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선우영 부장님.
다음날.
선우영은 정장을 잘 차려입고 길드에 출근했다.
또각, 또각.
구두 굽이 계단을 밟았다.
그는 4층으로 올라갔다.
4층에 마련된 헌터 5팀.
새로운 부서.
선우영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책상이 여러 개 놓여있었다.
맨 뒷자리.
사무실이 한눈에 보이는 위치에 고풍스러운 책상이 놓여있었다.
거기엔 명패가 있었다.
[부장 – 선우영.]
선우영은 의자에 앉아 사무실을 천천히 살펴봤다.
‘대형길드 부장직이라….’
이제 길드에서 권한이 나름 막강해졌다.
다른 부서 사람들과 실적을 경쟁해야 하는 상황도 속출할 거다.
‘그러면 김용대 부장님과 경쟁하게 되려나?’
선우영은 피식 웃었다.
장난삼아 생각했을 뿐, 김용대 부장님을 제쳐야 할 경쟁자로 보지 않았다.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도와주셨던 분이지 않은가.
선우영의 현재 목표는 세상을 좀 더 좋게 바꿔보잔 이상이었다.
대형길드의 부장직이면 그 목표를 좀 더 쉽게 이룰 수 있다.
‘사건사고는 한국에만 일어나지 않지.’
외국에서도 특수한 게이트나 불행한 사고로 큰 문제를 겪는다.
‘그것들도 한번 해결해볼까?’
그게 좋겠다.
선우영은 팔짱을 끼었다.
‘국제 길드.’
지금은 조금 이르지만, 미래에선 특정 국가에서 활동하는 게 아닌, 국제적으로 게이트를 닫는 길드가 등장한다.
선우영은 그걸 추진해볼 생각이었다.
‘뭐, 그러기 위해선 크루그먼 길드가 필요하지.’
여길 나가서 길드를 만들어봐라.
어느 세월에 중소길드를 대형길드로 키우고, 국제 길드로 활약할 수 있겠나.
차라리.
‘크루그먼 길드를 국제무대에 세우는 게 빠르지.’
선우영은 미래 계획을 세웠다.
크루그먼의 회장, 신용한.
훌륭한 헌터고 대한민국에 얼마 없는 S급이다.
하지만 나이가 제법 찼다.
실력을 키우긴커녕 퇴보하지 않게 유지하기도 버거운 시기였다.
‘슬슬 그때가 오겠군.’
S급 헌터 신용한과 그의 단짝 김용대.
앞으로 6년 뒤, 그들은 헌터 업계를 은퇴하고 크루그먼 길드를 떠난다.
S급, A급 헌터도 세월 앞에선 장사 없었다.
물론 신용한과 김용대는 6년 동안 후계자를 양성하고 은퇴했다.
무려 6년을 공들여 키운 후계자.
덕분에 신용한의 은퇴에도 크루그먼 길드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선우영은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엔 자신이 그 후계자 자리에 앉아볼 생각이다.
그러면 크루그먼 길드가 더욱 빠르게 국제적으로 활약할 수 있을 테니까.
‘앞으로 바빠지겠네.’
신용한의 성격상 분명 성과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을 후계자로 삼으려 할 거다.
‘뭐, 그러려면 내 실력뿐만 아니라 부하직원들도 키워야지.’
신용한의 평가목록엔 그것도 들어갈 테니까.
곧이어 헌터 5팀으로 사람들이 들어왔다.
백영희와 조용석 그리고 김철수.
학교가 끝나면 정운도 올 예정이다.
‘일단은 이렇게 5명인가.’
뭐, 오후에 있는 면접과 부서 이동을 원하는 헌터들을 뽑아 자리를 채울 예정이다.
상자에 자기 물건 잔뜩 챙겨온 김철수는 햇볕이 드는 자리에 얼른 앉았다.
“오우, 여기 볕이 잘 드네. 여긴 제 자리입니다.”
“아, 제일 좋은 자리를!”
조용석은 선수를 빼앗겼단 표정으로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김철수는 옆자리 책상을 두들겼다.
“옆자리도 괜찮아요!! 여기도 조금은 햇볕이 드니깐요.”
조용석은 어쩔 수 없이 김철수의 옆자리에 앉았다.
백영희는 어느 자리에 앉을까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김철수가 손을 흔들었다.
“백영희 씨!! 백영희 씨도 우리랑 붙어서 앉아요!”
그녀는 대답을 머뭇거렸다.
“아, 저는….”
그러다 드디어 찾았단 듯이 어느 한자리에 앉았다.
“저는 여기가 좋아요,”
“그렇습니까?”
김철수는 백영희가 떨어져 앉자 서운한 듯했다.
그녀는 슬쩍 선우영을 바라봤다.
고개만 살짝 돌리면 선우영과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는 자리였다.
백영희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게 들키지 않게 고개를 숙이고 짐을 풀었다.
선우영은 남은 책상을 바라봤다.
20개 정도 남았다.
그렇다는 건, 앞으로 새로운 인원이 스무 명 정도 충당된단 소리.
‘괜찮은 사람들이 지원했으면 좋겠다.’
그는 길드 메신저에 접속해 지원자 목록을 살폈다.
‘총인원 100명인가.’
하나하나 이력서를 보며 꼼꼼히 따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음?!”
의외의 인물이 자기 부서에 지원했단 사실을 깨달았다.
* * *
어느덧 오후가 됐다.
식사를 마친 선우영은 양치질을 끝내고 면접실에 도착했다.
의자를 뒤로 빼서 앉았다.
책상에는 지원자들의 이력서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괜찮은 경력자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선우영의 이목을 끈 인물은 하나였다.
‘박정철.’
D급 헌터로, 탱커 경력이 10년이나 되는 인물이었다.
중소길드에 몸담았다가 이번에 지원했다.
‘설마 이 양반이 지원했을 줄이야.’
꽤 놀랐다.
박정철은 미래에서 유명했다.
그게 헌터로서가 아니어서 안타깝지만 말이다.
솔직히 말해 박정철은 오러나 무예에 재능이 별로 없었다.
평범한 수준.
‘그러니 경력이 10년째인데도 D등급이지.’
저게 원래 정상적인 범주다.
선우영의 곁에 워낙 재능 넘치는 사람들이 많아서 금방금방 등급이 올라갔던 거지, 보통은 저런다.
‘박정철의 진짜 재능은 따로 있지.’
책략가 박정철.
그의 재능은 머리를 쓰는 일이었다.
선우영은 그를 미리 포섭해보잔 생각이 들었다.
길드의 운영은 헌터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다.
정부로부터 게이트를 따오는 서포트 부서.
몬스터를 쓰러뜨리고 마석을 챙기는 헌터.
그리고 길드의 경영을 책임지는 임원들.
길드의 운영체계는 일반적인 회사와 다르다.
게이트를 따오고 헌터들을 돕는 게 서포트 부서라면, 그들보다 위에 있는 임원들은 전반적인 운영과 외압을 막는다.
외압의 종류는 다양하다.
거짓 기사, 모함, 사건 부풀리기 등등.
이런 외압은 다른 대형 길드들한테서 들어온다.
이유야 뻔했다.
‘그런 식으로 서로를 견제하는 거지.’
그걸 제대로 맞받아치거나 방어하지 못하면 길드의 이미지가 만신창이로 변한다.
그렇게 되면 정부로부터 게이트를 따오기가 힘들어진다.
그 피해는 헌터들의 이직으로 번져 길드가 휘청일 수 있다. 그러니 대형길드에는 반드시 훌륭한 임원이 필요했다.
선우영은 박정철의 이력서를 찾아 그의 사진을 쳐다봤다.
‘이 사람이 그쪽 분야로는 최고란 말이지.’
미래의 박정철은 자신이 헌터로서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은퇴한다.
그리고 대뜸 미국으로 건너간다.
거기까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의 행보는 특별했다.
미국 하리온 길드의 서포트 부서.
그곳에 취직했다.
하리온은 세계에서 제일 잘 나가는 길드다.
세계 No. 1 헌터. 페일.
그가 세운 길드였으니까.
박정철은 그곳에서 두각을 나타내나 싶더니, 임원까지 파격 승진한다.
그때 구설수가 좀 나왔었다.
헌터로 실패한 한국인 임원.
그가 잘할 수 있냐는 이야기가 많았다.
한국에서도 뉴스가 나왔었다.
하지만 박정철은 사람들의 우려를 단숨에 잠재우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험담은 단숨에 찬사로 바뀌었다.
게다가.
‘국제 길드의 창설.’
세계랭킹 1위 헌터 페일이 이루고 싶었던 숙원을 그가 옆에서 도와줬다.
미국 정부는 국제 길드 창설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게 만들어졌다간 세계랭킹 1위 헌터 페일이 해외로 게이트 닫으러 나갈 테니까.
여론도 좋지 않았다.
‘그걸 반전시킨 인물이 박정철이었지.’
선우영은 들고 있던 이력서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자, 이 양반을 어쩐다?’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고 싶다.
당연했다.
이런 머리 좋은 사람을 누가 놓치고 싶겠나!!
문제는…….
‘이 양반이 헌터로 길드에 지원했단 거지.’
고심이 많다.
헌터로 고용해서 머리 쓰는 행정가로 키우면?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선우영은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걸 누가 좋아하겠나.
더군다나, 헌터로서 뽑았으면 몬스터를 잡아야지!
머리 쓰는 일에만 쓴다?
아니, 중요한 업무에선 배제하고 잡무만 시키는 꼴이 아닌가.
선우영은 이마를 짚었다.
‘그거잖아. 길드에서 자진 퇴사시킬 때 쓰는 방식.’
결코, 좋은 꼴이 아니다.
그때였다.
반쯤 열려 있던 문틈으로 김말단이 보였다.
“어? 김말단 부장님!”
선우영이 그를 불렀다.
복도를 지나가던 김말단이 그를 발견했다.
“어, 선우영 부장님!”
김말단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선우영의 맞은편에 놓여있는 의자들을 쳐다봤다.
“면접 준비 중이셨습니까?”
“네, 그러니까……. 1시간 정도 남았네요.”
“아이고. 바쁘시겠습니다.”
김말단은 그리 말하며 팔과 옆구리 사이에 끼운 서류를 고쳐 잡았다.
선우영은 서류에 눈이 꽂혔다.
분명히 봤다.
서류 앞머리에 쓰인 신입사원 모집이란 글자가!
“서포트 부서도 신입사원 모집합니까?”
“네. 기존에 일하던 직원이 다른 길드로 이직해버렸지 뭡니까.”
“김말단 부장님도 바쁘시겠습니다.”
“피차일반이죠. 아! 그러면 저는 일이 있어서 그만 가보겠습니다.”
“네. 오늘도 수고 많으십니다.”
문을 열고 나가는 김말단을 보며 선우영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턱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서포트 부서도 사람을 뽑아?”
서포트 부서에서 두각을 보인 사람이 임원으로 승진해 길드 운영에 큰 틀을 관리한다.
‘이거 잘만하면 일이 쉽게 풀리겠는데?’
* * *
면접이 시작되었다.
선우영은 사람들을 맞은편 의자에 앉혔다.
이런저런 질문이 오갔다.
박정철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면접을 보는 일도 소홀히 할 순 없었다.
이들 중 몇몇은 부하직원으로 함께할 사람들이니까.
뭐, 지원자들 경력은 만만치 않았다.
다들 5~8년 정도 경력이 있다.
대다수 중소길드에서 실력을 키워온 사람들이었다.
경력이 많은 사람들답게 답변도 시원시원했고, 맘에 드는 인물들도 많았다.
‘뽑을 사람 간추리려면 그것도 일이겠는데?’
선우영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번.
박정철의 차례가 왔다.
나머지 사람들은 면접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간 뒤라, 면접장에는 선우영과 박정철뿐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박정철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인사했다.
선우영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박정철 씨?”
“넵!”
“D급 헌터시네요? 경력은 10년?”
“그렇습니다. 다분한 경험으로 크루그먼 길드에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그렇군요.”
선우영은 그리 말하며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길드에게 필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훌륭한 헌터라 생각합니다.”
“헌터만 필요한 건 아니에요. 서포트 부서도 필요하고. 운영을 책임져줄 임원분들도 중요하거든요.”
“아, 넵!”
박정철은 우렁차게 소리쳤다.
선우영은 덜덜 떨고 있는 그의 손을 바라봤다.
‘너무 긴장하는데?’
좀 심하다 싶을 정도다.
뭐라고 할까.
숨이 턱턱 막히는 절박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전에 계셨던 길드는 왜 퇴사하셨습니까?”
“아, 그게….”
박정철은 말을 더듬었다.
사실, 전에 다녔던 길드에선 능력 부족으로 쫓겨났다.
나이도 이제 슬슬 서른 중반.
젊었을 때면 모를까, 이 나이가 됐는데 경력 하나 없으면 면접도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서 길드에 다녔던 경력을 적었다.
박정철은 고개를 푹 숙였다.
선우영이 전에 다녔던 길드로 전화 한번 걸면 자신이 어땠는지 전부 알 거다.
‘능력 부족으로 쫓겨났단 얘기를 들으면 분명 떨어지겠지.’
이번에도 재취직은 글렀다.
애당초 몸 쓰는 일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래도 헌터가 돈을 가장 많이 버는 직종이니까, 어떻게든 업계에 들어가려고 발버둥 쳤다.
길드에서 해고당하지 않으려고 꾸역꾸역 버텼다.
근데 한계다.
이젠 도저히 안 되겠다.
크루그먼 길드에 오기 전에, 다른 곳에서 25번 면접을 봤다.
무려 25번이다.
그걸 전부 탈락했다.
‘내가 딱 여기까지라는 뜻이겠지.’
그래도 헌터로 일하며 모아둔 돈이 있으니, 어디 한적한 곳에 가게라도 차려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번 면접도 포기했는데….
“이거 아쉬운데요?”
“예?”
“저는 자존감 박살이 나서 고개 숙이는 사람 안 좋아합니다.”
“….”
“보세요! 자존감이 낮으니까, 좋은 머리가 딱딱하게 굳어서 아무것도 못 하잖아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박정철은 눈을 껌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