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2) >
92(2)
아나스타샤 화이트, 혹은 아냐 화이트로 불리는 그녀가 천우 부부를 맞이했다.
그녀는 아이슬란드 한 복판에 있는 지하시설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인터넷을 비롯한 각종 서적들이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
규모는 천 평 남짓이었지만 그중에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공간은 15평도 채 되지 않았고 나머지 모든 시설들은 지식과 정보를 위한 인프라들이었다.
“아냐 화이트입니다.”
“주지스님께는 대략 말씀을 듣기는 했습니다만, 실제로는 처음 뵙네요.”“···초면에 스님 얘기를 꺼내시다니. 저를 자극하고 싶었던 모양이죠?”
“그렇게 생각되셨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스님께서 잘 지내고 계시다고만 알려드리려던 것뿐입니다.”
“그런 의도였다면 다행이네요. 저는 당신이 적이라고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릴 것 같았거든요.”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저는 당신의 얘기를 진심으로 듣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뿐이지, 적대심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렇군요···. 아무튼 그분들은 잘 계신다고요?”
“네, 물론입니다.”
그녀를 길러준 절간과 그 승려들을 향한 마음은 아직 변함이 없는 것 같았다.
허면 도대체 그녀는 왜 증발해 버린 것일까.
천우 부부와 일리나는 거실로 사용되는 넓은 홀에 앉아 술잔을 받았다.
아냐 화이트는 그 사정에 대해 솔직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천애 고아였어요. 게다가 벽안이라서 어딜 가도 도깨비 취급만 받을 뿐이었죠. 흑발의 벽안, 흔한 인상은 아니잖아요?”
한국은 단일민족 국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외국의 핏줄이 전혀 섞이지 않은 것은 또 아니었다.
동아시아의 정세가 국제와 맞물려 돌아가지 않았을 리 만무했고, 비단길이나 몽골제국의 유럽 공략 후의 고려 침공 등으로 피는 충분히 섞일 수도 있었다.
허나 흑발의 벽안은 상당히 드문 경우이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자칫 혼혈아 취급을 받을 수도 있는 문제였다.
“커서도 나는 사람들과 섞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과감하게 탈출을 감행했죠. 당시의 나에겐 다름 사람들에겐 없는 약간 특이한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돈 버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거든요.”
“특이한 재능이요?”
“금융범죄요.”
“아아!”
“원래 재능이라는 게 잘 쓰면 축복이지만 잘못 쓰면 재앙이 되는 거잖아요? 나는 축복보다는 재앙을 일삼고 다니는 사람이 되어버렸어요.”
“으음!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그녀는 눈시울이 약간 빨개져서 천우를 쳐다보았다.
그 눈동자에는 왠지 모를 질투와 원망이 담겨 있었다.
“···당신과 나는 같은 재능을 가졌어요. 그 힘의 정도에선 당신이 앞서지만 나도 뒤처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우리에겐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어요. 성장환경이요.”
“아아!”
“당신은 존경을 받아도 이상할 것 없는 조부모와 대단한 부모 슬하에서 자라났고 심지어 진외조부는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었죠. 게다가 친가는 또 어때요? 당신 정도면 현대판 귀족이잖아요.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어요. 현대판 천민, 저는 그런 사람이었다고요.”
“···미안합니다.”
“당신이 미안할 건 아니죠. 이놈의 빌어먹을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은 걸 당신의 탓이라고 하겠어요?”
어쩐지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천우였다.
그런 천우에게 그녀는 자신이 왜 골드인에 들어갔는지 설명했다.
“예전에 한 번은 당신에게 크게 당한 적이 있어요. 렉스테리아가 곡물로 장난을 친 후, 로이 조로스를 통해서 외환위기를 일으키려 했었죠. 그 당시, 나도 아직 소녀였지만 당신은 더 대단했어요. 나는 그때 로이 조로스의 움직임을 파악하곤 대략 4년 동안 모은 돈을 전부 다 밀어 넣었죠. 하지만 결과는···.”
“참패였군요.”
“정말 하나도 남은 것이 없었어요. 심지어 신용대출에 사채까지 끌어다 쓰는 바람에 죽기 일보직전까지 갔었죠. 다행이도 저는 어린 나이라 모든 것을 차명으로 진행 했었고, 그 바람에 살아남았어요. 하지만 한 가지 착오가 있었어요. 돈을 빌린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렉스테리아와 연관되어 있었다는 것이죠.”
“아아!”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몰라도 그녀는 천우가 일으킨 아시아 경제위기 방어전에서 참패하여 렉스테리아의 채무자가 된 것이었다.
그 악독한 집단이 그녀를 가만히 놔두었을 리가 없었다.
“당연히 신체포기각서를 쓰고 이곳저곳 술집을 전전했어요. 눈동자가 파란색이라 매음굴에선 아주 잘 먹히더라고요.”
“······.”
“한 몇 달은 역전 뒷골목, 몇 달은 섬, 심지어는 염전에 새우 잡이 배까지 가봤어요.”
“빌어먹을 놈들!”
“으음, 그놈들이 나쁜가요. 당신에게 당한 내가 바보지.”
이정도면 그녀가 천우를 미워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허나 그녀는 일반인의 사상과는 생각이 약간 달랐다.
“당신이 미웠지만 생각을 바꾸었어요. 우연치 않게도 당신의 능력을 따라잡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거든요. 유리시아 가문에서 저를 양녀로 들이겠다고 했어요. 빚을 갚으려고 주식으로 틈틈이 돈을 벌었는데, 그게 대박이 터지는 바람에 저쪽에서 관심을 보인 거죠.”
“으음,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운이 좋죠. 당신, 매음굴에서 돌고 돌다가 건강이 나빠지거나 더 이상 몸을 팔 수 없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바로 통나무 장사에게 끌려간다고요.”
“······!”
“저는 운이 나쁜 다른 여자들과는 달리 유리시아의 눈에 들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이고요.”
허나 그녀는 유리시아 가문에서의 삶은 끔찍한 고통이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죠. 유리시아 가문에 들어가자마자 경영수업을 받았지만, 그와 함께 마약도 함께 배웠어요. 그것도 중독성이 아주 강력한 헤로인으로 말이죠. 그들의 말에 따르자면 천연재료로 만든 마약이라 무슨 몸에 해가없다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요?!”
“알아요. 그냥 그들이 지껄이는 조크였으니까요. 아무튼 간에 나는 그렇게 마약의 노예가 되어버렸어요. 유리시아 가문이 카르텔을 소유하고 있는 한, 마약은 넘쳐났으니까요.”
운이 좋다가도 없었다고 할까. 그녀의 인생 굴곡은 어지간한 사람들은 명함을 내밀지 못할 정도였다.
“마약에 절어서 몇 년을 살았어요. 그러면서 금융범죄를 모방하고 그것을 계량하는 알고리즘을 개발해냈어요. 그들은 나의 알고리즘을 프로그램에 적용시켰고, 그것이 슈퍼컴퓨터에 장착되어 전 세계를 휩쓴 거죠.”
“그렇다면 당신은 정말로 천재였던 거네요?”
“내가 말했잖아요. 그냥 재앙이었다고.”
“그런데 그곳을 어떻게 나오게 된 겁니까?”
“아마 그대로는 죽었을 거예요. 마약에 중독되어 죽었거나 머리를 혹사당해서 그대로 백치가 되어 통나무 장사에게 팔려갔거나.”
“그럼 목숨을 구하기 위한···.”
“일종의 도망? 뭐, 그런 것이었죠.”
“으음, 그랬군요.”
“아무튼 간에 나는 저들의 범죄 알고리즘을 만들어주었고 그 자금들이 어떻게 운용되는지 자세히 알고 있어요. 그래서 당신과 함께 한다면 저들을 깨부술 수 있는 것이죠.”
“제가 뭘 어떻게 도와드리면 됩니까?”
“당신의 두뇌, 영향력, 그리고 가문이요.”
“머리와 영향력이라.”
“당신은 스스로 의도하였던 하지 않았던 간에 미국과 영국 등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고 있어요. 게다가 사프타와 라스타에도 절대적 영향력을 행하사고 있죠. 한마디로 저들이 어둠에 한해선 거의 유엔 수준이라면 당신은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 내가 당신과 손을 잡는다면···.”
“저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준비된 셈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골드인을 철저하게 부수는 일뿐이었다.
천우가 그녀와 조우했을 무렵, 마샤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주인님, 대규모 업데이트가 가능한 환경을 만났습니다.
‘업데이트?’
-이곳에 있는 슈퍼컴퓨터 말입니다.
‘아아! 저게 너와 연결이 될 수 있는 거야?’
-물론입니다. 업데이트에 시간이 조금 걸릴 수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럼 진행하자고.’
-그러기 위해선 주인님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어떤 승인인데?’
-유무선 인터넷 및 데이터통신망에 연결할 수 있는 어플리케이션 구축입니다.
‘이, 인터넷?!’
-지금까지는 저장장치에 각인된 내용만 사용이 가능했다면, 이제는 인터넷 연결망이 잘 구축되어 있는 시대에 들어왔기 때문에 외부와 연결해서 인터넷 연동이 가능해졌습니다. 심지어 어플리케이션만 있다면 무선으로 인터넷에 연결하고 대규모 해킹도 가능할 겁니다.
‘나는 생명체인데 그게 가능한가?’
-저는 생명체가 아니니 가능합니다.
‘아아! 그렇지, 너는 나노머신이었지!’
세포수와 맞먹을 정도로 증식한 나노머신이었다.
천우의 신체가 성장하고 강력해질수록 나노머신의 성능과 그 숫자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정보의 바다를 지배하는 하나의 축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진화의 결정판은 주인님께서 무한의 공간인 인터넷의 지배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번 업데이트가 실행된다면 그것이 가능해질 겁니다.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데?’
-대략 8시간 남짓입니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해보자고.’
-다만, 상당한 고통이 따르실 겁니다. 뇌를 산채로 갈라서 수술하는 정도의 고통이라고나 할까요?
‘술을 진탕마시고 잠들게.’
-부디 깨지 않고 끝까지 잠들 수 있도록 신께 빌어보시기 바랍니다.
‘···좋아, 한 번 해보자!’
그날 밤.
마샤는 극도로 발달된 천우의 뇌를 100% 이용하여 업데이트를 시작하였다.
아니, 이번에는 업데이트라고 하기보다는 일종의 진화라고 할 수 있었다.
-어플리케이션 업데이트를 시작합니다. 뇌기능 100% 가동으로 인하여 뇌에 과부하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업데이트가 시작되자마자 천우는 깨질 듯 한 두통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으, 으으윽!”
다행이도 모두가 잠든 시간에 시작된 업데이트로 인하여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은 아무도 보지 못할 것이었다.
천우는 이를 악물었다.
만약 여기서 그가 비명이라도 지르게 된다면 시설에 있던 누군가는 그의 상태를 심각하게 여겨 병원으로 데리고 가려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업데이트 50% 완료. 뇌기능을 120%까지 개방합니다.
‘뇌기능을 20% 오버한다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진화는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될 것입니다.
‘제기랄! 참아볼게!’
뇌에 과부하가 걸린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두통은 물론이고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찾아와서 미칠 것 같은데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뇌를 꺼내서 물로 한 번 씻어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마샤는 그런 천우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서 엔도르핀을 마구 뿜어댔지만 고통은 여전했다.
-완료 80%. 이제 곧 끝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긴 8시간이 될 것 같았다.
허나 생각 외로 시간은 정말 빠르게 지나갔다.
-···100% 완료되었습니다. 이제 인터넷과 이동통신 정보망 등, 모든 유무선 통신망에 접속할 수 있습니다.
‘한 시간 밖에 안 지난 것 같은데?’
-너무 고통스러워서 시간이 지나간 줄도 모른 겁니다.
다행이라면 천만다행이었다.
마샤는 이제 천우에게 인터넷 연결 유무를 물었다.
-유무선 통신에 접속하시겠습니까?
< 92.(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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