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더욱 빠르게
홍대호의 귓속말.
선우영은 자신을 찾는 인물의 이야기를 듣고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미국 헌터 협회?’
아니, 그쪽에서 자신을 왜 찾는 걸까?
‘설마, 귀화하란 제의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S급 헌터는 아주 귀중한 존재이니 말이다.
‘일단 한번 만나봐야겠네.’
선우영은 그리 생각하고 홍대호를 따라 어느 회의실로 향했다.
끼이익.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선글라스를 낀 흑인 남성이 한 명 있었다.
덩치가 우락부락했다.
근육질 몸매에 인상도 험상궂다.
오러도 느껴진다.
협상가의 분위기가 전혀 없다.
오히려 게이트에서 몬스터와 사투를 벌여왔던 베테랑 헌터 같았다.
그는 선우영을 보고도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었다.
팔짱을 끼며 약간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
선우영의 눈살이 꿈틀했다.
‘만나자 해놓고 저게 무슨 태도지? 예의를 밥 말아 먹었나.’
그의 행동이 약간 거슬렸지만, 어쨌든 국제 게이트 방어 점수가 1등인 미국에서 협회 사람이 찾아왔다.
시답잖은 이야기는 아닐 테니, 이번 한 번만 참아주기로 했다.
선우영은 의자를 뒤로 빼고 앉았다.
“안녕하십니까?”
선우영이 서툰 영어로 인사했다.
미국 헌터 협회에서 나온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홍대호에게 얼른 나가라고 눈짓을 줬다.
홍대호는 문을 닫고 나갔다.
미국 헌터 협회에서 나온 사람은 문이 완전히 닫히자 안주머니에서 뭘 꺼냈다.
기묘하게 생긴 기계장치였다.
거기에 달린 빨간 버튼을 누르자 기묘한 전자파 음성이 들렸다.
삐이이잉!
그는 기계장치로 주변을 찬찬히 탐색하더니, 이내 테이프에 매달린 도청 장치를 발견했다.
그걸 손가락 악력으로 부쉈다.
파지직.
부서진 도청 장치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한국 국정원 녀석들! 내가 온다니까, 이런 잡스러운 짓을 했군.”
미국 헌터 협회에서 나온 사람이 처음을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 만남 자리….
보통은 아닌 듯싶다.
한국 국정원이 도청까지 시도한 걸 보면 말이다.
미국 헌터 협회에서 나온 사람.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 선우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미국 헌터 협회에서 대표로 나온 스미스입니다. 그 유명한 선우영 헌터를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굉장히 유창한 한국어였다.
선우영은 그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스미스는 선글라스를 벗고 미소를 보였다. 그의 하얀 건치가 보였다.
아무래도 성격이 나쁘지 않은 모양인데….
‘아까는 홍대호 협회장과 국정원 때문에 바짝 긴장한 상태였나?’
도청도 할 수 없는 밀실.
그곳에서 스미스가 뻔히 예상하고 있던 제안을 던졌다.
“선우영 헌터님, 혹시 미국으로 귀화하실 생각 없으십니까? 귀화하시면 미국 헌터 협회가 모든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선우영은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갈 생각 없다.
크루그먼 길드를 국제 길드로 만들어 앞으로 벌어질 사건 사고에 대비할 생각인데, 무슨 귀화를 한단 말인가.
게다가 한국 정부에서 스킬석도 주고 세금 혜택도 준다.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원하는 스킬석을 구매할 수 있다.
미국에서 어떤 제안이 오던 매력적이지 않았다.
“이거 참. 깔끔하게 거절당했네요. 너무 아쉽습니다.”
스미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뭐, 선우영을 꼬실만한 카드가 없다는 건 미국 헌터 협회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의 설득은 포기했다.
대신, 선우영이 예상하지 못할 질문을 휙 던졌다.
“인벌 토벌에서 말입니다.”
“네?”
“쓰시마에서 인벌을 토벌할 때 만나셨죠?”
“누굴 말입니까?”
“……가면을 쓴 남자 말입니다.”
“?!”
선우영은 순간 손가락을 움찔했다.
질문을 던지는 스미스의 표정이 아까와 다르게 딱딱해졌다.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소름 돋을 정도였다.
마치 죄를 저지른 사람을 추궁하는 것 같았다.
진중한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선우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쓰시마에서 만난 가면을 쓴 남자는 틀림없이 페일을 뜻하는 거다.
‘뭐야? 저걸 왜 나한테 물어?’
그냥 페일에게 물어보면 될 텐데, 굳이 자길 찾아왔다.
스미스는 계속 질문을 던졌다.
“듣자 하니, 쓰시마에서 인벌 여왕을 잡고 난 뒤… 가면을 쓴 남자와 단둘이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눴다고 하던데요?”
선우영은 로열젤리가 생각났다.
페일이 그걸 달라고 했지만, 선우영은 끝까지 주지 않았다.
그러자 페일이 오러로 압박해 협박했고.
그리고….
‘페일의 듀란달이 갑자기 공명하기 시작했지.’
그러자 페일이 돌연 태도를 바꿔 로열젤리를 포기하고 떠났다.
세계랭킹전에서 기다리겠단 말과 함께.
선우영은 입술이 말라갔다.
‘설마, 로열젤리 문제로 찾아온 건 아니겠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선우영은 사실대로 이야기해줬다.
미국 헌터 협회가 바보도 아니고, 조사하면 사실이 금방 드러날 거다.
“가면을 쓴 남자. 그러니까, 페일은 인벌 여왕에게서 얻을 수 있는 부산물을 찾고 있었습니다. 다만 제가 그걸 갖고 싶다고 하니까 그냥 주더라고요.”
“그렇습니까? 그게 전부입니까?”
“네.”
스미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턱을 짚으며 무언가 생각에 빠진 듯하더니, 돌연 웃음기를 보였다.
진중하다 못해 날카로웠던 눈빛이 돌연 부드러워졌다. 심중을 숨기기 위해 가면을 쓰는 듯이!
스미스는 고개를 숙였다.
“뭐, 묻고 싶었던 질문은 그게 전부입니다.”
“…….”
“아, 혹시 미국으로 귀화하고픈 마음이 생기면 이쪽으로 연락해주십시오.”
스미스는 그의 앞에 명함을 뒀다.
끼이익.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선우영은 명함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왜 미국 헌터 협회는 페일에 대해 물었던 걸까?
정말 그에게 뭔가 있는 걸까?
선우영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한번 알아봐야겠어.’
선우영은 의자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한국의 몬스터 방어부 장관 문태진이 보였다.
북한 땅을 수복할 때랑 갈라시안 약초를 구하러 일본에 갔을 때 이후 처음이었다.
그는 문 앞에서 숨을 헐떡였다.
셔츠가 땀으로 축축했다.
“서, 선우영 헌터님. 이런 곳에서 다 뵙네요.”
떨리는 목소리.
엄청 다급하게 뛰어온 티가 났다.
선우영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협회에 잠깐 볼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런데 회의실에서 나오시다니. 혹시 누군가랑 만나서 얘기라도 하셨나요?”
문태진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스미스랑 뭔 얘기했는지 캐물으러 왔구나.’
단숨에 그의 의도를 알아챘다.
뭐, 미국 헌터 협회가 자신을 따로 만났단 정보를 입수했으니, 저러는 것도 이해는 갔다.
현재 자신의 위상이 어떤지는 선우영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다.
‘문태진에게 정보를 흘린 건 아마 홍대호 협회장이겠지. 미국 헌터 협회가 나와 접촉하려고 하니, 무슨 말을 하는지 확인해보라고 말이야.’
문태진은 계속 질문을 던졌다.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차라도 하면서…….”
“스미스가 미국으로 귀화할 생각 없냐고 하던데요?”
“네?! 아니, 그 양심 없는 놈들이. 어디서 다른 나라 헌터한테 추태를!! 그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뭐라고 했을 거 같습니까?”
“설마….”
문태진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선우영은 크게 웃었다.
“에이, 장난 좀 쳤습니다. 하하하. 제가 설마 고국을 버리고 다른 나라로 가겠습니까?”
“그렇죠? 순간 놀랐네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게다가 조만간 재미있는 소식도 듣게 되실 겁니다.”
“네? 재미있는 소식이요?”
“크루그먼 길드가 세계 1위 길드가 되는 소식이요.”
문태진은 눈을 껌뻑였다.
갑자기 저 말이 왜 튀어나오냐는 표정이었다.
선우영은 그의 등을 토닥이며 건물 밖으로 걸어갔다.
* * *
크루그먼 길드로 돌아온 선우영.
그는 아까 있었던 일을 다시금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스미스는 왜 페일의 정보를 수집했을까?
미국에선 도대체 페일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선우영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페일의 과거사는 밝혀진 게 아무것도 없다.
게다가 미국은 페일을 조사한다.
선우영은 순간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설마 그 루머가 맞나?’
그는 컴퓨터 마우스를 딸깍여 동영상 사이트에 접속했다.
그는 동영상을 검색했다.
- 텍사스의 페일 음모론자.
페일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치는 음모론자가 있었다.
그는 너튜브로 자신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녹화해 올렸다. 꽤 리얼했던 이야기와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 상황으로 제법 조회 수가 높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대다수의 반응은 이랬다.
너튜브 조회 수로 돈을 벌기 위해 찍은 사기라고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얘기가 너무 허무맹랑했으니까.
선우영은 동영상을 틀었다.
- 내 이름은 마크입니다. 여긴 제가 사는 집이고 아주 중요한 이야기할 겁니다.
바스락.
동영상 속에 마크는 뒤에서 소리가 나자 움찔거렸다.
잠깐 상황을 살피더니.
이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 난 봤어요. 나, 난!! 난 농부였는데. 갑자기 밭에서 이상한 빛이 생겨서… 그래, 게이트가 생겨나더니 거기서 사람이 나왔어요.
마크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게이트에서 나왔다던 사람의 이름을 연신 불렀다.
- 페일, 페일! 페일이 게이트에서 나왔어요. 여러분 그게 세계에서 최초로 나타난 게이트입니다. 그 이후 전 세계적으로 게이트가 출몰하고 몬스터가 나타났어요!
바스락.
동영상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마크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입술에 가져다 대며 공포에 젖은 눈빛을 했다.
- 페일을 조심하세요. 놈은 다른 세상에서 왔어요. 녀석은…….
동영상은 여기서 끝났다.
지지직 소리와 함께 화면이 깨지며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주장이다.
페일이 게이트에서 나온 사람이라니.
여기에 달린 댓글 반응은 사기 치지 말라는 것이었다.
[댓글]
gol.d.chip : 저게 말이 되냐? 사람이 어떻게 게이트에 나오냐고. 아무리 돈 때문이라지만 저런 가짜 뉴스 뿌리면 좋냐?
barsin : 페일이 세계에 공헌한 게 얼마인데. 최초의 오러 각성자로 오러 수련법을 대가 없이 모두에게 가르쳐줬잖아.
grass : 페일은 전 세계의 영웅이야. 최초로 몬스터와 싸운 헌터라고!!
만약 동영상이 삭제됐다면, 혹시 진짜가 아니냐는 반응이 나올 수도 있었지만.
동영상은 삭제되지 않았다.
마크는 이후 영상을 올리지 않았고, 그저 돈을 벌기 위해 만든 영상이었다며 사과 댓글을 올렸다.
[마크의 댓글]
미안, 사실 돈이 필요해서 거짓 영상을 만들었어. 속은 사람이 있다면 정말 미안해.
선우영은 손깍지를 꼈다.
뭔가 이상하다.
‘왜 마크는 영상이 아니라 댓글로 거짓 영상이었다고 밝혔지? 댓글은 다른 사람이 아이디를 해킹하면 얼마든지 쓸 수 있잖아.’
선우영은 검지로 책상을 툭툭 두들겼다.
페일이 게이트에서 나온 인물이 아니라 정말로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어째서 과거사가 없을까?
‘물론 미국과 한국의 행정 시스템이 달라서 과거 기록이 안 남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페일은 친구조차 없었다.
애인도 없다.
가족이라 주장하는 인물도 없다.
파파라치들이 항상 쫓아다니고 조사했지만, 페일과 관련된 사람은 한 명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 흔한 스캔들이나 폭로조차 없었다.
게다가 미국 헌터 협회에서 페일에 대해 조사하는 걸 보면… 혹시 미국 정부조차 그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단 의미가 아닐까?
어쩌면.
‘마크가 했던 말이 진짜 아니야? 페일이 게이트에서 나타났던 이야기 말이야.’
선우영은 순간 어떤 가설이 떠올랐다.
‘게이트는 다른 차원과 연결된 통로일 뿐이고 페일이 몬스터한테 지배당한 세상에서 도망쳐왔다면…….’
이러면 앞뒤가 은근히 맞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