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응우옌2
응우옌은 리무진을 타고 호치민 공항으로 향했다.
중후한 리무진이 도로를 달렸다.
“선우영이라.”
응우옌은 한껏 들떴다.
어마어마한 자산을 지닌 그였지만, 매일매일 반복되는 따분함은 고문이었다.
돈이 많으면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다.
여행도 가보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재미있는 공연도 볼 수 있다.
카지노 가서 100억을 하루 만에 탕진할 수도 있었다.
레이싱 경주도 참가해봤다.
돈이 있으니까,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거 다하고 나면….
‘할 게 없지.’
해볼 걸 다 해보니까, 남은 건 지루함이었다.
끝없는 지루함.
‘재미있었던 일도 반복하면 결국 익숙해지고 흥미가 떠나더라.’
그래서 마지막에 찾은 취미가 수집.
여러 가지 희귀한 물건들을 수집해 진열해놓는 건 그래도 재미가 있었다.
좀 뿌듯하달까?
내가 힘겹게 이만큼 모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그게 지루함을 좀 달래줄 뿐이지,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또 지루해졌다.
그런데 이게 웬 횡재인가.
‘스킬 융합 능력자 선우영이 베트남에 오다니.’
반드시 만나봐야겠다.
어쩌면 이 지루함을 조금이나마 덜어줄지 누가 알겠나.
끼이익.
리무진이 공항에 멈췄다.
응우옌은 차에서 내려 공항으로 들어갔다.
“저기 있는 사람, 혹시 응우옌 아니야?”
“어? 정말이네!!”
공항에 있던 베트남 사람들이 그를 알아봤다.
응우옌은 베트남의 유명인이었다.
“응우옌 씨, 싸인 부탁드려요.”
“사진 찍어도 되나요?”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부탁과 환호성이 들렸다.
카메라 플래시도 몇 번 반짝였다.
이런 일이 익숙했던 응우옌은 무미건조한 얼굴로 대응했다.
입바람으로 내려온 머리를 치우면서 말이다.
곧이어 비행기가 항공에 도착하고, 선우영과 정운이 베트남에 첫발을 내디뎠다.
“뭐야, 저쪽에 뭔 일 있나?”
선우영은 사람들도 북적이는 곳을 지긋이 바라봤다.
수많은 인파 사이로.
누군가 보였다.
새하얀 메이커 양복에 금시계를 찬 중년 남성.
‘응우옌?!’
때마침 그도 선우영을 발견했다.
응우옌는 인파를 헤치며 선우영에게 다가갔다.
“선우영 헌터님.”
응우옌이 친근하게 굴었다.
선우영은 눈을 껌뻑이며 다가오는 그를 쳐다봤다.
공항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주시했다.
“어? 선우영?”
“응우옌과 선우영이 왜…?”
대서특필 감이었다.
대부호 응우옌과 선우영의 만남이라니. 뭔가 엄청난 회동이 시작되지 않을까 싶었다.
응우옌이 능숙한 한국어로 선우영에게 악수를 청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선우영 헌터님.”
“저도 반갑습니다.”
선우영은 그의 손을 잡았다.
응우옌은 시원한 웃음소리와 함께 새하얀 건치를 보였다.
“하하하, 그나저나 베트남엔 어쩐 일로? 혹시 찾으시는 스킬석이라도?”
“아뇨, 그게 아니라요. 응우옌 씨를 만나 뵈려고 했거든요.”
“저를요?”
응우옌은 벌써 재미있단 듯이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여기서 말을 나누기엔… 사람이 많군요.”
응우옌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자기 집으로 가자고 신호를 보냈다.
“그러도록 하죠.”
선우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정운과 함께 응우옌의 리무진을 탔다.
부르릉.
중후한 리무진이 도로를 달렸다.
* * *
응우옌의 집.
선우영과 정운은 그곳 입구를 보며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참 대단하다.
“우와~!”
정운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아주 번쩍번쩍했다.
황금으로 이뤄진 대문.
험상궂은 경비원들이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커다란 대형 견도 보였다.
도둑 방지용인가 싶었다.
두드드드.
황금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선우영 일행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번엔 정원이 보였다.
아니, 이걸 정원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는 걸까?
산책길이 있고.
나무와 꽃이 있으며.
호수가 있었다.
종종 천연기념물 동물들도 보였다.
“굉장하다.”
정운은 저쪽으로 샤샤샥 움직이는 도마뱀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이 정도면 정원이 아니라 공원이다.
응우옌은 별로 대수롭지 않단 듯 보도를 걸었다.
“아, 선우영 씨.”
“네.”
“저를 만나려 하셨다는데. 무슨 일로 찾아오셨죠?”
“흑운철이 구매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응우옌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는 뒤를 돌아보며 선우영을 빤히 쳐다봤다.
“흑운철이요?”
“네.”
“오호, 제 컬렉션에 관심이 있으셨다니….”
응우옌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역시나 자신의 예상처럼 선우영은 지루한 자신의 일상에 자극을 더해줄 것 같았다.
“일단 제 방으로 가서 찬찬히 얘기를 나눠보죠.”
응우옌은 선우영과 정운을 자신의 방으로 초대했다.
아까 본 공원도 대단했는데, 방으로 들어가자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확 풍겼다.
그리고 저쪽에 황금으로 장식된 의자와 탁자가 있었다.
“앉으시죠.”
응우옌은 상석에 앉으며 말했다.
선우영과 정운은 손님 자리에 앉았다.
끼이익.
자리에 앉자마자 문이 열리며 집사가 커피와 비스킷을 가져왔다.
커피 향기가 제법 좋다.
자기가 좋아하는 커피가 눈앞에 있었지만, 선우영은 맛보고 싶단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흑운철을 얼마에 파시겠습니까?”
선우영은 본론을 꺼냈다.
응우옌은 여유롭게 커피를 홀짝이며 흘러내린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글쎄요. 딱히 팔 생각은 없습니다.”
“…….”
선우영은 역시나 이렇게 나올 거라 생각했다.
돈으로 움직일 수 있는 남자는 아니지.
“돈으론 안 된다. 그러면 뭘 원하십니까?”
“스릴, 재미, 흥분.”
응우옌은 생각할 가치도 없단 듯이 즉답했다.
선우영은 흠칫했다.
미래의 박인혁이 응우옌에게 흑운철을 구할 때, 돈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협상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이거였나?’
그러니까, 지루해 죽겠는 자길 재미있게 만들어 달란 소리가 아닌가.
박인혁은 무슨 수를 써서 그를 만족시키고 흑운철을 얻었겠지.
‘하지만 그건 무기 장인으로서 무언가 했으니까 가능했을 텐데….’
선우영은 불가능한 방식일 거다.
그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고개를 숙여 방도를 간구했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응우옌의 입꼬리가 점점 아래로 쳐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대놓고 손목시계를 보기도 했다.
흥미를 잃어간다는 행동.
선우영은 고개를 들어 응우옌을 바라봤다.
그러다 정말 우연히 무언갈 발견했다. 그건 서랍장에 장식된 사진과 무기였다.
몬스터를 잡고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응우옌의 모습.
선우영 다리를 꼬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스릴, 재미, 흥분…… 그걸 전부 충족시켜드릴 방법이 하나 있는데. 어떻게? 들어보시겠습니까?”
갑자기 여유로워진 선우영.
그 모습에 응우옌은 흥미를 보였다.
그는 고개를 앞으로 내밀며 선우영의 말에 귀 기울였다.
“그게 뭡니까?”
“스킬 융합 능력자와 대련 한번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대련?”
무표정했던 응우옌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선우영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어떻습니까? 스킬 융합 능력자와 대련해보는 건 어디서도 경험할 수 없는 일이죠. 게다가 술안줏거리로 충분합니다.”
“술안줏거리?”
“미래의 세계 No.1 헌터와 대련을 펼쳤단 이야기. 어디 가서도 먹힐 이야기가 아닙니까.”
“으하하하!!”
응우옌은 시원스럽게 웃었다.
맘에 든다.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는 스킬 융합 능력자와 한판 붙는다?
그거만큼 흥미로운 일도 없겠지.
남들한테 자랑할 수도 있고.
더군다나 선우영이 진짜 세계 No.1 헌터가 된다면, 대련 이야기는 두고두고 회자 될 거다.
응우옌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선우영은 손짓으로 가리켰다.
“좋습니다. 선우영 씨. 저랑 대련해서 이긴다면 흑운철을 드리죠.”
“그거 맘에 드는군요.”
“방심하지 마십시오. 제가 비록 은퇴했지만, 아직 A급 헌터 정도의 실력자니까요.”
응우옌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양복 재킷을 벗으며 자신의 집사를 불렀다.
“집사!!”
“네, 말씀하십시오. 응우옌 님.”
“지금 당장 연무장으로 가지. 간만에 몸 좀 움직여야겠네. 어서 준비하게.”
“알겠습니다.”
응우옌은 넥타이를 풀며 어깨를 딱 폈다.
그 어느 때보다 생기가 흘러넘치는 모습이었다.
* * *
연무장에 도착한 응우옌과 선우영.
관람석에는 정운이 있었다.
냠냠냠.
정운은 팝콘과 콜라를 먹으며 대련을 구경했다.
‘어차피 선우영 아저씨가 이기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우상인 선우영이 패배한단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응우옌은 제법 나이가 있다.
젊고 팔팔한 선우영이 좀 더 유리한 대련이었다.
터벅, 터벅.
선우영과 응우옌이 연무장으로 올라갔다.
둘 다 상체를 벗고 바지만 입은 채 대련에 나섰다.
“음?!”
정운은 고개를 갸웃했다.
응우옌이라는 사람, 나이대치고 제법 몸 상태가 좋다.
불끈불끈 근육질이다.
‘…김철수 아저씨보다 몸이 좋아 보이는데.’
응우옌은 목을 꺾었다.
“맨손 대결. 괜찮겠지요?”
“네.”
선우영은 즉답했다.
심판은 응우옌의 집사가 맡았다.
그가 손을 높이 들고.
“대련 시작!”
들었던 손을 힘껏 아래로 휘둘렀다.
뻐엉.
선공은 응우옌이 가져갔다.
그는 선우영의 안면에 주먹을 날렸다.
휘릭.
한 방 얻어맞은 선우영은 몸이 붕 떠올랐지만,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아 안전하게 착지했다.
제법 주먹이 맵다.
“은퇴하신 분 맞습니까? 주먹이 꽤 단단하십니다?”
“하하하, 누가 할 소리. 자네 딜러라고 알고 있었는데… 설마 탱커였던 건 아니지?”
응우옌이 손을 흔들었다.
웃긴 얘긴지만, 선우영을 때린 손에서 통증이 느꼈다.
엄청 단단하다.
이 정도면 탱커라고 봐도 될 정도다.
‘과연 스킬 융합 능력자! 방어력도 탱커 수준이군.’
정말 대단했다.
어떤 대련이 펼쳐질지 벌써 가슴이 두근거렸다.
선우영은 숨을 길게 들이켰다.
돌격 자세를 잡고.
뻐엉!!
무지막지한 각력을 자랑하며 빠르게 쇄도했다.
대련장이 그의 발자국 모양으로 움푹 파였다.
응우옌은 팔을 들어 방어 자세를 잡았다.
선우영은 발뒤꿈치를 회전축으로 삼아 뒤돌려차기를 선보였다.
퍼억!!
팔로 공격을 막은 응우옌.
순간 뼈가 부러지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아프다.
머리가 띵하고 식은땀이 흘렀다.
정말 짜릿했다.
견딜 수 없었던 지루함을 한꺼번에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
‘그래. 이거야.’
응우옌은 이 고통을 느끼며 깨달았다.
이 긴장감. 이건 헌터였던 시절에 느꼈던 바로 그 감정이다.
‘즐겁구나!’
늙어서 어쩔 수 없이 은퇴해야 했던 헌터 생활.
단시간만 전투가 허락된 늙은 몸뚱이.
그게 싫었다.
아직 마음은 싸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쉽게도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 스트레스가 풀려갔다.
이번엔 응우옌이 허공으로 튕겨 날아갔다.
“허억, 허억.”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손가락으로 바닥을 잡아서야 멈췄다.
“과연 대단합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스킬 융합 능력자겠죠. 정말 즐겁군요.”
응우옌의 눈빛에서 투기가 흘러나왔다.
과거 A급 헌터였던 시절이 떠올라 혈기를 주체할 수 없었다.
응우옌은 팔뚝을 바라봤다.
오른쪽이 부러져 기형적인 형태로 휘었다.
선우영은 그에게 기회를 줬다.
“항복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응우옌은 크게 웃었다.
“이대로 항복하면 아쉽죠. 아직 비장의 카드가 남아있는데요.”
응우옌의 왼쪽 팔에 오러가 집중되었다. 그건 이윽고 푸르른 빛을 띠더니…….
선우영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대련이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