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재벌 3세-173화 (173/202)

< 87. >

87.

CIA와 MI6가 정한 수사의 포커스는 어디까지나 범죄자의 자금이동경로였다.

허나 이제는 그 포커스가 흔들리고 있었다.

조사를 해 본 결과, 주가변동이 있어 용의선상에 오른 회사들의 경우엔 하나같이 유령회사인데도 불구하고 자금을 회수하기 좋은 포지션을 취하고 있었다.

보통은 범죄에서 거두어들인 돈은 조세피난처로 옮기거나 채권, CD 등으로 깔끔하게 세탁하여 보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조금 달랐다.

문제가 되었던 금액 모두가 멀쩡히 은행에 예치되어 있었고 심지어는 털어낸 돈이 뭉텅이로 한 계좌에 몰려 있었다.

천우는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 너무 쉬운데.”

그건 조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게요. 사기를 준비했을 때엔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준비를 했을 거잖아요? 그런데 도대체 왜 굳이 이렇게 허술하게 처리를 해 둔 것일까요?”

“당신이 말했던 과시를 위한 범죄라고 가정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다면 이놈도 콜렉터일 가능성이 높죠.”

“으음. 범죄가 취미인 놈인가?”

“범죄가 취미라면 정말 지독한 악질 변태가 분명해요. 이 사건으로 죽어 나자빠질 사람이 얼마인데요.”

아직 찾아낸 돈은 대략 1/10정도 되었다. 그러나 사기가 벌어진 지 그리 오래 되지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피해가 그리 큰 건 아니었다.

어쨌든 간에 사기를 당했어도 돈을 제 자리에 돌려놓기만 한다면 일부 보험으로 처리가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건 보험회사나 금융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재보험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니까.

“이 사건도 재보험 보장범위에 들어가긴 하죠?”

“그렇죠. 재보험 회사도 떼먹힌 돈을 찾은 후에 나갈 보험금이라고 한다면 그 규모가 훨씬 줄어들 테니 한 숨 돌리게 될 테죠. 그럼 보험업계 내부에서도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겁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천우는 범죄자라는 저 작자가 점점 보통의 인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우는 자신이 추적하던 자금의 출처를 잡아냈으니 FBI가 원하는 차트분석을 계속 해줘야만 했다.

하루에 100개가 넘는 차트를 분석한다고 해도 천우는 결코 지치지 않았다.

거의 기계처럼 일하는 천우였지만 그보다 바쁜 건 FBI이었다.

그가 족족 찍어주는 회사를 조사해야했고 그 조사를 위해서 영장발부를 받는 것만 해도 며칠이 꼬박 걸리는 일이라 FBI는 간만이 아주 일복이 터졌다고 천우를 욕하고 있었다.

“···사람이 하루 정도는 쉴 수 있잖아? 아니, 어떻게 하루에 100개가 넘는 회사를 조사할 수 있냐고.”

첫 번째 조사에서 1/10의 자금을 건져냈지만 그 이후의 조사에서는 주로 자잘한 금액들만 딸려 올라왔다.

허나 한 가지 신기한 것이 있었다.

A라는 회사를 조사하면 B라는 회사가 이 사건에 연루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알기 쉽게 만들어놓았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페이퍼컴퍼니라곤 해도 회사건물은 있었다.

비록 건물 안에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만 이 회사가 그동안 국세청에 신고를 한 내역이 정부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이 신고한 내역을 천천히 살펴보면 지금까지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입금을 받아왔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이들의 입금방식은 A라는 회사가 B사에게 100을 건네주고 B가 50을 가진 후에 C라는 회사에게 남은 자금을 넘겨주는 식이었다.

굳이 이렇게 자금을 송금해주면 자금을 추적하는데 상당히 번거로울 것이 분명하긴 했다.

허나 이 이외엔 전혀 장점이 없었다.

“혹시 조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서 일부러 이러는 건가?”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단순하게 판을 짜놓았다고요?”

“흐음···.”

조이와 천우는 고민에 빠졌다. 허나 그들에게 정말 의외의 인물이 뜻밖의 답을 주었다.

자금추적에 함께 따라온 금융당국의 담당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거야 슈퍼보이가 괴물이니까 가능한 거죠. 보통의 일반인이 이 사건을 수사했다고 쳐보세요. 얼마나 걸리겠나.”

“아아!”

너무나도 당연한 소리였지만 천우가 워낙 계산이 빠르니 일이 이렇게까지 급진전 된 것이지, FBI가 슈퍼컴퓨터를 죄다 동원했어도 상황은 이보다 족히 몇 십 배는 느리게 흘러갔을 터였다.

“상황을 초장에 잡아서 진화를 하셨잖습니까? 그러니 자금도 원형 그대로 다 남아 있었던 것이고 증거도 남아 있었을 겁니다. 만약 당신들이 한 박자만 느렸어도 일은 아마 어렵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말이 옳았다. 아무리 뛰어난 인간도 천우의 나노머신을 뛰어넘을 수는 없기 때문에 수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을 지도 모른다.

조이는 무릎을 쳤다.

타악!

“그래! 이제야 확실해졌습니다! 완전범죄를 자신해서 이런 허술한 복선을 깔아둔 겁니다!”

“어차피 꼬리를 잡아봤자 그것을 추격하는 게 쉽지 않을 테니까요?”

“바로 그거죠!”

“허어, 이놈들이 아주 공권력을 호구로 보고 있었던 거네요?”

조이는 자조적인 투로 말했다.

“뭐, 틀린 소리는 아니잖아요? 우리는 지금까지 저놈에게 호구처럼 휘둘리고 있었어요. 만약 당신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저놈에게 휘둘려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겁니다.”

마치 미국의 경찰력을 비웃듯이 장황하게 증거들을 뿌리고 다니는 그는 보통의 적수는 아닌 것 같았다.

천우는 이 사건이 일단락된다면 이번엔 또 어떤 사건이 벌어질지 무서워졌다.

“만약 자신이 내준 문제가 너무 쉬웠던 것이 아닌가, 싶어서 더 어렵고 큰 문제를 내면 어쩌죠?”

“···그런 끔찍한 얘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말이 씨가 된다는 소리가 있듯, 그녀는 천우의 걱정을 한 귀로 한 귀로 흘려보냈다.

허나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게 가장 두려운 문제이긴 했다.

금융당국의 관계가 폴 리츠는 당장 방어대책을 세울 것이라고 장담했다.

“당국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겁니다. 반드시 저놈들에 대비할 수 있는 방어대책을 세울 거라고요.”

“그래요, 당연히 그래야지요.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대책을 세운단 말입니까? 저놈이 이번에는 또 어떤 곳을 건드릴 줄 알고?”

“아픈 손가락을 보이지 마라. 악의를 품은 자는 그곳을 먼저 찌를 것이다.”

“···쇼펜하우어?”

“보통 이런 경우엔 약한 곳을 먼저 공격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약점을 상대에게 일부러 노출시켜 덫을 칠겁니다.”

“만약 실패한다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사실, 지금의 미국은 반드시 금융개혁이 필요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무려 100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재정비를 한 적이 없었죠. 그나마 공황상태나 위기가 찾아오면 바뀌긴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입니다.”

실제로 미국은 호황에 취해서 몇 번이고 고꾸라질 뻔했던 경력이 있는 나라였다.

특히나 호황 직전에 유례가 없는 쇼크가 터지기 일쑤였고, 그것은 무사안일주의에서부터 비롯된 재앙이나 다름이 없었다.

허나 그렇다고 청산주의에 빠져 있다간 나라가 망하는 꼴을 보기 십상이었다.

“약간의 상처는 오히려 인간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제 생각에는 미국이라는 나라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잘한 상처를 치유하면서 면역력을 높이겠다는 뜻인가요?”

“그런 셈이죠. 그것이 바로 미국의 미래를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 될 겁니다.”

불안감이 아주 깊은 작전이었다. 허나 더 이상 천우가 저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정책의 기조를 결정하는데 천우가 참여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천우가 그 당국의 당사자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폴 리츠는 그들에게 언제까지 매달릴 것인지 물었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수사를 하실 겁니까?”

“흩어진 돈을 모두 찾을 때까지 계속해야지요.”

“만약 돈을 찾을 때마자 이렇게 원금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면 오히려 이자를 받을 수도 있겠네요. 어휴, 그 많은 돈의 이자면 얼마나 되려나?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 같겠는데요?”

그럴 리 없겠지만 폴 리츠의 말대로만 된다면 오히려 이건 피해가 아니라 이득을 보는 사건이 될 수도 있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받은 충격까지 어쩔 수는 없을 것이었다.

물론, 이 상황에서는 그게 최선의 경우이긴 했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네요. 피해자들 전원이 울지 않고 1년을 보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아마 그러긴 힘들었을 텐데.”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준다고 했지만 전 재산을 다 털린 사람이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천우는 그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수사를 성공시키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

남미의 새로운 경제협력기구를 만들 것이라는 소리에 남미의 개도국 관련 주가가 가파르게 오르고 있었다.

물론 남미 신흥국에 대한 투자는 80년대부터 계속되어 왔었다. 그 덕분에 아르헨티나나 브라질이 지금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허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지금까지는 문제점을 알고도 해결할 수 없었던 것들을 경제협력기구를 통해서 하나씩 고쳐나가기로 협의가 된 것이었다.

이런 협의를 도출해 낸 사람은 황당하게도 한국에서 온 정치인이었다.

정도환은 이미 한국을 한 바탕 휘저어놓은 후, 그 틈을 타 남미와의 협상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는 이번 협력기구 발족이 앞으로 향후 100년을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남미의 여러 국가들은 한국이 본격적인 외자유지를 통해서 광활한 영토에 넓은 공장을 세울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정도환이 강조한 것은 사프타 연합이었다.

이제는 바야흐로 세계 6대 협력기구 안에 들어갈 정도로 그 세력이 강성해졌고 그들이 뭉친 이후의 경제성장력은 전 세계가 놀랄 정도였다.

물론, 사프타의 경우엔 워낙 낙후된 국가들이 많았기 때문에 경제성장률이 껑충 뛰는 것이 눈에 보일 수밖에는 없었다.

세계의 유력 무역국들의 성장률이 두 배, 세 배 갑자기 뛰지 못하는 것은 그 경제규모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경제성장률 2%와 후진국 성장률 200%를 비교해본다면 아마 상대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논리에 의해 후진국들의 도상은 당연히 눈에 띌 수밖에는 없었지만, 사프타는 아예 그 근본부터 달랐다.

이들은 풍부한 인력과 자원, 그리고 해외의 자본까지 끼어들어 거의 완벽한 성장구조의 표본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프타는 흔히 유럽연합과 비교되곤 하는데, 유럽연합이 가져다 준 이익과 사프타의 이익을 비교해본다면 아예 게임이 되지 않았다.

이들은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치밀하게 생각하며 연대감은 물론이고 협력관계 형성까지 마치 하나의 연방처럼 묶여 있었기 때문에 유로가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기축통화를 만들어 발매하였고 이것이 통용됨에 따라서 이미 유로화의 열풍을 밟아버릴 정도의 파워를 자랑하고 있었다.

만약 남미에도 이런 기구가 생긴다면 그들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를 정도로 기쁠 것이었다.

허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사프타에는 슈퍼보이라는 태풍의 핵이 있었고 이곳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남미경제협력기구를 만드는 모임에 나온 정도환에게 각 국가의 수장들이 물었다.

“우리의 구심점 역할을 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슈퍼보이 정도 되는 사람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새로운 황금시대를 맞이할 구심점.

정도환은 이들에게 한 가지 확신을 주었다.

“우리가 힘을 합친다면 그를 스카우트 할 수도 있습니다.”

“스카우트?”

< 8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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