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드디어 떠나다2
사이타나.
본래는 붉은 용이었으나 지금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마계의 일인자.
군단장들의 지배자.
“마계의 지배자이자, 모든 차원의 적법한 왕이 되실 사이타나 님을 뵙습니다.”
루시퍼가 군단장들을 대표해 인사했다.
황금으로 이뤄진 옥좌.
사이타나 그곳에 앉았다.
놈은 붉은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기며, 짐승의 눈동자처럼 좁고 날카로운 동공을 보였다.
그의 미간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내가 만마전에 너희를 부른 이유는 하나다. 군단장 중 하나가 당했다.”
“…….”
“벨페고르. 녀석이 지구에 있는 인간에게 당했다. 그것을 알리기 위해 너희를 불렀다.”
“벨페고르를 쓰러뜨린 인간이 누굽니까?!”
마몬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호기심.
그리고 적에 대한 궁금증.
두 가지 때문에 물어본 것뿐이었다.
그러나,
콰지직-!!
어마어마한 기운이 마몬을 덮쳤다.
“으윽!!”
마몬은 입을 꾹 다물며 비명을 질렀다.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귀와 눈동자 그리고 입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사이타나는 눈을 부릅떴다.
“마몬, 감히 누가 네놈한테 지껄여도 된다고 했지?”
“…….”
“네 녀석은 아직 쓸모가 있으니, 한번은 봐주마. 하지만 이처럼 똑같은 짓거리를 했다간 죽는다.”
“…….”
마몬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말하면 안 된다.
한 번만 더 심기를 거슬렀다간.
‘죽는다.’
마몬은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사이타나는 마몬을 옥죄는 기운을 풀었다.
그제야, 녀석은 쏟아내던 핏물을 멈추고 떨리는 육체를 진정시켰다.
사이타나는 부릅떴던 눈을 다시금 가늘게 떴다.
“군단장 자리의 공석은 나중에 메꾸도록 하겠다. 앞으로의 지구 침공을 위해 무얼 해야 할지 이야기하라.”
사이타나가 말하길 허락했다.
그제야, 모두가 말할 수 있었다.
마몬은 밉보인 걸 만회하려는 건지 다급한 손짓과 함께 의견을 밝혔다.
“제가 좀 더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 보탬이 되겠습니다.”
아스모데우스도 의견을 표명했다.
“저는 더욱 많은 이종족들을 몬스터로 만들어 보탬이 되겠습니다.”
사이타나는 이빨을 드러냈다.
답변이 맘에 들지 않았다.
“그게 네놈들 평소에 하는 일과 무엇이 다르냐. 생각하는 게 귀찮았던 거냐. 아니면 목 위에 달린 머리는 장식품이더냐.”
사이타나의 분노.
아스모데우스는 고개를 조아리고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죽을지도 모른단 공포심.
벼락이 정수리부터 시작해 발끝까지 내려치는 기분이다.
마몬은 다시금 몸을 벌벌 떨었다.
그때였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루시퍼가 근엄한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뚜렷하게 밝혔다.
“미천한 소신이 생각건대, 지구인들은 곧 이곳으로 쳐들어올 겁니다. 그러니 대비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집니다.”
“뭐라?”
사이타나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루시퍼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분노하진 않았다.
“루시퍼, 그대의 의견을 좀 더 이야기하라.”
“지구인들이 벨페고르를 잡은 건 우연이 아닐 겁니다. 아마도 군단장이 지구로 올 거란 예측이 있었기 때문에 대비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벨페고르가 지구로 갈 걸 예측했다? 마나에 대해 알지도 못했던 지구인이?”
“페일.”
루시퍼는 한 인물을 거론했다.
그는 고개를 더욱 조아리며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어나더에서 도망친 페일이 지구로 갔다면 충분히 앞뒤가 맞는 말입니다.”
사이타나는 턱을 괴었다.
어나더를 지배하기 위해 싸웠을 때, 그나마 봐줄 만한 전사는 페일 하나였다.
“페일이라. 그래. 그 녀석은 자네와 자주 전장에서 싸웠었지.”
“네.”
“그럼, 녀석이 군대를 이끌고 이곳 어나더로 침공한단 얘기인가?”
“그렇습니다.”
“푸흐흐흐.”
사이타나는 실금을 흘렸다.
이윽고, 녀석은 입을 크게 벌리며 폭소했다.
“크하하하하.”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감히 페일 따위가 자신에게 도전해온다니, 상상이나 했겠는가.
“해서, 루시퍼.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이냐.”
“군단장들은 자신의 영토를 철저히 수호하되, 적이 나타나면 연락하여 협력하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놈들이 쳐들어온다면…. 그 방법도 나쁘지 않겠군.”
사이타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맘에 들었다.
적들이 알아서 와주면 찾아갈 필요 없이 죽여버리면 될 게 아닌가.
“루시퍼. 그대에게 작전지휘권을 주겠다.”
“과분한 영광입니다.”
사이타나는 다른 군단장들에게 소리쳤다.
“군단장들은 들으라, 지금부터 루시퍼를 군단장의 최고 지휘자로 임명할 테니, 명령에 따르라.”
“알겠습니다.”
군단장들은 고개 숙여 대답했다.
사이타나는 황금 옥좌에 앉은 채 손을 휘저었다.
“이만 물러가라.”
군단장들은 사이타나의 알현실을 빠져나왔다.
감히 등을 보일 수 없어 뒷걸음질로 문을 나왔다.
군단장의 궁전의 복도를 걸었다.
아스모데우스는 루시퍼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그녀는 루시퍼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레비아탄은 힐끗 쳐다봤다.
까드득.
레비아탄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찢어진 입술에서 핏물이 흘렀다. 지금 당장이라도 공격할 기세였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소란 피우지 말라는 루시퍼의 말을 지금까지 지키려고 했으니까.
“아스모데우스.”
루시퍼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왜 그래, 자기?”
“당장 손가락 치우지 않으면 팔목을 잘라주마.”
아스모데우스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녀는 서둘러 그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루시퍼는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언제든지 아스모데우스를 죽여버릴 수 있다는 표정.
그는 오만했다.
그리고 오만할 만한 실력을 지녔다.
루시퍼는 냉정하고 차가운 눈길과 낮게 깐 목소리로 아스모데우스를 내려다보았다.
“아스모데우스. 네놈이 사이타나 님을 제치고 마계의 일인자가 되고 싶어 하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그걸 위해 날 유혹하려는 것도 알고 있고.”
“…!!”
아스모데우스는 흠칫했다.
맞다.
그녀는 사이타나를 왕좌에서 내리고 마계의 일인자가 되려 했다.
그래서 지금이 기회라 여겼다.
지구에 S급 게이트를 만드느라 약해진 사이타나. 그를 해치울 기회는 지금이 유일했다.
루시퍼는 아스모데우스의 모가지를 확 움켜쥐었다.
“컥!!”
신음하는 아스모데우스.
루시퍼는 끔찍한 살기를 내뿜었다.
“네년이 아직 쓸모가 있어서 살려두는 거다. 네년이 사이타나 님께 쓸모가 없게 된다면, 내가 가장 먼저 나서서 널 죽이겠다.”
“커억!!”
“그러니 행동 조심해라. 오늘처럼 불순한 동기로 거슬리는 행동을 보이면 목을 분질러주겠다.”
“죄, 죄송합니다.”
아스모데우스는 사과했다.
루시퍼는 그녀를 황금 바닥에 패대기쳤다.
마몬은 루시퍼를 쳐다봤다.
‘제기랄. 나한테도 힘이… 힘이 있다면 루시퍼보다 더 큰 공적을 세우고 사이타나 님의 총애를 독차지할 수 있을 텐데.’
마몬은 욕심이 많았다.
루시퍼를 제치고 군단장 서열 1위에 오르는 게 꿈이다.
그 꿈을 이루고 사이타나 님의 총애를 받고 싶었다.
하다못해 가장 큰 공적을 세우길 원했다.
페일이 정말로 군대를 데리고 어나더를 되찾으려 한다면, 그가 올 걸 예상하고 대비하려 했던 루시퍼가 1등 공신이 된다.
그건 싫었다.
‘제길, 루시퍼만 없었다면 내가 군단장 1위를…….’
그렇게 생각한 순간.
루시퍼가 차가운 눈길을 마몬에게 보냈다.
마몬은 고개를 확 숙였다.
루시퍼가 보낸 시선을 피하느라 급급했다.
루시퍼는 같잖단 듯 피식거렸다.
알고 있다.
마몬이 자신에게 열등감을 느낀다는 것 정도는!!
하지만 그래봤자 서열 4위.
고작 눈빛 한 번이면 쉽게 굴복하는 놈일 뿐이다.
그게 현실이었다.
마몬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제기랄, 젠장!! 루시퍼가 무서워 시선을 피하다니.’
마몬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루시퍼는 다른 군단장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적들이 각자의 영토에 출몰했을 경우, 바로 나에게 연락하도록. 벨페고르를 없앤 정도의 실력자라면 너희들로 버거울 수 있다.”
자신이라면 충분히 해치울 수 있다.
지극히 오만했다.
군단장들은 그런 그가 맘에 들지 않아 인상을 찌푸렸다.
루시퍼만을 사랑하는 레비아탄을 빼놓고 말이다.
* * *
선우영은 어나더로 떠날 준비를 끝냈다.
식량은 문제없다.
5년 치 식량을 전부 챙겼다.
혹여나 식량에 문제가 생겼을 때를 대비해 통조림 같은 인스턴트 식품도 많이 구매했다.
정제된 물도 10년 치 챙겼다.
태양광 판넬을 챙겨 부족한 전기를 태양광발전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심지어 현대 무기도 동원됐다.
각종 총기류.
크레모어와 수류탄.
탱크까지 전부 준비되었다.
선우영은 자신과 함께 어나더로 떠나겠단 한 인물을 쳐다봤다.
“정말 가시겠어요? 박인혁 씨?”
“네. 가야죠. 제가 없으면 누가 무기 수리하겠습니까?”
용광검을 만든 장인 박인혁.
그도 함께 어나더로 가겠다며 의사를 표명했다.
그가 필요하긴 했다.
무기를 수선하는데 그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을 테니까.
선우영은 지원자들과 브리핑 시간을 가졌다.
발표자는 페일.
그는 자신의 본래 세계, 어나더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나더는 엘프, 인간, 드워프, 오크가 사는 세상입니다. 각 종족은 국가를 이루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사이타나가 쳐들어왔습니다.”
페일은 주먹을 꽉 쥐었다.
“각 종족의 국가들은 서로 연합하여 싸웠지만, 열세를 면치 못했고 배신자까지 속출해 결국 패배했습니다.”
페일은 순간 감정이 울컥 치솟았다.
사이타나한테 짓밟힌 고향이 떠올라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꾹 참고 계속 브리핑했다.
“사이타나의 군세는 여섯 명의 군단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S급 게이트의 보스 몬스터 벨페고르 역시 군단장 중 하나입니다. 녀석이 죽었으니, 이제 5명 남았네요.”
그의 이야기를 듣던 사람 하나가 손을 들었다.
“질문이 있습니다.”
“네.”
“사아타나가 S급 게이트를 만드느라 약해진 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럼 나머지 군단장들은 얼마나 강합니까?”
“벨페고르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입니다.”
그 이야기에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렇다면 좀 더 시간을 들여 준비된 후에 쳐들어가는 게 낫지 않겠냐는 의견도 튀어나왔다.
선우영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오러로 목청을 강화해 모두가 들리게 이야기했다.
“저와 함께 S급 게이트에 들어가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준비에 공을 들인다고 놈들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또한, 스킬석도 게이트가 닫힌 관계로 현재 시중에 있는 것을 소모하면 추가로 얻을 수 없는 상태죠.”
그 말에 다들 침묵했다.
선우영은 마저 주장하였다.
“오러를 강화하는 훈련 또한 성과가 나오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강해지겠다고 시간을 들일수록 사이타나는 소모한 힘을 회복하니, 결과적으로 우리가 불리합니다.”
선우영은 중요한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기억하십시오. 시간은 우리의 편이 아닙니다. 지금도 사이타나는 힘을 회복하며 다음 침략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좀 더 훈련하고 떠나자는 이야기가 쏙 들어갔다.
선우영도 벨페고르와 싸워봤으니 알고 있다. 다른 군단장들과 싸우는 게 쉽지 않다는 걸.
하지만,
“지구에는 없는 스킬석이 어나더에는 있습니다.”
선우영이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그제야 표정이 밝아졌다.
“어차피 지구에서 더 강해질 방법은 딱히 없으니. 어나더로 가서 차라리 스킬석을 구하는 게 더 효율적입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어차피 강해지려면 어나더로 떠나 스킬석을 얻는 방법밖에 없었다.
페일은 그 외에도 어나더에 배신자가 있으니 주의하라고 했다.
그렇게 브리핑이 끝나고.
모두 밖으로 나와 일렬도 도열했다.
선우영은 모여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수천 대의 트럭.
어마어마한 숫자의 헌터들과 병사들. 이 정도면 군대라 불러도 되겠다.
사이타나를 무찌르겠단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였다.
주변에는 무사히 다녀오라며 꽃을 던져주는 시민들이 보였다.
선우영은 오러로 목청을 키웠다.
출정하기 전, 연설로 모두를 독려해줄 생각이었다.
“이곳에 모인 위대한 영웅들이여! 우리는 게이트를 만든 근원, 사이타나를 무찌르러 간다. 우리가 가는 길은 힘들고 혹독하다. 하지만 인류의 내일을 위해 우리는 싸워야 한다.”
선우영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선언했다.
“그대들이 싸우는 전장에서 나는 항상 선봉을 맡겠다. 후퇴한다면 내가 가장 늦게 후퇴하겠다. 그러니 영웅들이여, 끝까지 함께 싸우자! 역사가 우리를 기억할 것이다!!”
그의 연설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스르릉.
선우영은 허리춤에서 듀란달을 뽑았다.
그가 검을 높이 들었다.
그러자 칼날이 빛나며 섬광을 허공에 뿜어냈다.
찌이익.
섬광은 차원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더니, 이윽고 어나더로 떠나는 게이트를 만들어냈다.
“영웅들이여, 가자!!”
선우영이 외치며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드르륵.
탱크가 뒤이어 들어갔고.
헌터들과 총기류로 무장한 사람들이 뒤따랐다.
게이트를 지나 도착한 곳.
어나더.
선우영은 그곳의 광경을 보고 침묵을 지켰다.
“…….”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가 눈앞에 보였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
선우영은 곧장 지도를 펼쳤다.
페일과 이야기해서 아나더의 대략적인 지도가 완성된 상태였다.
선우영은 황무지를 이리저리 살피다 한쪽에서 거대한 산맥을 발견했다.
용암이 끓어 넘치는 산맥.
유황 가스와 전기가 뿜어져 나오는 자연환경.
선우영은 피식 웃었다.
“파르산. 군단장 마몬의 영역인가.”
드워프가 있는 장소다.
페일은 선우영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선우영 씨. 뭐부터 하실 겁니까? 마몬부터 공격하실 겁니까?”
“아뇨. 그건 두 번째 할 일입니다.”
“그러면요?”
“한국에서 제일 싫어하는 새끼가 누군지 아세요?”
“누군데요?”
“자기 나라 팔아먹은 새끼요.”
선우영은 지도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나더에 대해 설명해 주실 때, 배신자가 있었다고 했죠?”
“네. 어나더는 엘프, 드워프, 인간, 오크 등등 다른 종족끼리 동맹국을 형성했었는데…. 각국에 배신자들이 있습니다. 특히나 드워프의 배신자 니아온은 악명이 높죠.”
선우영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지도로 가리킨 곳
그곳은 드워프를 마몬에게 팔아넘긴 배신자 니아온이 사는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