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2) >
88(2)
2010년 12월.
포브스는 천우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30인에 선정하였다.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포브스를 비롯한 유력 일간지에서 그를 가장 똑똑한 재계인물 1위에 올렸다는 점이었다.
바야흐로 최첨단 시대를 달리는 요즘, 천우의 주가가 점점 오르고 있었던 이유는 그가 이미 미스릴의 계열사를 90년대에 구축해두었기 때문이었다.
12월 15일, 미국 보스턴에서 브루스 카렐의 결혼식이 열렸다.
오늘 결혼식에는 브루스의 인맥들뿐만 아니라 천우의 인맥들까지 대거 친서를 보내왔다.
결혼식은 비공개 형식으로 가족들만 모인 자리에서 진행하기로 했기 때문에 사실상 범 체스터 일가가 아니면 참석할 수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화환과 편지만 보내왔는데, 그것을 다 정리하는 것만 해도 하루 종일 걸릴 지경이었다.
결혼식은 오금자가 입원해 있는 병원 근처 성당에서 치러졌다.
체스터 카렐이 과거 가톨릭 신자였던 것을 감안해서 식장을 성당으로 잡은 것이었다.
삐빅, 삐빅···.
오금자는 강심제를 맞아가며 결혼식을 지켜보았다.
오늘 결혼식에는 체스터 카렐이 살아생전에 친하게 지냈었던 신부의 제자 안드레 말린이 미사 및 축전을 맡았다.
총 20명의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안드레는 최대한 간결하게 결혼을 성사시켰다.
“서로를 평생의 배우자로 인정하십니까?”
“네.”
“이로서 새로이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앞으로 영원토록 천주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모두가 성호를 그린 후, 결혼식은 마무리 되었다.
결혼식이 끝난 직후, 오금자는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후욱, 후욱···.”
산소 호흡기를 착용한 그녀는 이제 가만히 앉아있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다.
암이 온몸으로 전이되었고, 심장기능이 급격하게 떨어져 이제는 신체 전반에 걸친 모든 기능이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이제야 한숨 돌리겠다는 표정이었다.
“···장하구나, 브루스. 이제 네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회장직에 오르렴.”
“네, 고모할머니.”
“가정을 잘 돌보고 가식들을 사랑하며 아내를 존중하고 아껴주거라.”
“그렇게 할게요.”
바이탈이 상당히 불안했다.
그녀가 병원이 도착하자마자 의료진들이 쏜살같이 달려 나와 상태를 체크하였다.
사실, 주치의는 오늘 결혼식에 그녀가 참석하게 된다면 반드시 생명에 지장이 생길 것이라고 경고했었다.
허나 그녀는 집안의 어른으로서, 또한 이제는 고아나 다름이 없는 브루스의 결혼식을 챙겨주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의료진들은 그녀의 몸에 들어가는 약의 농도가 이제는 신체가 버틸 수 없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크윽···!”
밖에서 의료진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천우에게 변호사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천우를 데리고 오금자가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도련님, 회장님께서 유언하실 겁니다. 자리를 지켜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일단 그 전에 도련님께 하실 말씀이 있답니다.”
변호사들은 잠시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러자, 오금자는 천우에게 손을 뻗었다.
“이, 이리···.”
천우는 말없이 오금자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회한이 담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의 뒤를 잇겠다고 고생해 준 것, 너무나도 고맙게 생각한단다.”
“제가 좋아서 한 일인데요 뭘.”
“다만, 어려서의 추억이 별로 없어 그게 너무 안타깝구나.”
천우는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가 함께 해주셨잖아요.”
“···그래도 내가 너를 너무 강하게 몰아붙인 건 아닌지, 후회가 되는구나.”
“그런 말씀마세요. 할머니가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어요.”
그녀는 잡은 손에 힘을 꼬옥 주었다.
“···너도 이젠 가정을 꾸려서 열심히 살아가렴. 대대손손 사랑을 나누어주며 살아가거라. 알겠니?”
“그럴게요.”
잠시 후, 법무관계자들과 함께 그녀의 자손들이 들어왔다.
또한 회사의 중역들 역시 오금자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들어서 있었다.
오금자는 중역들에게 말했다.
“···브루스 카렐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나의 지분 전체를 넘기겠습니다.”
“현명하신 선택이십니다.”
“그리고 지분을 제외한 모든 재산은 손자인 천우에게 물려주고자 합니다.”
변호인단은 재산과 지분을 완벽하게 마무리 지은 그녀의 유언을 녹음하고 녹화하며 문서로 남겨 그 즉시 공증절차를 밟았다.
오금자는 마지막 유언을 아들에게 남겼다.
“호명아, 이리···.”
“네, 어머니.”
“···그동안 너무 미안했다. 이 어미가 많이 미웠지?”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죠. 과거에 너무 머물려 한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거라고. 이제 어머니도 과거는 잊고 아버지와 함께 새 출발 하세요.”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고맙다···.”
오금자는 자손들과 가족들에게 말했다.
이곳에는 휠체어를 탄 그녀의 형제들도 있었다.
“모두 사랑하면서 잘 살아가길 바랍니다. 지분과 재산 이외에 복잡한 사안들은 법무 팀에게 처리사안을 전달해두었고, 공증했습니다. 그러니···.”
그녀는 끝까지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허나 그녀의 마지막 숨에는 약간의 회한이 담겨 있었다.
“후욱, 후욱! 여, 여보···.”
결국 오금자는 마지막에는 남편 최충의를 찾았다.
잠시 후, 의료진들이 그녀의 사망진단을 내렸다.
“현재시간 19시 21분, 운명하셨습니다.”
최호명은 눈물을 삼켰지만 천우는 그 자리에 픽 쓰러지고 말았다.
“으흑흑!”
인생의 멘토였던 또 다른 한 사람을 기어이 여의고 만 천우는 그 충격으로 실신하고 만 것이었다.
의료진들은 그 자리에서 천우를 병실로 옮겼다.
대략 30분 후, 천우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부터는 빈소를 차리고 할머니를 보낼 장례식을 치러야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음속에 할머니를 묻었다.
‘인간에겐 마음의 공간이 있다. 이곳에 떠나간 사람들을 모시고 사는 거야.’
천우는 그리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
장례식이 끝난 후, 천우는 카렐 가문의 추모공원에 오금자를 안장시켰다.
장례는 미국에서 치렀지만 그녀의 모태가 된 한국에 추모공원을 세움으로서 체스터 카렐의 넋도 기리기 위함이었다.
공원은 한양 최가의 추모공원 바로 맞은편에 세워졌고 두 사람은 같은 묘소에 안치되었다.
그녀의 장례절차를 모두 끝낸 후 반 년이 흘렀다.
천우는 드디어 결혼식을 준비했다.
라스타의 결성 때문에 바빠서 미처 천우의 결혼식은 진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결혼식을 아주 간소하게 치르고 싶었다.
그건 전 씨 일가의 생각 역시 마찬가지였다.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급하게 치르는 결혼에 절차를 모두 갖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전 씨 일가는 추모공원 인근에서 결혼식을 치르자고 제안했다.
원래 결혼식은 장례식장과 최대한 멀리 잡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전 씨 일가는 그런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체스터 카렐 가문의 수장이었던 오금자의 소원이었던 천우의 결혼식을 조금이라도 가까이 보여주고 싶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결혼식은 예물을 교환하고 가족이 함께 모여서 식사를 하는 것으로 가볍게 마무리 되었다.
어지간한 약혼식보다도 간소하고 간단한 절차였다.
대신 혼인신고는 상당히 빨랐다.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혼인신고부터 해놓고 곧바로 비행기에 올랐다.
결혼의 증인으로는 회사 식구들이 함께 해주었다.
거의 명목상으로 치른 결혼식이었지만 두 부부는 충분히 행복했다.
그들은 전용기를 타기보다는 보통의 사람들처럼 비행기 이코노미를 예약해서 천천히 여행을 즐기기로 했다.
이제 당분간은 천우가 없어도 조직은 잘 굴러갈 것이고 CIA나 MI6도 적어도 한 달 동안은 그를 찾지 않겠다고 배려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재벌가의 자식들이 아닌 보통의 신혼부부처럼 짐을 챙겨 여행을 떠나는 길.
두 사람은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할머니는 잘 보내드린 것 같아요?”
이제는 새댁이 된 미라가 천우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천우는 목덜미에서 펜던트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이 안에 할머니의 일부가 들어 있어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엔 미처 하지 못했다가 최근에 이장을 하면서 할아버지의 일부도 이곳에 모셨어요.”
“아아, 메모리스톤!”
“맞아요. 저는 이게 우리 가족을 지켜줄 부적이 되어 줄 것이라고 굳게 믿어요.”
천우의 조부모는 단순한 핏줄의 의미를 초월해서 인생과 성공을 가르쳐 준 스승들이기 때문에 그녀는 천우의 이런 행동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물었다.
“나중에 내가 먼저 죽으면 이렇게 메모리스톤으로 남겨줄 거예요?”
“무슨 소리입니까? 따라죽어야지.”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
“이게 겨우 한쪽이 되었는데 다시 반쪽으로 살아가라고요? 그건 있을 수도 없는 얘기잖아요?”
“아이, 참···.”
두 사람은 비행기 안에서 마음껏 꽁냥거렸다.
파파라치가 따라붙어도 상관이 없는 정식 부부였기 때문에 남의 눈치 볼 것도 없이 실컷 입을 맞추고 포옹도 할 수 있었다.
허나 더욱 과감해진 스킨십에 당황한 사람들도 있었다.
“···좋을 때다.”
“그러게. 저때가 제일 행복한 때지.”
주변의 중년 부부들은 천우 부부가 마냥 부러운 모양이었다.
사실, 천우는 전생에 한 번 결혼을 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한 것이 아니었다.
성공을 위한 맹목적인 결혼이었기에 신혼여행을 가서도 흥이 난다거나 기분이 업되지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닭장에 갇히는구나, 그런 생각만 가득할 뿐이었다.
두 사람은 틈만 나면 앞으로의 삶에 대한 설계를 하느라 바빴다.
“자식은 두 명이 좋겠죠?”
천우는 한 명이나 두 명만 낳자고 계획했지만 전미라는 달랐다.
그녀는 아이에 대한 욕심이 엄청났다.
“적어도 5남매, 저는 힘이 닿는데 까지 계속 낳을 거예요.”
“그, 그렇게나 많이? 힘들지 않겠어요?”
“우리가 돈이 모자란 것도 아니고 부모가 건강하지 않은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잖아요?”
남자는 벌이에 상관없이 자식을 낳는다는 소리만 들어도 일단 부담부터 된다.
열이면 아홉 정도는 아이를 낳는 자체가 두려울 것이다.
허나 이제 천우는 자신의 진짜 반려자를 찾았다고 생각했기에 다산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농구팀은 이미 맡아놨고, 잘하면 배구팀도 가능하겠는데요?”
“저는 축구팀을 만들 생각이었는데?”
“그, 그렇게나?”
“호호, 왜요? 자신 없어요?”
“그건 이따가 직접 보면 알 것이고.”
다른 건 모르겠지만 천우의 신체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났다.
비록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증손주를 안겨드릴 수는 없었지만 그 자손을 만대에 퍼트릴 정도의 능력은 차고도 넘쳤다.
잠시 후, 밤이 되었다.
비행기는 조용했고 간혹 스튜어디스만 돌아다닐 뿐이었다.
그녀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다녀올게요.”
“그래요.”
화장실에 가나보다, 천우는 그리 생각했다.
헌데 그녀는 천우의 팔을 잡아끌었다.
“확인 좀 해보게요.”
“······!”
천우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 88.(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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