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
92.
영국 웨일스 지방에 위치한 화이트 웨일스 컴퍼니 본사로 천우가 찾아갔다.
그는 웨일스 컴퍼니의 대표이사이자 대주주 대리인인 일리나 화이트를 만날 수 있었다.
일리나 화이트는 천우가 가지고 온 대법원의 판결문을 천천히 읽어보았다.
판결문의 내용은 한양 최 씨 일가가 소유하고 있었던 재산의 소유권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일리나 화이트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언젠가부터 한양 최 씨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에 언젠가는 찾아오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는 늦으셨네요?”
“아무래도 힘을 키우다보니 조상님들의 유지를 받드는데 문제가 좀 있었던 것이죠. 게다가 보물이 있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으니까요.”
“하긴, 구전으로만 전해 들었을 테니 말이죠.”
일리나 화이트는 회장집무실에 앉아 있다가 불현 듯 일어나 천우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아무래도 자리가 바뀐 것 같다는 것이었다.
“앞으로는 이곳에 앉으십시오.”
“하지만 지금까지 회사를 경영해 왔던 사람들은 화이트 가문 아닙니까? 저는 경영에는 간섭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저 대주주로서 우리의 권리만 되찾고 싶은 것뿐이지요.”
그녀는 옅게 웃었다.
“심지가 굳으시네요. 그렇다면 앞으로도 저희 화이트 가문이 당신의 가문을 섬겨도 되는 겁니까?”
“이를 말씀이십니까? 요크셔의 오셔필드 가문과 함께 손을 잡고 우리 가문을 도와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오셔필드 가문에게 연락을 취해두었습니다. 아마 수많은 업무협약을 체결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대주주님을 섬기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고맙군요.”
최 씨 일가의 가신들 중에서 그 장자를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가문은 거의 없었다.
오로지 한 가문을 제외하고 말이다.
천우는 골드인과 한양 최 씨의 관계에 대해서 물었다.
“편지에는 골드인이 우리 가문에게 무슨 큰 죄를 지은 것 같던데. 무슨 사연인 겁니까?”
“으음, 일단 얘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사모님과 함께 술자리를 마련하시면 어떠시련 지요?”
오늘 만남에는 미라가 참석하지 못했다. 그녀가 호텔을 알아보느라 약간 늦은 것이었다.
일리나 화이트는 그런 그녀까지 신경 써서 일부러 약속을 잡는 것이었다.
천우는 그녀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럼 우리 부부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한 잔 하시죠.”
“감사합니다. 신혼이신데 이렇게 저를 받아주시다니요.”
그는 아내에게 전화해서 호텔에서 술을 한 잔 할 수 있냐고 물었고, 그녀는 재빨리 술을 준비하여 두 사람을 맞았다.
비록 한국에서 만큼은 실력발휘를 할 수 없지만 술을 마시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특히나 영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한국산 굴과 전복 등을 특별히 공수했다.
“한국에서 직배송 된 제품을 판매하는 업체에서 사다가 다듬어봤어요.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미라는 해산물 하나에도 신경을 써서 상을 차렸고 일리나 화이트는 상당히 감동한 모양이었다.
이제는 자신이 섬겨야 할 가문에서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는 게 매우 기쁜 것이었다.
“사모님께서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신다니···! 솔직히 좀 감동했습니다.”
“첫 만남부터 좋은 모습을 보여야 피차 좋은 기억을 가지고 지낼 수 있잖아요?”
“역시, 현명하십니다.”
세 사람은 푸짐한 해산물을 차려놓고 위스키를 한 잔 기울이기로 했다.
이 자리에서 술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없었고 안주 역시 훌륭했기에 술자리는 상당히 매끄러웠다.
술이 몇 잔 들어간 후, 이제는 슬슬 가문에 대한 얘기를 시작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일리나가 입을 열었다.
“골드인은 원래 우리 최가 상단의 일원들이 1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당시에 투자했었던 전쟁물자의 대금을 받기 위해서 만들었던 금융기관이었습니다. 헌데 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직전, 우리를 배신하고 독일과 일본, 이탈리아 등을 돕는 사악한 전범기업으로 돌변하였지요.”
“허어!”
경악할 노릇이었다.
최가 상단이 그렇게 고생해서 모아두었던 돈을 대량으로 흡수한 후에 그것을 전쟁에 투자하고 인연을 끊었다는 것은 사실 인정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허나 그 위에 이어진 말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들은 전범기업에게 물자를 조달해주다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될 쯤, 양다리를 걸치기 시작합니다. 바로 소련에게 전쟁 물자를 기부하면서 차후 전쟁이 끝난 후에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로비를 한 것이지요.”
“그게 먹혔나요?”
“어처구니없게도 그 로비가 먹혀들었습니다. 또한, 전쟁 직전에 물자보급을 끊어버렸고 소련에게 빌붙어 면책권을 인정받게 되었죠.”
“···개새끼들인데 그거?”
“뿐만 아닙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기 전, 대한제국을 점령하면서 그에 대한 수탈에 참여하기도 했었죠.”
“자신들의 모태가 된 조국을 수탈했다고요?!”
“뭐, 유리시아 가문은 엄연히 따진다면 한국과는 별 상관이 없는 가문이긴 하지만 그래도 쓰레기 짓을 한 것은 맞죠.”
경멸의 극치를 보여주는 행태였다.
만약 천우는 유리시아 가문의 수장을 만나게 된다면 그 두개골을 부셔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녀는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최근에 렉스테리아라는 범죄조직이 중국의 흑사회, 남미의 카르텔 등과 손을 잡고 사업을 하고 있었다는 걸 잘 아실 겁니다.”
“물론이죠. 그 사건을 수사하는데 제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 범죄조직의 수장이 유리시아 가문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유리시아 가문이 범죄조직의 수장이라고요?!”
“이탈리아에서부터 시작된 렉스테리아는 원래 이탈리아 전범들을 도와주던 민간 수송업자들이었습니다. 허나 무솔리니 정권이 무너지면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한참을 도망 다니면서 창고에 남아있던 전쟁물자로 밀수를 시작하게 되었지요. 그 이후에 곡물을 쥐고 흔드는 마피아로서 다시 태어나게 된 겁니다.”
경악을 금치 못할 사실들이 쏟아져 나오자, 천우는 그것을 감당하기 힘들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너무 황당해서 손이 다 떨리는 천우에게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렉스테리아를 이용해서 골드인 기업을 다시 세운 그들은 전 세계 각지의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습니다. 밀수를 해보니 자금세탁만 제대로 한다면 세금도 안 내는 데다 전액 비자금으로 전환이 가능하니, 이보다 더 좋은 사업이 없었거든요.”
“허어, 그렇다면 전 세계에서 거두어들인 돈으로 지금의 부를 축적하게 된 것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물론 저들이 소련에게 빌붙는 바람에 BIS설립 당시, JP모건 일가와도 엮이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스위스에 대량의 비자금을 조성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게 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렉스테리아는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래 된 조직인 것이네요?”
“전쟁사와 그 갈래를 같이하는 사람들이니까요.”
“···빌어먹을. 그런 줄은 꿈에도 몰랐네.”
도대체 그들을 어떻게 공략한단 말인가.
천우는 조상님들의 메시지를 받기는 했지만 어떤 방법으로 유리시아 가문을 무너뜨린 다는 것인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허나 어디에든 길은 있기 마련이었다.
“그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완전히 밤의 제왕들인데 어떻게 무너뜨린단 말이죠?”
“골드인 자체를 우리가 인수하면 됩니다.”
“···골드인을 인수하자고요? 어떻게 인수를 합니까?”
“저들은 완벽하게 잊고 있었지만 골드인의 설립자는 최가 상단입니다. 최 씨 일가가 저들의 최대주주라는 사실을 주장할 수 있다는 듯이죠.”
“하지만 우리가 그 머리를 흡수해도 몸통은 남아있는 셈 아닙니까?”
“그렇기는 하죠. 하지만 그들의 대동맥을 우리가 틀어쥘 수 있습니다. 저들이 만들어내는 현금의 대부분을 골드인에서 세탁해서 관리하고 있거든요.”
“아아!”
“이 세상의 그 어떤 집단도 완벽한 어둠 속에서만 살 수는 없는 법입니다. 저들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분명 어딘가에 허점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라는 뜻이죠.”
“흐음, 하지만 꽤나 긴 싸움이 되겠죠?”
“그래요. 긴 싸움이 되겠지만 인수전만 끝난다면 사실상 회장님의 역할은 끝난 겁니다. 나머지 몸통을 수술하는 일은 미국과 영국에서 다들 알아서 할 테니까요.”
저들은 미국과 영국에 참으로 많은 피해를 안겨왔다.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단단히 벼르고 있는 CIA와 MI6 등을 이용한다면 아무리 강성한 범죄조직이라도 소탕이 가능할 것이었다.
또한, 그녀는 자신에게 대단한 조력자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저에게는 아주 특별하고도 특이한 조력자가 한 명 있습니다.”
“조력자요?”“혹시 흑발에 벽안을 가진 정체불명의 투자전문가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
“원래는 골드인의 전속 투자전문가로서 여러 가지 범죄를 모방하여 계획했던 일명 ‘설계자’였지만 이제는 우리 조직의 사람이 되었죠.”
천우는 지금까지 흑발의 벽안을 가진 그녀를 애타게 찾아다녔다.
일리나는 현재의 그녀가 쓰는 이름에 대해 일러주었다.
“아나스타샤 화이트, 그녀의 현재 이름입니다.”
“아아!”
“한국에서 태어나 버려져 어떤 스님의 손에서 컸다고 하던데, 아마도 이제 곧 그 은혜를 갚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CIA의 수사망을 피해서 지금은 아이슬란드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지하시설에서 회장님이 찾아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지요.”
“저를요?”
“그녀는 최근, 회장님을 은연중에 돕기 위해서 거대한 금융사기를 기획하곤 그 단서를 곳곳에 뿌려두었습니다.”
“아아! 미국의 보험사기 사태 말입니까?”
“네, 맞습니다. 바로 그것이 아나스타샤의 작품이지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녀의 기획능력과 추진력, 천우는 그녀가 다시는 탄생할 수 없는 천재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이제는 적이 아니라 동료라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평생 그녀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면 기분이 어떨지, 사실 상상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그녀 역시 평생 골드인을 위해 일할 생각은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동안 그녀가 반인륜적 범죄를 기획하면서 많은 상처를 받은 것 같았습니다. 허나 그러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 끝도 없지 진화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 것이지요.”
정말이지 대단한 여자라고 밖에는 표현이 되지 않았다.
일리나는 아나스타샤가 골드인을 무너뜨릴 열쇠임을 강조했다.
“그녀보다 골드인을 잘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물론, 로이 조로스가 그들에 대해 제법 잘 알긴 했지만 그녀보다는 훨씬 못한 사람이었죠.”
“로이 조로스···.”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잊을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천우는 이번에 로이 조로스의 복수도 함께 해두기로 마음먹었다.
“조로스의 복수까지 한 번에 돌려줘야겠습니다.”
“회장님은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천우 부부에게 아이슬란드 행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가시지요. 제가 직접 그곳까지 모시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천우는 그녀가 직접 모는 경비행기를 타고 아이슬란드로 향했다.
< 9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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