지로 쫓겨나겠지.’
굉장히 비참하다.
성공해도 떨어지는 이득이 적고, 실패하면 죽음뿐이다.
선우영을 선택할 경우.
성공하면 사이타나를 무찌르고 땅을 되찾게 되며, 식량을 지원받아 배불리 먹을 수 있다.
굶주림도 피하고 영토도 되찾는다.
사이타나를 처치할 수 있을지 불확실하지만 이득이 확실했다.
실패하면 딱히 지금과 다를 게 없다.
땅굴 파고 숨어서 굶주리겠지.
실패해도 지금과 다를 게 없고, 성공하면 굉장히 막대한 이득이 기다린다.
‘손익만 따지면 선우영을 따르는 게 맞아.’
더군다나, 군단장 3명을 쓰러뜨렸다고 하지 않나. 저게 사실이라면 승산은 선우영에게 있다.
‘하지만 그걸 확인할 방도가 없어.’
수우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선우영이라고 했나?”
“왜?”
“군단장 3명을 쓰러뜨렸다는 걸 어떻게 믿지? 증거가 없는데?”
그때 페일이 나섰다.
“내가 증인으로 나서도 되겠나?”
“넌 누군데?”
수우는 페일을 쳐다봤다.
페일은 자신 있게 소리쳤다.
“나는 페일이다.”
“뭐? 한때 대륙 최강자라 불렸던 그 전사?”
“그렇다.”
“그걸 어떻게 증명하지?”
“듀란달을….”
“이봐, 난 듀란달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 사이타나에게 패배해 모든 종족이 노예가 된 시대에 태어났다고.”
“뭐?”
페일은 미간을 살짝 주름을 잡았다.
몰제는 그가 얼마나 대단한 실력자인지 알았기에 무례를 대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페일 폐하. 요즘 세대에도 전하와 듀란달에 대한 이야기는 전승되었습니다만, 아무래도 그림이나 기록이 전쟁통에 전부 분실되는 바람에…….”
“그렇습니까?”
“거듭 송구합니다. 이런 시대인지라 초상화도 없고 풍경은 남기는 아티팩트도 없는지라, 요즘 세대들은 듀란달과 폐하의 젊은 시절 모습을 모릅니다.”
“허허, 그럼 이 아이를 설득할 다른 뭔가가 필요하단 건데.”
페일은 그리 말하며 수우를 바라봤다.
수우는 코를 훌쩍였다.
처음 봤던 반항적인 모습은 확실히 사라졌다.
적의는 안 보인다.
이제는 믿음만 주면 될 것 같았다.
선우영은 땅을 짚고 일어났다.
“수우, 이 꼬맹아. 증거를 보여주면 된다 이 말이지?”
“그래.”
선우영은 용광검을 높이 들었다.
검강을 사용하고.
맹화로 위력을 극대화했다.
칼날에 담긴 열기.
태양처럼 빛나는 검의 모습은 위엄을 자아냈다.
수우는 그 모습에 넋을 놓았다.
용광검의 칼날에 감히 시선을 떼지 못했다.
공기가 요동친다.
위압감이 주변을 맴돌았다.
질척한 식은땀이 수우의 이마에서 흘러내렸다.
피부가 따갑게 느껴졌다.
선우영은 허공을 향해 검을 세차게 휘둘렀다.
퍼어엉.
공기압 터지는 소리와 함께 충격파가 앞으로 뻗어나갔다.
주변에 있던 나무가 모조리 부서지고, 땅은 갈라졌으며, 돌풍이 모든 걸 집어삼켰다.
수우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고. 살결이 진동했다.
“큭!!”
수우는 신음을 흘렸다.
도무지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다.
고작 충격파의 미세한 영향을 받았을 뿐인데 얼굴을 강하게 얻어맞은 기분이다.
얼굴을 제대로 드는 것조차 못하겠다.
이게 말이 되는가.
검강을 썼던 몰제도 이 정도 파괴력은 내지 못했거늘.
‘괴, 괴물이다!!’
곧이어 충격파가 사라졌다.
선우영은 맹화와 검강을 풀고 갈무리했다.
그는 수우를 쳐다봤다.
“어때? 전력을 다한 건 아니지만, 가볍게 한번 휘두른 게 이 정도 위력이야.”
“…….”
“이 정도 실력이면 군단장 3명을 쓰러뜨린 거, 확실하지?”
“넵. 그렇습니다. 어르신.”
수우는 공손해졌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위력.
이것보다 더 강한 공격을 할 수 있단 발언에 의심을 거둬들였다.
그를 믿기로 했다.
선우영은 수우를 바라보며 한마디 툭 던졌다.
“왜 갑자기 어르신이라 부르냐?”
“따르기로 했으니까 어르신으로 불러야죠.”
“…대장님이라고 불러라. 어르신 소리 듣기엔 젊다.”
“넵. 대장님.”
수우는 코를 훌쩍이며 존경심이 서린 눈을 반짝였다.
선우영은 슬쩍 웃었다.
자신이 얼마나 강한가. 그것이야말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증거였다.
고작 한번.
위에서 아래로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수우의 의심을 단번에 없애버렸다.
그만큼 선우영은 대단했다.
“그럼, 치료하자꾸나.”
선우영은 마차에서 포션을 꺼내 수우의 상처를 치료해줬다.
부러진 뼈가 붙고.
상처가 아물었다.
수우는 포션을 놀란 눈길로 바라봤다.
먹는 것조차 아쉬운 오크들한테 포션은 손에 넣지 못할 보물이었다.
“자, 이제 가자.”
선우영이 그리 말하며 자리를 뜨자, 수우가 허리를 굽신거리며 졸졸 쫓아갔다.
그 모습이 꼭 커다란 강아지 같았다.
마차는 다시 앞으로 움직였다.
* * *
마차가 멈추어 섰다.
수우는 얼른 마차에서 내려 문을 열고 허리를 숙였다.
“요크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선우영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마차에서 내린 선우영.
그는 수우에게 한 소리 했다.
“야, 너무 과장해서 모시려고 하지 마라. 너무 부담스럽다.”
“하지만 대장님한테 충성을 다해야 하는 게 도리 아니겠습니까?”
“적당히 하라고. 적당히.”
“넵, 알겠습니다.”
수우는 약간 허리를 펴며 대답했다.
선우영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요크에 도착했으니, 오크들이 사는 땅굴이 보여야 하는데.
왼쪽을 봐도 나무.
오른쪽을 봐도 나무.
주변은 수풀이 가득한 숲일 뿐이었다.
땅굴은 안 보인다.
“땅굴은 어디 있지? 요크에 도착했으면 보여야 할 텐데.”
선우영이 수우에게 물었다.
“이쪽에 있습니다.”
수우는 얼른 바위와 수풀을 치워 땅굴 입구를 보여줬다.
아주 컴컴했다.
햇볕조차 들어가질 못해 안이 보이지 않았다.
화르륵.
선우영은 손바닥을 펴고 불꽃을 만들었다.
어두웠던 땅굴 내부가 보이기 시작했다.
계단은 없었다.
아래로 내려가는 경사가 낮은 길이 보였다.
‘오크들 덩치에 비해 길목이 좁군. 딱 내가 드나들기 좋은 크기야.’
선우영은 땅굴 아래로 내려갔다.
수우와 몰제는 몸을 웅크리며 아래로 내려갔다.
물론 김철수도 마찬가지였다.
“큭, 좁아.”
김철수는 입을 삐쭉였다.
수우는 아래로 내려가며 자기 앞에 있는 몰제의 등을 바라봤다.
“몰제 아저씨.”
“왜?”
“죄송해요.”
“뭐가?”
“습격해서요.”
수우는 기가 팍 죽은 목소리를 냈다.
몰제는 콧바람을 불었다.
“흥. 그게 미안한 일이었던 건 알고 있군.”
“죄송해요.”
“진심으로 사죄하고 싶거든, 모두의 앞에서 증언 똑바로 해라.”
“네.”
“인생은 언제나 선택의 갈림길이다. 잘못된 선택을 피하려면 항상 명심해야 한다.”
“뭘 말인가요?”
“지금의 선택을 훗날 가슴 떳떳이 펴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한 점의 부끄럼 없는 선택이었는가. 그걸 기준으로 선택해라.”
수우는 놀란 얼굴을 했다.
크게 뜬 눈으로 몰제의 등을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몰제의 등이 커다랗게 보였다.
수우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가 왜 굴란의 말에 넘어갔을까.’
굶주림을 피할 수 있다.
그 말에 혹해서 굴란을 따랐던 과거가 원망스러웠다.
그땐 그게 옳은 줄 알았다.
현재의 비난만 감수하면 괜찮은 미래가 있을 줄 알았다.
근데 아니었다.
‘남은 건 부끄러움뿐이구나.’
수우는 그리 생각했다.
그리고 다짐하였다.
‘이번만큼은 가슴을 떳떳하게 펼 수 있는 오크가 되겠어!!’
증언을 통해 굴란의 악행을 밝히겠다.
그게 올바른 선택이니까.
사르륵.
선우영 일행은 땅굴 가장 깊숙한 곳에 도착했다.
마지막은 약간 미끄러지듯 이동하였다. 덕분에 모래와 먼지가 바닥을 쓸었다.
그렇게 도착한 오크의 보금자리.
선우영은 그곳을 보자마자 이렇게 평가했다.
‘원시 소굴이잖아?!’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다.
일단 악취가 엄청나다.
제대로 씻지 못한 오크들은 냄새가 고약했다.
코를 찌르는 지린내.
옷은 걸레짝이고 헤지다 못해 찌어졌으며, 땟국물 자국이 보였다.
항아리에 있는 식수는 바닥을 보였다.
평소 물 구하기 어렵단 뜻이겠지…… 위생 상태가 심각했다.
게다가 음식이라고 있는 건 도축된 고기 밖에 없었는데.
‘보관방식도 잘 못 됐어.’
훈제시키든가 아니면 소금에 절여서 오래 보관하는 식으로 만들어야 정상이거늘.
생고기를 가죽으로 덮어서 보관 중이다.
저러면 자칫 식중독에 걸릴 수 있다.
‘하긴, 땅굴에 숨어 사는 마당인데 어떻게 소금을 구하고 고기를 훈제하겠어.’
그러니 이러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게다가 햇볕이 없어서 빛을 내는 구슬, 조그마한 아티팩트에 의존해 시야를 밝히고 있었다.
선우영은 팔짱을 꼈다.
오크에 대한 지원이 굉장히 절실한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오크들이 선우영을 보고 소리쳤다.
“뭐야?!”
“넌 누구냐.”
“인간? 레오의 수하들인가!!”
선우영은 레오의 이름이 나와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헤스본의 배신자 레오가 자기 보신을 위하여 미리 접촉한 게 오크들이었으니까.
곧이어 수우와 몰제까지 도착했다.
그들이 모습을 보이자 몇몇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누군가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림자가 어둑어둑한 곳.
얼굴이 보이지 않는 구석진 장소에 있던 인물.
녀석이 으르렁거렸다.
“몰제.”
놈은 그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한 오크가 녀석에게 다가갔다.
“어쩔까요? 굴란 님?”
“일단 지켜본다.”
그림자가 어둑어둑한 구석진 장소에 있던 굴란.
놈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미세한 빛을 내는 아티팩트 덕분에 얼굴이 살짝이나마 보였다.
턱에 점이 있고.
머리는 희끗희끗하다.
중년을 지나 노년으로 향하는 피부 결.
눈동자엔 분노가 차 있다.
눈가에 잡힌 자글자글한 주름살은 그가 얼마나 옹고집에 고집불통인지 알려줬다.
다른 오크들은 냄새가 나는데.
굴란은 안 났다.
옷도 해지긴 했지만, 땟국물 자국은 없었다.
식수가 부족한 이 판국에도 물을 이용해 목욕하고 옷까지 빨았단 뜻이다.
생명줄 같은 마실 물로 목욕하고 옷을 빨다니.
이기심이 하늘을 찌르는 놈이다.
굴란은 몰제를 째려봤다.
몰제 또한 굴란을 발견하고 이빨을 드러냈다.
분위기가 날카롭다.
몰제는 굴란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굴란!! 날 암살하려 해놓고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구나. 명예를 모르는 쓰레기 녀석-!!”
굴란은 피식 웃었다.
“증거나 내밀고 말하시지. 남에게 누명을 씌우는 건 명예를 아는 전사가 할 짓거리인가?”
그러자 수우가 나섰다.
“제가 모든 사실을 증언하겠습니다.”
신념에 찬 수우의 눈빛.
굴란은 그 모습을 보자 단숨에 상황을 알아차렸다.
수우가 설득됐단 걸 말이다.
굴란은 목청을 높였다.
“잠깐!!”
모두의 시선이 굴란에게 향했다.
놈은 수우를 보며 히죽거렸다.
“수우, 알고 있겠지? 명예를 잃은 오크가 어떻게 되는지.”
“…….”
순간 수우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굴란은 수우를 가리키며, 명심하란 듯이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명예를 잃은 오크는 추방이다.”
동족을 습격해 죽이려 한 건 명예를 저버리는 일이다.
사실을 이야기하면 추방이다.
수우는 갈림길에 섰다.
떳떳하게 진실을 이야기하고 추방당하느냐, 아니면 비겁하게 거짓말하고 무리에 붙어있느냐.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선택.
수우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
몰제가 소리쳤다.
“인생은 언제나 선택의 갈림길이다. 잘못된 선택을 피하려면 항상 명심해야 한다.”
수우는 그 말을 듣고 몰제를 바라봤다.
결심이 선 표정.
수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선택을 훗날 가슴 떳떳이 펴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한 점의 부끄럼 없는 선택이었는가.’
그걸 되뇐 수우가 입을 뗐다.
“저는 굴란에게 사주받고 몰제를 습격해 죽이려 했습니다.”
굴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