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
79.
세상천지 50억 달러를 날름 훑어먹고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놈은 흔치 않다.
천우는 재무부에서 가지고 온 차트를 보곤 금세 표정을 굳혔다.
"신출귀몰···이 아니라 용의주도라고 해야 할까. 대단하다는 말로 밖에는 설명이 안 되는군요."
"하는 짓이 알바니아 사태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천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보다 훨씬 더 진화한 형태죠. 요즘 세상에 누가 알바니아 때와 같은 수법으로 사기를 당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알바니아 사태를 모방한 범죄일 가능성은 없는 건가요?"
"만약 모방을 했다고 해도 이정도면 범죄의 혁신이라 할 수 있겠지요."
"혁신이라니···."
"비유가 좀 그랬나요?"
신임 재무부 재정기획국장 앨버트 그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 비유, 정확합니다. 아무튼 간에 이 사태에 대한 해결방안이 있다면 좀 듣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해결방안이라니."
제 아무리 천우라도 민간인 자금 50억 달러가 증발한 사건을 어떻게 해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법치국가임과 동시에 민주주의국가, 자본주의사회인 미국에서 민간자본이 50억 달러나 유출되었다는 건 엄청난 의미를 갖는다.
사기를 당했다고 해서 국가에게 진정을 내서 돈을 받아먹을 수 있는 것에도 한계가 있고 지원을 받는다고 해도 결국 그건 또 다른 빚의 수렁을 만들어내는 일이 되고 만다.
그러니까, 50억 달러의 민간부채가 새로 생겨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소리였다.
이런 상황에서 HC를 찾아왔다는 것은 재무부가 또 다시 손을 벌이려 한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천우가 저들에게 무상으로 돈을 밀어줄 사람은 아니었다.
"벌써 공돈은 꽤 많이 쏟아 부었습니다만."
"그렇다기보다는 해결방안을 좀 첨언해달라는···."
"그게 그거죠. 하지만 저는 적선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다른 은행을 알아보시죠."
"···일전의 일은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담당자는 이미 해고조치를 취해두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신임 재정국장이 된 것이고요."
앨버트 그린은 재정기획국장이 바뀐 것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고자 했다.
재무부가 천우에게 쩔쩔 맨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허나 천우가 그런 잔챙이 하나에 열 받아 눈이 돌아갈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됐습니다. 한 만 달러쯤 기금으로 낼 수는 있겠네요."
"저희가 어떻게 하면 도움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정부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에도 한계는 있는 법이다.
연방준 비자금을 푸는 것은 마지노선을 넘은 극심한 재난 급 재정파탄사태가 일어났을 때에나 꺼내드는 카드였다.
그러니 HC를 비롯한 범 체스터 카렐 일가의 힘을 빌리려는 것이었다.
몇 번이고 천우에게 빌어봤자 소용이 없었다.
"그럼 나중에 또 봅시다."
"···전의 일은 거듭 사과드리겠습니다. 저희가 경솔했습니다."
"경솔이라니. 지금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할 때입니까?"
아까부터 우거지상을 하고 앉은 앨버트 그린, 천우는 사과를 받아주는 대신 조건을 걸기로 했다.
"그럼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마음을 푸신 겁니까?!"
"마음을 풀고 자시고 할 게 뭐 있습니까? 나는 사업가인데."
감정에 좌지우지 될 것 같았으면 애초에 천우가 사업을 했을 이유가 없다.
마인드컨트롤 능력이 떨어지면 바로 도태되는 것이 바로 이 바닥이다.
그런 스트레스를 천우가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면 아예 사업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실, 천우는 아까부터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서 자꾸 감정 선을 드러내는 척을 했던 것이다.
결국 그것이 효과를 발휘하여 재무부의 입장을 HC보다 한 수 아래로 끌어내리는데 성공하였다.
이제부터는 천우가 뭘 제안하든 재무부 측에서는 곧장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아까 제가 기금이라는 말을 했었죠?"
"네, 만 달러의 기금을 말씀하셨습니다."
"사기피해구호기금을 마련해서 드리겠습니다."
"저, 정말입니까?!"
"그 대신 우리에게 35억 달러 규모의 채권을 발행해주십시오."
"채권이라면 당연히···."
"무기명으로요."
순간, 앨버트 그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무기명채권이란 그야말로 채권은 채권인데 이름이 없는 채권이다.
기명채권의 경우엔 채권의 주인이 누구인지 기재되어 있지만 무기명채권은 그렇지 않다.
때문에 비자금 시장에서는 거의 독보적인 존재로 통하며 심지어는 범죄에 동원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그런 채권을 달라니 앨버트 그린은 따귀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을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 그건 좀···. 연준은행이랑도 상의를 좀 해봐야하고 말입니다."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럼 답을 기다리겠습니다."
사실, 천우도 저들이 35억 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비자금을 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무기명채권의 가치를 현물달러로 논한다면 액면가보다 훨씬 더 많이 책정이 될 것이다.
굳이 채권의 원금만 가지고 거론해도 뒷구멍으로 통용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적어도 20% 이상의 프리미엄이 붇는 것은 기본이었다.
한마디로 35억 달러에 최소 +20% 이상의 프리미엄을 받겠다는 소리나 다름이 없는데다 추후에 추적이 불가능한 자금을 퍼달라는 제안이었다.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고 천우는 생각했던 것이다.
천우는 그 대신 저들이 또 다른 제안을 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저희들 나름대로 상의를 좀 해봐야겠습니다."
"그래요. 조만간 또 봅시다. 그럼 안녕히."
앨버트 그린은 터덜터덜 걸어서 집무실을 나섰다.
천우는 그건 그를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결국 버티는 놈이 이기는 거지."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미국정부는 무수히 많은 요청을 해 올 것이고 천우는 그때마다 이렇게 프리미엄을 팍팍 붙여서 騁틘纛? 것을 다 騁틘纛? 것甄?.
溯? 후, CIA에서 천우를 찾아왔다.
"어이, 슈퍼보이!"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CIA에서 온 사람은 바로 아론 테이트였다.
그는 오늘따라 안면에 미소가 완연했다.
"자네에게 좋은 소식을 들려주고 싶어서 지나가던 길에 잠깐 들렀네."
"여긴 서울인데요?"
"알아. 서울에서 볼일이 좀 있었어."
"아아, 그렇군요."
무슨 일이기에 CIA의 부국장이 서울까지 온 것일까.
그 일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한 채 아론의 말이 이어졌다.
"국토안보부에서 러시아와 자유당의 유착관계를 조사하다가 뜻밖의 사실을 발견해냈데."
"뜻밖의 사실이요?"
"연방당에서 자유당의원 몇 놈에게 정치비자금을 보낸 거야."
"···비자금을요?"
"한마디로 연방당과 자유당의 일부가 유착관계를 형성한 거지."
"허어, 그게 가능합니까?"
"불가능할 건 또 뭐야. 정치라는 게 당파싸움이나 하라고 있는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아무튼 간에 러시아의 국회의원과 밀담을 가진 정황을 포착하였고 그 안에 비자금까지 끼어있다는 사실을 파악해낼 수 있었어."
"하지만 저들이 무슨 꿍꿍이가 있었는지 알 수가 없잖습니까."
아론 테이트는 천우의 앞에 두툼한 파일을 꺼내놓았다.
그 안을 펼쳐본 천우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허어···?"
"황당하지? 나도 처음엔 황당해서 아주 거품을 물 뻔했다니까. 설마하니 마피아에게 비자금 운반을 시킬 줄이야."
파일 안에는 러시아의 오일펀드에 대한 유가증권을 해외로 빼돌리던 마피아가 CIA에게 붙잡혔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 증권은 미국계 차명으로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차명의 계좌를 훑어보니 로버트 웜우드와 관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차명의 계좌는 자유당 의원들 몇몇에게 연결되어 있었고 그들은 3년 전부터 계속해서 유착관계를 형성해 온 것으로 드러나 있었다.
"이 개자식들이 유가를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었더군."
"유가를요?"
"얼마 전, 오펙은 증산협의에 거의 다 도달해 있었고 이제 막 도장만 찍으면 끝나는 시점이었지."
"으음."
"원래 여름이면 난방유비축이 시작되잖아. 그런데 오히려 감산에 합의했더라고."
천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깐, 원래 오펙은 계속해서 감산에 협의한다고 했었잖아요."
"아니야. 원래는 유가안정을 위해서 대폭 증산을 고려하고 있었던 거야."
"허어···."
아론 테이트는 손바닥을 휙 뒤집어보였다.
"그런데 오펙이 입장을 뒤집어버렸어. 연방당의 압박을 받은 거지."
"그 증거는요?"
이번에도 아론은 환하게 웃었다.
"이걸 한국에선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았다고 하지?"
그는 중동에서 찍힌 사진 몇 장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사진 속에는 로버트 웜우드가 중동에서 오펙의 관계자를 만나고 있는 사진이 들어 있었다.
"우리 CIA는 꽤나 오래 전부터 중동을 주시하고 있었잖아. 남들은 잘 모르지만 우리는 밀항선에도 꽤 돈을 많이 투자해두었지."
"으음, 그래요. 하지만 그건 정권이 바뀌면서 폐기된 거 아니었습니까?"
"아니야. 내 선에선 아직까지도 감시가 계속되고 있었어. 언더커버의 숫자는 오히려 더 늘어났고."
아론은 실소를 흘렸다.
"후후, 어처구니가 없긴 하지만 연방당이 삽질을 하느라 내가 대마를 잡았어. 유럽에서 엉뚱한 사람들 족치는데 진을 다 빼는 바람에 언더커버가 중동 내부에 잠입해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더라고."
"아아! 상황이 마침 딱 맞아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로군요!"
"그래. 언더커버를 보내기엔 아주 좋은 상황이었지. 아마 로버트 웜우드도 그걸 노린 것 같아. 등잔 밑이 어둡다고, 아예 대놓고 중동에서 자기만의 비즈니스를 하고 있었던 것이지. 언더커버가 있다는 건 아예 꿈에도 모른 채 말이야."
"자충수를 두었네요."
"자기 발등을 자기가 짝은 격이지."
로버트 웜우드는 킹메이커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무소불위 권력을 휘둘렀지만, 그 권력에 너무나도 취한 나머지 엄청난 실수를 하고 말았다.
아론 테이트는 대통령이 키워놓은 국토안보부가 백악관을 칠 수밖에는 없다고 단언했다.
"국토안보부의 칼날이 백악관을 향할 거야. 사태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뭔가 비책을 내놓으라고 말이지. 그렇게 되면 웜우드 가문과 그 가신들은 전부 몰살이야."
"드디어 부국장님의 시대가 도래하는 건가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이 사태가 마무리되면 CIA를 떠날 거야. 조직만 무사하다면 더 이상 미련은 없거든."
"으음···."
"대신 나를 따르던 사람들이 새로운 국장과 함께 CIA를 만들어 나가겠지."
"그럼 은퇴하셔서 뭘 하시게요?"
"세계여행이나 다녀야지. 나도 돈은 꽤나 모아두었거든. 세계를 유랑하면서 좋아하는 톨킨이나 마틴의 소설이나 실컷 읽으려고. 세상에, 얼마나 바쁘면 96년도 신작을 아직까지 완독하지 못했지 뭔가."
"유유자적한 삶이네요."
"후후, 그렇지?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자네를 찾아오도록 해보겠네."
강물은 결국 흐르는 법이다.
정체된 것만 같던 사건도 결국에는 강물처럼 흘러가버리는 것이 세상 이치였다.
그리고 떠날 사람은 떠난다.
이 또한 세상의 이치라는 것, 천우는 그걸 세삼 느끼고 있었다.
< 79. > 끝