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
88.
천우는 미국의 입장이 왜 저렇게 밖에 나올 수 없는 지부터 생각해보기로 했다.
전 세계 최강대국이자 가장 부유한 나라인 미국이 아이러니하게도 엄청난 적자행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빠져나올 수 없는 늪과 같았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무역거점을 어떻게 관리해왔는지를 알아보면 답이 나오는 문제였다.
미국은 타국을 침범하는 대신 해상 및 항공 교역로의 안전을 보장함으로서 세계의 무역 및 금융시장의 거점을 모두 뉴욕으로 집약시키는 방법을 택했었다.
이 과정에서 평화를 보장하는 대신 상당한 비용이 지출되었고 그에 대한 적자가 만만치 않았다.
다만, 그로 인하여 식민통치에 대한 비용을 줄이고 오히려 보다 넓은 세력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일본의 극우파 세력 중에서는 미국이 사실상 제국주의라고도 말하곤 한다.
허나 정말 미국이 제국이라곤 해도 그 어떤 세력도 그들을 넘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미국의 군사력은 세계 최강이며 그 경제력 역시 넘어설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이들에게서 남미를 분리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최대한 떨어뜨려 놓을 수는 있겠지.’
천우는 경제협력에 조인하는 대신에 다른 카드를 꺼내들기로 했다.
그것은 바로 미국이 제공하는 교역로 사용에 대한 인센티브 제공이었다.
“라스타가 당신들의 교역로를 이용하는 한, 그에 대한 일부 관세를 납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방위비 분담비율을 약간 낮춰주시고 경제협력은 보류해주시죠.”
“최강대국 미국의 영향권 안에 들어오는 겁니다. 그게 왜 싫은 것인지 모르겠네요.”
일리샤 록키드를 따라나선 미국 상무부 관계자는 천우에게 따지듯 물어왔다.
허나 천우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싫긴요. 우리도 아메리칸 이펙트 한 번 노려봄직 하지만, 아직 준비가 안 되었을 뿐입니다.”
“미국의 손을 잡기가 아직은 버겁다?”
“경제협력기구라는 것은 결국 평등한 이득을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당신들과 경제협력을 나눈다고 생각해보세요.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당장 5년간은 미국이 극심한 적자에 시달릴 겁니다.”
“그거야 두고 봐야 아는 것이고요.”
“과연 그럴까요?”
당장 계산기를 두드려본다면 답이 딱 나올 문제다.
향후 5년간은 라스타에 대한 미국의 적자는 당연한 일이었다.
환율 제도를 라스타에 대해서만 일부 고정해준다면 반발이 상당할 텐데, 그걸 다 어찌 감당하겠는가.
무역에서의 적자는 미국에게 있어선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굴레와 같았지만 그 적자폭이 높다는 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가뜩이나 미국은 이제 불황을 넘어 간신히 호황으로 향하는 길목을 열고 있는 중이 아니겠는가?
천우는 상무부 관계자들에게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뭐, 그렇게 자신 있으시다면 서명하시던지. 저는 책임 안집니다.”
“끄응···.”
적자해결을 위해서 온 것인데 5년 동안 극심한 무역적자를 겪을 수도 있다면 이들로선 완벽한 손해인 셈이었다.
천우는 그 대신 만년적자인 재정문제를 일부 해결해주겠다고 나섰으니, 저들로서는 도저히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가 교역로 사용에 대한 비용을 상당히 많이 지출하면 굳이 당신들이 적자를 보면서까지 경제협력을 채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맞죠?”
“뭐, 그야 그렇죠.”
“아마 재무부에서도 이번에는 상무부에게 꼼짝을 못 합니다.”
이 세상에 유기적이지 않은 정부는 없지만 그 유기체 안의 구성 물질들이 전부 다 사이가 좋으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건 현재의 재무부나 상무부나 같은 입장이었다.
전 정권에서의 실책이 과연 재무부에서 나왔느냐, 상무부에서 나왔느냐를 두고 서로가 첨예한 대치를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재무부를 꽉 눌러버린다는 말이 나오니 상무부의 관계자들이 입을 함지박 만하게 찢을 수밖에는 없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통 크게 양보하는 수박에요!”
“지당하신 말씀이네요.”
“그럼 협정서를 수정하도록 합시다.”
미국이 가지고 온 협정서에 일부분을 개정하고 각 국가의 수장들이 모여 서명함으로서 라스타의 대미 협력 사안이 마무리 되었다.
상무부에서 돌아간 후, 천우는 라스타의 일원들에게 물었다.
“오늘부터 처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두 다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물론입니다. 우리도 눈치는 있어요.”
당분간은 최대한 미국에게 이득이 되는 쪽으로 판을 짜서 굴려야한다.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라스타는 맺으나 마나한 협정이 될 수도 있었다.
그날의 협정 이후, 아시아에서 대규모 연구자원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이번 협정의 최대 이슈는 바이오산업이었고 인류의 미래식량을 해결하기 위한 연구진이 구성되어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한, 일의 연구원들과 함께 싱가포르, 대만에서 생명공학자들이 대거 모여들어 라스타 내부에 ‘바이오테크놀로지 벨리’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단지의 구성은 동북아시아에서 공수해 온 장비들을 설치하고 동식물과 수목을 연구할 수 있는 단지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앞으로 생산성이 훨씬 뛰어나고 성장이 빠르면서도 지구에 최대한 도움이 되는 묘목 및 모종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였다.
특히나 이번 연구에서는 현재 지구상에 있는 모든 나무들의 희생을 대폭 줄이고 산림을 보존할 수 있는 신품종을 계량한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었다.
남미의 아마존은 지구의 허파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넓고 광활하지만, 최근 난개발로 인하여 서서히 그 규모가 줄어들고 있는 추세였다.
게다가 그로 인한 환경오염과 산불 등이 아마존의 와병생활을 더욱더 길어지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한일 합작 프로젝트 팀은 이미 브라질에서 개발 중이었던 ‘슈퍼트리’에 대한 연구에 필요한 유전자정보 및 수액계량 등을 완성시킨 상태였다.
최근 중국에서는 사막의 팽창 및 도시의 사막화를 방지하기 위해서 꽤 많은 돈을 투자하는 중이었는데, 그 프로젝트를 뚫고 들어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한일 합작 프로젝트팀이 먼저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 프로젝트가 무산되는 바람에 더 이상의 연구는 진행되지 않았지만 운이 좋게도 라스타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 진 것이었다.
천우는 전생에서는 이 프로젝트팀이 정치적 이해관계 및 중국의 갑질로 인해 사라졌음을 상당히 안타까워했었다.
이들은 분명하고 확실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때를 잘못 만나서 망조를 걸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천우는 일주일 만에 완성된 간이실험실에서 슈퍼트리의 미래를 보았다.
연구진은 진갈색 기둥에 녹색 이파리를 가진 활엽수 슈퍼트리의 묘목에 대한 설명을 전해 들었다.
“이 나무는 원래 아마존의 밀림 속에서 소수만 자생하고 있었던 품종인데, 유난히도 군락이 좁아서 원주민들조차 이런 나무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고 합니다. 헌데 일반인 탐사대가 하이킹 도중에 우연찮게 이 나무를 발견하게 된 것이죠.”
“나무의 특징은 뭡니까?”
“일단 활엽수임에도 불구하고 더위와 추위에 강하여 사막과 툰드라 지대에서도 생존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수분을 저장하고 생명을 유지하는 생체리듬과 라이프사이클이 일반의 나무와 달라서 선인장만큼이나 생존력이 강하죠.”
“허어, 그런 나무도 다 있나요?”
“저희들도 처음엔 깜짝 놀랐습니다. 유전자조작이 아니고서 이렇게 완벽하게 진화할 수는 없잖아요. 하지만 지구는 놀랍게도 그런 완벽한 생명체를 만들어냈습니다.”
슈퍼트리는 그야말로 일반의 나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허나 이들에게도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병충해였다.
“다 좋은데 병충해에 약합니다. 특히나 소나무에게만 피해를 준다는 재선충과 진딧물 등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진딧물이요? 저렇게 큰 나무가요?”
“뿌리부터 썩어 들어갈 정도로 상당히 약합니다. 자연적 환경 중에서도 기후조건에는 특화되어 있었지만 외래종이 침입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곳에서 살다보니 그런 병에는 미처 대처할 능력을 기르지 못한 것이죠.”
“흐음···.”
“다만, 번식이 효율적이고 생장이 상당히 빨라서 일단 심어서 성목이 되기만 한다면 사방에 씨를 뿌리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병충해만 잡으면 끝이라는 소리네요?”
“거의 그렇다고 봐야지요. 물론, 나무를 옮겨 심는 과정에서 대략 절반 정도는 나무가 죽기 때문에 그 점을 보완하는 것도 시급하긴 합니다.”
슈퍼트리의 장점이야 너무나도 많지만 그것을 보완하기가 생각보다 그리 쉬워보이지는 않았다.
허나 이들은 슈퍼트리를 보급하기 시작하면 엄청난 수익창출이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어차피 인류는 목재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생장주기가 극단적으로 짧은 슈퍼트리를 대량으로 생산해서 사용하는 편이 훨씬 낫겠지요.”
“뭐, 그건 그렇지요. 근본적인 해결책은 나무를 최대한 사용하지 않는 것이지만요.”
연구진들은 쓰게 웃었다.
“근본적으로는 그렇지만, 그게 어디 가능한 얘기이겠습니까?”슈퍼트리는 천우에게 엄청난 흥미를 가져다주었다.
허나 이들 연구진이 내세운 또 하나의 연구품종은 그 흥미마저도 꺾어버릴 정도였다.
이번에 그가 소개받은 품종은 바로 플라스틱을 먹어치우는 ‘우드킬러 딱정벌레’였다.
“저희 연구진이 붙인 이름은 녹색점박이 딱정벌레입니다. 별칭은 청소부죠.”
“청소부라!”
“이놈들은 플라스틱을 먹어치운 후에 그걸 흙으로 변화시켜서 배출합니다. 그 치환비율이 대략 플라스틱 5대 흙 0.8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상당히 인간에게 이로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획기적이네요!”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이놈들의 학명처럼 나무를 병들어 죽게 만드는 치명적인 놈들이기도 합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거죠?”
“재선충이 솔수염하늘소를 통해서 퍼지는 것을 알고 계시죠? 이놈들도 비슷합니다. 우드킬러 딱정벌레의 몸에는 목사충이라는 치명적인 벌레가 공생하고 있습니다. 이놈들이 딱정벌레 안에 기생하고 있다가 녀석들이 나무에 알을 낳거나 수액을 빨아먹으면 그 즉시 배출되어 나무 안으로 침투하게 됩니다. 목사충은 나무의 수액을 양분으로 삼지만 그 대사
과정에서 배출되는 독성물질이 나무를 병들이게 되지요. 한 번 감염된 나무는 일주일도 채 생존하기 힘듭니다. 현재로선 치료약이 없지요.”
“허어, 그럼 이건 너무 위험한 벌레 아닙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철저한 격리와 연구만 계속된다면 반드시 인간에게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병에 대한 치료제도 개발할 것이고요.”
과연 이들이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주게 될 것인가.
천우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 프로젝트를 승인한 건 누구입니까?”
“라스타 수뇌부로 알고 있습니다.”
“흐음.”천우도 협정을 맺고 자금을 끌어오는 등의 일은 할 수 없지만 내부안건을 상정하는 실질적인 권한 자체는 없다.
물론, 입김을 불어넣을 수 있겠지만 그것도 명분이 있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는 앞으로 한 달만 더 지켜보기로 했다.
“안전성을 보장할 수 있는지 감사를 들여보내겠습니다. 만약 그래서 안정성이 결여되었다 판단된다면 라스타는 이 벌레들을 폐기시켜야 할 겁니다.”
“물론입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대박 아니면 쪽박.
천우는 이 벌레가 딱 그러하다고 생각했다.
< 8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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