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진정으로 강한 리더.
나도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다.
블릿은 그리 말했다.
그게 그의 비전이었고, 선우영은 멋있다는 말과 함께 존중해줬다.
오래간만에 받아본 칭찬.
블릿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어떠한 감정이 요동쳤다.
심장이 뜨겁게 타오르는 기분.
이유를 모르겠다.
구속된 무언가에 벗어나듯 발버둥 치고 싶은, 이 감정은 뭐란 말인가.
나아가고 싶다.
변하고 싶다.
그러한 감정이 밑바닥부터 솟구쳤다.
‘남들을 돕고 싶다.’
자신을 도와줬던 그 드워프 노인처럼 자신도 누군가를 돕고 싶다.
그 옛날, 드워프들의 자유로운 삶을 되돌리고 싶다.
목표는 정해졌다.
그러나,
‘나한테는 힘이 없어.’
남을 돕는단 건, 그만큼 힘이 있어야 가능하다.
힘이 없으면 자기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데, 무슨 수로 타인을 도울 수 있단 말인가.
‘나도 힘이 있었으면….’
눈앞에 있는 선우영처럼 힘과 카리스마가 있었다면, 자기 삶은 달랐을 거다.
드워프들을 돕고.
마몬과 싸웠을 것이며.
드워프의 기를 죽이는 도구로써 쓰이지도 않았을 거다.
그게 분했다.
블릿은 상의 밑단을 잡아당기며 눈물을 흘렸다.
“힘이 없어요.”
선우영은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다.
“남들을 돕고 싶어도, 힘도 자존심도 없어요. 저에겐 아무것도 없어요.”
블릿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무능한 자신이 싫다.
비전을 기껏 세워도 도전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 여겼다.
선우영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왜 힘이 없습니까?”
“흐윽. 흑.”
블릿은 우느라 대답도 못 했다.
“블릿 왕자님. 비전이 올바르고 타당하다면, 사람이 모이고, 돈이 모이며, 힘이 생깁니다.”
“네?”
“타인을 존중하는 비전을 가진 왕자님은 이미 강한 분입니다.”
“…….”
“그러니, 울지 마세요.”
선우영은 계속 블릿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블릿은 그가 고마웠다.
자신에게 강하다고 말해줘서,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말해줘서.
그 말이 너무나 듣고 싶었다.
한참을 울던 블릿은 진정이 되었는지, 소매로 눈가를 쓸어 눈물을 닦았다.
“흉한 모습 보여드렸네요.”
“아뇨, 제가 보기엔 오히려 좋았는데요? 원래 비전은 뜨거운 감정이랑 함께 세워지는 법이니까요.”
선우영은 그리 말했다.
그 말에 블릿은 피식 웃었다.
그는 하늘을 바라봤다.
‘남을 돕고 싶지만, 뭘 어떻게 할지 잘 모르겠네. 이것부터 정하는 게 내 비전을 실현할 첫 걸음이겠어.’
블릿은 그리 생각했다.
선우영은 그에게 질문을 하나 던졌다.
“그런데 드워프 왕가가 가진 능력이 굉장히 궁금한데요. 마나로 철을 두드린단 게 뭔가요?”
“마나로 철을 두들긴다는 건, 쉽게 말해… 검의 강도를 높인단 뜻입니다. 게다가 정령이 깃들 수 있는 첫 번째 단계이기도 합니다.”
“정령이요?”
선우영은 순간 흠칫했다.
듀란달에게 주인으로 인정받았을 때의 기억이 밀려왔다.
‘용광검에 정령이 깃들 수 있다고 했었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용광검은 더욱 강해질 거다.
‘이거 기대되는데?’
선우영은 얼른 용광검을 뽑아 블릿에게 보여줬다.
“이미 제작된 칼도 강화할 수 있나요?”
“네. 가능합니다만.”
블릿은 용광검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이게 검이라고요?”
“네.”
“아니, 누가 만들었습니까? 어떤 미X놈이….”
블릿은 당황해 입에서 거친 말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드워프로서 이 무기를 인정할 수 없었다.
동시에 감탄했다.
“아니, 발상도 대단하고. 이게 이론적으로는 엄청난 파괴력을 내겠지만….”
블릿은 기다란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는 마저 이야기했다.
“오러를 강제로 빨아들이는 특징이 있는데. 이걸로 검기나 검강을 극대화할 순 있어도, 사용하긴 어려울 겁니다. 많은 양의 오러를 세밀하게 조절하지 못하면 쓸 수가 없어요.”
“네. 그렇더라고요.”
“주인이 무기를 골라야 하는데, 이건 무기가 주인을 고르는 형식이에요.”
“이걸 만든 사람과 똑같은 얘기하시네요.”
“혹시, 이걸 만드신 분이 이 검은 무기라고 부르기 어렵다고 하셨나요?”
“네.”
블릿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기가 봐도 그랬다.
선우영 정도 되는 인물이니까 쓸 수 있지, 다른 사람이라면 과연 사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블릿은 용광검의 흑색 칼날을 면밀히 살폈다.
“그러니까, 제가 이걸 강화해주길 원하신단 거죠?”
“네. 마나로 철을 두들기는 능력으로요. 이미 만들어진 무기도 가능하시다면서요.”
“가능은 하지만….”
블릿은 머뭇거렸다.
아버지와 형님들이 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고 배우긴 했다.
문제는 딱 거기가 끝이라는 거다.
실제로 해본 적이 없다.
이론만 알고 실제 경험이 없으니 자신감이 없었다.
실패하면 어쩌나 생각했지만.
‘해보자.’
도전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실패한다고 해서 무슨 불이익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이 미숙하다는 걸 증명할 뿐.
‘미숙하다 할지라도 도전할 거야. 그래야 타인을 돕겠단 나의 비전이 이뤄질 테니까.’
블릿은 숨을 길게 들이켰다.
용광검에 손을 올렸다.
“후우.”
숨을 내쉬는 블릿.
그는 아버지가 가르쳐주셨던 내용을 기억했다.
- 마음이다. 마나로 철을 두들겨 강도를 올리는 건, 강력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강철의 의지를 가져라!!
처음엔 저게 뭔 소리인가 싶었다.
어려서 이해도 못 했다.
그저 아버지가 멋있단 생각밖에 못 했었다.
하지만 이젠 이해가 간다.
‘강철의 의지.’
그건 꺾이지 않는 신념을 뜻하는 것이었다.
분명 아버지도 가지고 계셨을 거다. 자신만의 확고한 비전을 말이다.
‘그랬으니 엄청난 지지를 받으셨겠지.’
마나로 철을 강화하는 능력.
그건 왕가의 핏줄과 함께 강력한 신념이 있어야 비로소 발동되는 거였다.
블릿은 대기의 마나를 살며시 조종하여 칼날을 두들겼다.
타앙.
마나가 칼날에 스며들었다.
그 소리가 청명하고 깊게 울려 퍼졌다.
일반적인 철을 때리는 소리와 달랐다.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처럼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음색이었다.
주변에 있던 드워프들.
그리고 멀리서 휴식을 취하던 드워프들은 그 음색을 들었다.
“……이 소리는?”
“설마?”
“이 소리. 틀림없어.”
드워프들은 그 음색에 이끌리듯 소리가 이끄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마치 본능에 따르듯이.
그들이 도착한 장소는 성의 발코니였다.
모든 드워프들이 침묵했다.
그들은 눈앞의 경이로운 광경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맙소사.
마나로 칼날을 두들긴다.
그 청명한 음색이 드워프들의 귀를 즐겁게 했다.
블릿은 정신을 집중했다.
점점 음색이 높아지며, 드워프들이 감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후우.”
블릿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정신을 집중하느라 주변이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칼날에만 집중했다.
“끝났습니다.”
블릿은 그리 말하며 용광검을 바라봤다.
칼날에 서린 기운.
그 기운이 훨씬 더 날카롭게 느껴졌다.
손등으로 땀을 닦던 블릿.
그는 순간 인기척을 느끼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
그제야 수많은 드워프들이 모여있는 걸 발견했다.
드워프들은 블릿을 바라봤다.
그 옛날, 선왕께서 무기를 만드실 때 보여줬던 모습을 오늘 보게 되었다.
선우영은 블릿의 등을 두들겼다.
“모두가 왕자님을 보러 왔습니다. 한 말씀 하시죠.”
“제가요?”
“누군가를 돕는 사람들이 되겠다고 하셨잖아요. 저기 도움을 바라는 드워프들이 있네요.”
선우영은 시선을 드워프들에게 줬다.
블릿은 침을 꿀꺽 삼켰다.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무얼 해야 할까.
블릿은 드워프들의 표정과 눈빛을 하나하나 찬찬히 살폈다.
기대감.
소망.
블릿은 그제야 드워프들한테 무엇이 필요한지 깨달았다.
‘아-! 자긍심. 희망.’
자존심이 무너진 드워프들은 자긍심을 되찾아 줄 존재가 필요했다.
앞으로 나아갈 희망.
무너진 나라를 재건할 수 있단 희망을 줄 수 있는 인물.
드워프들은 그걸 원했다.
블릿은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이 그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모르지만, 그러함에도 해보겠다.
‘그게 내 비전이니까.’
블릿은 모두를 바라보며 목청을 높였다.
“드워프들이여!! 위대한 블레셋의 백성들이여. 오늘 우리는 자유의 공기를 맛보았다. 우리 드워프들의 자긍심을 다시 일으켜 세울 때가 되었다.”
드워프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블릿은 주먹을 번쩍 들며 모두에게 소리쳤다.
“위대한 드워프들이여. 우리가 누구인가? 폭력은 폭력으로 갚고, 은혜는 은혜로 갚는 드워프들이다. 사이타나에게 당하고 이렇게 가만히 있을 건가? 우리가 그런 나약한 존재인가!!”
“아닙니다.”
“싸워야 합니다.”
몇몇 드워프들이 치솟는 분노와 함께 소리쳤다.
블릿은 발코니 난간을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일어나라, 드워프들이여. 조국을 재건하고 원수를 갚자. 엎드려 살지 말고 일어나 싸우자. 그 옛날 우리의 선조들처럼 당당하게 싸우자, 그게 우리 드워프다!!”
“와아아아-!!”
“블레셋에 축복을!”
“사이타나에게 죽음을!!”
“블릿 왕자님, 만세!”
저 멀리까지 울려 퍼지는 드워프들의 함성.
희망이 필요했고.
자긍심을 세워줄 사람이 필요했던 드워프들.
그들은 오늘 자신들을 이끌어 줄 왕을 접견했다.
블릿은 짜릿함을 맛보았다.
드워프들의 함성이 전신을 강타하며 깊은 고양감을 선사했다.
‘아~! 아버지. 아버지께선 이런 광경을 매번 보셨던 거군요. 아버지의 비전이 무엇인지 알겠습니다.’
블릿은 미소 지었다.
이 힘든 상황 가운데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보니 알겠다.
힘이 있다고 해서 위대한 지도자가 되는 게 아니다.
진정으로 위대한 지도자는….
‘국민의 구심점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게 왕이었다.
그리고 블릿은 드워프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선우영은 블릿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회의하러 가볼까요? 블릿 폐하?”
선우영은 그의 호칭을 폐하로 바꾸었다. 블릿은 왕으로 추대받아 마땅한 인물이 되었으니까.
블릿은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선우영 토벌대 대장님.”
“무얼 말씀이십니까?”
“비전을 세우라는 그 말씀이 아니었다면, 저는 여전히 한심한 녀석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스스로 비전을 세우셨죠. 이미 왕의 자질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 자질을 깨우쳐 준 게 선우영 토벌대 대장님이고요.”
블릿과 선우영을 피식 웃었다.
그들은 회의장으로 다시 돌아갔다.
* * *
페리온을 지배하는 벨제부브.
녀석은 자신의 성에서 식사를 하였다.
냄새나는 몸뚱이.
끈적한 액체가 피부에서 흘러나왔다.
그 냄새가 실로 고약했다.
벨제부브는 토막 난 사람 시체를 거대한 입안으로 집어넣으며 우적우적 씹었다.
뼈째로 씹히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인간은 별미야.”
녀석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마몬을 떠올렸다.
“그 빌어먹을 녀석.”
벨제부브는 마몬과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마몬은 벨제부브가 인간을 잡아먹는 걸 좋게 보지 않았다.
- 인간을 노예로 삼아 노동력을 착취하면 더 많은 무기를 만들 수 있을 텐데, 그 좋은 도구를 먹기만 하겠다고?! 제정신이냐.
마몬은 인간을 노예로 삼아 더 많은 무기를 만들기 원했다.
하지만 벨제부브에게 인간은 맛있는 별미였다.
그래서 노동력으로 사용하기보단 먹을 수 있는 가축으로 길렀다.
벨제부브는 입 안에 있는 사람 시체를 목구멍으로 넘기고, 또 다른 시체를 집어 입속으로 넣었다.
그때였다.
부하 하나가 그에게 다가왔다.
“벨제부브 님.”
“무슨 일이냐? 혹시 지구에서 적들이 넘어왔느냐?”
“아닙니다.”
“그럼 설마?”
“또 은빛 기사단이 우리 가축들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가축이란 잡아먹기 위해 기르는 인간을 의미했다.
은빛 기사단은 과거 페일이 이끌던 페리온의 최강 기사단을 뜻했다.
“이런 젠장. 이 귀찮은 인간 놈들.”
벨제부브는 턱살이 떨릴 정도로 분노하며 소리 질렀다.
“내 반드시 은빛 기사단을 끝장내고야 말겠다.”
벨제부브는 매서운 눈빛으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