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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2)
웜우드 가문의 몰락은 미국 금융권 개혁의 신호탄이 되었다.
현재 미국은 대량의 채권매각사태로 인하여 금융권 시장이 악화일로에 접어든 상태였다.
저금리 상태에서의 달러화 폭주라는 기현상을 잠식시키기 위한 정부의 자금투여가 시작되긴 했으나 그것이 실효를 거둘 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그러나 아직 악재는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 막 시작이라는 소리가 맞을 것이었다.
2007년 9월, 미국의 채권시장이 무너지면서 비우량채권의 데드라인이 깨지고 말았다.
부도채권이 우수죽순으로 쏟아졌으며 사방팔방에 차압딱지가 나붙는 극단적인 사회 붕괴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는 다시 말해서 국가의 신용도가 하락한다는 말이나 진배없었는데, 연준은 이것을 준비자금을 통해 간신히 방어하고 있는 수준이었다.
허나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한 국가신용도는 사실상 단기간 회복은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투자자들은 하나 둘 발을 빼기 시작했고 그것은 외국자본의 자금회수로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미국으로 대량의 자금을 투자했었던 구미의 금융권 장기투자자들이 하나 둘 채권을 회수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미국의 금융 황금기를 만들어낸 투자회사들 역시 어마어마한 자금유출을 경험하고 있었다.
이는 다시 말해 미국의 금융시장이 서서히 붕괴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상초유의 사태였다.
만약 이대로 6개월만 시장의 하락세가 계속된다면 전 세계의 주가지수는 반 토막이 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세계의 경제공황을 이끌어내는 시발점이 될 것이고 바야흐로 지구촌은 역성장의 늪에 빠져들게 되는 셈이었다.
구미의 투자자들에게 자본금 유출을 멈추어달라고 호소를 해도 속수무책이었다.
이제는 뚜렷한 정책만이 이들을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카드가 될 것이었다.
재무부는 연준을 자극하여 양적완화를 펼치는 동시에 우방국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청하였다.
영국과 일본, 프랑스 등 이른바 G7의 재무장관들이 달러화 채권시장을 살려낼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고 나섰다.
또한, 미국 정부는 거래의 일시정지 및 자본인출 절차강화 등으로 다소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HC의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번에는 회장이 긴급회의를 소집한 것이 아니라 중역들이 먼저 나서서 천우에게 회의를 요청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천우는 HC에게 이렇다 할 지시를 내리지 않고 있었다.
다만 '평소와 같이 침착하게'라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이제 HC도 위기가 곧 기회가 된다는 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허나 그 돌파구를 찾는 지침정도는 있어야 망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회장님, 지침을 내려주십시오!"
"이대로는 예금인출사태를 방지할 재간이 없습니다."
천우는 중역들에게 물었다.
"예금인출의 이유가 미국시장의 불안 때문입니까, 아니면 HC에 대한 신뢰도 하락 때문입니까?"
"아마 둘 다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회사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겠군요."
"뭐, 그렇다고 말씀하신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럼 우리의 내부적 문제만 해결하면 될 일입니다."
"허나···."
"이미 반전의 기회는 왔습니다. 조만간 우리는 다시 급부상 할 것이고 그때의 우리는 예전의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지위를 누리게 될 겁니다."
천우는 회의에서 채권에 대한 무조건적인 매입을 지시하였다.
미국의 모든 투자회사들, 심지어는 공룡급 투자은행까지도 두 손을 들어버린 상황.
허나 HC는 천우의 명령에 따르기로 했다.
B+등급 이하의 채권, 그러니까 투기성 채권이라고 말하는 기준 이하의 채권까지도 모조리 사들이기 시작했다.
천우가 이렇게 무조건적인 매입을 지시한 것은 채권매물이 미친 듯이 몰려들면서 무디스와 S&P등, 신용평가기관에서 채권의 신용등급을 재조정했기 때문이었다.
신용평가등급의 재조정은 터질 듯 한 채권물량을 조금 더 수월하게 소화하기 위함이었는데, 기준치를 낮춰서 채권가격을 떨어뜨리면 물량해소가 가능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던 것이다.
만약 신용평가기관들의 이런 궁여지책이라도 없었다면 미국의 채권시장은 진즉에 붕괴했을 지도 모른다.
천우는 이런 혼란 속에서 평가가 다소 절하되었거나 회생이 가능한 채권들을 빠르게 사들였다.
그중에는 정크본드로 취급되는 물건들이 대략 50% 이상 되었는데, 이들은 2년 전만해도 A-등급 이상을 받았던 우랑채권에 속해 있었다.
허나 신용평가기관의 이른 바 '채권덤핑'에 휘말려서 평가가 절하되어버렸고, 결국엔 도매금으로 채권이 팔려나가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HC는 이번에도 채권을 청소해주는 청소부 소리를 들었지만 실속은 제대로 챙기고 있었다.
물론, 그게 겉으로 보기엔 썩 깔끔해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천우는 그 채권들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향후 3개월 안에 판매할 채권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흔히 건물을 털고 나면 자원회사가 들어와 철거를 해주고 철과 비철 등을 챙기지 않던가.
천우도 바로 그런 형식이었다.
지금의 미국 금융업계야 말로 철거하고 다시 지어야 할 집인 셈이었다.
거의 100억 달러 이상의 물량을 빨아들였다. 그리고 거기서 50%의 물건을 3개월 이내에 판매하기로 했다.
과연 이런 재활용 판매가 얼마나 수익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천우와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아졌다.
처음에 사람들은 저게 도대체 뭐하는 짓일까, 생각했었지만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그들이야말로 진짜 돈을 버는 장사꾼들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미국의 자본인출 기간 동안 G7재무장관 회의가 시작되었고 그 2차 회의가 진행된 지 3개월 후인 2008년 1월에는 미국의 경기가 점점 살아나기 시작했다.
G7이 드디어 획기적인 경기부양책을 마련한 것이었다.
구미의 투자자들이 자본을 인출하지 못하자, 하나 둘 불평불만을 하고 나섰지만 G7재무장관 회의에서 뚜렷한 방어대책이 나오자 입을 닫았다.
그들이 제시한 것은 바로 달러화 채권과 국내 투지등급 채권의 대량 구매였다.
G7국가들은 넘쳐나는 달러화 채권물량을 일제히 회수하고 미국의 내수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부실채권을 회수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채권가격은 점점 상승하기 시작했고 극단적인 자본유출이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채권거래가 빈번해지면서 빠져나갔던 달러화는 다시 미국으로 유입되었고, 드디어 달러화 고공행진은 주춤하게 되었다.
2008년 2월, 드디어 달러화 가치가 10%이상 하락하면서 안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거짓말처럼 채권역류가 멈추었고 시장은 정상궤도에 안착했던 것이다.
HC의 채권매입도 딱 그때쯤 실시되었다.
2월 14일, 김영실은 천우에게 상자를 건네 왔다.
"이게 뭡니까?"
"오늘이 밸런타인데이라는 것을 잊으셨습니까?"
"뭐, 그렇기는 한데."
"한 번 안 열어보십니까?"
김영실은 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천우는 이게 단순히 우정의 초콜릿을 주기 위한 일이 아님을 눈치 챘다.
당장 상자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빨간색 화살표가 들어 있었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물건이네요."
월스트리트에서는 빨간색 화살표는 길조로 여겨진다.
주식시장 차트에서 빨간색 화살표는 상승을 의미하지 않던가.
특히나 인상적인 것은 화살표 안에 든 황소였다.
"뭔가 크게 올랐나보네요."
"우리가 사들였던 채권의 가치가 대략 25%정도 상승했답니다."
"생각보다는 적네요."
"하지만 그것들은 정크본드로 취급받았던 물건들입니다. 이정도 수익이라면 제법 나쁘지 않은 투자였다고 생각됩니다."
"흐음, 그렇군요."
"아무튼 간에 축하드립니다."
천우는 화살표를 꺼내어 집무용 책상 위에 잘 올려두었다.
그런 후,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호재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못 느끼셨어요? 곧 정권이 바뀔 것 같잖습니까."
"아아!"
카트리나 사태로도 모자라서 미국 재계를 아예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던 연방당의 삽질이 이제 곧 심판을 받게 될 것이었다.
천우는 그때야말로 자신이 미국으로 가장 화려하게 컴백할 수 있는 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
희대의 정치스캔들의 주인공 로버트 웜우드가 재판장에 섰다.
연방법원은 그에게 국가내란죄 및 반역죄를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아마도 재심에서 형이 경감될 수도 있다는 전문가들의 예견이 있기는 했지만, 확실한 것은 형이 줄어도 최소 종신형이라는 것이었다.
러시아 당국이야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조지아와 나토의 결합 이후 러시아와 나토의 분쟁조장에 로버트 웜우드가 일부 기여를 했다는 게 대법원의 판단이었다.
비록 로버트 웜우드가 직접 개입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서 나온 돈이 정치인들에게 지속적으로 전달된 바, 이것을 증거로 로버트 웜우드의 국정농단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검찰은 로버트 웜우드에게 종신형을 구형하였으나 연방법원은 러시아와의 내통은 곧 냉전구도를 부추기는 일이라면서 괘씸죄를 추가하였다.
엄청난 법의 철퇴를 얻어맞은 웜우드 가문은 이내 추락하기 시작했다.
국세청은 웜우드 가문의 초정밀 세무조사를 시작하였고, 만약 부정축재 및 불법비자금 축적이 발견된다면 곧바로 환수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췄다.
미국의 국세청은 세계적으로 높은 악명을 떨치는 바, 모두가 두려워하는 사신과도 같았다.
그런 사신들이 웜우드 가문을 훑고 다니니 재산이 털리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결국 웜우드 가문은 가진 재산의 1/3이라는 엄청난 추징금을 때려 맞게 되었다.
그들이 지금까지 정부각처를 움직여 빼돌린 돈을 죄다 털어내니 그 금액만 해도 수 억 달러에 달했던 것이었다.
그와 함께 정부의 각 기관에 대한 인사재조정도 이뤄졌다.
특히나 CIA의 인사단행이 인상적이었다.
CIA의 부국장이었던 아론 테이트가 국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거부하며 후임들에게 표를 돌린 것이었다.
그는 굳이 후임자를 지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앞으로 CIA가 잘 돌아갈 것임을 확신했기에 이런 선택을 한 것이라고 밝혔다.
솨아아아···!
미시간 호가 내려다보이는 산장에서 아론 테이트가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을 안주삼아 맥주를 곁들이는 중이었다.
"그야말로 세월을 낚고 계시네요."
"말하지 않았나. 앞으로는 이렇게 살 것이라고."
아론 테이트를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천우였다.
그는 낚시가방을 맨 채로 아론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곤 바닥에 있는 맥주를 집어 들었다.
뽕!
자동차 키홀더로 병뚜껑을 날리자, 아론이 신기하다는 듯이 천우를 쳐다보았다.
"자네는 정말 별 짓을 다 하는군."
"이게 저라는 사람의 매력 아니겠습니까?"
"그래, 자네는 지독하게도 팔방미인이지."
"그나저나 정말 이대로 떠나실 겁니까?"
아론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씀을."
"차기 국토안보부 장관으로 거론되던데요?"
"내가 몇 번이나 말하잖나.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라니까?"
"정말 굳게 마음을 먹었군요."
아론 테이트라는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외부로 돌아다니지 않게 될 것이었다.
허나 그는 이대로 떠날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도 선물은 하나 남기고 가야겠지?"
"선물이요?"
"지금의 연방당은 쇄신이 필요하다네."
그는 천우에게 USB를 하나 건네주었다.
USB에는 '최초의 흑인대통령께'라고 적혀 있었다.
천우는 이것이 바로 연방당을 베어버릴 날카로운 검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 80.(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