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구조
다음날.
스파이 사건은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이광해는 당연히 해고.
이후 크루그먼 길드에서 손해배상 고소까지 진행했다.
신용한과 도깨비 길드 사이에 고성이 오갔지만, 놈들은 절대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 발 빼며 꼬리 자르기를 시전했다.
하지만 신용한은 이렇게 덮을 생각이 티끌만큼도 없었다.
이광해의 스파이 사건을 공식 발표해 공론화시켰다.
도깨비 길드는 침묵했다.
신용한이 은퇴한단 사실을 까발려 크루그먼 길드의 주가를 떨어뜨릴 수 있었지만, 그랬다간 자기들이 스파이 심어놨단 사실을 인정하는 셈이다.
그래서 조용히 있었다.
그동안 신용한이 이끄는 임원진들은 신나게 도깨비 길드를 공격했다.
신용한은 자신의 사무실로 선우영을 불렀다.
“자네 활약 덕분에 스파이를 잡아냈네. 정말 수고했어.”
“아는 사람 도움이 컸습니다.”
“아는 사람?”
신용한은 관심을 보였다.
선우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박정철의 이야기를 꺼냈다.
“서포트 부서에 아는 사람이 한 명 있는데, 머리가 끝내주게 좋거든요. 스파이 잡는 법도 그 사람 머리에서 나왔습니다.”
“오호, 그렇단 말인가?!”
신용한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아래로 내려갔다. 눈빛이 환히 타오르다 어느새 부드럽게 변했다.
이광해의 해고로 임원 자리가 하나 비었다.
해서, 이번에 서포트 부서 부장인 김말단을 임원으로 승진시킬 생각이었다.
‘오랫동안 길드에서 일했고, 크게 모난 구석이 없는 친구니까.’
그리되면 서포트 부서 부장직이 공석이 되는데, 누굴 그 자리에 올릴까 고심이었다.
‘박정철이라.’
선우영이 똘똘하다 말할 정도면 보통 인물은 아니겠고.
‘한번 일을 맡겨봐야겠군.’
입사한 지 한 달도 안 된 박정철!
그 뛰어난 두뇌로 서포트 부서 에이스로 활동하더니, 이제는 부장으로 파격 승진하게 생겼다.
“선우영이! 자네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나구먼. 그런 사람을 벌써 만나다니.”
“인재는 인재를 알아보는 법 아닙니까?”
“으하하, 역시 선우영이야.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맘에 드는군.”
크게 웃던 신용한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선우영의 어깨를 두들겼다.
“뭐 어쨌든, 자네가 나서준 덕분에 스파이를 잡았으니 보상을 주도록 하지. 업적을 하나 세울 때마다 스킬석을 주기로 했으니까.”
“오오, 어떤 스킬석입니까?”
“우리 길드에서 붉은 스킬석 하나 가져가게.”
“감사합니다.”
선우영은 신용한에게 넙죽 인사했다.
* * *
선우영은 헌터 5팀에 있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책상에 스킬석 두 개를 올리고, 생기 넘치는 눈빛을 띄웠다.
한 개는 [분신] 스킬석.
여러 가지 제안이 걸려있지만,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스킬이다.
‘분신으로 상대방을 속여서 빈틈을 만들어내거나, 도망칠 때 유용하게 쓸 수 있지.’
선우영은 그걸 흡수해 곧바로 화염검기와 융합시켰다.
손등을 간질이는 촉감이 느껴졌다.
아주 극적인 변화를 느끼진 않았지만, 화염검기와 분신은 잘 융합되었다.
선우영은 주먹을 오므렸다 폈다.
‘너무 많은 능력이 융합됐네. 이젠 화염검기라고 부르기 애매한데?’
슬슬 다른 이름을 붙여줘야겠다.
강력한 화염스킬을 다양하게 구사하니, [맹화]는 어떨까?
‘어감부터가 맘에 드네.’
이제부턴 이 스킬을 [맹화]라고 부르겠다.
그다음 붉은 스킬석을 살폈다.
‘이 녀석한테선 어떤 스킬이 튀어나오려나? 사기적인 게 나오면 좋을 텐데.’
선우영은 붉은 스킬석을 흡수했다.
그 순간.
오러의 총량이 확 증가하는 감각을 맞봤다.
그걸 빠르게 사자심왕과 융합시켰다. 급격히 늘어난 오러의 총량 때문에 몸이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
“큭?!”
심장에서 통증을 느꼈다.
이윽고 고통이 사라지며 묘한 청량감이 몸을 쓸었다.
‘오러의 총량이 팍 상승했다.’
필요한 녀석이 걸렸다.
용광검은 오러를 많이 잡아먹는 녀석이다.
그래서 오러의 증강이 필요했다.
‘적절한 녀석이 걸렸군.’
안 그래도 정부와 스폰서에 오러의 총량을 올려주는 스킬석을 준비해달라고 말했던 참이다.
‘오러의 총량을 빠르게 높이면, 금방 S급이 될 수 있겠지?’
역시 스킬 융합은 사기다!
선우영은 자신의 자리에 올라온 서류를 살펴봤다.
오늘 할당된 게이트였다.
‘대체로 C급이 많네.’
그 때였다.
김철수가 헌터 5팀의 문을 벌컥 열고 위풍당당하게 들어왔다.
가슴까지 딱 피고 들어오는데.
어딘가의 개선장군이 오는 줄 알았다.
“김철수 씨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혹시나……?”
선우영이 떠보듯 말하자 김철수는 으하하 웃으며 서류를 딱 내밀었다.
그의 오러 총량이 B급에 도달했단 증명서.
그리고 오늘 B급 승급시험을 보러 간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오, 김철수 씨. 기대해도 되죠?”
“당연하죠. 이 신뢰의 이두박근을 보십시오!”
김철수는 팔뚝에 힘을 줬다.
울퉁불퉁한 알통이 튀어나왔다. 바위처럼 단단해 보이는 근육이었다.
선우영은 비어있는 조용석의 자리를 쳐다봤다.
“그나저나 조용석 씨는 어디 있습니까?”
“하하하, 천재 탱커 김철수가 앞서 나간다고 충격받아서 열심히 훈련 중입니다.”
김철수는 보디빌더처럼 포즈를 잡으며 대답했다.
하여튼 저 사람도 양반은 못 된다.
“그럼, 승급시험 보러 가보겠습니다!!”
김철수는 의기양양하게 문을 열고 나갔다. 분명 합격할 거다.
몸을 강철로 만드는 능력자니까.
선우영은 김철수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김철수가 B급이 되면 성과 경쟁에서 큰 도움이 될 거다.
선우영은 다시 할당된 게이트 목록을 살펴보았다. 대체로 C급이 많았지만. B급 게이트가 하나 있었다.
‘분신 스킬도 써볼 겸 B급 게이트에 들어가 볼까?’
선우영은 그리 생각하며 B급 게이트에 대한 정보를 읽어봤다.
‘음?’
좀 이상했다.
‘R 길드가 먼저 선점했던 게이트였지만 24시간 안에 닫지 못해서 크루그먼 길드에게 넘어왔다고?’
선우영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이거 그냥 게이트를 닫았습니다, 수준이 아니라 사람들 구조하는 상황으로 변할 수도 있겠다.
게다가.
- 게이트에서 헌터들을 구출하면 R 길드에서 보상금을 주기로 함.
금액이 얼마인가 확인해보니 꽤 컸다.
이 정도면 B급 게이트 2개를 클리어한 값과 맞먹었다.
“흐음.”
선우영은 잠시 시선을 위로 올리더니, 문뜩 박정철이 떠올랐다.
‘아, 이 양반. 고마운 행동을 해줬는데?’
여길 클리어하면 R 길드에서 크루그먼 길드에게 보상금을 줄 테니, 실적이 팍팍 상승할 거다.
선우영은 메신저로 사람들한테 게이트를 분배해줬다.
그리고.
드르륵.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허리춤에 찬 용광검의 손잡이에 손가락을 올렸다.
“어디, 간만에 몸 좀 풀어볼까.”
* * *
선우영은 B급 게이트로 향했다.
길드의 차량을 타고 이동했는데, 운전은 서포트 부서에서 나온 사람이 했다.
“선우영 부장님.”
“예.”
“이번 게이트가 좀 복잡한데 괜찮으시겠어요?”
“복잡하다뇨?”
“그게, 그 게이트에 R 길드의 후계자가 들어갔거든요.”
“후계자라면, 혹시 R 길드 회장의 자제분이 들어간 게이트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거기 회장이 우리 쪽에 게이트를 주며, 자기 아들 꼭 살아있을 테니, 반드시 구해달라고 하더라고요. 구해오면 보상금까지 주겠다고…….”
“그나저나 R 길드라. 처음 들어보는데 중소 길드입니까?”
“네. 조사해보니까 생긴 지 15년 정도 됐더군요. 업계에선 차차 자리를 잡아가는 판국인 듯싶습니다.”
“그렇습니까.”
“옆자리에 구해야 할 사람들 프로필이 있으니 확인해보시죠.”
선우영은 옆자리를 쳐다봤다.
아까부터 황색 서류 봉투가 있어서 뭔가 했는데, 구조해야 할 사람들의 인적 사항이 적힌 서류였다.
선우영은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 살폈다.
‘R길드의 후계자 남희찬. 사진을 보니 꽤 동안인데? 서른 후반이라곤 안 믿어져.’
막 B급이 된 근접 딜러였다.
그 외에 다른 사람들 프로필도 살폈다.
인원은 총 5명.
‘경력도 그렇게 나쁘진 않군. 하지만…….’
선우영은 차량의 의자에 기대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솔직히 말해 게이트에 들어간 헌터들이 살아있을 거란 희망은 없다.
이미 죽었다고 봐야 한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봐야지.’
간혹 구조대가 오기 전까지 숨어서 기다리는 헌터들도 있으니까.
끼이익.
차량은 B급 게이트 앞에서 멈췄다.
선우영은 헌터들이 살아있을 때를 대비해 각종 포션과 음식이 담긴 가방을 어깨에 멨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선우영은 서포트 부서 사람에게 손을 흔들며 게이트 내부로 들어갔다.
찝찝한 냄새가 풍긴다.
선우영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핏물이다.
붉은색 피가 사방에 흩뿌려져 있었다.
게이트에 들어서자마자 전투가 있었던 걸까. 고개를 돌려보니 몬스터 시체가 있었다.
“흐음.”
선우영은 몬스터 시체를 가까이서 살폈다.
상반신은 여자.
하반신은 뱀을 닮았다.
‘라미아.’
꽤 까다로운 몬스터다.
날카로운 독니를 가졌고, 뱀을 닮은 하반신은 단단하고 강력해 방어나 공격 용도로 사용한다.
“처음엔 괜찮았나 보군.”
선우영은 중얼거렸다. 아직까진 헌터들이 당한 흔적이 안 보였다.
오히려 몬스터들 시체에 생긴 상흔이 더 눈길을 끌었다.
‘상처를 보아하니, 그렇게 무능한 헌터들은 아닌 듯한데? 제법 실력은 있어 보여.’
B급으로서 실력이 부족하진 않다.
특히 라미아의 시체에서 마석을 채취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이상했다.
이 정도 실력이면 충분히 게이트를 닫았을 텐데.
어째서 닫지 못한 걸까?
‘도중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선우영은 헌터들의 발자취를 따라 이동했다.
다음 장소에서 또 다른 라미아들의 시체를 발견했다.
여기서부터 뭔가 꺼림칙했다.
흔적이…….
너무 심각하게 난잡하다.
첫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선 발자국과 몬스터들의 상처를 보고 어떻게 싸웠는지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흔적이 너무 중구난방이다.
‘처음엔 포메이션을 지키고 잘 싸웠던 모양인데.’
발자국과 핏자국을 따라 한 걸음씩 조심스레 움직였다. 그의 걸음이 도중에 멈췄다.
위화감이 느껴졌다.
정확히 20걸음 내디뎠을 때였다.
선우영은 뒤를 돌아보며 다시 20걸음 뒤로 돌아갔다.
‘아니야. 처음부터 다시 해보자.’
포메이션을 잘 지키고 싸웠는데…….
그래, 위화감의 정체를 알겠다.
‘발자국이 늘어났다.’
헌터들이 신었던 신발과 다른 발자국이 땅바닥에 찍혀있다.
선우영의 미간이 좁혀졌다.
‘뭐지?’
느닷없이 여섯 번째 인물이 등장했다.
서류에 적힌 사람은 다섯 명이었는데, 이 사람은 어디서 나온 걸까?
선우영은 남희찬이 R길드의 후계자란 사실을 되뇌었다.
‘설마, 후계자를 노린 습격?’
그런데 이렇게 난잡하게 처리한다고?
‘게이트 주변을 통제하던 경찰까지 속여서 들어온 것치고는….’
일 처리가 정신없다.
‘발상의 전환을 해보자.’
만약, 이 인물이 게이트에 몰래 들어온 게 아니라 원래 게이트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선우영은 흠칫했다.
‘외모와 목소리를 변화시키는 스킬.’
몬스터 중 그런 놈이 있다.
둔갑을 쓰는 몬스터.
‘도플갱어?!’
아니, 라미아가 나오는 게이트에서 도플갱어가 느닷없이 왜 등장했단 말인가.
황당하지만, 이거라면 앞뒤가 맞다.
“쓰읍.”
이거 꽤 복잡하게 일이 돌아가게 생겼다.
급작스러운 도플갱어의 등장.
놈이 타인 흉내로 헌터들 사이에 끼어 혼란을 줬다면?
‘헌터들의 포메이션이 깨졌겠지. 더 이상 몬스터를 잡기 힘든 상황이 펼쳐졌을 거고.’
게다가 서로를 믿을 수도 없었을 거다.
‘도플갱어 잡는 방법은 간단해. 게이트에 들어오기 전에 암호를 정하면 되니까.’
암호를 모르는 녀석이 도플갱어다. 그러니, 그 녀석을 공격해 잡으면 된다.
다만, 암호를 정하지 않고 게이트에 들어오면 골치 아파진다.
누가 도플갱어인지 알 수 없으니까.
“쯧”
선우영은 혀를 찼다.
여태까지 라미아가 나오는 게이트에서 도플갱어가 등장했던 적은 없다.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니 R길드 헌터들도 암호를 정하지 않고 게이트에 들어왔다가 허점을 찔린 게 아닌가.
선우영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젠장. 이렇게 되면 구해준 놈이 헌터인지 아니면 도플갱어인지 모르잖아.’
이제 어찌할까 고심했다.
그러다 도플갱어를 구분할 좋은 작전이 머릿속에서 번뜩였다.
“그거 한번 써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