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재벌 3세-191화 (191/202)

< 96. >

96.

인간은 이따금 일탈의 꿈을 꾸곤 한다.

사회적으로 길러진 인간에게 어떤 정형화 된 틀을 벗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짜릿한 경험인 것이다.

천우는 지금 그것을 실컷 만끽하고 있었다.

부아아앙!

“으하하하!”

달리는 곳이 곧 길이었고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달리고 달릴 뿐, 그 어떤 규율도 없었고 그 어떤 규칙도 없었다. 온 세상에 천우 한 사람만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을 만끽하다보니 어느 새 문을 통과한 이후였다.

“으음, 약간 허무하긴 하네.”

더 달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지금과 같은 일탈이야 언제고 다시 만끽할 수 있었다.

천우는 전송장치에서 내려 압축을 해제하였다.

그러자, 그의 앞에는 어느 새 복잡한 서류들이 굴러다니는 창고형식의 도서관이 보였다.

이 도서관을 지나다니다보니 한 가지 드는 생각이 있었다.

“···우리 가문의 도서관이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최 씨 일가 저택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도서관의 형식과 이곳의 형식이 거의 일치했다.

아슈리아 가문은 중간에 최가 상단에 합류한 세력으로서 일종의 자금세탁 및 운용을 해주던 관리인이었기에 그들의 영향을 받을 리는 없을 것이라고 천우는 생각했었다.

허나 이곳에 와서 그는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저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저들이 우리의 영향을 받은 것이구나.”

최가 상단을 상징하는 흰 수염고래의 무늬, 그리고 앨버트로스를 형상화 한 조각상들까지.

비록 인터넷 세상이지만 그들은 자신들만의 홈페이지 배경을 그리 꾸며놓고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제야 천우는 저들이 어째서 돈을 빼돌리고 스스로 세상의 주인이 되고자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슈리아 가문은 최 씨 일가를 동경하여 아예 그 안주인이 되고 싶어 했었던 것이다.

“정말 욕심이 끝도 없는 것들이로군.”

지금의 최 씨 일가는 과거에 선인들이 목숨을 걸고 비단길을 건너면서 일군 것이었고 그들은 객지에서 사망하여 변변한 무덤조차도 없었다.

자신의 운명은 객사라는 것을 알면서도 행상하면서 살았던 최 씨 일가를 통째로 빼앗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니, 천우는 화가 머리끝까지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이놈들은 정말로 악의 축이로구나. 사회의 암적인 존재야.”

반드시 없애야만 이들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었다.

천우는 회선으로 들어가는 방호벽을 뛰어넘은 후, 곧바로 유선과 이동통신 회선을 동시에 장악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이들이 대단한 사람들이라곤 해도 유선통신과 이동통신까지는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기껏 한다는 것이 신호의 암호화였지만 그렇게 코드를 분할한다고 해도 천우가 그것을 뚫지 못할 리는 없었다.

천우는 CDMA와 TDAM, 두 가지를 모두 사용하는 이들 회선을 아주 능수능란하게 점령했다.

회선이 점령되자, 그의 귓전으로 베네트 아슈리아의 통화내용이 전부 들려왔다.

“이번 회의가 골드인 호텔에서 열린다고···? 이제는 아예 베를린 한 복판에 범죄자들을 모아놓겠다는 뜻인가. 아주 다들 미쳤군 그래.”

-상부의 지시다. 네 백부께서 내리신 명령을 거역할 셈인가?

“거역한다고 거역할 수 있는 인물이셨나? 골드인의 대부를 말이야.”

천우는 골드인의 대부라는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 너무나도 궁금했었다.

만약 이 대화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천우는 그토록 베일에 싸여 한 번도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던 흑막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는 약간 흥분했지만 차분하게 베네트 아슈리아가 가는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저 그 속내가 궁금할 뿐이다. 도대체 백부께서는 굳이 이렇게 세력을 자랑하려고 하시는 걸까. 골드인은 안 그래도 이 세상 최강의 범죄조직이 아니던가.”

-뭔가 착각하고 있군. 아슈리아 가문은 범죄 집단이 아니라 그들을 아우르는 대부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인다면 바로 뜯어 먹혀 사라지는 것이 이 바닥 생리인데, 그들에게 매일 물렁물렁한 짓이나 하면서 버틸 수 있을 것 같나?

“···짐승들의 세계란 말인가.”

-약육강식의 세계. 그쪽이 제일 좋아하는 말 아니야?

“그것이 진정한 자연의 섭리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그래서 며칠 전에 그쪽의 충신들이 죽어나간 건가? 권총으로 대가리를 뚫어버려서 아주 그걸 치우는데 혼이 났었다고. 알고는 있는 건가?

“큭큭, 그게 바로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라는 거야.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세상, 당신은 그 약육강식의 논리에 의해 그 자리까지 간 것이라고.”

-···미쳤군.

천우는 얼마 전, 스위스 베른에서 일어났었던 권총 살인사건에 대해 익히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신원미상의 인물이 피해자 네 명에게 권총을 갈겨 죽인 후, 그 시신을 취리히 한복판에 버린 엽기적인 사건이었다.

총상을 입고 죽은 것이라는 것 말고는 알아낼 수도 없는 아주 깔끔한 살인과 그 처리방법.

경찰들은 그저 고개를 가로저을 뿐, 다른 정보는 찾아내지도 못했다.

그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 바로 베네트였다니, 천우는 경악하고 말았다.

‘이놈들 전부가 미친놈들일 것이라곤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막 나가는 새끼들일 것이라곤 아예 생각도 못했어.’

-그게 바로 이들 조직이 존립해 올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닐까요?

세상에는 수많은 조직이 있고 그 조직의 전통은 내부 규율을 조율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곤 한다.

허나 그걸 살인과 광기로 가득 채운다는 것은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천우는 그제야 이들 가문이 나치와 일제를 지원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세삼 절감하게 되었다.

“···일단 백부님께서 시키는 대로 움직이기는 할 테지만 두 번은 없어. 나도 그분이 끌면 끄는 대로 따라갈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만약 그분께 반항하는 날에는 당신의 가족들이 변사체가 될 수도 있어.

“후후, 변사체라. 아무리 짐승도 가족은 죽이지 않아.”

-혈족은 죽이지 않지. 하지만 자신의 친 핏줄이 아닌 사람이라면?

“···뭐?”

-그쪽의 아내와 그 처가의 사람들 모두는 솔직히 진짜 가족이 아니지 않나.

“다시 한 번 그딴 소리를 지껄이면 모가지를 비틀어주겠어!”

-나는 당신이 걱정되어 한 소리 해 준 것뿐이야. 그래도 죽이겠다면 어쩔 수는 없지.

보통의 살인자들은 타인에게 느끼는 감정과 가족에게서 느끼는 감정이 완전하게 다를 수 있다고 한다.

제 아무리 잔악한 살인마라곤 해도 자기가 낳은 친자에 대해선 엄청난 애착을 느끼게 되는데, 그 대상이 아내인 경우도 있었다.

베네트 역시 자신의 아내와 자식에 대한 애착은 상당히 깊었다.

헌데 그건 이 집안 특성인 모양이었다.

-당신의 아들과 딸 걱정은 하지 마. 그분께서 자기의 혈족을 얼마나 아끼는지는 당신이 더 잘 알 거 아니야?

“빌어먹을···!”

베네트가 저런 반응을 보인 것은 상당히 의외였다.

허나 천우는 이것으로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저 두 숙질은 그야말로 애증의 관계구나.’

-서로 혈육이라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뿐이지 사실상 같은 편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상태네요.

‘만약 그렇다면 이진아 씨의 말처럼 우리가 저들의 주식을 빼돌려서 분탕질을 해준다면 한 방에 상황이 정리될 수도 있겠는데?’

-그녀가 생각보다 머리가 좋아요. 앞으로 계속해서 그녀와 협력하는 것이 좋겠어요. 무서운 사람을 멀리 보내는 것보다는 내 옆에 두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한 법이잖아요?

‘허참, 네가 걱정이라는 걸 다 하는구나.’

-저도 주인님이 성장하는 만큼 성장합니다. 이제는 인간의 감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고요.

AI라는 존재는 상당히 신묘하면서도 때론 이해하기 버거울 정도로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창조한 피조물이지만 때로는 그들이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을 때도 있다.

특히나 마샤와 같은 경우엔 적으로 만날 경우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면모가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샤가 천우를 배신할 경우의 수는 0%라는 점이었다.

베네트의 통화는 계속 감청되었다.

“···그래서, 날짜는 언제라고?”

-일주일 후야. 그때 베를린에서 보자고.

“베를린이라.”

베를린은 역사적으로도 상당히 많은 의미를 가진 곳이다.

나치의 시작이 독일이었던 만큼 베를린은 제국주의의 상징이기도 했었지만 동독과 서독이 통일 될 때엔 자유의 상징이 되기도 했었다.

한 때는 저곳이 기술력의 집약체로 불리기도 했었고 지금은 나치의 잔재를 없애는데 앞장서는 독일 법의 상징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런 독일 한 가운데 범죄자들이 모인다는 것은 상당히 복합적인 의미가 있었다.

천우는 날짜와 장소를 알아낸 후, 그것을 이진아에게 전달해주었다.

그는 아이슬란드에 가만히 앉아서 일을 진행했었는데, 밥을 먹거나 운동을 하면서도 감청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저녁을 먹자마자 정보를 얻은 천우는 그녀에게 직통으로 소식을 전했다.

“일주일 후, 베를린에서 모인답니다. 일주일 후에 골드인 호텔에서 모인다는데, 어딘지 아십니까?”

“골드인 호텔이라. 글쎄요. 그런 호텔이 있었던가?”

천우는 그 즉시 골드인 호텔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보기로 했다.

그는 그저 단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검색이 가능했기 때문에 굳이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나노머신은 부지런히 움직여 천우가 원하는 정보를 가져다주었다.

“베를린 동부에 오래된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은 폐허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름은 없지만 옛날에는 그곳이 골드인 호텔이라고 불렸답니다.”

“옛날에는 영업을 했었던 모양이죠?”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운영을 했었지만 지금은 아니랍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방치되어 왔던 것으로 보이네요.”

“으음, 예전에 저들이 항상 접선장소를 바꾼다는 것을 들은 이후에 나름대로 한 번 알아본 적이 있었어요. 헌데 뒤를 잡기가 상당히 어렵더군요.”

“아마도 그건 저들이 이름도 없는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네요.”

“만약 그렇다면 인터폴이 잡고 싶어도 꼬리를 잡기 힘들겠네요.”

골드인에 대한 정보는 상당히 제한적이다. 심지어 인터넷을 뒤져도 그들에 대한 얘기는 거의 한 줄이 될까 말까 할 정도로 짧았다.

천우가 만약 그들의 뒤를 잡는다면 아마도 최초가 될 것이었다.

“그럼 매도타이밍은 일주일 후로 잡으면 될까요?”

그의 물음에 이진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들에게 혼란을 줄 시간도 있어야하니까 이틀 후로 잡는 것이 좋겠어요.”

“으음, 이틀 후라.”

그녀는 천우에게 팩스를 발송해달라며 USB를 건네주었다.

“이게 뭡니까?”

“이 안에 있는 계좌로 매각해서 생기는 이익을 모두 보내주세요. 그런 후, 이 계좌를 통해서 저들이 가지고 있는 계열사들로 각각 돈을 보내주는 거죠.”

“아아, 그러니까 서로 주식을 가지고 장난쳤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주자는 겁니까?”

“으음. 하지만 저들이 바보도 아니고 그 정도면 충분히 눈치를 채지 않을까요?”

“당연히 의심을 하겠죠. 하지만 너무 당연해서 저들이 속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때론 믿기 힘들 정도로 당당한 것이 최고의 속임수가 되는 경우도 있잖아요?”

“으음!”

천우는 그녀가 건넨 USB를 받아서 그 안의 내용을 읽어보았다.

USB안에는 스위스 은행의 계좌가 들어 있었는데, 그 계좌의 예금주는 바로 골드인의 합법적인 메인계좌의 이름이었다.

< 96. > 끝

ⓒ (19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