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2) >
부산의 어느 항만창고 안.
타악!
어두운 컨테이너 안에 불이 반짝 켜졌다.
날쌘 돌이처럼 쫙 빠진 몸매에 새까만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피투성이가 된 한 남자를 둘러싸고 있었다.
“쿨럭, 쿨럭!”
“이봐요, 김과장. 도대체 무슨 깡다구로 우리 회장님과 최의원 사이를 이간질한 겁니까?”
“이 실장님···?”
두 사람은 직장 동료 사이였다.
한마디로 남자를 빨래하듯 쭉쭉 빨아서 이곳으로 끌고 온 장본인이 저 남자의 상사라는 소리였다.
“···제가 언제 이간질을 했다고 그러십니까?”
하도 얻어맞아서 발음이 족족 흘러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남자의 말을 기똥차게 알아들었다.
“우리 김 과장님, 깡다구가 많이 좋아지셨네? 큰물에서 밑 닦아주니까 당신이 무슨 거물이라도 된 것 같아요?”
“···아닙니다. 실장님, 제가 그럴 깡다구가 어디 있습니까?!”
“이 사람아, 의원님들이 술자리에서 하시는 말씀을 귀담아 들으면 안 된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요?”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내가 미쳤다고 어르신들 하는 말씀을 밖으로 퍼 나르겠습니까?”
“그야 모르는 법이고. 혹시 알아요? 당신이랑 떡치는 여자가 밖으로 퍼 날랐을지.”
“···뭐라고요?”
순간, 남자의 뇌리로 한 여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와 무려 5년 넘게 몸을 섞은 여자.
“그, 그럴 리가···.”
“뭐, 아무튼 간에 어르신들 술자리에서 말 세어나간 건 당신 잘못이니까 벌을 받아야겠지요?”
“버, 벌이요?”
“고향이 어디라고 했더라?”
“대, 대전이요.”
“대전이면 대청댐이 유명한가? 그 줄기에 잘 묻어둘 테니 너무 억울해 하지는 말아요.”
“억울합니다!”
“그러게 때론 모르는 게 약이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그렇다고 사람을 죽이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그는 웃는 얼굴로 남자에게 말했다.
“몰랐어요? 당신은 청화그룹의 개였지 사람인 적은 없었다고요. 개가 사냥하다가 실수로 손님을 물었는데 살려둘 성 싶었어요? 앞으로 또 무슨 말을 나불나불 거릴 줄 알고?”
“허억!”
살인멸구, 어떤 사안이든 조직에 해가 되는 존재를 처리하는 가장 편리하고도 빠른 방법이었다.
남자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입 다물고 착실히 살겠습니다!”
“그딴 소리는 달나라 가서나 하시고. 자자, 다들 포장하세요. 강바닥에 찰싹 달라붙을 수 있을 정도로 성의 있게 포장하라고요.”
컨테이너 한 구석에서는 드럼통에 콘크리트를 붓고 막대로 잘 저어주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콘크리트를 사용할 곳은 딱 한 군데 밖에는 없었다.
남자는 마음이 급해졌다.
“제가 증거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제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 말입니다!”
“그런다고 달라질 게 있어요? 이미 판은 벌어졌고 사건은 터졌는데?”
“제가 수습할 수 있습니다!”
이용석은 여전히 남자를 비웃고 있었다.
“수습? 허참, 수습 참 좋아하시네. 수습하기엔 이미 늦었다고요. 이번 판은 누구하나 꼭 피를 봐야 끝이 난다고요. 아시겠어요?”
결국 일이 터진 후의 뒷수습으로 남자를 죽이겠다는 소리였다.
아마 이 모든 일은 남자가 다 뒤집어쓰고 죽게 될 것이 분명했다.
“겨우 정치인들 심기 불편하다고 사람을 죽여요?!”
“거참 시끄럽네. 자자, 빨리 담글 건 담그고 우리도 회식하러 갑시다! 오늘 여의도 황마담이 삼삼한 애들로 맞춰놨다잖아요?”
청화그룹 비서실이 이렇게 무서운 곳이었던가.
남자는 그 즉시 산채로 랩에 돌돌 말리기 시작했다.
피가 한 방울도 통하지 않을 때까지 마치 누에고치처럼 똘똘 말려버렸다.
“우우웁!”
물론 숨도 쉴 수 없었고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곤 뭔가 차갑고 축축한 것에 푹 담가지는 느낌이 들었다.
발버둥을 쳐봤지만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우우우욱!”
“숨구멍이라도 뚫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뭐하게요? 어차피 죽을 건데.”
“하긴.”
남자는 서서히 죽어갔다.
산 채로 딱딱하게 굳어 가는데 숨은 쉴 수 없는 이 고통.
답답함과 공황이 같이 찾아왔다.
어느 순간에는 의식이 끈도 뚝 끊어져버렸다.
마치 TV의 화면을 끈 것처럼 말이다.
그러더니 어느 한 순간이 되자, 서서히 시야가 뿌옇게 변하기 시작했다.
눈앞이 어지럽게 꼬여만 간다.
신신히 부서져 내리는 빛 무리가 마치 유리창에 물감을 뿌려놓은 듯했다.
그리고 그는 이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숨을 거둔 그는 콘크리트와 함께 바다에 수장되었다.
첨벙!
아마 망망대해 어느 한 가운데 버려졌다가 영영 수면 위로 떠오르는 일 따윈 것을 것이었다.
한 남자를 저승으로 보내버린 사내는 전화기를 들었다.
“처리했습니다. 아마 다시는 우리 조직에 대해서 떠들고 다닐 수 없을 겁니다.”
-고생 많았다. 조만간 청방으로 한 번 올라와라.
“예, 어르신.”
전화를 끊은 사내는 부하들에게 말했다.
“여의도로 가자. 회포 좀 풀어야지?”
“예, 실장님.”
그들은 오늘 손에 피를 묻혔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챌 수 없을 정도로 가뿐하고도 시원한 표정들이었다.
***
이른 아침, 국정원 요원 강현태가 CIA를 찾아왔다.
그는 지금까지 쌓아두었던 인맥을 총동원하여 CIA와 접선하였고 꽤나 큰 사건이 벌어질 것 같다면서 적극적인 도움을 요청하였다.
CIA는 왜 하필이면 국정원 요원이 자국도 아니고 타국까지 와서 이러나 싶었다.
허나 그 얘기를 듣고 난 후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중국 쪽 범죄조직 청방에서 정보원을 하나하나 제거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정보원이 사라질지 모르겠습니다.”
“정보원이 죽는다···?”
얼마 전, 렉스테리아의 비자금루트를 쫓고 있던 CIA는 아시아에서 그 자금의 일부가 빠져나간 것을 확인했다.
최근 미국에서 벌어졌던 보험사기를 추격하던 도중에 천우가 낚아챘던 자금의 행방이 중국까지 걸쳐 있었던 것이다.
해당 자금에 대한 조사를 벌이던 CIA는 이른 바 ‘청방’이라는 흑사회 계열의 조직이 한국으로 자금을 빼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포착하였다.
해서 그 조사를 강현태에게 의뢰하였는데, 그는 국정원 내에서도 가장 많은 수의 정보원을 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헌데 그 강현태가 지금 문어다리가 잘리듯 정보원들을 줄줄이 잃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국정원에 첩자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국정원이 무슨 애들 놀이터도 아니고 어떻게 첩자가 숨어들 수 있단 말입니까?”국정원 역시 인원을 선발하는 과정이 상당히 까다로운데다 조직 자체가 워낙 비밀스러워서 어지간한 정보는 바깥으로 유출된 적이 없었다.
헌데 그런 조직으로 프락치가 숨어들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낮은 확률이었다.
그러나 CIA는 첩자가 있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는 분위기였다.
그건 CIA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우리 CIA도 첩자가 다수 숨어 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누굴 믿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긴 마찬가지란 소리입니다. 국정원이라고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제기랄, 그럼 제가 이곳을 찾아온 것도 뾰족한 수는 아니라는 소리군요?”
“첩자를 가려내는데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잖습니까.”
“흐음, 이를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어쩌긴요. 조력자를 찾아야지요.”
CIA는 지금까지 강현태에게 꽤 많은 도움을 받아왔다.
그들은 그때마다 강현태가 자주 거론하던 인물을 떠올렸다.
“목포의 김 회장, 그라면 뭔가 처리를 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는 언론조작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뭘 어쩔 수 있다는 겁니까?”
“저들의 정보망을 뒤흔들 수 있는 연막을 칠 수 있겠죠. 만약 연막만 제대로 터진다면 우리가 움직여서 당신 쪽 첩자를 제거해드릴 수 있습니다.”
강현태는 자신의 가장 큰 정보원이자 뒷골목 언론의 제왕이라 불리는 김 회장이 상당히 껄끄러웠다.
허나 지금으로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일단 실종사건부터 덮고 프락치 노릇하던 흔적까지 깡그리 지워달라고 하십시오.”
“그렇게 하도록 하죠.”
“그를 움직이자면 돈이 필요하겠죠? 저희가 대겠습니다. 용산으로 가세요.”
그는 용산을 찾아갔다.
이곳 용산의 뒷골목은 원래 미국의 무기밀매조직이 중국을 경유해서 빼돌린 달러화 현금을 저장하는 창고였는데, 최근 CIA가 압수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돼지아빠 금고]
과연 사람이 사는지도 의문스러운 이곳에 엄청난 양의 비자금이 있었다.
강현태는 금고지기인 돼지아빠에게 CIA의 임시신분증을 보여주었다.
“CIA에서 보냈습니다.”
“안 그래도 연락 받았습니다. 40만 달러 정도면 될 것 같다고 하시던데요?”
“그렇군요.”
40만 달러나 되는 현금을 챙겨가자면 더플백에 침낭까지 얹어야한다.
어느 새 등산복 복장으로 갈아입은 강현태는 돼지아빠 금고에 있던 승용차를 타고 목포 김 회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목포 김 회장은 한 때 언론사의 제왕으로 불렸다가 이제는 댓글조작을 해주는 매크로를 운용하는 언론계의 흑막으로 전락했다.
70년대 10월 유신 시절에 기사 하나 잘못 보냈다가 이 지경이 되었다고 매번 투덜거리곤 했었다.
목포에 도착하니 김 회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타닥타닥···.
허름한 구옥 앞마당에 돼지고기 익는 소리가 들렸다.
“먹을래?”
“아니요, 속이 좀 안 좋아서요.”
“쯧. 적당히 해. 젊은 놈이 벌써부터 막 굴러먹다간 나처럼 되는 거야.”
“회장님이 뭐 어때서요?”
“손발 다 잘리고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었는데 이게 좋아 보인다고?”
“최소한 저보단 나아 보이는데.”
김 회장은 넋두리처럼 말을 이어나갔다.
“사람이 너무 많은 걸 알아도 다치는 법이라고. 언제까지 국정원이 자네를 지켜줄 것 같은가?”
“그야···.”
“같은 식구라도 커버를 쳐줄 수 있는 한계라는 것이 있어. 게다가 국정원에도 요즘 프락치 천지라면서?”
“그건 그렇죠.”
“조심해. 그러나가 정말 강바닥에서 평생 화석처럼 썩어죽는 거야.”
뼈와 살이 되는 조언이었다. 허나 지금은 그런 담소나 나눌 때가 아니었다.
잘못하면 렉스테리아와 연결된 상부조직의 꼬리를 놓칠 수도 있었다.
그는 재빨리 돈 가방부터 건넸다.
“그건 그렇고, CIA에서 불 좀 꺼달랍니다.”
“한국에서 일어난 일을 왜 CIA가 진화하는 건데?”
“사정이 좀 있습니다. 청방, 아시죠?”
김 회장은 청방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그는 CIA가 최근에 그들을 쫓고 있다는 걸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겠어. 한 일주일 정도 걸릴 거라고 전해줘.”
“네, 알겠습니다.”
“돼지고기도 구웠는데 한 잔 하고 하루 자고 가는 게 어때?”
“···아닙니다. 할 일이 좀 많아서요.”
하루 자고 가라는 김 회장의 성화에도 강현태는 굳이 고속도로를 탔다.
그는 목포에서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공주까지 올라왔다.
“끄으으응!”
차를 휴게소에 주차시자마자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정안휴게소에서 알밤 요거트나 좀 먹고 출발할까 싶었다.
밤이 숙취에 좋다고 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챙겨먹는데,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켜고 요거트를 사러 계단으로 향했다.
허나, 바로 그때였다.
퍼억!
뭔가 둔탁한 것이 강현태의 뒤통수를 타격하였다.
“크허억!”
“몇 대 더 갈겨. 주짓수 지역대회 챔피언이라 하더라고. 아주 야무지다니까 한 방에 양념해서 데리고 가야해.”
강현태는 거의 1분 동안 쉬지 않고 매질을 당했다.
하도 매를 맞아서 온몸이 불에 타는 것 같았다.
순간, 강현태는 생각했다.
‘···뭔가 일이 꼬였다. 잘못하면 죽겠는데?’
그 이후, 강현태는 질질 끌려서 승합차에 올랐다.
그리고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의자에 앉았고, 손과 발이 꽁꽁 묶인 채 어두운 공간에 놓이게 되었다.
이윽고 정체불명의 사내들이 말했다.
“자, 보자···. 다음 연결고리는 누구지?”
“무슨 은퇴한 CIA부국장이라고 되어 있는데?”
“···빌어먹을, 글로벌하기도 하네.”
< 89(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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