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스킬융합-89화 (89/200)

#89화 거북이는 수영하고 토끼는 뛰어야지 2.

박정철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만약, 회장이 된다면 자신을 곁에 두고 싶다던 선우영.

저 정도 되는 사람이 허투루 말할 리 없다.

‘회장이라?’

하긴, 신용한 회장도 많이 늙었다.

못해도 10년 안짝으로 은퇴하겠지. 그리고 S급 헌터가 있느냐 없느냐는 길드의 향방에 큰 영향을 끼친다.

‘설마, S급이 되겠다고 나한테 선언한 건가?!’

박정철은 눈을 크게 떴다.

“제가 헌터가 아닌 임원으로 크루그먼 길드에 있기를 바라시는군요.”

“네.”

선우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정철은 이해했단 듯이 잠시 침묵했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고심하는 표정.

대형 길드의 임원도 돈은 많이 번다.

하지만 헌터만큼은 아니다.

아무리 임원이라도, 실제 중요 인력은 어디까지나 헌터였으니까.

그렇기에 길드의 직급은 일반 회사와 매우 달랐다.

박정철은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선우영의 목표는 크루그먼 길드의 회장이 되어 국제무대에 진출하는 것!!’

뛰어난 헌터들만 곁에 있다고 끝이 아니다.

행정과 운영.

그 둘도 엄청나게 중요해진다.

국제적으로 움직이는 길드, 분명 다양한 국가의 지도자를 만나게 될 거다.

누군가는 발목을 잡고.

또 누군가는 도움의 손길을 내밀 터.

그걸 잘 구별해야 한다.

하지만 게이트에 들어가 몬스터를 잡으며 그런 일을 전부 처리할 순 없다.

그러니, 그걸 대신 해줄 유능한 인재가 필요한 거겠지.

‘그리고 날 점 찍었다?’

박정철은 머리를 굴려 계산에 들어갔다.

‘국제 길드의 임원 수준이라면 웬만한 헌터들보다 더 돈을 많이 벌 거야.’

당연한 소리였다.

국제적으로 움직이니, 벌어들이는 금액 단위가 달라진다.

솔직히 구미가 당긴다.

헌터로서 재능은 없지만, 머리 쓰는 일은 자신 있다.

그래도 궁금하다.

‘어째서, 선우영이 나에 대해 이토록 자세히 알고 있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저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아십니까?”

“뭐, 소문 좀 들었습니다.”

선우영은 둘러 될 변명이 없어 대충 얼버무렸다.

박정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말뜻을 다르게 해석해, 따로 사람을 시켜 조사했단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러며 선우영이 진심으로 국제 길드를 창설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국제 길드 창설에 신경을 쓰십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선우영은 잠시 눈을 감았다.

자신의 목표.

그걸 가감하게 이야기했다.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좀 더 나은 세상??”

“네. 몬스터로부터 사람들이 안전한 세상. 사건 사고로부터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세상. 그걸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

박정철은 흠칫 놀랐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게 인간이 아니던가.

그런데 뭐라고?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니.

믿기 힘들다.

‘내 평생 그런 인간은 들어본 적이 없어.’

박정철은 고개를 저었다.

동시에, 선우영이 해왔던 선행들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아무 이득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사람들을 위해 싸웠던 사건들이 수두룩했다.

말은 거짓이 섞일 수 있다.

하지만 행동에는 거짓이 절대로 섞일 수 없다.

그렇기에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본심을 판단하란 조언이 있지 않던가.

‘설마. 진심인가?!’

박정철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부르르 떨었다.

전율이 일어났다.

쩌릿한 감각이 정수리부터 시작해 발바닥까진 아래로 쑥 내려갔다.

둔해졌던 세포가 하나하나 깨어나는 기분이다.

그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어째서일까? 선우영이 갑자기 커다랗게 보였다.

‘이런 사람이 있구나.’

자신의 부귀영화보다 남을 위할 줄 아는 인물이 실제 한다.

소설이나 동화책에서 보던 그런 기사가 말이다.

‘대단하다.’

감복할 수밖에 없었다.

선우영은 박정철을 똑바로 바라봤다.

“박정철 씨, 저한테는 당신의 뛰어난 두뇌가 필요합니다. 물론 헌터를 그만둔단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

박정철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결심이 섰다.

‘사람에겐 각자 맞는 자리가 있겠지.’

1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그걸 인정하지 못했다.

그게 자신을 괴롭혔다.

‘이젠 인정해야겠지.’

자신은 헌터가 될 수 없다는 걸.

가슴 먹먹하지만, 그걸 인정해야 비로소 자신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박정철은 길게 심호흡하고.

“선우영 씨.”

“네.”

“크루그먼 길드의 서포트 부서에 혹시 남은 자리가 있습니까?”

“네. 조만간 뽑을 모양이더라고요.”

“그렇습니까. 그러면…….”

박정철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끊었던 마지막을 내뱉었다.

“그러면 다음번엔 서포트 부서 직원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혹여나 무슨 문제 있으시면 연락하세요. 여기 명함 있습니다.”

선우영은 그에게 명함을 건넸다.

박정철을 빙그레 웃으며 면접장을 나섰다.

임원이 되기 위한 시작점.

그건 서포트 부서의 직원이 되는 것이었다.

박정철은 마음이 시원해졌다.

헌터의 길을 포기하자 괴로움이 사라졌다.

좌절 끝에 포기했다면 이렇게 상쾌한 기분도 맛보지 못했을 거다.

새로운 목표를 위한 도전.

그걸 위해 포기하는 거라 미련조차 남지 않았다.

이제부턴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을 하겠다.

‘국제 길드라!!’

앞으로는 선우영을 위해 일하겠다.

저런 숭고한 뜻을 가진 사람 밑에서 일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무엇보다 자신의 재능을 전부 발휘할 수 있으니까.

‘면접을 보러 왔는데….’

이상하게 진로 상담이 된 듯하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선우영한테 스카웃된 느낌도 들고.

‘오늘은 오랜만에 기분 좋은 날이군.’

박정철은 피식 웃었다.

* * *

이틀이 흘렀다.

선우영은 면접 본 사람들 중 20명을 간추려 뽑았다.

다들 능력과 장래가 출중했다.

전투 센스도 발군이었고.

또 어떤 사람은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이었다.

선우영은 새 출발을 기념하는 뜻에서 퇴근하고 모두와 회식하기로 했다.

메뉴는….

“와규, 꽃등심!!”

자기주장이 강한 김철수 덕분에 결정됐다.

뭐, 반대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회식하러 갔다.

모두가 자리에 앉고, 고깃집 서빙 직원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식탁에 고기와 각종 밑반찬이 올라왔다.

“부장님, 건배사 한번 하시죠!”

김철수가 한껏 분위기를 잡았다.

선우영은 술잔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우리 헌터 5팀! 오늘부터 출발입니다. 새로운 부서가 출범하는 거라 다들 노고가 많으실 겁니다. 그러니 오늘은 실컷 먹고 마시세요. 제가 화끈하게 쏘겠습니다! 우리 헌터 5팀을 위하여!!”

선우영이 건배사를 끝내고 술잔을 들이켰다.

“헌터 5팀을 위하여!!”

다들 그의 마지막 말을 따라 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일단 서로를 알아야 하니, 돌아가며 자기소개시켰다.

주특기가 뭐고.

스킬은 어떻고.

전투 스타일은 이렇다.

자신은 탱거다 딜러다.

이러저러한 정보가 담긴 자기소개였다.

차례로 시작해 조용석을 끝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자, 고기 식겠습니다.”

선우영이 그리 말하며 다들 밥 먹으라고 손짓했다.

곧이어 왁자지껄해졌다.

헌터들은 서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눴다.

전투 상성에 대한 논의였다.

일반적인 회사였다면 그냥 떠들고 놀았겠지만, 지금 이들에겐 아주 중요한 업무 자리였다.

게이트는 헌터 5명이 합을 맞춰 닫는다.

그러니 고정적으로 같이 다니며 손발을 맞출 동료가 필요했다.

지금 같은 회식 자리가 사람 구하기 딱 좋은 순간이었다.

어떤 사람은 진득하게 한 명과 대화를 나눴고, 또 어떤 사람은 이리저리 테이블을 이동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다들 기본은 됐네.”

선우영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혹여나 고정 멤버를 찾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자신이 나서서 맺어줘야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 보였다.

다들 적극적이었으니까.

그리고.

지이잉.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뭔가하고 봤더니, 박정철한테서 왔다.

[메시지]

박정철 : 크루그먼 길드의 서포트 부서에 합격했습니다.

선우영 : 박정철 씨라면 해내실 줄 알았습니다.

박정철 : 지금부터 국제 길드 설립 및 성공요건을 조사하겠습니다.

선우영 : 네, 잘 부탁드립니다.

선우영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이렇게 열정적이라니!

‘맘에 든다!’

박정철이라면 분명히 크루그먼 길드를 국제 길드로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할 거다.

그때가 되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겠지.

지략가 박정철이란 소리가.

* * *

신용한.

그는 퇴근 후 김용대를 따로 만났다.

둘은 포장마차 우동집에서 소주와 어묵탕을 먹었다.

S급과 A급 헌터.

더 좋은 곳에서 식사할 수 있었지만, 이곳은 그들에게 좀 특별난 장소였다.

“야, 용대야. 우리 여기 얼마 만에 오는 거냐?”

“10년? 15년? 나도 가물가물하다. 하여튼 엄청 오랜만이네.”

“우리의 20대 추억이 여기에 있었지.”

김용대는 과거를 회상했다.

둘 다 가난했던 시절.

소주가 먹고 싶으면 이곳 포장마차에 와서 술을 마셨다.

그때가 F등급 시절이었다.

둘 다 빚더미에 앉은 집안을 위해 원금과 이자를 갚았고, 다쳤을 때를 대비해 구매한 포션도 아껴 사용했다.

심각하지 않다 싶은 부상은 약 바르고 붕대로 감았다.

무기도 싼 걸 사용했다.

게다가 크루그먼 길드 창설자금을 모은다고 열심히 게이트를 닫았다.

진짜 어떨 때는 하루에 2번도 돌았다.

또 경영도 배우고….

등급 올리겠다고 하루 5시간만 자면서 훈련에 매진하기도 했다.

하여튼 정신없었던 20대 시절이었다.

그래서 먹고 싶은 게 있어도 꾹꾹 참아야 했는데, 정 안 되겠다 싶으면 이곳 포장마차를 들렀다.

여기 주인장도 예전엔 기운 넘치는 아저씨였는데, 이제는 흰머리가 성성한 할아버지가 다 됐다.

이젠 예전 같은 활기가 안 보였다. 뭐, 가게에 손님이 없는 건 여전했지만.

솔직히 말해 여기 음식 맛대가리 없다.

근데, 장점은 딱 하나 있었다.

술과 안주가 쌌다.

그래서 20대 때는 이곳에서만 술과 안주를 먹었다.

“얌마, 신용한! 너 여기는 왜 오자고 한 거야. 너 이렇게 감성적인 녀석 아니잖아. 뭔 일 있어?”

“뭔 일이라…….”

신용한은 술잔을 쭈욱 들이켰다.

김용대는 걱정된단 눈빛으로 그의 술잔에 소주를 부었다.

“천천히 마셔라. 기분 안 좋을 때 먹는 술은 독이다.”

“야, 대용아.”

“왜?”

“우리도 이제 늙었지?”

“새삼 그건 왜 물어?”

“그냥.”

김용대는 피식 웃으며 천장을 바라봤다.

때 묵은 붉은 천장이 보였다.

20대 시절 처음 이곳에 방문했을 땐, 참 깨끗했었는데.

김용대도 흘러가는 세월이 매우 야속했다.

“늙었지. 우리도 많이 늙었지.”

“우리가 앞으로 얼마나 헌터로 활동할 수 있을까?”

“고작 그거 생각한 거냐?”

신용한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바라봤다.

“야, 김용대. 나 솔직하게 고백할 거 있다.”

“뭔데?”

“요즘 기량이 저하되는 걸 느낀다. 내 나이도 있으니, 슬슬 은퇴를 생각하고 있다.”

“나도 몇 년 전부터 실력이 정체됐다. 그러다 처음으로 어제 기량이 저하되고 있단 걸 느꼈어.”

“어쩌다?”

“추억 삼아 5년 전에 했던 훈련을 다시 해봤는데… 그때 이상으로 힘들더라고.”

“참나. 우리도 세월 앞엔 장사 없네.”

신용한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어묵을 하나 잘근잘근 씹어먹으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6년.”

“뭐가?”

“너랑 내가 은퇴를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룬 시간.”

“…….”

“그 6년 동안 둘이서 후계자 한번 키워보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