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오크.
벨리알을 쓰러뜨린 선우영.
그는 다시 성으로 돌아갔다.
정운은 성문으로 걸어오는 선우영을 바라봤다.
“어디 갔다 오신 거예요?”
“적의 정찰병이 나타나서 쓰러뜨렸어.”
정운은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정찰병이요?”
“그래, 사로잡아서 정보를 캐볼까 했는데 자결하더라.”
선우영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일단, 이 사실을 동료들한테 말해줘야겠다.
작전 회의를 시작했다.
동그란 책상에 사람들이 앉았다.
페일은 그중에서 가장 늦게 도착했다.
끼이익.
문을 열고 어울리지 않는 붉은 망토를 걸친 페일이 등장했다.
선우영은 농담을 던졌다.
“오-!! 위대한 국왕 폐하께서 오셨군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만 놀리세요. 팔자에도 없는 왕이 돼서 힘듭니다.”
페일은 푸념을 흘렸다.
헤스본은 마땅한 지도자가 없었다.
왕족은 모두 죽고 없다.
그나마 구심점이 될만한 조직은 은빛 기사단뿐이었다.
그리고 페일은 은빛 기사단의 단장이자 헤스본 최강의 기사였다.
왕가 다음으로 상징성이 높았다.
그 덕분에 페일은 사람들에게 왕으로 추대되었다.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페일은 왕이 될 생각이 없었기에 사양하다가, 이내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왕좌에 올랐다.
할 일이 산더미였다.
백성들의 삶의 터전을 만들어야 했다.
벨제부브한테 많은 사람이 잡아먹혀 인구수가 급격히 줄었다.
‘흩어진 사람들도 규합해야지.’
벨제부브가 사람들을 잡아먹으니, 살기 위해 도망친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져 숨어지냈다.
그런 사람들도 데려와야 했다.
은빛 기사단의 무장상태와 실력 또한 재점검해야 했다.
솔직히 말해….
‘엉망이지.’
제대로 된 기반도 없이 벨제부브와 싸워왔던 은빛 기사단이다.
무기는 레오의 병사들을 급습해 노획했고, 식량은 동물들을 사냥해 주린 배를 채웠다.
식량도 무기도 부족했다.
‘평지가 넓어서 농사와 군마가 대단했던 헤스본의 은빛 기사단이 그 지경이라니.’
아마 선왕께서 아셨다면 땅을 치고 눈물 흘리셨을 거다.
‘그래,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눈물 흘릴 줄 아는 분이셨지. 선왕께서는.’
페일은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존경했고, 진심으로 따랐던 분이었는데.
유해조차 없다.
벨제부브가 먹어버렸으니까.
그것도 자기 눈앞에서.
페일은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어쩔 수 없이 왕위에 앉게 되었지만, 왕세자 전하나 공주님들이 살아계신다면 곧바로 왕위를 드려야지.’
페일은 그리 다짐했다.
그는 의자에 앉으며, 작전 회의에 참석했다.
선우영은 벨리알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아까, 몬스터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아무래도 정찰병 같아 보였습니다.”
“적들이 슬슬 눈치챘군요.”
백영희는 올 게 왔다는 얼굴로 날카로운 눈빛을 했다.
지금까지는 제법 괜찮았다.
‘마몬이 공적을 세우겠다며 다른 군단장들에게 우리가 어나더에 도착했단 사실을 알리지 않았으니까.’
그 멍청한 짓거리 덕분에 벨제부브까지 쓰러뜨렸다.
벌써 군단장 셋을 쓰러뜨렸다.
하지만 나머지 세 명이 한꺼번에 덤빈다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1:1로 싸우면 우리 자기가 다 이길 거야.’
그건 맞다.
지금처럼 선우영이 1:1로 군단장들과 싸우면 이길 거다.
‘이제부터는 적들이 무리 지어 덤비겠지.’
군단장의 숫자는 세 명.
선우영이 홀로 군단장 세 명을 상대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내가 더 강해져야 해.’
백영희는 무릎에 얹을 손을 꽉 움켜쥐었다.
자신이 군단장급으로 강해지면, 선우영의 짐을 덜어줄 수 있을 거다.
선우영은 동료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앞으로 적들이 뭉쳐서 공격해올 가능성이 큰데, 어떻게 해야 한다고 봅니까?”
조용석은 턱을 더듬거렸다.
“적들이 한꺼번에 쳐들어올 수 있으니, 대비해야 합니다. 하지만 저희도 방어해야 할 곳이 많습니다. 블레셋은 무기 만드는 곳이니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헤스본도 최대 식량 생산 지역이니 반드시 방어해야죠.”
페일이 잊지 말라는 듯이 언급했다.
두 곳 전부 중요했다.
하나는 곡창지대이니, 식량 생산을 위해 지켜야 하고.
또 하나는 광물이 많은 지역이라 무기 생산에 중요했다.
김철수는 목청을 높였다.
“그럼 전부 다 지키면 되는 일 아닙니까!!”
조용석은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지만, 쉽지 않아요. 방어 전선이 넓어지면서 병력이 부족해집니다.”
그 의견은 옳았다.
적들이 어느 장소를 노리고 공격해올지 모른다. 중요거점마다 병력을 대기시키다 보면 자연스레 방어 전선이 넓어지니 병력이 부족해진다.
방어는 둘째치고.
적들이 어느 지역으로 왔다는 걸 알릴 인원이라도 필요했다.
선우영은 팔짱을 꼈다.
‘어딘가에서 더 많은 병력을 구할 수 있다면 방어 전선을 구축할 수 있을 텐데.’
뭔가 좋은 수가 없을까?
헤스본이나 블레셋 사람들을 병사로 징집하는 건 불가능했다.
‘식량 생산과 무기 제조를 맡아야 하니까.’
더군다나 헤스본의 경우 흩어진 사람들을 규합하는 게 우선순위였다.
답이 보이지 않았다.
선우영이 고개를 숙이며 고심하던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똑똑똑.
“들어오세요.”
선우영이 말하자 문이 열렸다.
등장한 인물은 활기차고 드센 분위기를 풍기는 여성.
팔랑이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귀족 아가씨처럼 입었는데, 표정이나 행실은 그러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에는 종이가 들려있었다.
페일은 그녀를 알아봤다.
“젬마!”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젬마라는 여성은 페일에게 예법에 맞게 인사하였다.
선우영은 페일에게 물었다.
“저분은 누굽니까?”
“젬마라고 합니다. 공주님을 호위하던 여성 기사였습니다.”
젬마는 선우영에게도 예법에 맞게 인사했다.
아직 헤스본이 사이타나에게 넘어가기 전, 공주를 호위하기 위해 여성들로 이뤄진 기사단이 있었다.
젬마는 그곳의 일원이었다.
그녀는 공주가 죽자 복수를 위해 은빛 기사단에 입단했다.
그리고 레오의 애인으로 활동하며 정보를 탈취해 은빛 기사단에게 전달해줬다.
즉, 첩자였다.
레오가 죽어버린 지금. 더 이상 첩자 활동이 무의미해져 은빛 기사단으로 돌아왔다.
물론, 레오의 밑에 있던 노예들을 해방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회의실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선우영이 물었다.
젬마는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실은 중요한 정보가 하나 있어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정보?”
선우영은 호기심을 보였다.
평범한 내용이라면 이렇게 찾아와 이야기하지 않았을 거다.
게다가 지금 시점에서 정보를 이야기한다면, 레오가 끝까지 비밀에 부치려고 했던 걸 간신히 알아냈단 뜻이었다.
“그게 뭡니까.”
선우영은 답변을 재촉했다.
젬마는 뜻밖의 소식을 담았다.
“오크가 있는 장소를 알고 있습니다.”
“네?”
선우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크는 어나더의 종족 중 하나로 사이타나에게 패배해 어딘가로 숨어버렸다.
아무도 그 위치를 모른다.
그런데 그걸 젬마가 알고 있다니?
“레오는 혹여나 벨제부브가 자신을 버릴까 두려워했어요.”
“하긴, 배신자니까 그럴 만도 하겠군.”
선우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레오의 공이 커도 결국은 배신자다.
벨제부브도 자신에게 충성한 레오를 그다지 탐탁지 않게 보았다. 배신자는 또 배신할 수 있으니까.
레오가 벨제부브도 배신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레오도 이러한 기류를 감지했다.
“그래서 녀석 나름대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뒀죠.”
“그게 오크입니까?”
“네. 녀석은 땅굴로 숨어버린 오크와 교류하는 데 성공했어요.”
젬마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책상에 펼쳤다. 그건 주변이 상세히 표시된 지도였다.
“레오는 벨제부브가 자신을 버릴 걸 대비해 함께 싸워줄 존재를 비밀리에 찾았고. 이곳 요크에서 오크를 발견했어요.”
“오크들이 싫어하지 않았나요?”
선우영은 질문을 던졌다.
배신자를 싫어하는 게 사람 심리 아닌가.
만약 자신이 오크였다면 레오를 발견하자마자 사지를 찢어 죽였을 것이다.
젬마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엔 싫어했죠. 하지만 땅굴에 숨어 사는 오크들한테 식량이 풍족했을 린 없고….”
“식량을 주어 환심을 샀다?”
“정확히는 거래한 거죠.”
선우영은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몰랐다.
페일은 혀를 찼다.
“쯧, 오크들 일부는 사이타나에게 붙잡혀 지구 침공 병사로 쓰이기까지 했는데…. 투쟁심 강하고 호전적이던 오크들이 배신자와 거래할 정도로 타락했다니.”
젬마도 페일과 같은 심정이었다.
개탄스러웠다.
본래 오크는 전사를 숭배하며 뛰어난 무예로 명망 높은 종족이었다.
젬마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후우, 오크들도 많이 변했습니다. 세상이 이 지경이니,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었겠죠.”
선우영은 페일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구에선 오크는 그저 C급 몬스터였는데…….”
“그건 일반 오크 백성입니다.”
“오크 백성이요?”
“진짜배기 오크 전사는 뛰어난 전투력을 지녔습니다. 특히나 오크는 가장 강한 인물을 족장으로 추대해 나라를 세웁니다. 그래서 오크 족장은 무시할 수 없는 힘을 지녔죠.”
선우영은 눈빛을 반짝였다.
저 말대로라면 오크들은 굉장히 강력한 종족이었다.
페일은 설명을 이었다.
“비록 지금은 족장이 사이타나에게 죽어버리고, 백성들 일부가 붙잡혀 침략 도구로 쓰이고 있지만, 남은 오크들을 아군으로 만들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선우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이다.
그 정도로 강한 전사가 있다면 부족한 전선을 메꿔줄 수 있을 거다.
“그럼, 이번 작전 회의는 답이 나왔군요.”
선우영이 씨익 웃었다.
그는 모두에게 명령을 내렸다.
“즉시, 요크로 가서 오크를 설득해 아군으로 데려옵시다.”
선우영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반대 의견은 없다.
모두가 찬성표를 던졌다.
* * *
선우영 일행은 요크로 출발했다.
기름을 아껴야 해서 차량이 아닌 마차를 타고 이동하였다.
“요크가 생각보다 가깝네요?”
선우영은 지도를 보며 말했다.
놀랍게도 요크는 헤스본의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뭐, 그래도 나흘거리였다.
“그나저나 정말 군마가 대단한데요?”
선우영이 마차에 탄 페일을 보며 말했다. 페일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헤스본의 말들은 지구의 말들과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 헤스본의 자랑은 풍부한 평지를 바탕으로 한 식량 생산과 뛰어난 군마니까요.”
페일이 자랑스러워할 만했다.
뭔 놈의 말들이 시속 80~90km를 달린다.
그것도 속도를 유지해서 말이다.
휴식 시간도 딱히 없었다.
지구의 말은 최고 속도가 시속 88km이지만 그렇게 달리면 3km도 못 가서 지치고 만다.
그 때문에 마차를 운용할 땐 시속 20km를 유지해야 했다.
그래야 오래 달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헤스본의 말들은 시속 90km를 유지하며 달려도 거뜬했다.
이 정도면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마차의 조종은 테오가 맡았다.
그는 고삐를 잡고 운전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도중 테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 말을 멈춰 세웠다.
“워, 워.”
테오는 앞다리를 세우는 말을 진정시켰다.
선우영은 마차에서 내렸다.
“무슨 일입니까?”
“그게, 앞에 있는 걸 한번 보십시오.”
테오의 말에 선우영은 눈앞에 있는 무언가를 확인했다.
그는 화들짝 놀랐다.
“아니, 왜 길 한복판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녹색 피부와 입술 밖으로 튀어나온 아랫송곳니.
틀림없다.
오크였다.
오크가 길거리 한복판에 쓰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