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2) >
86.(2)
이른 바 ‘홀리랜드 사건’으로 기록된 미국의 70억 달러 규모의 금융사기는 역대 최악으로 기억될 것이었다.
천우는 이 사건이 두 번째 모방범죄라는 것에 전혀 이견이 없었다.
첫 번째 모방범죄는 알바니아 피라미드 사기였고 이번에는 마틴 프랭켈의 사기였다.
“범죄가 진화하고 있군요.”
조이 맥켈런은 천우의 한 마디에 아주 격한 공감을 나타냈다.
“그래요, 진화하고 있죠. 모방범죄이지만 그 규모를 크게 키운 발전형 범죄로 분화하고 있어요. 한마디로 이건 인류가 진화하듯 사람의 두뇌도 진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죠.”
“으음.”
“어쩌면 과시용이라고 해도 되겠어요.”
“과시용?”
“우리는 너희들의 머리 위에 있다, 그걸 보여주려고 일부러 이러는 것 같단 말이죠.”
“힘을 과시한다? 어떤 목적에서 말입니까?”
“영구미제살인사건을 보면 말이죠, 이런 특징들이 있어요. 완전범죄를 꿈꾸면서도 굳이 경찰이 수사를 크게 벌이도록 시신을 보이는 곳에 유기해요. 만약 진짜로 완전범죄를 꾸몄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시신을 수습했을 텐데, 그런 흔적이 전혀 없다는 거죠.”
“마치 조디악 사건처럼요?”
조디악 사건은 미국 최악의 영구미제사건으로 남은 연쇄살인사건이었다.
그는 언론에 조롱의 편지를 보내는가하면 FBI에게 암호문을 보낸 후, 이것을 신면 1면에 싣지 않으면 12명을 살해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했었다.
이것은 마치 게임을 하는 듯한, 아주 잔인하고도 치밀한 사건이었다.
“조디악 킬러도 이처럼 자신의 살인이 마치 트로피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죠. 이번 사건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으음,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프로파일러들이 흔히 말하는 희생자를 수집하는 욕구, 이른바 콜렉터 기질이 이쪽에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마도 이번에는 조금 더 강력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을까, 그리 예상하고 있었다.
“저번 사건도 대단했지만 이번 사건도 결코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죠. 만약 이걸 트로피처럼 생각한다면 보다 더 큰 자극을 찾아 헤맬 겁니다.”
“그럼 이놈을 못 잡으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는 소리네요?”
“그게 팩트죠.”
보다 더 큰 자극을 원한다는 것은 과연 그가 나중에는 어떤 사고를 칠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천우는 그를 잡으려 FBI에서 혈안이 된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뭐, 아무튼 간에 아프리카에서 사라진 카르텔의 자금부터 한 번 추적해보자고요.”
“그거라면 아주 제 전문이죠!”
FBI에서 경제사범을 조사하는데 아주 도가 터 버린 그녀는 자금줄의 뒤를 쫓는 일이라면 일가견이 있었다.
그녀는 오랜 경험을 통해서 그들을 어떻게 엮어낼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일반적인 자금추적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포르노사이트라든지 각종 게임 사이트 같은 것으로 현금화를 시켜놓았다면 어떻게 추적을 하겠어요?”
“그래요, 그게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이런 노하우는 아무리 AI가 발전해도 알아낼 수가 없다.
아무리 나노머신이 뛰어나다곤 해도 인간이 스스로 터득한 노하우를 따라갈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세력으로 의심되는 사이트가 몇 개나 되죠?”
“의심되는 후보만 해도 거의 수 천 개는 될 겁니다.”
“그중에서 의심의 여지가 가장 많은 사이트 100개만 고를 수 있나요?”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만.”
그녀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미끼를 던져보자고요.”
“미끼요?”
“저쪽에서 눈치 채지 못하게 살살 부스럼을 만들어보자는 거죠.”
수사의 가장 좋은 방법은 세무조사나 압수수색 등인데 저들의 본거지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마당에 그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아주 가랑비에 옷 젖듯이 떡밥을 던진다면 얘기는 달라질 것이다.
그녀는 우선 포르노사이트 등에 소액으로 가상화폐 충전을 해두기로 했다.
아무래도 둘이 보기엔 민망한 사진들이 즐비한 사이트였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컴퓨터 화면을 천우와 공유했다.
“보통은 전자결제시스템을 구축해두었다면 환불에 대한 조치도 분명 대비를 해두었을 겁니다. 충전했다가 사용하지 않은 금액은 언제고 다시 환불할 수 있는 것이 일반적이잖아요?”
“뭐, 그건 그렇죠.”
“저들도 사이트를 정상적으로 운영하자면 전자결제시스템 정도는 제대로 구축을 해두었을 겁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너무 허술하게 만들어놓으면 분명 정부에서 사이트를 철거해버릴 테니까요.”
불법이 아니라 합법으로 돈을 빼돌리자면 당연히 그 시스템 자체도 합법인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녀는 사이트에 결제를 해놓고 그것을 취소하겠다고 전화를 걸었다.
-네, 블루원나잇 고객센터입니다.
“아무래도 결제를 잘못 한 것 같아서 환불을 좀 받으려고요.”
-환불이요?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상담원은 여느 사이트와 마찬가지로 아주 사근사근하고 친절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고객의 정보를 열어본 후, 환불을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네, 방금 전에 결제하셨네요. 실례지만 어떤 사유로 환불을 하시는 거죠?
“제가 남편이랑 포르노로 지출할 금액을 100달러로 합의를 해놨는데, 남편이 그 금액에서 한참이나 오버된 돈을 긁어놨지 뭐에요.”
-아아,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환불절차를 진행해드리겠습니다.
천우는 그녀의 말재간이 생각보다 뛰어나서 살짝 놀랐다.
프로파일러라고 해서 모두 말을 잘 하는 건 아니었고 특히나 그녀는 지금까지 언변에 뛰어난 점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다른 한 손으로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추적에 들어가도록.]
부하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FBI에서는 해당 사이트에 대한 전자결제시스템 변동사항을 체크할 것이고 자금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추적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환불 완료되었습니다. 더 필요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아니요. 이젠 괜찮아요.”
-네, 알겠습니다. 편안한 하루 되세요.
전화는 끊어졌고 그와 동시에 추적도 함께 마무리 되었다.
FBI에서 보내온 문자는 자금의 변동이 브라질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자금세탁이 이뤄지고 있거나 정말로 그곳에서 자금을 운용하는 회사가 있거나, 둘 줄 하나겠네요.”
“허어, 이런 방법이?”
직접 고객으로 위장해서 들어가는 방법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던 천우는 그저 황당한 나머지 웃기만 했다.
그녀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정도는 껌이죠. 아무튼 간에 브라질에 공조 요청해서 한 번 털어보자고요.”
만약 브라질에서 이 회사에 대한 대답을 부정적으로 준다면 그들은 100% 카르텔의 자금을 세탁하는 회사일 것이었다.
천우는 CIA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그들은 브라질의 인터폴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자, 단번에 답이 나왔다.
-유령회사랍니다. 아무래도 자금세탁을 하는 업체가 확실한 것 같아요.
“와우, 하나 잡았네요!”
그는 신기한 듯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조이는 이렇게 조언해주었다.
“당장은 그들을 엮어서 처분하지 말고 잠시만 기다리세요. 저들은 우리가 먼저 치지 않은 이상 달아나려 하지 않을 테니, 조금만 참고 기다렸다가 왕거니를 엮으면 그때 한 방에 감아 치자고요.”
“그래요, 그 방법이 가장 좋겠네요.”
조이는 천우에게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해주곤 이내 그에게 두툼한 서류뭉치를 건네주었다.
“앞 사건을 해결하시는 김에 뒷 사건도 좀 해결해주시면 안 될까요?”
“이번에 일어난 모방범죄 말입니까?”
“당신이 나선다면 자금의 행방 정도는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하지만 저는 차트분석이 전문이지 그쪽은 영 소질이 없는데요?”
“괜찮아요. 차트를 분석하는 일이니까.”
“차트를 분석한다고요?”
이미 벌어진 금융 사기에서 천우가 과연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허나 그녀는 천우에게 생각보다 중요한 일을 부탁하였다.
그녀가 건넨 것은 최근 미국에 생겨난 신생 펀드들의 수익동향차트였다.
“신생업체들의 수익동향입니다. 얼마 전, 거대사기행각이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관련 회사들 중에서 주가가 오른 회사가 있었어요. 그 회사를 털어보니 페이퍼컴퍼니더군요.”
“으음, 그러니까 저쪽에서 이번에는 페이퍼컴퍼니를 통해서 자금을 유출시켰다는 뜻이네요?”
“그런 셈이죠.”
“헌데 저번에 말씀하시길, 저들은 이미 돈을 들고튀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들고튀긴 했죠. 하지만 그게 아직은 미국을 빠져나가지 못한 것 같아요.”
“아아, 그러니까 그만큼의 대량자금을 빼돌릴 준비까진 안 되어 있었다는 소리네요?”
“그렇다기보다는 아마도 중간에 뭔가 큰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가, 그리 생각되네요.”
조직에 뭔가 문제가 생겼거나 주모자가 심경의 변화를 겪었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었다.
그렇다는 건, 저들에게도 분명 약점은 존재한다는 뜻이 된다는 소리였다.
“약점이 있다···. 저들에게도 반드시 약점이 있다는 뜻이죠?”
“생각보다 조직력이 그렇게 단단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렇게 흔들리는 것을 봐서는 요.”
천우는 그녀의 말을 듣다가 이내 다른 가설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이 자금들이 렉스테리아와는 아예 갈래가 다르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건 혼자서 움직이는 단독 범행이 아닐까요?”
“어째서 그리 생각하시나요?”
“만약 이것이 조직과 조직을 연결하는 그 엄청난 네트워크에 의해서 벌어진 사건이라면 사고를 치는 것보다는 자금을 빼돌려 실제로 이익을 챙기는데 더욱 중점을 두었을 겁니다. 행여나 자금추적에 걸려 애써 벌어두었던 돈을 다 날리면 얼마나 허무하겠어요?”
“으음, 그러니까 조직적으로 움직였다고 보기엔 뭔가 무리가 좀 있다는 뜻이죠?”
“바로 그겁니다.”
그녀도 천우의 의견에 동의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요. 당신의 말처럼 뭔가 조직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개인이 움직이다보니 역량이 거기까진 미치지 못했을 지도 모르겠네요.”
“만약 그렇다면 잡기가 더 쉬워질까요?”
조이는 씁쓸하게 웃었다.
“솔직히 그렇지는 않을 것 같네요.”
“으음···.”
“사실, 혼자서 이만큼의 범죄를 벌였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하긴.”
범인에 대한 궁금증이 점점 저 커져만 갔지만 모든 것은 베일에 싸여 있었다.
천우는 이제부터 그녀가 넘겨준 차트를 제대로 분석해보기로 했다.
보통의 작전 주와 비슷한 모습의 차트는 천우가 지금까지 분석해 온 중국계 자본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허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고 한다면 이 또한 상당히 허술하다는 점이었다.
주식시장의 작전은 보통 뚜렷한 목표가 있기 때문에 작전시점이 되기 전까지는 특유의 패턴을 보이지는 않는다.
작전은 개미들의 지옥이라 불리는 만큼 사전에 주가가 붕 떠버리면 바로 휴지조각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격적인 작전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어지간한 전문가들도 100% 확신을 하기 힘든 법이다.
허나 이건 좀 달랐다.
“마치 돈을 날려도 상관없다는 것 같달 까.”
“자금을 날려도 상관이 없다니.”
“어쩌면 이놈, 돈이 목적이 아닌 거 아닐까요?”
순간, 그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 86.(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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